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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사물을 응시할 것인가?

: 재현과 실재의 문화사회학



김현준ㅣ서교인문사회연구실 회원


  모든 시선과 표상은 문화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문화를 통해, 문화와 함께 행동하며, 사회는 문화적 퍼포먼스로서 재현된다. 이 연재 글에서는 문화주의, (포스트)구조주의, 구성주의, 실재론 등 사회과학 및 문화연구방법론을 통해 재현과정, 즉 문화-사회적 텍스트를 응시하고 해석/해체하는 기초적인 관점을 다룬다. 이 연재는 2016년 서교예술실험센터에서 진행한 문화연구방법론 "응시와 재현의 문화사회학" 강의원고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학술논문이 아니므로 인용은 삼가해 주세요. 문의는 이메일(hyunjun79@daum.net)로 주시기 바랍니다.)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본 것을, 또는 보고 있는 것을 다시 (누군가에게) 다시 보여주거나 말해주거나 묘사해준다는 것, 더 나아가 설명해 준다는 무엇일까? 보는 행위는 아무 생각없이 '보는 것'(see)부터 '주목하여 바라보는 것'(look at)까지 다양할 수 있다. 이에 관해 모든 학문 분야를 아우르는 사유를 할 수는 없겠다. 다만 여기서 우리는 근대적 주체 및 계몽주의의 탄생과 더불어 발생한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생각해 볼 것이다. 그것은 주체 밖의 세계는 어떻게 포착할 수 있을까, 객관적 시선(관찰)이란 무엇일까 하는 인식론적 물음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론적 물음은 단지 철학적인 것만이 아니라, 문화적인 것이자 사회적인 문제라는 점에 주목해 볼 것이다. 그래서 결국 응시(gaze)란 그저 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맥락과 힘(권력)의 관점에서 분류하여 보는 것이며, 재현이란 이러한 과정 전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글은 재현이론을 (사회)과학철학과 구성주의 사회이론의 관점에서 설명하고자 한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초현실주의화가로 알려진 르네 마그리트는 파이프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와 상반되는 캡션을 달았다. 누가 보아도 자명해 보이는 파이프를 그려놓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한 것이다. 회화의 재현주의를 깨뜨리고 모든 묘사는 ‘재-현’일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 것이다. 푸코에 따르면, 이 그림은 파이프가 아니라, ‘파이프에 대한 소묘’일 뿐이다. 이 사례는 기본적으로 이미지와 언어의 임의적 관계를 보여준다. 관객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이 파이프 그림이 ‘파이프 그 자체(실재)’가 아니라, ‘파이프에 대한 재현’일 뿐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이 작품의 의의는 단순히 이미지가 실재와는 다른, 실재 자체가 아님을 환기시켜주는 데에 있지 않다. 만일 이런 의도였다면 캡션은 이렇게 달렸어야 옳을 것이다: “이것은 파이프 그림이 아니다.” 파이프 그림은 파이프 실물이 (당연히) 아니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내 생각에 그의 작업의 급진성은 단지 모든 회화 표현이 (당연하게도) 재현일이라는 상식적인 미학과의 단절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지가 매개없이 즉각적으로 불러일으킨다고 믿었던 표상의 동일성에 대한 해체이다. 다시 말해 모두가 이 그림을 보고 ‘동일한 파이프’를 떠올리고 그것이 단 하나의 특정한 캡션(정의)과 대응하리라는 소박한 인식론에 균열을 낸 것이다. 이러한 마그리트의 (의도적) 작업으로부터 (의도하지 않은) 예술철학적 사유가 전개되었다. 묘사(그림 자체)와 캡션(해석)의 필연적 관계가 분리된 것이다. 알튀세르가 사물과 지식의 필연적 일치(상응)를 기각한 것처럼, 지식(이론)이 실제 사물의 표상일 필요는 없게 된 것이다.


