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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이주여성과 함께 ‘우리’가 열어젖히는

정치적 가능성의 공간에 대해


- 주디스 버틀러의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를 경유하여 


문희정 시인


2018년 1월에 있었던 서지연 검사의 고발을 필두로 하여, ‘미투’의 물결이 우리 사회의 잘 보이지 않던 권력 불평등, 젠더 불평등의 깊고 거대한 뿌리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미투의 내용은 크고 작은 성폭력들에 관한 것이며 그 형식은 ‘말하기’이다. 이 말하기는 누가 말하고 누가 듣는 것인가. 이에 대한 간명한 대답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말할 수 있는 자가 말하고 또 그 말을 듣는 자가 이어 말하며, 그 들음과 말함의 폭발적이고도 지속적인 연쇄가 인식론적, 실제적 억압과 폭력으로 가로막혀 있던 공간을 열어젖히리라는 것. 여성은 오래도록 그 말하기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여러 겹으로 입이 가로막혀 있었다. 우리들은 이제야 겨우 조금씩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말들의 물결은 계속될 것이고 또 계속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나는 그 물결에 대해 무한한 지지를 보내면서도 동시에 그 말하기의 조건 혹은 능력조차 온전히 갖추지 못한, 이중으로 배제되고 지워질 수밖에 없는 자들에 관한 이야기 또한 이뤄져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 범주에는 이주여성과 지적장애인 여성, 성매매 시장에 내몰린 가출 청소년 여성 등이 포함되겠지만, 여기서 나는 이주여성에 관한 논의만을 집중적으로 다뤄볼까 한다. 그들의 주된 곤란을 들자면 즉각적으로 언어 사용의 한계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놓인 상황적 곤란을 생각할 때, 이주여성은 이 사회에서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가도록 하는 가장 기본적인 허가증이라고 할 수 있는 주권과 관련한 문제에 일차적으로 봉착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한계는 그들의 미투를 제한하는 장해 요소인 동시에 그들의 성폭력 피해를 더 넓게 퍼져 나가도록 하고 더 깊게 감내하도록 만드는 요소이다. 미투의 물결 가운데에서도 그들은 여전히 이중으로 배제되고 지워지는 자, ‘서발턴’의 몸으로 흔들림 없이 가라앉는 중이다.

이러한 한계 상황에 놓인 그들의 몇몇 구체적 사례를 제한적으로나마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겠다. 이완 아시아 인권문화연대 대표는 “한국에는 남성, 여성 그리고 이주여성이 있어요.”라고 한탄하곤 했다는 한 이주여성의 말을 인용하면서, 지난 3월 9일에 국회에서 있었던 이주여성들의 미투 사례발표에 나왔던 이야기를 전했다. “사업주에게 성폭행 당했으나, 도망칠 수 없었다. 사업장 변경에 사업주가 동의하지 않으면 불법체류 신분이 되기 때문이다.”는 한 사례[각주:1]에 대해. 2017년 11월에는 태국인 여성 노동자인 추티마(사망 당시 29세) 씨가 ‘불법체류 단속이 있으니 내 차에 타라, 피신시켜 주겠다.’는 공장 관리자 김 씨의 말을 듣고 그의 차에 동승했다가 성폭행 시도 끝에 살해당하는 일도 있었다. 추티마 씨는 12년 전 18세의 나이로 가난한 가족 생계를 돕기 위해 관광비자로 입국해 일하다 미등록 신분이 된 여성이었다. 경기 안성의 한 자동차 부품제조업체에서 10년간 일해오던 그녀가 열세 살 딸과 가족 생계 걱정에 김 씨를 따라나섰다가 경북 영양군의 야산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 것이다. 추티마 씨의 아버지는 그녀가 평소 가끔 전화를 걸어 공장 관리자가 자신에게 치근덕거린다는 얘기를 해 왔다고 했다. 유족은 김 씨가 성폭행을 시도하다가 추티마 씨를 살해했다고 말하지만 김 씨는 감금과 폭행 혐의로만 기소된 상태이다.[각주:2] 이 두 건의 사례는 불법체류 신분과 관련하여 이주여성들이 극단적인 동시에 일상적인 억압과 폭력의 사각지대로 내몰린 상황에 관한 이야기다. 이 경우, 주권이라는 자격, 즉 그 자격의 바운더리 자체가 한 인간을 인간으로 살지 못하도록 강제하는 수단이 되는 셈이다. 


