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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적 토대: 페미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문제[각주:1] (1/3)

 


주디스 버틀러

번역: 단감/페미니즘 번역모임[각주:2]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문제는 결국 포스트모더니즘이라 불리는 것이 존재하는지 묻는 일임이 분명하다. 이것은 역사에 대한 유형화인가 모종의 이론적 입장인가, 그리고 어떤 미학적 실천을 설명해오던 용어를 지금 사회 이론, 특히 페미니즘 사회학 및 정치 이론에 적용하려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스트는 누구인가? 이는 그들이 직접 붙인 이름인가 아니면 누군가가 주체에 대한 비평이나 담론 분석, 사회 분석을 총합하는 통합성 혹은 일관성에 대해 물을 때 사용되던 이름일 경우가 더 많은가?

나도 그 용어가 사용되던 방식을 통해 그를 파악한다. 내 지평에 나타나는 그 용어의 비평적 정리는 대개 다음과 같다. “모든 것이 담론이라면, 그것엔혹은 모든 것이 텍스트라면혹은 만일 주체가 죽었다면혹은 실제의 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면이러한 문장은 곧바로 뒤이어 나타날 허무주의를 경고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런 류의 조건절이 상기시키는 내용이 사실로 드러난다면, 다음엔, 언제나 오는 다음엔, 분명히 일련의 위험한 결과가 따라올 것이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무시무시한 조건문의 형태로, 혹은 때로 젊고 비합리적인 것을 향한 가부장적 경멸의 형태로 연결되어 나타난다.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에 맞서, 일차적 전제를 강화하려는 노력이 있다. , 모든 정치 이론에는 주체가 반드시 필요하며, 처음부터 정치의 주체, 언어의 지시성, 그 정치가 제공할 제도적 설명의 완결성을 전제해야 한다는 주장을 미리 세워놓는 것이다. 정치란 이러한 토대, 즉 이러한 전제 없이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주장은 이러한 개념(정치, 주체, 언어 등(역자 주))이 정치를 정의할 때 문제 삼을 여지가 없는 특성이라고 주장해야만 가능한 우연적 정치 구성체를 고수하고자 하는 시도가 아닌가? 모든 정치, 특히 페미니스트 정치는 이렇게 중요한 전제들이 없으면 생각할 수 없다는 말인가? 혹은 일단 그러한 전제가 문제적으로 다뤄지면, 그 우연성 안에서 특정 버전의 정치가 나타나는 것에 가까운가?

정치에는 안정적 주체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주장은, 그 주장 자체에 대한 정치적 대립은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이기도 하다. 실제로 그 주장은, 주체에 대한 비판은 정치적 지식을 기반으로 한 비판이 될 수 없음을 암시한다. 오히려 그로 인해 정치를 혼란에 빠뜨리는 행동이다. 주체를 필요로 한다는 명제는 정치적인 것의 영역을 미리 폐제(foreclose)한다는 뜻이며, 이러한 폐제는 분석의 차원에서 정치적인 것의 본질적 특성으로 설정되면서 정치적인 것의 영역의 경계를 강제로 만들어내는데, 그 과정에서 그 강제는 정치적 검증을 피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정치적 기능의 영역을 일방적으로 구축하는 행위는 주체의 지위를 둘러싼 정치적 경합을 즉각적으로 묵살하는 전체주의적 계략이다.[각주:3]

섣불리 짐작하지 않는 것, 즉 주체의 개념을 시초에서부터 규명하고자 하는 것은 이 개념을 한꺼번에 부인하거나 적용하는 일과는 다르다. 반대로, 그것의 구성 과정 및 정치적 의미, 그리고 주체를 이론의 필수 요건이나 전제로 삼은 결과에 대해 묻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개념에 도달했을까?

