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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아직도, 가족?

 

 

지영 | 국문학 연구자

 

 

1. 가족을 둘러싼 환상들

혼자 감당할 수 없는 문제에 직면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가장 먼저 가족을 떠올린다. 나의 문제를 아무 대가없이 해결해 주고, 지친 나의 마음까지 끌어안아줄 것이라고 기대되는 존재가 바로 가족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공유하는 가족에 대한 이미지는 엄하신 아버지와 자상하신 어머니 밑에서 화목하게 자란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삶을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 이미지는 고착되어 있다.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리나의 첫 문장에서 말한 것처럼 행복한 가정은 모두가 엇비슷하다.” “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그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 확률적으로 생각해도 후자가 압도적일 것 같은데 왜 우리는 행복한 소수가 만든 가족 이미지를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이런 환상들과 대결해야 할 때 소설은 본연의 힘을 발휘한다.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소설들은 행복한 가족이 아니라 불행할 것으로 추정되는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김애란의 달려라, 아비와 김인숙의 안녕, 엘레나에는 각각 버림받은 딸과 이국의 이복형제/자매가 등장한다. 이 두 소설은 스위트 홈으로 대변되는 환상적인 가족의 이미지가 아니라, 어딘가 조금은 어그러진 형태의 가족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지금 우리에게 가족이란 무엇인지, 더 나아가 나와 가족이 새롭게 관계 맺는 법은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하게 만든다.

김애란의 달려라, 아비의 주인공 는 평범한 여고생이다. 어머니가 자신을 낳기 바로 전날 아버지는 부담감에 집을 나가버리고, 혼자서 애를 낳은 어머니는 억척스러움에 농담을 담아 딸을 키운다. 그래서 나는 자신과 어머니를 연민하지 않는다. 자신과 어머니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갇혀 위축되기보다는 주어진 환경 속에서 덤덤히 살아간다. 이 모녀는 남편이자 아버지에 대해 거의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데, 그 이유는 그가 상처로 남아서가 아니라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죽고 어머니는 재혼하여 다른 사람의 자식들을 돌본다는 점에서 김인숙의 안녕, 엘레나 는 혼자 남겨진 딸이다. 이 소설은 한국에 있는 내가 아버지가 이국땅에 버리고 온 자매를 찾는다는 점에서 김애란의 소설과 차이를 보인다. ‘버림받음을 일상적인 상태로 수용하는 달려라, 아비의 주인공과 달리, 안녕, 엘레나의 나는 홀로 남겨진 상태에서 그 존재조차 확실치 않은 가족 찾기를 시작한다.

가족이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꽤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대상이다. 그래서 가족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은 지우기 힘든 트라우마가 되기도 하고, 가족에게 받은 사랑은 힘겨운 삶을 버텨내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가족이 정말 그렇게 대단한 의미를 지닐까? 가족들과 거리두기를 선택하는 사람들은 죄의식을 느껴야만 할까? 그 죄의식이 정말 나의 윤리성을 담보해 주는 지표일까? 이런 것들은 가족주의가 만들어낸 환상 속에서 우리가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표는 아닐까? 질문은 계속해서 이어질 수 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세상의 모든 가족이 서로를 애틋해 하며 죽고 못 살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세상에는 서로 사랑하는 가족도 많지만, 남이었으면 더 좋았을 뻔한 가족들도 꽤 많을 것이다.

2. 편지 혹은 세 개의 부정어

달려라, 아비는 주인공이 자신의 태아 시절을 회상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이 회상 속에서 나의 몸은 말[]을 몰라서 어제도 내일도 갖고 있지 않는다. 태아는 아직 말을 지니지 못한 존재, 그래서 시간도 지니지 못한 존재이다. 그런 태아가 세상에 나오면 비로소 말을 얻고 동시에 시간도 얻게 된다. 나는 세상에 편지처럼 도착한 것이다. 수많은 말을 담은 편지처럼 나는 세상에 도착했고, 이제 나의 삶은 더 많은 말과 시간들의 매듭들로 채워질 것이다.

