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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화폐론과 한국 금융시장 제도화 연결짓기

 

 

박기형 | 서교인문사회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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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원고는 2020년 서교연 컨퍼런스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1950~70년대 한국 금융체계 형성에 대한 시론적 분석 : 자본주의 화폐순환에 대한 국가관리를 중심으로"가 원제로, 향후 연구를 위한 문제설정을 모색하는 시론적 글이라는 점을 미리 밝힙니다. 연구과제를 발전시키는 데  소중한 의견을 나눠준 서교연 회원들, 본 원고의 의의와 한계를 명확히 지적해주시고 향후 연구방향을 설정하는 데에 큰 도움을 주신 토론자 지주형 선생님께 감사합니다.

 

1. 서론 : 자본주의 화폐순환에 대한 국가관리와 한국 금융체계 형성

 

   본 논문은 1970년대 한국의 사금융을 각종 금융기관들로 제도화하는 과정을 자본주의 화폐에 관한 논의를 중심으로 재구성해보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자본주의의 화폐순환과 자본축적에 국가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밝히고, 그러한 국가관리가 '고리대 자본과 이자 낳는 자본 간의 불분명한 경계'를 어떻게 규제하는지 동시에 산업자본 내의 유휴자본이 이자 낳는 자본으로 배치전환하도록 유도·강제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국가관리가 효과적으로 이뤄지기 위해선 필수적으로 집중화된 은행체계를 필요로 한다. 반대로 이러한 집중화된 은행체계를 구축하기 위해선 끊임없이 '이자 낳는 자본'이 '고리대 자본'으로 퇴행하는 문제, 또는 산업자본 내의 유휴자본이 이자 수취만을 목적으로 삼게 되는 문제에 국가기구가 개입해야 했다. 1970년대 한국금융시장 제도화에서 집중적으로 진행된 사금융 양성화는 이러한 '자본주의 화폐의 순환에 대한 국가관리', 특히 '이자 낳는 자본에 대한 국가관리'의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970년대는 정치적으로는 유신체제라는 국가권력의 형성, 경제적으로는 산업부문에서 중화학공업화라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 시기다. 이와 함께 금융부문에서는 금융시장의 초기 형태가 갖춰진 시기이기도 하다. 1금융권을 비롯한 제2금융권, 서민금융, 증권·주식 시장 등 다층적이고 위계적인 금융시장 구조가 자리잡아가는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1970년대 한국금융시장 제도화와 관련한 가장 획기적인 사건은 바로 1972년 '8.3조치'라고 할 수 있다. 박태균(2013)8.3조치를 산업합리화 정책의 일환으로 평가하였으며, 이성형(1985)은 풀란차스의 자본주의 분파론에 입각해 이자 낳는 자본의 산업자본으로의 강제적 전환이라고 평가하면서, 재벌과 중간계급, 노동계급 간의 계급갈등과 그에 대한 국가개입을 설명해냈다. 하지만 19728.3조치가 비공식 금융부문으로 법제도 바깥에 있던 사금융 시장을 강력하게 규제한 것은 사실이나, 한국금융시장이 체계를 갖춰나가는 과정은 8.3조치를 전후로 다양한 법제도 마련을 통해 진행되었다.

 

   한국 사금융시장은 계, 무진, 사채업자 등 다양한 종류의 사금융으로 이뤄져있었으며, 이러한 각양각색의 화폐자본은 제도권 은행들과 유리된 채로 유통되고 있었다. 이러한 금융시장의 이중구조는 제도권 은행을 이용할 수 없었던 서민과 소상공인, 중소기업들에게는 금융공백을 메워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높은 인플레이션과 상당한 금리격차를 활용한 화폐적 투기의 장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재벌을 비롯한 제도권 은행으로부터 자금을 빌릴 수 있었던 기업들도 대출 자금 중 일부를 사금융시장에 유통시킴으로써 이자수취를 노리기도 했다. 더욱이 외자 도입을 중심으로 수출주도 경제성장을 하는 수출주의 부채경제 모델에서는 국제경제환경의 변화에 따라 불안정성에 지속적으로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차관 도입으로 장기자금을 마련한 기업이라 할지라도, 자금수요를 충족할만큼 충분한 자금공급을 받기 어려웠다. 제도권 은행과 정책금융으로부터 배제된 서민, 소상공인, 중소기업의 경우엔 더욱 자금수급 상황이 열악했다. 이에 이들은 단기차입금을 마련하고자 사채시장을 이용하게 되었다. 그럼으로써 금융시장 이중구조는 1970년대 초반까지 완화되지 않은 채 경제위기 국면마다 심화되었다. 물론 사금융시장은 금융시장의 이중구조 가운데서 금융공백을 메워줌으로써 일정한 수준에서 한국의 자본순환과 축적을 유지해주었다. 그러나 사금융시장은 이자 낳는 자본을 고리대 자본으로 퇴행시킬 위험이 컸고, 산업자본들의 유휴자본이 생산적으로 투자되지 않는 유인을 제공했다. 더욱이 경제위기를 조절하려는 국가의 통화정책이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집중화된 은행체계가 필요했음에도, 은행을 중심으로 한 안정적인 금융시장이 형성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에 박정희 정부는 1960년대 초반부터 1970년대 중후반까지 계속해서 사금융시장을 관리하고, 나아가 제도금융권으로 흡수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들을 취하게 된다.

