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라르 뒤메닐의 저서 “‘자본’의 경제법칙 개념”의 서문
루이 알튀세르
번역: 배세진 (파리 7대학 정치철학 전공 박사과정)
옮긴이 앞글: 이 텍스트는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가 제라르 뒤메닐(Gérard Duménil)의 1978년 저서 Le concept de loi économique dans ‘Le Capital’ (François Maspéro, 1978)에 붙인 서문을 번역한 것이다. 이미 옥우석의 번역과 서관모 교수의 감수로 “역사적 맑스주의”(서관모 엮음, 새길아카데미, 1993)에 실린 바 있었던 이 텍스트는 뒤메닐의 오늘날까지의 작업 전체에 큰 영향을 끼쳤던, 그리고 옮긴이가 아는 한 현재에도 뒤메닐이 마르크스주의 연구자들에게 독해를 권하는 매우 중요한 텍스트이다. 이 텍스트와 함께 읽어야 하는 뒤메닐의 글로는 옮긴이가 번역해 알튀세르 탄생 10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 기고한 ‘인식에 관한 마르크스의 이론에 대한 알튀세르의 분석에 있어 역사와 정치경제학 사이의 해소되지 않은 긴장에 대하여’가 있다(심포지엄 자료집을 구하기 힘든 경우 옮긴이의 블로그인 foucaldien.wordpress.com에서 전문을 다운받기를 바란다). 반드시 이 글을 본 번역과 함께 읽기를 권한다. 역어에 대해 간단히 몇 가지만 지적하자면, unité는 맥락에 따라 ‘통일성’ 혹은 ‘통일체’로 번역했다. “자본”과 관련해 매우 중요한 두 가지 대립적 용어인 exposition과 recherche의 경우, 역어가 굳어져 있지 않기도 하고 본 번역이 출판을 위한 것도 아니기에 가독성을 해치더라도 exposition은 ‘설명/서술’로, recherche는 ‘연구/탐구’로 옮겼다(반면 étude는 대부분 ‘연구’로 옮겼다). interne는 ‘내적’, intérieur는 ‘내부적’, intériorité는 ‘내부성’으로 옮겼으며, 평행하게 externe는 ‘외적’, extérieur는 ‘외부적’, extériorité는 ‘외부성’으로 옮겼다. position은 ‘위치’와 ‘입장’이라는 의미를 모두 지니고 있지만 (한두 곳을 제외하고) 여기에서는 명확히 (개념의) ‘위치’라는 의미이기에 ‘위치’로 통일해 옮겼으며, 이와 관련해 ouverture와 fermeture는 ‘열림’과 ‘닫힘’으로 옮겼다. limite의 경우 본 텍스트에서 대부분 복수형으로 쓰여 있으나 굳이 ‘한계들’이라고 하지 않고 간단히 단수형 ‘한계’로 옮겼다. sens는 ‘의미’와 ‘방향’ 모두를 의미하므로 가독성을 해치더라도 ‘의미/방향’으로 옮겼다. détermination은 ‘결정’, ‘결정작용’, ‘결정요소’ 모두를 의미하는데, 본 번역에서는 ‘결정요소’로 통일했다. abstraction은 ‘추상’이나 ‘추상물’ 혹은 ‘추상화’ 모두를 의미하지만 여기에서는 ‘추상’으로 간단히 옮겼다. commencement은 맥락에 따라 ‘시작’ 혹은 ‘시작점’으로 옮겼다. ‘이론적 영역’을 뜻하는 champ은 ‘장’으로 옮겼다. commander는 ‘지배’ 혹은 ‘명령’으로, 아니면 ‘지배와 명령’으로 번역했다. ‘우연성’은 contingence를 옮긴 것으로, 아래에서 알튀세르가 중요하게 활용하는 표현은 ‘우연성의 필연성’, 즉 nécessité de la contingence이다(동일하게 표현되기는 하지만 이를 알튀세르의 우발성의 유물론과 관련짓는 것은 옮긴이의 생각에 조금은 과잉해석일 것 같다). ‘명증성’은 évidence를 옮긴 것으로, 어려운 의미가 전혀 아니라 ‘당연한 것으로 전제된 바’, 즉 “자본”에서는 상품이나 가치 등과 같이 선행하는 무언가 없이 마르크스가 전제(poser)하는 것을 의미한다. ‘전제’는 poser를 옮긴 것이고, ‘가정’은 supposer를, ‘선-전제’는 présupposer를 옮긴 것이다. matière의 경우 ‘물질’과 ‘재료’라는 뜻이 모두 들어 있으나, 여기에서는 ‘사고 또는 이론의 재료’ 혹은 ‘사고 또는 이론의 대상’으로서의 물질을 의미하므로 이를 ‘물질/재료’로 통일해 옮겼다. 바로 이 ‘재료’를 ‘전유’한다고 할 때 ‘전유’는 approprier 혹은 대명동사 s’approprier를 옮긴 것이다. mode는 ‘방식’으로, modalité는 ‘양태’로 옮겼다. a priori는 ‘선험’으로 옮겼다. construction은 ‘구축’ 혹은 ‘구축물’로, constitution은 ‘구성’ 혹은 ‘구성물’로 옮겼다. développement은 모순과 관련해서는 ‘전개’로, 이론과 관련해서는 (이론이라는 말이 없더라도) ‘이론적 전개’로 옮겼다. 알튀세르는 독일어 Verarbeitung을 프랑스어 élaboration으로 번역하는데(사실 이 프랑스어는 일상에서도 많이 쓰이는 단어이다), 서관모 교수가 “마르크스를 위하여”에서 설명하듯 이를 ‘정교제작’으로 옮기는 것이 매우 정확하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맥락을 고려해 ‘정교화 노동’ 정도로 옮겼다. procès de pensée, 즉 ‘사고과정’이 독일어 Denkprozess로만 쓰였을 경우 ‘사고과정’으로 옮기면서 항상 원어를 병기해 주었다. œuvre는 (“자본”이라는) 저작과 (“자본”을 생산하는) 작업 모두를 의미하므로 가독성을 해치더라도 ‘저작/작업’으로 옮겼다. conséquence 또한 가독성을 해치더라도 ‘결론/결과’로 옮겼다. 텍스트를 읽어나가면서 독자들은 왜 옮긴이가 굳이 이 원어들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이 난해한 텍스트를 조금이라도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원어에 대한 지식을 사전에 가지고 있는 것이 좋다. 번역대본은 Louis Althusser, Solitude de Machiavel (Édition préparée et commentée par Yves Sintomer[편집자 ‘이브 생토매’]), PUF, 1998의 pp. 247-266이다. 번역을 하면서 고슈가리언(G.M. Goshgarian)이 최근 출간한 이 텍스트의 영역본(Rethinking Marxism, 2018, Vol. 30, N. 1)의 도움을 받았다. 그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편집자 이브 생토매의 서문: 1977년 2월에 작성한 이 텍스트는 알튀세르가 책임자로 지도하고 있었던 “이론”(Théorie) 총서의 한 권으로 1978년 출간된 제라르 뒤메닐의 저서 “‘자본’의 경제법칙 개념”의 서문(pp. 7-26)으로 처음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뒤메닐은 1968년 말부터 이 저서를 집필하기 시작했는데, 그 당시 그는 알제리의 해외협력 파견원으로 근무하고 있었으며, “자본”을 거의 유일하게 배타적인 작업도구로 삼음으로써 참고문헌 없이 이를 집필했다. 이 작업은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에서 1971년 발표했던 박사학위 논문으로 이어졌다. 마오주의를 지지했던 뒤메닐은, 그러나 특히 68운동에 적대적이었던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종파주의 때문에 1968년부터 마오주의로부터 스스로를 거리두었다. 뒤메닐은 알튀세르주의자가 아니었다. 비록 “마르크스를 위하여”의 저자인 알튀세르가 (1997년 5월에 행한 뒤메닐과의 대담에서 그가 사용한 표현을 따르자면) ‘멍청하지는 않은’(non niaise) 하나의 특정한 방식으로 “자본”을 읽을 수 있도록 그를 이끌어 주었다고는 할지라도 말이다. 물론 뒤메닐은 알튀세르주의자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분명 이 저서는 알튀세르 자신 또한 다루고자 시도했던 주제들에 동일하게 접근했다. 그러나 이 저서에서 뒤메닐은 알튀세르가 본질적으로는 철학적인 성격의 접근이라는 틀 내에서 상당히 피상적인 방식으로만 다루었던 (고유한 의미에서의) 경제학적 문제들을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1971년 알튀세르는 자신의 테제들과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던 뒤메닐의 테제들을 아마도 높이 평가하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 어쨌든 이 두 사람은 서로를 개인적으로 알지는 못했다. 하지만 몇 년 뒤, 그러니까 더 이상 도그마주의가 통용되지 않던, 이전과는 다른 이론적이고 정치적인 맥락 속에서(마르크스에 대해 뒤메닐이 너무 관대한 것 아니냐고 종종 암묵적으로 알튀세르가 그를 비판할 만큼이나 변화된 맥락 속에서) 뒤메닐이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알튀세르에게 우편으로 보냈을 때, 알튀세르의 반응은 이전과는 달리 굉장히 긍정적이었다. 알튀세르는 뒤메닐의 작업을 진지하게 취급했고 그를 직접 만났으며 이 박사학위 논문의 출간을 마스페로 출판사에 제안하기 전 그와 여러 차례 대화했다. 판매량이 너무 적을 것에 대한 걱정으로 이를 출간하고 싶어하지 않았던 출판사를 설득하기 위해 알튀세르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다.
현대출판기록물연구소(IMEC)에는 이 텍스트의 세 가지 판본이 존재한다. 아래에 우리가 출판하는 판본은 마스페로 출판사에서 출간된 텍스트와 일치하며, 마지막 타자원고와의 몇몇 중요한 차이들의 경우 편집자 주석을 통해 언급했다.[각주:1]
1965년의 “‘자본’을 읽자”에서부터 1974년의 “역사유물론 5연구”[각주:2]에 이르도록 “이론” 총서가 특정한 방식으로 “자본”에 대해 질문하는 것에 익숙해지도록 도와왔던 독자들에게, 매우 상이한 이론적 영감을 지닌 작업을 고독 속에서 지속해 왔던 제라르 뒤메닐이라는 한 연구자의 저서를 소개하는 것이 우리에게 의미 있어 보였다.
이러한 소개를 통해 우리는, 역사적이고 이론적인 거리두기가 우리로 하여금 “자본”의 몇몇 명증성들에 대해 [조금은 더 중립적인 관점에서 다시] 작업할 수 있게 해주는 이 시기에, “자본”에 그 [사고의] 물질/재료와 경제를 되돌려주기 위한 하나의 대결과 몇 가지 유익한 가설들을 희망해볼 수 있을 것이다[각주:3].
역설적이지만, 그 고유의 논리에 따라서만 “자본”을 분석하고 “이 “자본” 내에 쓰여지지 않은 것은 그 무엇도 절대로 읽어내지 않”는 것을, 그러니까 자신의 이론적 장의 한계를 절대로 초과하지 않는 것을 그 연구 원칙으로 취한 뒤메닐의 이 저서가 오히려 바로 “자본”을 분석하는 작업에 기여할 수 있다.
***
이미 그 자체만으로도 완벽히 자족적이며 자신의 엄밀함과 명료함 속에서 모든 권리를 소유하고 있는 그러한 저작을 소개(présenter)하겠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자본”을 “모든 의미/방향으로” 편력함으로써, 그러니까 “자본”의 1, 2, 3권과 그 여러 장들로부터 인용한 구절들을 자르고 다시 모음으로써, 동일한 문제들을 여러 차례에 걸쳐 하지만 매번 다른 각도로 다룸으로써, 이 저서가 예상치 못한 자신의 전개방식(procédé)을 통해 독자들을 혼란스럽게 하기는 하지만, 우리는 저자가 그 야망도 유효범위도 전혀 숨기지 않는 하나의 연구 계획, 즉 마르크스의 사유논리의 발견이라는 연구 계획에 활용되기 위해 ‘한걸음 한걸음’ 스스로 구성되어 나가는 섬세하고도 끈질기며 열정적인 그 논증 속으로 빠르게 진입하게 된다.