안녕, 엘레나의 서술자이자 주인공인 의 이름은 윤소망이다. ‘는 자신의 삶을 소망하는 것조차 없는 초라한 생이라고 규정 짓는다. “소망할 것이 없는 삶에 대한 소망”, “나른하게, 굳이 흔들리지 않아도 미안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 나에게 소망은 '부재'로서 존재한다. 외롭다는 이야기를 삶의 추임새처럼 사용했던 아버지와 그리움이 빛나는 것임을 실감케 했던 어머니 사이에서 소망은 외로움 그리움이라는 결핍의 감각을 토대로 성장하였다.

원양어선을 타던 아버지는 자신이 만져보지도 못했던 돈들을 아내가 다 날려버렸다는 사실을 알고는 이혼을 단행하고, 아내를 불행하게 만들기 위해 하나밖에 없는 딸인 ‘나(소망)’를 자신이 데려온다. 그 후 어머니는 재혼을 하고 아버지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러한 과정 속에서 나의 삶은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인 방식으로 구성된다. 그래서 나는 자신의 삶을 설명하기 위해 아니다’, ‘()’, ‘()라는 세 개의 부정어를 사용한다. 내 삶이 지닌 공백은 지정의 의미를 지닌 이다’, 존재를 표현하는 있다’, 그리고 행위를 나타내는 하다와 대립되는 부정어들의 결합을 통해 구현된다.

나로 말하면 그만둘 직장도 없었고, 당연히 퇴직금 같은 것이 있을 리 없었고, 따라서 몇 개월이나 이어지는 배낭여행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몇 군데의 직장을 다녔지만, 그 모두가 임시직이거나 비정규직에 지나지 않았다. 좋은 대학을 나오지도 못했고, 어학연수를 다녀온 것도 아니고, 남이 가지지 않은 것은 고사하고 남들 다 가진 자격증조차 내게는 없었다. 그럴 수 있는 형편이 되지 않았다. (19)

세 개의 부정어와 결합되는 직장, 퇴직금, 배낭여행, 좋은 대학, 어학연수, 자격증 등은 내 삶이 평균적 상태에 미치지 못함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평범한 삶의 기준이 앞에 언급된 단어들의 연쇄를 통해 계열화될 때, 이 언표들의 부재로 구성되는 나의 삶은 평범함에 도달하지 못하고 그 외부를 배회한다. 그리고 결여투성이인 나의 삶은 안정보다는 불안정 쪽으로 기울게 된다.

3. 어머니의 농담, 아버지의 농담

달려라, 아비에 등장하는 나의 어머니는 농담으로 나를 키운다. 택시 운전을 하는 어머니는 내가 우울해 할 때면 내 뒷덜미를, 재치의 두 손가락을 이용해 가뿐히 잡아올리곤 한다. 어머니의 농담은 때론 상스러운 재치를 담고 있었지만, 그 농담 덕에 나는 자신을 연민하지 않는 법을 배운다. 서로에게 미안해 하거나, 서로를 가여워하지 않기 때문에 이 모녀는 당당한 관계를 유지한다. 그래서 자신이 속이 깊으면 어머니가 더 쓸쓸해질 것 같아 나는 돈을 달라고 요구하고, 어머니는 그 요구를 빌미로 벌면 다, 새끼 밑구멍으로 들어가 내가 씨발, 씨발, 하면서 돈번다는 생색을 자연스럽게 낼 수 있게 된다. 서로에 대한 부채의식이 아니라 대등함이 만들어내는 이 상호성 덕분에 독자들 역시 이 모녀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안녕, 엘레나에는 이와는 다른 농담이 등장한다. 이 소설에서 아버지는 지구 반대편 엘레나라는 딸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당연히 이 이야기는 가족 제도 안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하지만 나는 피부색이 다른 자매에 대해 이질감을 느끼기보다는 호기심을 더 갖고 있었다. 그래서 나와 엘레나의 만남은 현실에서가 아니라 꿈속, 그 중에서도 만화 같이 비현실적인 상황 속에서 이루어진다. 꿈의 주체인 나는 알프스의 초원에서 자매를 만나지만, 알프스에 초원이 있는지에 대해 확신하지 못한다. 이것은 경험으로 구성되는 현실 공간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곳에 엘레나가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유년기에 가출을 해서라도 만나고 싶었던 자매와 나는 꿈속에서 해독할 수 없는 언어로 이야기를 나눈다. 이처럼 내가 말도 통하지 않는 엘레나를 만나는 꿈을 꾼 이유는 나의 삶에 커다란 공백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매일 싸움을 하는 부모님은 내가 느끼는 공백을 채워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 공백을 꿈속의 엘레나로 채우고 꿈에서 깨고 나면 왠지 가슴이 먹먹하다고 느낀다. 실재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고, 만약 실재한다면 나의 경험 세계 너머에 존재하며, 나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엘레나에게서 나는 삶의 위안을 찾는다.

