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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탈자의 수탈에 관하여

 

에티엔 발리바르 

번역 : 배세진 (파리 7대학 사회학 및 정치철학 학과박사과정)

 

[옮긴이] 

이 텍스트의 출전은 각주 1번에 나와 있다. 아직 프랑스어로도 미출간된 이 텍스트의 프랑스어 원본을 보내주시고 번역과 게재를 허락해주신 발리바르에게 감사하고 한국어판 인용문들을 찾아 보내주신 황재민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이 텍스트는 옮긴이가 최근에 번역한 일련의 논문들의 연장선상에 있는 텍스트이다. 순서 상관없이 나열하자면, (1) ‘마르크스의 두 가지 발견”’, (2) ‘공산주의의 현재성에 관한 몇 가지 언급’, (3) ‘상품의 사회계약과 화폐의 마르크스적 구성: 화폐의 보편성이라는 문제에 관하여’, (4) ‘미셸 푸코의 반-마르크스’, (5) ‘수탈자의 수탈에 관하여’. 이 다섯 가지 텍스트는 다루는 쟁점이 모두 다르긴 하지만 사실은 일관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일관된 문제의식물신숭배로 간주할 수도 있고 개인성의 구성으로 볼 수도 있으며 마르크스의 마르크스주의또는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로 간주할 수도 있으나 이는 독자들이 판단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참고로 여기에서 수탈자의 수탈로 옮긴 expropriation des expropriateurs의 경우, 다른 번역에서는 모두 수탈자에 대한 수탈로 옮겼으나 여기에서는 일부러 수탈자의 수탈로 옮겼다. ‘대중들의 공포대중들의/대중들에 대한 공포이듯(, 대중들이 대중들 자신에 대해 가지는 공포로서 대중들의 공포와 통치자들이 대중들에 대해 가지는 공포로서 대중들에 대한 공포’), 이 또한 (본문에 잠깐 언급되지만) ‘수탈자의/수탈자에 대한 수탈을 모두 의미하므로, 여기에서는 일부러 주격 속격과 목적격 속격의 이중의미로 해석할 수 있도록 수탈자의 수탈로 옮긴다.]  

 

자본의 가장 유명한 정식 중 하나인 이 수탈자의 수탈이라는 정식은 또한 자본의 가장 수수께끼 같은 정식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각주:1]. 이 논문에서 나는 이 정식을 문학적, 문헌학적, 철학적, 정치적, 심지어는 동시에 신학적인 주석의 대상으로 삼고 싶다. 박식함의 즐거움을 위해서가 아니라([마르크스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지식을 얻음으로써] 박식해지는 것은 마르크스 전문가들과 특히 마르크스 문헌학자들”marxologues의 관심사일 뿐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이라는 관념이 오늘날 마주해야 하는 문제들 중 몇몇을 정식화하기 위해서 말이다. 많은 측면에서 봤을 때, 자본주의는 [자본주의 이외에 그 어떠한 대안도 허용하지 않는] 일종의 절대적 자본주의”(우리는 이 절대적 자본주의를 종종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지칭하는데, 그러나 나는 현재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단순히 지시하는 것을 넘어 그 객관적인 사회적 특징들 또한 지적할 수 있는 더욱 구조적인 명칭을 선호한다)를 향한 역사적 이행의 묵시록적국면으로 들어섰다. 나의 목표는 이 정식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를 해명함과 동시에 (그 곳에서, 그리고 그 때에) “이 정식이 형성했던 바와 또한 (마르크스가 자신의 위대한 저작에서 접근했으나 그 해답을 내놓지는 못 하고 남겨둔 문제들로부터) 이 정식이 지시하는 바를 이해하려 시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논문의 기저에 깔려 있는 나의 질문은 사실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이 문제들은 오늘날 더욱 명료해졌는가? 또는 정반대로 이 문제들의 미스터리는 더욱 해명하기 어려운 것이 되었는가? 마르크스가 제시한 이 정식의 해석에 관한 모든 질문들이 어떠한 의미에서는 쥐들의 비판이 갉아 먹도록 내버려둘[각주:2] 정도의 가치밖에 없는 이미 지나간 과거에 속할 뿐인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하지만 심지어 그런 경우라 할지라도, 마르크스의 저작이 우리의 역사 전체에서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에 이르기까지] 차지하고 있는 엄청난 위치를 고려했을 때, 그리고 또한 이 저작이 혁명의 희망을 위한 의거점으로서 혹은 지배적인 사고를 거부할 수 있게 해주는 도구로서 행사하는 영향력을 고려했을 때, 이에 대한 엄밀한 검토에 착수할 가치가 있을 것 같다. 만일 우리가 마르크스를 장례를 치러 묻어주어야 한다면(복음서는 죽은 자들은 죽은 자들이 묻어주도록 하라라고 말했다), 우리는 어떻게 그리고 왜 마르크스의 장례를 치러야 하는지를 알아야만 한다

 

이 정식이 등장하는 직접적인 맥락에서부터 출발하자. 그리고 이 정식에 선행하는 것과 이 정식 뒤에 바로 따라 나오는 것을 (원어로[독일어로]) 복원함으로써 시작해보자[각주:3].

 

이제부터 수탈되는 것은 자영 노동자가 아니라 많은 노동자를 착취하고 있는 자본가들 자신이 된다[Was jetzt zu expropriieren, ist nicht länger der selbstwirtschaftende Arbeiter, sondern der viele Arbeiter exploitierende Kapitalist]. 이 수탈은 자본주의적 생산 자체의 내재적 법칙들의 작용을 통해, 또 여러 자본의 집중을 통해 진행된다. 하나의 자본가는 언제나 다른 많은 자본가들을 타도한다. 이 집중[즉 다수 자본가에 대한 소수 자본가의 수탈]과 함께 갈수록 대규모화하는 노동과정의 협동조합적 형태[forme coopérative 옮긴이], 과학의 의식적·기술적 응용, 토지의 계획적 이용, 노동수단의 공동 사용, 결합적·사회적 노동[travail social combiné - 옮긴이]을 생산수단으로 사용함에 따른 모든 생산수단의 절약, 세계 각 국민의 세계시장 네트워트 속으로의 편입 등등으로 말미암아 자본주의 체제의 국제적인 성격이 발전하게 된다. 이 전화과정에서 생기는 모든 이익을 가로채 독점하는 대자본가의 수가 끊임없이 감소해감에 따라 빈곤·억압·예속·타락 그리고 착취의 정도는 오히려 증대된다. 그러나 끊임없이 팽창하는, 그리고 자본주의적 생산과정 자체의 메커니즘을 통해 훈련되고 결합되며 조직되는 노동자계급의 저항도 증대해간다. 그런데 자본독점(Kapitalmonopol)은 자신과 함께[또 자신 아래에서] 개화한 이 생산양식의 질곡으로 작용하게 된다. 생산수단의 집중이나 노동의 사회화는 마침내 자본주의적 외피와는 조화될 수 없는 시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외피는 폭파된다.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의 조종이 울린다. 이제는 수탈자가 수탈당하게 된다[Die Expropriateurs warden expropriiert].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 생겨난 자본주의적 취득양식[즉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은 자신의 노동에 기초한 개인적인 사적 소유에 대한 제1의 부정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생산은 자연과정의 필연성에 따라 그 자신의 부정을 낳는다. 즉 부정의 부정인 것이다[Es ist Negation der Nagation]. 이 부정은 사적 소유를 다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시대의 획득물[즉 협업과 토지 공유 및 노동 자체에 의해 생산되는 생산수단의 공유]을 기초로 하는 개인적 소유(individuelle Eigentum)를 만들어낸다. 개인의 자기 노동에 기초한 분산적인 사적 소유에서 자본주의적인 사적 소유로의 전화는 물론 사실상 이미 사회적 생산 경영에 기초를 두고 있는 자본주의적 소유에서 사회적 소유로의 전화에 비하면 비교도 되지 않으리 만큼 지리하고도 가혹하며 어려운 과정이다. 전자에서는 소수의 횡탈자[usurpateurs, 탈취자 옮긴이]에 의한 민중의 수탈이 문제였지만, 후자에서는 소수의 횡탈자에 대한 민중의 수탈이 문제이다.[각주:4][각주:5]

