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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러블과 함께 머물기: 대지세 시대의 친족 만들기》서문 & 1, 5,6,7장 (5/5)

 

 

번역          연구공간 L. 

 

 

 

 

 

 

 

 

 

 

 

* 텍스트 서지사항
- Donna J. Haraway, Staying with the Trouble: Making Kin in the Chthulucene, Durham and London: Duke University Press, 2016, pp. 126-133.
- 도나 해러웨이, 《트러블과 함께 머물기:대지세 시대의 친족 만들(가제) 》

 

 

7장 호기심어린 실천

 

 

 

 

 

흥미로운 연구는, 존재를 흥미롭게 만드는 

조건 하에서 행해진 연구이다.

- 뱅시안 데스프레[각주:1]

 

확대된 정신능력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상상력을 방문하도록 훈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한나 아렌트, 《칸트 정치철학 강의》[각주:2]

 

 

뱅시안 데스프레는 다른 존재, 즉 인간 및 비인간과 함께 생각한다. 그것은 드물고도 귀한 소명이다. 소명이란 ‘부름, 함께 부름, ~에 의해 불려진, 마치 세계가 문제인 것처럼 부름, 호출, 도가 지나치기, 방문하기’ 등이다. 데스프레는 어느 날 아침 그녀의 집 창밖에 살아있는 찌르레기의 노래를 듣고, 중요한 소리가 무엇인지를 배워나간다. 그녀는 기쁨과 활력에 차서 — 되풀이해서, 독창적으로, 가차없이 — 그녀가 함께 생각하는 것들에 맞춰 생각한다. 그녀는 어떻게 존재들이 서로 실제로 만날 수 있게 되는지를 공부하고, 그런 식의 이론과 방법을 설득력있게 이용할 수 있게끔 이론화한다. 데스프레의 생각하기는 다른 이의 어리석음을 발견하거나, 관심의 분야를 논점의 증명으로 축소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그녀의 생각하기 방식은 자신을 포함한 모든 참여자의 능숙함competency을 늘이고 심지어 발명하기까지 한다. 그래서 존재방식과 인식방식의 영역은 커지고 확장되며, 존재론적 가능성과 인식론적 가능성 모두를 더하며, 전에 없던 것을 제안하고 작동시킨다. 바로 이것이 그녀의 세계짓기 실천이다. 철학자이자 과학자인 그녀는 발견을 위한 비난과 굶주림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며, 지구의 존재‧생명‧죽음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것 등과 더불어, 그리고 그것을 위해, 함께 인식하고 건설되어야만 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데스프레는 과학자를 관찰하기 위한 자기 자신의 실천과 생태학자 델마 로웰Thelma Rowell이 자신의 ‘소이 양(羊)’을 관찰하는 실천을 언급하면서, “내가 전념하는 특수한 인식론적 위치, 즉 내가 하나의 덕으로서 공손함의 덕이라고 부르는 것”을 긍정했다. [각주:3]그 모든 의미에서 데스프레의 공손함의 함양은 호기심어린 실천이다. 그녀는 상상만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존재를 훈련시키는데 이는 아렌트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방문하러 가기”이다. 방문은 쉬운 실천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의 적극적 관심을, 심지어 혹은 특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미 거의 모든 것을 완전히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그런 타자의 관심을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한다. 또한 대화상대방이 가진 관심을 진정으로 찾기 위해서 질문할 수 있어야 하고 호기심이 지닌 야생의 덕을 길러내야 하며 감각과 응답의 능력을 조율할 수 있어야 하고 그리고 이 모두를 공손하게 해내는 능력을 요구한다. 호기심은 늘 그 실행자를 아주 멀리 떨어진 길로 이끄는데, 그 길에 이야기들이 있다. 

