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인-무브

A 없는 A

- 이고르 홀린의 시집 서정시 없는 서정시-

 



이 종 현 | 서교인문사회연구실



 

두 달 전 <러시아 현대시 읽기>를 처음 연재하면서 삽기르의 친구 이고르 세르게예비치 홀린(Игорь Сергеевич Холин, 1920-1999)의 시를 읽어보겠다고 약속했었습니다. 홀린의 시들이 한데 모여 있는 선집[각주:1]을 중고거래로 구해서 읽어보았습니다. 300쪽 조금 넘는 길지 않은 책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큰 고민이 듭니다. 도대체 이 시들을 어떤 방식으로 읽어야 할까? 상징주의 시를 읽듯 시어가 상징하는 바를 추적하며 읽어야 할까? 아니면 아방가르드 시를 읽듯 시인이 만든 신조어가 어떤 효과를 일으키려는 것인지 가늠해야 할까? 재미있는 시들은 많은데 이걸 어떤 식으로 풀어내야 할지 출구를 찾지 못했습니다. 웹진 인-무브의 워크숍을 통해서 러시아 현대시뿐만 아니라 현대시 읽기라는 문제를 다루는 연습을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며 홀린의 책을 훑다보니 서정시 없는 서정시(Лирика без лирики)’라는 시집 제목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 시집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찾을 수 없지만 대략 1960년대 후반에 자가 출판 형태로 암암리에 돌던 시집이라고 합니다. 그러다 1995년이 되어서야 파리, 모스크바, 뉴욕에서 동시에 정식출간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A 없는 A’라는 말의 구조가 흥미로웠습니다. 얼핏 보면 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순적 표현입니다. A를 읽으려면 A에 적합한 요소들을 찾아야 할 텐데 A가 없다니? 이것은 A가 아닌 척 하는 A인 것일까? 아니면 A가 아닌 것을 지향하지만 결국 A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슬픈 A인 것일까? 아니면 정말 A에 핵심이 되는 요소들은 빠져 있고 A의 외양만 남은 쭉정이 A인 것일까? 아니면 ‘()가능이라는 표현과 유사한 (~)A라고 해야 할까?

 


우선 서정시 없는 서정시의 시들을 읽기에 앞서 제목의 수수께끼에 대한 힌트를 얻기 위해 서정시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러시아에서 가장 자세하게 문학이론 일반을 설명하는 두 권짜리 문학의 이론(Теория литературы)을 참조한다면 서정시에 대한 이론은 다음 세 가지로 간추려집니다[각주:2]. 1) 플라톤의 국가에 따르면, 주로 모방이라는 행위로 이루어지는 비극과 희극과는 달리 서정시는 시인 자신의 발언으로[각주:3] 이루어집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서정시의 시인은 다른 종류의 시들에서와 달리 가면을 쓰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각주:4] 남아있다고 말합니다. 2) 헤겔은 주체와 서정시를 밀접하게 연관 짓는 설명을 심화시켜 서정시에서 정신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와 자기 고유의 의식을 성찰한다[각주:5]고 말합니다. 헤겔의 설명은 이후 거의 두 세기 동안 유럽근대 서정시의 주요 정의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3) 바흐친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헤겔의 주장을 반박하며 서정시는 체험하는 영혼이 자기 자신에 대해 취하는 태도가 아니라 그 체험하는 영혼에 대한 타자의 가치적 태도[각주:6]를 표현한다고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서정시의 시인은 자신의 삶을 곧바로 이야기하지 않고, 예술적 전체를 만들기 위해서 반드시 타자의 입을 통해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해야합니다. 이때, 서정시에는 작가와 주인공 사이의 원칙적 경계가 없으므로” “작가는 주인공에 대해 순수한 정도로까지 내적인 외재성이 되어야 한다[각주:7]는 점에서 다른 문학 장르들과 구별됩니다. 서정시에는 소설과는 다른 고유한 주체적 구조가 있다는 것입니다[각주:8]. 

