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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올로 그라시(Paolo Grassi)에게 보내는 편지 (1968. 3. 6.)[각주:1]

-루이 알튀세르-


이찬선 옮김 | 알튀세르 번역집단



[편집자 프랑수와 마트롱(François Matheron)이 붙인 소개글]

‘밀라노 피콜로 극단’의 책임자(directeur)인 파올로 그라시(Paolo Grassi)에게 부쳐진 이 편지는 골도니(Goldoni)의 희곡, <두 주인을 섬기는 하인, 아를르캥(Arlequin, serviteur de deux maîtres)>[각주:2]이 조르지오 스트렐러(Giorgio Strehler)의 연출로 오베르빌리에(Aubervilliers)의 라 코뮌(la commune) 극장에서 공연된 당일 밤과 이튿날에 걸쳐 작성된 것이다. 스트렐러는 1968년 4월 1일 ‘피콜로 극단 후원 협회(l’Association des Amis du Piccolo Teatro)’의 밀라노 본부에서 개최된 알튀세르와의 대중 좌담회에서 이 편지를 이탈리아어로 낭독하였다.

이 편지의 타자본은 두 판본이 존재하지만 페이지 구성을 제외하고는 그것들 간의 차이는 없다. 알튀세르의 서신(correspondance)이 보여주는 것처럼, 그는 이 편지를 적어도 몇몇 친구들도 읽을 수 있도록 했던 것 같다.


[본문]

친애하는 그라시씨에게

당신의 <아를르캥> 공연을 보고 저는 매우 비범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탈리아 연극과 이탈리아 민중(peuple)에 대해서, 간략히 말해 민중에 대해서, 다른 것으로는 대체할 수 없는 무언가가 이 작품 속에서, 즉 이 작품의 구상과 연출, 그리고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이 지니고 있는 경이로운 통찰력 속에서 “상연되고 있습니다(passer)”.