 

 

출처: 문화일보

 

 

 

데스프레의 실천에서 위험을 초래하는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일은 존재들이 미리 확립된 본성과 능력이 있어야 만남을 갖게 된다고 가정하는 접근법이다. 그와 달리 데스프레가 말한 공손함은 놀라운 일이 일어날 가능성, 어떤 흥미로운 일이 발생할 가능성을 열어 놓는 것과 관련해 활동적인 일을 하는 것으로, 이는 우리가 방문하는 이들이 앞으로 일어날 일을 내적으로 활성화시키도록 내버려두는 덕을 함양할 때에만 가능하다. 그들은 우리가 방문을 기대했던 누구/무엇이 아니며, 우리도 예상되었던 누구/무엇이 아니다. 방문은 주체 만들기나 객체 만들기의 춤이며, 그것을 짜는 안무가는 책략가trickster이다.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다른 이가 아주 흥미로운 것으로 발견한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며, 미리 내다본 적이 없는 방식으로 모두를 변화시키는 그것에 연루되는 법을 묻는 것이다. 좋은 질문은 오직 공손한 탐구자, 특히 노래하는 찌르레기에게 자극을 받는 공손한 탐구자에게만 다가온다. 좋은 질문이 있다면, 심지어 혹은 특히 실수나 오인조차 흥미로운 것이 될 수 있다. 이는 매너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인식론과 존재론에 대한 질문이며, 또한 인적이-드문-길을 가는 실천을 경계하는 방법에 대한 질문이다. 적어도 이런 식의 공손함은 미스 매너양Miss manners이 자신의 충고 칼럼에 실은 것은 아니다.

 

 

데스프레가 공손한 탐구를 배우고 가르치는 사례는 너무나 많다. 가장 유명한 것은 그녀가 이스라엘 조류학자 아모츠 자하비Amotz Zahavi의 ‘네게브 사막’ 현장을 방문한 것이다. 거기서 데스프레는 ‘아라비아 꼬리치레새’Arabian babbler와 마주쳤는데 그 새는 새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통적 설명을 벗어났으며, 그 순간 과학자들도 과학적으로 즉흥적으로 행동했다. 자하비는 과학적으로 집요할 정도로 자세하게 ‘꼬리치레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가?’를 물었다. 그는 다른 식으로는 좋은 과학을 할 수는 없었다. 꼬리치레의 이타주의적 습속은 기존 기록을 벗어나 있었는데, 자하비에 따르면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혈연선택과 같은 이론들에 의해서는 잘 설명되지 않는 경쟁적 위신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하비는 꼬리치레들이 흥미로워하도록 그대로 두었으며, 그들에게 흥미있는 질문을 던졌고 그들이 춤추는 것을 보았다. “이 새들은 동이 틀 때 함께 춤춘다고 묘사되고, 서로에게 선물을 주고 싶어하며, 각자의 둥지를 짓는 것을 돌보거나 위험에 처한 동료를 지켜주는 일을 자랑스러워할 뿐만 아니라, 또한 자하비의 묘사에 따르면 그들의 관계는 신뢰에 의지한다.” [각주:4]

 

아라비아 꼬리치레새

 

 

 

