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인-무브


시라는 것을 아는 뻔뻔함

- 얀 사투놉스키의 후기 시 -

 

이 종 현 |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지난 410-11, 고리키세계문학연구소에서 <제목의 현상(Феномен заглавия)>이라는 제목의 학술대회가 열렸습니다. 문학작품의 제목만을 주제로 다루는 이 학술대회는 올해로 벌써 개최된 지 스물두 번째 해를 맞이했습니다. 운 좋게 저도 여기서 발표하게 되었고 제 발표 주제는 <얀 사투놉스키의 에피그라프에 나타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였습니다. 에피그라프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발표에서 써 먹었으니 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사투놉스키가 쓴 시에 대한 시들을 읽어보려고 합니다.

 

얀 사투놉스키(Ян Сатуновский, 1913-1982)는 필명이고, 본명은 야코프 아브라모비치 사투놉스키(Яков Абрамович Сатуновский)입니다. 그는 리아노조보 그룹의 다른 시인들보다 열 살 정도 나이가 많습니다. 1950년대 후반 삽기르, 홀린 등이 리아노조보에 오면서 시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반면, 사투놉스키는 이미 30년대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에 맞서 싸운 참전용사이기도 합니다. 삽기르는 사투놉스키를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나를 얀 노인이라고 부르시게.” 야코프 아브라모비치 사투놉스키가 젊은 우리에게 말했다. [...] 시인은 말랐고, 얄쌍한 얼굴에 작은 콧수염을 달고 있었다. 엘렉트로스탈에서 온 아저씨의 모습은 대체로 그러했다. 시는 다소 평범했고, 각운과 시의 소리는 어딘가로 숨어버려서 그의 시를 귀로만 들으면 무언가를 생각하거나 묘사하는 평범한 말 같았다. 이런 시에는 습관이 들어야 했다. 그 절대적인 비범함에 습관이 들어야 했다. [...] 얀은 시를 도서관 카탈로그 용지에 적었고 나중에 그것을 다른 종이에 옮겨 적었는데, 그것들이 점차 모여 그의 유일하고 통합적인 책이 되었다. 모든 시들은 번호를 달고 있었고 나중에는 1009번에 이르렀다.[각주:1]

 

삽기르의 말대로 사실 사투놉스키의 시들은 화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삽기르가 말하는 절대적 비범함이란 무엇일까 궁금해집니다. 리아노조보 그룹에 잠깐 몸 담았던 시인 에두아르트 리모노프는 70년대에 처음 만난 사투놉스키를 다음과 같이 회상합니다.


삽기르는 평범해 보이는 어떤 대머리 아저씨를 데려왔는데, 그는 경리과 직원이나 기를 법한 작은 수염을 달고 있었고, 그 아저씨는 손에 아보스카를 들고 있었다. [...] “, 시를 읽어줘.” 삽기르가 부탁했다. “읽어주세요, 읽어주세요!” 나도 거들었다. 얀은 아보스카에 손을 넣어 비닐봉지를 꺼냈고 종이를 펼치더니 드디어 시를 뽑아 들었다.[각주:2]

 

러시아인들은 그때도 비닐봉지를 좋아했나 봅니다. 요즘에도 모든 것을 비닐봉지에 싸서 다닙니다. 사투놉스키는 아마 시를 적은 도서관 카탈로그 용지들을 소중하게 비닐봉지에 말아 다녔을 것입니다. 왠지 사투놉스키는 사무용 팔 토시도 하고 다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소련 때 많이 사용하던 장바구니 '아보스카'



뻔뻔함

2012년에 번호가 달린 그의 시들을 모은 유일하고 통합적인 책[각주:3]이 출간되었고, 저는 그 책을 다행히도 인터넷 서점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었습니다. 시집을 쭉 훑어보면서 941이라는 번호가 붙은 모노스티흐(моностих) 한 편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모노스티흐는 영어로는 ‘monostich’, 독일어로는 ‘Monostichon’이라고 합니다. 그리스어로 모노스(monos)’하나를 의미하고 스티코스(stichos)’시행(詩行)’을 의미합니다. 영어사전에서는 ‘monostich’단행시(單行詩)’라고 옮기지만 저는 러시아어를 음차해서 모노스티흐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하나의 행으로 이루어진 시를 뜻하는 단행시라는 번역은 이 형식이 한 편의 라는 것을 너무 당연하게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사투놉스키의 모노스티흐는 무엇을 라고 가리킬 것인지의 문제가 얼마나 복잡한지 보여주므로 단행시라는 용어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941

 

Главное иметь нахальство знать, что это стихи.

