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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산으로서 여성빈곤

 -<여성파산>, 2017


지안




프리터와 흙수저라는 이슈


빈곤에는 여러 가지 유형이 있다. 가령 세대별로 본다면 노인 빈곤, 아동 빈곤, 청년 빈곤 등이 있으며 빈곤의 유형별 접근은 성별이나 계층, 지역, 학력 등등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빈곤은 단순히 주머니에 돈이 없는 가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집단이 다양한 상황에서 마주하는 사회/경제적 상태이다. 최근 40대 빈곤율이 20대 빈곤율을 앞질렀다는 기사를 읽으며 한국사회에서 빈곤하지 않은 집단이 있기는 한 건가 싶은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직/간접적으로 빈곤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회에서 특정한 빈곤이 이슈가 되며 다른 집단의 빈곤은 그다지 시선을 끌지 못하고 감춰진다면 그건 어떤 이유 때문일까? 어떤 빈곤에 대해서는 사회가 심각함을 느끼며 빨리 복구해야 하는 것으로 이야기하지만 어떤 유형의 빈곤은 의제화 되지 못한 채 마치 없는 것처럼 여겨지거나, 개인적인 조율이나 능력의 문제로 여겨진다면 그건 무엇 때문일까?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는 빈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혹은 우리는 무엇을 빈곤이라고 생각하며 어떤 사람들을 빈곤하다고 생각하거나 느끼는가? 라고 물어야 할 것이다. 최근 한국사회의 가장 문제적인 빈곤 집단은 청년층이고 이에 대한 명명으로 N포세대와 흙수저가 있다. N포세대란 삶을 구성하는 N개의 요소들을 포기하며 살아간다는 의미를 가지며 추후에는 이 ‘포기’들이 계층화된 불평등을 전제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흙수저’ 담론이 등장한다. 그러나 연애/결혼/출산(삼포), 경력/집(오포), 취미/인간관계(칠포)에서 ‘N포’에 이르기까지 포기된 것들이 과연 무엇이었는지를 젠더적인 관점에서 비판하는 지적들이 나왔다. 이와 같은 포기의 목록들이 남성에게는 (예정된) 권리의 박탈이라면, 여성에게는 (경력이나 집처럼) 애초에 박탈된 권리였거나 (결혼이나 출산처럼) 권리라기에는 매력적이지 못한 권리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을 포기 당했다고 말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포기의 목록들, 그 중에서도 연애/결혼/출산 같은 문제들이 중요한 박탈로 이야기되었다는 상황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는 ‘프리터’나 한국의 ‘흙수저’라는 상징적인 청년빈곤 이미지는 정확히 남성 청년을 상상한다. 이건 남성청년이 여성청년보다 더 가난하기 때문일까? 무언가를 더 포기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인가? 실제의 경제적 지표를 젠더적 관점에서 확인하면 여성 청년의 경제적 상황은 남성 청년의 경우보다 훨씬 심각하다. <여성파산>에 소개된 일본 비정규직 고용률을 보면, 20대 여성의 비정규직 고용률은 42%로 28%인 남성 비정규직 고용률에 비해 1.5배 높은 수치다. 임금 격차 역시 평균 남성임금이 2,230만원인 것에 반해 여성임금은 1,480만원으로 남성 임금의 60%정도 수준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빈곤은 왜 남성의 얼굴로 상상되었을까? 



“빈곤해질 수조차 없는 여성”


그것은 아마 무엇이 빈곤이라고 여겨지는가의 문제와 연결된다. 흙밥과 프리터가 전형적인 청년 빈곤의 상이라면 “머리와 손톱을 예쁘게 꾸미고 화려한 화장을 한 여성들은 ‘빈곤’과 무관해 보이기 쉽다”(63) 가령 한국 대중문화에서 유의미한 청년여성 재현이었던 <청춘시대1>의 ‘윤선배’ 캐릭터는 레스토랑, 과외, 심야 편의점 알바를 하면서 학교를 다니고 취업준비를 한다. 그녀는 알바와 다른 알바 사이에서 언제나 뛰어서 이동하고, 항상 편의점 폐기 식품을 먹는다. 그리고 옷이나 화장 같은 외적인 요소들이나 개인적인 취미/여가는 아예 포기한 채로 살아간다. (혹은 유일한 아주 조금의 여가마저 함께 주거하는 룸메이트들과 보낸다.) 이렇게 2~3개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집세를 내면 밥값이 없어 흙밥을 먹는 전형적인 빈곤청년의 모습은 자유롭게 연애하거나 하고 싶은 활동을 하고 원하는 소비를 하는 룸메이트들과 비교되어 비관적으로 보인다. 그런데 과연 한국사회 청년여성에게 빈곤은 자신의 욕구를 포기하며 최소한으로 사는 삶으로 드러날까? 그렇지 않다면 청년빈곤은 왜 포기상태로만 등장하는 것일까? 