데스프레가 우리에게 말한바 자신이 알게 된 것은 특정한 관찰의 실천, 구술, 그리고 새의 삶 등이 각각 독립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것은 단지 연구계획 및 해석을 형성하는 세계관과 그와 관련된 이론의 문제 혹은 그 밖의 순전한 담론적 효과의 문제만이 아니다. 과학자가 현장에서 실제로 하는 것은 “동물이 자신을 보는 그 과학자를 보는” 방식에, 따라서 동물이 응답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각주:5] 강한 의미에서, 관찰자와 새는 기존의 기록으로 써지지 않는 방식으로 서로를 유능하게 하며, 실천적인 연구에서 단순히 보여지는 것 이상으로 발명되거나 촉발되게 만든다. 새와 과학자는 서로에게 맞춰주는 역동적이고 이동하는 관계 안에 있었다. 새의 행위와 그들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행위는 그렇게 된 것(make)이지, 구성된 것(make up)이 아니다. 이야기는 본질적이지만 결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다. 자하비는 꼬리치레에 대해서가 아니라 꼬리치레와 함께 실험하려 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 꼬리치레에게서 세상을 보려한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세상을 보려고 했다. 실천을 요구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래서 그와 동일한 요구가 데스프레를 만들어냈는데, 그는 과학자들을 지켜보려고 갔지만 결국 훨씬 더 복잡한 실천에 얽히게 되었다. 새와 과학자는 뭔가를 하며 그것을 함께 한다. 그들은 서로 함께-되었다. 남부 이스라엘 사막 세계는 능숙함에 관여하는 능숙함을 더하고, 관점에 관여하는 관점을 더하며, 주체성에 관여하는 주체성을 더하고 버전[설명]을 이해해 버전[설명]을 더하면서 구성되었다. 간단히 말해 이러한 과학은 빼기가 아니라 더하기에 의해 작업했다. 세계가 넓어졌다. 즉 꼬리치레들과 과학자—데스프레가 포함된—들은 전에는 이용할 수 없었던 제안proposition의 세계에 거했다. “인간들과 꼬리치레들은 단지 서로 말을 한다기보다는 이야기를 창조한다. 그들은 새로운 기록을 창조하고 드러낸다.”[각주:6] 좋은 질문이 제기되었고, 놀라운 대답이 세계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다. 방문은 위험이 따를 순 있겠지만 분명 지루한 일은 아니다.

 

 

 

데스프레의 작업은 문자 그대로의 협력으로 가득하다. 사람들 및 동물들과의 협력이지 단지 서로에 대해 생각한다는 식의 은유로서의 협력이 아니다. 내가 인간, 생물체, [기계]장치가 얽혀있는 협력에 대체로 마음이 끌렸다는 것을 인정한다. 사회학자 조슬린 포르셰와 농부들 그리고 그들의 보살핌을 받는 돼지와 소 등으로 이루어진 데스프레의 작업이 나를 지탱하게 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데스프레와 포르셰는 프랑스의 산업적이지 않은 농장에서 소와 돼지를 사육하는 사람들을 방문했는데, 거기서 인간과 동물은 낭만적이지 않은 냉정한 매일의 상호작용 속에서 산다. 일하는 사육자들은 그런 일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동물들과 얘기하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각주:7]데스프레와 포르셰가 농장주들에게 했던 질문은 그들의 노력을 생각하는 쪽으로, 즉 이 가축 식용동물이 일을 하고 있고,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는 쪽으로 선회했다. 당연한 것이겠지만, 첫 번째 어려움은 사육자들이 흥미를 느끼고, 그들을 다른 동물들과의 대화 및 노동에 참여하게 하는 질문을 던지는 법을 헤아리는 것이었다. 사육사에게 동물과 인간이 일반적으로 같은가 아니면 다른가라고 묻는 것은 확실히 흥미로운 일은 아니었다. 그 사람들은 특정한 동물들을 살고 죽게 만드는 이들이며, 그 동물들에 의해 살고 죽는 이들이다. 과제는 그들에게 중요했던 질문을 만들 때 이 사육자들을 연관시키는 것이었다. 사육사들은 연구자의 질문을 쉴 새 없이 “뿌리 채 뽑았는데”, 이는 연구자들이 자신들의 일에 관심을 두고 던지는 문의사항을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이 이야기는 여러 번 방향을 바꿨지만, 나에게 흥미로운 것은 사육사들의 주장, 즉 자신들의 동물들은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압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라는 것이었다.[각주:8] 자신들의 동물들이 원하는 것을 헤아리는 것, 그래야 사람과 소가 함께 성공적인 사육을 이뤄낼 수 있다는 것은 농장과 근본적으로 결합된 농장의 일이었다. 자기 동물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고 그들과 얘기하지 못하며 응답하지 못하는 형편없는 농장주들을 동료들은 좋은 농장주가 아니라고 평가한다. 동물들은 자신의 농장주에게 관심을 기울인다. 마찬가지로 소와 돼지에게 실질적인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좋은 사육사의 일이다. 바로 이것이 사람과 생물체 모두에게 일어나는 주체성의 확장이다. “타자가 당신에게 제안한 그것이 되기, 주체성의 제안을 받아들이기, 타자가 당신에게 말 걸은 방식으로 행동하기, 이러한 제안을 진실되게 한다는 의미에서 현실화하고 확인하기.” [각주:9]그 결과는 인간을 기르는 동물과 동물을 기르는 인간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살기와 죽기가 함께 작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의 일상적인 노동‧대화‧관심의 상호작용 안에서의 “함께 일하기”가 내게는 올바른 관용구처럼 보인다. 