 

4 июня 1976, Феодосия

 

941

 

중요한 것은 이것이 시라는 것을 아는 뻔뻔함을 갖는 것.

 

197664, 페오도시야



이 시는 사투놉스키가 말년에 쓴 시입니다. 리아노조보 그룹에서 활동할 때 쓴 시는 아니지요. 삽기르처럼 일상의 그로테스크를 보여주지도 않고, 홀린처럼 서정시의 경계를 적극적으로 지우려 하지도 않고, 크로피브니츠키처럼 시적 전통을 나름대로 활용하지도 않습니다. 삽기르의 말처럼, 생각을 압축적인 한 행 안에 그대로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우선 여기서 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보통은 시가 자기는 라는 것을 자동적으로 또는 직접 주장합니다. 그 근거는 어느어느 시집에 수록되었음, 어느어느 문예지에 게재되었음, 어느어느 시인이 썼음, 어느어느 시적 형식을 지니고 있음 등등 다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투놉스키의 한 문장에서 시는 스스로 시라고 밝힐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합니다. 누군가가 이것은 !”라고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임을 누가 알아줄까요? 신인의 등단을 결정하는 신춘문예 심사위원? 문학평론가? 독자? 모두 아닐 것 같습니다. 이 셋은 문학작품을 독해하는 일정한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니까요. 사투놉스키는 뻔뻔한 사람이야말로 시를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 뻔뻔한 사람은 A가 어떤 타당한 근거로 A가 되는지 아는 이가 아니라 아무런 근거 없이 이것이 바로 A!”라고 뻔뻔하게 외치는 자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어떤 시를 보고 이것은 시다라고 판단할 때의 뻔뻔함은 모든 시를 읽을 때 필요한 자질이 됩니다.

 

그런데 사투놉스키는 포커스를 줄여 뻔뻔함을 자신의 한 문장에도 투사합니다. ‘이것이라는 직시사가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발화를 가리키기 때문이지요. 화자는 중요한 것은 이것이 시라는 것을 아는 뻔뻔함을 갖는 것이라고 말하는 동시에 이 문장을 시라고 알아보는 뻔뻔함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화자의 요청 때문에 이 문장을 읽는 사람은 선택의 기로에 놓입니다. 그동안 억눌려 왔던 뻔뻔함을 발휘해 이것을 라고 말할 것인가 아니면 겸손하고 점잖게 이것은 가 아니라고 말할 것인가.

 

그런데 번역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문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라고 번역한 것은 사실 시행(詩行)’의 복수형입니다. ‘시행을 뜻하는 러시아어 단수는 스티흐이고 복수는 스티히입니다. 단수로 쓰일 때는 시의 한 행, 한 행을 가리키고, 복수로 쓰일 때는 보통 두 행 이상의 운문으로 이루어진 작품, 를 가리킵니다. 이 문장을 직역하면, ‘중요한 것은 이것이 시행들이라는 것을 아는 뻔뻔함을 갖는 것이 됩니다. 하나의 시행으로만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시행들’, 두 행 이상의 운문 작품으로 볼 수 있을까요? 하나의 시행을 여러 개의 시행들로 보는 뻔뻔함도 필요해집니다.

 

사투놉스키는 시의 운율로도 장난을 칩니다. 러시아어 발음을 라틴 알파벳과 우리말로 음차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Glavnoe imet’ shto eto stikhi. 브노예 이쯔 쉬토 토 스티’ (굵은 글씨는 강세가 있는 모음) 운율을 따져본다면 강약격의 음보가 처음부터 6개고 마지막 음보만 약강격입니다. (10/00/10/10/10/10/01: 1이 강세 있는 음절, 0이 강세 없는 음절입니다)[각주:4]시행들을 의미하는 스티히에서만 운율이 약강격으로 바뀝니다.