  이러한 미학적 문제 뿐만 아니라, 재현 개념은 문화연구에서도 중심적인 자리를 차지한다(Hall 1997: 15). “재현은 다른 사람들의 의미있는 세계에 대해 어떤 의미있는 것을 말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다”(Hall 1997: 15). 더 구체적으로, “재현은 의미가 한 문화의 구성원들 간에 생산되고 교환되는 과정에서 하나의 본질적 부분을 이룬다. 그것은 사물들을 나타내거나 의미하는 언어, 기호, 이미지들의 사용을 포함하는 활동이다. 하지만 이것은 당신이 곧바로 발견할 것처럼 단순하거나 즉각적인 과정과는 거리가 멀다”(Hall 1997: 15). 


  외부 세계나 사물이 우리 인간에게 즉각적으로 매개없이 나타난다는 생각을 ‘반영론’이라고 한다. 일찍이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에서 발명된 ‘투시법(perspective)’은 보이는 현실과 수학적 비율(과학적 진리)을 일치시킴으로써 미술을 합리적으로 - 동시에 그 자체로 미학적인 것과 일치시킴으써 -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기법인데, 이러한 관점에서는 진리(의미 또는 가치)가 사건, 사물, 인간, 관념 그 자체 본성에 내재한 것이며, 그로부터 직접적으로 생겨나는 반영론적 관점을 취하게 된다. 미술의 표현기법이나 미학적 기호들이 거울처럼 실재를 그대로 반영(재현)하고 어떤 실재의 의미를 왜곡없이 전달하는 것처럼 이해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상징이나 언어도 세계, 사회, 인간(타자), 사물 내에 이미 존재하는 참된 의미를 반영하고 정확히 묘사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정희승 작가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의 시, “A rose is a rose is a rose(…)”(장미가 장미인 것은 장미이기 때문에...)를 생각해보자[정희승 작가의 작품 참조]. 이 시는 대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는 의미로 이해된다. 장미라는 이름에는 장미와 결부된 감성과 상상력이 이미 함축되어 있다는 것이다(Ron Eller, http://www.ron-eller.com/Rose.html). 진실(the truth)은 세계 내에 이미 고정된 것으로 존재하고 있다(Hall 1997: 24). '장미'라는 기호(언어)는 장미의 실제 본질을 결코 배반하지 않는다. '장미'라는 말은 실제 장미(자연)의 ‘모사(mimesis)’일 뿐이다. '장미'라는 언어 - 기호, 개념, 이론 - 는 실제 장미 - 그것의 본성과 경험 - 와 정확히 ‘대응(correspondence)’하는 것이다. 이것을 ‘진리 대응설(correspondence theory of truth)’이라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는 지식이나 진리란 인간이 ‘발견’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스타인의 시는 진리대응설을 확증하는 사례일수만은 없고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가능하다. 가령 '장미'라는 발화는 앞선 - 현전하는 - 사회적 발화들 속에서 이미 어떤 감성과 상상력이 함축된 방식으로 사용되어왔다. 따라서 이것은 단순한 모사가 아니라, 의미의 반복과 지연을 통한 재-현이거나 오히려 사회적 실재의 구성성을 보여주는 사례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원근법의 발견 이래, 특권화된 - 객관적인 - 시각의 ‘에피스테메’라고 할 수 있다. 객관적이고 관조적인 관찰자라는 위치는 서구 근대적, 과학적 주체의 발명과 그 궤를 같이 한다. 근대적 주체는 ‘밖의 세계’(자연, 대상)를 있는 그대로 정확히 재현하는 데 관심이 있었고, 이를 위해 방법(론)들 - 관찰, 귀납, 연역, 검증, 반증 등 - 과 실험도구들을 개발했다. 이른바 과학이란 자연 안에 있는 지식(법칙)을 발견해 가는 재현의 절차를 합리화한 것이다. 근대인은 과학적 지식(이론)과 경험의 객관적 준거로서의 자연 대상이 실제로 존재하며 과학적 방법을 통해 진리에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간다고 믿는다. 이러한 반영론의 형이상학적 기반을 이언 해킹은 “존재자에 관한 실재론(realism about entities)”이라고 한다(2005: 30). 이른바 ‘과학적 실재론’은 “올바른 이론에 의해서 기술되는 존재자, 상태, 구조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이야기한다. 양성자, 광자, 역장, 블랙홀은 손톱, 터빈, 개울의 소용돌이, 화산처럼 실재한다. 소립자 물리학의 약한 상호작용은 사랑에 빠지는 일처럼 실재한다. […] 진정으로 올바른 이론은 참인 이론이 될 것이다”(해킹 2005: 68).  