 

이 텍스트에서 독일어권 독자들을 분명 놀라게 할 지점은 (이 텍스트에서 우리는 마르크스주의에 특징적인 변증법적 운동과 경제적, 역사적, 법률적 범주들의 활용 사이의 경탄스러운 수준의 결합에 대한 명확한 예를 발견한다) 프랑스의 정치적 어휘에서 온(“exploitieren”, “expropriiren”, “Usurpatoren”) “외래어들”(Frendwörter)의 지속적인 활용인데, 당연히 마르크스가 활용할 수 있었던 (이 단어들에 대응되는) 독일어 단어들이 존재한다. 나는 이것이 문체의 방만함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자본” 1권 전체(여러번 다시 쓰기를 반복하면서, 마르크스는 자신의 생전에 1권만을 출판했다)는 독일어에 있어 그 용어의 정확성과 독일어 문체에 대한 지속적인 탐구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분명히 자본에 있어서 마르크스는 학자로서, 그리고 정치평론가로서 뿐만 아니라 문필가의 자격으로도 이 텍스트를 집필하고 싶어했다. 게다가 이 단락들은 자본전체의 정치적 결론을 구성하며, 그렇기 때문에 이 단락들이 사회주의 전통에서 기억되고 활용되어 왔을 정도로 중요한 단락들이라는 점에서 문체의 방만함 때문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하지만 곧바로 다음과 같은 난점이 등장한다. 이것이 정말로 결론을 구성하는 것이 맞는가?

 

분명히 이는 결론을 구성한다. 수탈자의 수탈의 변증법”(마르크스가 부정의 부정으로 제시한)이 자본주의가 (폭력적인 방식으로) 완수하는, 그리고 (사적 소유의 형태들과 이 사적 소유에 조응하는 노동에 행사되는 권력의 형태들을 폐지한다는 조건에서 공산주의가 자신의 것으로 다시 취할) 경제의 사회화로 나아가는 (사회적 관계의) 변형과정으로 마르크스가 기술했던 바의 결말(aboutissement)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마르크스가 고도로 상징적인 방식으로 수탈자의 수탈이라는 테제에 공산주의자 선언을 인용하는 각주 하나를 추가한 것이다(“공산주의자 선언20년 전, 그러니까 1847년에 엥겔스와 함께 집필하였으며, 사실을 말하자면 유의미한 수준으로 일반대중에까지 유포된 적은 없다).

 

부르주아지가 무의지와 무저항의 담당자인 공업의 진보는 경쟁을 통한 노동자들의 고립화 대신에 연합체[association 옮긴이]를 통한 노동자들의 혁명적 단결을 가져온다. 이리하여 대공업의 발전과 더불어, 부르주아지가 생산하며 생산물들을 취득하는 기초 자체가 부르주아지 발밑에서 빠져나간다. 부르주아지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무덤을 파는 사람들을 생산한다[Sie produziert also vor allem ihre eignen Totengräber]. 부르주아지의 몰락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는 똑같이 불가피하다. () 오늘날 부르주아지에 대항하고 있는 모든 계급 가운데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참으로 혁명적인 계급이다. 그 밖의 계급들은 대공업과 더불어 쇠퇴하고 몰락하며, 프롤레타리아트가 대공업의 가장 고유한 산물이다. 중간신분들, 즉 소산업가, 소상인, 수공업자, 농민 따위 이들 모두는 중간신분으로서의 자기 존재가 몰락하지 않도록 부르주아지와 싸운다. 따라서 그들은 혁명적인 것이 아니라 보수적이다. 더군다나 그들은 반동적이며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리려 애쓴다[sie sind reaktionär, denn sie suchen daß Rad der Geschichte zurückzudrehen].”[각주:6][각주:7]

 

이는 예전에는 예언에 불과한 것으로 보였던 것이(그런데 1848년 혁명이 유혈낭자하게 패배한다는 사실은 이 예언에 대한 확정적 비판을 곧바로 가져다줄 것이다) 사실은 미래에 대한 하나의 완전히 현실적인 관점이라는 사실을 지시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마르크스가 자신의 정치경제학 비판이라는 기반 위에서 설명하는 자본에서의 자본주의적 축적의 역사적 경향에 대한 분석은 이 미래에 대한 하나의 관점에 이제는 과학적이고 이론의 여지가 없는 기초를 제공해준다. 자본주의 발전의 법칙들에 대한 인식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한 예고는 정확히 이 지점에서 조우한다. (사람들이 종종 혁명적 운동과 역사에 대한 과학적 이론 사이의 융합”fusion 또는 해후”rencontre로 지시하는) “마르크스주의(최악의 마르크스주의이든 최고의 마르크스주의이든) 정확히 이러한 주장(affirmation, 확인 또는 긍정) 위에서 구축된다

 

하지만이러한 독해 내에서 마르크스주의의, 그리고 더욱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근대 사회주의의 가장 거대한 수수께끼들 중 하나로 다가가기 위한 문을 열어주는 무언가의 종소리가 울린[각주:8]. 여기에서 이 종소리는 바로 매우 단순한 다음과 같은 사실, 즉 마르크스가 제시한 논증의 결말을 의미하는 이러한 혁명적 결론자본이라는 이 책의 맨 끝에 위치해 있지 않다는 사실을 뜻한다! 이 혁명적 결론은 [“자본” 1권의 마지막 편인 7자본의 축적과정] 24이른바 본원적 축적”(Die sogennante ursprüngliche Akkumulation)의 마지막 절인 7자본주의적 축적의 역사적 경향에 위치해 있으며, 24장에서는 소생산자들에 대한 수탈을 통해 형성된 자본주의의 폭력적 기원들이 다루어진다(이 수탈은 특히 자본주의의 고전적국가인 영국에서 산업혁명 이전인 16세기와 17세기에 행해진 것이다). 이 장은 심지어 마지막 장도 아니라서 이 뒤에는 근대 식민이론에 관한 25장이 따라 나오는데, “자본의 독자들이 이 장에 많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점(그리고 아마도 그 잘못)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마르크스의 논증의 ”[혁명적 결론’]맨 끝자리를 점하지 못 하게 하는 이러한 괴리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렇듯 세심하게 구성된 저작에서 이러한 괴리(décalage)(한 번 더 말하지만) 일종의 미숙함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는 이러한 내용[즉 괴리]과 양립 가능한 해석이 필요한 것이다[각주:9]

 

