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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적 토대: 페미니즘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문제 (2/3)

 

 

주디스 버틀러

번역: 단감/페미니즘 번역모임



내가 포스트모던이라는 용어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후기구조주의로 더 잘 알고 있는 부분에 어떤 중요한 지점이 있다면, 비평가의 주체 입장(subject position)을 비롯한 자신의 용어를 협상하려 하는 바로 그 개념적 장치 자체에 권력이 녹아있다는 점이다. 나아가 권력의 장에서 이러한 비평 용어는, 규범을 제공하지 못하는 허무주의적 상대주의의 등장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적으로 깊이 관여된 비평이라는 전제조건 그 자체를 우리에게 암시한다. 권력이나 힘을 넘어서는 규범 체계를 세우는 일은, 규범적 보편성의 수사에 의지하여 자신의 권력 행사를 승화시키고 가장하고 확장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강력하고 권력적인 개념적 실천이다. 이 실천은 토대를 폐지하지 않는 것, 심지어 반토대주의(antifoundationalism)라는 이름 하에 모종의 입장을 지키는 것이 핵심이다. 이러한 입장은 모두 토대주의의 또 다른 버전이자 그것이 발생시킨 미심쩍은 문제로서 한패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오히려 토대를 구축하는 이론적 움직임이 승인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폐제하거나 제외하는 것은 정확히 무엇인지를 조사해야 한다.

이론은 끊임없이 토대를 가정하면서, 암묵적 약속인 형이상학적 전제를 당연한 사실로 만드는 듯하다. 심지어 그것을 경계하려고 할 때조차 그렇다. 어떤 이론에서든 토대는 의심의 여지가 없고 의심을 받지 않는 것으로서 기능한다. 그러나 이러한 토대’, 즉 무언가를 승인하는 근거로 작동하는 전제들은, 따지고 보면, 그 토대적 전제 역시 우연적이고 논쟁적인 추정임을 폭로하는 배제를 통해 구성되지 않았는가? 우리가 기존의 토대에도 암묵적으로 전제된 모종의 보편적 기반이 존재한다고 주장할 때조차, 그 암묵성과 보편성은 그저 의심이 불가능한 층위를 다시 새로 하나 만들어낼 뿐이다.

