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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화의 이론으로서 <시네마> 읽기(2/2)

-분열분석과 영화의 현상학

 Schizoanalysis and the Phenomenology of Cinema

조 휴즈 Joe Hughes

 번역: 조지훈|서교인문사회연구실 

영화이론 세미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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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동적 종합에 대한 <의미의 논리><안티 오이디푸스>의 차이

초월론적 무의식의 일반적 구조는 이미 들뢰즈가 <의미의 논리>에서 매우 자세하게 펼쳐놓은 바 있다.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를 재현의 발생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논리적이고 정신분석학적 소설로서 묘사했다. 이러한 일반적인 이야기에서, 두 가지 하위 플롯이 있다: ‘동적발생정적발생’. 우리가 관심을 갖지 않는 정적발생은, 비물질적 초월론적 장(잠재적인 것)에서 명제의 형식에 의해 구조화된 경험적 의식으로 이동한다. 그것은 종종 현행화의 이름으로 지나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이 발생과 그것에 의해 근거한 전체 초월론적 장은 동적발생을 예견한다. 정적발생과 대조하여, 동적발생은 부분대상의 물질적 영역 안에서 시작하고, 비물질적 초월론적 장을 수동적 종합의 계열을 통해 생산한다. 만약 우리가 <안티 오이디푸스>의 초월론적 무의식을 동적 발생의 순간들과 비교해본다면, 우리는 그들이 많은 부분에서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먼저, <의미의 논리>에서 동적발생은 부분대상의 물질적 영역과 함께 시작한다. 들뢰즈는 이 영역에 다양한 명칭을 부여한다. ‘일차적 질서’, ‘물체적 심도’, ‘분열증적 혼합’, ‘이드와 기타 등등. 그러나 어떤 이름이든 간에, 이 영역은 물질적 파편혹은 부분대상이 하나가 다른 하나에 충돌하는 장소다. 일차적 질서에서 모든 것은 신체이고 물체이다. 모든 것은 신체의 혼합이고, 그 신체 안에서, 서로 맞물리고 서로 관통하는 것이다.’ 신체들은 우주적 오수 구덩이(universal cesspool)에서 폭발하고 다른 신체들을 폭발하게 야기한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처럼, 세 가지 수동적 종합에 의해 구조화된 무의식은 마침내 이 카오스적인 물질적 장의 기초 위에서 생산되는데, 그러나, 본질적으로, 이 장과 그 장 안에 거주하는 부분대상들은 무의식과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물질과 기억>에 대한 암시를 통해 <시네마1>과 분명하게 공명하는 한 공식화 안에서, 들뢰즈는 심지어 다음과 같이 말하는데 까지 나아간다. 이 장 안에서 하나의 신체는 다른 신체를 관통하고 모든 부분들 안에서 그것과 함께 공존한다. 마치 대양 속의 와인 한 방울이나 강철 안의 불처럼 말이다.’ 일차적 질서는 종합하는 무의식에 대한 어떤 참조도 하지 않은 채 부분대상들 스스로 자신들 사이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을 재현한다.