뒤메닐은 우리가 12년 전에[그러니까 “‘자본’을 읽자”에서] 시도했던 것처럼 “자본”을 ‘읽’으려 하지 않는다. 그 당시 우리는 “자본”의 전사(préhistoire) -우리가 너무 획일적으로 ‘이데올로기적’이라고 불렀던- 에 맞서, 즉 스미스, 리카르도, 세에 맞서 ‘정치경제학 비판’으로 정의했던 적절한 개념적 차이들을 “자본”에서 탐지해 내고자 했다. 동시에 우리는, 부적절한 용어들을 통해, 어떠한 통념의 결함을 혹은 어떠한 증명의 원환을 예상하고자 했는데, 그러나 이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낡은 계보이든 인식되지도 못한 문제이든 이론적 허상이든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그러한 결함들의 증상일 뿐이었다. 매개의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동시에 이 역할을 거부하기도 했던, 정치경제학과 헤겔이라는 두 항의 작용(jeu)을 통해, 우리의 해석은 (비록 그 당시 우리의 해석이 어떠한 이론주의의 수인이기는 했지만) “자본”의 개념들과 현실적 문제들 -마르크스는 이 개념들과 문제들 속에서 대결했으므로- 사이의 관계를 요청했다[각주:4].
뒤메닐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 저서는 “자본”을 읽지 않는다. 대신 이 저서는 “자본”을 연구(étudie)한다.” 뒤메닐의 이 발언을 우리는 “자본”을 읽을 수 있기 위해서는 이를 연구해야만 한다는 주장으로 이해해야 한다. 뒤메닐의 ‘연구’(étude)의 대상에 대해 오해하지 말자. 이 저서의 목표는 명료하지만 혼란스러우며 미완성된 저작 “자본” 속에서 생산가격의 이론이나 (주기적 위기이든 일반적 위기이든) 위기 이론 등등과 같은 ‘경제(학)적’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이를 세밀하게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이 저서의 목표는 마르크스가 이러저러한 문제에 관해 사고했던 바를 이해하기 위해 “자본”을 연구하는 것도 아니다. 뒤메닐은 마르크스가 어떻게 사고했는가를 이해하기 위해 “자본”을 ‘연구’한다. 이 외의 나머지는 잉여적인 것이다. 극단적으로 뒤메닐은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마르크스가 어떻게 사고했는지를 우선 이해한다는 조건에서만이, 우리가 그의 대상을 정의하고 그의 증명을 지배하는 논리를 인식한다는 조건에서만이, 우리는 그 원인에 대한 인식 속에서 “자본”을 읽을 수 있으며, “자본”이 포함하는 것, “자본”에게 ‘당연히/정당히’(en droit) 귀속되는 것, “자본”을 빠져나가는 것, “자본”이 그로부터 배제되는 것을 인지(identifier)할 수 있다.
***
“자본”의 마르크스는 어떻게 사고하는가? 이는 매우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던 질문으로, 우리로 하여금 레닌의 너무 유명한 아포리즘들을 넘어, 그리고 비판적이기보다는 변호론적인 모든 관련 ‘문헌들’을 넘어, 다시 마르크스 자신 안에서 우선적으로 발견해야만 하는 해답의 요소들로 되돌아가도록 만든다.
가장 단순하고 가장 ‘명증’한 답변은 (하나의 논리라고 가정된) 마르크스의 사고 논리를 ‘“자본”의 이성/이유의 질서’, 즉 그 설명/서술 순서와, 혹은 마르크스의 표현을 다시 취하자면, 그 ‘설명/서술 방법’ 혹은 ‘설명/서술 방식’(Forschungsmethode 혹은 Forschungsweise)과 동일시하는 것이다[각주:5].
이러한 답변을 우리에게 강제하는 것은 “자본”의 ‘이성/이유의 질서’가 지니는 인상적인 개념적 통일성 뿐만이 아니라 또한 “자본”의 독일어 2판 ‘후기’, 즉 “자본” 1권이 출간된지 6년 뒤인 1873년에 “자본”의 독자들의 비판에 응답하기 위해 집필한 글에서 명시적으로 우리에게 이러한 통일성을 지시하는 마르크스 자신이기도 하다[각주:6]. 하지만 “자본”의 설명/서술 순서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어떠한 선-전제 없이 자명한 것으로 주어짐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후기’에서 두 번째 순서가, 하지만 사실은 첫 번째 순서인 그러한 순서가, 즉 연구/탐구의 순서가 등장한다. 마르크스는 연구/탐구의 방법 혹은 방식(Forschungs-methode 혹은 -weise)과 설명/서술의 방법 혹은 방식(Darstellungs-methode 혹은 -weise)을 구분해야 한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주장을 명확히 한다. “세부지점들에서 재료(Stoff)를 전유(sich aneignen)하는 것, 그 전개의 서로 다른 여러 형태들을 분석하는 것, 그리고 그 형태들의 내밀한 관계를 드러내는 것”은 연구/탐구의 방식에 속하는 것이다. 개념적 설명/서술은 연구/탐구 뒤에 이어지는 이차적인 것이다. “[연구/탐구라는] 노동이 완료될 때에만 현실적 운동은 적합한 방식으로 설명/서술될(entsprechend dargestellt) 수 있다.” 그러므로 설명/서술의 순서는 연구/탐구의 순서를 선-전제한다. 운동 중인 물질/재료를 전유하기 위해서는 연구/탐구가 우선 필요하다. 개념들의 운동 속에서 ‘현실적 운동’을 ‘재생산’하기 위한 설명/서술은 그 다음에 이어지는 것이다.
설명/서술의 순서와 연구/탐구의 순서 사이의 이러한 구분이 우리를 ‘연구/탐구의 방법’이 규정하는 영역의 내밀함(intimité)으로, 그러니까 (“자본”에서 우리가 명명백백히 확인할 수 있는 설명/서술이 연구/탐구의 결과를 ‘재생산’할 뿐이라는 점에서) 저작/작업의 운명이 최종적으로 작동하는 장소인 ‘물질/재료’의 ‘전유’ 노동 속으로 진입할 수 있게 해줄 것이라고 믿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혀 아니다. 만일 1857년 ‘서문’의 ‘정치경제학의 방법에 관하여’라는 절에서[각주:7] 마르크스가 이러한 정교화 노동(Verarbeitung)을 암시적으로 언급할 수 있었다고 우리가 주장할 수 있다 하더라도, 16년 뒤 마르크스는 이와 정반대로 “자본”의 ‘후기’에서는 이러한 정교화 노동에 대해 그 무엇도 말하지 않으며 그 이후로도 역시 그 무엇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마르크스는 이 ‘후기’에서 (게다가 그가 ‘형식적’formelle이라고 선언했던, 설명/서술과 연구/탐구의) 구분의 용어들을 분석하고자 하지 않는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용어들을 분석할 필요가 없었으며, 대신 이 용어들 간의 구분 내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단순한 위치에 대한 분석으로도 그에겐 충분했기 때문이다.
설명/서술과 연구/탐구 사이의 구분은 마르크스로 하여금 자신의 유물론에 ‘형태’(forme)를 부여할 수 있게 해준다. 만일 방법이 둘로 나뉘어진다면, 만일 설명/서술 순서의 뒤편에 또 하나의 다른 순서가, 즉 연구/탐구의 순서가 등장한다면, 이는 용어들의 한 쌍을 위치짓기 위한, 그리고 이 쌍 안에서 한 용어에 대한 다른 한 용어의 우위를 전제하기 위한 것이다. 즉, 설명/서술 방법에 대한 연구/탐구 방법의 우위. 따라서 ‘물질/재료’에 대한, 이 ‘물질/재료’의 세부지점에 대한, 이 ‘물질/재료’의 현실적 운동에 대한 전유 내에 모든 것이 달려 있는 것이다. 즉, 설명/서술의 개념적 운동은 현실적 운동을 ‘재생산’할 뿐이고 현실적 운동의 (관념 내에서의) ‘관념적 반영’(reflet idéel)에 불과한 것이며, 이 설명/서술의 개념적 운동은 심지어 단 하나의 ‘선험적a priori 구축물’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결국 이는 하나의 테제이며, 만일 이 테제가 하나의 테제로서 단순히 ‘전제’된 것으로 남아 있다면, (이 테제가 ‘재료’Stoff라는 단어를 가지고 말놀이를 하는 것과 동일하게 놀이함으로써) 이 테제는 마르크스의 유물론의 의미/방향에 관한 어떠한 관점을 제시할 수도 있을 것이며 동시에 이러한 전유 노동에 관한 분석을 위한 [복수의] 길들을 열어젖힐 수도 있을 할 것이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이 테제를 완전히 다른 하나의 목적으로 활용한다. 마르크스는 이 테제를 독일의 ‘서평가들’이 “자본”에 대한 그들의 비판에서 자신에게 제기했던 헤겔주의라는 비판에 대한 반비판 속으로 ‘집어넣’(précipite)고 고정시킨다. 따라서 마르크스에게서 방법의 양분은 이 성급한 독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설명/서술 방법의 뒤편에서 또 다른 하나의 방법, 즉 연구/탐구와 ‘물질/재료’의 전유라는 방법을 보지 못했다는 점을 깨닫게 만드는 역할에 집중한다. 잡지 Messager européen의 러시아 비평가는 이러한 구분을 정확히 파악했지만, 그는 “자본”의 설명/서술 방법’의 (헤겔주의적인) ‘독일적 변증법의 방법’을 ‘연구/탐구의 방법’의 ‘엄격한 현실주의’에 대립시켰을 뿐이었다[각주:8]. 불행히도, 그리고 이러한 구분에도 불구하고, 다른 독일 비평가들과 마찬가지로 이 러시아 비평가 또한 ‘설명/서술 방법’의 함정에 빠져들고 말았다. 따라서 우리는 더 멀리 나아가야만 한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사변적 허상의 효과가 바로 … 진정으로 적절한 유물론적 설명/서술에 의해 생산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이 비평가들의 오류를 하나의 허상을 통해 설명해내 우아한 자태를 뽐낸다! “그 관념적 반영 속에서 물질/재료의 생명을 재생산하는 노동[과업]에 만일 우리가 성공한다면, 우리는 하나의 선험적 구축물을 다루고 있다는 인상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는 하나의 역설이다. 바로 이러한 성공이, 그러니까 설명/서술 방법과 개념들의 운동 혹은 변증법을 통한 현실적 운동의 유물론적 재생산의 적합함이, 설명/서술 방법과 개념들의 운동 혹은 변증법을 통한 현실적 운동의 생산(즉 ‘선험적 구성물’)이라는 사변적 허상을 만들어내니까 말이다…
아마도 이러한 구분을 통해 마르크스는 (자연스러운 핑계로) 이 비판가들에게 그들의 사변적 허상의 원인, 즉 “자본”의 완벽한 ‘성공’을 지시해줌으로써 자신의 비판가들을 무시해버렸던 것 같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마르크스는 (감히 이런 표현을 사용할 수 있다면) 침묵으로밖에는 완수할 수 없는, 즉 이러한 구분의 두 항들 각각에 대한 침묵 혹은 오히려 (“자본”은 자신의 설명/서술 순서를 표현exhibe하고 강조한다는 점에서) 연구/탐구의 순서에 대한 침묵 -그러나 바로 이 연구/탐구의 순서가 “자본” 전체를 지배하고 명령하는 것이다- 으로밖에는 완수할 수 없는 ‘설명’에 착수한 것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이는 자기 스스로는 이해할 수 없는 설명/서술 순서(왜냐하면 이 설명/서술 순서는 또 다른 순서, 즉 연구/탐구 순서에 의존하기 때문이다)에 침입해 들어오는 ‘명증성’을 뒤덮고 있는 모호성들에 대한 침묵이다.