우리는 자본” 1권의 결론이 사실은 자본이라는 저작 전체의 진짜 결론이 아니라는 식으로 단순하게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 마르크스는 1권 이외에도 (자신의 죽음 이후 초고 상태로 남은) 2권과 3권을 구상했었다는 식으로 말이다(마르크스 사후 엥겔스가 이 2권과 3권의 편집과 출판을 책임진다). 그리고 아마도 마르크스는 이 이 2권과 3권을 곧 출판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자본전체의 실질적인 교훈(leçons pratiques)2권과 3권의 출판을 통해 명확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예상과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난다. 사실, (대영도서관British Library의 열람실에서 보낸) 수년간의 연구가 일관된 형태의 첫 결과물[, “자본” 1]로 이어졌을 때, 마르크스는 그가 이 1권에서 자본전체의 결론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들의 효과 하에서의 자본주의의 지양과 상관적인 그러한 결론-  예상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국제노동자운동이 자신만의 조직인 International Workingmen’s Association(오늘날 1인터내셔널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마르크스는 이 조직의 서기였다)을 갖추게 된지 거의 3년이 지나 자본” 1권이 출간되었던 만큼 [국제노동자운동을 위해] 이러한 결론을 예상하고 이를 이 운동에 제시하는 것은 마르크스에게 필수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바로 이 조직에게, 그리고 (이 조직을 통해서) 완연한 모습으로 발전한 프롤레타리아의 대의를 가슴 속에 품고 있는 투사들에게 자신의 논증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을 고려해본다면, “자본” 1권의 한 장 내에 그 결론들을 숨겨놓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지만 이렇게 어떠한 은폐[숨김]에 대해 암시함으로써 우리는 또 하나의 다른 가설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가설이 오랫동안 나에게 만족스러운 것으로 보였었다는 점을 고백하고 싶다. 이 가설은 아주 단순하게 검열이 존재했었다는 점을 언급하는 것이다. 다른 혁명가들과 마찬가지로, 마르크스는 자신의 삶 내내 검열이라는 이러한 제도를 영리하게 다루어야만 했다. 마르크스는 필요한 경우 레오 스트라우스(Leo Strauss)가 후에 탄압의 시대에 글을 쓰는 기술[각주:10]이라고 불렀던 바를 활용했었다. “자본” 1권은 사전에 프러시아 검열기관에 자신의 출판물들의 허락을 맡아야만 했던 함부르크의 어느 출판사에서 1867년 출간되었다. 그래서 마르크스가 다음과 같이 생각했을 수 있다는 것이 있음직하지 않은 일은 아니다. 이 경찰 공무원들은 내 책의 처음과 끝만을 읽어볼 것이다. 그들은 내 책에서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 할 것이며 이 책이 인민들이 읽을 수 없는 단지 과학적인”[학문적인] 저작에 불과하다고 믿고 검열을 통과시켜줄 것이다. 하지만 투사들은 내 책을 더욱 자세히 읽을 것이다. 투사들은 그들의 희망과 그들의 정치적 목표를 직접적으로 말해줄 수탈자의 수탈의 예고를 내 책에서 발견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이러한 설명을 전혀 믿지 않는데, 검열 때문에 마르크스가 겪었던 말썽들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이제 나는 자본의 분석이 제시하는 결론에 대한 내재적 곤란(difficulté intrinsèque) -부정의 부정이라는 변증법적형태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곤란- 이 존재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자본주의적 발전의 역사적 경향이 초래하는 혁명적 결과(issue, 탈출구)에 대한 언표에 영향을 미치는 이러한 신중함은 위에서 언급한 내재적 곤란의 증상을 구성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곤란은 마르크스주의의 활용이라는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초래했는데, 그 효과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지워지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150여 년이나 흘렀음에도 자본은 차갑게 식은 텍스트인 것이 아니라 여전히 뜨겁게 살아 숨쉬는”(chaud) 텍스트이기 때문이다[각주:11]. 오늘날 사회를 변혁하기 위한 기획과 시도는 여전히 자본함께이루어지고 있다. 이 시도들이 청년 그람시의 유명한 표현을 따라 “‘자본에 반하는방식으로 (하지만 자본이 제시하는 분석과 예언에서 절대로 멀어지지는 않으면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각주:12]. 바로 그렇기 때문에 수탈자의 수탈이라는 정식에 숨겨져 있는 이러한 곤란, 그리고 심지어는 수수께끼의 근원으로 나아가 (알튀세르라면 다음과 같이 말했을 텐데) 불확실성(incertitude)과 불완전성(inachèvement)을 드러내주는 징후적 독해” -이 정식은 그 불확실성과 불완전성의 표지(signe)이다- 를 제시하려는 시도를 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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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내적 논증이 서로 양립 불가능한 여러 가지 결론들로 가닿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저작이 자신의 저자에 의해 미완으로 남겨진 저작일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완성할 수 없는(inachevable) 저작이라는 것이 바로 오늘날 내가 주장하고 싶은 테제이다[각주:13]. 나는 심지어 조금 더 멀리 나아가서, 마르크스는 자신이 이를 이해했던 한에서 희생자의 태도,  수동적인 태도로 이러한 결론내리기의 불가능성에 만족하지는 않았다고 제안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사유가 지니고 있었던 몇몇 대안들을 명백하게 보여지도록 남겨 놓음으로써 이 문제에 대해 능동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었으며, 이는 어떠한 면에서는 마르크스가 결론을 이끌어내는 일을 우리의 몫으로 남겨두면서 “‘자본을 미완성시켰다고 나로 하여금 말하게끔 이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우리는 문자 그대로 이해했을 때 수탈자의 수탈이라는 정식이 포함하고 있는 의미라는 문제로 돌아와 이 정식에 포개어져 있는 역사적이고 상징적인 다양한 흔적들을 해독해야만 한다

 

