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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 시간의 시학횔덜린과 만델시탐 #3

 


아르테미 마군

번역 이 종 현 | 서교인문사회연구실




III. 전치(轉致)[각주:1]

 

이번에는 아주 다른 종류의 텍스트를 살펴보자. 다음은 오시프 만델시탐이 1913년에 쓴 시다.[각주:2]  

 

***

Мы напраяженного молчанья не выносим, -

Несовершенство душ обидно, наконец!

И в замешательстве уж объявился чтец,

И радостно его приветствовали: “Просим!”

 

Я так и знал, кто здесь присутствовал незримо!

Кошмарный человек читает Улялюм”.

Значенье - суета, и слово - только шум,

Когда фонетика - служанка серафима.

 

О доме Эшеров Эдгара пела арфа.

Безумный воду пил, очнулся и умолк.

Я шел по улице. Свистел осенний шелк...

И горло греет шелк щекочущего шарфа...

 

***

우리는 긴장된 침묵을 견디지 못한다, -

영혼의 미성숙은 얼마나 모욕적인지!

혼잡한 가운데 낭독할 사람이 정해졌고,

모두들 기쁘게 그를 맞았다: “부탁해요!”

 

누가 보이지 않게 모임에 참석했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악몽처럼 소름끼치는 사람이 <울랄룸>을 읽는다.

의미는 소란, 말은 오직 소음,

음성학이 세라핌의 하녀일 때.

 

하프는 에드가의 어셔 가()에 대해 노래했다.

물을 들이켠 광인은 정신을 차리고 말을 멈추었다.

나는 거리를 걸었다. 가을의 실크가 휘파람을 불었다...

간질이는 스카프의 실크가 목구멍을 데운다...



오시프 만델시탐(1891-1938)


이 시의 일반적인 독해[각주:3]에 따르면, 여기서 만델시탐은 아름다운 말소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상징주의를 조롱하고 있으며 아크메이즘이 추구하는 단어의 충만한 의미를 상징주의에 대립시키고 있다. 시의 마지막 구절은 두운을 이루는 무의미한 말들을 부조리의 차원에 이르기까지 패러디한다.[각주:4] 이러한 설명은 그럴싸하지만, 왜 만델시탐이 자신의 방어적인 이데올로기적 입장을 표현하기 위해 이렇게까지 운()을 맞추려고 애썼는지 설명해 주지 못한다.

 

텍스트를 자세히 살펴보자. 우선 <울랄룸>[각주:5]이 눈에 들어온다. 주지하다시피 에드거 앨런 포는 아름다운 말소리를 만드는 데 대가였다. 이런 의미에서 텍스트에 나오는 그의 존재는 위에서 언급한 일반적인 독해에 잘 부합한다. 그러나 <울랄룸>은 어떤 이름, , 그 이름이 명명하는 것의 무덤, 무덤과도 같이 무의미하지만 아름답게 울려 퍼지는 소리에 대한 발라드이다. 순전히 음성학적이고 음악적인 언어는 상실된 의미에 대한 거상(居喪), 즉 침묵을 붙들고, 견디고 보존하려는 수단이다. 그런데 이러한 거상 작업은 실현 가능할까? 비어있는 언어, 언어-침묵이란 과연 가능할까?

 

우리가 긴장된 침묵을 견디지 못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첫째, 침묵을 견딘다는 과제가 주어진다.

둘째, 이 과제는 어째서인지 실현 가능하지 않은 것으로 판명된다.

 

침묵, 즉 말에 대한 저항은 말에게 자율성을 부여하고 말 안에서 그 자율성을 성찰한다. 침묵은 밖으로 찢겨 나오는 말의 힘을 감각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말이 잠잠해지고 그 정적에서 말이 마치 새로 태어나듯 터져 나오는 순간, 그 문턱을 붙들어야 하는 과제가 주어진다(물론 이것은 보다 나중에 쓰인 시 나는 내가 말하고 싶은 말을 잊었다...의 주제이다). 그러나 그러한 붙듦은 혁명적 이행이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로 다음의 이유들 때문에 역시 불가능하다:

   1)침묵은 곧장 말하는 자가 된다. 침묵은 도덕적 비난, 거북함 등을 의미하기 시작한다.

   2) 다른 한편으로, 말이 곧 탄생할 것이라는 기대를 애써 외면하면서 팽팽하게 긴장된 침묵은 자신의 긴장된 이행성을 상실한다.

