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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과 성의 교차점 탈주변화하기_다섯 번째

반차별 독트린, 페미니즘 이론, 반인종주의 정치에 대한 흑인 페미니즘의 비판

 

킴벌리 크렌쇼

번역: 단감/페미니즘 번역모임

 

B. 교차성의 원칙적 처리의 중요성

데그라펜레이드, 무어, 트래브놀 사건은 차별에 관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정치적이론적 접근이 원칙적 차원에서 흑인 여성을 주변화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냈다. 법원뿐 아니라 페미니스트와 인권 사상가들도 흑인 여성의 교차적 경험의 중요성을 파악하지 못하고, 그들의 경험이 더 큰 집단인 여성과 흑인에게까지 구심이 된다는 점이나 그들의 상황이 지닌 고유한 복합성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그들을 대했다. 흑인 여성은 그저 여성이나 흑인과 너무 비슷하다는 이유로 그들이 겪는 경험의 복합적 본질마저 한쪽의 집단적 경험에 편입되어 버리거나, 너무 다르다는 이유로 흑인 여성의 필요와 관점이 그들이 흑인 혹은 여성이라는 것 때문에 여성해방 및 흑인해방 의제에서 뒤로 밀려나는 방식으로만 고려되었다.

이러한 실패는 결국 흑인 여성을 포함하려는 정치적 의지가 아예 없다는 뜻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나는 이것이 차별에 대한 지배적 사고방식을 받아들이는 무비판적이고 그릇된 태도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반차별 법이 근거로 삼고 있는 차별의 첫 번째 정의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라. 차별은 특정한 집단이나 범주를 지정하는 것에서부터 생겨나는 잘못된 결과이다. 차별의 가해자가 의도적으로 이러한 범주를 정하기도 하고, 어쩌다보니 이 범주의 모든 구성원에게 불이익을 주는 방식이 적용되기도 한다[각주:1]. 지배적인 관점에 따르면 차별의 가해자는 한 인종이나 성별 범주에 속한 사람을 모두 비슷하게 취급한다. 그런데 이 집단 안에서도 특별한 경험적 혹은 통계적 차이가 나타난다면, 이는 그들이 집단으로서 차별을 받는 것이 아니거나 공통의 주장을 제기하기 위한 모든 시도를 좌절시킬 만한 이해관계의 충돌이 존재한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한 사람은 일반적으로 여러 개의 범주에 복합적으로 속할 수 없다. 게다가 인종과 성별은 그것이 피해자에게 명백히 불이익으로 작동할 때에만 중요한 요소가 된다. 백인과 남성이 가지는 특권은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대체로 그것은 아예 지각되지 않는다.

그것만 아니었으면 공정하거나 중립적이었을 결정이 인종이나 성별 요소로 인해 왜곡되는 것을 문제로 보는 반차별 법의 관점이 바로 이러한 차별 개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렇게 과정을 기반으로 한 정의는, 수없이 많은 요소의 교차적 작용으로 인해 피해를 입는 사람들의 본질적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상향적 의무를 기초로 삼지 않는다. 대신, 성과를 내는 과정에서 인종이나 성별이 걸림돌로 작용하는 부분만을 한정적으로 규제한다는 입장이 반차별 법이 담고 있는 지배적 메시지이다. 이렇게 협소한 목표는 인종이나 성별의 효과를 규명할 때 오직 ‘~만 아니었다면이라는 분석만 사용하는 하향적 전략을 통해 더욱 강화된다. 반차별 법의 범위가 너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성차별 및 인종차별은 인종이나 성별 요소만 아니면 충분히 특권을 누렸을 사람들의 경험에 따라 규정되어왔다. 달리 말하자면, 성차별의 패러다임은 백인 여성의 경험을 기반으로 하는 경향이 있고, 인종차별의 모델은 가장 특권을 가진 흑인들의 경험을 기반으로 하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성차별이나 인종차별을 구성하는 개념이 아주 작은 일군의 상황만을 포함하도록 협소하게 재단되어 있기 때문에, 흑인 여성에 대한 차별은 어느 쪽에도 포함되지 못한다.