이러한 신체들의 혼합 안에, 들뢰즈가 자아혹은 기관 없는 신체라고 불렀던 무언가가 있다. 기관 없는 신체는, 이 지점에서, 첫 번째 수동적 종합을 유발하는 종합의 힘(유동적인 원칙인) 말고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것은 물체적 심도 안에서 회전하거나 폭발하는 물질적 파편들을 묶거나 용접하기 시작한다. 들뢰즈는 이런 구속(binding)연접의 첫 번째 종합이라 불렀다. <안티 오이디푸스>의 첫 번째 종합과 같이, 이러한 종합은 직접적으로 물질적 영역의 부분대상들을 포착하고, 종합이 잡다를 생산하는 것처럼, 이 종합은 예상된 부분대상들의 이미지 말고는 아무 것도 아닌 신체의 부분적 표면들을 생산한다. 이는 신체의 부분적 표면들을 전체 표면 안으로 모으는 두 번째 종합인 통접으로 이끈다. 여기에서 <의미의 논리><안티 오이디푸>와 절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그 단어들을 너무 많이 강조하지 말아야 한다. 이 두 책 안에서 두 번째 종합은 같은 기능을 가졌고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첫 번째 종합에 의해 포착된 정보를 받아들이고 기록했던 <안티 오이디푸스>의 두 번째 종합처럼, <의미의 논리>의 두 번째 종합은 첫 번째 종합 안에서 생산된 부분적 표면들을 받아 들이고 이를 묶어낸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종합인 이접이 있다. <안티 오이디푸스>의 세 번째 종합이 첫 번째 종합과 두 번째 종합을 조화시키려고 노력했던 곳에서, <의미의 논리>의 세 번째 종합은 첫 번째 종합과 두 번째 종합을 조화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안티 오이디푸스><의미의 논리>의 유사성이 진짜로 멈추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바로 이 세 번째 종합 안에서이다.

세 번째 종합에 대한 두 설명들 사이의 차이에 대한 연구에 앞서,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바로 그 형식적인 수준에서, <안티 오이디푸스><의미의 논리>는 두드러지게 유사하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두 책 모두 무의식을 생산의 과정으로서 혹은 발생으로서 기술한다. 두 책 안에서 이러한 발생은 부분대상들혹은 물질적 파편들이 거주하고 있는 물질적 장 안에서 시작된다. 두 책 안에서 두 번째 종합은 첫 번째 종합이 남겨둔 곳을 이어받고, 세 번째 종합은 전자의 두 종합을 조화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의 도식적 재현을 <의미의 논리>에 대한 형식적 기술로서 사용할 수 있다.

1. 물질적 영역

2. 첫 번째 수동적 종합

3. 두 번째 수동적 종합

4. 세 번째 수동적 종합

 

           

 

세 번째 수동적 종합의 특징은 확정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는 상대적으로 간단하다: 세 번째 종합은 두 번째 종합에 반하여 첫 번째 종합을 측정하고, 강도의 형식 안에서 둘 사이의 차이를 표현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세 번째 종합을 전자의 두 종합의 조화로 묘사했고, 그것은 명백하게 성공적인 조화로 나타난다. 그러나 <의미의 논리>에서 세 번째 종합은 실패한 종합이다. 그것은 재인 혹은 조화하려는 시도로서 시작한다. 그러나 들뢰즈는 이러한 처음의 시도를 오로지 의도된 행동혹은 일반적 행동의 이미지, 다시 말해 행동 이미지라고 부른다.

첫 번째 종합에서, 자아는 부분대상들을 수동적으로 종합한다. 두 번째 종합에서, 자아는 부분적 표면들을 수동적으로 종합한다. 세 번째 종합에서, 자아는 수동적으로 종합을 지속하고자 하는데,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성공하지 못한다. 세 번째 종합 안에서 정확히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의도된 행동이 더 이상 실제로 완수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은 명확하다, 그리하여 세 번째 종합은 두 부분을 갖는다. (1) 의도된 행동과 (2) 효과적으로 완수된 행동. 효과적으로 완수된 행동은 일반적으로 수동적 종합의 감각-운동 구조의 붕괴다. 두 번째 종합이 만들어낸 신체의 표면은 허물어지고, 모든 것은 새로운 형이상학적 표면 혹은 순수 사유의 표면위의 새로운 종류의 종합에 복종한다.

 

강도를 낳는 대신에, <의미의 논리>의 세 번째 종합은 사유의 형이상학적 표면을 산출한다. 들뢰즈는 <시네마>의 독해를 조명해줌이 틀림없는 이러한 표면에 관해 특별히 중요한 무언가를 말한다. 이러한 새로운 표면, 즉 사유의 형이상학적 표면 혹은 잠재적인 것은 특별한 종류의 시간에 의해 정의된다: ‘비물체적 표면에서, 우리는 아이온의 순수한 선을 인지한다.’ <의미의 논리>를 통해 들뢰즈는 두 종류의 시간성을 대조한다: 크로노스와 아이온.