나는 수탈자의 수탈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단락들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다소간 독일어화된 일련의 프랑스어용어들의 등장이 지니는 이상한 점에 대해 이미 앞에서 언급했다. 독일의 트리어에서 태어나 프랑스의 영향을 많이 받은 라인란트 지역 -이 지역에서는 혁명의 시기와 제국의 시기에 대한 기억이 여전히 잔존하고 있었다- 에서 자란 마르크스는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말하고 쓸 수 있었다(그는 자신의 주요 저작들 중 하나인 1847년의 철학의 빈곤을 직접 프랑스어로 집필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자신의 몇몇 친구들(하인리히 하이네, 모제스 헤스)과 같이 (영국이 경제의 국가이고 독일이 철학의 국가이듯이) “프랑스는 정치의 국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자본에는 문화적 영향 또는 민족적 신화보다는 다음의 것이 더 많이 존재한다. “자본에서 집요하고 끈질기게 남아 있는 것은 19세기 전기의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들(생시몽주의자들, 푸리에주의자들, 블랑키주의자들)을 경유하여 혁명기간의 급진적또는 (proto)-공산주의적운동들(특히 바뵈프주의자들[프랑스대혁명 당시의] “과격파”)로부터 유래하는 담론이다. “수탈자”(expropriateurs), “착취자”(exploiteurs), “탈취자”(usurpateurs)라는 용어들에 우리는 이들과 매우 이웃해 있는 용어인 독점자(accapareurs)를 추가해야 하는데, 평등주의적 농민봉기는 이 용어를 통해 (처음에는 귀족과 교회의 토지를 팔아서, 그 다음에는 군대에 물자를 공급하고 이 공급에 수반하는 거래를 통해) 부를 축적한 신흥 부르주아 계급을 지칭했다[각주:14]. 그러므로  “공산주의자 선언에서 가져와 각주로 인용한 부분은 온전한 자신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 명시적이든 아니든, 이 인용은 정반대의 의미를 가지는 또 다른 폭력을 통해 하나의 폭력을 제거하는 혁명적 독재라는 관념을 (동시에, 하지만 대립되는 방향으로) 도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인용은 이미 과거가 된 부르주아 혁명의 급진적 경향들과 도래할 프롤레타리아 혁명, 그리고 이 미래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자신의 모델을 통해 표상하게 될 진보(progrès) 사이의 연속성을 동시에 표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연속성 사이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은 비현실적인 목표([직접]생산자들 사이의 평등)를 경제의 사회적 형태와 (이제부터 생산수단의 소유가 수행하는) “중앙집중적기능에 조응하는 역사적 필연성으로 변화시켰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활용했던 또는 심지어는 그가 발명해냈던 (“국제주의적인 의미의”) 혼합적 언어[독일어와 프랑스어 사이의 혼용]를 통해 제시한 이러한 첫 번째 해석의 결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어떠한 면에서 이러한 해석의 결은 가장 예상 가능한 해석의 결이고 사회주의 정당들(특히 볼셰비키들)자본을 가지고 행했던 활용에 가장 부합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해석의 결은 19세기와 20세기에 혁명이라는 개념의 활용을 기초지었던 위대한 신화의 근원을 형성하기 때문이다[각주:15]. 하지만 이 해석의 결은 마르크스가 활용했던 수사학적 문채(figure, 文彩)[각주:16], 수탈자의 수탈또는 어떠한 폭력의 수단들 자체를 (이 폭력의 한 형태에 반하는 방식으로전도하는 것(retournement)을 남김없이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이 지점에서, “순수한정치로부터 탈출하여 (로베르토 에스포지토가 토마스 만을 인용하면서 말하는) 우리가 비정치적인 것(l’impolitique, Das Unpolitische)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영역으로 진입하는 또 다른 의미차원을 개입시켜야 한다[각주:17]. 이는 (유대교와 기독교 메시아주의에 있어 공통적인) 해방에 대한 희망들이 가지는 공동의 토대로부터 기원하는 종교적 요소이며, 이 요소는 묵시록적이고 천년왕국론적인 운동들이 주기적으로 재생산하는 요소이다. 내가 예전에 지적한 바 있듯이[각주:18], 마르크스의 정식은 이사야서의 핵심적 정식에 대한 번역이다(이사야서는 바벨론의 노예가 된 이스라엘의 해방을 다루는 위대한 저서인데, 후에 이 책으로부터 기독교적 맥락에 따라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라는 테마와 임마누엘이라 불리우는 구원자의 메시아적 이름 또는 우리와 함께 하는 신이 등장한다). “이번에는 (너희들이 - 발리바르) 너희들의 압제자들을 압제할 것이다.”(vos oppresseurs seront opprimés [par vous] à leur tour)[각주:19] 메시아주의는 마르크스에게서 주기적으로 등장하는데, 특히 근본적으로 박탈당한 계급으로서 (자본주의적 착취와 계급지배의 모든 역사적 형태 둘 모두를 동일한 운동을 통해 앞으로 종결시킬) 프롤레타리아가 지니는 자신의 혁명적 임무를 환기시킬 때 그러하다[각주:20]. “자본결론에서 이 메시아주의가 집요하게 남아있다는 것은 이 결론이 본원적 축적에 관한 상당히 긴 분석 -이 분석에서 마르크스는 국가의 폭력을 기술하는데, 이 국가의 폭력을 통해 [직접]생산자들에 대한 수탈이 행해지며, 이 수탈은 자본의 축적을 위한 길을 열어준다- 이전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그만큼 주목할 만한 것이다. 이 본원적 축적이라는 이론적 발전에서 우리는 메시아적 유형의 또 다른 정식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 또 다른 정식은 폭력이 새로운 한 사회를 잉태하고 있는 이전 사회 전체의 산파라는 주장을 제시한다[각주:21]. 이 또 다른 정식은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에서 종말/목적의 폭력(violence de la fin) 기원의 폭력(violence des origines)[, 본원적 축적]과 비교하기 위해 이용된다. 그래서 이 두 가지 정식 모두를 함께 고려했을 때, 이 두 정식은 왜 부정의 부정이라는 관념이 단순한 논리적 의미만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급진적인 역사적 변혁의 특징과 기호 자체로서 법과 정치의 제도적 형태들의 해체(décomposition) -내가 방금 전에 비정치적인 것이라고 말했던 바- 를 상기시키는 것이기도 한지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각주: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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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역사적 경향에 대한 해석을 고유하게 묵시록적인 역사의 종말이라는 관념으로까지 밀어붙이는 이러한 독해가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하게 가능한 독해인 것은 아니다. 이 독해는 개량주의적인 독해 또는 최소한 진화주의적인(évolutionniste) 독해에 의해 이중화될 수 있는데, 이 독해 내에서 자본주의적 착취의 형태들은 전조(préfigurations)로서, 그리고 심지어는 집단적 전유 또는 연합의 잠재적인 도구(이 도구가 바로 도래할 공산주의의 형태를 구성한다)로서 나타난다. 이러한 가능성을 발견하기 위해, “수탈자의 수탈과 어떤 의미에서는 쌍둥이 형제와 같은 이론적 발전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고 소유의 형태들에 관한 변증법을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활용하는 그러한 이론적 발전을 자본” 3권에서[각주:23] 찾아내야만 한다. 이 이론적 발전이 금융자본이라는 테마계(thématique)와 맺는 관계 때문에 나는 이를 더욱 더 강조하는 것인데, 오늘날 이 이론적 발전은 아주 특별한 [이론적] 효력범위를 획득하게 된다[각주:24]

 

이는 자본주의 생산양식 그 자체 내부에서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제거하는 것이다[die Aufhebung der kapitalistischen Produktionsweise innerhalb der kapitalistischen Produktionsweise selbst]. 그러므로 이는 자기 스스로 파괴되는 모순이며, 생산의 새로운 형태로 나아가기 위한 단순한 이행국면으로 명백하게 제시된다. 또한 이러한 이행국면은 모순이라는 현상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몇몇 특정한 영역에서 이 모순은 국가의 개입을 야기시키면서 독점을 확립한다. 이 모순은 새로운 금융 귀족을, 즉 새로운 종류의 기생충들을 기획인, 설립인, 허울 좋은 이름일 뿐인 경영자[즉 생산을 관리하는 관리자로서의 역할을 전혀 하지 않는 경영자]라는 모습으로 탄생시키는데, 이 모두는 주식의 형성, 발행, 거래에 관한 절도와 사기의 체계일 뿐이다. 바로 여기에서 사적 소유의 통제를 받지 않는 사적 생산이 등장한다(). [이러한 사적 생산의] 성공은 (실패 또한 마찬가지이지만) 동시에 자본의 집중, 그리고 결과적으로 가장 폭넓은 차원의 수탈로 이어진다. 여기에서 수탈대상은 직접생산자로부터 소자본가 또는 중진자본가로까지 확장된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출발점은 바로 이러한 수탈이다. 이 수탈의 목표는 수탈을 실현하고 마지막에는 각각의 모든 생산수단의 소유자인 각각의 모든 개인을 수탈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생산수단은 사회적 생산이 발전되면서 사적 생산의 수단과 생산물이기를 멈추고 연합생산자들의 수중에 있는 생산수단으로 남아 (이 생산수단이 이 연합생산자들의 사회적 생산물인 것과 마찬가지로) 연합생산자들의 사회적 소유물이 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자본주의 체계 자체 내부에서 이러한 수탈은 사회적 소유의 몇몇 이들의 전유물로서 모순적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신용은 항상 이 몇몇 이들에게 순전한 사기꾼의 특징을 더욱 많이 부여한다(). 노동자들의 협동조합공장(usines coopératives) 그 자체는 이전의 형태 내부에서의 이러한 형태에 대한 최초의 단절을 표상한다. 비록 분명히 이 협동조합공장들 또한 이 공장들의 실제 조직 내 곳곳에서 현존하는 체계의 결함들 모두를 재생산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협동조합(coopératives) 내에서, 자본과 노동 사이의 모순은 제거된다. 비록 노동자들은 (연합체로서) 자기 자신의 자본가일 뿐이겠지만, 다시 말해 노동자들은 그 생산수단을 자기들 자신의 노동을 가치화하기 위해서 사용하겠지만 말이다(). 우리는 자본주의 기업을 주식회사로 간주해야 하며, 협동조합공장을 생산의 자본주의적 양식에서 집합적(collectiviste) 양식으로의 이행이 지니는 형태들로 이와 동일하게(하지만 자본주의 기업에서 모순은 부정적으로 해소되는 반면 협동조합공장에서는 긍정적으로 해소된다는 차이를 고려하면서) 간주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신용체계에 내재하는 특징이 지니는 두 가지 측면이다. 한 편으로, 자본주의적 생산의 동력을 발전시키는 것, 다시 말해 더욱 순수하고 더욱 괴물 같은 투기와 도박의 체계를 형성하기 위해, 그리고 사회적 부를 착취하는 이들의 수를 점점 더 제한하기 위해 타인의 노동을 착취함으로써 만들어지는 부의 축적이 존재한다. 다른 한 편으로, 새로운 생산양식으로의 이행형태를 구성하는 것이 존재한다. 바로 이 이중적 측면[Doppelseitigkeit]이 로우(Law)에서 이작 페레르(Isaac Péreire)에 이르는 신용의 주요 대변인들에게 (호감을 가질 수 있도록 조금은 완화된 의미의사기꾼과 예언자라는 이름이 함께 뒤섞인 그러한 특징을 부여하는 것이다[각주:25] 

