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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욱의 <생각하는 마르크스>를 시와 더불어 음미하기





 이상하 | 독립연구자







그 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이성복 시 그 날 중


 


고유한 시대의 질병? 영원한 자본의 모순?

        

 모든 시대마다 그 시대의 고유한 질병이 있다는 말로 시작하는 한병철의 세계적 밀리언셀러 피로사회 이후, 마치 하나의 축제마냥 경쟁이 벌어졌다. 서동진이 변증법의 낮잠 책 서두에서 말하는 것처럼 한국사회는 어떤 사회인지 어떤 고유질병이 있는지 분석한다는 XX사회 류의 책들은 넘쳐났고 하나의 붐을 이루었지만, 그중 피로사회를 넘어섰다는 평가를 듣는 책은 판매량으로 따지는 대중적 영향력으로 보나 이론적 학문적 성과로 보나 사실상 없다고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그것은 왜일까, 단순히 아류작은 원본의 아우라를 능가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답변은 신은 죽었다는 니체와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 이후의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겐 너무나 고려할 가치도 없는 게으른 답변으로 들린다. 아마도 앞서 말한 서동진의 입을 빌리자면, 다른 종류의 XX사회류의 책들이 피로사회만큼 성공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결국 그 책들이 사회의 한 단면만을 분석할 뿐 총체적이고 종합적인 모습을 제시하고 설득하는 것에는 끊임없이 실패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비판에서는 한병철의 피로사회 조차도 크게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백승욱의 생각하는 마르크스는 바로 이렇게 XX사회류의 책들이 독자들에게 점점 질려가는 와중에 등장했다. 왜 하필 수많은 인물과 사상중에 마르크스라는 유령일까. 그것은 분명 그가 교수로 재직중인 중앙대학교의 인문학 축소적 구조조정과 이명박근혜 권위주의적 정부의 실정이라는 정세분석과 절대 무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정세분석에 기반해 각자의 속도와 리듬을 유지하면서 개입할 타격지점을 찾은 결과로, 중앙대에선 박용성 이사장이 물러났고 한국 정부에선 박근혜가 결국 탄핵되었다. 예전엔 불가능해보였던 투쟁들이 결국 싸움끝에 상대방의 실책이 더해져 승리로 귀결된 것이다. 이러한 승리는 어떻게 가능했는지 알아내고, 또 승리하려면 세계를 전체적으로 분석하고 종합한 마르크스가 어떻게 생각했는지 추상에서 구체로 향하는 등의 그의 방법론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주요 주장이다.


 이전의 마르크스 논의들에선 마치 노동자 인간을 불쌍히 여긴 마르크스가 천상에서 대지로 내려와 자본주의 타파과 공산주의 낙원건설을 위한 복음을 자본론 등등의 책에 성경처럼 내려주었다는 식으로  마르크스가 무엇을 말했는지를 앵무새처럼 반복했었다. 허나 중요한 것은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 인 것이다. 정세는 예전과 비슷해 보일뿐 절대로 똑같이 반복되지 않고, 그렇다면 수백년전의 이야기와 투쟁을 그저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식으로 반복한다면 아침해가 저녁되면 저물듯이 자연스러운 패배가 기다리는 것이다. 불행히도 이러한 소모적 투쟁과 미래없는 패배는 십년동안 너무나 많이 반복되었고, 그 결과 서글프게도 노오력 해봤자 안 바뀐다는 냉소주의와 헬조선에선 공부따위 다 쓸모없고, 지식인 교수들도 부도덕하고 멍청하다는 반지성주의가 지금 시대의 시대정신이 되어버렸다.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은 듯 프로필에 음식이나 웃는 사진을 올리는 이런 정세 상황속에서 마르크스가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 사고했는지, 다시 한번 파고든다면, 시대의 고유한 질병이 아닌 관계성에 기반한 사유로 영원한 자본의 모순을 찾아내는 그 방법론을 배운다면 지금 시대 지금 사회에도 활용할 유용한 길잡이 또는 지침서가 되지 않을까. 


 이런 과감한 야심을 내비치는 책 생각하는 마르크스는 그 야심만큼 자신의 뜻을 다 펼쳐냈을까? 나는 적지않은 부분에서 백승욱의 뜻에 공감하나 부족한 부분이 있고, 그것들이 사랑이나 계몽주의 비판이나 랑시에르 등으로 보완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이 글을 쓴다. 마르크스에게서 사회적인 것 1과 사회적인 것 2를 구분하는 백승욱의 독창적인 개념 분리나, 마르크스의 자본에 세 가지 시간대가 각각 존재한다는 분석도 매우 흥미로운 논쟁 주제이나, 이 글에서는 마르크스의 개인적 소유 개념과 알튀세르의 과잉결정 과소결정 개념의 보완에 주안점을 두기에 위의 다른 논의점들은 추후에 다른 글을 쓰면서 꼭 따로 논의해보거나 세미나를 진행하면서 논쟁해보는 것이, 아쉽지만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하기에 다음 기회로 미뤄둔다.




