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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적 페미니즘은 '여성'을 구할까?(1/2)

 

 

 

발표자   김보명 (이화여대 여성학과)

 

 

 

 

 

※ 본 원고는 지난 2022년 6월 14일 서교인문사회연구실에서 진행한 [2022 서교연 연속포럼 체제전환을 위한 정치학적 모색2]에서  김보명 선생님께서 발표한 내용의 일부를 녹취 형식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본문에 실린 그림은 모두 김보명 선생님 수업자료에 기반한 것입니다. 

 

 

 

# 다양한 조합의 동시대 페미니즘

 

  어떤 면에서는 조금 혼란스럽다면 혼란스러울 수도 있을 것 같고, 이따가 말씀드리겠지만 이 혼란의 와중에 이제 '도대체 우리는 어디에서 무슨 얘기를 해야 되는가' 이런 고민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라고 하면 ’얘들은 또 누구냐’라고 할 수 있겠지만. 아무튼 저와 저희 동료 교수님 선생님들 그리고 학생들이라고 해보겠습니다. 아무튼 '어느 위치에 서야 되는가 부터가 이제 쉽지 않은 상태다'라는 정도까지 일단 이야기 드려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새로운 논의들보다는 굉장히 이미 많이 반복된 얘기들이긴 합니다. 페미니즘의 새로운 조합들인 거죠. 그러니까 이제 무슨 얘기냐면 페미니즘은 이미 굉장히 많은 역사들을 가지고 있는 거죠. 그럼에도 새로운 현상이 또 여전히 새롭게 등장하는데 그 새로움이라고 하는 게 기존의 레퍼런스들을 새롭게 조합하는 방식으로 일어나고 있는 게 최근의 포스트 페미니즘이든 보수적 페미니즘 혹은 트랜스 배제적인 페미니즘이든 여러 가지 이름들을 갖고 나타나고 있죠. 


페미니즘에서 셀레브리티 페미니즘이 많이 보이는데 특징은 기존에 굉장히 많은 페미니즘의 레퍼런스들을 새롭게 재조합하거나 약간씩 비틀어서 새롭게 쓰는 거거든요. 예를 들어 트랜스 배제적인 페미니즘이 되게 대표적이잖아요. 레디컬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을 가져오면서 일견은 또 그 정치학을 사용하는 듯 하지만 사실은 레디컬 페미니즘의 정치학을 굉장히 반대로 뒤집어서 왜곡하는 방식으로 쓰고 있죠.

이제 그런 현상들이 굉장히 많이 나타나고 있고 신자유주의적 페미니즘도 마찬가지. 한편으로는 자유주의 페미니즘 정치학인 것 같지만 사실은 또 자유주의 페미니즘이 가지고 있었던 나름의 질적인 부분을 매우 시장에 맞춰서 새롭게 삭제하고 대중적인 문법으로 번역해내는 것이죠. 그래서 ‘성공적인 여성을 미워하지 말라’라든지 하는 표어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굉장히 많이 보시는 사례들입니다. 

 

 


정치·경제 여러 영역들, 대중문화 영역에서 성공하는 여성들에 대한 매혹적인 이미지들과 이야기들이 있죠. 그리고 그런 것에 대해서 ‘여성들이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정치적이든 도덕적이든 이것은 ‘여성의 마땅한 몫이다’라고 하는 이제 정당성을 부여해 주는 방식이 되겠죠.그래서 새로운 문법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는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각자 또 다 다르기 때문에 분석을 한다면 많은 연구들이 나올 수 있는데요.
 

그래서 얘기하고 싶은 것은

‘새로운 배치들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리고 ‘왜 최근에 여러 가지 표현이 좀 이렇게 혼란스러운가?’ 등에 관한 것입니다.

 


혹은 이제 뭐라고 해야 될까요. 이게 새로운 재편인 것인지, 어떤 면에서 우리가 과거를 어떤 왜곡이라고도 얘기할 수 있지만 또 어떻게 보면 새로운 배치라고도 얘기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배치들에 또 설득되어가는 많은 여성들이 있기는 하니까요. 그래서 그거를 또 단순히 ‘속았다’라고 하는 이야기만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질문들이 더 제기되어야 된다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왜 저는 연구를 못하는가’라는 고민이 들지만. 현실적으로는... 바쁘죠.