 

그런데 만약 시행’, 스티흐라는 단수형을 쓴다면 이 문장은 오로지 강약격의 음보 7개로만 이루어지게 됩니다. (10/00/10/10/10/10/1) [각주:5]상식에 맞게 이 문장을 단수인 시행으로 본다면 형식적 통일성은 유지됩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뻔뻔함이라는 단어가 넌센스가 되어 버립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하나의 시행이라는 것을 아는 뻔뻔함이 되는데, 이 문장은 7음보 강약격을 지닌 하나의 온전한 시행이므로 읽는 사람은 뻔뻔해질 이유가 없습니다. 넌센스로 남는 대신 형식은 말끔해 지지요. 한편, 마지막 단어를 시행들이라는 복수, 스티히로 해야만 뻔뻔함이라는 단어가 유지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강약격인 다른 음보들과 반대인 마지막 약강격 음보 때문에 형식적 통일성이 깨집니다. 말끔한 형식 대신 뻔뻔해질 수 있습니다.


군복을 입은 얀 사투놉스키

 

 


아님을 증명하라

이렇게 발화된 한 문장은 어떤 유보 상태에 계속 놓이게 됩니다. 겉모습이 너저분해지는 대신 뻔뻔해질 것인가 아니면 말끔한 대신 하나마나 한 소리를 할 것인가. 시의 형식이 낳을 수 있는 갈등을 잘 보여주는 시가 또 있습니다. 앞의 시가 모노스티흐라는 형식으로 시행의 경계 설정에 문제를 제기한다면, 다음 시에서는 와 대비되는 개념인 산문’, 그리고 이 둘 사이에 애매하게 걸쳐 있는 자유시를 걸고넘어집니다



315

 

Интенсивно

и формулированно

думаю 1/2 часа в день:

когда утром бегу на работу.

 

Содержание

может быть бессознательным.

Сознательной

должна быть форма.

 

Да,

но как же тогда

обезьяны (которые малюют)?

Ответ:

так же,

как соловьи (которые поют).

 

Поэзия,

опрозаивайся!

Проза,

докажи, что ты не верлибр.

 

9 августа 1964

 315

 

격렬하고

간명하게

하루에 1/2 시간 생각 한다:

아침에 직장으로 달려갈 때.

 

내용은

무의식적인 것일 수 있다.

형식은

의식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럼,

원숭이는 어떻게

되는 거지 (걔들 그림도 그리잖아)?

대답:

꾀꼬리들과

마찬가지입니다 (노래를 부르니까).

 

시여,

산문이 되어라!

산문이여,

네가 자유시가 아님을 증명하라.

 

196489



상당히 유머러스하게 들리는 1연을 읽어보면 과연 시적 화자처럼 하루에 30분만 생각할 수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그런데 30분 동안의 밀도 있는 사고가 얼마나 가능한가에 대한 문제는 일단 제쳐둔다면 규칙적인 일과로서의 이 사고는 의식적인 형식입니다. 그것은 매일 아침 직장에 갈 때마다 30분 씩 집중적으로 생각해야지!’라는 형식입니다. 이때,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는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화자는 이 ‘30분 생각의 형식에 그 어떤 내용도 들어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내용은 / 무의식적인 것일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림을 그리는 원숭이와 노래하는 꾀꼬리들도 의식적인 형식무의식적일 수 있는 내용을 담을 수 있을까요? 그 답은 이 시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3연에서 나타나는 질문과 대답의 형식이 내용상으로는 그 어떤 답을 주고 있지 못하니까요. 서로 같은 문장 구조를 가져 데칼코마니처럼 보이는 질문-대답의 형식에는 사실 아무 말이나 들어가도 상관없어 보입니다. 보통 어떤 앎을 담고 있다고 여겨지는 질문-대답의 형식은 그 어떤 의식적인 내용도 포함하고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3연은 1, 2연에서 제기된 의식적인 형식무의식적일 수 있는 내용의 관계를 작동시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갑자기 마지막 연에서는 시와 산문을 대비시키며 앞에서 했던 이야기와 상관없는 것을 말하는 듯합니다. 화자는 시에게는 산문이 되라 하고, 산문에게는 자유시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라고 요구합니다. 우선 자유시(верлибр, vers libre)는 그 어떤 형식적 율격, 각운도 지니지 않은 시를 가리킵니다. 자유시는 산문과는 다르게 어쨌든 행으로 나누어져 있고 이 행 구분이 텍스트의 해석에 큰 영향[각주:6]을 미칩니다. (율격은 있고 각운이 없는 시는 벨릐예 스티히’(белые стихи), 직역하면 하얀 시라고 합니다.)