 

 

 

나는 데스프레의 ‘생물체들, 그들의 사람들, 그들의 장치들과 함께 방문하기’에 대해 더 계속해서 갈망하면서 그리고 그녀가 “인간-동물-발생”에 대해 더 많이 설명하길 갈망하면서, 그러한 계획menu에서는 오로지 사람 인간human people만 만족감을 준다는 느낌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러한 선입견은 내가 《호들갑 떠는 여성들: 버지니아 울프의 바람피는 딸들》—이자벨 스탠저스와 뱅시앙 데스프레가 비범한 건방진 여성 집단과 함께 쓴—을 읽었을 때 고꾸라졌다.[각주:10] “우리는 해야만 한다. 생각을!”이 버지니아 울프의 《3기니》로부터 온 유명한 구절과 연동되어서 이 책에서 외쳐진다. 서양 세계에서 그리고 또한 도처에서 여성들은 생각하기의 부계(父系)가장 확실하게는 (잇따르는) 전쟁에 관한 부계의 의사결정—에 포함된 적이 거의 없다. 버지니아 울프나 다른 여성‧남성들이 이 문제에 있어 그러한 부계나 그들의 희생 요구에 충실할 이유가 있는가? 적어도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불륜Infidelity을 요구해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모든 것이 중요하지만 이 책의 질문은 정확히 여기에 있지 않다. 오히려 ‘생각하기가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를 발견하는 문명 안에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어떻게 우리는 다양하고 쉴 새 없이 재발명되는 집단적 모험으로 다시 돌아가는가? 개인적 토대에서가 아니라 바통을 넘기는 방식으로 즉 새로운 소여와 새로운 미지를 긍정하는 방식으로 재발명되는 그러한 모험으로 말이다.”[각주:11] 우리는 어쨌든 ‘이어가기’를 만들고, 트러블을 물려받고, 다중 번영을 위한 조건을 재발명해야 한다. 끝없는 인간 전쟁과 인종학살의 시간에서만이 아니라, 인간과 생물체를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해 대량 멸종과 다종 학살로 몰고 가는 인간의 시간에서 말이다. 우리는 “감히 이어가기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것은 절망하지 않기 위해서 창조하는 것,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어쩌면 변형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대의명분의 이름으로’가 아무리 고귀해보일지라도, 그것을 닮은 인위적인 충성심이 없어야 한다.”[각주:12]

 

 

 

 