 

이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내부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지양하는 것이며, 따라서 스스로를 지양하는 모순으로서, 그 모순은 일견 새로운 생산형태로 넘어가는 단순한 통과지점으로만 나타난다. 그런 다음 그 모순은 현상으로도 나타난다. 그것은 어떤 영역에서 독점을 만들어내고 따라서 국가의 개입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새로운 금융귀족을 재생산하는데, 이 금융귀족이란 곧 기획인, 발기인, 그리고 단지 명목뿐인 이사 등의 형태를 띤 새로운 종류의 기생계급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발기, 주식발행 그리고 주식거래 등과 관련된 사기와 협잡의 전 체계를 재생산한다. 그것은 사적 소유의 통제를 받지 않는 사적 생산이다. () 여기에서는 성공과 실패가 동시에 자본의 집중을 가져오고 따라서 엄청난 규모의 수탈로 이어진다. 이제 수탈은 직접적 생산자로부터 중소자본가들에게까지 널리 확대된다. 이러한 수탈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출발점이다. 그러한 수탈의 관철은 곧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목표이며 궁극적으로는 생산수단을 모든 개인으로부터 수탈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사회적 생산이 발전함에 따라 이들 생산수단은 사적 생산의 수단이나 생산물에서 벗어나, 결합된 생산자들의 수중에 있는 생산수단으로만 있게 되고, 따라서 그것은, 그것이 그 생산자들의 사회적 생산물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사회적 소유로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수탈은 자본주의 체제 내부에서는 소수에 의한 사회적 소유의 획득이라는 대립적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신용은 이들 소수자들에게 순수한 도박꾼으로서의 성격을 점점 더 부여해준다. () 노동자들 자신의 협동조합공장들은 낡은 형태 내부에서의 그 낡은 형태에 대한 최초의 타파이다. 물론 그것의 실제 조직 안에서는 곳곳에서 기존 제도의 온갖 결함들이 재생산되고 또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들 공장 내부에서는 자본과 노동 간의 대립이 지양되는데, 이것도 물론 노동자들이 연합체로서 그들 자신의 자본가가 되는 형태[즉 생산수단을 여전히 그들 자신의 노동의 증식을 위해 사용하는 형태]일 뿐이라는 한계는 있다. () 자본주의적 주식기업과 협동조합공장은 모두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 결합적 생산양식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형태로 간주되어야만 하는데, 이들 간의 차이는 하나는 자본과 노동 간의 대립을 적극적으로 지양하고 있지만 다른 하나는 소극적으로 지양하고 있다는 것뿐이다. () 신용제도에는 이중적인 성격이 내재해 있는데, 한편으로 그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추동력과 타인노동의 착취에 의한 치부방식을, 순전히 대규모의 도박과 협잡제도로 발전시키고, 사회적 부를 착취하는 사람의 숫자를 점점 더 소수로 제한한다. 그리고 또 다른 한편 그것은 새로운 생산양식으로의 과도적 형태를 형성한다. 이런 이중성으로 인해 로(J. Law)에서 페레르(I. Péreire)에 이르기까지 신용의 주요 대변인들은 협잡꾼과 예언자의 얼굴이 함께 뒤섞인 모습을 하고 있다[각주:26].

 