과학적 재현의 기술들 중에 ‘관찰’과 '이론'이란 무엇인가?

‘자, 이제부터 관찰을 시작합니다!’ 지금부터는 과학철학자 칼 포퍼의 예화다. 

연필과 종이를 들고 유심히 관찰하여 그 내용을 기록하시오!” 학생들은 무엇을 관찰하라는 말이냐고 물었다. 분명히 "관찰하라"는 지시는 불합리하다. (……) 관찰은 언제나 선택적이다. 관찰은 선택된 대상, 분명한 과제, 관심, 어떤 관점, 문제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관찰의 기술은 속성을 나타내는 단어를 가진 기술적 언어(descriptive languge)를 전제한다. 카츠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굶주린 동물은 주위 환경을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으로 나눈다. 쫓기는 동물은 주위 환경을 피할 수 있는 길과 숨을 곳으로만 본다 ……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대상들은 …… 그 동물의 필요에 따라 바뀐다.> 대상들은 오직 이러한 방식으로만, 즉 필요나 관심과 결부된 방식에 따라서만 분류될 수 있으며, 비슷해지거나 달라질 수도 있다는 점을 덧붙일 수 있겠다. 이러한 규칙은 동물뿐만 아니라 과학자에게도 적용된다. …… 과학자의 경우에는 그의 이론적인 관심사, 탐구하고 있는 특수한 문제, 그의 추측과 기대, 그리고 일종의 배경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론, 즉 그의 준거틀이나 <기대 지평>에 따라 관점이 주어진다(포퍼 2002[1963]: 101).

결국 ‘관찰과 가설 중에 어느 것이 먼저인가?’라는 물음에 포퍼는 ‘선행된 가설’이라고 대답했다. ‘선행된’ 가설은 관찰시에 수집할 자료의 범위를 확정한다. 즉 가설을 수립하고 나서야 비로소 ‘어떤’ 관찰과 사실들을 수집해야하는지 결정할 수 있으므로, 가설연역적 방법(이론)이 귀납적 방법보다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김경만 2004:114-115). 이것을 ‘관찰의 이론 의존성(또는 이론 적재성)’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이론(언어)으로부터 중립적인 관찰 보고(언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토마스 쿤은 (포퍼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논리를 더 발전시켰다. “어떤 실험도 어떤 부류의 이론 없이는 고안될 수 없다." 쿤은 감각 경험에 직접 호소하는 경험적인 기반을 거부했다. 감각 경험이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며, 관찰 언어가 감각 경험을 이론 언어로부터 독립적으로, 즉 해석을 거치지 않고 직접적으로 표상한다는 전제를 거부했다. 과학은 이론과 자연 그 자체를 비교하는 일이 결코 아니다(Sharrock・Read 2005: 34).


그렇다면 이론의 역할은 무엇일까? 이론은 어떤 방식으로 사용되는가? 그리고 자연(대상)은 그 이론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론은 경험(사례)을 분류하고 조직한다. 토마스 쿤이 예로 든 어린이의 학습과정을 생각해보자. 조류에 대해 배우는 한 어린이는 개별 새들 사이에 수많은 차이들과 유사점들을 찾아낼 수도 있을 만큼 ‘일반적인 시각’과 인지능력을 갖추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어린이는 처음에 오리, 거위, 백조 등을 구별하지 못할 것이다. 오리과에 속한 다양한 종 간의 차이와, 오리과와 거위과의 차이 간의 차이도 구별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곧 어린이는 어른들로부터 (또는 또래 친구로부터) 오리와 거위의 구별법을 시행착오 끝에 체득하게 된다. 이 어린이가 배운게 된 것은 무리 내에서의 유사점과 무리 간의 차이점을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어린이의 지각은 특정한 측면에서의 유사성과 차이점에 고정이 된 것이고 그러한 점에만 선택적으로 주목하도록 훈련된 것이다(Barns 1988: 73). 말하자면, “시각 자극을 처리하는 신경 작용이 부분적으로 재구성된 것이다”(Kuhn 1977: 309-310; Barns 1988: 73에서 재인용). 이제 이 어린이는 각각의 종들을 분류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을 쿤은 ‘학습된 유사관계’라고 표현했다. “이러한 유사 관계의 체계는 우리가 자연에 대해 부여한 질서이지, 그것 자체에 의해 강요된 질서는 아닌 것이다”(Barns 1988: 73). 자연은 우리에게 어떤 정의(definition)나 의미를 강요하지 않는다. “우리가 분간할 수 있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유사점과 차이점들 가운데서 어떤 점을 기준으로 삼아 구분하든 간에 자연은 상관치 않는다. […] 종류의 구분은 관습일 따름이다”(Barns 1988: 74). 사물의 규정은 인간(사회)의 실천적 용법에 달려있다. 어린이가 배운 것은 “주어진 사회에서 선호되고 있는 분류방법인 것이다”(Barns 1988: 74). 이러한 “학습과정에는 사회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이 동시에 작용한다. 문화와 경험이 나란히 작용하는 것이다”(Barns 1988: 75).


