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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장애인야학 박경석 활동가 인터뷰
정리: 노의현, 장희국, 정정훈





* 본 인터뷰는 2017년도에 만들어진 「 한국 '진보적 인권운동'의 역사에 대한 인권활동가 인터뷰 자료집: 1993년부터 2012년까지의 시기를 중심으로」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출처: 장애해방열사_단


[장애운동과 인권운동과의 관계]

Q. 1997년 시작된 에바다 투쟁에서 만들어진 에바다 공대위는 장애운동이 장애운동단체들만의 운동을 벗어나 다양한 사회운동단체들과의 결합을 시작하게 된 계기로 이야기됩니다. 실제로 박래군 활동가 또한 에바다 투쟁을 통한 장애운동과 인권운동의 결합을 인상적으로 이야기하고 있기도 하고요. 박경석 활동가에게도 에바다 투쟁은 다른 운동과의 연대를 만들어냈다는 측면에서 특별한 의미를 찾는 사건으로 기억되시나요? 에바다 투쟁이 이러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A. 제가 에바다 투쟁에 처음 결합하게 된 건 전장협의 조직국장을 할 때였어요. 그때 권오일 선생(현 에바다학교 교장)에게 “정부청사 쪽에서 집회를 하는데 와달라”고 연락이 와서 갔었죠. 그때 가봤더니 농인인 에바다학교 학생들이 ‘김영삼 할아버지, 우리를 봐주세요’라는 시혜적 방식의 호소를 하고 있더라고요. 우리의 운동 방식하고는 굉장히 달랐던 거죠. 그걸 가만히 보면서 ‘저러면 힘들 것 같은데…’라는 생각을 했어요.
당시는 에바다 투쟁이 인권 문제로 크게 이슈화되어서, 초기에는 내로라하는 단체들이 다 붙었어요. 그런데 책임자들이 구속되고 난 후에는 다 떨어져나갔죠. 왜냐하면 책임자들이 구속되고 나면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보이니까요. 하지만 시설 비리 투쟁이나 법인 투쟁은 시설 비리가 일어나고 책임자들 몇몇이 지목되어서 구속되어도, 그 일을 저질렀던 일가는 존속해요. 그리고 보복을 하죠. 하지만 겉으로는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보이니까 처음에 붙었던 단위들이 다 떨어져나갔어요. 전장협은 계속 붙어 있었고요. 같이 집회를 하는데 국민의례, 국기에 대한 경례 이런 걸 순서에 집어넣더라고요. 그래서 저희가 집회할 때 그런 건 하는 게 아니라고 알려주고… 그런데 안 하기로 해놓고 집회 때는 하더라고요. (하하) 또 우리는 집회를 할 때 도로를 점거해서 가야 해요.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정부청사로 갈 때에도 “휠체어 탄 장애인을 어떻게 합니까, 도로를 점거해서 같이 갑시다”라고 해서 그러기로 했는데, 막상 경찰이 지하도로 가라니까 거기로 가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집회나 투쟁을 굉장히 ‘순수’하게 했던 거죠.
에바다 초기에는 인권-비리 문제가 충격적이라 단체들이 많이 붙었지만, 구조적인 모순으로 접근해나갈 때는 시간도 많이 걸리다보니 많이 떨어져나갔어요. 장애인 단체든 인권단체든… 애초에 인권단체는 거의 없었어요. 주로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 한국농아인협회 등 법인단체들이었죠. 그런데 책임자들이 구속되고 조금 바뀌는 것처럼 보이니까 더 이상 활동을 하지 않는 거죠. 최성창 일가족에 대한 척결, 이들을 쫓아내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기약이 없는 투쟁 사안이었죠. 다 떠나고 투쟁 주체만 좀 남고, 관심 있는 지역의 노동조합 몇 개만 남고 싸움이 확장이 안 됐죠.
그러다 1000일이 지났을 때쯤 인권운동과 결합하게 돼요. 당시에 1000일 문화제를 조직하자고 해서 사람들이 왔는데 20~30명도 안 되는 사람들만 모이더라고요. 권오일 선생님을 주축으로 한 투쟁 주체들은 핍박받고 있었고요. 희망이 안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찾아간 게 인권운동사랑방이었습니다. 박래군과 개인적으로 만나서 이야기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그 전에는 인권운동이 장애운동과 만날 일이 없었어요. 그게 99년 정도 되었을 거예요. 당시 노들야학이 대학로에 독립해 나와서 ‘개발새발’ 하고 있을 때였는데… 제가 박래군을 찾아갔어요. 인권운동사랑방이 성균관대학교 로터리에 있었는데 그 건물 밑에 찾아가 만나자고 해서, 근처 책방에서 만났어요. 제 기억으로는 장애운동 관련해서 인권운동하는 곳과 만난 것은 그게 처음이었어요. 하지만 저는 박래군을 그 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동생 박래전이 숭실대에 다녔었거든요. 제가 숭실대에 91학번으로 들어갔을 때 웬 시커먼 사람이 와서 기자회견하고 민주화 이야기하고 그랬죠. ‘와 저 사람 진짜 빨갱이네’ 이렇게 생각했었는데… (하하) 박래군을 찾아가면 뭐라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래서 평택지역 공대위 말고 전국 단위의 ‘에바다 연석회의’라는 것이 만들어졌죠. 이때 주체가 박래군이었어요.