사적 소유도 사회적 소유도 아닌 개인적 소유라는 허구 또는 규정적 이념



 흔히 마르크스는 미래에 대해 적극적인 전망을 말하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특히 주저인 자본 책에는 흔한 오해와는 달리 공산주의를 이룩하는 혁명론 방법론 따위는 전혀 나와 있지 않다. 그렇기에 일본의 철학자 가라타니 고진같은 학자는 마르크스는 미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반동적으로 생각했으며 자본 책은 공산주의의 필연성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자본주의가 얼마나 무너지기 어려운 탄탄한 시스템인지를 말해준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때문에 가라타니 고진의 경우에는 주저 세계사의 구조를 위시한 최근 작품들에서 새로운 세계동시혁명의 이론과 논리를 설명하고 만들어내기 위해 기존 마르크스의 생산양식이 아닌 교환양식론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분석하는 방법을 바꿔야 한다고 이론적 우회 또는 전환을 택한다.   


 하지만 백승욱은 놀랍게도 자본 책 자체에서 미래를 향한 전망을 발견 아니 발굴해낸다. 스스로도 언급하다시피 자본 책 전체에서 딱 한번 나오는 용어인 개인적 소유가 그것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 생겨난 자본주의적 취득양식(즉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은 자신의 노동에 기초한 개인적인 사적 소유에 대한 제1의 부정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생산은 자연 과정의 필연성에 따라 그 자신의 부정을 낳는다. 즉 부정의 부정인 것이다. 이 부정은 사적 소유를 다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시대의 획득물(즉 협업과 토지 공유 및 노동 자체에 의해 생산되는 생산수단의 공유)을 기초로 하는 개인적 소유를 만들어낸다 -자본1


 자본주의를 폐지하려면 사적 소유를 폐지하고 사회적 소유의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상식 수준이다. 그것이 보통 사회주의 국가에 대해 가지는 이미지 그 자체이나 이 부정에 대해 또다시 부정하는 개념으로서의 개인적 소유란 대체 어떤 것인가? 생각하는 마르크스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것은 단순히 소유가 아닌 영유, 또는 전유 즉 자신의 능력으로 하는 실질적인 취득 행위이자 이것이 사회적으로 공유되는 상황을 일컫는 말이라면, 확실히 지성적 능력이야말로 개인적 소유라는 개념의 양태로서 매우 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지식 그 자체를 소유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개념이니까. 책이야 소유할 수 있겠지만 지식을 배타적이고 독점적으로 자신만의 소유로 한다는 것이 지금 시대에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오히려 그 지식을 사회적으로 널리 공유할수록 지식 자체의 가치와 효용도 더 커진다는 점에서 인쇄물이 전부이고 라디오조차 없던 마르크스의 19세기보다 팟캐스트와 트위터 페이스북라이브 등의 양방향 미디어가 넘쳐나는 지금 21세기 시대에 매우 적절한 통찰이라고 볼 수 있다. 역으로 생각하면, 마치 자본주의가 지속적 기술발전을 추구하기 때문에 언젠가 지성이 널리 공유되어 개인적 소유가 확대되는 이런 사회가 올 것이라고 마르크스가 이 부분에서 예언한 게 아닐까 혜안이 빛나는 듯 보이기까지 한다.


 허나 문제는 따로 있다. 이 지성을 활용하는 개인적 소유 개념에서 백승욱은 너무나 쉽게 마치 자연스러운 듯이 ‘대체불가능한 사람’ 이라는 개념으로 점프, 목숨을 건 도약을 한다. 자본가나 권력자가 거대해 보이지만 자본의 소유를 잃거나 권력을 잃는 순간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어버리기에 더더욱 소유에 집착한다고 그는 말한다. 허나 개인적 소유의 개념이 사회적으로 확립되고 사람들이 지성을 사회적으로 공유한다고 해서 모두가 뛰어난 지식인이 되고 칸트의 말처럼 타인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는 대체불가능한 사람들의 목적의 왕국이 과연 될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백승욱 자신이 언급한 예처럼 학교에서 독서실을 모두에게 공동으로 개방한다고 해서 모두 시험점수가 똑같이 높게 나오지는 않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모두에게 개방하면 공부가 목적이 아니라 공부하는 친구를 같이 게임하러 놀러 가자고 하거나 아에 노골적으로 난장판을 만들고 공부를 방해하는 사람도 분명히 생겨난다. 지성과 도덕은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작년부터 시작되어 여전히 진행중인 최순실과 우병우의 국정농단 사태에 의해 전 국민이 이해하기에 따로 더 설명이 필요하진 않을 듯하다.    