 

현대 한국시에서는 자유시가 대부분이지만, 러시아시에서 자유시는 특별한 지위를 갖습니다. 소비에트 공식문학계는 자유시가 서방의 타락한 문화를 상징한다고 보았고, 자유시는 푸슈킨과 네크라소프의 전통에서 비롯된 성스러운 각운과 율격을 해칠 것이라고 비난[각주:7]받았습니다. 그래서 비공식 문학의 장에서 자유시를 쓴다는 것은 일종의 저항적 성격도 지니고 있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에서는 벌써 25년째 자유시 페스티벌(Фестиваль верлибра)’을 개최하고 있을 정도로 자유시는 러시아시에서 독특한 존재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투놉스키는 시에게는 산문이 되라 하고, 산문에게는 자유시가 아님을 증명하라고 말합니다. 첫 번째 주문은 쉽게 이해가 됩니다. 각운과 율격을 지닌 것으로 여겨져 온 시에게 이러한 형식적 굴레를 벗고 새로운 무언가가 되라는 것입니다. 앞 연들에서 제시된 의식적인 형식무의식적일 수 있는 내용이라는 공식에 비추어본다면, ‘라는 의식적인 형식을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형식을 벗어나는 것도 의식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두 번째 주문 역시 산문에게 자유시라는 의식적인 형식에 포섭되는 것을 의식적으로저항하라는 것으로 읽힙니다. 자유시를 쓴다는 것은 자유시가 지닌 문화적 의미 등을 염두에 두고 쓰는 것입니다. 사투놉스키가 보기에 산문은 굳이 자유시라는 형식을 통해 특정한 의미를 얻을 것이 아니라 그 어떤 형식에 포섭될 가능성을 끊임없이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산문은 무엇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되지 않을수만 있습니다. 시 역시 사투놉스키의 주문대로 산문이 된다면 마찬가지로 무엇이 되지 않을수만 있습니다.

 

이처럼 사투놉스키는 시도, 산문도 오로지 형식의 부정적 규정이라는 의식적 운동으로 남기를 바랍니다. A 아닌 것을 A라고 부르는 것이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하는 뻔뻔함이라면, A에게 그 무엇이든 되지 말라고 강요하는 것은 밑도 끝도 없는 뻔뻔함입니다.

 



의지의 부산물

그렇다면 의미의 결정이 영원히 유보되는 시, 무한히 형식을 부정하는 시를 어떻게 쓸 수 있을까요? 누군가 A를 쓰면 사투놉스키는 그것이 A가 아니라고 할 것이고, 그것에게 A가 되지 말라고 할 테니 말입니다. 어떤 긍정적인 규정이 안팎으로 차단된 상황에서 시적 발언의 주체가 취할 수 있는 하나의 태도를 다음 시가 보여줍니다.



630

 

Я маленький человек.

Пишу маленькие стихи.

 

Хочу написать одно,

выходит другое.

Стих — себя — сознает.

Стих — себя — диктует.

 

26 января 1969

630

 

나는 작은 사람.

작은 시들을 쓴다.

 

쓰고 싶은 게 있는데,

다른 게 나온다.

시는 자신을 의식한다.

시는 자신을 받아쓰게 한다.