 

   이상의 과정을 이론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본 논문은 자본주의 화폐와 국가 관계를 설명하는 쉬잔느 드 브뤼노프의 논의와 이자 낳는 자본에 대한 칼 마르크스의 논의를 참고하고자 한다. 8.3조치를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설득력 있게 분석한 이성형(1985)은 해당 논문에서 풀란차스의 자본주의 분파론을 통해 계급갈등을 그려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사금융의 자본 성격을 제대로 규명하지 않은 채 넘어갔고, 이는 자신이 이론적으로 참고하고자 했던 브뤼노프의 화폐에 대한 국가관리를 충분히 개진하지 못한 한계를 낳고 만다. 최진배(1989)는 사금융의 자본 성격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의하면서, 8.3조치 외에 1960-70년대 동안 진행된 사금융 시장에 대한 정부정책들의 의미를 재규정하고자 했다. 특히 끊임없이 발전과 쇠퇴를 반복하는 사금융시장의 재생산과 그 내에서의 자본순환에 대해 설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최진배는 이자 낳는 자본에 관한 마르크스의 논의가 제시한 문제설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이자 낳는 자본과 고리대 자본을 이분법적으로만 파악하다보니, 사금융을 단순히 이자 낳는 자본으로 규정하게 되고, 그 결과 사금융이 은행체계를 위협하는 이유나 고금리 사채로 인해 부채위기가 초래되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지 못했다.

 

   따라서 본 논문은 8.3조치와 함께 사금융양성화3법을 비롯한 일련의 한국금융시장 제도화 과정을 자본주의 화폐, 특히 '이자 낳는 자본에 대한 국가 관리라는 문제설정' 속에서 재조명해봄으로써, 이성형과 최진배를 비롯한 한국 사금융에 관한 분석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그 함의를 더욱 진전시켜보고자 한다.

 

 

2. 한국 사금융의 자본 성격 규명에서 제기되는 새로운 문제설정

 

   “사금융은 보통 제도화된 또는 공식적으로 인정된 신용제도 밖에서 독자적인 증식운동을 하는 자본으로 정의된다(최진배 1989, 193).” 이러한 정의는 '사금융이 제도화되었는가 아닌가'라는 기준에서 규정된 것이지만, '사금융이 자본으로서 어떤 성격을 갖는가'에 대해서는 답해주지 못한다. 최진배 또한 단지 사금융이 제도 밖에 있다고 해서, 그 자체로 비합리적이거나 비효율적이라는 비판과 나아가 그러한 부정확한 비판을 근거로 사금융의 제도화를 정당화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사금융의 성격을 규명하는 일은 사금융의 운동원리와 재생산 구조를 규명하는 출발점으로, 사금융 제도화 과정을 재조명하도록 해준다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한국 사금융은 어떤 성격의 자본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마르크스의 '고리대 자본'과 '이자 낳는 자본'에 관한 논의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이자 낳는 자본은 상인자본과 함께 자본주의 생산양식 이전부터 존재했다. 전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여분의 화폐(축장)은 존재했는데, 이러한 화폐축장자가 고리대업자로 전화할 때 비로소 자본이 되고, 나아가 이자 또는 고리대를 수취할 수 있게 된다. 전 자본주의 시기 고리대는 두 가지 형태, 봉건귀족들에게 화폐를 대부하거나 수공업자와 농민 등의 소생산자에게 화폐를 대부하는 형태를 취한다. 이를 통해 고리대는 한편으로는 봉건귀족들의 부와 소유를 훼손하고 파괴하는 작용을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소생산자들의 생산을 훼손하고 파괴한다. 그리하여 고리대 자본은 고대적·봉건적 생산양식을 궁핍화하고,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대신 마비시킴으로써 생산양식의 재생산을 제약한다. 한마디로 고리대는 생산양식의 재생산을 방해하고 종국에는 파괴한다(하비 2016, 357-359; 마르크스 2010).