물론 여기서 청년여성의 빈곤이 다른 유형으로도 나타난다는 말이 남성청년들만 ‘흙밥’이나 ‘프리터’와 같은 류의 삶을 살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리고 빈곤의 세밀한 차이들, 가족들과 사는지 혼자 사는지, 원룸에 사는지 고시원에 사는지, 창문 있는 쪽방인지, 그마저도 없는 방인지 이런 생활의 질의 차이는 큰 변별점이 된다. 그러나 대다수의 세대와 집단이 빈곤한 상황에서, 떠올릴 수 있는 최악의 이미지만을 빈곤으로 제시하는 것은 누가 더 가난한지의 대결구도가 되어버릴 뿐만 아니라 그 밖의 문제들은 빈곤문제가 아닌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또한 이런 전형적인 빈곤이미지는 마치 빈곤이 그 이미지와 동일한 문제인 것처럼 만들어버린다. 예를 들어 지난 연말 후원자의 제안으로 크리스마스 선물을 고르게 된 아동이 20만원대 롱패딩을 고르자 후원을 중단한 사건에는, 빈곤층은 항상 롱패딩도 스마트폰도 컴퓨터도 없이 최악의 모습으로 살아야한다는 의식이 존재한다. 그리고 빈곤의 전형적인 모습에서 벗어나는 순간 마치 빈곤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해버리는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여성파산>에는 <미혼여성 3명 중 1명이 빈곤층>이라는 기사를 발표했을 때, 여성이 빈곤을 주장하다니 가당치도 않다는 전화가 쇄도했다는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그러나 여성노숙인의 비율이 낮다는 것, 실제로 빈곤한 여성들이 길거리에서 눈에 안‘띈다는’ 것이 실제로 여성빈곤이라는 문제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앞서 보았듯이 경제적 지표들을 통해 훨씬 만연해 있는 여성빈곤을 확인할 수 있지만, 여성빈곤은 빈곤으로 인식되지 않거나 드러나지 않는다는 이중적인 상황에 놓여있다. 

<여성파산>의 저자 이이지마 유코는 일본사회에서 여성빈곤이 비가시화된 여러 가지 배경들을 설명한다. 첫 번째로 역사적인 배경이 있다. 일본 전후사회가 남성생계부양자 모델을 통해 가장과 주부라는 역할분업을 만듦으로써 노동/가족 문제를 구성해왔다는 사회적 맥락이다. 이러한 성별에 따른 역할분업은 일본 사회의 경제적 상황에 따라서 그때마다 재할당 되어왔다. 고도 성장기에는 종신고용과 연공임금의 보장을 바탕으로 남성가장들이 생계를 전담했고 그 외의 모든 가내노동을 주부들이 전담했다면, 버블경제가 붕괴된 90년대 이후로 주부들이 비정규직 노동에 전면적으로 나서게 된다. 이때에도 이들의 ‘주부로서’의 노동은 가계수입의 보조적인 역할로 ‘기능하며’, 그런 사회적 인식에 따라 임금과 대우는 평가절하 된다. 물론 여기서 모든 비정규직 여성이 시간제근로를 하는 주부인 것은 아니다. 심지어 비혼여성이나 싱글맘 등 훨씬 열악한 상황의 집단이 존재했지만 이러한 문제도 크게 부각되지 못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청년 남성의 실업 및 비정규직화가 심각한 사회적 문제가 됨에 따라 비정규직 문제가 전면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비정규직 문제를 경제적 문제로만 보는 것은 그 이전부터 누적되어왔던 여성들의 비정규직화라는 문제를 누락시킨다.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청년여성의 빈곤 문제는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에 기반해 있는 인식 위에서 결혼과 결부되어 일시적인 상태로 여겨지거나 결혼으로 해소될 문제로 취급된다. 따라서 여성빈곤 문제는 노동문제나 빈곤문제가 되지 못하고 특정 시기의 여성 문제가 된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전통적인 생애주기 모델이 깨지면서 남성생계부양자 모델은 실제로는 더 이상 유지되지 않는데, 여기에 2015년 여성활약추진법의 제정으로 여성들 간의 계층화(‘여여격차’)가 극심해졌으며 여성들의 삶이 더 이상 단일하지 않다는 복잡성이 더해진다. 

