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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에게 임금을』(5/5)

연구공간 L 연구자 박채원, 왕세종, 노지현, 이민주 번역



이것은 2013년 3월 3일 저녁 8시 뉴욕 비버가(街) 16번지에서 있었던 대담의 녹취록이다. 토론은 2시간 20분가량 이어졌고, 길게 늘어진 탓에 편집이 되었다. 몇몇 반복되거나 곁가지 논의는 생략되었지만 언급된 대부분의 내용은 그대로 적었다. 토론은 참석한 모든 사람의 동의 하에 녹음되었으며 편집자는 여기에 기록된 대화 참여자 모두에게 연락하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임이 공개 행사였기 때문에 모든 대화자의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고, 그래서 이 녹취록에는 8명의 “익명의 참여자”가 등장한다.


익명의 참여자6 : 제가 느끼기에 우리의 논의에는 뭔가 빠진 것이 있습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 말이죠. 자본가의 편에서가 아니라 노동자의 편에서 교육의 가치를 재평가할 수 있을까요? 제 생각에 노동과정과 교육과정 간의 차이를 이해하고 어떤 구별점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학생들은 제멋대로다’라는 생각과 관련해 혹은 교육 자체의 본성이 지난 40년간 변해왔던 방식과 관련해, 어떻게 교육 상품이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소비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육 상품 자체의 생산은 학생들이 그것을 어떻게 소비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제게는 임금을 요구하는 것이 반드시 좋은 일은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임금을 받는다고 해도 여러분은 여전히 착취당하는 것이니까요.

가브리 : 이 질문 중 일부분은 실비아가 1974년에 썼던 「가사노동에 반대하여 임금을」에서 제기되었습니다. 실비아는 임금이 왜 투쟁의 대상이 아닌가에 대해 명확하게 얘기했죠. 임금에 관해 말하는 것은 또한 그러한 장을 여는 것이자 이 관계를 아주 다르게 이해하는 것과 관련됩니다. 그런데 ‘배움이냐 노동이냐’와 관련된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 오늘날 자본주의가 기능하는 방식의 일환인 노동의 간헐성으로 인해 여러분은 보수를 받는 시간들에 대해 여러분이 아는 것과 아는 방식을 계속해서 다시 형성해야 합니다. 그렇게 배움은 시장(market place)의 과정 안에 파묻혀있고 그것에 순응합니다. 어쩌면 여기 이 자리의 누군가는 자신들의 새로운 강좌를 던져버릴 준비를 하면서 다른 선택지를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여러분은 다음 직장 아니면 긱노동[초단기노동] 아니 뭐가 됐든 그것을 보장받을 수 있는지를 결코 알지 못합니다. 배움의 장소와 노동의 장소를 분리하는 것이 더욱더 어려워지는데, 세계의 과잉발전된 부분에서의 노동은 변화하고 있으면서 또 늘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고 있는 그러한 특정한 종류의 지식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야콥센 : 제 생각에 조지가 지적한 것은 지식이 실제로 훈육이라는 점이며, “제멋대로인 학생들”에 관한 모든 것은 학생들이 이제는 소비자이기 때문에 대학 내에서 많은 권력을 갖는다는 사실과 관련됩니다. 수강신청자가 10명이 안 되면 강좌는 개설되지 않습니다. 대학 내 권력 위계는 변했습니다. 신자유주의적 관점에 따르면 학생이 중심이지만, 여러분은 또한 이것이 훈육적 도구로 작동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학생들이 기본적으로 소비자의 형태를 띠고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공부할 것을 지불하기 때문에 소비자로 행동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제가 보기에 배움은 더욱 더 신자유주의적 훈육과 닮아있습니다. 여기 학생들이 나의 이 생각을 교정해주십시오. 학생들의 이러한 인식변화 즉 “내가 이만큼 지불하니 난 이런 것을 요구할 수 있어”의 관점이 또한 오늘날 대학을 구조화하고 있습니다.

알렉산더 드위넬(Alexander Dwinell) : 또한 이 “자기-투자”라는 생각과 관련해, 교육의 유일한 이유가 ‘너 자신이 일할 수 있게 준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저는 대학에서 배우는 많은 기술들이 여러분이 직장에서 하는 일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그러한 신체적 희생 없이 혹은 빚더미에 앉지 않고는 직업을 가질 수 없습니다. 더더구나 그것이 사람들이 교육의 가치에 관해 말하는 유일한 이유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교육의 진정한 가치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눈가리개를 씌웁니다. 쿠퍼 유니언도 똑같이 “금융시장이 변했고 이제 우리는 그것을 [무료로] 제공할 수 없기 때문에 등록금을 청구해야 한다”라는 겁니다. 전에는 왜 교육에 무료로 접근할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어떠한 설명도 없이 말이죠.