   3) 마지막으로, 겉보기에 한곳에 머물러 있는 듯한 침묵은 오랫동안 기다려온 그래서 더욱 깜짝 놀라게 하는 말을 억누르는 노력을 하는데, 이러한 억누름 자체는 자기 나름의 말을 취한다. 우리가 분석하고 있는 시는 그러한 말의 반작용으로 독자를 이끈다.

 

이 시의 리듬은 조급하다. 이 시에서는 강세[각주:6]가 없는 몇몇의 긴 구간들이 눈에 띄는데, 이 구간들은 강세를 받는 날숨과 휴지로 종결된다.[각주:7]И| в за|ме|ша|тель|стве| уж| объ|я|вил|ся| |чтец|” (i| v za|me|sha|tel’|stve| uzh| ob’|ja|vil|sja| |chtets|).[각주:8] 세 개의 4행짜리 연으로 구성된 이 시는 전체적으로 약강격으로 쓰였는데, 그 중 음절이 4-5개인 긴 단어가 6개나 된다. 만델시탐은 그러한 리듬에 소란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이 단어에는 두 가지 뜻이 있는데, 이 두 가지 뜻은 서로 서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조급함으로서의 소란은 언어의 비본질성, 비어있음으로서 언어의 소란을 확인하려 한다. 단어 그 자체를 버리는 것. 그러나 우리는 바로 이 버려냄 안에서 의미가 돌아온다는 것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의미는 - 소란이라는 구절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들린다. 의미가 바로 소란이라는 것, 또는 소란이 바로 의미라는 것).

 

조급함은 <울랄룸>에서도 언급되는데, 여기서 주인공은 프시케의 조언보다 이름의 무덤을 획득하기를 선호한다. 소란, 가속화는 시간을 기만하고, 통과할 수 없고 위험한 휴지를 최대한 빠르게 가로지를 수 있는 방법이다.[각주:9] 음성적인 언어, 비어있는언어는 침묵을 견디고 침묵을 무언가 새롭고 독립적인 것으로 옮기려는 희망을 품고 침묵을 길게 잡아끈다. 이와 마찬가지로 러시아의 개혁자들도 최대한 빠르게, 최장 500일 안에 위험한 장소를 가로지르려고 노력하다가 결국 그 위험한 장소 안에 영원히 갇혀 버린 것이다.

 

다시 한 번 질문해 보자. 침묵을 길게 잡아끌려는 전략은 성공으로 이어질 것인가? 침묵을 견딘다는 것은 성공할 것인가? 그렇다, 그러나 언어를 비워내는 것에 ()하여, 그 언어를 비워내는 전략의 실패를 통해서만 그럴 것이다. 비어있는 언어는 불가능하고, 비워내려는 충동은 시들해지고, 길게 잡아끈 침묵은 위반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중지의 중지 안에서 이름이, 미성숙하고 조산(早産)된 이름이 탄생한다.

 

 

이 문제에 대한 만델시탐의 입장은 괴물처럼 긴 두 단어에서 엿볼 수 있다. “замешательство(자메샤텔스트보: 혼잡)”щекочущего(셰코추셰보: 간질이는)”.

 

혼잡(замешательство)은 텍스트(текст)를 반죽(тесто)처럼 뒤섞는 것(замешивание)이기도 하다.[각주:10] 시는 자라나서 통통해지고 인플레이션과 같은 비어있음으로 부풀어 올라 무()를 주조한다(이러한 형상은 만델시탐의 후기 시 아니, 나는 위대한 헛소리로부터 숨을 수가 없네...”에서 의미 있는 무의미라는 맥락을 통해 명시적으로 나타난다). 크림이 담긴 단지 안에서 발버둥 치며 크림을 버터로 변하게 만드는 개구리와 같이 이름은 형식적 비어있음으로부터 탄생한다. 이 시에서 소란스러운 혼잡은 반죽이 된다.