보편성이라는 바로 그 범주가 단지 고도로 자민족중심적인 그들만의 편향이었음이 겨우 폭로되기 시작했다면, 우리가 어떻게 보편적인 발화 상황이나 주체 입장 속에서 이론 및 정치의 근거를 마련할 수 있겠는가? 얼마나 많은 보편성이 존재하는가[각주:1], 그리고 너무 당연하여 타협할 수 없는 일군의 보편성의 상충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문화적 갈등은 어디까지인가, 그것은 보편적인 것이라는 문화 제국주의적 개념에 의지하여 협상될 수는 없는 갈등인가, 아니면 오히려 폭력이라는 대가를 치르면서 그렇게 의지해야만 해결되는 갈등인가? 내가 보기에 우리는 미국이 이라크를 상대로 일으킨 전쟁에서 이러한 실천의 개념적, 물질적 폭력을 목격해왔다. 거기서 아랍이라는 타자는 이성과 민주주의라는 보편적 구조에서 근본적으로 외부에 있으며, 따라서 누군가가 강제로 안으로 끌고 들어와야만 한다고 여겨진다. 의미심장하게도, 미국은 이렇게 이라크를 민주주의의 울타리에 강제로 끌어들이기 위해 다름아닌 정치적 주권과 표현의 자유라는 민주주의 원칙을 폐기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 폭력적 움직임은 다른 무엇보다도, 보편성이라는 개념이 실행되어야 할 바로 그 보편적 원칙을 폐기하는 것을 통해 관철된다는 점을 드러낸다. 더 넓게 우리 시대의 탈식민주의라는 정치적 맥락 내부에서 보면, ‘보편적인 것이라는 바로 그 범주를 집요한 논쟁과 재의미화의 지점으로 강조하는 일이 특히 절실하게 필요할 수도 있다[각주:2]. 그 용어에 논쟁적 성격이 있음에도 보편성에 절차적 혹은 실체적 개념이 있다고 처음부터 가정하고 시작하면, 필연적으로 문화적 헤게모니에 따른 개념을 사회적 장에 강요하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뒤 그 개념을 권력의 갈등 속에서 협상을 이끌어낼 철학적 도구라고 유포하는 것 역시, 정확히도 궁극적 규범성이라는 메타정치적 장소에 그것을 심어 넣어 헤게모니를 가진 권력의 입장을 지키고 재생산하는 일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내가 보다 구체적이고 내적으로 다양한 보편성을 요구하면서 보편성을 한층 통합적이고 포괄적인 개념으로 만들고, 이를 통해 내가 허물고자 했던 바로 그 토대적 개념에 다시 투신하려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내 과업이 포괄적인 보편성을 명료히 하는 일과는 현저히 다르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그렇게 종합적인 개념은 보다 새롭고 심화된 배제를 생산하는 것을 대가로 해야만 달성될 수 있다. 포함되어야 한다고 요구할 미래의 주장을 미리 폐제하지 않기 위해서는, ‘보편성이라는 단어가 영원히 열린 채로, 영원히 논쟁적으로, 영원히 우연적으로 남아있어야만 한다. 실제로 내 입장에서, 그리고 역사적으로 억압받은 모든 관점에서 보기에, 보편적인 것이 종합적 개념이 될 때에는 그것이 어떤 개념이든 보편적인 것이라는 기호 하에 제기될 예측하지 못한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주장을 승인하기보다는 막아버릴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항목을 없애버리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영구적인 정치적 논쟁의 장소로 만들기 위해 항목에서 그것의 토대주의적 무게를 제거하려 한다.

탈식민주의적 지평 속에서 민주적 논쟁에 매진하는 사회이론은 자신이 어쩔 수 없이 놓게 되는 토대에 대한 질문을 던질 방법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 이는 내가 보기에 모든 급진적 정치 기획의 핵심인 논쟁으로부터 자신을 차단하려 하는 권위의 책략을 심문하려는 움직임이다. 후기구조주의가 토대주의적 움직임에 대해 이런 식의 논쟁을 일으키는 비평 양식을 제공했던 만큼, 여기서도 매우 급진적인 의제 중 하나로 이용될 수 있다. 내가 이용될 수 있다고 말한 점에 주목하라. 나는 어떤 이론에서든 필연적인 정치적 결과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가능한 정치적 배치가 있을 뿐이다.

포스트모더니즘과 연결된 지점 중 하나가 철학의 인식론적 출발점이 부적절하다(inadequate)는 것이라면, 그것이 근대라는 기호 아래 사태를 파악하고 이론화한다고 주장하는 주체에 대항하여 포스트모던이라는 기호 아래 사태를 파악하고 이론화한다고 주장하는 또 다른 주체의 질문이 되어선 안 된다. 이것이야말로 주체에 의해 정해지는 입장은 언제나 어떤 식으로든 그 입장이 자리를 마련하면서 밀려나는 것에 의해 구성된다는 주장, 그리고 이론화하는 주체는 일군의 배제적, 선택적 과정에 의해 이론화 주체로 구성된다는 주장에 의해 비판되고 있는 논쟁의 틀을 만드는 바로 그 방식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페미니스트 이론가로 구성되어 그의 논쟁의 틀이 널리 알려지게 될 사람은 누구인가? 이 역시 언제나 권력이 사전에 작동하는 경우, 즉 누가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으로 발화하는 주체가 될지 그리고 누구에게 말을 할지 설정하는 바로 그 과정에 이미 권력이 작동하고 있는 경우가 아닌가? 그리고 페미니즘 논쟁에서 한 사람의 말하는 주체를 당신 앞에 생산하는 주체화 과정 속에는 종속의 과정이 미리 전제되어 있다는 점 역시 분명하지 않은가? ‘가 당신에게 말할 때, 무엇을 말하는가? 지금 여기서 나의 입장을 정하는종속과 주체화의 제도적 역사는 무엇인가? 만일 버틀러의 입장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만들어내서, 출판하고, 방어하는 것, 그렇게 일종의 학문적 자산으로서 내가 소유한 것인가? 아니면 내가 그러한 이론의 소유자의 입장을 가질 수 있도록 그저 우리를 독려하는 주체의 문법이 있을 뿐인가?