한나 아렌트와 버지니아 울프는 방문하러 가기 위해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뜻밖의 친족을 만나려고 인적이 드문 길을 가기 위해서, 대화를 시작하기 위해서, 흥미로운 질문을 던지고 답하기 위해서, 예상되지 않은 어떤 것을 함께 제안하기 위해서, 만남을 갖기라는 청해지지 않은 의무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정신과 상상력을 훈련하는 일이 관건임을 이해했다. 바로 이것이 내가 ‘응답능력을 기르기’라고 불렀던 것이다. 방문은 영웅적인 실천이 아니다. ‘호들갑떨기’는 혁명이 아니다. 서로 함께 생각하기는 사유가 아니다. 이야기를 계속 이어갈 수 있는 이야기의 버전을 여는 것은 너무나 일상적이며, 너무나 세속적[땅에 묶여있는earth-bound]이다. 그게 요점이다. 찌르레기는 그 중요성을 노래한다. 꼬리치레는 자신들의 빛나는 춤사위로 춤을 춘다. 이야기를 말하는 이들은 기존의 무질서를 깨부순다. 그것이 ‘도가 지나치기’가 의미하는 바이다. 이러한 호기심어린 실천은 안전하지 않다. 한나 아렌트와 버지니아 울프와 마찬가지로, 데스프레와 그녀의 협력자들은 우리가 “거주할 수 있는 세계라는 관념”을 다루고 있음을 이해한다.[각주:13] “호들갑 떠는 여성들의 힘은 진실을 재현하기보다, 어쩌면 ‘더 나아질’ 수도 있는 다른 행동방식의 가능성을 목격하는 데에 있다. 호들갑은 대의명분에 관한 영웅적 진술이 아니다. … 그 대신 호들갑은 지금 모든 곳을 지배하는 ‘우리가 그것을 원하든 원하지 않든 달리 할 가능성이 없다’가 만들어낸 숨 막힐 듯한 무기력에 저항할 필요성을 긍정한다.” [각주:14]호들갑 떨기는 과거 시간past time이다. 

 

 

데스프레의 호기심어린 실천은 대의나 교의에 대한 충성심과 거래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은 때로는 충성심과 혼동되는 다른 덕, 즉 유산“으로부터 생각하기”에서 깊숙이 끌어내진다. 그녀는 상황적 역사, 상황적 이야기로부터 시작하기에 내재하는 의무로 조율된다. 그녀는 “~로부터 시작하기” 즉 “우리가 그로부터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과 관련해 의무를 지게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12마리 낙타의 우화’를 다시 이야기한다. “그 이야기는 우리 자신을 사건으로부터 배우게 두는 것, 사건으로부터 창조하는 것을 의미한다.” 강력한 우화들로 일종의 실뜨기를 하면서 데스프레는 이자벨 스탠저스로부터 우화를 받아 그것을 2013년 초 나에게 이어주었다. 나는 이 글에서 그것을 다시 그녀에게 이어준다. 물려받는다는 것은 “사유와 약속을 필요로 하는” 행동, “바로 그 물려받기의 행위로 우리를 변형시킬 것을 요구하는 행동”이다.[각주:15]

 

 

 

이 이야기에서 아버지는 유언으로 그의 다투기 좋아하는 세 아들에게 겉보기에는 불가능한 어떤 유산을 남겼다. 즉 11마리의 낙타를 정확히 첫째에게는 ½을, 둘째 아들에게는 ¼을, 셋째에게는 ⅙을 분할해 물려주었다. 얄궂은 유산의 조건은 혼란에 빠진 아들들을 화나게 했다. 그들이 어쩔 수 없이 유언조항을 이행하려 하기 직전에 마을에 사는 한 노인이 방문했다. 12번째 낙타를 아들들에게 빌려준 그의 현명한 친절은 상속받은 이들로 하여금 그들의 곤란한 유산에 대한 해법을 만들어내도록 했다. 즉 그들은 자신들의 유산을 능동적이고 살아있으며 생성적이게 만들 수 있었다. 12번째 낙타와 함께 [딱 떨어지는] 분수가 완성되었고 [그래서 각각 6마리, 3마리, 2마리를 갖게 되고], 남은 한 마리 낙타는 노인에게 돌려주었다. 

 

