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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로와 인종주의


전주희/서교인문사회연구실


인종주의가 씌우는 가면

제주도에 몰려든 480명의 예맨 난민들로 인해 한국사회는 인종주의를 둘러싼 논란에 휩싸였다. 마치 이민족이 평화로운 남쪽 섬을 침략이라도 했듯이 제주도의 여성과 아이들을 그들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논리까지 등장했다. 그렇다. 예맨 난민들의 90%를 2,30대 남성들이며, 그들은 브로커를 끼고 입국했다. 이로부터 ‘가짜 난민’설까지 등장했는데, 저들은 인도주의적 보호를 보장받아야할 난민이 아니라 잠재적이지만 곧바로 현실화될 (성)범죄자집단들이자, 불법 체류자들이라는 것이다. 다시말해 예맨에서 밀입국한 480명은 ‘예맨인’ 이거나 ‘난민’이 아니라 (성)범죄자로서 예맨인으로 표상된다.

인종주의는 ‘순수한 집단’으로 인종(race)을 지목하지 않고 우리 사회가 선호하는 공격목표, 즉 사회적으로 정상화를 위해 배제되어야할 집단의 가면을 쓰고 등장한다. 그래서 인종에 대한 혐오는 사회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가 되는데, 난민 혐오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보기에 그들은 불특정한 예맨인이어서가 아니라 ‘2,30대의 낯선 남자들’이기 때문이다.

최근 불거진 난민 문제는 한국사회에 존재하고 있는 인종주의에 대한 문제를 되짚게 하며, 또한 논란들이 재활성화되고 있다. 예맨 난민들로 인해 인종주의적 태도가 등장한 것이 아니라 한국사회의 인종주의적 통념들이 예맨 난민문제로 더욱 격렬한 형태로 제기되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차별과 배제뿐만 아니라 여성에 대한 성차별, 성적 소수자들에대한 혐오, 장애인에 대한 동정과 시혜와 함께 있는 혐오 등 인종주의는 이미 한국사회에서 매우 문제적인 이데올로기로 존재한다.

프랑스 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는 ‘종족적 인종주의’와 ‘성적 인종주의’는 늘 함께 기능하며, 나아가 “인종주의는 항상 성차별주의는 전제한다.”고 말한다. 문제는 여러유형의 인종주의의 형태들이 있다는 것이 아니다. 인종주의는 늘 특권화된 집단을 보편의 얼굴로 내세우며, 다양한 사회적 집단들을 평가절하하며 인종화한다.

그래서 우리가 인종주의에 대항할 때 차별받고 배제되는 집단이 사회적으로 ‘위험한’ 가면을 쓰고 등장하는지를 분석해야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러한 가면을 씌우는 자가 누구인지, 보편의 얼굴을 한 지배적 표상은 무엇인지를 보아야 한다.


<히든 피겨스>가 싸운 것은 어떤 인종주의인가?

이러한 맥락에서 여성주의 영화라고 평가되는 작품하나를 보자. 영화 <히든 피겨스 hidden figures, 2016>는 1960년대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시대, 나사(NASA)에서 근무했던 흑인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 영화에서 흑인여성들은 백인 남성들 뿐만 아니라 백인 여성들에게서 차별을 받는다. 그런데 백인 남성들과 백인 여성들이 흑인 여성에 가하는 차별의 양상들은 사뭇 다르다. 우성 여성들 전체는 나사에서 핵심적이고 중요한 역할의 바깥에 있다. 이들은 전산원으로 별도의 독립적인 사무실에서 기능적인 계산을 하거나, 남성들이 일하는 공간에서 필요한 사무일을 보기위해 배치될 뿐이다. 흑인여성들과 직접적인 갈등을 겪는 것은 백인여성들이다. 이들은 같은 전산원이자 다른 인종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백인 남성들은 흑인여성에게 직접적으로 모욕을 주지 않는다. 심지어 그들 중에는 흑인여성들의 능력을 알아보고 그들에게 정당한 역할을 주려고 지원하는 사람들도 있다. 영화에서 실질적인 중책을 맡고 있는 캐빈 코스트너 역은 흑인 여성 전용 화장실 간판을 깨부수고 “이제 됐군. 유색인종 화장실은 없어. 백인 화장실도 없고. 그냥 변기 있는 화장실일 뿐이야.”라고 말한다.

처음 이 영화가 개봉되었을 때, 이 영화는 인종주의적 차별에 맞서 흑인여성들이 ‘여성과학자’가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소개되었다. 하지만 그 목표가 성공했다고 영화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이 영화를 실화에 바탕을 둔다) 말할 수 있을까? 이 영화가 여성들의 연대와 협력에 관해 이야기하는 빼어난 영화라고 할지라도 이 영화의 출발인 인종주의는 여전히 남는다.

영화에서 백인 남성이 재현하는 것은 백인도 아니고 남성도 아니다. 그것은 ‘나사’다. 그리고 그것은 1960년대 미국이라는 국가이기도 하다. 나사는 미국과 소련의 군사적 국가주의가 우주를 향해 쏘아올릴 우주선을 둘러싸고 가장 첨예화되었던 시대의 한가운데서 상징적으로 자리한다. 백인 남성의 몇몇이 인종차별의 벽을 깨고 흑인 여성의 천재적인 두뇌를 인정한 것은 미국과 소련간 벌어진 우주‘전쟁’의 이익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역설적으로 인종주의의 얼굴, 보편을 가장한 지배적 표상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흑인 여성들의 인종주의적 편견과 차별은 당시에 정세적으로 요청된 적, “망할 소련놈들”에 대한 타자화를 통해 비로소 극복될 수 있다. 즉 영화는 인종주의에 대항한다기 보다 특정한 인종주의를 다른 인종주의로 대체하면서 인종주의를 구성하는 교차적인 그물망들(종족적 인종주의와 성적 인종주의) 사이를 오간다. 그리고 그 그물망 안에서 영화는 끝난다. 드디어 미국은 우주선을 쏘아올렸고, 흑인 여성들은 나사의 과학자와 엔지니어가 되었다. 전쟁은 승리했다!