단언컨대, 사람들은 감동을 받지 않고서는, 제2의 <아를르캥>을 만들어 냈던, 이 첫 번째 <아를르캥>의 이야기/역사(histoire)를 읽어낼 수 없을 것입니다. 스트렐러의 짧은 몇 쪽의 글[각주:3]은 비장하리만큼 아름답습니다. 이 글은 관객 바깥에서 펼쳐지는 공연(spectacle), 즉 어떤 작품의 무언의 이야기/역사 속에서 펼쳐지는 공연의 이면(envers)일 뿐이며, 이 공연은 그것을 보는 사람들 속에 살아 있기 이전에, 그것을 연기하는 사람들 속에 살아 있습니다. 이 몇 쪽의 글은 이러한 이면을 뛰어 넘어 “들을 수” 있을 모든 사람들에게, 배우들 말고도 모든 인간들이 감내해야하는 노고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 노고란 그들의 노동, 그들의 투쟁들, 그들의 삶으로부터 그들이 배운 것을 어떠한 대가를 치루더라도 유산으로 물려주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배우들이란 행동하는(agir)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은 아를르캥에 관해서 본질적인 것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함께 하고자 했던 솔레리(Soleri)[각주:4]가 바로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솔레리는 스스로를 두 세계와 갈등을 빚고 있는 사람으로 선언합니다. 그 사람은 배고픔에 허덕이며(avoir faim), 어쩔 수 없이 스스로가 불가해한 힘들의 표적이 되어 벌어먹음으로써 궁지를 모면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 중에 한 명이면서도, 이 불가해한 힘들의 분쇄를 노리는 사람들 중에 한 명입니다. 또한 그 사람은 “스스로를 구제하기” 위해, 즉 단지 “먹기” 위해 어떤 행동들에 전념하도록 강제됨에도 불구하고, 그 행동들로 마침내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는” 민중들 중에 한 사람입니다. 이러한 등장인물이 민중들의 저항과 그들의 계략들의 아주 오래된 경험에 대한 무언가를 “재현/대표하지(représenter)” 않았으며, 그러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가능하다면 이론의 여지가 없는 이 주제에 대해 한 마디 덧붙이고 싶습니다. 솔레리의 연기를 그의 배역[아를르캥]의 의미에 결부시켰던 논리 속에서, 저는 아를르캥의 활발함(vitalité)의 매우 특이한 성질로 인해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나 할까요? 저는 솔레리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배역에 대한 그의 통찰력이 작품 내에 기입되어 있는 어떤 필연성을 실현시켰으며(réaliser), 그 누구도 이 필연성을 가시적으로, 그것도 그만큼이나 가시적으로 만들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솔레리에게 보낼 수 있는 최고의 찬사일 것입니다. 이러한 필연성은 바로 아를르캥의 활발함(vitalité)에서 실현됩니다. 단순하고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이러한 활발함은 성적인(sexuelle) 본성을 지니는 놀라운 상징적 임무를 띠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를르캥은 언제나 굶주림에 “허덕입니다”/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Arlequin 《a》 toujours faim).[각주:5] 하지만 아를르캥은 굶주림/욕망만은 아닙니다.(Mais il n’est pas que faim) 그리고 그가 “인” 것은(qu’il 《est》 sexe) 단지 아를르캥이 아주 잠시 동안 하녀[각주:6]의 여성적인 특성들에 관심을 갖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를르캥은 섹슈얼리티(sexualité)의 통속적인, 심지어 “구체적인” 의미에서 성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의미, 즉 상징적인 의미에서 성입니다(est sexe). 그는 이 연극을 구성하는 모든 등장인물들에 그를 대립시키는 규제된 “작동/운동/연기(jeu)” 속에서 그가 굶주림/욕망으로 존재하는(il est faim) 바로 그 방식으로 인해 성으로 존재합니다. 이는 그의 고유한 물리적 신체와 관련이 있습니다. 즉 어깨 위의 분장한 얼굴과 가면, 모든 제스쳐들의 둥그스름한 몸짓들, 그의 모든 불균형들로부터 생겨난 기이한 균형, 이러한 것들이 그의 제스쳐들의 역동성(dynamique)에 따라 그의 신체를 휘감고 있습니다. 매 순간 땅바닥으로부터 튀어 오르는 민첩함과 한 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또 다른 운동을 예견케하는 어떤 운동에 대한 끊임없는 묘사, 항구적인 솟구침, 분출, 뛰어오름, 도약, 이러한 것들이 그의 역동성을 표현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는 어디에나 있으면서도, 결코 어디에도 있지 않으며, 서있으면서도 누워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그는 똑바로 서있으면서도 거꾸로 서있을 수 있으며, 배를 깔고 엎드려있으면서도 등을 대고 누워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동시에 어디에나 존재함(ubiquité)은 그로 하여금 커튼/장막 뒤에서, 그리고 두 주인들의 가랑이 사이에서 튀어나오게 만들며, 그가 있어서는 안 되는 곳 어디에서나 그가 있게 합니다. 요컨대, 이 모든 것들이 그에게 어떤 몸(corps)를 부여하며, 이 몸이야말로 그의 물리적 신체의 차원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들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 몸은 그가 상대하는 다른 등장인물들의 물리적 신체와는 완전히 다르게 작동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몸이 단지 하나의 신체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성으로서(comme sexe) 상징적으로 “작동하는” 몸이라는 것을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아를르캥의 굶주림/욕망이 그저 그런 굶주림/욕망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굶주림에 허덕이는/욕망하는 것은 바로 성(sexe)입니다(c’est un sexe qui a faim).