  

 모든 싸움은 억압받는 자의 위엄을 지켜내기 위한 싸움으로 귀결된다는 설명도 마찬가지로 보인다. 분명 싸움에서 자유주의나 진보의 이름을 가진 브로커들이 개입해서 당신들이 원하는 돈을 더 받아주겠다며, 당신들이 원하는 것은 원래 돈 아니었냐며 회유하고 결국 돈 때문에 위엄까지 포기하는 일은 많이 벌어져왔다. 그리고 그 뒤에는 싸움의 이유를 잃어버렸기에 싸우지 못하고 부당한 것도 수용하게 된다는 음울한 이야기. 결코 어디 멀리서 역사적인 사례를 찾아야만 할 것도 없이 나 자신도 싸움중에 그러한 금전적 타협을 한 기억이 분명히 존재한다. 허나 백승욱이 말하는 것처럼 타협을 하지 않으면 이러한 억압받지 않는 자의 존엄이 생겨나고 자기 자신을 대체불가능한 사람으로 여기고 타인에게도 연대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이 되는 것일까. 마치 닭과 달걀중 누가 먼저인가 논쟁같기도 하지만 나는 인간의 존엄이란 선천적이고 생득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 사회적인 것이고 취득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가장 쉬운 예로, 사랑이나 배려라는 것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은 사랑도 배려도 할 줄 모른다. 인간사회가 아닌 야생속에서 어떠한 언어도 배우지 못한 사람은 언어소통 자체를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랑받고 배려받고 자란 사람이 스스로를 대체불가능한 존재로 여기고 개인적 소유같은 이상을 실천하기 위해 더 배우고 지성을 공유하는 것이 그 반대보다 현실에 널려있는 사례가 아닐까. 자 그러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뿌리인 개인적 소유 개념 자체를 허구라고 생각하고 폐기해야 할까. 이 부분에서는 잠시 쉬어가며 박준 시인의 시를 하나 읽어보자.   




빛 하나 들여보내는 창 이면 좋았다 우리는, 같이 살아야 같이 죽을 수도 있다는 간단한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시절에 만났다 네가 피우다 만 담배는 달고 방에 불 들어오기 시작하면 긴 다리를 베고 누워 국 멸치처럼 끓다가 `사람이 새와 함께 사는 법은 새장에 새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마당에 풀과 나무를 키우는 일이었다` 정도의 글귀를 생각해 너의 무릎에 밀어넣어두고 잠드는 날도 많았다 이불은 개지도 않고 미안한 표정으로 마주앉아 지난 꿈 얘기를 하던 어느 아침에는 옥상에 널어놓은 흰 빨래들이 밤새 별빛을 먹어 노랗게 말랐다


-박준 시 광장 전문


 

아마 폐기라던가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박준의 이 시가 보여주는 것처럼, 사적 소유도 사회적 소유도 아닌 개인적 소유의 사례는 지성이라는 범주 외에도 사랑이라는 범주도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배타적 독점적 소유가 불가능하면서도 한 개인이 아닌 두 사람 이상이 사회적으로 공유되는 것이 바로 사랑이 아닐까? 물론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해선 최소 천 년 단위의 논란이 있었지만, 이 시에서 나오는 것처럼 사람이 새와 함께 사는 법은 새장에 새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마당에 풀과 나무를 키우는 일이었다 라는 생각과 행위를 사랑이 아니라고 반대하기란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개인적 소유의 사례를 지성 뿐만이 아니라 사랑으로 확대한다면, 단순히 허구나 칸트의 언어로 구성적 이념이 아닌 규제적 이념으로서의 개인적 소유가 더 큰 확장성과 가능성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제안해본다.    