모든 감각과 인식 작용은 분류된다. 보는 것(vision)은 분할(division)해서 보는(gaze) 것이고, 해석 작업이란 범주화하고 구별하며 경계를 만들고 포함시키거나 배제하는 것이다. 메시지는 수용자에게 자동적으로(spantaneously)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부호화된 것(coded)의 해독(decoding) 과정을 통해 이해된다. 부호화되었다는 것은 특정한 의미 범주로 전형화(typification)되었다는 것이다. 개별 대상들을 전형화한다는 것은 특정한 상징적 기호 아래로 동일시(identify)한다는 것이다(동시에 동일시는 구성적 외부를 갖게 된다). 결국 관찰은 이론과 궁극적으로는 분리될 수 없다. 객관적 실재를 찾아내려는 과학적 연구 활동은 이론적 개입, 즉 실천(praxis)인 것이다.

문화사가 피터 버크는 포퍼, 니체, 비트겐슈타인, 듀이, 윌리엄 제임스 이후, 또는 소위 ‘언어적 전회(linguistic turn)’ 이후, 이제 “거울은 깨졌다. 표상이 그 대상과 ‘일치’한다는 가설에는 의혹이 드리워졌다”고 말했다(2005: 131). 미술에서는 인상주의부터를 탈재현적 미술양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일상의 말과 실천을 통해서 자신들의 세계(실재)를 건설(구성)해 나간다. 홀은 이것을 ‘의미있게 만드는 실천’(signifying practice; 의미화 실천)이라고 표현했다.

이러한 생각(구성주의)을 더 밀고 나간 사람들 - 소위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표상 뒤에, 텍스트 밖에 (재현/해석과 독립적인) 실재의 재현 불가능성을 말하고, 궁극적 실재가 있는가라는 물음 자체를 우문으로 여긴다. “미디어가 메세지다”(마셜 맥루한). “행위 뒤에 행위자는 없다”(주디스 버틀러). 맥루한의 생각을 더 밀고나간 보드리야르나 기 드보르는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현실(reality)을 아예 미리 구성해버리는 ‘하이퍼 리얼리티(hyper-reality)’ 또는 ‘스펙터클’을 말한다. 뉴스는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특정한 사건이 매체를 통해 반복되고 복제됨으로써 진짜/가짜 경계는 사라지고 재현된 이미지는 초현실성을 획득한다. “하이퍼 리얼리티는 현실을 더럽히는 재현이라는 의미를 지닌 ‘가짜’가 아니다. 그것은 또 다른 유형의 ‘리얼리티’이며, 주체가 리얼리티를 경험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레인 2010: 183). 그래서 결국 현대적 삶의 모든 것이 거대한 하이퍼 리얼리티이다. 이제 재현에 상응하는 원본(실재)에 대한 관심은 사라진다. 이것이 바로 ‘시뮬라크르’이다. 다시 말해 실재/표상 이미지, 필연적 자연/인위적(임의적) 문화, 객관적 사실/주관적 의미라는 이분법적 경계는 무화된다. 양자 간의 일대일 대응 관계에만 천착하는 것은 무의미하게 된다. [하지만 나는 보드리야르의 주장이 논쟁적이긴 하지만, 재현불가능성과 실재에 대한 단순한 회의주의에 빠지는 것 - 소위 '포스트모더니스트'에 대한 흔한 비난이 보여주듯 - 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가 모순을 일으키도록 극단까지 밀어붙이는 사유를 통해서 현재 (대개 미디어를 통해) 승인된 사실성으로서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사유를 촉진하고 재현불가능성을 폭로함으로써 오히려 실재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킨다고 생각한다. 그의 글쓰기(limit-writing)는 그러한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제 ‘문화’는 단순한 관념으로서 실재(자연)를 해석하는 정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을 ‘실재’로 구성하는 - 의미를 부여하는 실천이며, 표상 자체, 재현행위 그 자체가 되었다. 자연은 이미 문화 - “bodies that matter”(버틀러) - 이며, “패러다임은 자연이다”(쿤). 우리가 “실재”라고 부르고 믿으며 (아무 문제 없이 잘) 사용하는 모든 실제적인 것들이 실체성의 여부와 무관하게 문화적인 것, 즉 우리 인간 사회가 만들어낸 집단적 의미화 실천의 산물인 것이다.  