 

1969126



1연을 보면 쓰는 사람이 작으므로 그가 쓰는 시들도 작다, 그러므로 시란 쓰는 사람에게 전적으로 달려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합니다. 하지만 2연에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시의 한 행 한 행은 쓰는 사람의 의지에 반해서 그 자체의 논리로 발생합니다. 얼핏 보면 전형적인 낭만주의적 시인관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낭만주의 시인은 뮤즈나 아폴론이 내려주는 영감으로 시를 쓰는데 이때의 그는 전적으로 수동적입니다. 하지만 사투놉스키의 시인은 일단 무언가를 쓰겠다고 작정하고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씁니다. 그 무언가가 그가 원했던 것은 아니었을 지라도요. 일단 무언가를 시로 쓰는 순간, 그가 원했던 것은 시라는 의식에 의해 왜곡됩니다. 어떻게 보면 시행은 이 의지의 직접적인 결과물이 아니라 의도치 않았던 부산물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시행의 입장에서 보자면 자연스러운 자기 발현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투놉스키의 이런 말만 들어보았을 때, 시의 논리는 구체적으로 어떤 형식을 띄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앞의 시에서 나온 하루에 30분 격렬하게 생각하기처럼 책상에 앉아 무언가 쓰기만이 유일한 의식적 형식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의식적 형식에 무의식적일 수 있는 내용이 들어간다는 점에서 시는 결코 예견할 수 없습니다. 사투놉스키의 이러한 생각은 다음 시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그가 직접 이 시를 읽고 녹음한 것[각주:8]도 같이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651

 

Поэзия — не пророчество, а предчувствие.

Осознанные предчувствия

                                НЕДЕЙСТВИТЕЛЬНЫ.

 

21 декабря 1969

 

651

 

시는 예언이 아니라 예감이다.

인식된 예감은  

                       효력 없음.

 

19691221



시인은 다가올 시대의 예언자! 어디서 많이 들어본 구호입니다. 시인은 다가오는 것을 예감한다! 이것도 역시 어디서 많이 들어보았습니다. 이 짧은 시에서 사투놉스키는 예감이라는 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생각해 봅니다. 우선 예감을 언어로 풀어서 설명한다면 예언이 될 것인데 사투놉스키는 예언은 시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예감이 언어로 옮겨지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인식되어야 하는데 이러한 예감은 사투놉스키에 따르면 진짜 예감이 아닙니다. 그것은 구체적인 모습을 띠고 있기 때문에 이미 인식된 것입니다. 사투놉스키는 인식되기 이전의 것만을 엄밀하게 가리켜 예감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예감을 뜻하는 러시아어 프레트추스트비예‘~의 이전을 뜻하는 프레트(пред)’감각(чувствие)’을 뜻하는 추스트비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통상적 의미에서 예감은 무엇무엇이 나타나기 이전에 그것을 미리 느끼는 것을 뜻합니다. 하지만 사투놉스키는 무엇무엇이 나타나기 이전과 이후라는 시간적 틀을 넘어선 새로운 차원을 가리키는 듯합니다. 그것은 바로 감각 이전, 인식 이전의 차원이 아닐까 싶습니다. ‘프레트추스트비예를 분리해서 감각-이전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두 시를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은 시인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시인은 무언가를 미리 느끼고 그것을 서둘러 언어로 적어보려고 책상에 앉습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을 가지겠지요. , 이것을 놓치지 말고 어서 시를 써야겠다! 하지만 예감했다고 여겨졌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 나옵니다. 이 경우 그는 그것을 예감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예감하고자 했지만 그가 미쳐 감각으로 지각하거나 인식하지 못한 것이므로 감각-이전의 것이 아닐까요?

 

여기서도 뻔뻔함이 필요해집니다. 시인이 무어무어라고 썼지만 그는 사실 다른 것을 쓰고 싶었습니다. 그의 의지가 취한 방향의 곁가지에서 나온 것은 엄밀히 말해 그의 시가 아닙니다. 그래도 그는 그것을 자기 시라고 말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일단 이 시는 그의 의지가 발현되었어야만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서둘러 그것에 자기 이름을 서명하는 뻔뻔함을 가져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나의시라는 것을 아는 뻔뻔함을 갖는 것! 이런 생각 때문에 사투놉스키는 자신의 선배인 예브게니 크로피브니츠키와 매우 다른 말을 하는지도 모릅니다. 다음은 크로피브니츠키가 시인들에게 내리는 충고입니다.