크로노스는 신체들의 시간이고 일차적 질서의 분열증적 심층 안에서의 그것들의 혼합이다. 여기서 시간은 운동과 관계해서 측정되고, 현재는 시간의 지배적 차원이다. 이것이 왜 <의미의 논리>의 첫 번째 발생이 동적 발생으로 불리는지에 대한 이유다: 그것은 운동혹은 조각난 신체들이 다른 신체들 위에서의 행위와 열정에 의해 한정되는 물질적 장 안에서 시작한다. 크로노스와 대비하여, 아이온은 비물질적 시간인데, 운동으로부터 자유로운 시간이다, 혹은 그것의 순수 상태 안에서의 시간이다. 이를 들뢰즈는 칸트를 인용하여 시간의 텅 빈 형식혹은 스스로는 변화하지 않으면서 다른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형식으로 명명한다. 순수 사유의 시간 안에서 현재는 존재하지 않거나, 혹은 끊임없이 과거와 미래로 분할된다.

<안티 오이디푸스><의미의 논리>에 나타난 들뢰즈적 무의식을 요약하기 위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1) 모든 것은 운동에 의해 종속되는 시간 안에서의 부분대상들의 물질적 장과 함께 시작한다. (2) 세 가지 수동적 종합은 이 기본적인 물질을 받아 들여 처리하지만 세 번째 종합 안에서 수동성은 실패한다. (3) 세 번째 종합의 실패에서 벗어난 이러한 새로운 표면은 시간을 그것 순수한 상태 혹은 시간의 텅 빈 형식을 재현한다. 우리의 도식적 재현은 이제 다음과 같이 보인다:

1. 물질적 장

2. 첫 번째 수동적 종합

3. 두 번째 수동적 종합

4. 세 번째 수동적 종합

5. 시간의 텅 빈 형식

나는 이것이 들뢰즈적 주체의 전체는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이것은 단순히 그것의 무의식인, 수동적인 절반이다. 동적발생은 정적발생을 이끈다. 욕망하는 생산은 사회적 생산을 이끈다. 시간의 텅 빈 형식이 거주하는 사건은 갑작스럽게 경험적 의식으로 현행화 될 것이다. 여기서 내가 묘사하는 것은 오로지 들뢰즈적 전체 주체 이론의 첫 번째 절반일 뿐이다. 이 다섯 가지 계기들은 들뢰즈적 무의식의 기본적 구조를 구성한다.

 

 

<시네마>가 기술하는 세 번째 수동적 종합의 실패와 물질적 주체성

들뢰즈적 무의식의 이러한 다섯 가지 계기들은 또한 <시네마>의 기저에 흐르는 물질적 주체화의 결정적인 순간들이다. 이러한 주체화는, 내가 간략히 이 글의 초반부에 묘사한 것처럼, 다섯 개의 국면을 갖는다: (1) 그것(주체성)이 연역되어 나오는 내재성의 평면; (2) 지각-이미지 (3) 정서-이미지 (4) 행동-이미지 그리고 (5) 시간-이미지. 여기서 나는 이런 측면들 각각이 <의미의 논리><안티 오이디푸스> 양자에서 발전된 것으로서의 들뢰즈적 무의식 속 순간들에 기초를 두고 모델화된 것이라는 점에 대해 간략히 제시하고 싶다.

 

내재성의 평면운동-이미지들이 그들의 다른 모든 부분들과 모든 측면들에서 서로 행동하고 반응하는 장이다. 그것은 긍정적 분산에서 부분대상의 분자적 다양성’(안티 오이디푸스)과 분열증적이고 신체적인 심층의 일차적 질서양자의 기능적 등가물이다. 따라서 내재성의 평면은 물질적 이미지들이 다른 모든 부분들 속에서 행동하고 반응하는 주체성의 기반에 있는 물질의 장이다. <의미의 논리><시네마> 양자에서, 이러한 물질적 장은 시간이 운동에 종속되는 곳이다. 이 모든 세 책에서 주체성은 같은 방식으로 묘사된 물질적 장에 토대를 두고 있다. 물질적 파편들은 그 어떤 주체도 없는 곳에서 서로 소통한다.