 

 

 

 

 

# 파퓰러 페미니즘?

파퓰러 페미니즘도 마찬가지입니다. 한편으로 여기서 파퓰러 페미니즘이라고 하는 것은 이제 위에서 말하는 여러 페미니즘들이 대중성을 갖는 부분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대중성이 또 정확히 뭔가? 이게 사실은 파퓰러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대중성이 뭔가, 무엇이 대중적인 것인가부터 정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파퓰러 페미니즘의 여러 형상들


여러 가지 있는 것 같습니다. 첫 째는 주로 대중문화에서의 대중성이라는 매체의 특징일 수도 있고, 둘 째로는 디지털도 마찬가지로 디지털 자체의 어떤 기술적인 분산성이나 확산 가능성과 복제 가능성이라고 하는 것. 이것이 굉장히 빠른 속도로 페미니스트 메시지들이 확산될 수 있는 기재를 제공하기도 하겠고요. 둘 다 접근 가능하고 굉장히 쉬운 용어들로 페미니즘을 번역합니다. 세 번째 같은 경우는 스페인이라든지 여러 라틴아메리카에서 등장하는 과거에 우리가 얘기하던 민주 페미니즘하고는 좀 비슷한... 그러니까 디지털 문화도 물론 여기서 SNS도 역할을 하는 것이 있는데, 우리도 그렇지만 또 거리와 광장에서 나오는 굉장히 전통적인 사회 운동을 닮은 형태의 여성 대중도 등장하고 있기는 한 것이죠. (예를 들어 여성 행진)

한국 사회에서도 ‘미투’라든지 하는 원인으로 굉장히 많은 여성들이 거리로 나오기도 했거든요. 그래서 이들도 사실은 우리가 흔히 좌파에서 말하는 그 대중의 어떤 얼굴들을 하고 있기는 합니다. 그래서 이 대중성이라고 하는 것도 있고요.
그다음에 한편으로는 또 이제 ‘여성의당’ 혹은 정치적으로 이제 조직하려고 하는 물론 이제 ‘여성의당’ 흐름은 역사적으로 면면하게 다양하게 있는데요. 이걸 ‘왜 파퓰러페미니즘에 넣었는가?’라고 했을 때, 그 답을 하자면 어쨌든 많은 표를 모아야 되고, 혹은 사례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예를 들어 한국의 사례에서 ‘여성의당’은 이전 역사로부터 올라가 봐도, 예를 들어 워마드의 역사로부터 올라가도 굉장히 대중성에 대한 호소와 관심을 얻으려는 일종의 노력이라고 하는 것이 있거든요.

예를 들어 ‘왜 생물학적인 여성에 호소하는가?’라고 했을 때 한 가지 대답은 그것이 ‘숫자를 모으는 방식’이라고 하는 대답이 나오거든요. 그리고 실제로 많은 정치적인 설득이나 어떤 내부에서의 차이들에 대한 복잡한 민주적인 논의를 하지 않고 ‘우리가 같은 이해관계를 갖는 사람이다’라고 하는 것을 굉장히 즉각적으로 이제 설득할 수 있는 기제가 생물학적인 여성이라고 하는 것들도 등장하는 것이죠. 그래서 이런 기제에는 한편으로 어쨌든 ‘우리가 숫자를 모아야지 힘을 갖는다’라고 하는 굉장히 민주주의 세대가 갖는 이 경험적으로 체득한 ‘숫자가 많아야 된다’라고 하는 그 신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각자의 사회에서 사실 대중성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성격들을 갖기는 합니다. 일단은 크게 볼 때 어쨌든 대중적인 것이라는 ‘묶음’으로 일단 지금은 굉장히 들여올 수 있는 걸 한번 다 한번 놓고 생각해보자 약간 이런 식이기도 합니다. 

 

 

 

 


한국 사회에 마찬가지고요. 우리가 여성 대중의 이미지를 생각한다면 그 옛날 여성 노동 운동으로부터 시작해서, 86 세대의 ‘민중 여성’이라고 하는 어떤 이미지들도 있겠죠. 정치적인 주체들도 있겠고. 90년대라고 하면 또 대중문화에서 실제로 굉장히 빨리 여성 페미니즘 메시지를 담은 대중문화들이 등장했거든요. 