익명의 참여자7 : ‘제멋대로’라는 말이 어째서 계속 맴도는지 모르겠는데 우습네요. 퀘벡의 투쟁에서는 그것 즉 ‘제멋대로인 애들’은 주류언론이 학생 운동에 가한 공격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재밌죠. ‘제멋대로인 아이’란 무엇입니까? ‘제멋대로인 아이’는 훈육이 안 된, 시킨 대로 하지 않는 아이죠, 그렇죠? 그것이 그 말이 유래된 곳이고, 그리고는 그 말은 중고등과정 이후의 학생들에게 하는 말로 옮겨집니다. 저는 교실 뒤편에 앉아 “아, 또 맑스 얘기하네”라고 하는 많은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들을 제멋대로인 학생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구미가 당기지만 제가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그들과 말해 보니, 그들은 결국 교육을 샀던 겁니다. 그들은 졸업장을 사고 있죠. 저와 얘기한 대부분의 학생들은 교과 과정의 결정적 요소들이 실제로 그들을 돕기보다는 그들이 뭔가를 해내는 능력을 방해한다는 첫인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만일 “게으름”이나 “훈육안됨”이 실제로는 조직되어야만 하는 초기적 저항의 형태라면 어떤가요. 만일 “솔직히 내가 졸업하고 나갈 사회는 내게 눈곱만큼의 관심도 없는데, 내가 왜 성가시게 하겠어? 내가 이 사람들에게 무슨 빚을 졌지? 내가 왜 이렇게 열심히 일해야 하지? 내가 왜 그걸 이용하고 싶겠어?”라고 말한다면 어떤가요. 우리가 정말로 학교와 배움에 열중하는 학생들을 조직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구미가 당깁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 우리와 함께 해야 하는 것은 지금 현 제도의 압도적 다수의 학생들—이들은 제멋대로가 아니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훈육되고 착취당하고 있습니다—입니다. 문제는 학생들이 충분히 훈육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들이 충분히 분노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가브리 : 제 생각에 우리는 이 그림의 한 부분을 놓치고 있습니다. 까이오네씨가 말한 계급 차원 말이죠. 이러한 “제멋대로인 학생”이라는 생각을 묵살하기는 쉽습니다. 하지만 더 빈곤하고 이주민 출신인 제 자신의 느낌도 대학에 대한 저의 첫 경험은 정확히 “나는 다수의 제멋대로인 애들과 함께 있다”였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정말 형편없는 삶을 살고 있어서 이 학교에 있는 동안 나는 더 나은 삶을 산다고 여겨질 수 있다”라는 말에서 엄청난 무게를 느꼈습니다. 그러한 조건들은 정말로 여러분이 여러분 주변 사람들을 인식하는 방식을 형성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그러한 위치에 있을 수 있는 이유, 다른 사람들을 적대적으로 보는, 혹은 어쨌든 특정한 현실원리 바깥에서 보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학생들이 믿을 수 없이 부지런하다’고 혹은 ‘우리가 제멋대로라고 인식하는 것은 일종의 저항’이라고 말하면서 이것을 빙빙 돌려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모두 실제로는 사실이고 제가 동의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급 간에는 분열이 있습니다. 더 부유한 환경 출신인 이들과, 더 노동계급적 환경 출신이나 이주민의 처지에 있는 이들은 대학에 있다는 것을 아주 다른 방식으로 인식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부유한 사람들이 대회의실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본 사람들은 그들을 경멸하며 이렇게 말하기 쉽습니다. “그들은 부자 부모를 뒀기 때문에 저럴 수 있지. 이런 나날이 끝나면 결국 난 일자리를 가져야만 하지. 나는 처리해야 할 산더미같은 일들, 청구서들, 빚을 가지고 있거든.” 이 또한 우리가 투쟁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분리를 빙 돌아가 우리의 길을 말할 수밖에 없지만, 그것을 다룰 방법을 찾기는 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다른 곳에서 여기로 와 극심한 빈곤을 겪고, “여기는 엄청난 곳이다. 내가 왔던 곳보다 훨씬 더 많은 기회가 있다”라고 생각한다면, 문제가 복잡해질 수 있습니다. 저는 ‘모든 학생들이 제멋대로 군다’라는 판단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계급이 주된 문제임을 인식해야만 합니다.