중층결정이 아닌 과잉결정, 그리고 도래하는 과소결정에 대처하기



 이 책 생각하는 마르크스가 이전의 알튀세르등 마르크스주의 관련 논의와 갈라지는 또 하나의 결정적 지점은 과잉결정 또는 중층결정 다원결정등으로 번역되던 용어 surdétermination를 더 이상 논쟁의 여지가 없도록 과잉결정과 과소결정이라는 하나의 쌍으로 설명하고 정립한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이것이 백승욱 혼자만의 공은 아니며 진태원이 라캉과 알튀세르에서 이미 설명하고 번역한 바 있지만 그러한 논문이 실린 학술서적이 아닌 서점에서 대중적으로 읽히는 책에서 이렇게 논의하고 정립한 것은 사실상 최초가 아닌가 싶다. 이 점에서 또한 이 책의 이중적 구조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제일 처음 챕터와 마지막 챕터는 자유인문캠프에서 했던 공개강연의 녹취록을 풀어서 대중적인 접근이 가능한 수준의 내용으로 구성하고 그 사이의 중간내용은 좀더 학술적이고 전문적인 논의로 구성하여 대중성이냐 전문성이냐 하는 낡은 논의를 어느정도 혁파하는 출판사의 영리한 면모가 엿보인다고 생각했다. 


 기존의 마르크스에 대한 비판 중에서도 가장 큰 비판은 역시 정치든 국가든 사회든 모든 것이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에서는 경제적인 것이 본질이라고 설명된다는 경제환원론이었고, 알튀세르는 이 환원론으로부터 마르크스를 지켜내기 위해 기존의 기계적 인과성이나 표출적 인과성이 아닌 구조적 인과성을 주장했다. 마르크스가 말을 따라 핵심적인 자본주의의 모순이 자본-노동의 자본관계를 통해 표출된다고 하더라도, 현실에서는 자본 노동의 모순 뿐만이 아니라 전쟁 생태 성차 인종 등등 다양한 모순들이 지역별로 다르게 존재한다. 또한 자본 노동의 모순만이 주요 모순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그와 거리가 있는 모순이 주요 모순으로서 현실에 폭발하기도 한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한국의 역사에서는 독재와 민주화가 주요 모순이었고, 저번 2012 대선만 하더라도 조금 다른 형태로 경제민주화가 주요 의제로 떠오른 바 있다. 이런 역사적 모순은 알튀세르에 의하면 결코 순수한 자본 대 노동의 모순으로 나타나지 않으며 이 둘 사이를 관계로 묶어내는 ‘마주침’ 또는 ‘우발성’이 있어야만 한다. 이러한 모순이 나라 지역 시기마다 특수성 속에서 모순의 일반성이 확인되어 과잉결정되는 것이라면, 이전의 중층결정이나 다원결정이라는 번역은 확실히 오해를 없애기 위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보인다. 또한 과소결정이라는 과잉결정의 짝까지 생각하게 되면 더더욱 의문의 여지없이 과잉결정-과소결정이 적절한 번역으로서 확인된다.


 다만 알튀세르가 지나가면서 언급했다는 이 과소결정-자본 노동 적대의 변증법적 작동이 중단된 상황-개념이 지금 세계에서는 과잉결정 개념보다 더 피부로 다가오는 것은 나만의 발걸음이 머뭇거려지는 느낌은 아닐 것이다. 과잉결정은 어쨌든 ‘결정’에 초점을 맞추지만, 과소결정은 ‘자본-노동의 변증법이 자본주의를 넘어서지 못해서 혁명이 유산되고 혁명적 운동이 지체되거나 사라지며, 제국주의가 부패 속에서 발전하게 되는, 결정의 문턱이라는 사고‘ 즉 다른 모순들의 효과가 특정 모순의 두 항의 만남과 작동을 억지 또는 저지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2017년 지금 시점에서 이것에 대해 떠오르는 것은 당연히 이민자를 반대한다는 인종주의에 기반해 자국민들이 투표로 내린 두 결정, 브렉시트와 트럼프 대통령 당선이다. 한국의 경우도 민주정권 이후에 북한과 친북좌파를 적대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집권한 이명박근혜 정권도 이러한 과소결정 개념에 매우 잘 들어맞는 상황이 아닌가?  




우리는 목숨을 걸고 쓴다지만

우리에게

아무도 총을 겨누지 않는다

그것이 비극이다

세상을 허리 위 분홍 훌라후프처럼 돌리면서

밥 먹고

술 마시고

내내 기다리다

결국

서로 쏘았다


-진은영 시 70년산 전문


 