 

'텍스트'와 '테스토'


겉보기와 달리 침묵, 휴지는 시적 작업을 중단시키지 않고 시적 작업의 역동적 원칙이 된다. 침묵의 견딜 수 없음은 휴지를 붙들고 동시에 가로지르려는(한마디로 말하자면, ‘옮기려는’), 잠재적으로 무한한 활동의 가능성과 필연성을 개시한다. 이런 의미에서 침묵은 언어로부터 남겨져 언어를 보충하는 그 무언가와 같이 시행(詩行)의 발생과 성장의 지점이기도 하다. 맑스에게서 잉여적인 자유시간이 모든 자본주의적 생산의 핵심 원칙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만델시탐의 시학에서 이 원칙은 순차적으로 이루어진다. 침묵은 단어의 상실(망각)으로 이해되기도 하고, 단어의 아직-태어나지-않음으로 이해되기도 한다(Silentium, 나는 말을 잊었다...). 침묵은 발생의 순간인데, 그 안에서 단어는 침묵이기도 하고 말(речь)이기도 하고 음악이자 단어이기도 하다. 바로 이러한 간극의 공간에, 복귀와 탄생이라는 두 방향 사이에 무언가를 붙들어야 한다는 과제가 놓여있다. 심지어 단어여, 음악으로 되돌아가라라고 말하면서도 만델시탐은 말에게로 달려가 수신자(아프로디테)의 이름을 불러야 했다. 시적 언어의 리듬은 탄생에서 회상으로, 그리고 반대방향으로도 이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시적 작업은 침묵의 지점에서부터 비롯된다. 바로 여기에서 역설처럼 보이는 것이 생겨난다. “침묵을 모르는 정적의 후렴이라는 구절은 시집 의 첫 번째 시에서 나오는데, 여기에서 정적은 시적 노동의 상징인 헬레네와 페넬로페의 물레와 비교된다(“금빛 꿀의 흐름이 병에서 흘러나왔다...”). 정적은 실을 잣고, 시적 작업을 반죽으로 만든다. 모든 것이 다 말해졌고 단어들로 말해질 수 없는 무언가가, 그리고 무엇을 가리키는지 불분명한 무용한 단어들이 남게 될 때 시적 작업이 비로소 시작된다.

 

이 시에서 묘사되는 모든 운동의 엠블럼, 또는 mise-en-abîme[각주:11]이 되는 것은 바로 간질이는 스카프(щекочущего шарфа)”라는 단어들이다. ‘간질이는(щекочущего: 추셰보)’이라는 단어에는 5개의 음절이 있고 그 중 한 음절만 강세를 받는다. 그런데 이 강세는 급하게 목구멍으로 삼켜진다.(“ще|ко|чу|ще|го|_|ша|рфа”).[각주:12]간질이는이라는 단어의 소리 자체가 사람을 간질인다. 단어의 의미는 그 음성학적 형태의 운동 안에서 체현된다. 자기부정의 소란은 간지럼만큼이나 견딜 수 없기에 이러한 소란은 중단되어야 한다. 다음 단어 스카프(ша|рфа: |)’의 첫 음절이 받는 강세는 더욱더 길게 늘여질 수 있는 것을,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갑자기 절단되어야만 하는 것을 절단한다.

 

가속화의 간지러움은 무엇에서 제동을 받는가? 음절 !’, 즉 침묵하라는, 입을 닫으라는 명령에서 제동을 받는다. 사실 이 시는 간지럽히는 샤에 대해 쓰인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시는 세 개의 작은 별 대신 간지럽히는 샤라는 제목으로 불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각주:13]는 그토록 찾고 있던 언어의 이름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침묵은 침묵의 위반, 즉 말을 멈추라는 명령 안에서 위풍당당하게 나타난다. 의미는 거부 그 자체, ''를 거부하는데, 언어는 이미 (비밀스럽게) 가 되고 있다. 이로써 의미는 거부 그 자체를 폭로한다. 단어의 의미는 중단의 순간에서부터 축적된 억압을 순간적인 전기 충격처럼 반대방향으로 가로지른다. 이는 마치 억압된 가동성, 내뱉지 못한 호흡에 대한 보상과도 같다. 말하자면 단어는 자기 자신에 반()하여 무언가를 의미한다. , 단어는 실제로 어떤 무덤인데 바로 자기 자신의 무덤이다

러시아어 알파벳 'Ш'. '샤'라고 읽고 음가는 'sh'이다. 뱀이 기어가는 소리 같아서 이렇게 그려놓은 듯 하다.