이 이론적 발전이 자본” 1권보다 덜 알려져 있기에 나는 여기에서 이를 매우 길게 인용했다. 이 이론적 발전은 결론으로 간주된 적이 전혀 없다. 그럼에도 이 정식화들은 결론에 가장 가까울 뿐만 아니라 중요한 지점들에서 결론과 동일한 것이다. 이는 수탈(expropriation)(프랑스어와 독일어로 모두 동일하게 expropriation인데, 이제 이 수탈에는 연합이 대립하게 되며, 이 연합은 마르크스에게 있어 공산주의의 가장 보편적인 이름들 중 하나가 된다)과 동일한 용어법을 활용하고 있으며,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들의 발전으로 인한 자본주의 폐지의 필연성을 표현하는 변증법적 전도와 동일한 문제설정을 지니고 있다. 특히 이는 혁명적 변화의 본질이 개인들(이 개인들은 자신들의 생존수단과 자신들의 생산능력으로부터 소외Enfremdet되어 왔다)에 의해 수탈을 전유(Aneignung) -자신들의 생존수단과 생산능력 자체에 대한 전유- 로 전도하는 것이라는 관념과 동일한 관념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는 또 다른 종말론적인 정식에 따라 자기 자신의 묘를 파는 이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자본” 1권의 정식화들에는 본질적인 두 가지 차이점이 존재한다. 첫 번째 차이점은, 은행신용의 금융메커니즘을 원용하면서 (자본주의 생산양식 내부에서부터) 공산주의의 전조를 알리는형태들을 자본주의의 제도들 그 자체 내에서 연구함으로써 마르크스가 자본” 1권보다 더욱 멀리 나아간다는 점이다. 두 번째 차이점은, 여기에서 공산주의의 전략이 이질적인 두 가지 역사적 발명들 -이 이질적인 두 가지 발명들 모두는 사회화의 형태들(또는 사적 소유의 지양)로 간주될 수 있다- 사이의 결합 또는 화해의 지평에서, 하지만 반정립적인 이유들로 인해( 화폐의 사회화 노동의 사회화),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 둘 모두를 함께 고려했을 때, 이 모든 것은 하나의 ”(정의해 나가야 할, 또는 최소한 구성해 나가야 할)이 다음의 두 가지 대립항을 함께 유지할 수 있을 때에만 자본주의의 지양이 가능하다는 점을 의미한다. 계급들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즉 공산주의]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것(금융), 그리고 현재의 조건들 내에서 이러한 사회에 가능한 한 가장 가까이 근접해 있는 것(노동자적 협동조합coopératives). 하지만 마르크스는 이러한 힘의 본성에 대해, 그리고 이 힘이 활용해야 할 그 수단(국가적 수단이든 비-국가적 수단이든)에 대해 우리에게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수탈자의 수탈의 이러한 두 번째 판본은 현재 가장 많은 현재성을 담지하고 있는데, 이는 비단 이 판본이 변형태”(variante, 변수) 또는 이전의 메시아적 담론에 대한 대안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 두 번째 판본이 현재의 또는 최근의 몇몇 사회주의적 기획에 있어 일깨워줄 수 있는 그러한 반향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르크스가 상호 근접시키기를 원했던, 또는 융합하기를 원했던 이 두 항들이 사실은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 분리된 채로 남아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협동조합이는 관념(또는 오늘날 안토니오 네그리나 다른 이들의 이론화 작업의 전개 속에서 등장하는 새로운 공통체”nouveaux communs라는 관념)은 매우 생생히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다[각주:27]. 하지만 역설적으로 금융자본주의의 구조들에 대한 혁명적활용이라는 관념 또한 만만치 않게 생생히 살아 숨쉬고 있다[각주:28]. “연기금이 미국 은행과 미국 헤지펀드(hedge funds)를 위한 투기적 성격의 기금의 주요 원천이 되었을 때, 몇몇 사회주의 이론가들이 [소액]주주들의 집합체로 재결합된 임노동자들이 자본주의를 매입”(rachat, 되사기)해야 한다고 진단하거나 제안하는 모습을 우리는 최근에 보았다[각주:29]. 그리고 최근 들어 우리는 유동성개념에 주목하는 일군의 마르크스주의 또는 포스트-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이 주식시장의 회로 내부에서 시민들이 권력을 쟁취할 수 있는 전략들을 세공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각주:30]. 이러한 식으로, 마르크스가 발명한 변증법에 대한 (“거대한”[위대한] 혁명적 전통과 비교하자면 사소한 형태의) 개량적인 또는 더 좋게 말해 변혁적인(transformiste) 독해가 소묘된다. 나는 이것이 이론 내에서의 변동뿐만 아니라 사적소유와 집합적”(collective) 소유라는 반정립 내에 객관적으로 각인되어 있는 하나의 대안과도 관련된 것이라고 분명히 생각한다. 하지만 현재를 위한 교훈을 이로부터 이끌어내기에 앞서, 나에게는 자본주의의 경향에 대한 표상들(우리가 마르크스의 텍스트에서 읽어낼수 있는)에 대한 기술(tableau)을 조금 더 복잡화시킬 필요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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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텍스트가 끊임없이 재정식화 해야만 하는 모든 것 이 텍스트는 자본과 노동의 변증법이 자신의 계기들을 순서에 따라 정리/배치해야 한다는 사실로 인해 이 모든 것을 끊임없이 재정식화 해야만 한다- 을 매우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자본의 중심적인 테마계(thématique)는 바로 모순 갈등(또는 적대) 사이의 절합이다[각주:31]. 모순은 경제의 기능작용(fonctionnement) 내에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그리고 모순을 주기적으로 위기 속에 몰아넣는 이러한 경향들을 대립시킨다[각주:32]. 갈등은 계급들 사이에서(그러니까 무엇보다도 자본주의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 또는 노동자계급 사이에서) 또는 이 계급들 내의 분파들사이에서 생산된다. 분파들은 그들의 적대적 이해관계 때문에 생산의 중심 그 자체 내에서 또는 사회적 삶의 서로 다른 영역들 내에서 직접적으로 대립한다. 하지만 (변형 또는 단절로 향하는) “역사적 경향이 존재하기 위해서, 모순들(그리고 위기들)은 갈등의 강화로 이어져야 하며, 갈등은 갈등의 악화(aggravation) 또는 정반대로 모순의 전위로 이어져야 한다. 역사에 대한 정치이론으로서, 마르크스의 이론은 이와 다른 대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전혀 아니다. 그리고 내가 인용한 텍스트들이 다루고 있는 것이 이러한 절합 또는 이 절합의 효과를 결정하는 조건들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관점을 확대해 본다면, 우리는 대안적인 가능성들, 심지어는 서로 분기하는(divergentes) 가능성들이 또 다시 출현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마르크스가 노동일에 관해 집필한 상당히 긴 장[각주:33]은 생산을 위해 소비된 노동력과 비교하여 생산물의 가치의 초과(excès)로 정의되는 절대적 잉여가치”(absoluter Mehrwert) 개념(notion)(다시 말해, 노동자계급의 소비수단을 생산하기 위한 필요노동의 양 -오늘날 우리가 실질임금이라고 부르는 바- 과 등가적인 방식으로 비교했을 때 상품생산을 위한 사회적 필요노동의 초과시간)을 예증하는 데에 만족하지 않는다[각주:34]. “절대적 잉여가치라는 개념은 이러한 잉여가치의 비율”(Rate des Mehrwerts)이 자기 자신을 자본의 모순으로 이끌고 가는(다른 이유들보다도 특히 이 적대의 존재가 노동력의 소진과 노동자계급의 만성적인 과소소비를 함의하기 때문에) 그러한 항상적 적대가 가지는 쟁점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갈등 내에서 자본의 이해관심은 잉여노동(Mehrarbeit)의 증가, 그러니까 매일매일의 노동시간(또는 주당 노동시간이나 연간 노동시간, 또는 생존을 위해 필요한 최소 노동시간)의 모든 한계를 넘어선 연장이다. 반대로 노동자계급의 이해관심은 노동시간의 제한인데, 이러한 제한은 부불노동의 비율을 감소하고 살아 있는 노동력을 그 소진으로부터 보호하는 결과를 이끌어 낸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갈등을 연장된 내전”(“ein langwieriger Bürgerkrieg zwischen der Kapitalistenklasse und der Arbeiterklasse”)으로 기술한다[각주:35]. 마르크스는 19세기 전기 내내 영국에서 정상노동시간에 대한 요구를 둘러싼 갈등에서 이러한 갈등이 어떻게 세력관계를 변화(évoluer)시켰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변화는 자연스럽게 많은 수의 요소들을 개입시키는데, 특히 [(1)] 노동자의 조직화 정도(노동자들은 폭력적 압제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노동조합 구성의 권리를 위해 이 조직화를 활용한다), [(2)] “공장감독관의 보고서와 (그 당시 막 출현했던) 노동사회학의 영향을 받은 여론의 상황, [(3)] 자본가들 전체의 이해관계(하지만 이 [계급구성원으로서의] 자본가들은 개별 기업가들과 동일한 인물은 아니다), 그리고 특히 마지막으로 [(4)] 계급투쟁을 조절”(réguler)하는 기능, 그리고 용인 가능한 한계 밖으로 자본주의의 모순들이 벗어나지 않도록 관리(ramener)하는 기능을 자임하는 국가. 분명히 흥미로운 점은 역사적인 몇몇 조건들이 변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기술(description)(특히 노동법의 확립, 노동조합의 합법화, 사회의 민주화를 통해 자본주의의 중심부에서 다소간 제거되었던 노동력 착취의 야만적인형태들이 주변부로 옮겨갔다는 점에서) 그 현재성을 전혀 잃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이는 사회적 투쟁과 노동조합의 힘이 세계화된 경쟁에 의해 박살이 나고 개량주의적 국가[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 또는 (발리바르 식으로 말해) 국민-사회국가 또는 (데이비드 하비 식으로 말해) 착근된 자유주의국가]가 전투적인 신자유주의로 개종함에 따라 이 야만적 형태들이 중심부 되돌아오기 이전의 이야기이지만 말이다

 