87년 6월 항쟁으로 절차적 민주주의를 쟁취한 이후에 대학을 들어간 70년생 진은영 시인의 이러한 자조적인 시는 과소결정 상황에서의 비극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국은 독재와 민주화가 주요 모순이었고, 그것이 87년에 대통령 직선제 쟁취로 해소된 뒤에는 내내 노동자 계급의 해체라고 부를 정도까지(적어도 10대중에 장래희망 노동자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이미 한병철의 책 제목처럼 심리정치 차원에선 이미 달성된 듯한) 노동의 위기가 발생했고, 여기서는 자본의 위기가 노동의 ‘승리’로 귀결되기보다는 적대하는 두 계급의 공멸로 향할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이 논의에서 떠오르는 것은 한국 사회의 출산파업이라고 부를 정도의 낮은 출산율이다. 정규직 비정규직의 차별과 대기업 중소기업의 차별로 인해 대다수 2030세대는 결혼을 했더라도 출신을 미루거나 포기하는 큰 이유로 ‘이런 나라에서 자식을 낳으면 자식에게 죄를 짓는 기분이다’ 라는 것을 1위로 들고 있다. 


 지젝이 자주 인용하는 마르크스의 문구.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을 행한다!처럼 노동의 위기 상황에서 사람들은 거시경제적인 것까지 생각하거나 알지 못해도 알아서 인구를 줄이고 있고 그것은 과소결정적인 상황을 낳고 있다. 과연 이것이 주류경제학에서 흔히 예측하는 것처럼 10년 뒤에는 줄어든 인구로 인해 지금 일본처럼 청년실업이 완화되고 경제 분위기가 활황을 띌지 아니면 노동의 위기 상황에서 자본의 위기가 겹쳐 공멸의 위기가 올지, 심히 우려되지 않을 수 없으나 추가적인 논의가 더 필요한 상황이라 생각한다. 이 글을 쓰는 중에 개표중에 당선인사를 한 문재인 대통령과 정부는 이런 위기를 과연 막아낼 수 있을까. 자본과 노동의 주요모순을 해결할 수 있을까. 추가적 논의가 필요하지만 국가부채와 가계부채가 각각 천조를 넘는 재정상황을 직시한다면, 모든 고정된 것들이 녹아내린 비관적이고 우울한 안개들을 손바닥으론 막아내기는커녕 가리는 것조차도 매우 난감해보인다.

     



생각하는 마르크스 백승욱에게 내재된 폭력적 계몽주의를 두려워하며

    


 

놀라서 뒷걸음질치다가 

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를 밟다 


슬픔 

물에 불은 나무토막, 그 위로 또 비가 내린다 


자본주의 

형형색색의 어둠 혹은 

바다 밑으로 뚫린 백만 킬로의 컴컴한 터널 

―여길 어떻게 혼자 걸어서 지나가? 


문학 

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때 

멀리서 백열전구처럼 켜지는 개구리 울음 


시인의 독백 

"어둠 속에 이 소리마저 없다면" 

부러진 피리로 벽을 탕탕 치면서 


혁명 

눈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 

가로등 밑에서는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 


시, 

일부러 뜯어본 주소불명의 아름다운 편지 

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진은영 시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당연하게도 위에서 말한 과소결정적인 비관적 상황인식은 사실 어제 오늘만의 일은 아니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과잉결정과 과소결정은 하나의 짝이다.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에서 자본 노동의 모순은 항상 기본적으로 잠재되어 있는 것이다. 진은영이 저 시를 쓴 2001년 전세계에서 다들 새로운 세기 새로운 시대가 왔다고 축포를 쏘아올리고 한국도 IMF를 극복했다고 대통령이 자화자찬하고 헬조선같은 국가 사회비하적 말은 상상도 할수 없던 시절에도 자본주의는 존재했으며, 도저히 혼자 걸어갈 엄두가 안나지만, 숨을 참고 들어가야만 하는 어마어마하고 무시무시하지만 또 매혹적인 너무나 매혹적인 해저 속 빛나는 무저갱 그 자체였다.   

 

 물론, 이러한 자본주의가 2001년에도 2017년에도 존재했다는 사실 그 자체는 아무런 위안도 도움도 되지 않는다. 발리바르의 시민인륜 인권의 정치와 라캉의 주체론과 더불어서 이 책의  기승전결에서 하이라이트 부분을 차지하는 알튀세르의 과잉결정 과소결정 설명은 그러면 왜 굳이 존재하는 걸까? 읽는 독자들에게 자본 노동 주요모순이 있는 한 옛날에나 지금이나 절망이라고 느끼게 하려고? 그런데 그것이 정말로 그렇다는 게 책을 완독한 나의 소감이다.    



누구나, 자기가 사는 시대를 낭떠러지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누구나, 자기가 벼랑에 서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오히려, 세상을 변혁하려 한다면 더욱, 스스로 벼랑이 되어야 한다.