우리는 손쉽게 아를르캥의 집요하고도 끈질긴 “몸짓”들이 “몸”의 특성들이 기입되어 있는 공간 속에서 그리고 있는 그 특성들 전체를 “다시금 취해서”, 이러한 이상한 몸(그 누구도 이것과 동일한 몸을 전혀 갖고 있지 않습니다)의 특성들이야말로 등장인물들 간의 교환들의 규제된 운동(jeu) 속에서 “팔루스(phallus)”의 상징적 기능을, 이 팔루스의 “형태(forme)”를 형상화함으로써 규정하는 것임을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를르캥의 “활발함”은 단지 굶주려 있는/욕망하는 한 인간의 활발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굶주림을 굶주려 하는/욕망하는 것을 욕망하는(a faim d’avoir faim) 한 인간의 활발함, 프로이트의 용어로 말하자면, “리비도(libido)”의 활발함입니다. 그리고 아를르캥이 이 연극의 중심이면서도 동시에 포착할 수 없는/잡히지 않는(insaisissable) 중심인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모든 이들[등장인물들]을 위해(pour tout le monde), 그가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기 때문에(car il a faim d’avoir faim) 연극의 중심인 것입니다. 따라서, 다른 모든 등장인물들이 그들이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 모든 다른 등장인물들은 그들에게는 결여되어 있는 것에 의해 표시될 것입니다. 그[아를르캥] 없이는, 다른 사람들 모두는 잠시도 무대 위에서 “살아 갈”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아를르캥]에 의해, 즉 (그들은 아를르캥이 재현/대표하고 있는 것을 움켜 쥘 수도, 파악하여 이해할 수도 없다는 두 가지 의미에서) 그들에게서는 포착될 수 없는 그[아를르캥]에 의해 “살아 갈” 뿐입니다. 그는 이 연극의 중심이지만, 결코 자신의 자리에 있지 않기 때문에 포착할 수 없으며, 이 중심[포착될 수 없는 중심]은 세계의 그 어떠한 무대 위에서도 아무런 자리를 갖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이 연극의 물리적인 중심에 결코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틀림없이 아를르캥이 한 명은 남성[플로린도]이고 다른 한 명은 여성[베아트리체]인 “두 주인들”을 섬기는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아를르캥] 없이는, 남성도, 여성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솔레리의 해석/연기(interprétation)가(비록 이 연기가 어떤 전통에 깊이 연결되거나, 이 연기가 이러한 어떤 전통을 발견했다고 할지자도) 이러한 비범한 이중-인상(surimpression)을 굶주림/욕망(faim) 그리고 성(sexe) 지니는, 덜 거친 언어로 말하자면, 욕망(faim) 그리고 욕망하는 욕망(faim d’avoir faim)을 지니는 민중적인(populaire) 한 명의 등장인물 속에서 나타나도록 만든 것은 아닌지 자문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아마도 우리로 하여금, “민중”의 “자리”를 점하는 것이 민중을 “재현/대표”하는 등장인물에게 다음과 같은 전대미문의 특권을 부여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도록 만들 겁니다. (마치 아를르캥이 한 번에 두 주인을 섬기는 것처럼) 한 번에 두 가지의 것들을 “말할” 수 있는 특권 말입니다. 즉, 한 번에 굶주림/욕망과 성을, 즉 욕망과 욕망하는 욕망을 “말할” 수 있는 특권, 고로 [그 자체가] 삶인 유일한 등장인물이 될 수 있는 특권 말입니다. 이로부터, 우리가 이러한 특권 하에서 약간의 것을 모색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이러한 것들을 “말할” 수 있는, 그것도 이러한 것들을 소리 높여 “말할” 수 있는 자는 오직 민중들뿐임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민중들만이 다른 모든 사람들이 숨겨 말하지 않는 것, 즉 (그들의 관계들 속에서의 인간들의) 세계는 최종심급에서(en dernière instance), 욕망과 성이라는 “이름들”을 갖는 두 “실재들(réalités)” 위에 세워져있음을 소리 높여 말할 수 있습니다. 굶주려 있는/욕망하는 자들만이 욕망을 그것의 이름으로 부를 수 있지만, 그 욕망을 그것의 이름으로 부를 수 있기 위해서는, 그 욕망은 또한 성이라는 것을 말해야만 하며, 성으로 “존재해야”만 합니다. 이는, 섹슈얼리티(sexualité)라는 유일한 의미가 아닌, 다양한 의미로 이해될 수 있고, 그래야만 합니다 ([성적인] 수줍음이 가득한 이 연극에 섹슈얼리티의 관습적인, 심지어 “민중적인” 형태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는 우선적으로 욕망하는 욕망이 지니는 가장 일반적인 의미로 이해될 수 있고, 그래야만 합니다. 욕망하는 욕망은 활발함이라는 일반적인 이름을, 더 정확하게 말해 투쟁성(combativité)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궁지에서 벗어나기”위해, 짓눌려 으스러지도록 자신을 내버려두지 않기 위해, “살기” 위해, 모든 수단들과 모든 권력들을 지니고 있는 적들을 물리침으로써 살아남기 위해, 투쟁하고자 하는 욕망(désir)의 이름 말입니다. 적들은 먹어치우는 자들이며, 사회적 관계들뿐만 아니라 성적인 관계들까지 결혼/연합(marige) 속에서 지배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들이 ‘굶주림/욕망=성’이라는 것을 발견하여, (자신이 욕망하고 있음을 말한 아를르캥처럼) 말하고 (성으로 존재하는 아를르캥처럼) “존재”하는 것은 바로 민중의 “자리”로부터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굶주리는 것/욕망하는 것,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는 것, 그리하여 (아주 옛날부터 계급사회들 속에 기입되어있는) 삶 속에 “욕망= 욕망하는 욕망 = 투쟁의지(volonté de lutte)”를 적어 넣는 것은 바로 민중의 자리 속에서 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어쩌면 골도니의 텍스트에 대한 편지나 또는 아를르캥에 대한 당신(들)의 해석/연기를 넘어서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성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욕망“한다”고 말하는 등장인물인 아를르캥이 (아를르캥 자신은 그 속에서 어디에도 있지 않기 때문에 어디에나 있는) 무대라는 인간적인 공간에서 그리고 있는 이상한 형상(forme) 속에 쓰여져 있는 것을 문자 그대로 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끝)    