이 모든 설명 내에서, 마르크스는 단순한 하나의 단어에 불과할 수 있는, 하지만 동시에 매우 멀리까지 나아갈 수 있는 하나의 작은 단어, 즉 ‘방법’이라는 단어를 간접적으로 암시한다. ““자본”에서 사용된 방법은 거의 이해되지 못했다.” 마르크스는 바로 이 문장으로 자신의 논의를 시작한다.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마르크스는 방법을 양분하고 자신의 저작/작업의 유물론적 ‘성공’이 생산한 사변적 허상을 해명했다. 그리고 매우 당연히도, 그가 간접적으로 암시한 이 방법과 사변이라는 단어들이 ‘자신의 변증법적 방법’을 헤겔의 ‘변증법적 방법’과 대립시키는 근본적인 차이를 도출하는 것이다.
“나의 변증법적 방법은 그 토대에 있어(Grundlage) 헤겔의 변증법과 다를 뿐만 아니라 헤겔의 것과 직접적으로 정반대되는 것(ihr direktes Gegenteil)이다. 헤겔에게서, [대문자] 관념이라는 이름 하에 하나의 독립적인 주체로 변형되기까지 하는 사고과정(Denkprozess)은 현실적인 것(das Wirkliche)의 조물주인데, 이 현실적인 것은 그 외부[즉 관념적인 것]의 현상(Erscheinung)만을 표상할 뿐이다. 반면 나에게서, 완전히 역으로(umgekehrt), 관념적인 것은 인간의 머릿 속에서 전치(transposé)되고 번역된 물질적인 것과 다른 것이 전혀 아니다.”[각주:9][각주:10]
이 유명한 구절들은 헤겔의 방법 혹은 사고과정(Denkprozess)의 양태(modalité)와 마르크스의 방법 혹은 사고과정의 양태 사이의 일대일 대립 혹은 전도를 정의하고 있다. 헤겔적 사고과정(Denkprozess)이 ‘현실적인 것의 조물주’이며 ‘현실적인 것’은 그 현상에 불과한 것과 달리, 또한 ‘조물주’라는 용어는 제거함으로써 우리가 헤겔적 사고과정(Denkprozess), 즉 [대문자] 관념의 운동이 현실적인 것을 생산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과 달리, 마르크스에게서 사고과정(Denkprozess)은 개념들의 운동 내에서 물질/재료 그 자체의 운동을 ‘재생산’하는 것에 만족한다. 그리고 헤겔에게서 현실적인 것이 독립적인 것으로 전제된 [대문자] 관념의 현상(Erscheinung)에 불과한 것과 마찬가지로, 하지만 동시에 그 역으로(umgekehrt), 마르크스에게서 관념적인 것(즉 사고과정Denkprozess)은 ‘물질적인 것’의 ‘반영’에 불과하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용어들의 전도를 통한 이러한 대립이 사변적 허상을 수식하기 위해 말해진 바를 초과한다는 것을 즉각 확인하게 된다. 이는 더 이상 하나의 ‘선험적 구축물’(Konstruktion a priori) -개념적 설명/서술의 형태(개념적 ‘구축물’은 이와 다를 수 있다)만을 유일한 대상으로 취하는- 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구성 혹은 생산 -‘선험적 구축물’과 달리 이 구성 혹은 생산은 현실적인 것 그 자체를 대상으로 취한다- 이다. 그러므로 방법의 ‘전도’에서 은밀하게 그 쟁점으로 설정되는 것은 방법 뿐만이 아니라, 특히 설명/서술의 방법 뿐만이 아니라, 또 하나의 다른 것, 즉 인식의 작업(œuvre)을 제대로 이끌어 나가기 위해 정의하고 차지해야만 하는 철학적 위치[혹은 입장]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모호한 점은 이러한 위치[혹은 입장]가 정확히 방법에 따라서[방법으로](en fonction de) 정의되는지이다.
우리는 이러한 유보를 서로 다른 여러 형태들로 표현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내가 예전에 보여주었듯[각주:11], 우리는 마르크스가 그 중심에서 자신의 ‘전도’를 수행했던 철학적 장치(dispositif)가 포이어바흐가 이를 통해 사변을 완성된 본질로, 그러니까 모든 관념론의 진실로 정의했던 그러한 철학적 장치로 남아 있다는 점을 보여줄 수도 있고, 또한 이러한 의미에서 마르크스가 헤겔적 ‘사변’에 대한 포이어바흐적 해석 내에, 그러니까 유물론을 자신의 ‘전도’로, 다시 말해 ‘사변’만의 전도로 정의하는 그러한 한계 내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다는 점을 보여줄 수도 있다. 하지만 또한 우리는 이 동일한 유보를 또 하나의 다른 형태 하에서, 그리고 우리에게 마르크스 사유의 ‘정관사’(la) 논리에 대한 정의(définition)의 쟁점을 포착할 수 있도록 해주는 더욱 적절한 형태로 표현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이 지점을 자세히 살펴본다면, 헤겔적 방법과 마르크스적 방법이라는 양태들 간의 전도는 양극적인 두 가지 철학적 범주들 -여기에서는 이 두 가지 철학적 범주들 사이의 전도가 결국 요구되는 것인데- 을 그 쟁점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즉, 한편에는 현실적인 것 혹은 물질 혹은 물질적인 것, 다른 한편에는 관념 혹은 관념적인 것이라는 두 가지 철학적 범주들이. 이 양극적인 두 가지 범주들 각각의 우위 사이에서 유물론적 테제와 관념론적 테제라는 철학적 입장들이 기본적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양극적인 두 가지 범주들 이외에도, 여기에는 바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용어들이 개입해 들어온다. 바로 사고과정(Denkprozess)과 방법이 그것이다. 이 두 용어들이 단지 하나를 이룰 뿐이라는 점, 이 두 용어들 모두가 관념 혹은 관념적인 것의 편에 존재한다는 점을 우리는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 사고과정과 방법이라는 이 두 가지 용어들은 하나의 우위에서 다른 하나의 우위로 이동하게 만드는 양태의 전도가 취하는 불변적 축 혹은 토대(substrat)이다. 이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해보자. 이 불변항과 같은 유형 하에서, 우리는 비판되지 않았으며 문제제기되지 않은, 사고과정(Denkprozess)과 방법에 관한 마르크스의 특정한 하나의 관념을 발견하게 된다(이 사고과정과 방법은 이러한 작동을 지배하는 철학적 선-전제들의 한계로부터 빠져나오지 않으면서 자신들에 대한 ‘전도’를 가능케 한다)[각주:12].
우리는 그 효과를 통해 이를 판단할 수 있다. 만일 모든 것이 사고과정(Denkprozess)의 양태의 전도 위에서 작동하는 것이라면, 비판에 따라, 다시 말해 모든 관념론의 진실로서의 사변이라는 포이어바흐적 개념화의 논리에 따라, ‘유물론적-과학적’ 사고과정(Denkprozess)을 획득하기 위해 ‘사변적’ 사고과정(Denkprozess)의 양태를 전도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일까?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이 사고과정(Denkprozess)의 형태와 개념, 다시 말해 관념을 뒤엎기(bouleverser) 위해 이 사고과정(Denkprozess)으로부터 거리를 취해야 하는 것 아닐까? ‘헤겔의 변증법’이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방법’이 되기 위해 이 사고과정(Denkprozess)의 양태를 전도하는 것만으로 정말 충분한 것일까? 그리고 사태를 근본적인 차원에서 말해보자면, 도대체 어떠한 자격에서 그리고 어떠한 대가를 치르고서 우리는 (심지어 헤겔적 사변으로부터 ‘해방된’) ‘하나의 방법’을, 진정으로 하나이며 진정으로 방법인 그러한 ‘하나의 방법’을 획득했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이는 하나의 ‘방법’과 하나의 ‘변증법’을 위한 모험으로 향하는 여러 길들을 열어젖히는 위험에 빠질 수 있는데, 이 하나의 ‘방법’과 하나의 ‘변증법’이 포이어바흐가 헤겔에게서 사변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바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가정해 본다면, 이 길들은 전사변적인(préspéculative) 오래된 관념론적 경향을 완전한 자유 속에서 되찾기를 요구하는 것에 불과하다. 오히려 이 사고과정(Denkprozess) 그 자체를, 다시 말해 유일(unique)하면서도 공통적인, 그래서 전형적인 하나의 사고과정(Denkprozess)의 존재라는 관념 그 자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야만 한다는 점은 너무나 명확하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사고과정(Denkprozess)이라는 관념은 물질/재료를 진정으로 ‘재생산’하는 개념적 설명/서술이라는 사변적 허상과 마찬가지로 이 물질/재료를 ‘생산’한다고 자처하는 사변적 담론의 오류 또한 지지한다는 [역설적인] 이점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를 그 효과를 통해 판단할 수 있으며, 또한 (우리가 사변적 허상에 빠질 수 있는 것과 정확히 동일하게) 다른 의미에서 진지한 이유들로 인해 ‘변증법적 허상’에 빠질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줄 수 있다. ‘헤겔의 변증법적 방법’과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방법’ 사이의 차이가 그 양태(즉 더 이상 사변적이지 않고 유물론적인 양태)에 달려 있다고 말함으로써,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입장(position)을 방법에 관한 기존 관념 속에서 작동시킴으로써, 그러니까 이 기존 관념 속에 집어넣음으로써, 마르크스는 자신의 테제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할 위험에 처하게 된다. 나는 이것이 마르크스가 내뱉은 몇 마디 성급한 말들에 지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가 이 점을 다시 제대로 다루지도 않았으며 또한 특히 이 몇 마디 말들을 읽었던 몇몇 이들이 이를 마르크스가 직접 제출한 결론으로 간주해 종교적으로 주석을 달았기에, 우리는 이 단어들을 진지하게 취급해야만 한다. 결국 마르크스 자신이 이를 진지하게 다루지 않았던가[각주:13]. (그토록 조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유혹의 깊은 흔적들이 남아 있는) “자본”을 집필하는데 있어 필요불가결한 장(champ)을 취하기 15년 전, 마르크스가 (광적으로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최소한 헤겔적 유혹에 종종 빠지곤 했다는 점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그룬트리세”를 읽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자본” 1권 1편의 헤겔적 ‘용어들’과 ‘불장난’을 했다는 마르크스 자신의 인정을 악용한 복수의 논평가들은, 매우 자연스럽게도, ‘대립물들의 통일체’로서의 상품이라는 ‘선험적 구축물’로 대표되는 그러한 함정에(도대체 어떤 의미에서 ‘가치’의 ‘담지자porteur, Träger’라고 불리는 ‘사용가치’가 자신이 ‘담지’하는 가치와 모순적이라고 말해질 수 있는지? 나는 도무지 모르겠다), 그리고 상품으로부터 자본을 연역하는 것 등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즉자(상품)와 대자(교환)로부터 즉자-대자로서의 화폐를 연역하고자 하는 것으로 대표되는 그러한 함정에 빠졌다.