이러한 논리에 조응하는 경향개념은 무엇일까? 여기에서 또 다시 개량 또는 개량주의에 대해 말하는 것이 매혹적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세력관계의 부침(fluctuations, 변동)을 고려했을 때, 마르크스의 단어를 다시 취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 , 이는 어떤 때는 극단으로 치닫기도 하고 어떤 때는 반대로 사회적 타협의 한계 내로 되돌아가기도 하는(유럽에서 사회민주주의는 이 사회적 타협을 위해 많은 노력을 쏟았다) “내전”(또는 다소간 완화되었으며 표면적인 사회전쟁)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내전은 수탈자의 수탈의 표상(그리고 그 표상의 이러저러한 변형태들)과는 반대로 이미 결정된 종말/목적(fin)을 가지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마르크스에게 갑작스레 나타나는 것은 우리가 계급투쟁과 그 결과에 대한 마키아벨리적개념화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또 다시 한 번 더 마르크스가 반정립적인[어떠한 항을 다른 항에 대립시키는 안티테제적인] 관점을 발전시켰다는 사실은 놀라운 것이다. 이 반정립적인 관점을 미간행된 텍스트(하지만 오늘날에는 매우 잘 알려진)에서 새롭게 다시 찾아보아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는 자본미간행된 장”, 1863-1865년 초고의 한 단편(그러므로 이 초고는 1859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Zur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자본” 1권 사이의 매개가 되는 초고이다)을 말하는 것인데, 마르크스는 이 장을 1867년에 출간된 자본” 1권에 통합시키지 않았다. 마르크스의 플란에 따르면[각주:36], 이 장은 자본” 1권의 마지막 편(section)으로 구성되어야 했으나 그러지 못 했다(또는 마르크스주의의 또 다른 전문용어를 따르자면, 마지막 ”chapitre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다시 말해 이 장은 내가 위에서 언급했던 현재의 결론격의텍스트[24이른바 본원적 축적의 마지막 절인 7자본주의적 축적의 역사적 경향’] 이후에 위치해야 했다는 것이다). 이 장의 주석가들과 사용자들은 왜 마르크스가 1867년 자신의 최종 집필에서 이 이론적 발전을 자본” 1권에 통합시키지 않았는지에 관한 수 많은 논쟁을 지금까지 전개하고 있으며, 이러한 논쟁은 한 세기가 넘도록 이 자본” 1권의 수용과 이해의 방식을 결정하고 있다[각주:37]. 이 주석가들과 활용자들은 이 논쟁에 마르크스의 이론적 작업방식에 관한 자신들 각자의 해석경향과 이해를 투여하고 있다. 나의 경우를 말하자면, 다른 요소들에 대한 선입견 없이, 나는 그 결정적인 이유가 자본주의의 변화 경향(tendance d’évolution) -모순과 갈등 사이의 절합 또는 자본주의의 변화와 계급투쟁의 가능성 사이의 절합과 관련한 이 장의 분석들로부터 도출되는 자본주의의 변화 경향-  허무주의적 특징과 관련된다고 사고하고자 한다. 정말로 우리는 여기에서 자본에 의한 노동력의 형식적 포섭”(formale Subsumption) -이 형식적 포섭 내에서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전문적 능력에 기초해 있는, 그리고 그들의 착취에 대한 저항과 해방의 기획을 배양할 수 있는 상대적 자율성을 보존한다- 에서 실질적 포섭”(reale Subsumption) -이 실질적 포섭 내에서 기술체계는 (기계화와 노동의 조직화[분업화]라는 수단을 통해) 노동력을 자신 안으로 완전히 통합시키며”, 이 노동력을 자본에 예속되지 않는다면 아무 쓸모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으로 자본주의가 변화한다(évolue)는 관념에 관한 이론적 발전(게다가 비교할 바가 없을 정도로 탁월한)을 발견한다[각주:38]. 심지어 우리는 이후에 대중소비사회와 이 대중소비사회가 만들어내는 욕구/필요의 소외에 관한 이론가들 곁에서 굉장한 행운을 경험하게 될 그러한 관념이 소묘되는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자본주의는 생산과정을 조직화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노동자의 삶과 일상적 생존을 상품과 이윤의 법칙에 종속시킴으로써 삶과 일상적 생존의 재생산 자체까지도(이 삶과 일상적 생존의 재생산은 보완적인 하나의 산업”[자본” 2권의 재생산표식을 따르자면 소비재 생산영역인 ‘2부문’]을 형성한다) 조직하기에 이른다는 관념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질적 포섭 뿐만 아니라 일종의 자발적 예속”, 즉 시민들(노동자든 아니든)의 존재 자체에 대한 자본의 완전한 통제/관리(contrôle exhaustif)라는 일종의 총체적 포섭에 관해서도 말할 수 있게 된다[각주:39]. 그러므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발전에 관한 자신의 분석에서 절망스럽게도 이 자본주의가 전체주의적 체계[즉 완전한 통제/관리에 기반한 체계]가 될 것이며, 이러한 체계에서 -계급투쟁이 자본주의 자체에 의해 사전에 도구화되거나 자본주의에 의해 (그리고 필요한 경우에는 폭력에 의해) 통제/관리되기 때문에- 이 계급투쟁이 무력해지면서 거세당할 [각주:40]이라는 점을 어렴풋이 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우리가 노동일에 관한 장에서 방금 읽어냈던 항상적 내전과 절대적으로 반대되는 것이며 분명히 자본주의의 모순들이 산출하는 혁명적 결론(issue, 탈출구)의 반정립[안티테제]이다.       

 

방금 우리가 살펴보았던 이러한 조건들에서 우리는 마르크스가 이러한 논증을 억압하기를 더 원했거나 또는 그에 대한 검토를 나중으로 미루기를 더 원했다고, 그리고 마르크스가 이 논증을 낙관적인결론으로 -이 낙관적인 결론에서 최후의 순간에(in extremis) 소유관계의 변화경향(tendances d’évolution)은 그 세속적 변형태 내에서 또는 그 메시아적 함의를 지니고서 정치혁명의 시나리오 또는 권력쟁취의 시나리오를 허락한다- 대체했다고 이해(또는 상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에는, 우리가 이 모든 대안적인 결론들(마르크스 자신이 확실히 불균등한 방식으로 허락했음에도 어쨌든 자신의 저작에서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일련의 전략적 관점들에 도달하게 된다. 이 일련의 전략적 관점들에서, “수탈자의 수탈”(그 자체로 두 가지 독해가 가능한[각주:41])이라는 시나리오의 이편과 저편에서 연장된 사회전쟁이라는 정치적 시나리오와 총체적 포섭/복종이라는 허무주의적 시나리오가 동시에 등장한다. 결국 지금까지 설명한 바가 오늘날의 우리에게 있어 “‘자본의 저자 마르크스그 자체인 것이다. 훨씬 불명확하지만, 그럼에도 마르크스주의적전통에서 제시한 마르크스보다 훨씬 더 풍부한 그런 마르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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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결론에 대한 좋은 독해(bonne lecture, 올바른 독해)를 찾고자 하는 독자들을 내가 당혹스럽게 만든 것은 아닌지, 그리고 심지어는 아마도 현학적인 문헌학적 고찰들을 통해 독자들을 질리게 만들어 버린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만일 혹시라도 당혹스럽거나 질려버린 것이 아니라면, 그 경우 독자들은 어떻게 결론을 내려야 할까? 내 생각으로, 독자들은 (역사가 변화시켜 왔던 바 그 자체로서의) “자본이 미완의 텍스트일 뿐만 아니라 열린 작품/저작(움베르토 에코가 열린 예술작품에 대해 말했던 것처럼)이기도 하다는, 그래서 순전히 이론적인 것만은 아닌 다양한 문제들을 열어젖히는 하나의 작품/저작이기도 하다는 결론을 내려야 할 것 같다[각주:42]. 사실 우리는 자본주의 분석에 있어 마르크스가 이 자본주의의 경향들과 그 경향들의 잠재적인 정치적 결론(issue, 출구)을 해석하면서 끊임없이 분기했음을(bifurquer)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예상하고 있는 이러한 [복수의] 분기들은 순수한 하나의 주관적인 의미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분기들은 가능성들, 게다가 자본주의의 변화(évolution) -이 변화의 실현은 자본주의의 역사가 처한 조건들과 자본주의의 역사가 생산해내는 효과들에 달려 있다- 에 있어서의 실제 경향들에 조응하는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마주하고 있는 자본주의는 끝없는 축적의 논리, 그러므로 결국 이윤율의 극대화라는 논리 -이를 통해 마르크스는 자신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한 개념을 주조해 냈다- 에 의해 항상 지배되고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제도들과 그 사회형태들은 상당히 변화하였는데, 특히 이 자본주의가 완전히 세계화되었기 때문에([긍정적 통과점으로서의] 혁명을 대신해 등장하는 [부정적 통과점으로서의] 식민화에 대한 통찰들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는 이에 대해 진정 사고하지는 못 했었고, 그래서 마르크스의 몇몇 후계자들이 마르크스에 반하여 이 자본주의의 세계화에 대한 자신들의 주장을 제시해야만 했었다[각주:43]), 그리고, 아마도 심지어는 사회주의의 경험들을 자신의 현대화를 위한 재료로 활용하면서, 이러한 세계화의 끝에서 이 자본주의가 완전히 금융화되었기 때문에(하지만 자본주의는 자신의 위기의 메커니즘을 금융화를 통해 심원하게 변화시키면서도 이 위기를 제거하지는 않는다) 그러하다(나는 점점 더 자본주의의 금융화가 사회주의의 경험들을 활용한다는 이러한 가설을 따르게 되는데, 이는 우리가 현재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바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보인다). 포스트-역사적이고 심지어는 포스트사회주의적인 자본주의는 몇몇 측면에서 극복할 수 없고 물리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이 자본주의는 수탈자의 수탈과 같은 테마들 주변에서 혁명적 변혁의 상상계가 취하는 배경으로서의 역할을 해왔던 계급투쟁의 고전적 형태들과 표상들을 해체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자본주의가 안정적이거나 평온한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이 자본주의는 극도로 폭력적이며, 자본주의가 초래하는 고유한 전쟁의 양태들과, 그리고 지식노동과 육체노동 사이로, 정주와 이민 사이로, “유용한인간과 일회용인간 사이로, “능력 있는인간과 부적합한인간 사이로 인류를 분할하는 그 양태들과, 그러므로 인민들 사이에서, 그리고 개인들 사이에서 보편화된 경쟁의 그 양태들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포스트-마르크스주의자에게 있어 가장 중대한 문제는 어떻게 이 자본주의가 지니고 있는 분기의 가능성들과 대안들을 정의하고 구체화시킬 것인지를 인식하는 것이다. 정치적인 만큼이나 지적인 이러한 작업을 위해, 마르크스가 이러저러한 순간에 다소간 완전한 방식으로 채택했던 길들에 대해 성찰해보는 것은, 비록 그것이 충분하지는 않더라도,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경험으로 남아 있다. 우리는 마르크스의 작업을 다시-만들어야(refaire) 하지만, 이러한 개조(refonte)에 있어서 우리는 마르크스의 작업을 마치 좋은 길동무와 같이 우리 곁에서 끊임없이 만나게 된다[각주:44]. [