 

 

이런 90년대에 이런 이미지들도 있고 최근에 보면 여성 정책도 ‘여성 젠더 정책 사례’에는 굉장히 대중적이면서 동시에 굉장히 힙한 이미지거든요. 제가 볼 때는 지역의 모든 여성들이 참여할 수 있는 정책입니다만 메시지는 굉장히 모든 정책 용어들을 가지고 있는...어렵다면 어려울 수 있는 얘기들까지 다 포괄되는 그런 사례들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거 말고도 한국에서 디지털 페미니즘이라든지 많은 사례들이 있지만 일단 넘어가보겠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한국 페미니즘의 역사에서도 이 페미니즘의 대중성 혹은 여성 대중이라고 하는 이 상상력이 부재하지는 않았고, 이렇게 어떤 시대마다 다른 방식으로 계속 조금씩 있었던 것은 맞고요. 이거를 우리가 그러면 이제 페미니즘의 어떤 대중성 혹은 패미니스트 ‘대중’ ‘여성 대중’ 혹은 ‘대중적인 페미니즘’이라고 하는 어떤 단위로 계보화 할 필요가 있는가? 계보화할 수 있는가? 이런 고민들은 조금 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최근의 장면만은 아니라고 하는 것이고요. 한 가지 더 사례를 들어보면 한편으로 페미니즘에 반대하는 여성들, 반 페미니즘인데 여기에선 여성들이 페미니즘 반대의 주체들인 것이죠.

근데 이 운동 또한 사실 상당한 대중성을 가지고 등장을 하거든요. 서구 반페미니스트 사례를 들어보자면, 이제 우리가 흔히 말하는 ‘보수’ 이런 버전들이 사실 현대 사회로 오면 또 보수적인 페미니즘으로 약간 변주되기도 하거든요.
과거 같으면 페미니즘을 반대하는 입장인데, 지금 같으면 뭐냐 하면은 ‘우리는 보수적이지만 페미니스트다’라는 식으로 문법을 바꾸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과거는 이제 페미니즘이 예를 들면 ‘여성을 괴롭힌다’라고 하는 메시지예요.
여성들이 페미니즘을 원하지도 않고, 두 번째는 실제로 페미니즘을 하더라도 ‘고통스러울 것이다.’ 쉽게 얘기하면 ‘여성들은 정치적인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운 해방된 상태를 원한다. 그러니까 투표권은 우리의 삶을 더 힘들게 할 것이다’라고 주장하죠.
마찬가지로 미국의 ERA(Equality Right Amendment, 남녀 성별에 무관하게 동등한 법률적 권리를 가지도록 미국헌법을 개정하자는 운동, 1923년 처음 의회에 제안됨)에 대해 보수적인 사람도 수사적으로 굉장히 잘 말하거든요. 

 

 

 

 

보수적인 여성들이... 잘 아시겠지만 그래서 ERA 같은 것도 이제 미국 헌법에서 이미 여성들을 굉장히 ‘여성의 특권을 보호하고 있기 때문에 (ERA는)오히려 퇴보다’ 이런 얘기를 한다든지 아니면 ‘여성들은 아내로서 살고 싶어 하지 노동시장에서 동등한 권리를 원하지 않는다’ 이런 얘기들을 해요. 어떤 면에선 그들에게 제가 말하는 것보다 훨씬 설득력 있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나오고 있는데요.

한편으로는 굉장히 보수적인 성역할을 얘기하는데 여기서 메시지는 보수적인지 아닌지가 아니라 ‘이것을 여성들이 원한다’ ‘여성들이 행복해 한다’라고 하는 것. ‘여성에게 좋다’, ‘보수적인 페미니즘은 여성을 위하는 페미니즘이다’라고 하는 ‘그 누가 여성을 위하는가 누가 여성을 대변할 것인가’라는 것에 있어서 실질적으로 굉장히 정치적으로 경합하는 얘기인 거죠. 