하지만 엘레나에 대해 이런 상상을 하는 것은 아직 사회의 제도나 관습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어린 나의 반응이었고, 어머니의 반응은 이와는 사뭇 달랐다. “아버지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어머니는 코웃음을 쳤다.” 어머니에게 아버지의 이야기는 진실일 수 없는 언어, ‘거짓말 혹은 농담이기 때문이었다. 양쪽 다리의 길이가 달라 직선으로 달리 수도 없는 아버지에게 혼외 자식이 있을 리 만무하다고 어머니는 단정 짓는다.

농담을 즐겨하는 아버지는 농담이란 말따먹기 장난에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눈물이 핑 돌아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농담이란 눈물이 아니라 웃음을 담고 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살아 있는 무언가에 대해서 미안한 거야.”라는 존재론적 성찰이 담긴 수준급의 농담을 던질 때의 아버지는 더없이 진지하다. 의도 없이 던져지는 웃음의 언어인 농담 눈물과 함께 출현할 때 그것은 웃음이면서 눈물인 상태, 농담이면서 진담인 상태, 즉 하나로 환원될 수 없는 인생의 진실을 담은 상태에 놓이게 된다.

 

4. 달리는 아버지와 수많은 엘레나

김애란의 달려라, 아비가 한국문학사 속에서 중요한 이유는 이 작품이 기존 문학과 변별되는 아버지상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계급 때문이든, 사상 때문이든, 직업 때문이든 한국 문학에서 아버지는 가부장적 전통과의 연결선상에서 논의되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등장하는 기존의 문학들은 전반적으로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김애란은 이러한 흐름을 깨고 발랄하고 경쾌한, 게다가 우습기까지 한 아버지상, 즉 달리는 아비를 창조했다.

나는 분홍 야광 반바지 차림의 아버지가 지금 막 후꾸오까를 지나고, 보루네오섬을 거쳐, 그리니치 천문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모습을 본다. 나는 아버지가 지금 막 스핑크스의 왼쪽 발등을 돌아,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의 백십번째 화장실에 들러, 이베리아반도의 과다라마산맥을 넘고 있는 모습을 본다. (15)

달려라, 아비의 나는 아버지가 집을 나간 이유는 달리기를 하기 위해서이고, 아직 오지 않은 이유는 시계를 챙겨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머니의 농담에서 건강한 기운을 받은 나는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분홍색 야광 반바지 차림의 유쾌한 모습으로 상상한다. 자신에게는 아버지가 없지만, 여기 없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은 상상 속의 아버지에게 아빠! 보기보다 잘 뛰네?!”라는 말을 건네고 싶어 하기도 한다.


안녕, 엘레나에서 아버지는 이국에서 엘레나들과 더불어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면서도 늘 가족들이 있는 고국으로 돌아오고 싶어 했다. 하지만 아들은 뇌수막염에 걸려 죽었고, 아내는 보내준 돈을 모두 날렸으며, 딸은 아버지가 짐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아버지는 자신에게 위안을 주었던 존재들을 기억하는 방식으로 엘레나를 소환한다. 특히 아버지는 인지 여자인지 분간할 수 없는 엘레나를 근사하고 참 좋은 상대로 기억해낸다. 그들은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달리 아버지의 등에 올라타는 방식이 아니라 아버지가 자신들을 타게 하는 방식으로 관계를 맺었다.