분명 모든 발화가 그러한 가치를 인정받지는 못한다면, 과연 어떤 입장이 하나의 입장이 되는가? 이것은 명백히 특정한 승인 권력의 문제이며, 그 입장 자체에서 나온 것은 분명 아니다. 나의 입장은, 그들이 (내 입장을) 수렴할 가능성을 다루는 동시에 체계의 차원에서 배제할 가능성을 고려하면서, ‘내가’ -나는 대명사로부터 회피하지 않는다- 나를 구성해 온 이론적 입장을 재연하고(replay) 재표명하는 범위까지 나의 것이다. 그러나 비록 내 활동의 일부가 도구적으로 그들을 뒤섞고 일부는 옆으로 치워버리고 다른 일부는 편입시키는 형식을 취했다 하더라도, 나를 구성해온 입장들을 가 관장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그들 중에서 선택한 그 는 언제나 그들에 의해 이미 구성된다. ‘가 그러한 재연의 전이 지점이긴 하지만, 가 상황적(situated)이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충분치 않다. ’, 즉 이 는 이러한 입장들에 의해 구성된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들은 그저 이론적 산물이 아니라, 온전히 내재되어 물질적 실천 및 제도적 배치를 조직하는 원칙이며, 그러한 힘과 담론의 매트릭스들이 나를 살아갈 수 있는 주체로 생산해낸다. 실제로, 내가 반대하는 바로 그 입장, 즉 주체는 반드시 사전에 주어져야 하며 담론은 그 주체를 반영하는 도구라고 주장하는 그러한 입장이 이미 나를 구성하고 있는 일부분이 아니었다면, 여기서의 는 사고하고 발화하는 가 아니었을 것이다.

자기 자신이 출발점이 되는 주체는 없다. 그리고 대항적 외재성의 영역으로 그들을 개조해야(recast)만 그것의 구성적 관계를 끊어낼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이다. 여기서 자연발생의 환상으로 이해되는 주체는 언제나 이미 남성적이라고 한 뤼스 이리가레의 주장을 고려해볼 만하다. 정신분석학적으로 그 버전의 주체는 모성에 대한 자신의 의존을 일견 부정하거나 근본적으로 억압하면서 구성된다. 그리고 이 모델에서 주체가 되는 것은 분명 페미니즘적 목표라 할 수 없다.

주체에 대한 비판은 주체를 부정하거나 배척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미리 주어진 혹은 토대주의적 전제로서 주체의 구성을 심문하는 방식이다. 이라크에 대한 전쟁이 시작될 때, 우리 모두는 분석의 대상이자 도구적 군사 행동의 목표물인 중동의 지도를 우리 앞에 펼쳐놓는 전략가들을 보았다. 퇴역 및 현역 장교들은 전장에 나가 있는 장교의 대역을 하기 위해 방송국에 소집되었다. 그 장교들의 의도는 다수의 이라크 군사기지를 파괴하는 것으로 예외 없이 현실화된다. 이러한 작전이 일찍이 성공했음이 다양하게 확인되어 열정적으로 전달되었고, 이렇게 목표에 도달하는 장면, 즉 이렇게 의도가 별다른 저항이나 장애 없이 도구적 행동을 통해 더할 나위 없이 완전히 실현되는 장면은 그저 이라크의 군사시설을 파괴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들의 의지는 곧장 행동으로 이행되고 그들의 발화나 명령은 반격의 가능성 그 자체를 파괴하는 행동으로 물질화된다는, 그리하여 그 제거의 힘을 통해 그들이 세운 주체성의 침범할 수 없는 경계를 단번에 확증하는 남성적 서구 주체의 승리를 보여주는 듯했다.