 

 

 

 

# 누가 여성을 대변할 것인가

 

첫 사례로, 보수적인 페미니즘. 이걸 우리가 너무 보수적인 정치학을 단순화하거나 무시할 수만은 없는 이유가 이들도 사실은 굉장히 진심으로 조직하는 경향들이 있다는 데 있습니다. 세라 페일린 같은 경우는 굉장히 수사적으로 정밀하게 반대편을 조직해내는 정치성을 정치적인 영향으로 굉장히 크게 만들죠. 이를 해프닝으로 보기보다는 사실 조금 더 면밀하게 이제 분석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참고로 한국에서는 아직 세라 페일린처럼 굉장히 정밀한 수사학을 가진 반페미니즘은 제가 보기엔 아직은 오지 않은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오세라비 씨 이런 분들은 자기의 어떤 언어가 있는 건 아니거든요. 그냥 기존 페미니즘을 공격하는 것에서 굉장히 인기를 끄신 것이지 뭔가 다른 철학이 있으시거나 이런 것 같지는 않아요. 제가 볼 때는 수사학을 가진 반페미니즘은 없는데 ‘언젠가에는 나올까?’ 이런 생각도 잠깐 들고 그런 상황입니다.



둘째 사례로, 기독교의 반페미니즘은 점점 진화하시고 있잖아요.
굉장히 열심히 공부하시거든요. 예전에 동성애 반대는 이제 주로 성경으로 하는 반대하는 거였고, 또 한때는 과학적인 언어로 반대 하셨다가 지금은 ‘젠더 이데올로기’라고 하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잖아요. 예를 들면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이유는 이게 ‘민주적이지 않기 때문에 반대한다’ 이런 얘기들을 하고. ‘국민들이 아무도 모르는데 어떻게 제정하느냐 국민들 대부분 반대한다’ 이런 식의 수사들이 들어오는 거죠. 그리고 기독교는 요즘 굉장히 트랜스 반대도 주장해요.
과거에는 이 부분이 없었는데, 트랜스 반대를 집어넣으면서 ‘트랜스가 여성 화장실에 들어가면 여성들이 얼마나 위험하겠는가’ 이런 것들을 또 수용하면서 이제 새로운 문법들을 계속 만들어 가는 이제 태도를 보여주죠. 어디까지 진화할 것인가에 대해 이제 좀 궁금하기는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세 번째 사례는 최근에 임신 중지 관련해서 프로라이프 페미니즘이 한동안 또 논쟁이 됐었거든요. 그래서 몇 년 전에 트럼프 대통령 당선 때, ‘여성 행진’에서 프로라이프 페미니즘을 이제 주최 측에 넣었다가 빼고 이런 사례들이 있었습니다.
최근에 이제 굉장히 새롭게 등장하는 사례인데, 이것도 분석을 하는 논문들이 좀 있을 텐데 아무튼 요지는 그렇습니다. ‘임신 중지가 여성을 해한다’라고 하는 것이죠.

메시지들이 주로 그래요. 그래서 여성은 ‘deserve better’ 그니까 이것보다 더 나은 것을 대우받을 권리가 있다. 여성은 임신 중지보다 혹은 여기에 흑인도 넣기도 하고 그래요. 그들은 ‘abortion’어보션보다 더 나은 것을 누릴 권리가 있다. 이런 메시지가 이제 큰 기조로 갑니다. 그러면서 이제 임신 중지 권리가 혹은 어떤 여러 정책들이나 스펙트럼이 ’여성을 해한다‘라고 하는 메시지로 설득을 하는 것이죠. 분석하자면 굉장히 재미있다 하면 재미있는 사례들이 이제 계속해서 등장하는데요. 


시간상 한국으로 넘어가 보면 한국에서는 지금 동시대적으로 배치되는 세 가지의 이제 젠더 반대의 세 입지가 있는데. 잘 아시겠지만 하나는 교회 하나는 시장(사실은 우파 정권인데 공정성을 주장)이죠. 쉽게 얘기하면 왜 반대하는가 공정성이고요. 세 번째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이제 렏펨이라고 하는 세 집단인데. 다른 집단인데도 이제 어쨌든 젠더를(각자의 젠더의 의미는 다르지만)젠더 반대의 어떤 목소리들을 내고 있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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