데스프레가 주목한 것은, 그녀가 읽은 이 이야기가 “~로부터 시작하기”가 의미하는 바를 발견하는 일의 확장 및 창조성에서 현실의 낙타를 제외했다는 점이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이 낙타들은 지극히 평범하고 산만하고 의인화된 짐승들이었으며, 그들의 유일한 기능은 가부장적 인식 및 개괄recapitulating—데스프레와 내가 물려받은 약간의 철학의 역사보다도 훨씬 더한—에서 자란 아들들에게 문제의식을 가질 기회를 준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 특수한 이야기를 자신의 길로 듣고 말하고 활성화함으로써 부재한 현재였던 어떤 것을 만들어낸다. 그녀는 누구도 비난하지 않으면서 흥미롭고 호기심어린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므로 다른 유산은 ‘다른 이에게 듣고 다른 이에게 맞추라’는 요구를 출현시키고 만들어낸다. 변화해야 하는 것은 단지 철학이 아니다. 언젠가는 죽는 세상이 이동해야 하는 것이다. 긴 다리, 큰 입술, 혹을 가진 낙타는 혹사당한 자신의 뜨거운 가죽에서 먼지를 털어대고, 자기 귀 뒤에 가려운 곳을 긁으려고 이야기를 말하는 이에게 코를 비빈다. 데스프레 그리고 그녀로 인해 우리는, 이제 낙타를 물려받는다. 즉 그들의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여행하고 노동하는 그들의 장터에 있으며, 오늘날의 고비사막과 같은 위태로운 세상에서 자신들의 살기와 죽기를 해내는 낙타를 물려받은 것이다. [각주:16]우리는 이후 응답-능력을 길러내기 위해 예기치 않은 요구를 만드는 확장된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우리가 변형된 이야기로부터 시작하는 일에 충실한 채 남으려면 우리는 낙타와 사람이 서로—지역, 젠더, 인종, 종, 실천을 가로지르는—에게 위태롭다는 점을 모른 채 있을 수 없고 또 그들을 돌보지 않을 수 없다. 지금부터는 그러한 철학을 혈통이 아니라 실뜨기 놀이라 부르자. 우리는 상황적 세계로부터 말할 의무를 지지만, 더 이상 인간주의적 부계나 그것의 숨이 막히는 삭제 그리고 아슬아슬한 줄타기로부터 시작할 필요는 없다. 어떤 이야기를 듣는 위험은 그것이 우리에게 거미줄을 치도록 의무를 지울 수 있기 때문인데, 그때 거미줄은 그 무수한 실들 사이에서 모험하는 일에 앞서 미리 알려져 있지는 않다. 인간동물발생anthropozoogenesis의 세계에서는 의인화된 것이 십중팔구 치아가 자라나 우리의 엉덩이를 물어뜯을 것이다.

 

데스프레의 철학적 동물행동학ethology은 살아있고 눈에 보이는 것뿐만이 아니라 죽은 것과 상실로부터 시작한다. 그녀는 자신의 철학적 동물행동학의 실천과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죽은 자에 대한 상황적 인간의 애도 실천을 연구했다. 이 두 영역에서 그녀는 어떻게 인간이 실제로 여러 종류의 시간성과 물질성 안에서 부재한 것을 생생한 공현재로 얻으려 하고 또 얻을 수 있는지에 주목한다. 그녀는 어떻게 실천들—활성화된 이야기하기—이 내가 “계속 진행 중ongoingness”이라 불렀던 것의 편에 있을 수 있는지 주목한다. [각주:17]즉 거주성이 위협받는 땅의 조직tissue 안에서 서로 같이 잘 살고 잘 죽기 위해 함께 기르고 발명하고 발견하고 고쳐 쓰는지에 주목한다. ‘계속 진행 중’의 여러 종류의 실패는 우리 시대의 돌진하는 멸종‧박멸‧전쟁‧추출‧학살 안에서의 삶의 방식을 허물어뜨린다. 여러 종류의 부재 혹은 위협받는 부재는 지속적으로 진행 중인 응답-능력으로 옮겨져야 한다. 추상에서가 아니라 집에서 이야기된 길러진 실천 안에서 말이다. 