  (김정환 글 신화와 어떤, 절벽에 대하여)


 알 듯 말 듯한 그 절박함,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자기 스스로 벼랑이 되는 것입니다.   -끝-


 

김정환의 시가 아닌 글이라고 밝혔지만 시로써 읽고 해석하고픈 책의 마지막 부분이다. 라캉이나 알튀세르같이 난해하기로 소문난 현대철학자들의 논의를 마르크스와 더불어 논리적으로  이어가다가 마지막에서 왜 이렇게 문학적이고 시적인 표현으로 마무리를 하는 것일까. 그것은 책의 마지막 장인 대중강연 인문, 마르크스에게 말걸기에서 자기가 좋아한다고 밝힌 루쉰을 강조하는 부분과 아마 맞닿아 있을 것이다. 


-가령 말일세, 쇠로 만든 방이 하나 있다고 하세. 창문이라곤 없고 절대 부술 수도 없어. 그 안엔 수많은 사람이 깊은 잠에 빠져 있어. 머지않아 숨이 막혀 죽겠지. 허나 혼수상태에서 죽는 것이니 죽음의 비애 같은 건 느끼지 못할 거야. 그런데 지금 자네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의식이 붙어있는 몇몇이라도 깨운다고 하세. 그러면 이 불행한 몇몇에게 가망없는 임종의 고통을 주는 게 되는데, 자넨 그들에게 미안하지 않겠나?(루쉰 2010:26)-


 루쉰은 이런 대중을 깨워 절망에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 자신의 임무로 생각했기에, 대중에게 섣부른 희망보다는 더 절망하게 만들고 절망의 절망까지 가서 바닥에 닿아야 진짜 극복을 위해 절망의 심연을 분석하고 그 근원을 성찰하게 된다는 말. 언뜻 듣기에 정말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나도 처음 읽을 때에 격하게 고개를 끄떡였지만, 두 번째로 읽으면서 그 안에 내재된 계몽주의의 폭력성을 다시 성찰하게 되었고, 내가 격하게 고개를 끄떡였던 것이 그 말이 옳아서 마음을 움직인 것이 아니라... 계몽의 폭력성과 지적 차이로 생기는 계급, 권력 그 맛 그 힘에 군대에서 최고참 병장이 된 것 마냥 스스로 도취되었던 게 아닌가 싶어 스스로에게 고개를 격하게 흔들게 되었다. 


 물론 한 시대의 위대한 지성임에 틀림없었던 루쉰을 마치 흔한 계몽주의 학자에 불과한 것처럼 격하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비판으로 보인다. 허나 중요한 것은 백승욱도 말하는 것처럼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 즉 관계성이다. 마르크스를 계몽주의적 방식으로 읽으면 자본주의는 윤리적으로 나쁘다는 수준에서 끝이 나버리고 갖고싶은 물건이 생기는 등의 현실적 계기를 만나면 다시 돈을 열심히 벌어야 겠다는 생각에 골몰하게 되어버리는 것이 계몽주의적 사고의 한계이고 이 책이 지금 그런 관계를 스스로 보여준 것이다. 포르노가 나쁜 것이라고 말하면서 집에서는 다들 포르노를 본다는, 지젝이 지적하는 외설적 상황. 아이러니.


 사람은 계몽주의적 지식만으론 감동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은 예술 작품 하나를 감상으로써 바뀔 수가 있다. 그래서 백승욱은 책의 마지막을 의도적으로 꽤 고심해서 엥겔스의 무덤 이야기까지 꺼내서 문학적인 예술적인 문장으로 마무리했다는 것은 느껴지지만, 그 문장조차도 전형적인 지적 차이가 가정되어 있고 지식인이 대중을 가르치는 계몽주의의 형식이라는 것은, 안타까운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어느날

한 자칭 맑스주의자가

새로운 조직 결성에 함께하지 않겠느냐고 찾아왔다

얘기 끝에 그가 물었다

그런데 송동지는 어느 대학 출신이오? 웃으며

나는 고졸이며, 소년원 출신에

노동자 출신이라고 이야기해주었다.

순간 열정적이던 그의 두 눈동자 위로

싸늘하고 비릿한 막 하나가 쳐지는 것을 보았다

허둥대며 그가 말했다

조국해방전선에 함께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라고

미안지하만 난 그 영광과 함께하지 않았다


 -송경동 시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중에서 발췌.