СОВЕТ ПОЭТАМ


Длинные стихи

Читать трудно

И нудно.


Пишите короткие стихи.

В них меньше вздора

И прочесть их можно скоро.

 

1965

시인에게 보내는 충고


시가 길면

읽기 어렵고

지겹습니다.


시는 짧게 쓰세요.

그래야 헛소리가 적고

금방 읽힌 답니다.

 

1965



다음은 사투놉스키의 시입니다. 크로피브니츠키의 시와 비교해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723

 

ПРОСТОТА СТИХА

была обманчива.

Она была

ХУЖЕ ВОРОВСТВА.

 

14 августа 1971

 

723

 

시의 단순함은

기만이었다.

그것은

도둑질보다 더 나빴다.

 

1971814



크로피브니츠키는 짧은 시, 읽기 쉽고 지겹지 않은 시를 쓰라고 시인들에게 충고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좋다고 생각하는 짧은 시에는 헛소리가 들어갈 자리가 많이 없어서 알맹이만 금방 읽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알맹이 자체도 단순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크로피브니츠키가 제안하는 시의 형식은 단순함을 지향합니다. 단순한 형식 때문에 알맹이도 거추장스러운 형식에 가려지지 않고 잘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시는 시인의 것이라는 생각이 숨어 있습니다. 크로피브니츠키에 따르면 시인은 시의 길이를 의식적으로 조정할 수 있습니다. 알맹이와 헛소리까지 모두 그가 절대적으로 관리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입니다. 시가 길면 헛소리가 많이 들어갈 수 있으므로 애초에 헛소리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시를 일단 짧게 쓰라고 충고하는 것이니까요.

 

한편, 사투놉스키는 시의 단순함을 가리켜 도둑질보다 더 나빴다라고 욕합니다. 그에게 시를 쓴다는 것은 시행의 자기운동에 슬쩍 올라타 서둘러 자기 이름을 서명하는 뻔뻔함’, 즉 일종의 도둑질입니다. 그런데 크로피브니츠키는 시가 시인의 것이라고 은근슬쩍 전제합니다. 사투놉스키가 보기에는 실제 사태가 그렇지 않은데 시가 마치 시인의 것인 양 시를 짧게 쓰라고 충고하는 것은 기만일 것입니다. 단순하게 쓰고 싶어도 다른 게 나오는그것에 대놓고 뻔뻔하게 의 이름을 적는 것이 차라리 솔직해 보입니다. 적어도 이 경우에는 시인의 뻔뻔한 짓거리가 모두 드러나니까요. ‘에헴, 시는 짧게 쓰시오라며 큰 어른인 척 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뻔뻔한 시인은 무엇을 지향할 수 있을까요? 만약 그가 탐욕스럽다면 모든 것에 자기 이름을 서명할 텐데, 그렇다면 그는 아무런 원칙도 갖지 않는 것일까요? 사투놉스키는 시가 할 수 있는 최대치를 블라디미르 이고레비치 야코블레프(Владимир Игоревич Яковлев, 1934-1998)라는 화가의 그림을 통해 에둘러 가리키는 듯합니다.


 

694

 

Художник Володя Яковлев

 

То есть до чего

поразительно:

вместо приблизительной точности

точная приблизительность.

 

8 ноября 1970

 

694

 

화가 볼로댜 야코블레프

 

그러니까, 어느 정도로

놀랍냐 하면:

근사(近似)한 정확성 대신

정확한 근사치.