출처: 한겨레


Q. 이후 전개되는 장애운동에서 인권단체들과의 연대는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조건부시설공대위에는 인권운동사랑방이 참여했고, 그 외 장애인시설 관련 투쟁에는 인권단체들이 함께 투쟁해온 것 같습니다. 반면 이동권투쟁, 장애인차별금지법 입법투쟁, 활동보조인서비스 제도화 투쟁 등에서도 인권단체와의 연대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가령 이동권연대에는 인권단체의 이름이 보이지 않거든요. 시설대응운동 외에 장애운동에서 인권단체와의 연대가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은 왜일까요? 연대가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형식적으로 연대하더라도 인권단체가 별달리 적극적인 역할을 맡지 않은 것인지 궁금합니다.

A. 제 기억으로는 인권운동사랑방에 저희가 많이 요청했었어요. 특히나 시설 문제는 워낙 심각한 인권침해 문제이기 때문에… 그런데 질문의 후반부에서 언급하신 이동권투쟁과 관련해서는 인권운동 진영이나 사랑방 내부에서 이런 토론들이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냥 이름만 걸어주는 운동들은 안 했으면 좋겠다’는 내용으로요. 자신들의 운동 양심상 이름만 걸어주는 것은 너무 기만적인 게 아니냐는 토론들을 했대요. 우리는 이름이라도 좀 걸어달라고 요청한 거였는데… 섭섭함들이 좀 있었죠. 섭섭하긴 했지만 그들의 또 다른 고민거리가 있었던 것 같아요. 저는 자세히는 몰라요. 그 논쟁을 잘 아는 건 아마 박래군일 거예요.

Q. 이와 관련해서 박래군 활동가의 입장에서 나온 이야기도 있더라고요. 처음에는 장애운동과 많이 연대하려고 했는데, 장애운동단체가 많이 생기고 운동 자체가 독자적인 역량을 갖추다보니 다른 인권운동과의 연대보다는 독자적 운동에 더 역량을 쏟는다고요. 이야기하고 보니, 잘못 전달하면 이간질하는 게 될 것 같아 죄송하지만… (하하)