이러한 국면에서 푸코를 떠올리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의도적 주체가 밀려나는 것을 근대적 권력 관계와 연결하면서, 푸코는 또한 그 근대적 권력 관계를 전쟁과 연관시켰기 때문이다[각주:3]. 내 생각에 그는, 행동을 실행하는 주체는 이전 행동이 만들어낸 효과의 영향을 받게 되고, 우리가 행동하는 지평이란 외적 장이나 작동의 무대로서 순수히 혹은 배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동할 수 있는 능력 그 자체의 구성적 가능성으로서 존재한다고 주장한 듯하다. 그러나 더 중요하게는, 그러한 주체를 통해 실행되는 행동은, 방향면에서 더 이상 단선적이거나 결과가 충분히 예측가능하다고 이해될 수 없는 연쇄적 작용의 일부이다. 그러나 도구적, 군사적 주체는 처음엔 파괴적 행위를 실현하는 단어를 곧장 입 밖에 내는 듯하며, 전쟁을 통해 남성적 서구 주체는 언어를 행위로 번역할 수 있는 비범한 권력을 선취한 것처럼 보인다. 뉴스 캐스터는 그 파괴의 정확성을 발표하고, 지켜보고, 대리수행하면서 하나같이 경박한 행복에 가득 차 있다. 전쟁이 시작되면서, 사람들이 텔레비전에서 듣게 되는 단어는 도취감이었고, 어떤 뉴스 캐스터는 미국의 무기야말로 잔혹한 아름다움의 도구라고 언급하며(CBS), 그러한 대립을 말소하고 그 말소의 결과를 통제하기 위해 세계 속에서 도구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자신들의 능력을 환영에 홀린 채 성급히 칭송했다. 그러나 이 행동의 결과성은 그때 당시에 자신의 의도가 그대로 실현되는 효율을 상찬하던 도구적 행위자에 의해서는 예견될 수 없다. 푸코는 이러한 주체 자체가, 그 주체가 자신을 자기 행동의 유일한 기원으로 삼는 순간 지워지는 계보의 효과이며, 그 행동의 효과는 항상 진술된 의도를 대체한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도구적 행위의 효과는 언제나 주체의 통제를 넘어 권력을 증식시키는 힘이 있다. 그 주체의 지향성(intentionality)이 지닌 이성적 투명함에 도전하고 그리하여 주체 자신의 정의 자체를 전복시킬 수 있는 힘 말이다. 나는 우리가 미국 정부의 일부 및 그 환영적 주체의 동료의 일부, 즉 자신의 세계를 일방적인 곳으로 만들기로 결정하는 자를 찬양하는 가운데에 있어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는 화면에서 중동 지도 옆에 잡힌 퇴역 장군의 섬뜩한 머리에 의해 어느 정도 전형적으로 드러난다. 여기서 이 주체의 말하는 머리는 그것이 지배하고자 하는 영역과 비슷하거나 혹은 더 크게 보여진다. 이는 어떤 면에서 제국주의적 주체의 도식, 즉 그 행위 자체의 시각적 알레고리이기도 하다.