 

1970118




저는 사실 야코블레프의 그림을 보아도 이게 어째서 정확한 근사치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사투놉스키는 여기서 정확한 근사치를 보고 싶어 한 듯합니다. 그리고 이 정확한 근사치는 지금까지 사투놉스키가 말한 의지에서 빗겨나가는 시, ‘감각-이전의 시가 추구할 수 있는 최선으로 보입니다. 우선 근사한 정확성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어떤 뚜렷한 지점을 겨누고 최대한 그것에 가까워지려고 하지만 결코 도달하지 못하는 상태. 아니면 그 지점에 정확히 도달했다고 말하지만 절대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어쩔 수 없이 근사치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상태. 이 두 가지 상태들은 목표 지점과의 비교될 때만 의미를 갖습니다. 무엇무엇과 얼마나 비슷하다 비슷하지 않다, 가깝다 가깝지 않다 등등. 의지를 동원해 목표 지점을 겨누고 그곳에서 먼지 가까운지를 인식해야 합니다

 

블라디미르 야코블레프. <붉은 꽃 (Красный цветок)> (1960) 



그러나 정확한 근사치에는 도달해야 할 목표지점이 없습니다. 근사치가 되겠다는 것 자체가 목표가 됩니다. 오히려 절대적인 근사치 그 자체로 남습니다. 흔히 근사치는 대략 얼마쯤이라고 이야기됩니다. 하지만 사투놉스키는 그 근사치 자체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것을 예찬합니다. 대략적으로 정한 원주율 3.14의 소수점 아래 값을 정확히 그 끝까지 늘어보자는 것입니다. 3.1415926535897932384626433832795028841971... 끝이 없으니 정확성은 결코 도달될 수 없습니다. 다만 그 끝을 모르면서 근사치 자체를 무한히 기록하려는 열정만큼은 정확성을 추구합니다. 자기가 하고 있는 것이 정확한 값이라고 결코 말하지 않을 뿐입니다.

 

언제나 근사치로 남겠지만 그 근사치를 무한히 정확하게 기록해 보겠다는 생각도 뻔뻔함과 연결되는 듯합니다. 사투놉스키의 시에서 시인은 무엇을 원하지만 언제나 다른 것이 나옵니다. 그는 의지하는 지점에서 빗나가는 근사치들을 그대로 기록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종이에는 끝이 있기 때문에 일단 자기가 도달한 근사치들을 기록하고 서둘러 마무리하고자 일단 자기 이름을 뻔뻔하게 서명합니다. 그러한 실험들을 반복적으로 하느라 그의 시들은 1000번이 넘어가는 번호들을 받았던 것 아닐까요?


다음에는 리아노조보 그룹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프세볼로트 네크라소프의 시집 <리아노조보>를 읽어보겠습니다

PS. 뻔뻔하게도 사투놉스키의 리아노조보 그룹 시절에 대한 시들은 읽지 않고 리아노조보 그룹의 시인에 대해 이야기한 셈이 되었습니다. "쓰고 싶은 게 있는 데 / 다른 게 나온다."


  1. http://rvb.ru/np/publication/sapgir2.htm#28 [검색일: 2018.04.21] [본문으로]
  2. http://www.kkk-bluelagoon.ru/tom1/satunovsky.htm [검색일: 2018.04.21] [본문으로]
  3. Сатуновский Я. Стихи и проза к стихам. М.: Виртуальная галерея. 2012. [본문으로]
  4. 두 번째 음보에서는 강세를 받지 않는 음절만 두 개인데, 이럴 경우에도 주변의 율격과 같은 것으로 봅니다. [본문으로]
  5. 마지막 음보가 강세 있는 음절 하나로만 끝나는데, 시행의 마지막에서 이럴 경우 앞의 율격과 같은 것으로 봅니다. [본문으로]
  6. Гаспаров М.Л. Русский стих начала ХХ века в комментариях. М.:2001, С. 14-15. [본문으로]
  7. Орлицки Ю. История с верлибром // Арион. №1, 2014. http://www.arion.ru/mcontent.php?year=2014&number=93&idx=1544 [Дата обращения: 25.04.2018.] [본문으로]
  8. 이 녹음파일은 다음 사이트에서 받아 왔습니다. www.litkarta.ru/mediateka/letter_С/ [본문으로]
댓글 로드 중…

최근에 게시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