<안티 오이디푸스><의미의 논리>에서 포착이라는 첫 번째 수동적 종합은 내재성의 평면의 물질적 파편들을 모두 묶어내기 시작했다. 이러한 종합의 행위 안에서 가장 기초적인 자아-기관 없는 신체-는 물질적인 영역을 응시한다. 그것(종합의 행위)은 부분대상을 받아들이고, 그 부분대상들을 기록될 수 있는 정보 조작들이나 신체의 부분적 표면들로 변형시킨다. 유사하게, <시네마>에서 내재성의 평면으로부터 연역된 첫 번째 이미지는 물질성의 응시(contemplation)이다. ‘지각-이미지뇌의 내재성의 평면의 포착을 재현한다. 뇌는 운동-이미지를 지각하고 그것들을 프레이밍한다. 따라서 그것은 나머지 다른 두 책에서 포착의 조합으로서 같은 기능을 가진다. 그것은 물질을 지각한다.’

<안티 오이디푸스><의미의 논리>에서 두 번째 종합은 첫 번째 종합이 남긴 장소를 물려받는다. 이것은 모두를 묶고, 지나가는 포착의 종합이 생산된 이미지를 기록한다. 이것은 또한 들뢰즈가 정서-이미지를 묘사하는 방식이거나 혹은 물질적 주체화의 두 번째 수동적 순간이다. "우리가 흡수하고 굴절시키지만, 지각의 대상이나 주체의 행동들로 변형되지 않고 오히려 순수 특질 안에서의 주체와 대상의 일치를 나타내는, 외부적인 운동들의 한 부분이 불가피하게 존재한다."

-이미지는 외부적 운동들또는 내재성의 평면의 운동-이미지들의 파지이자 재생이다. 그것은 운동을 지나가게 하기 보다는 흡수한다. <안티 오이디푸스><의미의 논리>의 두 번째 종합과 같이, 그것은 파지와 재생의 형식으로 기능한다.

 <의미의 논리>의 세 번째 종합은 두 순간을 갖는다. 의도된 행동과 효과적으로 완수된 행동. 첫 번째 것은 행동-이미지를 정의한다. <안티 오이디푸스>의 세 번째 종합과 같이, 행동-이미지는 첫 번째의 두 종류의 이미지들의 화해다. 들뢰즈에게, 행동은 두 가지를 요구한다. 첫 번째로는 대상과 함께 감각적 접촉이 있어야만 하고(지각), 두 번째로 그 대상은, 이러한 방식으로, 정서적 기억을 다시 깨우고, 감정을 재현실화시켜야만 한다(정서). 행동은 지각과 정서를 요구한다. 행동은 그것들의 종합이다. 행동-이미지의 발생적 기호는 따라서 대상과 감정의 종합, 즉 지각과 정서의 종합에 의해 정의된다. 행동-이미지는 첫 번째 물질적 주체성의 두 순간의 성공적인 종합이다. 그것은 <의미의 논리>의 의도된 행동을 실현한다.

그러나 거의 동시적으로 시네마는 행동-이미지의 위기와 그것의 종합의 실패를 경험한다. 의도된 행동은 효과적으로 완수된 행동에 자리를 내준다. 행동-이미지의 위기에서, 지각과 정서 사이의 감각-운동적 연결은 실패한다. 지각이 기억을 불러오는 것을 실패하거나, 혹은 기억이 그 상황에 기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인물이 놓여 있는) 상황은 모든 면에서 그의 감각-운동적 능력을 초과하고, 그 인물로 하여금 더 이상 반응 또는 행동의 규칙에 종속되어 있지 않는 것을 보고 들을 수 있게 만든다.’더 이상 반응의 규칙에 굴종하지 않는이런 종류의 이미지들은 새로운 종류의 기호를 구성한다. 광학적 기호와 청각적 기호, 즉 순수 시청각 기호들은 더 이상 감각 운동적이지 않고, 해방된 감각들을 시간 및 사유와의 직접적인 관계로 이끈다. 그것들은 순수하고 직접적인 시간 이미지들을 제공한다.