간질이는이라는 단어는 시가 독해될 때 생기는 독자(讀者)라는 저항을 내보내기도 하고 동시에 자신에게로 호출하기도 한다. 바로 이 단어 때문에 독자는 기이하게도 직시사(deixis)[각주:14]처럼 자기 자신을 알아보게 된다. 단어를 알아보는 것은 독자가 이 단어를 읽고 있는 자기 자신을 알아보는 것처럼 이루어진다. 내가 간지럽다라고 말할 때, 이것은 이미 간지럽힘을 멈추라는 명령을 의미한다. 강세를 받는 는 내가 호흡을 참을 때 축적된 운동과 일치한다. 한편, 는 호흡을 참는 것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것은 거울처럼 전치(轉置) 알아봄이라고 할 수 있다. 시는 내가 시를 읽을 때 하려고 하는 것 자체에 이름을 붙인다. 뒤에 이어지는 단어는 내가 그보다 앞에 나왔던 단어를 읽을 때 염두에 두었던 것에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실행한다.

 

의미는 실재적인 것에 침투한다. 단어는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느리게 표류하는 세계의 흐름을 포착해서 고정시키려고 하는데, 이 세계의 흐름은 단어 그 자체의 중지 안에서 독자의 억압된 비밀스러운 욕망으로서 회귀한다. 역시 알아차릴 수 없지만 이미 지나가 버렸기 때문에 순간적이라고 할 수 있는 전치로서 회귀한다. 원칙적으로 말하자면, 이것은 사실 여러 측면들이 교체되면서 생기는 효과일 뿐이다. 그러나 이때 우리는 순간의 미끄러져가는 신체에, 질료에, 체현된 무()의 숭고한 비밀에 접근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바로 그렇게 시는 헤겔이 사물에 접근하는 것, 자기 자신의 감각을 독립적인 물 자체의 감각으로 전이시키는 것으로 파악했던 것, 작업(Arbeit)과 일치하게 된다. 헤겔의 이러한 생각이 만델시탐에게 낯선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그의 아크메이즘의 아침(Утро акмеизмаб 1912-1913)에서 읽을 수 있다.

 

무언가를 짓기를 원하는 정신에 사로잡힌 사람이 보기에 아크메이즘은 자신의 무게를 무기력하게 거부하지 않고, 그 무게 안에 잠들어 있는 힘을 깨워서 활용하기 위해 그 무게를 기쁘게 받아들인다. <...> 재료의 실재성, 그리고 이겨내야만 하는 저항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고서 무언가를 짓는 것에 동의한다는 것은 광인이나 할 짓이다. <...> “산에서 뜯겨져 계곡에 떨어진 돌, 저절로 뜯겨졌거나 생각할 줄 아는 손이 내던진[각주:15] 튜체프의 돌, 그것은 바로 단어다. 질료의 목소리는 이 예기치 못한 낙하에서 분절적인 말이 되어 울려 퍼진다.[각주:16]

 

재료의 실재성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믿음은 단지 시적 작업의 필연적 조건일 뿐 아니라 시 안에서 검증되어야 하는 전제이기도 하다는 점을 덧붙일 수 있겠다. 바로 이 가공-승화의 과정이 질료의 저항을 일깨우고질료가 직접 말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시적 작업은 그 작업이 처음부터 오직 믿을 수밖에 없는 실재성에 대한 증명인 셈이다. “끝없이 증명하고 증명할 것.” 만델시탐은 이어서 다음과 같이 쓴다. “예술에서 무언가를 믿음으로만 쉽게 받아들이는 것은 예술가가 할 일이 아니다.”[각주:17] 


문자 또는 소리가 축적된 것으로서의 말은 그 자체로 어떤 의미도 포함하고 있지 않은데, 무의미의 의미 역시 포함하지 않는다. 저항, 즉 말 자체를 통해 전유된 말의 저항은 말하는 것과 글을 쓰는 과정에서 저항의 고유한 의미가 된다. ‘비어있는말 또는 가득 차 있는말은 그 자체로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둘 중 하나를 고른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말은 자신의 비어있음을 통해서 가득 차게 되는데, 오직 희망 없는 작업의 역동적 운동 안에서만 그러하다. 만델시탐의 다소 수다스러운, 술에 취하지 않은 맑은 정신(трезвость)[각주:18]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는 의미와 무의미한 말이 동등하게 가능하고 동등하게 의미 있다고 여기는 주해자들의 술에 취하지 않은 맑은 정신과는 정반대다