이제 당신은 내가 행위 자체와 재현에 해당하는 무언가를 구분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보다 강력한 지적을 하고자 한다. 당신은 합동 참모 본부장 콜린 파월이 미사일을 발사하는 것을 군수품 조달이라 부르면서 새로운 군사 관습을 -내 생각에는- 만들어내는 것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보기에 그 구절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폭력의 행위를 법의 행위로(군사 용어 군수품(ordnance)’은 어원적으로 사법상의 법령(ordinance)과 연결되어 있다) 만들어내고, 그리하여 파괴를 정연한 질서의 외양으로 포장한다. 더구나 이는 미사일을 일종의 지시, 즉 반드시 따라야 하는 명령으로 만들고, 그에 따라 그 자신이 특정한 발화 행동이 되어, 메시지(쿠웨이트에서 나가라)를 전달할 뿐 아니라, 죽음의 위협 및 죽음 그 자체를 통해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관철시킨다. 물론, 이것은 수신자를 죽이기 때문에 결코 수신될 수 없는 메시지이며, 그렇다고 법령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모든 법령의 실패이자, 소통의 거부이다. 그리고 그 메시지를 읽을 사람이 남아있다 해도, 그들은 간혹 말 그대로 미사일 위에 적혀있기도 한 메시지를 읽지 않을 것이다.

전쟁을 통해 우리는 텔레비전 화면과 폭격기 조종사의 렌즈가 합성되는 장면을 목격하고 또 참여했다. 그런 점에서 이 전쟁의 시각 기록은 전쟁의 반영이 아니라 그것의 환영적 구조의 법령, 즉 전쟁이라는 것을 사회적으로 구성하고 유지하는 데 사용되어 온 바로 그 수단의 일부이다. 일명 스마트밤은 폭탄 앞부분에 카메라 -일종의 광학적 팔루스- 가 장착되어 다가오는 목표물을 기록하며 파괴한다. 이 폭탄은 그 영상을 다시 사령부로 중계하고 텔레비전으로 방영하면서, 텔레비전 화면과 시청자를 폭탄의 확장된 장치로 효과적으로 구성해낸다. 이런 점에서, 시청을 통해 우리는 폭격을 하고, 폭격자는 물론 폭탄에 자신을 동일시하며, 공중을 날고, 북미 대륙에서 이라크까지 이동하고, 그러면서도 자기 집 거실의 소파에 안전하게 붙어있을 수 있다. 물론 스마트밤 화면은 자신이 맡은 파괴를 완수한 순간 부서진다. 말하자면 자신의 파괴성을 결코 기록하지 못하는, 온전히 파괴적인 행위의 기록인 셈이다. 실로 그것은 폭격과 그 결과를 환영적으로 구분하는 데 영향을 끼친다. 따라서 시청자로서 우리는 군사적 승리의 알레고리를 실제로 수행한다. 우리는 육체에서 분리되어 피를 내지 않는 살육의 수행을 통해 우리의 시각적 거리와 신체적 안전을 유지하며, 그러면서 우리의 급진적 불침투성을 유지한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이 파괴의 장소와 절대적으로 가깝게, 절대적으로 본질적으로, 그러면서도 절대적으로 멀리 관련되어 있다. 이는 고공에서 내려다보는 전지구적 관점을 취하고 있는 제국적 권력의 형상이기도 하며, 육체에서 분리되어 결코 죽지 않는 암살자, 제국주의적 군사력의 형상을 띤 저격수이기도 하다. 따라서 텔레비전 화면은 초월의 환상, 전기적 거리의 보장을 통해 역습으로부터 무한히 보호되는 탈육체화된 파괴 기구의 환상을 유지하면서 고공의 관점이 갖는 위력을 배가한다.

이러한 고공의 관점은 결코 자신의 파괴 행위의 효과를 보기 위해 다가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 지역을 클로즈업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점차 높아지면, 화면은 편리하게도 자기 자신을 망가뜨린다. 그리하여 건물과 군사 시설만 목표물로 삼는 인도적인 폭격인 것처럼 보이도록 제작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것은 인구의 체계적 파괴를 시야에서 차단하는 프레임의 효과, 푸코의 표현에 따르면 국가의 근대적 꿈이다[각주:4]. 아니면 우리는 이것을 다른 방식으로 진술해야 할지도 모른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조준하는 능력을 증명한다는 규정 하에 바로 그 목표물을 시야에서 제외하는 것이야말로 전멸을 체계적으로 비현실화하면서 이를 효과적으로 완수하는 프레임이다.