위 그림의 통계자료[각주:3]를 참조할 때 성희롱과 성폭력에 대한 이주여성들의 공적 말하기는 인권단체 상담 후 대응 6.7%, 노동부 신고 2.2%로, 이 둘을 별개의 대응으로 놓고 합산한다고 해도 그 비율이 10% 이내인 것을 알 수 있다. 실로 미미한 수치가 아닐 수 없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성폭력 피해 경험의 유무에 대한 답변의 수치 결과가, 노출 가능한 일반적 설문조사와 별도 심층 면접조사에 있어 극명하게 갈린다는 점이다. 일반적 통계에서 10% 수준에 머무르던 것이 면접을 통한 심층적 통계에서는 100%에 육박한다는 것. 이 같은, 드러내놓고 말할 수 없음의 상황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그들이 자신의 언어를 말하지 못해서, 혹은 이 땅의 언어가 서툴러서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타국의 언어를 서툴게나마 소리 내어 말하려는 시도, 통역이라는 제도적 장치를 이용하려는 시도에 앞서 그들의 입에 이미 치명적인 재갈이 물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 재갈은 주권박탈과 갈 곳 없음의 위기에 대한 두려움의 다른 형상이리라.

한국인 남성과 결혼하여 이곳에 정착하게 된 결혼 이주여성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 경우 이주여성은 자신의 체류자격을 연장하려면 매번 한국인 남편과 함께 출입국관리소에 동행해야 한다. 중앙정부와 지방자체단체를 막론하고 정부가 여성을 한 사람의 존엄한 인격체가 아닌 한 국민의 배우자와 한 국민의 엄마로서만 그 존재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것의 또 한 증거는 일부 지방자치단체의 이주여성 담당 부서의 명칭이 ‘출산·다문화팀’이라는 점에서도 찾을 수 있다.[각주:4] 새로운 땅을 찾아 떠나온 한 무고한 인간을 이 나라의 저출산 현상과 고령화 현상을 해소할 대책의 도구로만 바라보면서 그를 반쪽짜리 국민으로, 더 나아가 언제든 추방 가능한 잠재적 임시체류자로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경우를 보자. 필리핀에서 심리학을 전공하던 대학생 케이트(가명·22) 씨는 2년 전 지인 소개로 한국에서 왔다는 기획사 관계자를 만났다. 그녀는 오디션을 보았고 쉽게 합격되었다. 그런 식으로 케이트 씨는 기획사와 ‘엔터테이너’ 계약을 한 뒤 예술흥행비자(E6-2)를 받아 한국에 왔다. 그것은 국내 호텔과 클럽에서 가수나 댄서로 일할 수 있게 하는 비자였지만 그녀는 한 번도 무대에 설 기회를 얻지 못하고 술시중만을 들다가 결국 수순처럼 성매매에 강제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케이트 씨와 같은 경우가 예술흥행비자가 활용되는 가장 모범적(?) 프로세스라도 되는 양 이런 사례는 널려 있다시피 하다. 이들은 업주의 24시간 감시로 업소를 벗어나기 어렵다. 업소에서 도망을 치면 기획사 측이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에 신고해 비자 효력을 정지시킨다.[각주:5] 인신매매와도 같은 불법적 사기와 협박과 감금으로 한 인간의 인권을 유린한 자들이 오히려 자국의 법망을 이용하여 피해자를 잠재적 범법자로 몰아가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지 다시 묻고 싶다.