말하자면 시적 작업에서 의미는 음악의 정신으로터 탄생하는 것이다. 우리가 분석한 만델시탐의 시에서 생겨나는 비동시성의 효과를 가리켜 A. 크루쵸니흐는 전치(轉置)’, ‘창조적 작업의 비밀[각주:19]이라고 대단히도 정확히 일컬었다. 훗날 만델시탐은 시 석판의 송가(Грифельная ода, 1923)에서 이렇게 쓴다. “여기 공포가 쓴다, 여기 전치가 쓴다 / 납으로 만든 우윳빛 작대기로”. 혁명과 시는 마취하는 듯한 규칙적인 리듬으로, 이행의 발걸음으로 한가한 시간을 가득 채우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고 난 다음 이 리듬은 소란으로 변한다. 그러나 비밀스러운 작업, 그리고 혁명과 시의 작품은 언제나 따로따로 크기도 맞지 않는 듯한 지체(肢體)들의 전치, liaison, 혼외관계, 불법적 연결이다. 국가의 경계와 마찬가지로 침묵은 건너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위반되는 것이다. 경계이월, 휴지를 가로지르는 비행(飛行), 외관상의 연속성을 흐트러뜨리는 것. 언어는 단어에서 단어로의 낙차 또는 도약을 통해 작업한다. 사물들과 운동들이 서로 전치되고, 여기저기 헤엄치는 현재라는 시간의 강세 때문에 생겨나는 부정맥(аритмия)[각주:20] 속에서 시간의 작업이 진행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작업은 어쩔 수 없이 서로 부딪히고, 지각하고, 추월하는 시간들, 시간적 양태들의 작업이다. 우리 시대의 현재가 지니는 내용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 그리고 불법적으로 계속되고 있는 과거의 접합과 파열(‘붕괴’)을 통해 존재한다. 다른 평면들에서도 마찬가지다. 원자적 개인주의의 기획과 환상은 인간적 관계들, 상호적인 채무들의 활동적인 연속성과 충돌하고, 폭력 속에서, 그리고 아마도 우리 세계가 아직 모르는 강력한 융합 속에서 구현된다.

 

혁명의 형식은 반죽처럼 이겨져 비어있음의 기호가 되는 자기경멸, 자기폐기이다. 혁명은 자기 시대뿐만 아니라 미래의 역사가들에게도 혁명을 하나의 간극의 심연으로서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혁명은 심지어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도 금지하는 듯한데, J. 미슐레에 따르면[각주:21] 혁명은 기념비 대신 비어있음을 후손들에게 남겨준다.

 

우리가 그 자체로서의 역사적 사건의 형식이라는 문제를 건드리고 있는지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예를 들면, 2차 세계대전 때 자행된 유대인 학살(‘홀로코스트쇼아’)을 사유할 수 없다는 문제도 유사한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을까? 아마도 우리 시대의 가장 의미심장한 사건은 그 괴물 같은 끔찍함 때문에, 그리고 그 평범성(banality) 때문에 자신을 향한 시선을 거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각주:22] 유감스럽게도 이 사건을 은폐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왕국의 역사가 펼칠 (어서 도래해야 할) 새천년에 대한 마지막 기술적 준비를 목도한 이 사건의 조직자들은 후손들이 그것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이미 기획해 두었다.[각주:23]

 

조지 시걸(G. Segal)의 <홀로코스트> (1984, 샌프란시스코)


혁명의 파열은 계속 표류하고 있는 삶 위로 날아오른다. 혁명의 파열이 이미 도래했다면 이미 시작된 운동을 계속한다는 것은 포스트모던적과잉으로 비춰질 것이고, 혁명의 파열이 이제 곧 도래할 것이라면 바로 그 계속되고 있는 운동은 인내의 그릇을 넘치게 하는 마지막 한 방울로 보일 것이다. 계속하는 것과 파열하는 것의 이중성은 삶을 그 자신에 대해 동등하지 않은 것, 그 자신에 대해 과도한 것으로 만든다. 그리고 다시 이 잉여에는 두 가지 시점이 동등한 효력을 가지게 된다. 과도할 뿐 결코 필요하지 않은 존재의 절망, 그리고 자기 자신마저 제압하는 어마어마한 힘의 승리. 이 두 가지 시점은 혁명적 거울들의 체계를 통해 서로를 반영한다.