지금까지 여러 입장들이, 마치 포스트모더니즘이 일련의 입장을 담지할 수 있는 종류의 개념이라도 된다는 듯 사태의 책임을 포스트모더니즘의 탓으로 돌렸다. 담론이 모든 것을 구성해내는 일원론적 무언가인 양, 거기엔 담론밖에 없었다. 주체는 죽었다. 나는 이제 다시는 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현실은 없고 오직 재현만 있을 뿐이다. 이러한 특성화는 포스트모더니즘과 후기구조주의가 한데 합쳐지고 때로는 해체주의까지 셋이 섞이면서, 그리고 때로는 프랑스 페미니즘, 해체주의, 라캉 정신분석, 푸코 분석, 로티의 대화주의, 문화연구의 무차별적 집합으로 이해되면서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유럽 학계 및 최근 담론에서 포스트모더니즘혹은 후기구조주의라는 용어는, 아주 다양한 양상이나 배열로 나타나는 여러 입장들을 뭉뚱그려 담아버리는 하나의 실체 즉 명사를 제공함으로써, 이러한 입장들의 차이를 단번에 타개해 버렸다. 프랑스의 라캉 정신분석학 입장 자체가 공식적으로 후기구조주의에 반대하고, 크리스테바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반대했으며[각주:4], 푸코주의자가 데리다주의자와 거의 연관을 맺지 않고, 식수스와 이리가레가 근본적으로 대립하고, 텍스트 실천에서 데리다와 이리가레 사이에 어떤 친연성이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페미니즘과 해체주의는 고작 식수스와 데리다 사이에서 빈약하게 연결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면 놀라는 대륙 이론 연구자도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비디 마틴은 거의 모든 프랑스 페미니즘이 고도의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 개념을 고수한다고 직접적으로 지적하며, 이러한 이론 혹은 글쓰기가 단순히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범주 하에 묶일 수 있는지 질문을 던졌다.

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질문은 단순히 포스트모더니즘이 페미니즘에게 던지는 질문이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으로 읽힐 수 있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그것은 어떤 종류의 존재를 가지고 있는가?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는 그 용어를 옹호하지만, 포스트모더니스트라고 불리는 나머지 이론가들을 모두 포괄하는 사례가 될 수는 없었다[각주:5]. 가령 리오타르의 연구는 포스트모던이란 개념을 긍정하지 않는 데리다의 연구와 심각하게 불화할 뿐 아니라 리오타르가 대표하는 다른 사람들과도 불화한다. 그는 예증적인가(paradigmatic)? 이 모든 이론들이 동일한 구조(한꺼번에 그것을 생략하고자 하는 비평가들에게 편안한 개념)를 가지고 있는가? 이는 이러한 이론을 똑같다는 기호 하에 식민화하고 길들이려는 노력, 하나의 규정(rubric) 하에 강압적으로 종합하여 묶으려는 노력인가? 이러한 입장의 특수성을 승인하기 위한 단순한 거부인가? 읽지 않을 핑계, 자세히 읽지 않을 핑계인가? 리오타르가 그 용어를 사용한다면, 그리고 그의 편의대로 일군의 작가들과 묶일 수 있다면, 그의 작업에서 어떤 문제적 질문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러면 인용이 전체를 징후적으로 나타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예시로써 기능할 수 있는가?