이주여성의 사례를 논하는 사이사이 언급했던, 그들 삶의 곤란의 직접적 동인이기도 했던 그 ‘주권’에 대한 생각을 이쯤에서 본격적으로 풀어놓아야 할 것 같다. 이에 대해 주권과 관련된 문제적 상황을 논하겠다고 하면 누군가는 지극히 단순한 물음을 던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주여성에게 허락된 다양한 비자(VISA) 발급이라는 대안적 체류권이 있지 않느냐고. 그런 합법적 절차를 거치면 문제될 게 없다고. 혹은 또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다. 그들이 어떻게 일정한 세금을 매달 예외 없이 납부하는 우리 국민과 같은 조건에 놓일 수 있겠냐고. 딱 필요한 만큼만, 즉 출산이나 가사노동을 포함한 값싼 노동력을 위한 인원만 수용하고 나머지는 다 그들의 나라로 돌려보내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느냐고.

그러나 이런 언설들은 국민주권이라는 제도 자체가 만들어내는 상징체계의 한계, 인식의 한계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음을 반영한다. 국민, 특히 한 민족에게 주어지는 주권이 있다고 할 때 그것은 국민주권이라는 기준에 의해 주권의 테두리를 설정하는 것이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진리임을 의미한다. 더불어 국민이 아님에 의해 그 테두리 바깥으로 밀려나는 존재에 대한 존재부정 또한 합당하고도 자연스러운 일임을 암시한다. 그 바깥의 존재에게 행해지는 어떤 폭력이나 위해도 그저 ‘자연’의 차원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자연은 루소가 말하는 소위 ‘순수 자연 상태’는 아니다. 그것은 국가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권리가 박탈된, 그저 자연처럼 보이는 상태이다. 인간의 문명과 욕망과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장소에서 일어나는 폭력이 자연이라는 이름을 빌린 것일 뿐이라는 말이다.

그 단적인 예로 위에서 언급했던 불법체류 단속에서 피신시켜 주겠다는 관리자에 의해 성폭행 시도 후 살해당한 추티마 씨의 경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그녀는 ‘완전한 자연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자연 상태의 막다름 속에서 그녀의 선택은 지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평소 성추행을 일삼던 관리자가 내민 손이라도 잡아야만 했던 것이다. 그녀의 경우를 차치하고도 위에서 인용한 대부분의 사례에서, 자연 상태에 놓일 위기, 즉 ‘불법체류 신분’이 될 위기를 늘 안고 있다는 구조적 상황 자체가 이주여성의 입을 막고 그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감금 상태에 놓이게 하는 힘이라는 것 또한 확인할 수 있다.

강조하고 넘어가야 할 점은 이런 주권 없음의 상태가 온전한 순수 벌거벗음의 상태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순수한 자연 상태에 그들이 놓이게 되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와도 통하는데, 이는 그들이 단순히 한 국가의 보호나 책임의 바깥에 놓여있기만 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 벌거벗음의 상태는 바로 그 국가가 야기하는 위력에 의해 그들이 희생되는 상태를 말하기 때문이다. 주권 없음의 삶 위에 가해지는 폭력과 위해를 국가가 방조하는 것을 넘어, 이상적인 듯 보이는 어떤 기준을 근거로 하여 주권을 박탈하는 식으로, 그 폭력과 위력이 허락되도록 국가가 직접적으로 권력행사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주권과 관련하여 버틀러는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각주:6]에서 아렌트의 <민족국가의 쇠퇴와 인권의 종말>이라는 논문 안에 담긴 인권 담론에 대한 비판을 소개하고 있다. 아렌트는 기존의 인권 담론을 폐기하면서 그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인간의 권리를 주장하고 주창한다. ‘삶의 터전을 가질 권리(rights to a home)’와 ‘권리를 가질 권리(right to rights)’, 그리고 ‘자유를 가질 권리(right to freedom)’에 대해. 이 ‘권리(right)’는 국가나 정부에 근거한 것이 아니기에 고정적, 가시적 권리라 할 수 없다. 이 권리는 권리들(rights)에 앞서는 권리이며 권리들을 위한 권리이다. 이러한 권리는 늘 주어져 있거나 항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삶의 터전과 권리들과 자유를 달라고, 나에게 그것을 달라고 요구할 권리가 있음을 안다고 말할 때, 즉 한 장소에서 누군가가 말하고 행위하면서 정치적 주체의 모습으로 출현할 때 비로소 주어지는 권리인 것이다. 그런데 권리(right)에 대한 이 같은 정의는 이제까지는 없던 명제였다. 아렌트는 그 자신의 선언을 출발점으로 잡아 전에 없던 새로운 정치의 공간을 열고 있는 것이다.