 

 

IV. 결론

 

나는 이 글에서 만델시탐과 횔덜린의 시적 전략이(그들을 분리시키는 거리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공통점[각주:24]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두 시인 모두 한가함, 잉여와 관련된 시의 본질, 즉 무위의 언어를 바탕으로 하는 무위의 주체의 말을 대상으로 작업한다. 두 시인에게 무위란 극복하면서 동시에 붙들어야 할 이행이다. 시는 어떤 간극에 붙들리기 위해 애쓰는데, 그 간극에서 음악 또는 문자는 아직 완전히 단어가 되지 않고, 단어는 또 단어대로 완전히 비어 있는 소리 또는 차가운 문자로 변하지 않는다. 무언가가 안정에도 불구하고 계속 움직이고 있고, 침묵에도 불구하고 계속 말하고 있을 때, 시의 휴지는 잉여와 잔여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두 시인에게서 휴지를 붙잡아내고 뛰어넘으려는 과제는 언어의 물질화, 그리고 의미의 구조들로부터 시적 질료의 해방으로 이어진다. 질료는 끓어올라 녹아내리고 언어로 주조되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우리가 분석한 두 편의 시에서 결국 의미는 외부에서 비롯된 신성 또는 신과 유사한 주체의 의지가 아니라, 잠재적으로 무한한 소란의 갑작스러운 중단에서, 그리고 갑자기 술에서 깨 정신이 맑아지는(두 시인을 묶어주는 모티프이기도 하다)[각주:25] 순간에 이루어지는 무위의 작업의 부정적 결과가 된다. 긴장된 침묵에서 태어나는 이름은 바로 이 침묵에 이름을 준다. 그렇게 두 작품에서 시적 창조의 논리는 헤겔과 맑스가 묘사했던 사유와 역사의 논리와 유사한 것이 된다. 횔덜린과 만델시탐은 순수하고 자유로운 시간을 실현(реализовать)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그들이 상연하는 막은 그 순수하고 자유로운 시간에 대한 경험을 얻게 한다.