이 일반적 설명이 정확하다는 전제 하에, 반차별 법과 인종차별 및 성차별 구조의 경계면에서 흑인 여성이 주변화되는 방식을 다음의 비유로 묘사해보자. 인종, 성별, 계급, 성적 지향, 나이, 신체적 능력(장애여부) 등을 토대로 불이익을 당하는 모든 사람이 들어가 있는 지하실을 떠올려보라. 모든 요소에 의해 차별을 받으며 맨 아래에 늘어서있는 사람들에서부터 한 가지 요인으로 차별받는 사람들 중에서도 맨 위에서 거의 천장에 닿으려 하고 있는 우두머리까지, 이들은 층층이 쌓여 다른 사람의 어깨를 밟고 서서- 지하실을 채우고 있다. 그 천장은 사실 어떤 이유로도 차별받지 않는 사람들만이 살고 있는 곳의 바닥이다. 지배 방식을 일부 개선하기 위한 노력으로, 천장 위에 사는 사람들은 지하실 인구 중에서도 그 천장만 아니었다면위층에서 살 수 있었을 거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만을 인정해준다. 천장 바로 밑에 있던 사람들이 기어올라올 수 있는 입구가 하나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 입구는 대부분 단 한 가지 족쇄만 제외하면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 비해 특권을 가진 지위이기에- 바로 기어올라갈 수 있는 위치에 있던 사람들에게만 허용된다. 다수의 차별 요인을 짊어진 사람들은 입구에 발을 넣어볼 수 있도록 허용된 집단에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간 경우가 아니면 대부분 뒤에 남는다.

이 비유를 흑인 여성에게 적용해보면, 그들의 문제는 반차별 정책에 반영되어 있는 사람들의 경험과 비슷해 보이는 부분만 보호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흑인 여성이 최종적으로 인종만 아니었다면혹은 성별만 아니었다면지금과 다른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고 입장을 정리하지 못하면, 그들은 입구를 기어 올라갈 수 있는 집단에 끼지 못한 채, 보다 크고 이미 보호받을 자격을 인정받은 인종 및 성의 범주에 흡수될 때까지 그저 무방비로 변방에서 기다리라는 처분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토록 협소한 지배적 개념의 범위와 엄격히 정해진 기준에 맞아떨어지지 않는 차별을 겪는 사람들을 주변화하는 경향에도 불구하고, 이 접근은 어떤 범위의 문제를 다루기에 적절한 틀로 여겨졌다. 상당수의 페미니즘 이론과 일부 반인종차별 정치학에서 이 틀은 인종, 성별, 혹은 계급 중 어떤 면에서는 특권을 가진 부류 외의 다른 사람들의 삶에 주목하지 않고도 성차별 및 인종차별을 충분히 논할 수 있다는 믿음을 만들어내는 데 일조했다. 그 결과, 페미니즘 이론과 반인종차별 정치학은 모두 어떤 면에서는 흑인 중산층 혹은 흑인 남성에게 가해지는 인종차별의 공식 및 백인 여성에게 가해지는 성차별의 공식에 따라 구성되었다.

페미니즘 진영 및 인권운동 진영 모두의 역사적 문제 및 현재적 문제를 살펴보더라도, 그들이 차별에 대한 지배적 틀을 수용하면서, 보다 적절한 이론을 발전시키고 교차성 문제를 다루는 것까지 응용해갈 수 있는 가능성을 저해했다는 증거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이렇게 차별에 대한 단일 이슈 틀을 수용하는 것은 자신도 자기 집단의 일부라고 주장하는 바로 그 운동 안에서 흑인 여성을 주변화할 뿐만 아니라, 인종차별과 가부장제를 없애자는 까마득한 목표를 더욱 달성하기 어렵게 만든다.




  1. 상당수의 반차별 정책이 차별하려는 의도가 있었는지 여부로 합법적 차별과 불법적 차별을 가른다. 워싱턴 대 데이비스 사건(1976, 평등 보호 조항을 위반했음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차별하려는 목적이 있었다는 증거를 제시해야 했음)을 보라. 그러나 민권법 7조에 따라 법원은 불평등 효과를 보여주는 통계 자료만 있으면 충분히 차별을 파악할 수 있다고 결정했다. Griggs, 401 US at 432를 보라. 두 분석의 간극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워즈 코브 포장회사 대 애터니언 사건(1989, 차별 효과에 대한 증거를 갖춘 사건임을 입증하기 위해 원고가 존재하는 차별 현상 이상을 보여줘야 했음)를 보라. 의도와 효과 분석의 기반이 되고 있는 규범적 시각들의 경합에 대한 논의는 Alan David Freeman, 《Legitimizing Racial Discrimination Through Antidiscrimination Law: A Critical Review of Supreme Court Doctrine》(1978)을 보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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