  

 

서정시에 대한 설명들을 참고한다면, ‘서정시 없는 서정시서정시 고유의 주체적 구조가 없는 서정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홀린의 시들을 보면 이러한 접근방법이 어느 정도 들어맞는 것 같기도 합니다. 몇 편을 읽어보겠습니다.



* * *

Она в ресторане с ним водку пила,

Потом среди ночи к себе завлекла.

А утром на кухне сказала соседям:

Приехал из Тулы племянничек Федя.

 * * *

그녀는 레스토랑에서 그와 보드카를 마셨다.

그리고 한밤중에 집으로 끌어들였다.

아침에 부엌에서 이웃들에게 말했다

툴라에서 조카 페쟈가 왔어요.




여기서는 바흐친이 말하는 서정시의 고유한 주체적 구조를 찾기 어렵습니다. 주인공은 있지만 체험하고 있는 영혼’, 즉 시적 화자에 대해 그가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시에서 말하고 있는 주체, 즉 시인은 단지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전할 뿐입니다



* * *

Он выпил водки. И в пьяном виде

Лез целоваться к соседке Лиде.

* * *

그는 보드카를 마셨다. 술에 취해서

이웃집 여자 리다에게 뽀뽀하려고 기어들어갔다.



그녀페쟈에게 술을 먹여 자기 방으로 끌고 들어가더니 는 술에 취해 제 발로 리다의 방으로 기어듭니다. 두 문장 밖에 안 되지만 서정시보다는 단편소설에 가까워 보입니다.


 

* * *

Каждый вечер я одна,

Каждый вечер у окна.

За окном по тротуару

Каждый вечер

Ходят пары

И веселый слышен смех.

Ненавижу я их всех!

* * *

매일 밤 나는 혼자,

매일 밤 창가에 앉아.

창문 너머 보도엔

매일 밤

커플들이 다녀

즐거운 웃음소리가 들려.

나는 그들 모두를 증오해!



이 시는 화자가 1인칭으로 말하고 있어서 시인과 주인공이 일치하는 것 같지만 사실 주인공은 여성입니다. ‘혼자를 뜻하는 오드나가 여성형입니다. 바흐친에 따르자면, 작가인 시인은 주인공과 순수한 내적 외재성, 즉 서로 다른 존재이지만 구분이 안 되는 지경에 이르러야 하지만 여기서도 시인은 연애 못하는 여자의 말을 옮기고 있을 뿐입니다. 다음의 시에서 시인은 언어적 대조를 통해서만 시적 상황에 개입합니다




* * *

Поехала на курорт,

Отдалась спортсмену,

Провела время

С наслаждением.

Муж не заметил измены,

Не ладилось на работе

С водоснабжением.

* * *

그녀는 리조트에 가서

스포츠맨에게 푹 빠졌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매우 즐겁게.

남편은 불륜을 눈치 채지 못하고

직장에서 애를 먹고 있었다.

수도관이 망가져서.



매우 즐겁게(스 나슬라쥐데니옘)’수도관이 망가져서(스 보도스납줴니옘)’이 비슷한 소리들로 각운을 이룹니다. 시인은 시 밖에서 이 상황을 말장난으로 비웃고 있습니다. 바흐친이 말하는 체험하는 영혼은 시 안에서 주인공의 입을 빌어서 자기 자신에 대한 태도를 말해야 하지만 이 시에서 시인은 엄연히 시 밖에 있습니다. <교제>라는 시는 단편소설과 매우 가까워 보입니다




ЗНАКОМСТВО

 

Началось с флирта

При покупке торта

Скорчил морду

Вроде черта

Она не осталась в долгу

Сказала

Могу

Съесть 10 пирожных

Не запивая водой

Невозможно

Это искусство

Проводил домой

Говорили об искусстве

Любишь

Соловьева-Седова

Да

Балет

Нет

Ерунда

Бред

Опера

Свинство

Симфония

Хамство

Завязалось

Знакомство

 교제

 