뒤이어 버틀러는 시선을 틀어 해당 논문의 화법을 들여다본다. ‘나’라는 1인칭 주어구문이라곤 찾을 수 없는, ‘우리’라는 주어로만 시작되는, ‘우리’라는 대명사가 들끓고 있는 텍스트의 현장을 말이다. 그리고는 묻는다. 아렌트가 ‘나’가 아닌 ‘우리’를 고집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하고. 그것이 어떤 소속양식이나 소속할 권리에 대한 염원의 표현이라면, 그 소속양식은 어떤 형태였을까 하고. 아렌트는 민족국가의 종말 이후에 이를 대신할 수 있는 ‘연방’이나 정치체를 사유한다. 그 정치체란 삶의 터전을 가질 수 있는 권리와 권리를 가질 권리, 자유를 가질 권리를 말하고 수행하는 동시에 그 권리가 획득되는 공간 혹은 공동체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러한 정치체에 대한 사유와 발화가 곧바로 실제적 현실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분명 새로운 시작을 촉구하는 담론적 절차로써 중대한 의미를 가질 것이라고 버틀러는 말한다. ‘새로운 가능성을 유도하고, 선동하고, 요청함’으로써 말이다.

버틀러는 이 ‘우리’라는 대명사에 더욱 주목하면서 다음의 예를 통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우리’ 담론을 펼치기에 이른다. 2006년 봄, 캘리포니아의 주요 도시에서 ‘불법’ 거주자의 권리 보장을 요구하는 대규모 거리 시위가 있었는데, 그때 사람들이 거리에서 미국 국가(國歌)를 멕시코 국가와 함께 스페인어로 노래한 사건이 바로 그 예이다. 버틀러는 이때의 거리에 대해 ‘집회의 자유를 얻지 못한 자들이 자유롭게 모이는 모순의 장소’라는 탁월한 정의를 내놓는다. 이 모순의 장소가 역동적인 창조의 공간을 열어젖힌다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노래를 부를 장소로 거리가 선택된 것이 아니라, 노래를 부름으로써 거리가 자유로운 집회 현장으로 재구성된다는 점이다. 노래를 부르는 행동은 자유의 표현이자 권리를 향한 호소이다. 또한 그것은 거리라는 공간의 틀을 다시 짜고, 법적으로 금지된 바로 그 순간에 집회의 자유를 실천하는 행위이다. 버틀러는 이 같은 상황이 정확하게 아렌트가 말하는 ‘권리를 가질 권리’를 시사한다고 말하면서 거리에서의 권리 요구와 그들이라는 ‘우리’가 부르는 노래 사이에서 권리를 가질 권리가 행사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나는 크게 버틀러의 두 가지 논지에 기대어 주권의 한계를 넘어서는 우리의 정치적 실천과 수행에 대해 말하고 싶다. 그 하나는 버틀러에 의해 이끌려 나온 한나 아렌트의 ‘선언’과 관련된다. ‘삶의 터전을 가질 권리’와 ‘권리를 가질 권리’, 그리고 ‘자유를 가질 권리’에 대해서 아렌트는 선언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국가권력이 부여하고 제한하고 강제하는 권리(rights)가 아니다. 그것은 한 인간이 평등한 인간으로서 살아가길 스스로 요구하고 선언하는 권리(right)로서의 권리이다. 누군가가 주장하고 수행할 바로 그때 권리로 완성되는 것. 예컨대 이 땅으로 건너온 이주여성이 자신이 살아갈 터전을 외치고, 우리와 같은 권리를 갖기를 외치고,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인간으로서의 자유를 갖기를 외칠 때, 그 외침에 의해 그들에게 그 모든 것이 주어질 수 있기를 나는 희망한다. 아니, 희망한다는 그 맥없는 말을 선언으로, ‘나’라는 말을 ‘우리’로 교체하고자 한다. 우리는 그 권리가 그들에게 주어지길 함께 노래하고 선언한다. 아렌트를 따라 우리는 포기 없이 끈질기게 그 모든 차이에 관계없이 인간이 같은 인간으로 차별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유도하고, 선동하고, 요청’한다.