 

 

 

처음으로 내가 놀랐던 것은 이 문제가 데스프레와 나를 함께 경주 비둘기에게로, 또한 이른바 ‘전서구’(불어로는 보야즈voyageurs, 즉 여행자)와 그들의 열광적인 애호가(불어로는 콜롱보필colombophiles, 즉 비둘기를 사랑하는 자)에게로 데려갔다는 점이다. 나는 2010년 7월 ‘쓰히시 코뮌’에서 데스프레 및 그녀의 동료들과 특별한 한 주를 보낸 뒤 그녀를 위한 글을 한편 썼다. 여기서 나는 다종 응답-능력을 기르기 위한 동반종과의 실뜨기 놀이를 제안했다. [각주:18]나는 데스프레에게 ‘비둘기-블로그’라 불리는 베아트리즈 다 코스타의 놀라운 ‘예술-테크놀로지-환경-활동가 프로젝트’와 남부 캘리포니아의 경주 비둘기 공동체 및 그들의 애호가에 대한 나의 의견을 포함한 초안을 보냈다. 비둘기 경주는 세계 전역에서 벌어지는 남성 노동계급의 스포츠로, 그것은 도심지 전쟁(바그다드‧다마스코스), 인종적‧경제적 부정의(不正義)(뉴욕‧베를린)의 조건 안에서 곤란함을 유발시켰고, 지역(프랑스‧이란‧캘리포니아)을 가로질러 여러 종류의 노동과 놀이를 대체했다. 

 

마탈리 크라세가 2003년 프랑스의 누보 코망디테(Les nouveaux commanditaires) 재단의 프로젝트를 위해 디자인 한 캡슐형 비둘기집.

 

공유되는 곳이지만 또한 종종 곤혹스럽게 만드는 공적 공간 안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생물체들을 연결하는 예술-디자인-활동가 실천이 일어났다는 점이 내 마음을 기울게 한다. 이러한 마음쓰임caring“으로부터 시작하기”—통상적으로 얘기되는 어떤 과대망상적인 마음쓰임으로부터가 아니라—는 나를 혁신적인 비둘기집에 도달하게 했다. 그곳은 알고 보니 데스프레가 기념의 실천에 맞춰 이미 보금자리를 틀기 시작했던 곳이다. 특히 그녀는 나를 마탈리 크라세의 캡슐형 비둘기집—이 집은 2003년에 프랑스 쇼드리 공원에 지어졌다—으로 이끌고는 계속 진행 중인 살기와 일하기를 위한 현실적 공간을 여는 힘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공유했다. 이 공간은 부재의 위협에 직면해 강력한 기념의 실천으로서 설립된 것이었다.[각주:19] 전서구 애호가들의 <보브와 협회Beauvois association>는 예술가이자 산업디자이너인 크라세에게 사람과 새를 위해 미(美)와 기능성이 결합된 원형의 비둘기집을, 미래의 실무자들을 배우기 힘든 기술로 이끄는 교육학적 매력을 가진 곳을 지어달라고 요청했다. 현실의 비둘기들이 이 집에 거주하며 번창했다. 현실의 비둘기 훈련사들이 이 집이 일하는 것을 경험했다. 그리고 현실의 방문자들이 생물체와 사람을 회복시키기 위해 피폐해진 농작지를 ‘다양한 색을 지닌variegated 자연보호’로 재활시키는 생태공원을 경험했다. 이 곳은 새를 여행자로 변형시키는 그러한 삶에의 욕망으로 전염되었다. 데스프레는 이 뭔가를 기리는 원형의 새집이 전서구와 그들의 사람 모두를 위한 것이자, 과거이자 현재이며, 아직 오지 않은 미래임을 이해했다.[각주:20]

 

 

생물체도 사람도 서로가 없이는 존재할 수도, 계속 진행 중인 호기심어린 실천을 지속할 수도 없다. 그들은 계속 진행 중인 과거와 연결되어 서로를 ‘두꺼운 현재’로, 그리고 ‘여전히 가능한 미래’ 쪽으로 끌어당긴다. 그들은 사변적 우화 속에서 트러블과 함께 머문다.