노닥거리다 시작되었다

케이크를 사는데 그가

악마새끼처럼

낯을 찌푸렸다

그녀는 지지 않으려고

말했다

나는

파이를 10개나 먹을 수 있어

물도 안 마시고

불가능해

그 정도면 예술인데

그가 집에 데려다 주었고

예술에 대해 이야기했다

솔로비요프-세도프를

좋아하니

발레는

아니

시시해

헛소리야

오페라는

추잡해

교향곡은

야비해

그렇게 교제가

시작되었다




서정시 고유의 주체적 구조가 없다는 점에서 홀린의 서정시 없는 서정시는 서사성이 강한 운문으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홀린의 시는 서사시가 되어 버리는 것일까요? 물론 서정시에도 플롯이 종종 활용되기도 합니다. 독일의 문학이론가인 페터 휜은 서정시에서의 플롯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지 고민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시에서 플롯은 행위자가 독백 형태의 반성적, 인지적 과정에서 자신의 플롯으로 자신에게 귀속시키는 생각, 기억, 욕망, 감정, 상상, 태도 등을 전형적으로 가리킨다.”[각주:9] 그러나 이러한 설명도 홀린의 시를 설명하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서정시 없는 서정시에서는 시인의 정신적, 감정적 행동들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서정시 없는 서정시쭉정이 서정시여서 운문으로 된 단편소설이라고 해야 할까요? 로트만은 예술적 텍스트에서 서사를 구성하는 요소인 사건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텍스트에서 사건은 인물이 의미적 장의 경계를 넘어 자리 이동하는 것을 말한다.”[각주:10] 주인공이 단순히 시간, 장소 이동을 한다고 해서 사건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동이 그의 운명에 결정적인 의미적 변화를 일으켜야 사건이 될 수 있습니다. 한 곳에 앉아있더라도 생각을 통해 가치관이 180도 변한다면 사건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홀린의 시들에서는 이런 사건들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녀의 방으로 가 들어가고, ‘부인이 리조트에 가서 스포츠맨을 만나고, ‘가 리다의 방으로 기어들어간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주인공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이동들을 사건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두 남녀의 교제가 시작되었음을 의미심장하게 선포하는 시 <교제>는 어떨까요? 두 남녀는 새로운 의미적 장으로 들어갔을까요? 둘은 데칼코마니처럼 비슷해 보입니다. ‘악마새끼처럼 얼굴을 찌푸려 보인남자나 지지 않으려고파이를 10개나 먹을 수 있다고 받아치는 여자는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의 취향이 비슷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교제를 시작합니다. ‘교제를 뜻하는 단어 즈나콤스트보‘~에 대해 지식이 있음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결국 이 시에서 교제는 새로운 의미적 장으로 들어가는 사건이 아니라 두 사람 사이의 동일한 정보 확인, 각자에 대한 지식의 확인에 지나지 않습니다



서사시도 아니고, 운문으로 된 단편소설도 아니고, 서사적 특징이 강한 서정시도 아닌 서정시 없는 서정시를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저로서는 도저히 ‘A 없는 A’를 설명하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홀린의 연작시 <팝 혹은 구체시(Поп или конкрет стихи)>의 한 편에서 이러한 구조를 또 발견합니다.



* * *

Я мню дное венье

Передо вилась ы

* * *

나는 억하네 적의 간을

앞에 타난


 

러시아 사람들에게 이 시를 보여주었더니 처음에는 어리둥절해 하다가 곧바로 푸쉬킨의 유명한 시 <***에게(К***)>(1825)의 첫 구절이라는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마치 이 시는 독자들에게 러시아시에 대한 지식이 있는지 확인하는 듯합니다. 나름의 즈나콤스트보아닐까요?



* * *

Я помню чудное мгновенье

Передо мной явилась ты

* * *

나는 기억하네 기적의 순간을

내 앞에 나타난 너




유명한 시구에서 글자들을 뺀 경우는 다른 나라들 시에서도 매우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시를 보니 ‘A 없는 A’와 관련하여 몇 가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글자들이 빠져 있는 푸쉬킨의 시는 푸쉬킨의 시 없는 푸쉬킨의 시일까요? 아니면 푸쉬킨과는 아무 상관없는 글자들의 모음일까요? 글자들이 빠진 상태로 푸쉬킨의 시를 읊는 시적 화자는 푸쉬킨의 시를 기억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홀린의 시에서 왜 하필 라는 단어는 한 글자도 남겨놓지 않고 사라졌을까요? 이 시에는 앞에를 뜻하는 페레도만 온전히 남아 있습니다. ‘A 없는 A’라는 상황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문제들을 앞에 내놓는 듯합니다.