 

문이란 공부란 나의 존재가 타인의 해방을 위한 조건이 되며 타인의 존재가 나의 해방을 위한 조건이 되는 관계를 만드는 것이라는 텍스트의 매력. 그리고 모든 텍스트는 살아서 움직이기에 그 개념을 분열시키고 흔들면 텍스트가 갑자기 살아서 움직이고 텍스트의 폭발적 힘이 자신의 사유의 희열, 사유의 기쁨과 만나면 그때 지식이 탄생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강연의 멋진 문장들이 앞서 말한 계몽주의에 내재된 폭력성 앞에서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마저 든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인문의 과제는 생각보다 단순하게 정해진 듯하다. 낡은 지적 계몽주의를 벗어나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



진은영과 시쓰는 랑시에르가 백승욱과 생각하는 마르크스에게 답하기



 각자가 지성을 갖추어 대체불가능한 개인이 된다는 것은 대중이 지식인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주장과 맥락상 분리불가능하다. 그리고 그것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낡은 계몽주의의 함정에 빠지는 것일까, 지적 차이를 전제하는 것이 아닌 다른 해방의 방법론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이 지점에서 나는 시와 정치라는 논제로 랑시에르를 한국 문단에 소개하고 위험한 논쟁을 개시한 진은영의 책 문학의 아토포스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년이 내 목소매를 잡고 물고기를 넣었다

내 가슴이 두 마리 하얀 송어가 되었다

        세 마리 고기떼를 따라

푸른 물살을 헤엄쳐갔다


-진은영 시 첫사랑 전문



 이 짧은 시의 소년은 아직 어림을 감안해도 막무가내고 강압적인 면이 있다. 허나 진은영은 이 어린 추억을 불쾌함이 아니라 첫사랑의 추억으로 시로 만들어낸다. 상대방에게 너의 행위는 잘못되었고 비윤리적이다 그런 논리적 반박이 없어도, 저 소년이 이 시를 본다면 스스로  돌이켜보고 부끄러워하지 않을까. 백승욱이 생각하는 마르크스에서 의도했던 사람은 예술작품 하나로 바뀔 수 있다는 작은 사례가 아닐까 싶다. 바로 이러한 윤리를 벗어나는 미학적 논의를 랑시에르의 말을 빌려 진은영은 친절하게 설명한다.


-예술은 예술적 영역이라는 제한적 감성적 새장 안에서 활동의 최대치를 가질 수 있다는 식의 자율성을 벗어난다. 그것은 “생산과 재생산 및 복종의 자연적 주기들에 순응하는 몸짓들과 리듬들의 기능성을 손상시킴으로써 감각적인 것의 지도를 바꿔 놓는다.”라는 의미에서 현실로부터 자율적이지만 현실을 변형하는 허구들을 만들어 낸다. 이것은 랑시에르가 말하는 예술의 특이성, 다시 말해 감성적 자율성이다. 감성적 자율성은 예술의 자율성과 다른 것이다. 그것은 세계의 낡은 감각적 분배를 파괴하고 다른 종류의 분배로 변환시킴으로써 삶의 새로운 형태들의 발명을 동반한다. 이렇게 해서 랑시에르는 감성적 체제에서 예술로 식별되는 활동, 즉 감성적 혁명을 가져오는 활동에 다름 아니다. “‘감성적’혁명이란 공동체의 상징적 공간에 (또는 외부에), 즉 생산과 재생산의 ‘사적 영역에 노동자들의 자리를 지정하는 식의 감각적인 것의 분배를 전복시키는 것이다.”- 진은영 문학의 아토포스 26p


 교수는 교수의 자리에, 학생은 학생의 자리에, 지식인은 지식인의 자리에, 대중은 대중의 자리에 각자의 주어진 자리에 충실하라는 공자식 정명사상과 유사한 계몽주의는, 랑시에르에 따르면 새로운 감성적 분배에 참여함으로써 낡은 분배 형태와 불일치하고 그와 맞서 싸우는 한에서, 예술은 정치적인 것이 된다고 주장하기에 계몽주의는 자리 자체가 없어진다. 이러한 랑시에르와 진은영은 논의를 더 파고들어 다음과 같은 급진적 주장에 다다른다.


-미학의 정치는 몫을 갖지 못한 자들이 감각적 영역 전체에 작동하는 기존의 분배 방식에 대하여 불일치의 견해를 제기하고 새로운 공동의 세계를 형성하는 활동을 의미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랑시에르는 감각적 혁명의 가능성을 단순히 왕정을 와해시킨 프랑스 혁명에서만 찾지 않는다. 진정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은 “생산과 재생산의 ‘사적’영역에 노동자들의 자리를 지정하는 식의 감각적인 것의 분배를 전복시키는” 19세기 프랑스 노동자들의 해방적 활동이다. “이 노동자들에게 해방이란 낮을 노동자들이 노동하는 시간으로, 밤을 그들이 휴식하는 시간으로 한정하는 감각적인 것의 분배를 파괴하는 것을 의미했다. 해방의 단초는 밤 시간을 더 많이 활용하기로 한 그들의 결정이었다. 잠자는 대신 쓰고 읽고 생각하고 토론하기! 처음에 해방은 노동자들 자신의 실존을 다시 구성함을, 즉 노동자로서의 정체성, 노동자의 문화, 노동자의 시간과 공간과 절연함을 의미했다. - 진은영 문학의 아토포스 77p

