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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화의 정치


반복이란 최초의 기입-사건을 반복하는 것이며, 이는 새로운 권리 주체들의 출현을 의미한다. 투쟁을 통한 권리 주체들의 지속적인 확장과 증식. 이것이 바로 반복의 정치가 갖는 효과이다. 그리고 기입-사건의 반복이 결국 새로운 권리 주체의 확장과 증식이라는 함은 또한 인권선언이 제시하는 권리의 보편화를 뜻한다. 어떤 제한이나 단서도 없이 모든 개인들이 권리주체가 되는 보편화. 인권선언의 세 번째 정치성은 보편화의 정치이다.


1789년의 인권선언은 이 보편화의 성격을 매우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이 선언은 역사적으로 너무나 큰 의미를 가지지만 그 선언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매우 ‘부실’했다. 프랑스에 권리선언이 필요하다는 요구는 삼부회 의원선거를 앞두고 시행된 1879년 3월에서 4월 사이에 작성된 각 신분들이의 불만목록에서 이미 나타난다. 그리고 이해 6월 17일 국민의회가 선포되고 이틀 뒤인 19일에 국민의회가 권리선언에 착수해야 한다는 주장이 의원들로부터 제기된다. 이 권리선언의 기조와 내용, 그리고 구성방식이 어떠해야 할지는 국민의회 내에서 뜨거운 쟁점이었다. 권리조항만 들어가야 하는지 의무조항도 같이 들어가야 하는지, 권리에 대한 단서조항은 필요한지 그렇지 않은지, 각 조항이 규정하는 권리의 구체성은 어느 정도야 하는지 등이 논쟁되었다.


그러한 논쟁의 결과 8월 4일 국민의회는 의무 없는 권리선언을 성문화할 것을 결의했고, 익명의 40인이 선언문의 초안을 작성하기 위한 소위원회를 구성하게 된다. 그러나 이 소위원회는 24개의 발의된 권리조항 중에서 단 17개조의 개정안에만 합의를 이루어냈다.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헌법을 제정한 이후 재검토하고 보완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또한 선포된 17개 조항들 역시 각 권리들에 대한 구체적 규정보다는 ‘형이상학’적 원리를 밝히는 수준에서 이루어진 합의의 산물이었다. 이 선언문의 작성에 참여한 각 분파들의 입장 차이와 의견충돌은 각 분파들이 제시한 세분화된 권리들에 대한 구체적인 조정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각 분파 모두가 수용 할 수 있는 추상적 수준의 권리를 제시하는 타협안을 만들어 내도록 하였다. 그러니까 새로운 국가체제와 권리체제를 열어낸 혁명의 지향을 밝힌「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관한 선언」이라는 역사적 문서는 미완의 문서였던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바로 이와 같은 미완의 성격이 선언의 보편화의 정치를 작동시킬 수 있는 조건이기도 했다. 특히 프랑스인권선언의 권리조항들이 갖는 추상성, 각 세력 분파들의 입장을 넘어서는 추상성은 오히려 그 선언이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될 수 있는 가능성의 조건이 되었다. 아무런 단서 조항 없이 모든 인간과 모든 시민이 권리주체로 제시되었으며, 인간과 시민이라는 권리주체에는 그 어떤 자격조건도 제시되지 않았다. 그러자 현실적으로는 인권선언이 보장하는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자들이 자신들 또한 인간이며 시민임을, 권리의 주체임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린 헌트는 1789년 선언의 추상성이 갖는 효과를 다음과 같이 의미화 한다.