그러나 내가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바에 따르면, 포스트모더니즘의 기획에는 그러한 예시들패러다임들이 자신이 설명하고자 하는 바를 종속시키고 삭제하는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도 포함된다. ‘총체의 차원에서 볼 때, 포스트모더니즘이라 여겨지는 영역은 총체의 징후이자 전형을 대표한다고 설정된 사례를 통해 효과적으로 생산된다’. 그 결과, 리오타르의 예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한 가지 표상을 확인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억지로 그 예를 통해 전체 영역을 대체하려 하는 것이다. 이는 비평가가 기꺼이 읽고자 하는 한 편의 텍스트, 포스트모던이라는 용어를 편의적으로 사용한 글 한 편으로 그 영역 전체를 무리하게 환원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어떤 면에서는, 일군의 입장을 포스트모던 하에 하나로 묶고, 포스트모던을 하나의 시대 혹은 종합적 총체로 만들며, 그 부분이 이 인공적으로 구축된 총체를 의미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 개념적 지배의 움직임이 권력의 특정한 자기 만족적 책략을 시행하기도 한다. 이렇게 부인하는 태도에만 근거하여 여러 입장을 포스트모던에 쓸어 넣어 버리는 개념적 지배 행위가 정치적 권위주의의 위험을 물리치길 원한다는 사실은 아무리 좋게 평가해도 역설적이다. 그 가정은 몇몇 텍스트는 재현적이다, 그것은 현상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렇게 여러 가지입장의 구조가 결국은 하나의 구조 속에서 적절하게 그리고 경제적으로 식별될 수 있다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러한 가정을 승인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처음부터 우리는 이론이 한 데 묶여 혹은 정리된 총체성으로서 제시된다고 믿어야 하며, 그리고 역사적으로 구조적으로 비슷한 일군의 이론은 인간의 성찰이 역사적으로 특정한 조건의 표명으로서 나타난다고 믿어야 한다. 아도르노까지 이어지는 이 헤겔주의자 무리는 공통의 구조적 선취를 다양하게 징후화하기 때문에 애초부터 이러한 이론들이 서로 대체될 수 있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그 가정은 더이상 만들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종합이 가능하다는 헤겔주의적 가정이 정확히도, 포스트모더니즘의 표식 아래 행복하게 통합된 몇몇 입장에 의해 다양한 방식으로 경쟁하는 속에서 나타났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포스트모던이 통합적 기호로서 기능할 수 있다면, 그리고 기능한다는 점에서, 이것이야말로 결정적인 모던의 기호가 아니냐고 따질지도 모른다. 또한 이것이 포스트모더니즘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며 논쟁할 수 있냐는 질문이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승인하지 않으면 부정해야 하는 양자택일의 대상으로 이 용어를 정착시키는 것은 결국 둘 중 한 입장을 지키라고 강요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보다 생성적인 도식에 대해서든 반해서든 모순이 없는 논리를 승인하게 된다.

여러 입장들을 이렇게 통일시키려는 이유는 그 장 자체가 무질서하기 때문일 것이며, 이러한 입장들 간의 차이가 서로에게 혹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 불리는 어떤 공통 구조에 징후적, 전형적, 표상적인 성격을 띠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용어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이 사회이론, 그 중에서도 특히 페미니즘 사회이론 안에서 모종의 힘이나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이론이나 철학이 항상 권력과 연루될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주고자 하는 비판적 실천 속에서 발견될 수 있고, 그것은 아마도 정확히, 포스트모더니즘의 항목 아래 일군의 강력한 비판을 길들이고 거부하는 노력 속에서, 징후적으로 작동하는 무언가일 것이다. 다양한 개념적 정련 속에서도 언제나 철학적 장치는 실행 중인 권력에 종사하고 있다는 사실은, 새로운 통찰은 아니지만, 그렇기에 다시금 포스트모던이 새로운 것으로 -결국 새로운 것에 대한 추구는 고도 근대가 가장 몰두하던 것이었다- 혼동되어선 안 된다. 굳이 말하자면, 포스트모던은 새로운 것이 가능한지, 즉 그것이 이미 낡은 것에 어떤 식으로든 연루되어 있지는 않은지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최근의 규범적 정치철학 비평가 중 일부는, 어떤 입장 -가설적이든 반사실적이든, 상상적이든- 에 의지하여 자신을 권력의 작동 바깥에 두는 것이나 권력 관계의 협상을 위해 메타정치적 기반을 구축하고자 하는 것이야말로 권력의 가장 교활한 책략일 수도 있다는 점을 강력히 지적했다. 권력을 넘어섰다는 이러한 입장이 선험적이고 암묵적인 보편적 동의에 의지하여 자신의 정당성(legitimacy)을 주장하면, 어떤 식으로든 다음의 혐의를 피할 수 없다. 어떤 합리주의의 기획이 동의로 인정되는 바를 미리 지정할 수 있단 말인가? 여기서 보편적인 것의 기호 아래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것은 어떤 형식의 유해한 문화 제국주의인가?[각주:6]