행복에 도취된 채 손쉽게 목표물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환상을 수행하는 미군 주체라는 반신(半神)은 자신의 행동이 그것의 환영적 시야를 훨씬 넘어설 효과를 생산해왔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목표는 그저 몇 주만에 달성되었으며 자신의 행동은 완료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행동은 의도적 주체가 완료되었음을 공언한 후에도 계속 행동한다. 그 행동의 효과, 즉 서구 주체의 환영적 자아 구성(self-construction)에 대한 막대하고 폭력적인 논쟁을 생산할 효과는, 예견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종국에는 수용할 수도 없을 폭력을 이미 곳곳에 다양한 방식으로 심었다.

그리하여 내가 할 수 있다면, 나는 가까이에 있는 주체로 돌아가 보려 한다. 그 주체는 배제와 구별, 혹은 억압을 통해 구성되며, 그 이후에 감춰지고 자율성의 효과에 의해 덮인다. 그런 면에서 자율성은 부인된 의존성의 논리적 결과이다. , 말하자면 자율적 주체는 그것이 구성되었다는 사실이 폭로되지 않게 덮을 수 있는 한에서만 자율성의 환상을 유지할 수 있다. 이러한 의존성과 폭로는 이미 주체의 형성을 진행시키고 통제하는 사회적 관계이다. 따라서 이것은 그 상황을 형성하는 관계 중 하나일 뿐, 주체가 그 안에서 자신을 발견해내는 관계가 아니다. 주체는 구별의 행위를 통해 구성되며, 이를 통해 구성적 외부와 구별된다. 여기서 주체를 구성하는 외부란, 관습적으로 여성적인 것을 분명히 연상시키지만 늘 그것만을 연상시키는 것은 아닌 비체화된 대타성(alterity)의 영역을 말한다. 앞서 말한 최근의 그 전쟁에서도 우리는 사담과 소돔의 언어적 유사성에 기반한 질 나쁜 농담의 범람 속에서 동성애혐오적 판타지가 선명히 드러나는 지점은 물론 아랍이 비체화된 타자가 되는 모습을 목격한 바 있다.



  1. 대안적 보편성 개념에 대해서는 아시스 난디(Ashis Nandy)의 󰡔친밀한 적: 식민주의 하의 자아 상실과 회복󰡕 (The Intimate Enemy: Loss and Recovery of Self under Colonialism, (New Delhi: Oxford University Press, 1983)의 서문을 보라. [본문으로]
  2. 이 맥락에서는 호미 바바의 ‘혼종성(hybridity)’ 개념을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 󰡔문화의 위치󰡕(The Location of Culture (New York: Routledge, 1994))를 보라. [본문으로]
  3. 미셸 푸코, 󰡔성의 역사󰡕 제1권 영역본 p.102. (Michel Foucault, The History of Sexuality, Vol. I: An Introduction, translated by Robert Hurley (New York: Random House, 1980), p.102.) [본문으로]
  4. “이제 전쟁은 보호해야 할 군주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모든 이의 생명이라는 명목으로 행해지고, 국민 전체는 생존의 필요라는 명목으로 서로 죽이도록 훈련받는다. 살육은 사활이 걸린 문제가 되었다.” 라고 푸코는 썼다. 그는 뒤에 이렇게 덧붙였다. “전투의 전술을 뒷받침하는 원리, 즉 살아남을 수 있기 위해 죽일 수 있어야 한다는 원리는 국가 간 전략이 되었지만, 문제되는 실재는 더 이상 주권의 법적 실재가 아니라 국민의 생체적 실재이다. 민족의 말살이 정말로 근대적 권력의 꿈인 것은 오래전부터의 죽일 권리가 오늘날 다시 행사되기 때문이 아니라, 권력이 생명, 종, 종족, 대규모적 인구현상의 차원에 자리 잡고 행사되기 때문이다.” 미셸 푸코 저, 이규현 역, 󰡔성의 역사 1: 지식의 의지󰡕 3판 3쇄, 나남, p. 14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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