두 번째는 여성 빈곤의 안전망으로써 여성쉼터 같은 시설이나 성산업이 있다는 주장이다. 이는 반론하기에도 황당한 주장이지만, 한국적 상황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주장은 여성이 노숙인이 되었을 때 처해지는 위험한 상황에 대한 고려나 여성에게만 부과되는 안전비용에 대해서는 지적하지 않는다. 그리고 최하층 여성은 성매매를 하면 된다는 주장은 기본적으로 왜곡된 성인식을 바탕으로 최하층계급 여성은 빈곤층이 되면 언제든지 성산업을 할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는 인식을 낳는다. 

세 번째 이유는 남성 빈곤 문제와는 다르게 여성 빈곤 문제는 집단/계층 간에 유사한 특징이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남성 빈곤은 저학력이라든지, 고시원에서 산다든지, 가족이 없다든지 하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빈곤의 원인을 밝히거나 빈곤의 결과로서 문제점들을 지적하기가 쉽다. 하지만 여성빈곤의 경우에는 주거형태, 학력, 고용형태 등의 측면에서 모두 차이가 존재한다. 즉 여성빈곤은 훨씬 파악하기 까다로우며 다층적인 이유로 발생하고 다층적인 형태로 드러나기 때문에 단일한 이미지로 제시되기 어렵다. 결국 <여성파산>이 제기하는 문제는 프리터와 흙밥이라는 이슈 사이에서 “빈곤해질 수조차 없는 여성”의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여성파산>이 가지는 중요한 의미는 고용형태/학력/주거형태/결혼유무 등의 세세한 차이를 통해서 여성빈곤 문제를 다룬다는 점이다. 조건들의 차이는 빈곤 형태의 차이로 이어지는데, 저자는 책 전반에 걸쳐 이러한 차이들을 가시화하고 이 차이들을 빈곤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성 계층화와 “위로 밀어 올리는 압력”


저자는 2000년 이후 대대적인 노동의 비정규직화로 인해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이 붕괴한 상황이 여성과 남성들에게 각각 다른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다. 안정된 고용이 보장되던 남성들의 상황이 열악해지면서 청년남성들은 직접적으로 눈에 보이는 경제적/사회적 타격을 받았다. 그래서 신자유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이 남성들에게는, “아래쪽으로 배제하는” 것이었다면 반대로 여성들에게는 “위로 밀어 올리는 압력”이 존재한다. 그러나 위를 향하는 “순풍”은 전반적으로 여성들의 삶이 나아졌다는 의미가 아니다. 신자유주의 이후로 남성가장의 임금만으로 생계를 유지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에서 여성들이 자의든 타의든 노동시장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따라서 여성노동자들에게 남성가장을 보조하는 기능에서 벗어나서 일정 정도의 활약을 촉발하는 시대적인 압력들이 생겨나게 되는데, 문제는 “위로 밀어 올리는 압력”마저 선택적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여성 계층화는 학력 등을 매개로 여성간의 ‘여여격차’를 벌리며 이루어지고 있다. 즉 “순풍은 주로 고학력 여성들을 향해 불고 있”(275)다. 여성들의 권리가 신장된다면, 그건 아마도 신자유주의가 야기한 고용불안정 속에서 발생한 남성생계부양자모델 붕괴라는 해프닝의 일정효과다. 고학력 정규직인 소수의 커리어우먼을 통해 ‘여성상위시대’라는 순풍이 분다면, 그 뒤편에서 수많은 여성노동자들이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사무직에서 서비스직으로 밀려난다. 이러한 여여격차의 시발점은 1985년 제정된 남녀고용기회균등법이다. 균등법은 심야 노동 규제 등의 여성보호규정을 폐지함으로써 노동의 형태를 기존의 남성들이 하던 장시간 노동과 동일하게 만들었다. 이에 따라 여성들은 경리직뿐 아니라 남성과 똑같이 일할 수 있는 종합직에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시기 여성들의 대학진학률은 14%였고, 전문대 진학률은 21%였다. 이때부터 많은 전문대졸 여성들이 대기업 종합직에 취업하게 되는 시기가 찾아온다. 90년대 후반이 되면 여성 대학진학률은 40%를 넘기며 점차 남성대학진학률을 웃돌게 되는데, 이렇게 대졸여성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전문대졸 여성들의 일자리는 대졸여성들로 채워진다. 이후 경제가 악화되면서 대졸 여성들마저 취업이 어려워지는 상황이 되자, 90%에 달하던 전문대졸 여성 취업률은 57%로 떨어지며 이들은 비정규직 일자리로 떠밀려난다. 즉 경제위기로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계층은 전문대졸 여성이었던 것이다. 이 시기 이후로 전문대졸 여성들이 취업하던 경리사무직마저 대부분 계약직으로 바뀌게 된다. 결국 종합직 여성과 비정규직 여성 사이의 급격한 격차가 만들어지게 된다.