 

   이에 반해, 자본주의의 이자 낳는 자본은 고리대 자본과 다르게 생산양식의 재생산에 기여한다. 우선 고리대 자본과 이자 낳는 자본은 '현상적'으로 다르다. 양자는 화폐대부자가 마주하는 차입자의 모습에 의해 명확히 구분된다. 앞서 설명했듯이, 고리대 자본은 봉건귀족이나 수공업자와 농민과 같은 소생산자를 대상으로 하는 반면에, 이자 낳는 자본은 산업자본가나 상업자본가를 대상으로 한다. 이렇게 이자 낳는 자본이 상대하는 대상의 변화는 그것의 기능과 존립조건이 변화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이자 낳는 자본이 기능하는 조건이 변화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확립되면서, 이자 낳는 자본은 상업자본과 산업자본이 얻는 이윤으로부터 이자를 수취하게 된다. 이자 낳는 자본이 상업자본과 산업자본의 자기증식활동에 종속되는 것이다. 반대로 자본주의의 이자 낳는 자본은 상업자본과 산업자본의 자기증식활동을 촉진함으로써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재생산에 기여한다(하비 2016, 361; 마르크스 2010).

 

   최진배는 (명시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마르크스의 개념적 구분을 참고함으로써, 한국 사금융이 누구를 대상으로 하는지,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본다. 이창렬(1966)과 콜·박영철의 연구(1984)에 따르면, 한국 사금융은 중개기관, 차입자, 자금공급자의 특성에 따라 원시적 개인신용시장(또는 객주, 농가, 기타)와 계시장(또는 계), 비공식적 상업어음시장, 사채(私債)시장, 준공금융기관(또는 서민금고)로 구분된다. 최진배는 이를 참고하면서, 만약 이창렬과 콜·박영철의 유형을 수용한다고 하더라도, 원시적 개인신용시장과 계시장은 소상인, 소기업 그리고 농민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리대 자본, 비공식적 상업어음시장과 사채시장은 이자 낳는 자본이라고 정의한다(최진배 1989, 198).

 

   그러나 한국 사금융을 이렇게 명확히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것이 과연 타당할까? 우선 최진배가 고리대 자본으로 분류하는 원시적 개인신용시장과 계(예컨대, 농어촌계, 식리계 등)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위 유형들에 속하는 대표적 사례가 바로 농어촌 고리채다. 하지만 한국의 농어촌 고리채는 위에서 정의한 파괴적 힘을 가진 고리대 자본만으로 규정할 수 없다. 이는 1961년 박정희 정부에 의해 취해진 일련의 농어촌 고리대 정리사업에 대한 평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농어촌의 부채가 고리대금업자의 착취라고 규정하면서, 농어민들의 생계안정과 농어촌 경제합리화를 위해 막대한 부채를 정부보증 하에 일소하고자 했다. 하지만 군사정부의 계엄 하에 고리채 신고기피자에 대한 단속과 행정지도를 강압적으로 시행했음에도, 농어민들은 신고를 회피하고 채무를 사전 조정했고, 농어촌 내에서 행정을 집행하는 자들 또한 태만한 판정과 기재오류를 빈번히 일으키는 등 냉소적이고 부정적인 대응에 직면하였다. 물론 복잡한 부채관계가 정리되고 채무상환 압박이 줄어들었으며 채권채무관계에 대한 법적 보호가 제공됨으로써, 생계불안정과 농어촌 생산력 저하 등의 문제가 일부분 개선되었다. 하지만 위 정리사업에서 드러난 일련의 반발은 농어촌 고리채를 고리대금업자에 의한 착취라고 일률적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채권자와 채무자 모두 해당 농어촌 내의 구성원들이었다는 점, 사채만이 아니라, 농어촌의 계 등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해당 고리채가 현금만이 아니라 현물대부 또는 현금-현물대부 등 다양한 형태를 띠었다는 점, 차입자의 사용처에 생계비, 교육비, 관혼상제비 등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를 놓고 볼 때, 농어촌 고리채는 제도화된 금융의 혜택을 입지 못하는 농민들에게 필요한 자금을 융통해주는 보완물이자, 최소한 절대빈곤의 농민에게 생계를 유지시켜주며 농어업의 활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이른바 상호대부와 연대보증 하에 해당 농어촌을 유지하고 적어도 구성원들의 생계를 유지하도록 돕는 사회안전망의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채무변제용 채무나 관혼상제를 치르기 위해 급히 급전이 필요한 이들의 현금수요를 노린 채무, 쌀값 변동과 시세차익을 노리고 추수기 전후 농민들을 대상으로 한 단기채무 등은 농민의 생계를 보장해주거나 농어촌 사회를 지탱시켜주는 것과는 거리가 멀며, 생활수준을 최저 생계비 이상으로 개선시킬 수 없도록 제한하는 효과를 동반하기도 했다. 이렇게 원시적 사금융시장은 고리대 자본의 개념을 일률적으로 적용되기 어려운 양가적 측면을 지니고 있다. 실제 농어촌 고리채 정리사업의 경우에도 농어촌 사금융을 해체시키기보다는 부채 신고 및 상환 등의 행정적 조치를 수정하고 농어촌 금융기관으로서 농협·수협의 역할을 보완하는 등 일정한 타협책을 찾게 되었던 것이다(이명휘 2010; 전재호 2010).