그래서 나는 엘레나가 있는 나라로 여행을 간다는 지나치게 친절한 친구에게 자매를 찾아달라는 말을 무심한 듯 흘린다. 그런데 너무나 친절하고 부탁 받은 일에 충실한 친구는 수많은 엘레나가 담긴 사진에 번호를 붙여 계속해서 보낸다. 친구가 보내준 엘레나 사진들에는 백인 소녀, 중년 부인, 신문 파는 여인, 어린 소녀들, 파파 할머니, 개 등의 모습이 다채롭게 담겨 있었다. 아버지의 이야기와 친구가 보내준 엘레나 사진들은 엘레나는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각인시킨다.

사진 엘레나1’에서의 백인 소녀와 엘레나2’에서의 소녀는 동일인물이지만 후자가 전자의 지갑 속에 있는 사진을 찍은 듯이 보인다는 서술 때문에, 이 둘은 완벽하게 분리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온전히 일치하지도 않는 상태가 된다. 게다가 사진 속에 등장하는 피사체가 단수가 아니라 복수가 될 때 이 문제는 좀 더 복잡해진다. ‘엘레나4’에서 엘레나는 소녀1이나 소녀2뿐 아니라 나의 친구일 수도 있다. 그리고 미인과 개가 함께 찍힌 사진의 경우 엘레나는 미인일 수도 있고 개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친구가 보내주는 사진들 속에서 엘레나는 나의 자매라는 연령의 한계도 벗어나고, 인간과 비인간이라는 경계도 넘어선다.

처음에 내가 존재 여부도 확실하지 않은 엘레나를 친구에게 찾아달라고 한 것은 친구가 여행을 가는 나라에 대해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친구가 보내오는 엘레나 사진 덕분에 아버지를 이해하고, 현재의 자기 삶을 긍정하며, 새로운 인생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가능성을 발견한다.

 

5. 상처와 화해한다는 것

달려라, 아비의 나는 아버지가 없는 아이라고 해서 특별히 나쁠 것도 다를 것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상상 속에서 아버지를 달리게 만든 이유는 아버지가 멈춰서 있으면 자신이 가서 죽여 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아버지의 부재는 이미 봉합되어 아프지 않은 상처가 되었지만, “나쁘면서 불쌍하기까지 한 아버지는 분명히 상처이긴 한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의 부고를 어머니에게 전하고는 재치 있는 농담을 건네고 싶었지만 마땅한 농담을 떠올리지 못한다.

대신 나는 영어로 쓰여 있어서 어머니는 읽지 못하는 편지의 내용을 조작하여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한다. ‘진실말하기를 통해서는 삶을 회복할 수 없을 때 거짓말은 꽤 유용한 도구가 된다. 그래서 미국에서 결혼해 살다가 아이도 낳았지만 이혼한 내력, 잔디 깎는 기계를 타고 가다 맞이한 죽음, 아버지를 기다리며 자랐다는 이복형제의 이야기 등은 모두 빼고, 어머니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졌던 아버지를 만들어내어 어머니를 위로한다.  농담 잘하고 씩씩했던 어머니는 이날만은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아버지가 비록 세상에서 가장 시시하고 초라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그런 사람도 다른 사람들이 아픈 것은 같이 아프고,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같이 좋아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니 아버지는 내가 아버지를 상상했던 십수년 내내, 쉬지 않고 달리는 동안 늘 눈이 아프고 부셨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밤 아버지의 얼굴에 썬글라스를 씌워드리기로 결심했다. (28-29)

세상에 편지처럼 온 나와 항공우편에 실려 온 아버지의 죽음. 어쩌면 인생이란 편지처럼 왔다가 편지처럼 사라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누군가의 인생이 담긴 편지를 받은 사람은 기존과는 다른 것을 상상할 수 있게 된다. 그전까지 나의 상상 속에서 아버지는 남들과 같이 고통과 즐거움을 느끼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는 아버지의 죽음이 담긴 편지를 받고 쉬지 않고 달리는 동안 늘 눈이 아프고 부셨을 아버지에게 썬글라스를 씌워드리고 앞으로 아버지가 더 잘 뛰기를 기원한다. 아버지의 아픔이 조금 덜어진다면 나의 상처도 좀 더 가벼워질 것이다.  