밀라노 피콜로 극단 창립 50주년 공연 프로그램 책자에서[각주:7]     

아를르캥은 세계 연극 역사 속에서 비범한 하나의 사건입니다. 이 공연은 해가 갈수록 새롭게 우리네 삶 전체와 함께 해왔습니다. 100여명의 배우들이 이를 공연해왔고, 많은 관객들은 이 공연이 시작되는 것을 보았으며, 몇 년이 지난 뒤에도, 이 공연이 다시 시작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도 많은 관객들은 이 공연의 [진가를] 알아봤습니다. 오늘 날, 여전히 동일한 관객들과 또 다른 관객들은 우리의 기념일을 맞이하여, 이 공연을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러한 이야기/역사에 대한 위대한 책을 쓸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즉 거의 무한하게 (베껴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는, 유일한 공연의 이야기/역사에 대한 위대한 책 말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러한 책을 갖고 있지 않으며, 그러한 책을 쓸 수도 없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연극의 또 다른 등장인물들이기도 한 우리가, 우리들의 굉장하면서도 절망스러운 역할를 수행하기 위해서, [그러한 책]을 쓸 사람들을 기다려야만 한다면, 우리는 그 어디에서도 연극 조명에 불이 들어오는 것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연극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 연극을 바라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시금 그 연극을 묘사하고, 그 속에서 기억을 회상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잊어버리고 말거나, 또는 그것을 잊었다고 믿죠. 그런데 저는 예술적이며, 살아있고, 완성된 연극적 행위는,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는 기억처럼, 대중/관객들 한 가운데에 남아있다고 믿습니다.   

