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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쿠즈민의 <날개>와 러시아 퀴어 문학 (1)

 

 

이 종 현 | 서교인문사회연구실 회원

 

 

작년 11월 18일 큐큐출판사에서 미하일 쿠즈민의 소설 <날개>가 번역되어 출간되었습니다. 그리고 12월 4일 서점극장 라블레에서, 12월 17일 보안책방에서, 12월 28일 무지개신학교에서 북토크를 가졌습니다. 동성애혐오로 유명한 러시아에서 어떻게 세계 최초의 커밍아웃 소설이 등장하게 되었는지, 또 이후 러시아 퀴어 문학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시가 아니라 소설이라서 이 코너에 올리는 것이 적절한가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시인이자 소설가로서 소설보다 시를 더 많이 썼던 쿠즈민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퀴어라는 주제가 지닌 현대성의 근원을 탐색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니 오랫동안 쉬었던 <러시아 현대시 읽기>에 이 북토크의 원고를 올려봅니다. 역자 후기에는 미처 넣지 못한 내용들입니다. 여러 가지 작품과 영상들도 올리면서 5회 정도에 걸쳐 연재하겠습니다.  

 

 

  

 

<날개>를 쓴 미하일 쿠즈민은 1872, 구력인 율리우스력으로는 106, 신력인 그레고리력으로는 1018일에 태어났습니다. 대략 두 달 전이 쿠즈민의 생일이었던 셈입니다. 저는 이 사실도 모른 채 두 달 전쯤 러시아 우랄 지역의 대표적 공업도시 첼랴빈스크에 간 적 있습니다. 첼랴빈스크는 제철공업이 발달한 도시로 흔히 무쇠의 마이애미라고 불립니다. 하지만 저는 첼랴빈스크라는 이름을 들으면 이반 둘린 Иван Дулин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이반 둘린은 2000년대 중반 러시아에서 방영되었던 코미디 프로그램 <나샤 Russia>, 우리 Russia’의 등장인물입니다. 짧은 영상을 자막과 함께 보실텐데요, 여기서 말놀이가 하나 나옵니다. 말놀이의 이해를 위해 힌트를 드리겠습니다. 러시아에는 노브고로드라는 이름을 가진 도시가 두 개 있습니다. 하나는 북쪽의 유서 깊은 도시 벨리키 노브고로드’, 직역하자면 위대한 노브고로드이고 다른 하나는 볼가 강과 오카 강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역시 유서 깊은 상업 도시 니즈니 노브고로드’, 아래쪽 노브고르드입니다. <날개>에서 바냐가 이곳의 장에 가보고 싶어 하기도 하지요. 영상에서 나오는 자드니 노브고로드에서 자드니뒤쪽을 뜻합니다. 2016년에 이도진 씨와 친구들이 퀴어 잡지 뒤로(DUIRO)’를 창간하신 바 있지요. ‘뒤쪽의 의미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우선 영상을 보시지요. (자막을 넣은 영상이 올라가지 않습니다. 아래 링크의 영상을 보시면서 자막을 참고하세요. 자막 - 이종현)  

 

 

 출처: Командировка поездка в ЗАДНИЙ Новгород Дулин и Михалыч наша раша. - YouTube

 

내레이션: 이곳은 첼랴빈스크. 첼랴빈스크의 사나이들은 엄청난 상남자들이다.

그들은 자기 나이를 셀 때면 손가락을 하나 잘라서 절단면의 나이테를 센다. 

바로 이곳에 전통적이지 않은 성적 지향을 지닌 프레이즈공이 일하고 있다. 이반 둘린. 그는 얼마 전 공장장이 되었다.

 

둘린: 들어와.

미할리치: 불렀나, 둘린? 

둘린: 응, 미할리치. 들어와서 앉게. 공장의 중요한 일 때문에 자네를 불렀어. 

미할리치: 그래? 빨리 말해봐, 벌써 점심시간이야. 

둘린: 미할리치, 공장 경영진이 나보고 출장을 다녀오라고 하네. 