두 번째로 언급하려고 하는 버틀러의 논지도 이런 정치적 실천의 맥락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 그녀는 부자유한 자들의 대명사인 미등록 이민자들이 자유롭게 모여 자유를 외치는 ‘모순의 장소’를 주목하고 있다. 존재 자체가 불법인 자들의 집단적 노래가, 금지된 장소를 자유로운 집회 현장으로 재구성해내는 그 전복적 순간에 버틀러는 주목하는 것이다. 이것은 미등록 이민자 당사자들의 외침에 대한 예시이다. 그들 스스로가 직접 거리로 나와 ‘우리’가 되어 열어젖히는 정치적 공간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하지만 그런 전복의 열쇠는 노래가 ‘합창’으로 전환되는 데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누가 그 노래를 함께 부르는가도 중요하지만, 그렇게 함께 부르는 노래가 어디에까지 뻗어나가 공명하는가, 그러한 공명이 어느 벽을, 얼마나 많은 벽을 타 넘는가를 보아야 한다. ‘나’가 아닌 ‘나들’이 ‘우리’로서 몰려나와 연대할 때 한 공간이 다른 공간으로, 제한과 고착과 닫힘이라는 불가능성이 자유와 전복과 열림이라는 가능성으로 일시에 뒤집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국민주권이라는 보이지 않는 폭력이 만든 모든 가두리와 경계들을 해체하는 일에 대한 말이다. 국민주권이라는 제도와 구조 자체가 만들어내는 상징체계의 한계와 인식의 한계를 알 때, 또 그것이 얼마나 인위적이고 임의적인 권력의 산물인가를 알 때 이 일은 가능해지리라. 주권이라는 절단의 획에 의해 인간임이 지워지는 그들은 우리의 타자가 아니다. 그들이 곧 우리이다. 그런 우리가 우리로써 함께 말하고 노래하고 행동할 때 모든 인간이 다르지 않은 한 인간으로 살아갈 만한 정치적 가능성의 공간을 열어젖힐 수 있다.


  1. 경인일보 2018월 4월25일자 기사 참조. 제22면 <수요광장>이주여성의 미투가 가능하려면 by 이완 [본문으로]
  2. 동아일보 2018년 2월28일자 기사 참조. [이주여성들 ‘외칠 수 없는 미투’]<上> ‘추방 공포’ 파고든 성폭력의 덫 by 조은아, 위은지 [본문으로]
  3. 각주 2)와 같은 기사의 그림. [본문으로]
  4. 각주 1)과 같은 기사 참조. [본문으로]
  5. 동아일보 2018년 2월28일자 기사 참조. [이주여성들 ‘외칠 수 없는 미투’]<下> 인신매매 통로된 예술흥행비자 by 위은지, 조은아 [본문으로]
  6.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by 주디스 버틀러 & 가야트리 스피박, 산책자, 200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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