한편으로 “위로 밀어 올리는 압력”은 여성들에게 이중의 노동을 부과하려는 의도다. 기혼여성의 경우에는 남녀고용기회균등법 이후로 일/가정 중 택일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를 양립하게 돕는 제도들이 마련된다. 이제는 독신의 커리어우먼이 아니라 아이를 키우며 직장을 다니는 슈퍼맘이 여성들의 롤모델로 제시된다. 일/가정에 있어 모두 뛰어난 여성이 성공모델로 등장하는 것이다. 애초에 남성 장시간 노동이 가능했던 이유는 가사와 육아 전반을 돌보는 아내의 역할이 뒷받침되어 가능한 것이었지만, 이제는 여성노동자들에게 장시간 노동과 가정이라는 두 영역이 모두 주어진다. 상황이 이렇다면 ‘여성상위시대’ 속에서 발전되었다는 여성들의 권리는 누구를 위한 권리였던 걸까? 결국 균등법을 통해서 표면적으로는 남녀가 균등한 기회를 보장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성들에게 이중 삼중의 노동이 가해지거나, 그런 노동조차 할 수 없는 사회적 박탈감을 만들었다. 




<여성파산>이 가지는 중요한 의미는 고용형태/학력/주거형태/결혼유무 등의 세세한 차이를 통해서 여성빈곤 문제를 다룬다는 점이다. 가령 고용형태의 측면에서 정규직 여성들은 과로사, 과로로 인한 자살과 정신장애, 직장 내 괴롭힘 등에 시달리며 이러한 전반적인 문제점들은 제2신규졸업자(대학 졸업 후 취업한 첫 직장에서 단기간에 퇴직하는 것)라는 보다 보편적인 현상으로 드러난다. 반면 비정규직 여성들의 문제는 위에 열거된 문제 외에도 저임금, 고용불안정 등의 문제가 더해진다. 여기서 고졸 여성의 경우에는 56%(대졸 여성은 28%)가 비정규직이며 임금 상승이 없고 갈수록 비정규직화 되는 서비스 직종밖에 선택지가 없다. 고교 중퇴 이하 학력일 경우에는 비정규직 비율이 89%이며 이러한 저학력 여성들은 단시간 아르바이트를 여러 개 전전하기 때문에 사회보험 등의 제도에서도 벗어나 있다. 

여기서 비정규직 비혼 여성은 남성임금의 60%에 불과한 임금을 가지고 전적으로 스스로를 부양해야하는 상황에 놓이는데 추후 이들의 부양가족이 전혀 없다는 점이 미래에 대한 부담감으로 작용한다. 또한 여기에는 대대적으로 행해진 저출산 대책이, 출산/육아를 하지 않은 여성을 대상으로 만들어낸 단죄가 더해진다. 한편에서 비정규직 여성의 결혼율은 정규직 여성에 비해 낮아지는데, 한국적인 맥락이라면 이 지점은 여성들의 생애주기모델 혹은 단계가 변화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표현일 수 있다. 하지만 비정규직일수록 결혼율이 낮은 상황에서 저출산과 높은 미혼율을 단죄하며 이루어지는 사회적 차원의 결혼 장려 문화는 어떨까. 이것은 저자가 지적하듯이 정체성의 위기감을 발생시킬 뿐만 아니라, 남성생계부양자모델이 사라진 시대적 상황에서 여성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새로운 삶의 형태라는 실험 자체를 불가능하게 할 것이다. 