그리고 우리가 다룰 만한 가치가 역사적으로 사실상 거의 없는 주석가들을 제외한다면, 레닌 자신은, 헤겔의 “대논리학”[각주:14]을 읽고 난 뒤 느꼈던 놀라움 속에서, 믿기 힘든 다음과 같은 문장을 분명히 썼다. ““자본”에서 마르크스는 우선 가장 단순한 것 (…) 상품들의 교환을 분석한다. 이러한 분석은 그 현상 속의 모든 모순들을, 더욱 정확히 말해 현대 사회의 모든 모순들의 맹아를 발견해 낸다. 그 다음으로 마르크스의 설명/서술은 처음에서부터 그 끝에 이르기까지 그 다양한 부분들에 존재하는 이 모순들과 이 사회의 전개(와 성장, 그리고 운동)을 묘사한다. 바로 이것이 변증법 일반의 설명/서술 방법(더욱 정확히 말해 연구/탐구étude 방법)임에 틀림 없다. 왜냐하면 부르주아 [시민]사회의 변증법은 마르크스에게 변증법 일반의 특수한particulier 하나의 경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각주:15] 그리고 명백히 자신이 전혀 통제하지 못하고 있는 이러한 ‘대담함’과 일관되게 레닌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가장 단순한 것, 가장 익숙한 것, 가장 일반적인 것 등등, 그 어떠한 명제이든간에 (…) 그러한 명제로부터 우리가 시작한다는 것, (…) 모든 명제에서 우리가 (‘세포’에서와 같이) 변증법의 모든 요소들의 맹아들을 드러낼 수 있(고 드러내야만 한)다는 것 (…).”[각주:16] 물론 레닌의 이 문장은 즉흥적으로 작성한 개인적인 메모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메모 외에도 이러한 주장이 여럿 존재한다. 동일한 시기에 레닌은 다음과 같이 썼다. 헤겔의 “대논리학”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마르크스 이후 반세기 동안 단 한 명의 마르크스주의자도 마르크스를 이해하지 못했다!”[각주:17] 너무 깊은 심연이 없다면 현기증 또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각주:18].
그런데 이러한 변증법 ‘일반’이 엥겔스와 레닌 각각이 대표하는 상호 보완적인 두 가지 유혹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하고 있다는 점을 보기 위해서는 (‘사변’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자기 자신으로 온전히 존재하게 된, 다시 말해 ‘사변’보다 더욱 오래된 자신의 이론적 존재이유를 온전히 보존하게 된) 이 변증법 ‘일반’이 일반적이며 전능하다고 말하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 변증법 ‘일반’은 사람들이 흔히들 이렇게 말하듯 ‘물질/재료의 운동’과 ‘사고의 운동’의 ‘법칙들’을 언표하는 ‘과학’이거나 -하지만 나는 독자들이 ‘법칙’이나 ‘보편적인’과 같은 단어들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기를 원하는데, 이 단어들을 도대체 왜 사용하는 것인지? 이 단어들을 사용하는 것은 최악의 선택인데, 왜냐하면 이 변증법 ‘일반’의 ‘보편성’은 참[즉 진리]으로 인지하기를 원하는 것을 이 변증법 ‘일반’의 ‘법칙’이 지니는 권위를 통해 보증하기 위해 마음껏, 그러니까 자의적으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고, 사용된 이후에 은퇴자 요양소로 유유히 걸어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면 마르크스 자신이 이미 언급하고 있는 ‘방법’, 그리고 마르크스 이후에 엥겔스가 이 ‘방법’을 구해내기 위해 이를 헤겔적 ‘체계’로부터 분리시켜야만 했다고 회고적으로 말하는 그러한 ‘방법’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이 ‘과학’이 참이기 위해서, 이 ‘방법’이 무엇보다도 우선 과학의 확실한 길이기 위해서, 요컨대 자기 자신을 선행하는 과학이기 위해서, 우리는 변증법이 ‘과학적 방법’이라고 말해야만 한다[각주:19].
그런데 철학의 깊고 깊은 오래된 심연으로부터 등장하는 이러한 방법이라는 관념, 무엇보다도 자신의 작업을 개시할 수 있도록 자신이 취할 길을 사전에 이미 인식하기를 원하는 이들, 헤겔이 말했듯 수영을 배우기 위해 사전에 이미 수영하는 법을 알고자 하는 이들, 연구/탐구를 개시하기도 전에 자신이 발견할 진리를 사전에 이미 보증받아 놓기를 원하는 이들의 질문에 아마도 응답해줄 이러한 방법이라는 관념, (데카르트에 반대해) 스피노자가 거부했던, (칸트에 반대해) 헤겔이 거부했던 이러한 방법이라는 관념은 모든 좋은/선량한(bonne) ‘인식론’이 제공하는 상상적이지만 인상적인 그러한 보증물에 조금은 너무 단단히 엮여 있어서 우리는 이를 두 번은 바라보지 않게 될 정도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이라는 관념을 격렬하게 비판했던 헤겔에게서 이 방법이라는 관념이 자신의 생성(devenir) 속에서 모든 결과를 도래케할 보증물로서의, 모든 과정의 목적론적 의미/방향의 선험적(a priori) 보증물로서의 ‘절대적’ 방법이라는 형태 하에서 다시 돌발(resurgit)하는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헤겔을 인식론의 함정에 다시 빠지도록 만드는 ‘절대적’을 제거하자. 그리고 이 방법이라는 관념이 일반적 혹은 보편적이라고, 다시 말해 당신은 모든 영역에서, 그러니까 명령에 의해 존재하거나 혹은 아무런 외부의 강제 없이 스스로 존재하는 좋은/선량한 인식론의 대체물로서 기능하는 ‘변증법적 방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자.
그래서 (하나라고 가정되는 사고과정Denkprozess이 취하는 사변적 양태만을 공격하는 유물론적 테제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상태'는 변증법 그 자체, 다시 말해 운동의 ‘가장 일반적인’ ‘법칙들’의 과학, 보편적이면서 동시에 간헐적인[일시적인] 존재론과 같은 것이거나, 혹은 이론가(chercheur) 혹은 교조주의자에게서 (우선적으로 그리고 동시에 사후적으로) 자신의 주장들을 보증해주는 인식론을 대신하는 방법과 같은 것이다. 이와 거의 유사하게 라이프니츠가 다음과 같이 말했듯이 말이다. 연구/탐구의 결과에 도달하기 위해, 당신은 이 결과를 획득하는데 적절한 방식으로 과정을 진행해 나가기만 하면 된다[각주:20].
하지만 마르크스는 이러한 유물론적 테제 -이 유물론적 테제는 변증법적 방법을 해방시켜 결국 이를 이미 존재하고 있는 유혹에 빠지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다- 만을 언표했던 것이 아니다. 또한 마르크스는 “자본”의 독일어 2판 ‘후기’보다 15년 전에, 그러니까 1859년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1분책”의 1857년 ‘서문’[즉 “그룬트리세”의 서문](마르크스는 이 텍스트를 출간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우선 증명부터 해야 하는 결과들을 미리 예상하는 것은 지극해 해로울 뿐이기 때문이다”)에서 사고과정(Denkprozess)의 핵심적인 지점에 관해 스스로 해명했다[각주:21].
1867년이 되어서야 그 1권이 출간되는 “자본”의 첫 번째 판본(“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1분책”)과 같은 시기[인 1857년]에 작성한 이 ‘서문’은 바로 헤겔적 사고과정(Denkprozess)의 사변적 개념화를 비판한다. 마르크스는 이 텍스트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헤겔은 현실적인 것(das Reale)을 자기 자신 안으로 환원되는, 자기 자신 내부로 더욱 깊어지는, 자기 자신에 의해 운동하기 시작하는 사고의 결과로 개념화하는 그러한 허상에 빠지게 된다.”[각주:22] 따라서 헤겔 자신이 1873년의 ‘후기’에서 마르크스가 비판하는 사변적 허상의 희생자인 것이다. “추상에서 구체로 상승(aufsteigen)하는 것이 핵심인 이러한 방법은 사고가 구체를 전유(aneignen)하는, 구체를 사고-구체(ein geistig-Konkretes, concret-de-pensée)로 재생산하는 방식에 불과하다.”[각주:23] 마르크스가 1857년 ‘서문’에서 썼던 이 문장에서 우리는 1873년 ‘후기’의 단어들을 이미 발견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사고과정(Denkprozess) 그 자체에 관해 말하는, 거대한 일반성을 지닌 테제들과 관계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양태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1)] 당신은 사고과정이 자신의 고유한 운동을 통해 현실적인 것을 생산한다고 전제하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2)] 당신은 이 사고과정이 현실적인 것에 대한 전유의 한 방식(mode)에 불과하다고, 그래서 종교적인, 미학적인 그리고 실천적인 것과 같은, 동일한 현실적인 것을 전유하는 서로 다른 방식들이 존재한다고 전제하거나. 따라서 사변으로부터 참된 이론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양태를 전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그 자체로만 보자면 이는 마치 (우리가 사변을 생산하기 위해 증강할 수 있는 혹은 과학으로 전도할 수 있는) 사고과정(Denkprozess) 그 자체가 존재한다는 듯이 사고하는 것이다.
이 1857년 ‘서문’에서 마르크스가 보여주었던 그의 위대한 독창성이 이 사고과정(Denkprozess)을 ‘유물론적인 것’으로 구성하는 바에 대한 분석을 개시하고 이에 대해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이라고 간주해야만 하는가? 그러나 뒤메닐을 매혹시켰던 것과 동일하게 우리를 매혹시켰던 마르크스의 대담함은 아마도 (모든 경험주의에 반대하여) 참된 사고과정(Denkprozess) 내에서 구체적인 것은 출발점이 아니라 도착점이라는 점을, 그래서 우리는 추상으로서의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구체적인 것에서부터 ‘시작’하지 않고 대신 조금씩 조금씩 구체적인 것을 생산하기 위해, 그러니까 ‘사고-구체로서의 구체적 총체성’(la totalité concrète comme concrète-de-pensée)을 생산하기 위해 추상에서부터 시작한다는 점을, 그리고 이 총체성이 ‘사고하는 머리의 생산물’이라는 점을 보여준다는 점일 것이다. (좋은/선량한 유물론적 테제에서는) 아마도 현실적인 것이 직관과 표상을 ‘개념으로’ 변형하는 길고 긴 정교화 노동(Verarbeitung, élaboration)의 끝에서, 현실적인 것의 ‘재생산’에 불과할 그러한 ‘생산’을 감시하는 일종의 감시자처럼 사고과정(Denkprozess)의 바깥에 지속적으로 자리해(stets) 현존하고(présent)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분석’을 통해 획득한 ‘가장 단순한 결정요소들’이라는 최초의 추상을 대상으로 하는 또 하나의 다른 주의점을 제외한다면) 바로 이것이 우리를 사변적 사고과정(Denkprozess)에 빠지는 것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유일한 지표이다.
그런데 구체적인 것을 생산하기 위해 추상적인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과정(procès)은 헤겔적 사고과정(Denkprozess)과 단절하지 않는다. 심지어 우리는, 형식적인 측면에서는, 이 ‘구체화’의 사고과정(Denkprozess)이 먼 곳에서 헤겔의 “대논리학”의 과정(procès)을 모방하고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분명 레닌이 보지 못했던 중요한 점은 “대논리학”이 ‘가장 단순한 결정요소’ -바로 이 단순함이 자신의 노트에서 레닌을 매혹시켰던 것이다- 에서부터 시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가장 단순한 것’은 아무것(n’importe quoi)과 마찬가지로 항상 무언가(quelque chose), 그러니까 하나의 결정된 것이기 때문이다[각주:24]. 이와 반대로 “대논리학”은 결정되지 않은 것, 즉 [대문자] 존재(Être)에서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우리는 이 “대논리학”으로부터 ‘가장 단순한 것’에서부터 시작하지 않기 때문에 “대논리학”이 [대문자] 존재 내에서 가장 거대한 추상에서부터 시작한다고, 그리고 물론 이 추상의 모든 운동은 “대논리학”을 추상적인 것으로부터 구체적인 것으로 데려다 준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헤겔적 사고과정(Denkprozess) 내에서 개념들의 출현 방식(mode), 이 개념들의 결정요소들의 출현 방식 그리고 그 변형의 출현 방식이 (헤겔이 원했듯) ‘선험적으로’ ‘절대적 방법’에 의해, ‘부정의 부정’에 의해, 지양(Aufhebung)에 의해 지배되고 명령받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하지만 (‘생산’에 관한 차이가 아니라 ‘구축’에 관한 차이일) 이러한 차이라는 유보조건 속에서, 우리는 추상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것으로의 이 유일한 운동만이 마르크스의 사유에 대한 질문을 해결해주고 마르크스를 헤겔로부터 구분해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뒤메닐은 매우 강력한 몇 가지 테제들을 옹호한다. 나는, 개념들의 자기생산(autoproduction)을 통해 전개되는 대신, 마르크스의 사고가 개념의 위치에 의해 열리고 닫히는 이론적 공간에 대한 탐험(분석)을 개시함으로써, 오히려 이 개념의 위치를 통해, 그리고 그 이후에는 어느 한 새로운 개념의 위치를 통해 (등등) 이론적 장을 확장시키면서 계속 앞으로 나아가 하나의 극한적인 구조적 복합체의 이론적 장들을 구성하는 데에 이르기까지 전개된다고 말함으로써, 뒤메닐의 사고의 핵심을 잘못 표현하지는 않기를 바란다.