이런 논리가 작동되는 데 있어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관한 선언」에 깃든 것으로 추정되는 형이상학적 본성은 매우 긍정적인 자산임이 드러났다. 세부항목에 대한 질문을 아예 제처 놓았다는 바로 그 이유로 1789년, 7,8월에 행해진 일반원리에 대한 토론에서 결국 필요한 세부항목을 더 급진적으로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14)


인권선언의 이와 같은 추상성, 혹은 충분하지 못한 규정성은 일종의 역사적 우연이 만들어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양한 세력 분파들의 팽팽한 입장이 대립한 결과 그 모든 입장이 타협 가능한 수준으로 권리들의 추상성을 높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1789년의 선언은 권리의 주체를 ‘국적, 직업, 소득, 종교, 성별, 인종 등과 상관없이’라는 명확한 규정을 통해 보편성을 선포하지도 않았지만 동시에 권리의 주체가 ‘특정 국가의 시민, 어느 정도의 자산을 가진 시민, 어떤 종족의 인간, 특정 종교를 믿는 인간’ 등으로도 규정하지 않았다. 단지 인간과 시민이라고 추상적으로 규정된 존재자가 권리의 주체로 등장한 것이다. 심지어 인간과 시민의 관계 역시 이 선언문에서는 명확하게 밝히지 않고 있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관한 선언」의 추상성, 린 헌트의 용어를 빌리자면 ‘형이상학적 성격’이 이 선언의 보편성을 결과한다. 하지만 그러한 보편성을 단지 선언의 작성에 참여한 분파들 사이에 존재한 입장 차이의 효과만으로 환원할 수는 없다. 이미 강조한 바와 같이 1789년의 선언은 구체제(Ancient regime), 혹은 신분제라는 낡은 지배적 체제를 전복한 혁명이다. 혁명 이후 필요한 것은 새로운 지배적 체제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지배적 체제는 항상 보편적인 것을 그 안에 담을 수밖에 없다.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자신의 효과들을 지배자들 자신의 경험을 넘어서 -지배자들의 ‘사적 세계’의 경계들을 넘어서 - 확장시키기 위해서, 그것이 사회에서 ‘정상적’(또는 규범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 그것은 순수하게 형식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강한 의미에서 보편적이어야 한다. ․․․․․중략․․․․․ 그것은 우선 지배자들의 ‘체험된’ 경험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의 ‘세계’에 대한 인정 또는 승인과 저항 또는 반역을 동시에 함축하는(마르크스는 종교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피지배대중들의 ‘체험된’ 경험이라고 반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역설적 테제에 이르게 된다. 즉 최종심에서 이와 같은 지배자들의 이데올로기 그 자체인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예를 들어 ‘자본가적’인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주어진 사회에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는 항상 피지배자들의 가상의 특수한 보편화이다. 15)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일방적으로 지배계급의 이해관계만을 정당한 것으로 내세울 수는 없다. 그것이 지배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오히려 피지배자들의 ‘체험된’ 경험, 즉 그들의 집단적 가상이 ‘특수’하게라도 보편화되어야 한다. 가령 프랑스대혁명의 인권선언이 제3신분 내에서도 부르주아지의 헤게모니 하에서 작성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선언이 일방적으로 부르주아지의 이해관계만을 승인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비록 ‘특수하게’, 단적으로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구조적 적대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인간과 시민의 권리를 선언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되기 위해서는 피지배자들이 열망하는 정당성을 전면화할 수밖에 없다. 지배자들에 의해 피지배자들의 가상이 받아들이지는 만큼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피지배자들의 이해관계를 전적으로 승인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지배자들의 이해관계만을 전적으로 대변할 수도 없다.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잠재적 모순을 내포’16)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관한 선언」이 새로운 권리체제의 원리와 방향을 제시하는 텍스트라는 것은 이 선언이 근대정치질서의 지배적 이데올로기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선언이 지배적 이데올로기라면 당연히 피지배대중들의 가상을 특수한 방식으로 보편화할 수밖에 없다. 1789년의 선언이 지배적 이데올로기로서 작동한다면 이 선언 역시 항상 잠재적 모순을 내포하며 그러한 만큼 투쟁의 이데올로기적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 선언의 권리조항이 구체적이지 않고 추상적이라는 점, 명확한 규정성보다는 모호한 지점이 많다는 점이 바로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피지배자들의 가상이 포함되는 방식이며 그로 인한 모순이 드러나는 방식인 것이다.