이러한 새로운 기호들과 함께 우리는 명백히 들뢰즈가 <의미의 논리>에서 묘사한 비물질적이고 형이상학적인 표면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시간-이미지는 우리에게 더 이상 시간이 운동에 복종하지 않는 순수 사유의 장을 재현한다. 여기에 생성, 변화, 이행이 있다. 그러나 변화하는 것의 형식 그 자체는 변화하지도 이행하지도 않는다. 이것은 순수한 상태 안에 있는 약간의 시간그 자체다: 직접적인 시간 이미지는 변화하는 것에 변화하지 않는 형식을 제공하는데, 그 형식 안에서 변화가 생산된다. 내재성의 평면의 시간과 대비해서 여기에는 현재의 순간이 없다. 인물들은 이제 이미 결정된 과거와 막다른 미래 사이의 찢겨진 시간의 순수한 형태를 살아간다. 들뢰즈가 독해한 영화의 역사는 물질에서 순수사유로, 운동에서 시간으로 이동하지만, 그것은 1969년에 일찍이 들뢰즈에 의해 펼쳐진 초월론적 무의식의 구조에 따른 것이다. 우리가 강조하곤 했던 <안티 오이디푸스><의미의 논리> 양자에서 구조화한 초월론적 무의식의 순간들에 대한 도식적 재현은 <시네마>에도 마찬가지로 적용할 수 있다. 더 정교한 버전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1. 물질적 장(내재성의 평면)

2. 첫 번째 수동적 종합(지각-이미지)

3. 두 번째 수동적 종합(정서-이미지)

4. 세 번째 수동적 종합(행동-이미지)

5. 세 번째 종합의 실패(행동-이미지의 위기)

6. 순수 사유, 텅 빈 시간

<시네마1>의 물질적 주체성은 <안티 오이디푸스>의 초월론적 무의식과 <의미의 논리>의 동적 발생의 재공식화이다. 이 세 권의 책 모두 동일한 들뢰즈적 무의식에 대한 기술이다.

 

<시네마>가 제기하는 주체성의 문제

이러한 독해가 극단적으로 일반적이고 필연적으로 환원적이라고 할지라도, 나는 그 독해가 두개의 유사한 광범위한 결론들을 보증하거나 혹은 적어도 하나의 문제와 하나의 결론의 명확한 표현을 보증한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로, 영화에 대한 들뢰즈의 연구는 정확히 주체성의 연구인 것처럼 보인다.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그가 정교하게 공을 들인 것은 영화를 즐기거나 보거나 혹은 필름을 만드는 주체의 이론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제안하는 매우 일반적인 수준에서의 이 주체는 이미 들뢰즈가 자신의 초기 저작에서 묘사했던 것이다. 영화적 기호를 체험하는 물질적 주체성은 명확하게 영화적이지 않다. <시네마>는 영화에 대한 이론인가, 아니면 주체성의 이론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 나는 여기서 이 질문을 열어두고 싶다.

우리가 끌어낼 수 있는 결론은 들뢰즈의 영화 분석은 명백히 영화의 분열분석이라는 것이다. 분열분석은 초월론적 무의식의 탐사인 초월론적 분석이다. 이런 의미에서, <의미의 논리>는 또한 분열분석의 사례다. 그것은 또한 자신의 궁극적 요소인 부분대상과 함께 시작하는 초월론적 무의식을 묘사하고 있고, 세 가지 수동적 종합을 통해 그것들의 진화를 추적했다. <시네마1><시네마2>가 이러한 탐사를 계속하고 있는 한, 우리는 충분히 안전하게 그 영화책들 또한 분열분석의 한 사례를 구성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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