‘자원의 파산’으로서 여성빈곤


빚을 갚을 능력이 완전히 없다고 판단될 경우 파산자는 파산선고를 받는다. 채무를 갚을 능력이 없고, 미래에도 없다고 예상될 때 파산이 선고되는 것이다. 선고를 받은 파산자는 경제적/사회적/금융적 불이익을 얻는다. 즉 파산은 경제적인 빈곤을 넘어서 사회적인 의미의 불이익을 받게 된다. 이렇게 파산의 의미를 되짚어봤을 때 ‘여성’이 파산했다는 것, 여성들이 모두 파산자가 되었다는 것, 그래서 “여성파산”이라는 것은 가능한 말일까? “파산”이라는 말을 통해 제기되는 관점은 여성들이 현재 구조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이 없으며, 그러한 상황을 변화시킬 능력이 완전히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파산”은 단순히 여성들이 처한 경제적 현실로서의 가난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왜 ‘여성들이 가난하다’는 말 또는 ‘여성빈곤 문제가 심각하다’는 말로는 부족해서 “파산”이라는 표현이 필요했을까? 빈곤을 대체하는 언어로서 파산은, 여성빈곤 문제에서 왜 중요한 것일까? 

책의 제목이 환기하는 관점, “파산”이라는 말에서부터 여성빈곤문제를 생각해야한다는 입장에서 저자는 빈곤을 이렇게 정의한다. “소득의 많고 적음뿐 아니라 가족이나 친구 같은 의지할 인간관계가 있는지, 교육받을 기회가 있었는지, 건강해서 사회 참여가 가능한지 여부 등 사람과 사회와의 관계에 주목해 빈곤을 인식하는 ‘사회적 배제’라는 개념이 일반화되고 있다.” (291) 

저자는 이러한 사회적 배제 개념을 통해 물질적인 빈곤 이상으로 빈곤의 의미를 넓히는 것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사례들을 통해 곳곳에서 빈곤을 발견한다. 예를 들어 부모와 함께 사는 미혼 여성이 가계소득 상으로 빈곤층이 아니더라도 본인의 가처분소득을 기준으로 보면 빈곤층에 해당할 수 있으며, 남편이 고소득자이더라도 이혼 후 빈곤층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는 전업주부라면 빈곤과 근접해있다. 현재 소득이 있더라도 향후 빈곤층으로 전락할 수 있는, 현실적인 안전망이 없는 조건에 놓인 여성들을 빈곤의 연장선상에서 보는 것이다. 즉 현재 소득의 빈곤상태 뿐만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걸쳐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기능하는 자원이 없다는 점에서 자원의 파산이라는 빈곤이 있다. 우리는 여성빈곤을 물질적 빈곤이 아니라 관계/자원 등의 결핍이라는 측면, 그리고 이러한 결핍에 맞서 이중 삼중의 노동을 수행해야 하는, 그래서 책의 부제처럼 “일할수록 가난해지는” 상태로써 읽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런 현실에 대한 해결책은 어떤 것이 될 수 있을까? 이제까지 저출산/결혼율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거나 기혼여성이 육아와 일을 양립할 수 있도록 돕는 제도들이 마치 여성을 위한 정책인 것처럼 등장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리얼주(리얼충)’와 ‘푸어주(푸어충)’라는 현상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한편으로 개별적인 여성들이 빈곤에 저항하면서 빈곤을 받아들이는 모습이기도 하다. 리얼주는 현실세계에서 열심히 “물질적 풍요보다는 인간관계나 그날그날의 만족스러움을 추구”하는 청년층의 경향을 의미한다. 반면 ‘푸어주’는 가난하지만 충실한 삶을 사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리얼주의 정신을 이어받은 극단이다. 


방송에서는 꿈을 위해 궁핍한 생활을 마다하지 않는 여성들과 돈을 들이지 않고도 하루하루  즐겁게 살아가는 비결 등을 소개 한다…“절약도 할 겸 베란다에서 채소를 키우고 있어요.” “다이소 같은 곳에서 파는 도구로 계절 분위기 나는 소품을 만들어 장식해요.” “채소 껍질을말려서 달짝지근하게 졸이면 정말 맛있어요.”  


앞서 청년남성의 빈곤이 일종의 포기상태로 드러났다면 청년여성들은 푸어주처럼 적은 자원으로 빈곤을 넘어서거나 대비하면서 자신이 처한 빈곤 상황을 모면해나간다. 나는 앞으로 ‘푸어주’와 같은 상황이 한국에서는 어떻게 전개되어왔는지 보고자 한다. 글의 말미에서 저자는 여성빈곤의 비가시화가 여성 자신의 빈곤을 인식하지 못하는 문제로 이어진다고 지적한다. 그동안 청년여성들이 흙수저 담론 안에서 남성청년의 언어로 자신의 빈곤을 설명해왔다면, 드러나지 못했던 여성빈곤은 어떤 식으로 표현되어왔으며, 앞으로 여성빈곤은 어떤 식으로 표현 되어야할까? 이 문제는 앞으로의 고민으로 남겨두고 글을 마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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