미할리치: 다녀와, 내가 무슨 상관이야? 

둘린: 알다시피 내가 이 자리에 있은 지 얼마 안 되었잖아. 자네는 25년이나 이 자리에 있었고. 그래서 공장을 위해서 자네한테 부탁하네만, 나랑 출장을 같이 가지. 일을 좀 알려줘

미할리치: 공장 일이라면 당연히 도와주지. 같이 갈게. 그런데 어느 도시로 가는 건가?

둘린: 노브고로드. 

미할리치: 노브고로드. 멋진 도시지. 그런데 어떤 노브고로드? 니즈니겠지?

둘린: 아니, 미할리치, 니즈니는 아니야.

미할리치: 니즈니가 아니라고? 그럼 벨리키 노브고로드?

둘린: 아니, 미할리치, 벨리키도 아니야. (둘린, 문을 열쇠로 잠근다)

미할리치: 벨리키도 니즈니도 아니면 노브고로드가 또 있나

둘린: 나랑 자네, 미할리치, 우리는... 자드니 노브고로드로 갈거야

미할리치: 자드니 노브고로드? 그런 게 다 있나?... 둘린 이 자식, 자드니 노브고로드 따위엔 안 가

둘린: 어쩔 수 없어, 내가 표도 이미 사뒀거든. 짜잔, (둘린, 핑크색 콘돔을 꺼낸다) 그것도 급행열차.

미할리치: 너나 자드니 노브고로드로 꺼져! 또 개소리하고 있네. (미할리치, 나가기 위해 문을 열려고 하지만 열리지 않는다) ... , 너 뭐 하는거야

둘린: 출입문이 닫힙니다! (둘린, 호루라기를 분다) 첼랴빈스크 출발 자드니 노브고로드 도착 급행열차가 1번 플랫폼에서 출발합니다. (둘린, 역무원 모자를 쓴다) 차장 이반 둘린이 승객 여러분을 친절히 모시겠습니다

미할리치: 이게 무슨 짓이야?

둘린: 속옷을 입고 출발할까요, 벗고 출발할까요? 차라도 좀 드릴까요? 설탕은 안 줄 거야, 엉덩이가 끈적거릴 테니까. (둘린, 미할리치에게 다가가며) 자드니까지 못 기다리겠구만.

 

어떠신가요? ‘러시아’, ‘퀴어라는 단어를 들으면 유튜브 영상 하나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남자 둘이 손을 잡고 붉은광장을 거닙니다. 행인들은 그들을 툭툭 치지요. 이 영상이 언제 찍은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지금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을 듯합니다. 사실 <이반 둘린>이 방영되던 2000년대에도 상황은 더 낫지 않았을 것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그때는 2013년에 제정된 동성애 선전 금지법이 없다는 것일 뿐입니다. 여기서 다시 묻게 됩니다. 우리는 러시아’, ‘퀴어라는 단어를 듣고 마냥 억압을 떠올려야만 할까요? 푸틴 대통령이 곰 사냥을 하고 웃통을 벗은 채 말을 타고 초원을 달리는 상남자 불곰국의 이미지만을 떠올려야 할까요

 

<이반 둘린영상을 보여드린 까닭은 사실 상남자 불곰국 퀴어포빅 러시아가 최근의 현상이고 원래 러시아는 퀴어프렌들리했다는 사실을 보여드리고자 한 데 있지 않습니다. 이 영상에는 분석할 만한 문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왜 퀴어는 웃음거리로 표상되는가? 퀴어가 일반을 잡아먹을 거라는 공포가 담겨있지는 않을까? 왜 퀴어는 항상 뒤쪽과 연결되는가? 사실 저는 러시아퀴어문학 전문가가 아니라서 이런 문제들에 답하지는 못할 듯합니다. 이제 막 <날개>를 번역하고 공부하면서 러시아퀴어문학 전문가가 되고 싶을 뿐입니다. 이 영상을 보여드린 까닭은 우리가 퀴어를 생각할 때 항상 제쳐놓았던 지역을 환기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즉 우리에게 내면화되어 있는 서방의 시각에서는 거친 변방인 러시아에도, 게다가 듣도 보도 못한 지방에도 퀴어는 존재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간다는 것, 여기에도 우리가 관심 갖고 분석할 만한 문제들이 쌓여있다는 것을 살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서 제가 역자후기에서 옮겼던 쿠즈민의 시에 나오는 '선조들'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 러시아 퀴어 문학의 선조들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러시아 퀴어 문학 약사(略史)