한편 안녕, 엘레나의 나는 이제 친구의 과함을 부담스러워하기보다는 자신도 엘레나 찾기에 동참한다. 친구가 보내온 세상의 수많은 엘레나들 사이에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놓음으로써 아버지 역시도 또 한 명의 엘레나가 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소에게도 엘레나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는 아버지는 본인에게도 엘레나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을지 모른다. ‘엘레나라는 이름을 둘러싸고 나와 친구 사이에는 이전과는 다른 우정이 생성되었다. 그리고 엘레나의 진위 여부는 더 이상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대신 열리지 않는 문 밖에 서 있거나, 아무도 없는 빈집에 있거나, 고독하고 두렵기는 마찬가지였던 내 삶에 엘레나라는 수많은 가족이 더해진다. 그래서 더 이상 혼자가 아닌 나는 아버지와 엘레나에게 ‘Hi’ ‘Good bye’ 모두로 번역 가능한 안녕이라는 인사를 건넬 수 있게 된다. 새로운 가족에게 건네는 환영의 인사이기도 하고, 애도하지 못했던 아버지에게 건네는 작별의 인사이기도 한 안녕은 나의 자매인 세상 모든 엘레나들이 나에게 주는, 혹은 내가 수많은 엘레나들에게 주는 선물이다. 이제 나는 물리적으로 함께 할 수 없는 아버지/자매와 공존하면서 동시에 분리되는 삶을 선택한다.

잠시 후 거실로 나가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가져와 그 편지 옆에다 붙였다. 붙여놓고 보니 참으로 농담 같았다. 세상의 수많은 엘레나들 사이에서, 아버지 역시 또 한 명의 엘레나처럼 웃고 있지 않은가. (……) 안녕, 아빠 (32)

결국 나는 엘레나라는 사건을 충실히 지속함으로써 아버지라는 상처와 화해한다. 또한 자매를 찾아 달라고 했던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진다. 아버지는 늘 내 인생의 오 분을 기억하라고 했다. “내 인생의 오 분이라는 표현은 삶이 임시적임을 보여준다. 오 분이라는 짧은 지속성을 인지하면서 나는 자신의 삶에도 미안하다는 농담을 건네고, 이 작품은 새로운 의미들을 향해 열린 채로 마무리된다.

 

  6. 세상의 모든 가족을 위하여

우리들은 누가 만들었는지도 모르면서 수많은 정상성들을 이미 마음에 품고 있다. 가족에 대해서도 정상/비정상의 구분은 공고한 형태로 작동한다. 많은 사람들이 부부와 자녀로 구성된 가족을 정상의 범주로 이해하고, 그 외의 것들은 비정상의 상태 혹은 결여의 상태로 받아들인다. 그렇게 되면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형태의 가족들, 구체적으로는 한부모 가족, 조손 가족, 일인 가족, 반려동물 가족 등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기 어려워진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모든 가족의 형태들을 동등하게 바라보기 위해서는 정상 가족에 대한 환상을 버려야 한다. 세상에 정상 가족 같은 건 없다. 그저 다양한 형태의 가족들만이 있을 뿐이다.

가족이란 구성원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깝기 때문에 그것만으로 충분히 서로에게 쉽게 지워지지 않을 감정의 흔적을 남길 수 있다. 그 감정이 사랑이든 미움이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버지에게 전혀 연연하지 않는 줄 알았던 달려라, 아비의 나에게 아버지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잔재했던 것처럼, 혹은 아버지를 짐으로 느꼈지만 아버지가 죽은 후에도 아버지를 마음속에서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었던 안녕, 엘레나의 나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어떻게든 가족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하고 행복한 자신을 위해 가족과 적당한 관계 맺기의 방식을 찾는 것이다.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상상 속에서 아버지에게 계속 달리기를 시키든, 아버지를 엘레나라고 부르든, 자신만의 방식으로 상처를 덜 주기/받기 위한 혹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방식을 찾아야 한다. 그렇게 된 후에야 다양한 형태의 가족들 역시 '행복한 삶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보다 친근하게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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