뒤메닐의 이러한 관점의 이점은 마르크스에게서 존재하는 다음과 같은 끈질긴 요구들을 명료하고 체계적으로 표현한다는 점이다. 우선 ‘법칙들’의 내부성이라는 특징. 뒤메닐은 이 ‘법칙들’의 내부성이라는 주제가 마르크스에게서 일반적인 경험주의적이고 합리주의적인 함의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관념을 대담하게 옹호한다. 뒤메닐에 따르면, 내부성은 외양(apparences)에 대립되는 본질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개념 혹은 하나의 이론적 장의 내부성에 결정요소들이 속한다는 점을 지시한다. 엄밀하게도, 설명/서술의 각 계기마다 마르크스는 “자본”에서 하나의 개념 혹은 심지어는 고려된 하나의 ‘현상적 총체성’으로부터 기존 이론적 장의 내부성 안에서 기입될 수 있는 바 이외에는 그 무엇도 취하지 않는다. 장으로부터 배제된 결정요소와 관련해 마르크스가 다음과 같이 말하듯이 말이다. “이 결정요소는 우리 논의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 없다.” 바로 이 배제된 결정요소가 이론적 내부성을 이론적 외부성으로부터 구분해준다.
그러므로 내부성에 대한 이러한 정의(뒤메닐은 “자본” 3권에서 마르크스가 제시한 ‘법칙’에 대한 하나의 정의로부터 출발한다. “두 가지 사물/사태 사이의 내적이고 필연적인 연결connexion(…).”)는 외부성에 대한 하나의 상관적 정의를 도출한다. 현상적 외양 -내부적 본질로서의 현상적 외양- 이라는 정의가 아니라, 이 현상적 외양이라는 정의와 일치하지 않는 또 하나의 ‘다른 논리적 총체성’이라는 정의를. 그러므로, 이 예만을 취해 논의해 보자면, 교환가치(혹은 가치)는 “자본”을 출발하게 해주는 ‘근본적인’ 이론적 장에 속하지만, 사용가치(상품의 ‘또 다른 측면’)는, 비록 이 사용가치가 가치의 물질적 ‘지지물’(support)이라는 점에서 상품을 사고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또 하나의 다른 이론적 장, 즉 유용성을 가진 생산물들의 물리적이고 생물학적인 속성들을 연구하는 이론적 장에 속한다. 그러므로 각각의 ‘논리적 총체성’은 자율적인 것이다[그래서 가치와 사용가치는 모순적이지 않은 것이다].
내부성과 외부성에 관한 뒤메닐의 이 테제들은 추상(화)에 대한 그의 해석에 모든 생명력[즉 근거]을 부여해준다. 우리는 ‘경제학’이라는, 자연과학의 도구들(현미경 등등)을 활용하지 않는 이론이 취할 수 있는 사고를 위한 유일한 ‘도구’가 추상이라고 마르크스가 집요하게 주장할 때 그것이 어떠한 문제들을 제기하게 되는지 알고 있다. 또한 우리는 어떻게 마르크스가 추상 속에서 하나의 허약한 형태만을 보았던 이들과 논쟁해 왔는지 알고 있다.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치로부터 독립적인 하나의 존재의 도래를 하나의 순수한 추상으로 간주하는 이들은 산업자본주의의 운동이 바로 현행적인(in actu) 추상 그 자체라는 점을 망각하고 있다.” 이에 대해 뒤메닐은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최초로, 한 명의 경제학자[즉 마르크스]가 추상을 인식의 원리로 전제하고 이론적 장의 점진적인 정교한 구성(élaboration)에 대한 의식 그 자체 위에 기초해 있는 하나의 체계를 구축한다.” 이는 “자본”에서 이론적 추상이 독자적(singuliers) 대상들에 대한 그 어떠한 일반성의 추출(prélèvement)도 포함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의 객관적 추상에 관해 성찰함으로써, 이론적 추상은 배제를 통해 자신의 사고를 스스로 구성한다. 만일 마르크스가 추상 내에서 사고한다면, 그리고 이 추상의 과정이 ‘구체화’의 과정이라면, 이는 마르크스가 추상을 통해 사고하기 때문이며, 개념의 각 위치가, 그러니까 ‘내부적인’ 이론적 장의 각 열림이 동시에 외부에 대한 배제, 그러니까 장의 닫힘이기 때문이다. 장의 열림은 장의 닫힘과 상관적이며, 장의 닫힘은 각 계기마다 외부를 추상한다(faire abstraction de)는 점을 함의한다.
그 자체 제한된 장 내에서 옹호되는 이 테제들은 나에게 매우 강력해 보이는데[즉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왜냐하면 이 테제들은 헤겔적 방식의 개념에 대한 (그리고 더욱 강력하게는 개념에 의한 현실적인 것의) 자기생산의 모든 외양을 배제하며, 또한 이 테제들은 핵심적 개념들 -이 핵심적 개념들 주위에서 개념적 장의 구성과 탐구가 자신의 다양한 결합들 속에서 조직된다- 의 설명/서술의 계기에서의 개입, 즉 위치를 사고하도록 강제하기 때문이다. “자본”의 전개 전체를 지배하는 가치 개념(‘최초의 토대’), 자본 개념, 자본주의적 생산 개념과 같은 핵심 개념들 말이다. 그런데 개념들의 위치를 말하는 이에게는 개념들의 자기생산으로서의 ‘이성/이유들의 질서’ 내에서 이 개념들이 출현한다는 식으로 사고하는 것이 금지된다. 설명/서술 순서의 외양적 연속성은 핵심 개념들의 위치에 의해 구획지어진 이론적 불연속성을 숨기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뒤메닐의 텍스트에서 가치를 잉여가치로 연장하기 위해 ‘상품생산’의 가치를 수량적으로 변이시키는 작동(jeu de variation quantitative)을 수행하고자 하는 유혹에도 불구하고 상품이라는 개념으로부터 자본이라는 개념을 연역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성하다는 점을 명확히 읽을 수 있다. 게다가 마르크스는 심지어 “그룬트리세”에서 이를 매우 강력히 말한다. “잉여가치는 아주 단순히 그 등가물 너머에 존재하는 가치이다. 등가물은 정의상 단지 가치의 자기 자신과의 동일성일 뿐이다. 그러므로 잉여가치는 등가물로부터 출현할 수 없으며, 따라서 유통/순환(circulation)의 기원에 있는 것도 아니다. 잉여가치는 자본 그 자체의 생산과정으로부터 돌발(surgir)해야만 한다.” 설명/서술의 순서가 [그릇되게도] 개념의 자기생산 혹은 자기연역을 믿도록 만들 수 있는 지점에서, 뒤메닐은 하나의 새로운 [이론적] 공간을 열어주는 하나의 개념의 위치를 발견해 우리에게 제시한다.
하지만 이러한 개념의 위치는 하나의 새로운 [이론적] 공간을 열자마자 이 공간을 닫아버린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유한한 특징을 지닌다는 이러한 테제를 강력한 근거들을 통해 옹호하는 것은 이러한 뒤메닐의 분석의 매우 중요한 결과들 중 하나이다[‘옹호하다’는 défendre를 옮긴 것으로, 원문에는 détendre로 잘못 쓰여있다]. 여기에서 레닌의 다음과 같은 정식이 뒤메닐의 분석의 핵심을 드러낸다. 마르크스는 우리에게 [몇 개의] “초석들”을 제시했을 뿐이다… 여기에 우리는 ‘하나의 유한한 이론적 공간’의 초석들이라고 덧붙여야 한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그 자체로 보편적인 것이 아니며, 사회적이고 인간적인 ‘사실들’의 장 내에서 주어진 모든 현상으로 자의적으로 확장 가능한 것도 아니다. 우리는 각각의 경우마다 근거들을 가지고서(sur pièces)[즉 각 상황에 맞게 구체적이고 입체적으로 분석하여] 이를 판단해야 한다. 자, 바로 이것이 아마도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이 이론이 자신의 고유한 장으로부터 배제하는 혹은 이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그 운명을 침묵 속으로 유보해두는 대상들에까지 권위적으로 확장하는 모험에 뛰어들고자 하는 형이상학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의욕을 꺾어버리는 지점일 것이다.
과연 우리는 뒤메닐의 이러한 증명에서 무엇을 취해야 하는가? 바로, 지속적으로 ‘그 비율이 조절’(dosée)되고 통제되며 규정된 개념들의 위치와 상관적인 그러한 하나의 추상을 통해 마르크스가 사고를 위해 ‘의식적으로’ 취하는 방식에 대한 매우 명료하고 분명한 특정한 하나의 표상을 취해야 한다. 자신 가까이 접근해 있는 유혹을 매우 잘 인지하고 있는 뒤메닐은 이 책의 어딘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치경제학은 하나의 공리계(axiomatique)가 아니다.” 분명 여기에서 뒤메닐은 이데올로기적 개념화의 의미에서의 공리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연속적으로 도출되는 결과들을 순수한 가설을 통해 ‘탐험’하기 위해 혹은 결론/결과의 효과들을 생산하기 위해 자신의 개념을 전제하거나 덧붙이는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자의적인 변이들(variations)에도, (단순한 학문적 즐거움을 위해) 현상적 총체성의 ‘이해’(appréhension)에도 빠져들지 않는다. 명백히 마르크스의 설명/서술은 자신이 활용함에도 드러나지 않는 ‘연구/탐구 방법’을 통해 발견한, 무대의 바깥에 존재하는 거대한 현실에 의해 인도된다. 가치라는 그의 최초의 추상이 “산업자본주의의 운동의 현행적 추상”에 의해 지지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하지만 추상 속에서 현실적인 것을 ‘재생산’한다는 이러한 유물론적 테제가 원리적으로 그 위에 기초해 있는 이러한 한계들 내에서, 개념의 위치, 이론적 장의 열림-닫힘 효과, 하나의 외부를 배제하는 하나의 내부(이 외부와 내부는 이론 내에서 서로 독립적인 두 가지 ‘논리적 총체성들’이다)에 의해 구성되는 장의 유한한 자율성, 하나의 새로운 개념 -이 하나의 새로운 개념은 다수의 변이들과 교차들, 그리고 심지어는 법칙들의 ‘발현’(manifestation)과 이 법칙들의 ‘실현’(이 법칙들의 ‘실현’이 역사적 변화들을 개입하도록 만든다)의 무한히 복잡한 분석에 이르기까지 이를 가능케 함으로써 이론적 장의 의미와 한계에 영향을 미친다- 의 위치에 의한 장의 변형, 이 모든 것은 설명/서술이라는 형태 내에서 공리계적 사고와 매우 가까운 하나의 사고방식을 필연적으로 떠올리게 만든다. 뒤메닐을 읽고 나면, 형식적으로 마르크스의 “자본”에서는 (설명/서술의 각 계기마다 이론적 장을 결정하는, 다시 말해 이론적 장을 열고 닫는) 그러한 전제된 개념들을 통한 ‘의식적’ 통제 하에서 조금씩 조금씩 전개되는 것 이외에는 그 무엇도 전개되는 것이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자본”의 사고과정(Denkprozess)일 것이다.