다들 아시겠지만 퀴어라는 말은 고사하고 동성애자라는 말도 상당히 뒤늦게 등장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작품을 퀴어 문학에 편입시킬 것인가라는 질문은 상당히 문제적입니다만, 저는 일단 규범적 이성애주의에서 벗어나는 경우들이 관찰되는 러시아 문학 작품들을 꼽아보고자 합니다.

 

그러기 전에 다시 노브고로드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번에는 벨리키 노브고로드입니다. 20세기 중반에 이곳에서는 13세기에 자작나무 껍질에 적은 것으로 보이는 고대러시아어 문헌이 다수 발견됩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온핌이라는 아이가 그린 그림과 글씨입니다. 알파벳을 배우면서 적었나 봅니다. 귀엽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자작나무 문헌들 가운데에는 11세기 경 수도사들의 사랑이 엿보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편지입니다. 편지라서 퀴어 문학이라고 하긴 어렵지만 재미있는 글입니다. 편지의 내용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예프렘이 나의 형제 이수히에게. 너는 묻지도 않고 화부터 냈니. 수도원장님이 나를 내보내지 않으셨어. 나는 부탁드렸지만 나를 아사프와 함께 꿀을 사러 시장에 다녀오라고 보내셨어. 그래서 종이 울릴 때 우리는 둘이서 수도원에 도착했던 거야. 그런데 너는 왜 화를 내니? 난 언제나 네 것인데. 네가 내게 나쁜 말을 해서 기분이 안 좋아. 나의 형제야, 네가 뭐라고 하든 맹세할게. 너는 내 것이고 나는 네 것이야. (자작나무 문헌 605번)

 

 

본격적으로 러시아 퀴어 문학을 연구하는 데 아주 선구적인 역할을 하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사이먼 카를린스키라는 분이십니다. 오늘 워낙 많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할 거라 생애에 대해서는 넘어가겠습니다. 이 분은 원래 세묜 아르카디예비치 카를린스키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러시아인인데 미국으로 망명하셔서 버클리 대학교에서 러시아문학을 가르치셨습니다. 러시아 게이문학을 발굴하고 소개하는 데 큰 역할을 한 분이시지요. 특히 <<니콜라이 고골의 성적 미로(The Sexual Labyrinth of Nikolai Gogol)>>라는 책에서 고골의 창작 세계를 섹슈얼리티를 통해 조명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 분이 1970년대에 미국에서 쓴 글이 1991년 러시아 문예지 <문예평론 Литературное обозрение>에 실렸는데 그 제목이 다음과 같습니다. <외국에서 들여왔다고? 러시아문화와 문학에서 나타난 동성애 개괄>. 짧은 논문인데요, 번역은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웹진에 조만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제목에서 외국에서 들여왔다고?’라는 말은 소련의 대표적인 농촌문학 작가 발렌틴 라스푸틴 В. Распутин이 영국 방송에서 인터뷰한 내용을 가져온 것입니다. 라스푸틴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동성애에 관해서라면, 러시아는 그 문제에 있어 깨끗하게 놓아둡시다. 우리에겐 우리의 전통이 있습니다. 남성 간의 이러한 교류 양상은 외국에서 들여온 것이지요. 동성애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침해받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다른 나라에 가서 살면 될 일입니다.” 