 

 

[옮긴이: 옮긴이가 위에서 언급했던 다섯 가지 텍스트에서 발리바르가 행한 마르크스 독해를 조금은 도식적인 방식으로, 그러니까 인식을 위해 계발적인(heuristique) 방식으로 정리해 보자면(이는 말 그대로 인식을 돕기 위한 구분일 뿐이라는 점에 유의하자), ‘수탈자의 수탈은 마르크스의 두 가지 발견에 조응하는 두 가지 형태의 자본주의 비판, 그리고 이 두 가지 형태의 자본주의 비판에 조응하는 두 가지 형태의 공산주의적 가설 중 두 번째 계열에 대응되는 것이다. ‘수탈자의 수탈에 관하여라는 텍스트 상으로 보자면, ‘수탈자에 대한 수탈로서 총체적 포섭/복종’[(1)]이라는 허무주의적 시나리오가 첫 번째 계열에, ‘수탈자의 수탈로서 연장된 사회전쟁’[(2)]이라는 정치적 시나리오가 두 번째 계열에 대응되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두 가지 발견”’이라는 텍스트에서 조금 인용해보자.]

 

이접적 종합의 방법에 관한 고찰을 지나, 이제는 내가 이접적 종합이라고 부르는 바의 내용으로 들어가기 위해 마르크스의 한 텍스트에 대한 환기로부터 출발해보자. “자본” 1권의 출판 당시 쓴 1867424일 엥겔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마르크스는 자신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아담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르도의] 정치경제학과 비교하여 자신의 저작이 지니는 새로움을 구성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자본주의 비판의 기초를 구성하는 것을 자세히 설명한다. “제 책에서 가장 뛰어난 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첫 번째 장에서부터(그리고 이 첫 번째 장 위에 사실들facts에 대한 모든 이해intelligence가 기초해 있죠) 제가 한 편으로는 사용가치로, 다른 한 편으로는 교환가치로 표현되는 노동의 이중적 성격을 명확히 한다는 사실. (2) 이윤, 이자, 지대 등등으로서의 개별형태들과는 독립적으로 잉여가치(survaleur, Mehrwert)를 취급한다는 점. “자본” 2권은 이에 대한 증명을 제시할 것입니다. 이 개별형태들을 끊임없이 그 일반형태와 혼동하는 고전경제학에서 이 개별형태들을 취급하는 방식은 정말 잡탕(olla potrida) 만들기에 불과합니다.”[각주:45] 우리는 이 편지에서(마르크스는 이 편지에서 자본의 비판가들이 이 점을 파악하지 못 했다는 점에 불만을 표한다), “자본아돌프 바그너의 정치경제학 논설에 대한 주석” -자신이 죽은 해인 1883년에 이 문제에 관하여 그가 내린 최종적인 결론[각주:46]에서 마르크스가 행했던 일련의 동일한 언급들을 다시 발견할 수 있다. 첫 번째 점이 구체적 노동/추상적 노동의 분할과 사용가치가치”(그 가치의 크기는 교환가치로 표현된다)라는 상품의 두 가지 요소들사이의 평행성과 관련된다는 점을 명확히 하자. 고전정치경제학은 사용가치교환가치사이의 구분은 인식했지만, 노동의 두 가지 특징들에 대한 구분은 마르크스에게만 고유하게 속하는 것이며, 또한 바로 이 노동의 두 가지 특징들에 대한 구분이, 무엇보다도 사용가치를 한 편으로 분리해 놓음으로써, (교환) 가치 내에서 그 실체와 형태를 구분할 수 있도록, 그 다음으로 가치형태를 교환 내에서 주어지는 사용가치의 관점에서 가치의 크기의 표현으로 구성할 수 있도록, 마지막으로 이로부터 일반적 등가물로서의 화폐의 구성을 연역하고 상품 물신숭배” -물신숭배 속에서 개인들의 노동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들은 사물들 자체(상품과 화폐) 사이의 양적 관계들로 표상된다- 에 대한 그의 분석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두 번째 지점과 관련하여,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의 노동을 착취하는 다양한 전략들을 수단으로 하는 잉여노동(Mehrarbeit)에 대한 추출로부터 만들어지는, 생산요소들(생산 수단 + 노동력)의 가치 증가로서의 잉여가치 일반에 대한 정의를 제시하는데, 반면 그 개별형태들(산업 이윤, 지대 또는 광업 이윤, 금융자본의 이자)은 생산수단의 소유를 공유하거나 그 사용을 통제하는 자본가들 사이에서 이러한 잉여가치가 사후적으로 분배된다는 사실을 반영할 뿐이다.

 

(...)

 

도식적이긴 하지만, 아마도 우리의 사유경험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결론들을 허락할 것이다. 마르크스의 관점에서 이 두 가지 발견은 상호보완적인 것이다. 이는 분명 이 두 가지 발견이 고전경제학자들의 문제설정, 특히 리카르도의 문제설정 내에서 중심적인 두 가지 질문들에 의거한다는 사실과 관련된 것이다. 한 편으로는[(1)] 가치의 내재적인측정과 가격의 변동 사이의 관계라는 질문이, 다른 한 편으로는[(2)] 서로 다른 수입들사이에서 자본에 추가된 가치[잉여가치]분배라는 질문이 존재하며, 이 질문은 고전경제학자들과 마르크스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