  1. 본 논문의 이 절은 다음 저널에 발표된 바 있다. Вестник СПбГУ. 1999. Сер. 2. Вып. 2/3. С. 159-164. [본문으로]
  2. 혁명 자체와 마찬가지로 시 역시 그 집필된 날짜를 확정할 수 없다. 시집 『돌』(1916)에 수록된 판본에서는 마지막 행이 다음과 같다. “나는 목을 감쌀 스카프가 없다.” 내가 여기서 인용하는 판본은 1937년에 ‘복원’된 것이다. 텍스트는 Мандельштам О. Стихотворения. Проза. М.: Рипол-Классик, 2001. С. 43.에서 인용한다. [본문으로]
  3. 예를 들면, 다음 책에 있는 A. 메츠의 주석을 보라. Мандельштам О. Полное собрание стихотворений. СПб.: Академический проект, 1997. С. 532-533. [본문으로]
  4. [역주] 7행의 ‘шёл(숄: 걸었다)’, ‘шёлк(숄크: 실크)’ 그리고 8행의 ‘шёлк(숄크: 실크)’, ‘щекочущего(셰코추셰보: 간질이는)’, ‘шарфа(샤르파: 스카프)’ 등의 단어들은 유사한 소리들로 시작되어 일종의 두운을 이룬다. [본문으로]
  5. [역주] <울랄룸(Ulalume)>은 에드거 앨런 포가 1847년에 쓴 시이다.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사랑하는 여인의 죽음을 슬퍼한다. [본문으로]
  6. [역주] 러시아어의 모든 단어에서 한 음절은 반드시 강세를 받는다. 강세를 받는 음절은 모음 알파벳 그대로 소리가 나지만 나머지 음절은 다르게 변형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창문을 뜻하는 ‘окно[okno]’는 마지막 o가 강세를 받아서 첫 번째 o는 [a]로 발음된다. 따라서 이 단어는 ‘오크노’가 아니라 ‘아크노’로 발음된다. [본문으로]
  7. [역주] 약강격이 모든 운보에서 실현된다면 다음과 같이 되어야 한다. 타타’|타타‘|타타’|타타‘|타타’|타타‘|. 그러나 만델시탐의 이 구절의 율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타타|타타’|타타 || 타타|타타‘|타타’| 네 번째 운보에 가서야 강세를 받는 ‘샤’가 날숨으로 터져나오고, 그 다음 강세를 받아야 하는 ‘베(ve)’는 강세를 받지 않고 휴지부로 끝나버린다. [본문으로]
  8. 만델시탐이 자신의 시들 중 한 편을 타́’-타타’타-타타타타타’(따옴표는 강세 표시-역자)와 같은 리듬으로 읽은 바 있다는 E. 게르시테인의 이야기를 참고하라. (Герштейн А. Новое о Мандельштаме. P.: Atheneum, 1986. C. 56) [본문으로]
  9. 가속화에 대해서는 만델시탐의 논문 「단어의 본성에 대하여」(О природе слова)를 보라.(Мандельштам О.Э. Слово и культура. М., 1987. С. 55-67). “오늘날의 역사에서 각 일 년을 하나의 세기로 여기는 과장은 정말 필요하다. 하지만 축적되어서 자라나는 역사적 힘, 역사적 에너지의 잠재력이 광포하게 실현되는 과정에서 기하급수, 또는 정확하고 규칙적인 가속화와 유사한 무언가가 포착되기도 한다.”(55쪽) 더 뒤에서는 이렇게도 쓴다. “언어가 발전하는 속도는 삶 그 자체가 발전하는 것에 맞추어 측정할 수 없다. 언어를 삶의 요구들에 기계적으로 끼워 맞추려는 모든 시도는 일찍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폭력적이고 기계적인 끼워 맞춤, 동시에 걸음이 빠른 사람이면서 거북이이기도 한 언어에 대한 불신.”(60쪽. 두 인용문에서 이탤릭체는 인용자의 것. ̶A.M.) 최근의 정치적 사건들과 관련하여 내가 이미 언급한 대로, 정체와 가속화는 동일한 상황에 대한 두 가지 시점이다. 만델시탐의 이러한 발언은 말하는 사람을 앞지르기도 하고, 말하는 사람보다 뒤쳐져 있기도 한(말을 하는 사람은 언어에게로 난 길을 따라 헤매기도 하고 언어로부터 달아나기도 한다) 언어의 삶을 뛰어넘는 잠재력을 당당하게 확증해준다. 그러나 그 서브텍스트를 염두에 두면 이러한 발언은 아이러니한 것인데, 왜냐하면 제논의 역설에 대한 암시는 언어가 그 자신과 원칙적으로 불일치한다는 것, 천천히 걷는 말과 속도가 빠른 생각이 ‘동시적인’ 비동시성을 지닌다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10. [역주] 마군은 여기서 언어유희를 하고 있다. ‘혼잡’을 뜻하는 ‘замешательство(자메샤텔스트보)’와 ‘반죽을 만드는 것’을 뜻하는 ‘замешивание(자메시바니예)’, 그리고 ‘텍스트’를 뜻하는 текст(텍스트)’와 ‘반죽’을 뜻하는 ‘тесто(테스토)’가 유사한 소리들 때문에 서로 뒤엉키면서 그의 문장 자체가 반죽의 형상을 띄게 된다. [본문으로]
  11. [역주] 미장아빔. 예술 기법으로서 ‘Mise en abyme’이라고도 하며, 불어로 ‘심연에 배치하는 것’을 뜻한다. 서로 마주보고 있는 두 개의 거울 사이에 놓인 물체의 이미지가 거울들에 무한히 반사되며 반복되는 형상에서 이 기법의 기본 아이디어를 찾을 수 있다. 앙드레 지드는 벨라스케스의 그림 <시녀들(Las Meninas)>을 예로 들면서 미장아빔을 처음으로 현대 비평에 도입했다. [본문으로]