조르지오 스트렐러, 1997년 5월





  1. 역자 주: Louis Althusser, “Lettre à Paolo Grassi(6 mars 1968)”, Éc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Tome II, Stock/IMEC, 1997, pp.535-539. [본문으로]
  2. 역자 주: 내용의 이해를 조금이라도 돕기 위해, <아를르캥>의 주요등장인물들의 관계와 간략한 줄거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총 3막(acte)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연극은 베니스의 대상인 ‘판탈로네’의 대저택에서 시작한다. ‘판탈로네’의 딸 ‘클라리체’와 ‘롬바르디 박사’의 아들 ‘실비오’의 약혼식이 열리는 와중에, 이 극의 주인공인 ‘아를르캥’이 갑자기 등장하여 자신의 주인인, ‘페데리고’가 이곳에 당도했음을 알린다.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듣고 아연실색하는데, 왜냐하면 ‘페데리고’는 자신의 여동생인 ‘베아트리체’와 ‘플로린도’의 결혼을 막기 위해 ‘플로린도’와 결투를 벌이다가 사망했다는 소문이 항간에 파다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소문은 사실이었고, ‘플로린도’는 ‘페데리고’를 죽인 뒤 행방을 감추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베아트리체’는 ‘플로린도’를 찾아 그를 도와주기 위한 돈을 마련할 목적으로, 원래 ‘클로리체’와 결혼을 약속했던 ‘페데리고’로 가장하여 ‘판탈로네’에게 결혼지참금을 받으려고 한 것이다. ‘페데리고’로 가장한 ‘베아트리체’가 도착하자, ‘클라리체’와 ‘실비오’의 약혼은 연기된다. 행방이 묘연했던 ‘플로린도’는 이미 베니스로 도망쳐온 상황이었고, 우연히 ‘아를르캥’을 만나 자신의 하인으로 일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하게 된다. 이를 수락하면서, ‘아를르캥’은 동시에 두 주인, 즉 ‘베아트리체’와 ‘플로린도’의 하인 일을 맡게 되고, 자신의 주인들에게는 이를 비밀로 한다. 그런데 두 주인의 하인으로 일하는 와중에, ‘아를르캥’은 끊임없이 실수를 연발한다. ‘베아트리체’의 손님을 ‘플로린도’에게 데리고 가는가 하면, 편지를 원래 주인이 아닌 다른 주인에게 전해주기도 하고, ‘판달로네’가 건네준 결혼지참금을 ‘플로린도’에게 갖다 주기도 한다. 심지어 ‘아를르캥’의 또 다른 실수 때문에 ‘베아트리체’와 ‘플로린도’는 자신의 연인들이 이미 죽어버렸다고 믿게 되면서 이 연극은 절정으로 치닫게 되지만, 결과적으로 두 사람은 재회하여 자신들의 사랑을 확인하게 된다. 사실상 이 연극의 주요한 장면들은 이러한 ‘아를르캥’의 실수가 만들어내는 예기치 못한 사건들로 채워지고 있으며, 이것이 극적 재미를 유발한다. [본문으로]
  3. 편집자 주: 공연 프로그램 책자에 들어있는 조르지오 스트렐러의 발문(跋文)을 말한다. <첫 번째 아를르캥>의 초연은 1947년 밀라노 피콜로 극장에서 조르지오 스트렐러의 연출로 이루어졌다. [본문으로]
  4. 편집자 주: 아를르캥 역을 연기한 배우를 말한다. [본문으로]
  5. 역자 주: 아를르캥이 무대 위에서 보여주는 엄청나게 활발한 활동력의 주요한 동인은 그의 끊임없는 배고픔에서 드러난다. 실제로 무대 위에서 아를르캥은 음식이 보이면 닥치는 대로 그것을 먹어치우면서도 자신의 배고픔에 대해 끊임없이 불평을 토로한다. 하지만 이러한 배고픔은 어떤 생물학적인 필요(besoin)의 차원만을 함축하는 것이 아니라(만약 그러하다면, 먹으면서 배고픔을 불평한다는 것은 애초에 말이 되지 않는다), 뒤에서 알튀세르가 설명하고 있듯이, 또한 욕망(désir)의 차원을, 즉 엄청나게 다형적인 활발함이라는 특성을 가능케 하는 상징적 성(팔루스)이 구조화하는 욕망의 차원을 함축한다. 따라서 이 두 차원을 모두 나타내기 위해서 “faim”을 굶주림/욕망으로 병기하여 옮겼다. [본문으로]
  6. 역자 주: 극 중에서 아를르캥이 사랑에 빠지는, ‘클라리체’의 하녀 ‘스멜라디나’를 말한다. [본문으로]
  7. 역자 주: 아래의 아주 짧막한 글은 피콜로 극단 창립 50주년을 맞아 스트렐러가 <아를르캥>을 재연출하면서 이 작품이 가지는 의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간략하게 적은 것이다. 위에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피콜로 극단의 <아를르캥> 초연은 1947년에 이루어졌으며, 이 해는 피콜로 극단이 스트렐러와 파올로 그라시의 주도로 창립된 해이기도 하다. 스트렐러는 1947년 초연 이후, 1997년의 50주년 공연에 이르기까지 <아를르캥>을 끊임없이 새롭게 연출하여 무대에 올렸으며, 1997년 12월 세상을 떠나기 전 그가 연출한 마지막 작품이 바로 이 <아를르캥>이었다는 점에서, 그에게 이 작품이 가지는 중요성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비록 아래의 짧은 몇 줄의 글이 <아를르캥>이 지니는 중요성 모두를 담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이 글에서 우리는 스트렐러가 이 작품의 연출로 새기고자 했던 효과들에 대한 중요한 단초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원문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 http://www.letheatre-narbonne.com/dossiers/00-01/arlecchino.html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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