A. 그렇게 평가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실제로 ‘파이의 크기’로 보자면 장애운동이 성소수자운동이나 이주노동자운동 등에 비해 더 커요. 그리고 장애운동의 독특성도 있죠. 당사자주의라든지… 일종의 배타성이 있다고 할까요? 또 어떤 때 보면 투쟁이 너무 빡세거든요. 활동보조서비스 쟁취투쟁 같은 경우는 정말 빡센 투쟁이었거든요. 다른 단체에서 같이 하면 무척이나 힘들어질 수 있는… 그래서 독자적으로 투쟁을 견딜 수 있는 근력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독자적인 또 다른 측면이 잘 드러난 사례가 차별금지법 제정운동에서 장애운동의 대응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인권단체들은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제정을 요구했었는데, 장애인들은 장애인 문제를 전적으로 다루는 독립기구 설치를 포함한 독자적인 차별금지법을 제정하자고 했었거든요.
우리 내부에서는 “왜 장애인 차별금지법이 포괄적인 인권 문제인 차별금지법과 함께 가야 하냐”는 논쟁이 있었고, 또 ‘무조건 장애인 차별금지법을 독립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어요. 노무현 정부의 기조는 차별금지법 안에 장애인도 끌어다 넣고, 여성도 끌어다 넣는 거였는데, 인권단체들도, 노무현 정부를 도왔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기조가 있었던 거죠.

Q. 하지만 전장연은 인권단체연석회의(이하 연석회의)의 가입단체입니다. 전장연이 연석회의에 가입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노들야학이나 전장연 활동가들이 초반에는 연석회의에 자주 나왔다가 현재는 거의 안 나오시는 것으로 알고 있거든요. 전장연은 왜 연석회의에 가입하게 되었는지, 또 왜 지금은 활동을 잘 안 하시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A. 그건 아마도 논리의 문제라기보다는 현장의 문제 때문일 것 같아요. 그런데 연석회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이유를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알아두어야 할 게 있어요. 장애운동계 내부의 입장 차이 문제예요.
전체 장애운동계를 묘사해보자면, 먼저 여기에는 장애 당사자가 ‘최고 대빵’이고 ‘당사자주의’가 빠르게 그 세력을 확산하고 있어요. 전장연도 장애인 당사자 주체성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해요. 전장연은 장애인 당사자의 주체성을 확장해야 한다는 지점에서 대단히 적극적인데, 이게 ‘주의’까지 가야 하느냐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합니다. 이 지점에서 ‘당사자주의’와는 입장이 매우 다르지요.
또 하나는 ‘재활패러다임’이에요. ‘재활패러다임’을 사이에 두고 장애인 당사자주의는 적대적인 관계가 만들어져 있죠. ‘당사자주의’에서는 재활을 자립과 나누고, 재활은 비장애인 전문가 중심 영역이라고 치부해요. 역사적으로 비장애인 전문가가 전달체계의 중심이 되어 기득권을 행사했던 게 있고, 지금도 여전히 그 세력이 강하죠. 장애인복지서비스를 전달한다는 것은 결국 그 자원을 어떻게 확보하고 누가 전달할 것인가에 따라 그 집단의 사회적 위치가 많이 달라지잖아요. 그러한 측면에서 ‘재활’을 중심으로 하는 전문가들이 가장 앞서나갔어요. 그래서 그 전달체계를 확보하기 위해 ‘재활’의 이념과 그 세력을 타격하는 것이 당사자주의 운동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과제가 된 거죠. 재활론자들이 서비스 전달체계의 상층부를 점령하고 있을 때, 이것의 탈환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의사결정에 당사자가 과반수 이상 참여해야 한다’, ‘우리를 배제하지 말라’는 구호로요. 아프리카 민족주의로부터 온 언어를 빌리자면 ‘nothing about us without us’인 거예요. 그런데 이러한 중요한 이념이 오히려 다른 사람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활용되어온 거죠. 반면에 저희는 ‘자립’뿐만 아니라 ‘재활’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자립’과 ‘재활’의 적대적 전선이 아니라, ‘장애인과 비장애인과의 관계 문제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라고 생각해요. 이 지점에서 장애인 주체와 비장애인 활동가의 연대투쟁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고요.
그러니까 우리가 당사자주의라서 다른 인권단체와의 연대를 열심히 하지 않는 건 아니에요. 우리는 연대해야 한다는 입장이지요. 다시 말해서 연석회의에 잘 못 나가는 건 장애운동의 독자성을 구축하고자 했던 것과 관련된 문제는 아니라는 거예요. 현실적인 조건이 안 됐다는 게 가장 큰 이유죠. 그런데 지금의 활동가들은 연석회의로 묶이지는 않지만, 성소수자운동이나 여성운동과 더 적극적으로, 자발적으로 결합하고 있어요. 이런 활동들이 나중에 조직화되면 자연스럽게 논의 구조가 활발해지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Q. 그렇다면 연석회의에 나가지 않는 실질적인 이유는 바빠서인가요? 자연스럽게 연석회의가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A. 네, 아무래도 장애인계의 일들이 많아서겠죠. 장애운동은 꼭지와 과제가 굉장히 많아요. 때문에 전장연 사무처가 가지고 있는 가장 핵심적인 고민은 돈이 없고, 활동가들이 매우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연석회의 같은 회의체에 책임 있게 참여하기에는 더더욱 그렇죠. 하지만 노들야학만 봐도 밀양이나 쌍차투쟁 등에 현장의 한 단위로 꾸준히 결합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회의에 참여하기에는 역부족이지요. 이것이 장애운동의 독자성 때문이라는 해석보다는 어쩔 수 없는 조건과 상황 때문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이런 상황이 장애운동의 성장으로 이어질지, 아니면 폐쇄적으로 변하는 결과를 낳을지는 두고 봐야 하는 문제인 것 같고요.