가령 TV드라마는 실제 삶의 단순한 반복(재현)이 아니고, 공연 역시 대본의 단순한 낭독(재현)이 아님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초창기 연극학이나 인류학, 의례학에서는 공연이 단지 대본을 그대로 따르는 것으로 이론화했다. 하지만 오늘날 공연에서 의미는 각각의 공연마다 새롭게 창출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빅터 터너 같은 인류학자나 고프먼 같은 사회학자, 퍼포먼스 이론가들은 인간사회도 연극공연무대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70년대 ‘performative turn’). 인간은 초월적 가치 규범(파슨스)이라는 대본을 무지몽매하게 따라가는 ‘꼭두각시(cultural dope)’가 아니라(고프먼, 가핑클), (해석없이 존재하는) 외부 실재에 호소하지 않고도 매번 변화하는 상황 가운데에서 즉흥적이지만 적절하게 임기응변하고 자신의 행동을 (나름) 합리적으로 해명하며 도덕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능력있는 존재다(가핑클). 이런 사람들이 모여 사회라는 무대에서 자신을 전시하고 상호작용하며 특정한 집단문화와 진정성(authenticity)을 생산함으로써 다시 사회를 (재)창출하는 것이다. 연기자들이 시나리오나 스토리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듯이, 사람들은 사회적 규범이나 사회체계를 단순히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창조하는 것이다. 공연이나 연극작품은 단순히 무엇인가를 '위해'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무엇을 만드는 재-현인 것이다. 작품의 진실성은 재현의 배후에 있는 실재에 있다기보다는 재현 그 자체에 있다(다만 우리가 그것을 ‘리얼리티’라고 부를 뿐이다). 진실은 저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 정체성이나 인격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상호작용을 통해서 저마다의 인격(persona)을 전시하지만 (고프만의 연극론에 대한 흔한 오해에서처럼) 이 인격은 가짜-가면이 아니다. 나의 정체성은 무대 위 상호작용의 퍼포먼스를 통해서 구성되고 퍼포먼스가 끝나면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가면 뒤에 진짜 얼굴은 없다. 끝없는 가면만이 있을 뿐이다(중국 변검 공연을 생각해 보라).


결국 재현이란 언어적이고 관계적인 실천을 통해 의미라는 산물을 구성해 나가고, 또 이를 '실재'로서 인식하게 되는 과정이다. 재현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듯 ‘순수’하고 ‘투명한’ 과정이 아니라, 무언가를 매개하고, 무언가에 의해 매개되며, 심지어 사물이 순수하고 자연적인 것이라는 믿음을 우리에게 ‘상식'으로, '실재'로 만들어 주는 과정 그 자체이다. 다양한 방식의 재현과정들은 어쨌든 재현의 대상들에 대한 궁극적 신뢰, 본질주의적 가치에 대한 환상, 이 세계의 의미나 미학적 가치에 대한 자연스러운 믿음들을 생산하고, 그럼으로써 재현의 기제와 매개의 과정들은 재현 대상의 본질 속에 기입된다. 이렇게 해서 재현은 우리에게 '실재'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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