 

  1. 뱅시앙 데스프레와 나눈 개인적 대화. [본문으로]
  2. Arendt, Hannah, Lectures on Kant’s Political Philosophy, Brighton, UK: Harvester Press, 1982. p. 43. [한글본] 한나 아렌트, 《칸트 정치철학 강의》, 김선욱 옮김, 푸른숲, 2002. [본문으로]
  3. Despret, Vinciane, “‘Sheep Do Have Opinions’”, In Making Things Public, edited by Bruno Latour and Peter Weibel, Cambridge, MA: mit Press, 2005, p. 360. [본문으로]
  4. Despret, Vinciane “Domesticating Practices: The Case of Arabian Babblers”, In Routledge Handbook of Human-Animal Studies, edited by Garry Marvin and Susan McHugh, New York: Routledge, 2014, p.24. [본문으로]
  5.  Despret, “Domesticating Practices”, p. 36. [본문으로]
  6. Despret, “Domesticating Practices”, p. 31. [본문으로]
  7. Despret, Vinciane, “The Becoming of Subjectivity in Animal Worlds”, Subjectivity 23 (2008): p. 124. 신중함과 용기를 지닌 포르셰는 결코 농장이라고 불릴 수 없는 끔찍한 산업적 돼지시설도 연구했던 적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Porcher, Jocelyne, Vivre avec les animaux: Une utopie pour le XXIe Siecle, Paris: Decouverte, 2011를 보라. [본문으로]
  8. Despret, “The Becoming of Subjectivity in Animal Worlds”, p. 133. [본문으로]
  9. Despret, “The Becoming of Subjectivity in Animal Worlds”, p. 135. [본문으로]
  10. Stengers, Isabelle, and Vinciane Despret, Women Who Make a Fuss: The Unfaithful Daughters of Virginia Woolf, Translated by April Knutson. Minneapolis: Univocal, 2014. [본문으로]
  11.  Stengers and Despret, Women Who Make a Fuss, p. 46. [본문으로]
  12. Stengers and Despret, Women Who Make a Fuss, p. 47. [본문으로]
  13. Stengers and Despret, Women Who Make a Fuss, p. 159. [본문으로]
  14. Stengers and Despret, Women Who Make a Fuss, pp. 162-163. [본문으로]
  15. 2013년에 페이지가 매겨지지 않은 채 내게 보내진 초안에서 인용했다. 이 책은 그 뒤에 출판되었다. Despret, Vinciane, “Why ‘I Had Not Read Derrida’: Often Too Close, Always Too Far Away”, Translated by Greta D’Amico, In French Thinking about Animals, edited by Louisa Mackenzie and Stephanie Posthumus, 91–104. East Lansing: Michigan State University Press, 2015. [본문으로]
  16. 이에 대해서는 예컨대 비암바수렌 다바아와 루이기 팔로르니가 각본을 쓰고 제작한 영화 <낙타의 눈물>을 보라. Davaa, Byambasuren, and Luigi Falorni, writers and directors, The Story of the Weeping Camel, Mongolkina Production Company, 2003. [본문으로]
  17. 이에 대해서는 Despret, Vinciane, Au bonheur des morts: Recits de ceux qui restent, Paris: La Decouverte, 2015를 보라.  [본문으로]
  18. 나중에 그 글은 수정되어 이 책 1장에 실렸다. 쓰시히의 글은 불어로 출판된 적이 있다. Haraway, Donna J, “Jeux de ficelles avec les especes compagnes: Rester avec le trouble.” Translated by Vinciane Despret and Raphael Larriere. In Les Animaux: Deux ou trois choses que nous savons d’eux, edited by Vinciane Despret and Raphael Larriere, pp. 23–59, Paris: Hermann, 2014. [본문으로]
  19. 이에 대해서는 Crasset, Matali, “Capsule”, Artconnexion, November 2003. http://www.artconnexion.org/espace-public-public-realm/37-matali-crasset-capsule(Accessed August 3, 2015)과 이 책 1장의 1.5 사진([한글본] 《트러블과 함께하기》, 47쪽)을 참고하라. [본문으로]
  20. Despret, Vinciane, “Ceux qui insistent: Les nouveaux commanditaires”, In Faire art comme on fait société, edited by Didier Debaise, X. Douroux, C. Joschke, A. Pontégine, and K. Solhdju. Part I, chapter 7. Dijon: Les Presses du Reel, 201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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