Q. 일반적으로 장애운동은 인권운동의 한 부분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전장연은 연석회의의 참여단체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2007년에 박경석 활동가가 하셨던 인터뷰를 보면 인권을 장애인차별철폐운동의 기본 가치나 신념으로 파악하신다기보다는 전략적 활용의 문제로 이해하시는 듯합니다. 또한 『노란들판의 꿈』이나 『차별에 저항하라』 등 노들 활동가들이 쓴 자료를 보면 인권이란 가치가 노들이나 전장연의 운동에서 중심적 근거나 이념적 지향으로 언급되는 경우는 없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그리고 노들의 장애운동을 인권운동으로서 장애운동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지요? 장애운동을 인권운동이라 칭할 수 없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여기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좀 해봐야 할 것 같아요. 전장연 활동가들 사이에서도 생각이 굉장히 다양하니까요. 박경석 개인의 생각만 말씀드리자면, 저는 앞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인권이라는 주제와 관련해서 인권운동이라는 것을 먼저 접했던 것은 아니에요. 그리고 따로 공부는 안했지만 계급이라는 개념은 운동을 통해서 알고 있었죠. 박래군도 진보적 인권운동, 사회권적 인권운동이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저는 여전히 인권이라는 문제가 지금 현실에서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일정 정도 유용성은 있을 수 있어도, 우리의 구체적인 본질을 말하는 데 많은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요.
인권이라는 것은 어떤 때는 매우 당혹스러울 정도로 포장지 같은 느낌입니다. 미국도 전쟁을 치르기 위한 명분으로 인권이라는 말을 쓰지 않나요? 이건희도, 그 아들도 그 말을 쓰잖아요. 인권이라는 것은 너무 포괄적인 사람의 문제이기 때문이죠. 그렇게 따지면 자본가 계급에게는 인권이 없나요? 그래서 박래군이 ‘진보적 인권’이라는 단어로 굳이 나누려고 했던 의도는 결국 계급의 문제가 아니냐는 생각이에요. 물론 계급 문제로 다 치환할 수는 없지만, 그 바탕은 계급적 성격의 문제가 아니냐는 생각입니다. 특히 계급운동이 소수자운동의 다양성을 포괄하지 못하는 지금 상황에서 독자적인 운동들은 더 확대되고, 각자의 평등한 관계 속에서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인권운동과 장애운동의 관계 문제로 돌아오면, 저는 장애인인권운동보다는 장애운동이라고 부르는 것을 선호해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장애인인권운동’이라고 쓰지 않으면 안 ‘먹히는’ 것은 아닐까라는 고민을 하게 되었어요. 그만큼 인권이라는 담론과 인권이라는 운동이 예전에 느꼈던 것보다 커졌고, ‘잘 먹힌다’는 생각이 있어요. 인권이 사람의 본질이라는 생각에 반대하진 않아요. 하지만 저에게 이건 ‘예수님의 사랑’ 같은 거예요. 불교의 자비라든가… (하하) 사회의 모순이나 갈등 지점에서 인권이라는 단어가 쓰이는 폭이 너무 넓어서, 여기에 대해서는 아직 고민을 많이 해봐야 할 문제라 생각해요.