  12. [역주] 러시아어 к를 발음할 때 혀의 뒤쪽을 목구멍에 가까운 입천장에 갖다 대야 하는 점을 가리키는 듯하다. 또, '셰'를 먼저 발음하고 '코'로 넘어가면서 혀가 갑자기 뒤로 이동하는 것도 무언가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움직임과 유사하다. 이 구절과 관련하여 러시아어 조음위치와 조음방법에 대해서 상세하게 조언해준 황철현 씨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본문으로]
  13. ‘이름을 주는’ 단어들 중 첫 번째 단어, 즉 ‘자메샤텔스트보’에서도 강세를 받는 ‘샤’가 들어있다. [본문으로]
  14. [역주] ‘deixis’는 언어학 용어로서 직시, 또는 직시사라고 한다. ‘나’, ‘너’, ‘여기’ 등과 같이 화자나 청자, 발화 위치 등에 따라 뜻이 달라지는 단어나 어구들을 가리킨다. 마군에 따르면, 누군가 ‘나’라고 발화할 때 각자에 따라 그 ‘나’의 지시체가 달라지듯 독자가 ‘간질이는(셰코추셰보)’이라는 단어를 읽을 때, ‘간질이는’이라는 단어는 각각의 독자를 가리킨다. 이 단어를 발음함으로써 독자는 이 시를 읽고 있는 독자로서의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본문으로]
  15. [역주] 19세기 중반에 활약했던 러시아 시인 표도르 튜체프(Ф.И. Тютчев)의 시 「Probleme」(1833/1857)에 나오는 구절을 만델시탐이 변형한 것이다. [본문으로]
  16. Мандельштам О. Утро акмеизма // Мандельштам О. Камень. Л.: Наука, 1990. С. 188. [본문으로]
  17. Там же. С. 190. [본문으로]
  18. [역주] 러시아어 명사 ‘трезвость(트레즈보스티)’는 술에 취하지 않은 상태를 가리키는데, 적절한 번역어가 없으므로 다소 길더라도 ‘술에 취하지 않은 맑은 정신’이라고 옮긴다. [본문으로]
  19. 다음을 보라. Крученыйх А. Сдвигология русского стиха // Крученых А. Кукиш прошлякам. Таллинн: Гилея, 1992 [1921년판의 리프린트], 특히 67쪽. [본문으로]
  20. [역주] 접두사 а의 의미를 염두에 둔다면 '리듬이 없는 상황'이라고 파악할 수도 있겠다 [본문으로]
  21. Michelet J. Histoire de la Révolution Française. P.: Gallimard, 1952. P. 1. [본문으로]
  22. 홀로코스트와 관련해 평범성에 대한 판단이라는 아포리아에 관해서는 다음을 보라. Arendt H. Eichmann in Jerusalem. N. Y.“ Viking Press, 1963. 그리고 이 저작에 대한 나의 해석을 보라. Магун А. Понятие суждения в философии Ханны Арендт // Вопросы философиию 1998. № 11. С. 102-115. [본문으로]
  23. J.-F. 리오타르의 주장과 비교해보라. Lyotard J.-F. Le différend. P.: Éditions de Minuit, 1983. [본문으로]
  24. 여기서 영향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지만, 부인인 나데즈다 만델시탐은 만델시탐이 횔덜린의 시들을 읽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그의 독서는 그의 창작세계를 형성했다... 그가 마치 직접 접촉했던 것처럼 보였던 책들, 그의 삶의 특정 시기 또는 삶 전체를 규정했던 책들이 있었다. 삶의 특정 시기를 규정하는 새로운 책을 만나는 것은 마치 친구가 되도록 운명 지어진 사람과 만나는 것과 같았다. <...> O.M.은 괴테, 횔덜린, 뫼리케, 낭만주의자들 같은 시인들도 알고 있었지만, 이것은 단지 독서일 뿐이었지 만남은 아니었다.”(Мандельштам Н.Я. Воспоминания. М.: Согласие, 1999. С. 274) “아르메니아에서 만델시탐은 독일 작가들에게로 돌아왔고 30년대에는 열심히 그들의 책을 샀다. 괴테, 두 클라이스트들, 헤르더 기타 등등. 그는 클롭슈톡도 들였는데, 왜냐하면 그가 말하길 그의 작품은 오르간 소리처럼 들리기 때문이었다. 그 밖에도, 뫼리케와 횔덜린의 책들도 모았다.”(같은 곳. C. 288) [본문으로]
  25. 1801년 12월 4일 횔덜린이 벨렌도르프에게 보낸 유명한 편지에서 ‘유노의 맑은 정신(Junonische Nüchternheit)’은 동시대 서구의 운명과 동일시된다.(Hölderlin F. Werke, Briefe, Dokumente. S. 788.) 만델시탐의 작품에 나타난 맑은 정신에 대해서는 시 “한밤에 처녀들의 용감함은...”(우리가 분석한 시와 마찬가지로 1913년에 쓰였다)을 보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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