 

 

세묜 아르카디예비치 카를린스키(1924-2009) 

 

 

카를린스키는 라스푸틴의 말을 반박하기 위해서 고대 러시아의 성자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11세기에 쓰인 <보리스와 글렙에 대한 이야기 Сказание о Борисе и Глебе>에서 보리스와 글렙은 러시아의 왕자들인데요. 이때, 보리스는 헝가리 출신의 시종 게오르기를 사랑해서 금목걸이를 하사합니다. 왕자들은 권력투쟁에서 형제인 스뱌토폴크에게 죽임을 당하는데요, 게오르기는 보리스가 죽은 것을 보고 이와 같이 말합니다. “나의 소중한 주군이시여, 당신을 홀로 두지 않겠습니다! 당신 몸의 아름다움이 시드는 지금, 나도 당신을 따라 목숨을 끊겠습니다!” 그렇게 스스로 가슴에 칼을 찔러 죽은 게오르기의 시체를 거두는데 보리스가 선물한 금목걸이가 목에서 빠지지 않자 스뱌토폴크의 병사들은 그의 머리를 잘라내고 맙니다

 

 

러시아 정교회에서 시성된 보리스와 글렙의 이콘

 

 

미국의 노문학자 브라이언 제임스 배어는 이 이야기에서 보리스와 게오르기의 관계를 가리켜 동성애보다는 동성유대에 가깝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면서 러시아 문학에서 동성애다운동성애는 번역문학에서 등장한다고 합니다. 18세기 후반에 활동한 시인 가브릴 데르자빈 Г. Державин이 번역한 사포의 시입니다. 아시다시피 레스보스의 시인 사포의 시적 화자는 여성입니다. 그런데 사포의 두 번째 송가를 러시아어로 옮길 때 여러 남성 시인들은 화자를 남성으로 바꿨다고 합니다. 데르자빈은 이러한 관행을 깨고 1780년의 번역에서 형용사 여성형(감각을 잃은, лишенна)을 사용해서 화자의 성별을 여성으로 살려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또 재미있는 점은, 1797년의 번역에서는 동사(느낀다, ощущаю)만을 사용해서 이 형용사 구절을 없애고 화자의 성별을 알 수 없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더 생각하고 조사해야겠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러시아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시인 가브릴 데르자빈(1743-1816) 

 

 

Густая, темна мгла мой взор объемлет вкруг;

Не слышу ничего, не вижу и не знаю:

В оцепенении едва дышу — и вдруг,

Лишенна чувств, дрожу, бледнею, умираю.  

 

짙고  어두운 안개가 내 시선을 감싼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온몸이 마비되어 숨을 쉴 수 없다, 갑자기

감각을 잃은 나는 몸을 떨며, 하얗게 질려 죽어간다. (1780년 번역)  

 

 

По слуху шум, по взорам мрак,
По жилам хлад я ощущаю;
Дрожу, бледнею — и, как злак
Упадший, вяну, умираю.

 

들리느니 소음, 보이느니 어둠,

혈관에 차가움을 느낀다;

나는 몸을 떨며, 하얗게 질린다 떨어진

낱알처럼, 시들며 죽어간다. (1797년 번역)

 

 

이처럼 고급문학에서 동성애라는 주제는 번역문학을 통해서 들어왔고 이러한 특성은 러시아시의 태양푸시킨의 시에서도 드러납니다. 푸시킨의 경우, 외국시를 번역한 것이 아니라 외국시를 모방한 작품에서 동성애 모티프를 활용합니다. 이때, 모태가 되는 텍스트는 바로 1819년에 프랑스어로 편찬된 아랍시선입니다. 소년의 이야기는 듣지 않고 우리는 (...) 쌍둥이 호두알이 되었단다라고 말하는 것이 참 난감하면서도 나는 조롱도 두렵지 않단다라는 다짐이 장하기도 합니다

 

 

 

 

아랍 모방

 

사랑스러운 소년아, 다정한 소년아,

부끄러워 말렴, 넌 영원히 내 것이야.

우리 안에는 똑같은 격렬한 불꽃이 있으니,

우리는 하나의 삶을 살자꾸나.

나는 조롱도 두렵지 않단다.

우리는 함께 두 배가 되었고

우리는 하나의 껍데기 아래

점 하나도 똑같은 쌍둥이 호두알이 되었단다.

 

 

 

--- 다음 편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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