[이동권 투쟁]

Q. 진보적 장애운동에서 가장 생소하고 인상적인 개념으로 느껴지는 것은 2001년 이후 등장한 ‘이동권’입니다. ‘장애인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를 가능하게 하라’는 요구가 ‘이동권’이라는 단어로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합니다.

A. 그냥 자연스럽게 사용하게 된 것 같아요. 우리가 사용하는 말 중에 노동권이나 생존권이라는 말이 있었기 때문이죠. (Q. 오이도역 장애인 추락사건 전에도 장애 활동가들이 이동권이란 용어를 사용했나요?) 네, 사용했죠. 그런데 이동권 강의를 하려고 검색해보다가 2003년도에 네이버 국어사전 신조어 항목으로 등록되었다는 걸 알고 깜짝 놀랐던 적이 있어요. 저희는 2001년도에 오이도역에서 이동권투쟁을 했었고, 2002년도에 발산역에서도 이동권투쟁을 했었어요. 그리고 ‘국가에게는 장애인들이 저상버스를 이용할 수 있게 할 의무가 있다’는 사실이 헌법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느냐에 대해서 헌법소원을 냈는데, 졌어요. ‘국가가 저상버스를 도입해야 한다는 헌법적 의무는 없다’는 판결이 난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는 투쟁을 통해서 ‘교통약자의 이동편의증진법’을 쟁취해내요. 그리고 그 법 제3조에 이동권이라는 단어를 집어넣어요. 그게 2005년이었어요. 이동권이라는 단어를 정확히 언제부터 한국사회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국어사전에 등록된 것은 2003년이고, 법률용어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2005년이지만, 그 이전에도 투쟁할 때는 이동권이라는 말을 써왔어요. ‘접근권’, ‘이동권’ 이런 문제로….

Q. 그렇다면 장애운동에서 ‘이동권’이라는 말은 언제쯤 출현했나요? 2001년 이동권투쟁에서 이동권이라는 문제가 이슈화되기 이전에도 사용해왔던 건가요?

A. 생각해보자면 그 이전부터 ‘접근권’이라는 개념은 이미 있었어요. ‘건물에 대한 접근권’, ‘도로에 대한 접근권’… 그리고 84년에 김순석 열사의 죽음에서도 접근권이 사회적 문제로 드러나기도 했죠. ‘대중교통을 이용할 권리’로서 이동권은, 이때는 접근권과 혼용됐던 것 같아요. 그러다 이규식이 리프트에서 떨어진 99년도부터 본격적으로 ‘이동권’이라는 단어를 통해 이 문제를 파악하기 시작한 거고요.

Q. 그렇다면 이동권 개념이 이동권투쟁이 본격화되기 이전에도 장애운동권에서는 논의가 되고 정리가 되었던 건가요?

A. 그 전에도 장애운동판에 이동권이라는 단어는 있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게 힘을 얻는 단어였느냐는 다른 문제죠. 사회적으로 이슈화될 수 있었느냐… 그때에는 이동권이라는 단어보다 접근권이라는 단어가 더 포괄적으로 많이 이야기되던 시기였던 거고요. 이동권이 접근권과 분리되어 정식화되는 것은 이동권투쟁이 본격화되던 시기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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