까이오네 : 제가 제멋대로인 학생들에 대해 말한 것과 관련해 오해받는 일을 원하지 않습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저처럼 대학을 다니면서 쓰리잡을 뛰어야 한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아나스타스 : 그러나 이 논의는 더 큰 상황에 관한 것입니다. 당신은 “저는 저 자신을 중심에 두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당신의 경험을 벗어나는 것은 중요합니다. 당신의 경험에서 벗어나 다른 쪽으로 이동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다른 사람과 함께 “내가 함께 생각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은 누구지? 어떻게 나는 이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카펜치스 : 이 팸플릿이 처음 발행되고 오늘까지 40년 동안, 저는 이 팸플릿 정치의 패배와 그러한 패배의 결과를 제 자신의 눈으로 보았고, 제 피부로 느꼈습니다. 저의 학생들에게 미친 깊은 결과를 제가 이해하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몇 년 동안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저의 학생들—그들은 메인주[미국에서 가장 북동부지역]에서 프롤레타리아 대학에 다닌 이들입니다—이 점점 더 인플레이션보다 더 빠르게 증가하기 시작한 등록금을 내야 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과 그들 가족에게는 새로웠던 영구채무(eternal indebtedness)에 직면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변형을 수년간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저의 학생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했죠. 저는 많은 밤을 학생들이 맑스의 노동 소외 개념을 이해했는지 아닌지 등급을 매기는 데에 시간을 보낸 “좋은” 급진적 교육자 같았죠. 소외를 공부할 수 있는 내 수업에 있기 위해서 이 학생들이 엄청난 빚을 갚아야 한다는 사실을 실제로는 인식하지 못한 채 말이죠! 지난 몇 년간 저는 속죄하기 시작했고, 이것을 바꾸려고 헌신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하고자 했습니다. 여기 보이는 몇몇 동지들과 함께 학생 채무 점거(Occupy Student Debt) 캠페인과 채무 파업(Strike Debt) 등에 참여하면서 말이죠. 저는 대학에 가려고 점점 더 빚을 떠안아야 하는 대다수 학생들의 일반화된 조건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한 이 결과는 엄청난 무장해제 효과를 가집니다. 학생 채무에 대항하고 대학의 무상교육을 옹호하는 현재의 투쟁들이 성공하지 않는다면, 모든 세대가 자본에 맞서는 자율적 유형의 투쟁을 조직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결과를 바꾸는 첫걸음 중 하나는 학자금 대출 채무자와 그들을 옭아맨 세력 간의 관계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이 논의에서 필수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은 우리가 ‘학생에게 임금을’ 요구를 시작할 수 있으려면 먼저 학생들이 현시점에 직면하고 있는 빚을 제거해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야콥센 : 여러분의 팸플릿에 담긴 에토스에는 교육에 맞서자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너무도 많은 학생들—어떤 점에서는 우리 모두—이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두 눈 멀쩡히 뜨고 있으면서도 대학에, 이 훈육 공장에 들어간다는 사실이 당혹스럽습니다.

카펜치스 : 요점은 우리가 소외를 힘으로 변형하고 싶어했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패배의 조건이 되는 소외 대신에 우리가 하려 했던 것은 대학에서의 과정을 임금 관계로 변형시킴으로써 한편으로는 학교노동을 착취로 인식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학생들이 그/녀의 학교노동에서 소외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학생에게 임금을』은 교육에 맞서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다른 아이러니도 있는데, 그것은 정확히 그러한 소외과정 안에서 여러분은 투쟁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투쟁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반전의 반전이 있습니다.

야콥센 : 투쟁이 학교입니다. 교육은 복종이 아니라 투쟁입니다.

카펜치스 : 맞습니다. … 또한 그와 유사한 일이 집 안의 재생산노동에서 일어나고 있죠.

야콥센 : 쿠퍼 유니언에서 온 우리 친구들에게 궁금한 것이 있는데요. 여러분은 학교를 그만두는 것을 논의하거나 “빌어먹을 학교”라고 말한 적이 있나요? 아니면 학생들을 조직하거나 여러분 자신의 학교를 만든 적이 있나요?

익명의 참여자8 : 그런 방식에 제 마음이 가지만, 우리가 실제로 가능한 미래를 상상했던 것은 아닙니다.