Я - Я

Я сравниваю себя

Со всем Миром

Я - Эйнштейн

Вместе с теорией относительности

Я - недостроенный 12-этажный дом

С моей кооперативной квартирой

На третьем этаже

Я Пушкин

С поэмами

и стихами

Я - ты

Я - Я

나는

나는 스스로를

전 세계와 비교한다

나는 아인슈타인

상대성이론을 갖고 있지

나는 짓다 만 12층짜리 집

조합아파트를 갖고 있지

3층에

나는 푸쉬킨

장시들과

단시들을 갖고 있지

나는

나는 -




나의 집(Мой дом)이라는 시집에 수록된 이 시도 ‘A 없는 A’의 변종처럼 보입니다. <서정시 없는 서정시>에서 시인은 주인공들의 온갖 시시한 상황을 열거하며 서정시도, 서사시도, 단편소설도 아닌 것을 만들었습니다. 그럼으로써 시인의 정체성도, 주인공들의 정체성도 뚜렷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나는 >에서도 나는 나라는 공허한 말만 남습니다. 아무리 를 세계와 비교하여 A, A’, A“ 등과 어떻게 다른지 보려고 하지만 나는 무엇이라는 정의의 반복은 결국 나를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듭니다. ‘가 곧 세계라면 라는 말은 더 이상 무의미해집니다. ‘나는 ’, ‘나는 를 동시에 말함으로써 의 구분이 지워지고 나는 나 없는 나는 같은 것이 됩니다. ‘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를 동어반복한다고 해서 의 의미가 증폭되지도 않고 에서 부정한다고 해서 의 의미가 감소하지도 않습니다. 결국 ‘A 없는 A’의 실체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홀린에게 이 모순의 구조는 장르의 실험, 문자의 실험, 동일성의 실험을 추동한 주문(呪文) 같은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에는 홀린과 삽기르의 스승이자 1950년대 후반 언더그라운드 창작집단인 리아노조보 그룹의 리더였던 예브게니 레오니도비치 크로피브니츠키의 시를 찾아 읽어보겠습니다





  1. Холин И. Избранное. М., 1999. [본문으로]
  2. Теория литературы. под ред. Н.Д. Тамарченко. М., 2004. С.333-341. [본문으로]
  3. Платон. Госудаство // Соч.: В 3 т. Т.3. Ч.1. М., 1971. С. 174-179. Цит. по: Теория литературы. под ред. Н.Д. Тамарченко. С.333. [본문으로]
  4. Аристотель. Соч.: В 4 т. Т.4. М., 1984. С.648. Цит. по: Теория литературы. под ред. Н.Д. Тамарченко. С.334. [본문으로]
  5. Гегель Г.В.Ф. Эстетика: В 4 т. Т.3. М., 1971. С.347. Цит. по: Теория литературы. под ред. Н.Д. Тамарченко. С.336. [본문으로]
  6. Бахтин М. ЭСТ. С.145. Цит. по: Теория литературы. под ред. Н.Д. Тамарченко. С.340. [본문으로]
  7. Бахтин М. К философии поступка // Философия и социология науки и техники. М., 1988. С.154-155. Цит. по: Теория литературы. под ред. Н.Д. Тамарченко. С.340. [본문으로]
  8. Теория литературы. под ред. Н.Д. Тамарченко. С.341. [본문으로]
  9. P.Hühn “Plotting the lyric: forms of narration in poetry”, Literator 31(3) Des./Dec. 2010, p.24 [본문으로]
  10. Лотман Ю.М. Структура художественного текста. М., 1970. С.282. Цит. по: Теория литературы. под ред. Н.Д. Тамарченко. С.18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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