게다가 자신의 이러한 관점으로부터 뒤메닐은, [“자본”에 관한 다른 주석가들의] 유명한 개념화들과 해석들과 관련해, 자신만의 흥미로운 이론적 결과들/결론들을 이끌어냈다. 뒤메닐은 어떠한 방식으로 이러한 이론적 결과들/결론들을 도출해 냈는가? 뒤메닐은 “자본” 그 자체에 자신이 “자본”에서 발견한 사고의 논리를 적용하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이러한 단순한 적용은, 장의 넓이와 한계에 따라, 초과들(excès) 혹은 결여들(défauts)을, 다시 말해 “자본”에 기입될 수 없는 몇 가지 테제들[즉 ‘초과들’]을 혹은 “자본”에서 자신들의 자리를 이미 차지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누락되어버린 몇 가지 이론적 전개들[즉 ‘결여들’]을 나타나도록 만든다. 바로 이를 통해 뒤메닐은 엥겔스가 (그 절반은 포기해버리기 전에) 다시 취했었던 ‘임금철칙’에 반대하여, 그리고 ‘절대적 궁핍화의 법칙’ 혹은 심지어는 ‘상대적 궁핍화의 법칙’에 반대하여, 과소소비가 위기의 ‘원인’이라는 관념 등에 반대하여 자신의 주장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를 통해 뒤메닐은 주목할 만한 하나의 부재, 즉 이윤율의 결정에 있어서 자본의 회전이 수행하는 역할 등을 발견하고 이에 대해 논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른 지점들에서 뒤메닐은 번역상의 중대한 여러 오류들을 명확히 바로잡을 수 있었고, (예를 들어 상품경제적 경쟁과 자본주의적 경쟁 사이의 차이와 같은) 몇몇 차이들을 우리가 명확히 인식할 수 있게 해주었으며, 또한 마르크스가 행했던 Form, Gestalt 그리고 Gestaltung 사이의 구별 등과 같은 구분들의 이론적 생산성[즉 이론적인 중대한 의미]을 강조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뒤메닐은 마르크스의 사유에 그 무엇도 덧붙이지 않으면서 그의 사유를 더욱 가까이에서 통제(contrôler)하는 것에, 특히 우리들이 마르크스로부터 빌려오는 사고들을 통제하는 것에 만족한다[각주:25]. 왜냐하면 뒤메닐은 마르크스가 자신의 사고과정(Denkprozess) 내에서 자기 스스로 취했던 사유형태 위에서(sur) 자신의 논의를 전개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뒤메닐은 “자본”의 결정요소들이 상품, 자본 그리고 자본주의적 생산이라는 세 가지 거대한 개념들에 의해 정의된 개념적 장의 내부성에 속하는 한에서만 “자본”에서의 [이론적] 계급투쟁에 대해 마르크스가 언급했다는 점을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뒤메닐은 자신이 다음과 같이 예상하듯, 만일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국가에 관해 언급했다면, 이는 ‘필연적으로’ 바로 이 동일한 한계 내에서 행해진 언급[즉 이 동일한 한계 내에서의 ‘국가’에 관한 이론적 전개]이었을 것이라는 점을 그 어떠한 주저함 없이 확신했다.
***
당연히 뒤메닐이 주장하는 이러한 테제들의 급진적 성격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들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뒤메닐 또한 자신의 테제들이 이 문제들을 제기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으므로] 이 문제들을 제기함으로써 내가 뒤메닐을 놀라게 하는 것은 전혀 아닐 것이다. 뒤메닐의 테제들은 이 테제들 자신의 방식으로 하나의 관념을, 즉 우리가 취할 수밖에 없도록 느린 속도이지만 조금씩 조금씩 강제된, 그리고 “자본”은 이 “자본”이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통일성‘만’을 취하는 것도 아니며 심지어 이 통일성을 ‘정확히’ 취하는 것도 아니라는 역설적 형태를 취하는 하나의 관념을 우리가 강하게 가지도록 만든다[각주:26][각주:27].
“자본”을 시작하면서부터 마르크스가 그 설명/서술에 가능한 가장 통일적이고 동질적인 하나의 형태를 부여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 마르크스는 매순간마다 자신의 길을 열고 이 길에 이정표를 세웠으며 자신이 탐험하는 이론적 장의 한계를 끊임없이 통제했다는 점, 그래서 이 장 내부에서 연구/탐구와 설명/서술은 극한적인 경우에는(à la limite) 하나로 통일될 수 있었다는 점, 이는 거의 확실하다. 마르크스 스스로가 (뒤메닐에 따르면 ‘의식적으로’) 이러한 통일성을 ‘“자본”의 방법’이라는 범주들 하에서 혹은 ‘분석적 방법’과 ‘변증법적 방법’이라는 범주들 하에서 성찰했다는 점을 우리는 마르크스의 선언들로부터 파악할 수 있다[각주:28]. 마르크스가 이러한 ‘방법’을 ‘사고과정’(Denkprozess)이라는 특정한 하나의 관념과, 다시 말해 참을 사고하기 위해 필요불가결한 특정한 하나의 사고 기준(norme)과 결합했다는 점, 그래서 이를 통해 (뒤메닐이 주장하듯) 마르크스가 인식에 관한 ‘정관사’(la) 이론이라는 특정한 하나의 관념을 스스로 형성해 가지게 되었다는 점, 이는 1857년 ‘서문’과 “자본”의 1873년 ‘후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거의 확실한 것이다. 사고과정(Denkprozess)이라는 이러한 관념이 “자본”의 설명/서술의 통일성의 보증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는 점, 이는 가능한 것이며 그럴듯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 산출하는 그 효과들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나는 “자본”의 효과로 인정하기에는 “자본”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간접적인 사이비-효과들, 레닌이 “변증법은 (헤겔의,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의 인식론이다”라고 말할 때 우리가 레닌에게서 인지할 수 있는 바와 같은 사이비-효과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 전혀 아니며, 대신 나는 “자본” 그 자체에서 관찰 가능한 [객관적인] 효과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토록 많은 시도들과 경험들/실험들 이후에 우리는, “자본”의 사고과정(Denkprozess)의 통일성, “자본”의 설명/서술 순서의 통일성이 자기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바와 같이 통일적인 것이 전혀 아니며 대신 두드러지게 불균등(inégale)하고 비통일적(disparate)이라고 생각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다. 나는 ‘두드러지게’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불균등성이 하나의 의미를, 그것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에는 분명 하나의 설명/서술 순서가, (이 설명/서술 순서라는 이러한 통일성을 뒤메닐과 같이 개념들의 위치position와 구조화composition에 의해 구성되는 것으로 이해한다는 조건에서) 주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가시적이고 인상적인, 하나의 동질적인 설명/서술 순서가 존재한다. 가치로부터 자본으로, 자본주의적 생산으로, 그리고 “자본” 3권의 ‘구체적인’ 범주들까지로 이어지는 하나의 설명/서술 순서가 말이다. 하지만 이와 함께, 그리고 간접적으로, 여기에는 또한 여러 번에 걸쳐 첫 번째 설명/서술 순서에 개입하고 이를 관통하는 다른 ‘서술/설명 순서들’이, 불규칙적으로 “자본”의 다른 장들 사이로 개입하며 완성되지도 않은 상태로 남아 있지만 굉장한 중요성을 지니는 장들이 존재하며, 바로 여기에 또 하나의 완전히 다른 ‘분석’이, (마치 ‘이론’이 인정된, 확인 가능한 그리고 완성된 하나의 형태만을 가질 수 있다는 듯) 편이를 위해 사람들이 주요 순서의 진정으로 ‘이론적인’ 분석에 대립되는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분석이라고 불렀던 그러한 분석이 개입해 들어온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편리함에 머무를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분석들은 또한 하나의 ‘이론적’ 가치를 지니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비록 이 분석들이 주요 설명/서술 순서와의 통일성에 있어 문제를 일으키긴 하지만 말이다. 역설적이면서도 동시에 끈질기게 존재하는 이러한 통일성 그 자체의 다양성과 의미를 고려해야만 한다. 이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론’이 필연적으로 자신 주위에 그리는 원환에 사로잡히게 될 것인데, 왜냐하면 ‘이론’ 그 자체로서 ‘이론’으로 존재하기 위해, ‘이론’은 (자신의 한계 내에서) 열려 있는 동시에 닫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명민하게도 뒤메닐은 이 한계를 우리에게 끊임없이 지시하며 마르크스가 이 한계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예를 들어 이론적인 것의 한계라는 것이 존재한다. 이론적인 것을 넘어서면, 그곳에는 이론화할 수 없는 것만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사용가치로부터 노동의 생산성과 계급투쟁으로 이어지는 (이론-)내부적인 것과 그 ‘외부’ 사이의 한계가 존재한다! 어떤 경우이든 간에, 우리는 주요 설명/서술 순서의 한계와 부딪히게 되는데, 왜냐하면 이 한계는 이 개념들의 위치라는 사실(fait), 다시 말해 최종적인 수준에서 마르크스로 하여금 가치 개념을 통해 그 설명/서술 순서의 이론적 장을 열 수밖에 없도록 강제했던 우연성을 통해 장을 열고 닫는 개념들의 기능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열려진 모든 길은 한계를, 그러니까 ‘외부’를 정의한다. 이 ‘외부’가 또한 “자본” 내에도 존재한다는 것, 이는 (이 “자본”을 지지하기 위해 그 순서를 관통하고 그 순서에 개입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순서에 관해서 만큼이나 그 닫힘에 관해서도, 그 우연성에 관해서도, 그러니까 또한 그 의미/방향에 관해서도 우리의 인식을 위해 빛을 밝혀준다.
그러므로 “자본”의 통일성이 두드러지게 불균등하다는 점은 왜 마르크스가 “자본” 내에 사람들이 말하듯 ‘노동일’에 관한 분석들 -매뉴팩처와 기계제를 다루기 위해 ‘피와 땀’을 흘려가며 집필했던 장- 을, 본원적 축적 등에 관한 놀라운 8편을, 그러니까 우리가 ‘구체적 역사’라고 부르는 바가 분석 속에서 난입하는 그러한 모든 장들과 페이지들을 ‘내삽’(injecté)했는지 그 이유를 진지하게 사고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우리는 이 ‘외부’가 ‘내부’와 독특한 방식으로(singulièrement) 교통한다는 점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리고 만일 애초에 마르크스 자신이 이러한 교통을 명료하게 사고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마르크스 자신에게 강제되었던 설명/서술 순서에 의해 생산된 외부성의 효과 이외의 다른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있겠는가? 더 정확히 말해, 그토록 독특한 이 ‘외부적’ 설명/서술의 형태들에서부터 출발해, 우리는 분석 그 자체의 내부에서 까지, 다른 무엇보다도, 이 이상한 이론적 ‘중핵’(이 이론적 ‘중핵’을 지배하면서 동시에 감추는 1편의 개념들로 환원됨과 동시에 환원될 수 없는), 즉 노동력과 그 재생산에 관한 ‘이론’을 인지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결정적인 지점에서(왜냐하면 이 결정적인 지점에 대한 해석에 자본주의적 착취에 관한 이론 전체가 의존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뒤메닐의 언어를 다시 취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에서 노동력에 관한 ‘이론’은 이 ‘이론’이 그 한계 내에, 다시 말해 고려된 이론적 장의 개념들 아래에 속하는 한에서만 존재한다. 이 경우 이 개념들이란 가치를, 그러니까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상품[즉 노동력 상품]과 같이 자신의 가치(=그 재생산을 위해 필수적인 상품들의 가치)에 따라 지불된 상품을 뜻한다. 이 지점에서 멈춰섬으로써, 다시 말해 마르크스는 여기에서 자신이 쓰는 것 이외에는 그 무엇도 자신의 머릿 속에 가지고 있지 않다고 [그릇되게] 믿음으로써, 우리는 착취에 관한 완전한 하나의 이론을 위해 잉여가치에 관한 (필연적으로 회계학적일 수밖에 없는) 제시/표현(présentation)을 취할 위험에 빠지게 된다. 사태를 더욱 명료히 표현하기 위해 다르게 말하자면, 우리는 노동 조건들(첫 번째 ‘외부’)과 노동력 재생산의 조건들(두 번째 ‘외부’)을 ‘외부’[즉 바깥]에 유기해 놓음으로써 착취를 잉여가치의 단순한 공제(décompte)[즉 감산]로 환원할 위험에 빠지게 된다(그런데 이 노동력이라는 상품은 다른 상품들처럼 생산되고 소비될 수 없으며, 임금철칙을 둘러싼 논쟁에서 마르크스가 충분히 제대로 보여주었듯이 계급투쟁, 즉 세 번째 ‘외부’의 일부분이자 그 쟁점이다).[각주:29]
그러므로 “자본” 내에(dans) ‘외부’가 존재한다는 점에 놀랄 필요가 전혀 없다. 설명/서술 순서를 관통하고 초과하는 이 장들과 같은 유형 내에서, ‘외부’는 ‘정치경제학 비판’의 기획에 있어 필요불가결한 하나의 이론적 요소로 개입한다. 마르크스가 그 이론적 제약들을 수용했던 설명/서술 순서가 작동시키는 ‘환원’(réduction)의 의미/방향을 증거하기 위해서, 이러한 ‘환원’의 엄격하게 규정된 공간 내에서 행해진 분석의 현실적인 유효범위를 증거하고 이를 통해 그 필연적 ‘한계’를 초월/지양(dépasser)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 의미/방향이 일단 인정되고 나면, 이 다양한 설명/서술 순서들의 공존이 형성하는 통일성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이 문제는 마르크스의 [연구/탐구의] 시작점이 내포하는 우연성과 그 ‘방법’에 관련된 또 다른 질문이다.