빅토리아 소벨(Victoria Sobel) : 저는 그와 유사한 배경 출신이고 등록금이 무료인 대학에 다니고 있습니다. 저의 부모님 중 한 분은 부모 중 한 분이 이민 1세대셨고, 다른 분은 부모 중 한 분이 이민 2세대셨습니다. 저는 현재 일어나는 일에 대한 계급분석이 결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대학에는 다음 두 가지가 작동합니다. 하나는 학교에 가서 거기에 앉아 있을 여유가 있는 이들의 계층화가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학교에 가면서 늘어나는 빚을 안게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학생 투쟁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저는 여러분이 대학 공간에 들어갈지 말지가 계급 및 접근권과 관련이 있다는 점에 동의합니다. 여러분이 대회의실을 차지한 특권을 가진 학생들에 관해 말했던 것은 흥미롭습니다. 제 경우 그리고 제 또래들의 경우는 실제로는 [그런 학생들과는] 정반대입니다. 저는 아마도 더 주변화되고 빚을 진 학생들 중 하나입니다. 저는 이것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양 측면 모두를 보고 있습니다. 가장 빚을 많이 진 학생들과 공간을 차지하고 늘 공간을 차지해왔던 이들이 모두 일어섰다는 것을 말이죠. 이는 이들을 어떻게 병합해 공간을 되찾을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제 생각에는 그것이 우리가 학교에서 하려고 하는 것 혹은 어쩌면 새로운 뭔가를 시작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레임 톰슨(Graeme Thomson) : 교육이 그 제도적 틀 안에서 점점 더 부채에 대한 환수율이 떨어지는 상품이 되고 있다면, ‘교육은 제도 바깥으로 옮겨져야 하지 않을까?’라는 질문이 절실합니다. 적어도 우리가 교육을 가치있는 것이라고 본다면 말이죠. 우리는 이러한 부채 문제에 너무 과하게 매달리는 것 같아요. 특히 우리는 점점 더 이렇게 묻습니다. ‘학위를 갖는다는 것의 가치는 무엇인가?’ 그것은 여러분을 어디로도 데려가지 않으며, 거기에는 더 이상의 어떠한 해방의 지평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왜 교육을 여전히 대학과 등치시키는 걸까요? 거기에서 얻을 가치가 점점 더 없어지고 있는데도 말이죠.

페데리치 : 많은 경우에서 그것은 필사적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특정한 학위를 갖지 못한다면, 일자리를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학위가 있어도 일자리를 가질 아주 적은 기회가 주어짐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이것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선택지가 많지 않습니다. 바로 그것이 사람들이 계속해서 학위를 갈망하고, 그에 돈을 지불하고 그것이 그들에게 어떤 보장을 해줄 것이라고 희망하는 이유입니다.

드위넬 : 저 역시 이 투쟁 안에 사립대학의 요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가 이 자리에서 그 문제를 충분히 얘기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학생 채무의 상당 부분이 발생되는 것은 바로 여기입니다. 많은 경우 학위의 가치가 점점 더 떨어지고 있음에도 말이죠. 이건 정말 담보 대출 압류 사태와 똑같습니다. “좋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이 제도 안에 완전히 흡수될 수 있게끔 신용 대출을 늘려가고 있습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여러분의 모든 것을 훔쳐갈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여전히 우리에게 갚아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이죠. 그것은 사람들을 완전히 옭아매고, 하루하루를 근근히 살아가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할 여지도 주지 않습니다.

테미스 펠라스(Themis Pellas) : 지난 학기 가졌던 몇 번의 학생 노조 회합에 여러분 중 누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어떻게 하면 학생 노조를 넘어설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도시 전역에 걸쳐있는 노동조합을 가질 수 있을까를 논의한 바 있습니다. 이 말은 여러분이 이해해야 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이러한 다리를 건너야 하고, 또한 대학들이 하는 일이란 그들이 배출할 직업[전문직]을 마련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렇게 여러분은 양 끝 가장자리에서, 그리고 또한 그 사이에서 일해야 합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이 모든 상황에 개입하자는 것입니다. 이는 대학에 있는 동안 여러분이 원하는 직업을 여러분이 창출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오큐파이[월가 점거] 시위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여러 대학들에서 온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관계를 파악하려고 애쓰면서 “나는 그들에게 얼마나 가치있는가?”를 물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제가 이 제도[대학교육]를 넘어서길 원한다면, 저는 저 자신의 마음가짐을 고쳐먹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더 넓은 투쟁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페데리치 : 그것은 교육과 의료를 평행하게 만드는 데 조력합니다. 당신이 이 둘 모두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주장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필요하지 않은 많은 부자들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보편적 의료 서비스를 가져서는 안 된다.” 사실 사람들은 늘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시장을 벗어나는 다른 의료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가진 의료체계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사람들은 대안을 창출하고자 합니다. 아직까지는 그것을 대체할 수단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의료체계 자체를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교육투쟁과 의료투쟁을 동일한 과정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다른 길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을 꽁꽁 얼어붙어 있는 것으로 본다면 우리는 길을 잃습니다. 학생들은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들의 투쟁을 더 넓은 맥락에서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특정한 전략을 넘어설 수 없으며 이는 곧 패배입니다.

야콥센 : 자치 교육에 관해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덴마크에서 코펜하겐 자유[무료] 대학을 열었습니다. 이 나라는 우리가 “대학”이라는 용어를 쓰지 못하게 금지시키고 불법화하는 법을 통과시켰습니다. 자본은 학생들이 그들만의 대학을 조직할 생각에 빠질까 두려워합니다. 비록 우리가 당시—2007년에 폐교되었죠—에 그 자리에 없었지만, 우리는 ‘코펜하겐 자유대학을 재개하는 것은 불법이다’라는 통보문자를 받았습니다. 이 모든 작은 조치들이 점점 더 더해지고 있습니다.

코펜하겐 자유대학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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