 

   이렇게 원시적 개인신용시장과 계시장 또한 각 시장이 대부하는 차입자들이 속한 영역의 사회경제적 활동을 재생산하는 데 일정부분 기여한다는 점에서 온전히 고리대 자본이라고 규정하긴 어렵다. 오히려 이자 낳는 자본이 착취적 성격을 강하게 띠는가, 아니면 생산적 성격을 강하게 띠는가의 문제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마르크스의 고리대 자본과 이자 낳는 자본에 대한 논의의 초점을 놓치지 않도록 해준다. 마르크스가 지적했듯이, 자본주의 하에서 이자 낳는 자본의 독특성은 화폐대부자가 상대하는 차입자의 모습, 즉 차입자가 누구인가에 따라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마르크스가 차입자의 모습을 대비시키는 것은 고리대 자본과 자본주의의 이자 낳는 자본 간의 차이, 나아가 산업자본과 이자 낳는 자본 간의 상호종속을 보다 명확히 드러내기 위함이다. 다시 말해, 화폐자본이 대부되어 이자를 생산할 때, 그 과정이 일정하게 생산자본으로 유통되고 생산 활동, 특히 자본의 자기증식과정으로부터 자신의 이윤을 수취하는 것이라면,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재생산에 기여한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염두에 두고서, 한국 사금융을 다시 살펴본다면, 아래와 같이 말할 수 있다. 고리대 자본과 자본주의의 이자 낳는 자본 간의 경계, 이자 낳는 자본의 생산적 성격과 착취적 성격 간의 경계는 불분명하며 언제나 유동적이다. 이제 고리대 자본이 갖는 양가성은 이자 낳는 자본이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기여하는지 아닌지라는 문제설정을 드러낸. 그리하여 위 문제설정을 통해 우리는 자본주의 생산양식, 특히 자본순환에 이자 낳는 자본이 생산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유도·규제하는 문제, 이자 낳는 자본에 대한 관리라는 쟁점을 도출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설정으로의 전환이 타당한지, 사금융 시장의 다른 유형들을 좀 더 살펴보자. 비공식적 상업어음시장과 사채시장 또한 온전히 이자 낳는 자본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 이 유형들 또한 생산자본의 자기증식활동에 기여하는 것만은 아니다. 이 유형들에서 대부 대상으로 삼는 기업과 소상공인들 또한 농어촌 고리대의 경우와 같이 다양한 이유로 대부를 한다. 때론 생산에 필요한 기계설비를 구입하는 자금을 빌리기도 하고, 때로는 다른 채무상환을 위한 용처에 쓰기도 한다. 전자의 경우라면, 생산을 지속하고 확대하는 데 필요한 고정자본, 유동자본을 구입한다는 점에서 자본순환을 촉진한다고 볼 수 있다. 그에 반해 후자의 경우, 특히 여러 차례에 걸쳐 채무를 상환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면, 이는 높은 금융비용을 치러야 하는 것이므로 일정부분 생산활동을 유지하는 데 기여한다고 볼 수는 있겠지만, 오히려 생산활동을 일정 수준에서 제약하는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실제로 1972년에 전격적으로 취해진 경제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일명 8.3조치)는 후자에 해당하는 상황, 기업들의 막대한 채무상환 문제를 타개하고자 했다. 더욱이 당시 박정희 정부는 사채시장에서의 위장사채를 거론하며, 자본가들이 경제발전에 기여하지 않는 부도덕함을 비판했다. 물론 정말 위장사채가 1970년대 초 경제위기를 일으킨 주요 요인이냐는 것에 대해선 논쟁의 여지가 있다(박태균 2013). 그럼에도 위와 같은 비판은 우리의 문제설정과 관련해 눈여겨 볼만 하다.