과로의 보편적 얼굴

인종주의적 접근말고 다른 면에서 보자면 <히든 피겨스>는 ‘나사’에서 일하는 과학자이자 공무원들의 이야기다. 그들의 살인적인 과로는 ‘로켓에 사람을 태워 달에 보내는 계획’이 성공할 때까지 이어진다. 과로를 과로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은 과로에 오랬동안 노출되어 있거나, 아니면 자신의 일이 공적인 임무를 띠고 있다는 사명감 때문이다.

노동운동에서 제조업 남성 노동자의 이미지는 오랫동안 보편적인 노동의 표상을 갖고 있었다. 동시에 이 이미지는 국가주도의 발전주의 시대에 ‘산업역군’의 표상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제조업 남성 노동자의 얼굴은 곧 국가이자 혁명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이미지가 가장 비극적으로 균열이 난 채 극대화 되었을 때가 IMF 위기시의 정리해고와 그를 둘러싼 투쟁이었다.

IMF 위기때 98년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은 정리해고 반대 파업을 벌였다. ‘차 만드는 남성’과 ‘밥 짓는 여성’이 함께 한 파업이었지만, 파업이후 식당 여성노동자들은 해고되었거나, 식당 자체가 외주화되어 나빠진 노동조건과 임금을 감수해야 했다. 파업의 패배로 남성노동자들도 더 빨리, 더 많은 차를 만들어야 했다. 강화된 노동강도와 장시간 노동으로 컨베이어벨트에서 과로사하는 노동자들이 늘어가고, 죽지는 않더라도 다치거나 병에 걸리는 속도도 빨라졌다. 빨리 밥을 먹고 빨리 쉬고 싶었기 때문에 남성노동자들은 더욱 급해졌고, 그리고 험악해졌다.

“씨발년들아 빨리 밥줘.” 식판을 두드리며 재촉하는 남성 노동자들과 여성노동자들은 모두 신자유주사회의 살벌한 과로를 경험하고 있었지만, 그 과로는 동질적이지 않다. 차를 만드는 노동과 밥 짓는 노동의 분할, 원청 정규직 노동자와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 사이의 분할은 분할 이전에 특정한 노동의 형태를 특권화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분할은 곧 차별과 배제의 선으로 작동한다. 여기에 8시간, 10시간 혹은 12시간으로 균질화된 노동시간의 질적 차이가 구성된다. 이것은 노동강도로 환원할 수 없는 과로의 질이다.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과로는 종족적 인종주의와 성적 인종주의가 교차하며, 서로를 보충하는 메커니즘이 형성하는 분할의 선을 따라 형성된다. 하지만 정규직 노동자들이 여전히 스스로를 보편의 표상으로 재생산하는 이상 이러한 인종주의적 분할선 역시 재생산된다. 그들은 더 이상 ‘국가’나 ‘혁명’을 상징하는 얼굴은 아니지만,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기득권’을 보편화한다.

최근 기아자동차 노조가 불법파견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여성노동자를 단 한명도 포함시키지 않은 것, 아니 700명 중 단 한명도 여성노동자를 포함시키지 않기 위해 사측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반대한 것은 단지 정규직의 횡포가 아니다. 정규직화하면 남성들도 하기 힘든 조립라인에 여성노동자들을 배치전환시키겠다고 겁박하는 것은 역으로 남성노동자들도 조립라인의 노동강도가 견디기 힘들어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래서 젊고 건장한 남성 하청노동자들만이 정규직으로 전환되었다. 이 때 비가시화되는 건 여성 노동자들의 과로다. 정규직 노조의 주장에 따르면 그녀들은 남성들도 하기 힘든 조립라인에서 일하기에는 약한 체력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즉 보편적인 과로의 강도를 견뎌내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신체를 가졌다는 것이다.

인종주의는 이러한 차별의 논리 배후에서 작동한다. ‘비정규직’이라는 인종, ‘여성’이라는 인종이 교차하며 ‘여성 비정규직’은 여성의 문제로도, 비정규직의 문제로도 환원되지 않는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차별의 선들 아래에 놓인다. 그리고 ‘남성 정규직’이라는 일부 집단이 특권화되면서 보편의 얼굴을 하고 등장한다. 이들이 자신들의 과도한 노동을 특권화 하는 순간 과로를 야기하는 인종적, 성적인 메커니즘은 사라지고, 더 많은 과로를 조직하는 경영기술이나 노동과정의 변형, 노동의 형태들도 사라지고 오로지 물리적으로 계량화된 과로의 수치만이 남게 된다. 그들의 과로를 가장 보편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순간, 그들이 입증하고 싶어하는 과로 역시 가장 앙상한 것으로 남았다. 

따라서 사회적 소수자들과 연대해야 한다는 것은 도덕적인 요청이 아니다. 스스로가 보편의 지배적 얼굴에 대항하는 소수자의 위치를 점하는 것만이 모든 인종주의에 대항하는 길이자, 자신들이 그토록 갖고 싶어하는 ‘기득권’을 획득할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  이글은 한국노동안전연구소가 발행하는 <일터> 7월호에 실린 글을 일부 수정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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