바로 이것이 “자본” 내에서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바로서의, 그리고 스스로에게 강제하기를 원하는 바로서의 주요 설명/서술 순서 그 자체의 통일성과 관련된 문제이다. 그 시작의 명증성에 정초해 있는 강한 의미에서의 하나의 질서, 그리고 상품 혹은 가치라는 ‘가장 단순한 결정요소’의 명증성을 확정적으로 지니고 있는 하나의 시작점. “자본” 1편 전체는 (시작점에 필요불가결한 명증성, 다시 말해 이론의 토대에 필요불가결한 명증성에서부터와 같이) 단순한 것과 이 단순한 것이 차지하는 동질적 공간에서부터 시작해야만 한다는 요구에 지배되어 있다. 시작에 대한 특정한 하나의 관념 하에서 이러한 방식으로 마르크스가 자신의 작업을 시작했다는 점, 이러한 방식으로 마르크스가 시작해야만 했다는 점, 이는 명증성들에 반하여 그리고 동시에 명증성들 하에서 자신을 증명하고 싶어하는 하나의 발견(이 하나의 발견은 명증성들과 단절한다)에 대한 주장들, 쟁점들 그리고 활용들이 개입하는 지점인 하나의 우연성의 필연성을 표현하는 하나의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마르크스가 이 “자본” 1편에 이 1편이 가져야만 하는 명확한/정의적(définitif) 특징을 부여하기 위해 그토록 여러 번 이를 다시 집필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우리는, 자신의 이론과 같은 하나의 혁명적 이론을 개시하는 분리(arrachement)[즉 떨어져 나옴]를 한 과학의 설명/서술에 하나의 절대적 시작점을 부여해야 한다는 요구와 혼동해 “모든 과학에 있어 시작은 어렵다”라고 말함으로써, 왜 마르크스가 자신이 마주했던 난점을 [과학 일반에서는 다들 그러한 것처럼] 일반화시켜 이를 [자신이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영역으로] 전가시켰는지 이해하게 된다. 그러므로 마르크스가 자신의 기획을 정초하는데 고유한 전형적인 사고과정(Denkprozess)과 하나의 ‘방법’의 철학적 보증물을 무대의 뒤편에서(à la cantonade) [남몰래] 활용했던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닌 것이다. 일단 이러한 보증물의 역할을 우리가 인지하게 되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보증물이 대체하고 은폐해야만 하는 현실적 난점들이 무엇인지 질문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난점들이 바로 [이미 위에서 지적했던] 명증성들이다. 다시 말해 ‘가장 단순한 결정요소’의 명증성, 이 명증성에서부터 시작해야만 한다는 명증성.
왜냐하면, 이러한 명증성을 자신의 보증물로 강제하는 관념 바깥에서는, 그리고 이 명증성에 대한 취급(traitement)이 생산하는 관찰 가능한 효과들(즉 다른 설명/서술 순서들에 의해 관통되고 초과된 하나의 설명/서술 순서가 도달한 결과들) 바깥에서는, 도대체 누가 우리에게 [굳이] 이러한 명증성에서부터 시작하도록, 다시 말해 단순한 것과 이 단순한 것의 동질적 공간에서부터 시작하도록 강제하겠는가? 이는 [내가 자의적으로 설정하는] 상상적 변형/왜곡(variation imaginaire)이 전혀 아니다. 우리는 마르크스 안에서 시작에 대한 주저함의 흔적을, 그리고 명증성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자신의 의무에 대한 의심의 이유들을 발견한다. 예를 들어, 루트비히 쿠겔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마르크스가 ‘가치법칙’을 재생산의 관점에서 정의하고 이 ‘가치법칙’을 ‘어린 아이에게조차’ 접근 가능한 것이라고 말할 때 그렇다. 마찬가지로 예를 들어, ‘아돌프 바그너의 정치경제학 교과서에 대한 난외주석’에서 “상품들의 교환법칙은 (…) 상품이 복수형으로 말해질 수 있을 때에만, 즉 서로 다른 여러 종류의 상품들이 이미 존재할 때에만 존재한다(…)”[각주:30]고 쓸 때, 그러니까 상품이 가치로 환원되지 않는 사회적 관계라는 점을 강조할 때 그렇다[각주:31]. 아마도 우리는 이에 더해 사물/사태를 ‘취’(prendre)하는, 그러니까 분석을 다시 취하는(reprendre)[즉 개시하는] 하나의 방식 혹은 다른 여러 방식들을 제안하는 지표들을 조금 더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단순한 것에서부터’가 아니라 특정한 하나의 복잡성(complexité)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생산적일 것이라는 관념, 즉 이 관념이 의존하고 있는 관념에 반작용을 통해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관념, 시작이라는 관념, 그리고 단순한 것의 동질성을 체현하는 개념으로서의 가치.[각주:32]
***
분명 나는, 뒤메닐의 테제들과 평행하는 나의 이런 단순한 비판적 언급들에 기반해, “자본”에 자신의 진정한 또 하나의 다른 ‘설명/서술 순서’를 우리가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마르크스의 작업은 그 자체로서 이미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바로 마르크스의 작업이 설정한 의도적 한계가 우리로 하여금 그 유효범위를 지각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에게 주어진 과업은, (100년도 더 전에) ‘이론’으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사유가 스스로에게 부여해야만 했던 형식적 통일성을 함축함과 동시에 초과하는 이 하나의 사유가 지니는 힘들을 인지하고 재결합하며 해방시키기 위해, 이 한계의 이론적 선-전제들을 통해 “자본”의 설명/서술 순서의 통일성과 불균등성 내에 기입된 난점들을 인지하고 이와 대면하는 것이다.
이 난점들과 대면하는 것, 이는 마르크스의 사유형태들이 지니는 우연성의 필연성이라는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결국 이는 필연적으로 마르크스의 사유를 우리의 시대와 연결시키고 이를 통해 이 사유를 현재적인 것으로 만드는 시도와 다름없다. [끝]
- 옮긴이 주: 편집자 주의 경우 한국어 독자들에게 불필요한 프랑스어판 쪽수 등은 생략했다. [본문으로]
- 편집자 주: 이는 에티엔 발리바르(Étienne Balibar)의 저서이다. [본문으로]
- 편집자 주: “(자기 자신 안에 이미 모든 해답을 지니고 있을 것이라 가정하고) “자본”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명백히 더 이상 충분하지 않으며, “자본”에 그 물질/재료와 경제를 되돌려주기 위해 “자본”의 몇몇 명증성들에 관해 다시 질문해보아야만 하는 이 시기에”. [본문으로]
- 옮긴이 주: 여기에서 알튀세르는 “마르크스를 위하여”와 “‘자본’을 읽자”라는 작업이 이론주의에 빠져있었다는 점을 지적하는데, 이는 이 텍스트를 집필할 시기에 그가 자신의 이론주의를 강력하게 자기비판했기 때문이다. “알튀세르의 철학적 유산”, 공감, 2008에 실린 ‘알튀세르의 철학적 궤도’(박상현)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 옮긴이 주: ‘이성/이유의 질서’는 ordre des raisons을 옮긴 것인데, 프랑스어 ordre에는 ‘질서’와 ‘순서’라는 의미가 모두 들어있다. 사실 이 표현은 데카르트의 것으로 ‘근거들의 질서’로 번역하는 것이 관례이지만, 알튀세르가 데카르트의 표현을 가져오면서도 이를 “자본”의 설명/서술과 관련짓기 때문에 조금 다르게 옮겨 보았다. 하지만 “자본”의 설명/서술과 관련해서는 ‘순서’로 통일해 옮긴다. 그리고 이미 위에서 지적했듯 ‘방식’은 mode를 옮긴 것이다. [본문으로]
- 알튀세르 주: Cf. Marx-Engels, Werke, Berlin, Dietz, 23권, p. 18 이하. 내가 직접 번역했다. 마르크스가 전체를 ‘검토’했던 조제프 루아(Joseph Roy) 판본의 “자본”은 부정확하고 빠진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루아 판본’은 프랑스 공산당 소속 출판사인 에디시옹 소시알이 출간한 판본이다. ‘루아 판본’ 이후, 확정적인 독일어 판본에 기반한 “자본” 1권의 새로운 번역이 장-피에르 르페브르Jean-Pierre Lefebvre의 책임지도 하에 번역되었다. Le Capital, 1권, Paris, PUF, “Quadrige” 총서, 1993. (마르크스의 이 문장은 이 번역본의 p. 17에 등장한다. - 편집자) [본문으로]
- 편집자 주: Introduction à la critique de l’économie politique (1857). [본문으로]
- 편집자 주: 알튀세르는 마르크스가 이 ‘후기’에서 인용했던 어느 한 비판가를 암시하고 있다. [본문으로]
- 편집자 주: ‘후기’. [본문으로]
- 옮긴이 주: 여기에서 ‘사고과정’은 procès de pensée를 옮긴 것이고, 독일어 원어는 알튀세르가 병기한 것이다. 그래서 이 ‘사고과정’에는 강조표시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본문으로]
- 알튀세르의 주: “마르크스를 위하여”와 “‘자본’을 읽자”에서. [본문으로]
- 편집자 주: “… 사고과정(Denkprozess)에 관한 특정한 하나의 관념과 방법에 관한 특정한 하나의 관념은 그 자체로 자신들의 양태의 ‘전도’를 위한 축으로 사용될 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해, 이 두 가지 관념은 마르크스가 선언하는 ‘전도’의 형태 그 자체를 지배한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 관념은 건드릴 수 없는 선-전제들의 결정들(déterminations) 속에서 마르크스가 취한 입장을 개시하면서 동시에 훼손하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 편집자 주: “결국 마르크스 자신이, 그 모든 주저함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후기’에 이 단어들을 써넣기 전에 이 단어들을 진지하게 취급하지 않았던가.” [본문으로]
- 편집자 주: Science de la logique (Wissenschaft der Logik), Berlin 1927. [본문으로]
- 알튀세르의 주: Cahiers sur la dialectique, Paris, E.S., p. 280 (“Sur la question de la dialectique”, in Lénine, Cahiers philosophiques, Paris / Moscou, E.S. / Éditions du Progrès, 1973, pp. 344-345. - 편집자). [본문으로]
- 편집자 주: Sur la question de la dialectique. [본문으로]
- 편집자 주: Résumé de la Science de la logique de Hegel, in Cahiers philosophiques. [본문으로]
- 옮긴이 주: 절벽 낭떠러지에서 아래를 바라보면 현기증을 느끼듯, 사람은 너무 깊은 심연을 보게 되면 현기증을 느낀다. 여기에서는 레닌의 깊고 깊은 무지 혹은 결여, 즉 심연 때문에 그가 이렇게 현기증을 느끼고 있다, 혹은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본문으로]
- 편집자 주: 삭제된 단락은 다음과 같다. “사실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가 “자본”의 독일어 2판 ‘후기’에서 언급하는 ‘방법’이다. 마르크스 자신의 용어를 그대로 가져오자면, 마르크스는 (너무 성공적이었던 이 사고과정Denkprozess이 역설적으로 생산해낸 놀라운 사변적 허상 때문에) ““자본”의 방법은 거의 이해되지 못했다”라고 말한다. [본문으로]