 


  1. 이 논문은 1990년 9월 “범 필라델피아 지역 철학 컨소시엄(Greater Philadelphia Philosophy consortium)”에서 발표한 “페미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문제”을 수정한 것이다. [본문으로]
  2. 이 번역의 절반은 인무브 페미니즘 번역모임에서 느루와 함께 활동하며 했고, 나머지 절반은 느루를 그리워하며 했습니다. 번역하는 동안 줄곧 함께해 준 느루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본문으로]
  3. 최근의 몇몇 정치 이론, 특히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샹탈 무페(󰡔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Hegemony and Socialist Strategy󰡕(1986)), 윌리엄 코놀리(󰡔정치 이론과 모더니티Political Theory and Modernity󰡕(1988)), 장 뤽 낭시와 필립 라쿠-라바르트(「정치의 후퇴Le retrait du politi que"」(1983))의 글에서 정치적 장은 반드시 결정적 외부(determining exterior)의 생산을 통해 구성된다는 강력한 주장이 있지만, 여기서 이러한 의견은 아무 가치가 없다. 다시 말해, 정치의 영역 그 자체가 정치 ‘이전’(pre-political), 혹은 ‘비’정치(non-political) 등을 만들어내고 자연화하는 행위를 통해 자신을 구성한다. 데리다의 용어로 하면, 이것이 ‘구성적 외부’의 생산이다. 여기서 나는 그렇게 구성적 외부를 생산하고 자연화하는 정치적 장의 구성과 그 구성적 외부의 특정 매개변수를 생산하고 우연적으로 만드는 정치적 장을 구분하자고 제안한다. 정치적 장 그 자체를 구성하는 구별적 관계가 언젠가 정교하게 완성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분명 그 정교화의 상태 역시 무한히 정교화되어야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윌리엄 코놀리의 구성적 반목이라는 개념이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정치적 자신을 의문에 붙이는 매개변수를 설정한 정치적 투쟁의 형태를 제안하는 라클라우와 무페의 글에서 평행적 표현을 찾아낸 개념이다. 정치의 근거들(‘보편성’, ‘평등’, ‘권리의 주체’)이, 드러나지 않은 인종적, 젠더적 배제를 통해 그리고 사적인 것(재생산, ‘여성성’의 영역)을 정치 이전의 것으로 만드는 정치와 공적 삶의 융합에 의해 구성되어 온 만큼, 이는 페미니즘 문제에 특히 중요하다. [본문으로]
  4. Julia Kristeva, Black Sun: Depression and Melancholy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89), pp. 258-259. [본문으로]
  5. 넓게 ‘포스트모더니즘’의 항목에 포함되는 여러 사상가와 리오타르의 융합은 세일라 벤하비브의 에세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인식론: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에 대한 응답」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Epistemologies of Postmodernism: A Rejoinder to Jean-François Lyotard," in Feminism/Postmodernism, edited by Linda Nicholson (New York: Routledge, 1989)) [본문으로]
  6. 이는 캐서린 맥키넌뿐 아니라 위르겐 하버마스에 대한 페미니즘 비판에서도 매우 분명히 드러난다. 아이리스 영의 「공평성과 시민 대중: 근대 정치 이론에 대한 페미니즘 비평의 몇 가지 함의」(Seyla Benhabib and Drucilla Cornell, eds., Feminism as Critique: Essays on the Politics of Gender in Late-Capitalism, (Oxford: Basil Blackwell, 1987에 수록), 낸시 프레이저의 󰡔제멋대로의 실천들: 현대 사회 이론에서 권력, 담론, 젠더󰡕(Nancy Fraser, Unruly Practices: Power and Gender in Contemporary Social Theory,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9), 특히 프레이저의 「비판이론에서 결정적인 것은 무엇인가: 하버마스와 젠더의 경우」("What's Critical about Critical Theory: The Case of Habermas and Gender")와 웬디 브라운의 「의식 지우기」("Razing Consciousness", The Nation, 250:2, January 8-15, 1990)을 보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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