 

 프랑스 시민혁명뿐만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해방적 활동이 진정 혁명적이었음을, 계몽주의의 가르치는 전위와 가르침받는 대중이라는 낡은 이분법이 없어도 각자가 지성의 힘을 갖추는 해방의 기획이 가능하다고 진은영은 이 문학의 아토포스에서 역설한다. 이러한 방법론은 책의 또 다른 글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우리 시대의 진실은 아무도 모른 채 깊이 숨겨져있는 것이 아니라 정보더미 사이에 아무렇게나 내팽겨쳐져 있다. 따라서 예전처럼 신문이나 뉴스가 보도하지 못한 것을 시나 소설이 직설적으로 보고해야 할 필요보다는 어떤 사건을 거대한 무관심으로부터 환기시키고, 그 사건의 공간을 채우는 정서들을 여러 겹으로 만들어 그 겹겹이 쌓인 공간들, 정서의 미로들 속에서 더 많은 이들이 오래 놀고 헤매고 사유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정치적 사건들을 특수하게 신성한 공간 속에 보존하는 대신 음악을 듣고 연애하고 친구 사귀는 일처럼 일상적이고 익숙한 공간으로 데려올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작품들이 지닌 모종의 모호함이란 정치적 의식의 부족이 아니라 이전과는 달라진 정치적 공간과 문학적 공간의 접속에서 발생하는 하나의 효과로 이해될 수도 있지 않을까? -진은영 문학의 아토포스 175p


-최근에 있었던 쌍용자동차 22인 추모 문화제에서 심보선 시인은 '스물세번째 인간' 이라는 시를 발표했다. 시청 앞 대한문의 그 공간은 시인에게는 일종의 신작 시 발표회이기도 했다. 시인은 광장에서 쓰여지는 작품들의 휘발성에 매혹된 것처럼 보인다. 그는 7개월만에 쓴 시를 그곳에서 발표했다고 한다. 단순히 사회참여라는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당위 때문이 아니라 스물 두 명의 이어진 죽음을 둘러싼 겹겹의 사건이 촉발시킨 강렬한 감응(시-그의 눈동자)속에서 그 사건을 사유하고 감각하려는 미학적 욕구 때문이었다. 결코 저항할 수 없는 영감에 강제되어 자신에게 문학적으로 새로운 공간들과 사랑에 빠지는 것. 이러한 문학적 기투는 롤랑 바르트가 '아토초스' 라고 불렀던 것을 닮아있다. 아토포스atopos는 장소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토포스topos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여기서 a는 부정과 결여의 접두사로서, 아토포스는 비장소성으로 번역될수 있다. 이 단어는 어떤 장소에도 고정될 수 없어서 그 정체를 알기 없다는 의미로 소크라테스의 대화자들이 그에게 붙여준 것이라고 한다. 바르트는 이러한 비장소성이 사랑의 사건에 내재한다고 보면서 "내가 사랑하고, 또 나를 매혹시키는 그 사람은 아토포스다" 라고 말한다. -진은영 문학의 아토포스 178~179p



 이러한 랑시에르와 진은영의 논의로 생각하는 마르크스의 계몽주의적 스탠스를 보완할수 있지 않을까 가능성에 기대하며, 마지막으로 사랑이라는 개인적 소유로서 서로에게 대체불가능한 존재가 되라고 암시하는 듯한 진은영의 시로 이 부족한 글을 마쳐본다.


  


  연애의 법칙

                           진은영


너는 나의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어제 백리향의 작은 잎들을 문지르던 손가락으로.

나는 너의 잠을 지킨다

부드러운 모래로 갓 지어진 우리의 무덤을

낯선 동물이 파헤치지 못하도록.

해변의 따스한 자갈, 해초들

입 벌린 조가비의 분홍빛 혀 속에 깊숙이 집어넣었던

하얀 발가락으로

우리는 세계의 배꼽 위를 걷는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포옹한다

수요일의 텅 빈 체육관, 홀로, 되돌아오는 샌드백을 껴안고

노오란 땀을 흘리며 주저앉는 권투선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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