- 옮긴이 주: ‘과정을 진행해 나간다’로 의역한 동사는 procéder로, 그 명사형이 processus 혹은 procès, 즉 ‘과정’이다. [본문으로]
- 편집자 주: Introduction à la Critique de l’économie politique (1857). [본문으로]
- 편집자 주: 같은 책. [본문으로]
- 편집자 주: 같은 책. [본문으로]
- 옮긴이 주: n’importe quoi는 영어로 anything, quelque chose는 영어로 something이다. 고슈가리언은 n’importe quoi를 no matter what으로, quelque chose를 something or the other로 번역했다. [본문으로]
- 옮긴이 주: contrôler는 ‘통제’ 이외에도 ‘관리’라는 뜻이 있으며, 일상에서는 ‘체크’라는 의미로 쓰인다. 그래서 프랑스에서는 중간평가와 기말평가에서 ‘평가’를 contrôle이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한국어로는 위의 문장이 조금 어색하지만, 독자들은 이 contrôler라는 단어에 ‘통제하다’, ‘관리하다’, ‘체크하다’라는 뜻이 모두 들어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이 문장의 의미를 조금은 더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으로]
- 옮긴이 주: ‘만’과 ‘정확히’의 따옴표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옮긴이가 넣은 것이다. [본문으로]
- 편집자 주: 초고에서 이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뒤메닐의 테제들이 지니는 급진성은 하나의 문제를 지각하게 해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미 존재하고 있는 오래된 하나의 관념을 강화시켜준다. 그런데 이 문제는 아마도 이러한 해석보다는 사고의 형태, 다시 말해 마르크스가 “자본”에, 그리고 “자본”을 통해 그 독자들에게 부여해야만 했던(그리고 부여해야만 한다고 믿었던) 통일성의 형태, 즉 마르크스가 의식적으로든 아니든 사고과정(Denkprozess)을 통해 스스로 형성해 가지게 되었던 ‘관념’과 관계된 하나의 통일성의 형태에 관한 문제일 것이다.” [본문으로]
- 편집자 주: “우리는 이 지점에서 마르크스가 우리에게 (단순한 것에서부터의 순수한 시작과 이를 전개하는 데에 적절한 정관사la 방법 사이의 결합 내에서) 자신의 철학적 ‘자기 의식’의 내용, 그러니까 마르크스가 참된 사고과정(Denkprozess), 제대로 형성된 하나의 인식을 통해 그 자신의 중심에서 암묵적인 것으로 남아 있는 마르크스 자신의 ‘인식론’(뒤메닐의 용어를 다시 차용하자면)을 만든다는 관념이라는 내용을 제시한다고 믿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1857년 ‘서문’의 선언뿐만 아니라 1873년 ‘후기’의 사후적인 성찰 또한 우리의 이러한 믿음에 그 근거를 제공한다. 이 1857년의 선언과 1873년의 성찰은 1867년의 “자본”을 양자 사이에 너무나도 잘 고정시켜버린다. 그리고 이 1857년의 선언과 1873년의 성찰은 서로 정확히 일치함으로써 전형적인 하나의 사고과정(Denkprozess)이라는 핵심 관념을, 그러니까 “자본”의 설명/서술과 몇몇 이론적 측면들 내에서 “자본” 고유의 방법이 인도(veille)하는 이 사고과정(Denkprozess)이라는 관념의 ‘실현’을 우리가 보지 않도록 하나의 정의 가능한 방법이 반영될 수 있는 이러한 핵심 관념을 충분히 구획짓는다. 그런데 하나의 사고과정(Denkprozess) -이는 진정 존재하고 있는 것이며, 우리로 하여금 이 사고과정이 자랑하는 동질적 통일성을 이 사고과정이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도록 우리를 강제한다- 이 이러한 통일성을 구성하는 ‘정관사(la) 방법’ 내에서 자신의 통일성을 사고하기 위해 양분될 때, 우리는 이 양분을 하나의 증상으로 취급할 근거가 있으며, 또한 이 사고과정(Denkprozess)이 사실은 자신의 형태 내에서뿐만 아니라 이를 넘어서도 이러한 형태, 이러한 인식론 -이 인식론은 (분석적이든 변증법적이든) ‘방법’의 유형들 하에서 이 사고과정(Denkprozess)이 실현할 것이라고 간주되는 그러한 통일성을 보증하는 역할을 맡는다- 이 필요로 하는 이론적 효과들 내에 사로잡혀 있고 모델화되어 있다고 믿을 만한 근거가 있다. 결국 레닌은 위에서 우리가 인용했던 긴 독서노트의 끝에서 악의없이 다음과 같이 결론내렸을 때 이러한 결과/결론의 힘을 완벽히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변증법은 (헤겔의,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의 인식론이다”(이 의미심장한 괄호는 레닌 자신의 것이다). 일단 이는 수수께끼 같은 문장이다. 여기에서 ‘인식론’은 도대체 무엇을 하기 위한 것인가? 어떤 점에서 그리고 어떻게 변증법은 정확히 ‘인식론’이 될 수 있는가? 게다가 어떤 점에서 그리고 어떻게 변증법은 헤겔과 마르크스 모두에게서 정확히 ‘인식론’이 될 수 있는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방법이라는 하나의 단어 속에 이미 기입되어 있으며 숨겨져 있다. 만일 우리가 원용된 방법의 이론적 과업 내에서 어느 한 인식론의 축소되고 위장된 형태를 인지한다면, 변증법은 방법으로서의 인식론일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제대로 형성된 모든 사고과정(Denkprozess)이 그 통일성의 조건과 보증물과 같이 ‘정관사(la)’ 방법에 종속된다면, 이 문장의 의미는 명확해진다. 그런데 우리는 그토록 많은 시도들, 경험들/실험들(expériences)과 증거들 이후, “자본”의 사고과정(Denkprozess)의 통일성, 그 설명/서술 순서의 통일성이 불균등하고 비통일적이라고, “자본”의 설명/서술 순서가 사실은 상당 부분 허구적인 하나의 통일성과 하나의 동질성을 부여받았다고 간주할 만한 근거가 있다. 설명/서술 순서가 하나이고 동질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우리는 “자본”에서 서로 일치할 뿐만 아니라 서로 충돌해 서로를 초과함으로써만 결합되는 그러한 이질적인 여러 설명/서술 순서들의 존재를 사고해야만 한다(1974년에 자크 랑시에르는 아마도 이와는 다른 맥락에서 ““자본”에는 하나의 논리가 아니라 복수의 논리들”이 존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 La Leçon d’Althusser, Paris, Gallimard, p. 154.). 이러한 가설은, 매우 명민하게도 뒤메닐이 마르크스의 텍스트가 지니는 ‘이론적인 것’의 한계라는 문제, 내부와 외부 사이의 이론적 구분이라는 어려운 문제(이 ‘외부’가 노동의 생산성 혹은 ‘계급투쟁’ 등이라고 불릴 때), ‘경제학’의 장에 고유한 내부성 바깥에 있는, 근본적으로 자율적인, ‘생산양식들의 연속에 관한 이론’으로서의 그 고립과 그 강령적 빈곤함 속에서 사고된 역사유물론의 ‘외부’라는 문제, 대상과 그 개념 사이의 적합성과 상관적인, 법칙들의 ‘실현’이라는 목적론의 문제 등등을 건드릴 때, 뒤메닐의 정식들에 귀신처럼 들러붙는 동어반복의 유혹을 그로 하여금 스스로 피해갈 수 있게 해준다.” [본문으로]
- 편집자 주: 바로 뒤에 이어지는 아래의 두 단락은 타자원고에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대신 타자원고에서는 다음의 단락이 등장한다. “이 질문들의 극단에서, (“자본”의 또 다른, 아마도 유토피아적일 ‘설명/서술 순서’의 가능성이 아니라면) “자본”의 문제들과 확실성들, 그리고 그 지표들에 대한 인지(identification)의 가능성이 소묘될 것이다. 이 인지는 철학 자신이 거들먹거리면서 스스로 명증성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그 철학적 의무를 우리로부터 해방시키고 우리에게 더 나은 분석 수단들을 제공하기 위해 우리가 “자본”으로부터 대체 불가한 것으로 빚지고 있는 바를 재분배할 것이다. 허상에 빠지지 말자. 만일 우리가 “자본”의 설명/서술의 허구적 통일성에 문제를 제기한다면, 그리고 마르크스와 레닌이 ‘“자본”의 방법’이라고 불렀던 바를 건드린다면, 우리는 설명/서술에 관한 형식적 질문들을 다루기 시작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이러한 변형이 강제되는 매순간마다) 용어와 개념의, 그러니까 개념화[이해](conception)의 문제들도 다루기 시작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 편집자 주: Notes marginales pour le Traité d’économie politique d’Adolphe Wagner (수정해 인용함). [본문으로]
- 편집자 주: “(“자본” 1편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지 않은 채 설명/서술된) ‘가치법칙’의 이론적이고 역사적인 의미와 관련해 끝없이 제기되는 문제들을 피해가는 것, 그리고 마르크스가 상품의 도래에 관한 설명을 시작하고자 뛰어들었던 (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마르크스의 뒤를 이어 엥겔스가 그 내용을 더 채워넣었던) ‘역사 소설들’(즉 “자본”의 역사에 관한 장들 - 옮긴이)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또한 우리는 한편으로 마르크스가 상품이라는 개념, 특히 가치라는 개념을 전제함으로써 스스로에게 부여했던 최초의 명증성과 다른 한편으로 마르크스가 활용하거나 선언하는 방법, 그러니까 한편으로 상품 내의 가치라는 개념의 내부성(‘가장 단순한 결정요소’)과 다른 한편으로 마르크스가 전개하는 (그리고 이러한 명증성에서부터 시작해야만 했기에 분명 전개하지 않을 수 없었던) 설명/서술 순서, 이 둘 사이의 결정적인, 하지만 숨겨진 하나의 관계가 존재한다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출발에서부터(au départ) 가장 단순한 시작점을 스스로에게 부여함으로써, 필연적으로 우리는 이미 ‘방법’이라는 이름으로 특정한 한 유형의 통일성(이 특정한 한 유형의 통일성은 그 거만함으로 인해 너무 강하면서도 동시에 그 결함으로 인해 너무 허약한데, 왜냐하면 ‘물질/재료’ -이 ‘물질/재료’의 ‘생명’은 ‘재생산’되어야 한다- 의 관점에서 이 통일성은 부분적으로 ‘허구적’이기 때문이다)을 사유의 설명/서술에 종속시키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 편집자 주: 이 다음에 등장하는 마지막 두 단락은 타자원고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본문으로]
'인-무브 연재완료 > 알튀세르를 번역하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르크스주의는 역사주의가 아니다 (0) | 2019.06.25 |
---|---|
역사와 정치경제학 사이의 해소되지 않은 긴장: 알튀세르와 마르크스적 인식론을 위하여 (0) | 2019.04.05 |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위기 (0) | 2018.08.01 |
알튀세르 사용설명서 : 독서 안내 (0) | 2018.07.11 |
알튀세르에게 연극이란 “허구적 위험”일 뿐인가? (3/3) (0) | 2018.04.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