기입-사건의 반복은 바로 이 모순으로부터 작동하게 된다. 그리고 그 반복의 효과는 선언의 형태로 지배 질서에 기입된 피지배자들의 가상이라는 보편성이 현실적 제약과 제한을 넘어선 확산이다. 선언의 추상성이 갖는 권리들의 보편성이란 그 권리들의 주체가 보편화될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러한 보편성이란 새로운 권리주체의 영속적 생성의 조건으로서 보편성이며 그것은 항상 보편화를 통해서만 의미를 가지는 보편성이다.


이러한 보편성은 발리바르가 말하는 ‘이상적 보편성’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에 의하면 이상적 보편성이란 ‘보편적인 것이, 모든 제도적 제약들에 맞서 상징적으로 원용될 수 있을 절대적 또는 무한한 요구들이라는 형식 속에서 또한 하나의 이상으로 존재한다’17)는 사실과 다른 것이 아니다. 이 ‘절대적 또한 무한한 요구들’로서의 보편성이란 보편적 권리의 주체들이 무제한적 생성 가능성과 다른 것이 아니다.


제도로서의 정의의 성립조건은 개인들이 공통적이거나 보편적인 가치들을, 의무들을 “내면화”해야 한다는 것만이 아니다. 더 근본적으로 그것의 성립조건은 그 가치들과 의무들이 역사나 신화에 기록된 어떤 창립적 봉기에 뿌리내리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주체성 자체의 “무한성”이 나온다. 또는, 이러한 점이 주체성 자체의 무한성을, 모든 순수하게 제도적인 사회적 법규에 반대하는, “절대적” 자유에 대한 요구의 등가물로 만든다.18)


선언에는 이러한 보편성의 계기가 포함되어 있다. 그 계기는 절대적이고 무한한 권리의 요구로, 그 요구는 현실의 제도적 법규가 제한하거나 제약하는 권리들을 요구하는 주체들의 무한한 출현으로 드러난다. 이것이 바로 발리바르가 말하는 ‘주체성 자체의 무한성’이다. 그와 같은 주체성의 무한성은 기입-사건, 즉 봉기-사건의 반복가능성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이러한 기입-사건의 반복을 통해 선언이 표명한 보편적 권리들을 제약하는 현실적 제도와 법규를 넘어서 그 권리를 무한히 확장해가는 정치가 바로 보편화의 정치이다. 권리 주체들의 지속적 증식과 영속적 생성으로서 즉 보편화. 이것이 바로 인권선언의 정치가 갖는 세 번째 정치성으로서 보편화의 정치이다. 


4.인권선언의 정치는 종결되지 않는다


이상으로 우리는 근대적 정치질서가 시작되면서 그 이념적 지향 가운데 하나를 천명한 '인권선언 '에 배태된 정치성을 세 가지로 살펴보았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모든 인간의 존엄함, 혹은 발리바르의 개념을 빌려서 표현하자면 무든 인간이 시민으로서 '평등자유'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이 조건없이 시민으로서 '평등자유'의 주체가 되는 과정을 '인권선언'은 기업-반복-보편화라는 세 가지 계기에 의해 규정되는 정치로 제시한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존엄, 모든 인간이 평등자유의 주체라는 보편적 시민권에 대한 천명이다. 존엄성의 제도적 기입과 그것의 무한한 반복을 통한 존엄성의 보편화야말로 인권선언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정치성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인권선언의 세 가지 정치는 민주공화국으로서 지금의 대한민국에서도 여전히 작동되어야 할 정치성일 것이다. 모든 사람의 존엄성이 보장될 때까지, 모든 인간이 시민으로서 평등자유의 주체가 될 때까지 이 정치는 종결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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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린 헌트, 앞의 책, 172면.

15) Étienne Balibar, 윤소영 역, 『알튀세르와 마르크스주의의 전화』, 도서출판 이론, 1993, 186면.

16) 같은 책, 187면.

17) 『대중들의 공포』, 533면.

18) 같은 책, 534~53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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