 

   마르크스는 역사적으로 이자 낳는 자본과 산업자본 간의 계급분파 갈등이 있다고 설명하면서도, 계급분파들 사이의 관계로 나타났던 것이 개별 자본가의 인격체 내에서 내부화된다고 강조한다. “모든 자본가는 두 개의 각기 다른 역할을 함께 수행한다. 산업자본가는 항상 자신의 자본 가운데 일부를 화폐형태로 갖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언제나 자신의 화폐를 사용해 생산을 확장함으로써 잉여가치 생산을 늘리거나 혹은 그 화폐를 타인에게 그냥 빌려주고 이자를 받을 수도 있는 선택의 여지가 있다. 양자 가운데 무엇을 선택할지의 문제가 개별 자본가에게는 지속적인 유혹의 대상이다(하비 2016, 284).” 산업자본가는 고정자본 마련 등의 이유로 유휴자본을 일부 갖는다. 문제는 이를 생산에 재투자할 것인가 아니면, 타인에게 대부할 것인가이다. 만약 산업자본가가 자신의 유휴자본을 대부한다면, 해당 자본은 이자 낳는 자본으로 전환된다. 그럴 때, 산업자본과 이자 낳는 자본의 경계는 흐려진다. 그리하여 해당 자본이 다른 자본가들의 생산활동에 기여하는지 검토할 필요가 제기된다.

 

   예컨대, 당시 박정희 정부가 외자 도입 중심의 수출주도 산업화 전략 하에서 수출산업에 뛰어든 재벌들은 국내 일반은행대출금리 보다 현저히 낮은 수준의 금리로 차관을 빌릴 수 있었다. 이렇게 저금리로 확보한 부채를 사채시장에 유통하여 고금리 대출을 함으로써 비공식적으로 이자수취를 할 수 있었다(박찬종 2014, 70-73; ·박영철 1984, 1981-1982; 최진배 1989). 이렇듯 1960~70년대 초 한국의 산업자본 중 일부는 이자 낳는 자본, 심지어 차관을 고금리 사채로 유통하거나 위장사채를 활용하여 비공식적으로 추가수입을 올리는 식으로 생산활동을 제한하는 등 고리대 자본으로 전환되기도 했다.

 

   이상의 논의를 살펴볼 때, ‘이자 낳는 자본에 대한 관리라는 문제는 두 측면 모두에서 제기된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고리대 자본과 이자 낳는 자본 사이의 불분명한 경계. 이자 낳는 자본이 고리대 자본으로 퇴행하도록 놔두는 게 아니라,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재생산에 기여할 수 있도록 그 불분명한 경계를 끊임없이 조절해야 한다는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산업자본 내에서 주어진 선택의 문제. “화폐자본과 생산자본의 두 가지 역할 중 어느 편의 입장을 취하고 행동하는지(하비 2016, 288)”가 자본축적에서 중요한 쟁점이 된다. 본 논문의 문제설정에 맞게 다시 표현한다면, 이 또한 생산자본의 일부가 이자 낳는 자본으로 전환할 때, 그것이 얼마나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재생산에 기여할 수 있는가가 주요한 관심사가 된다는 것이다.

 

 

3. 이자 낳는 자본에 대한 국가관리

 

   이자 낳는 자본의 성격상, 개별 자본들은 언제나 이자 수취의 유혹에 직면한다. 생산적인 곳에 투자하는 위험을 감수하기 보다는 대부하여 이자를 받는 보다 쉽게 보이는 선택지가 늘 그들 앞에 놓여있다. 그렇기에 개별 자본들은 자본 일반의 이해관계와 상반되는 방향으로 행동할 수 있다. 다수의 개별 자본이 이자수취만 할 뿐이라면, 생산성이 저해되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개별 자본들을 넘어선, 자본 일반의 이해관계를 자신의 이해관계로 삼는 단위가 요청된다. 이는 자본주의 재생산의 문제 전반과 관련되지만, 본 논문과 관련해서는 특히 이자 낳는 자본에 내재한 모순을 해결하는 데, '국가'의 역할이 필수적이다. 그렇기에 사금융 시장의 제도화, 금융체계 형성이라는 문제와 관련해, 이자 낳는 자본에 대한 '관리라는 문제설정을 풀어내기 위해서는 이론적으로 '국가'의 문제를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 지점에서 본 논문은 자본주의 화폐와 국가의 관계를 설명한 브뤼노프의 화폐에 대한 국가관리논의를 참고해보려 한다. 브뤼노프는 화폐자본 순환에의 국가 개입, 해당 순환을 지속·촉진하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화폐 피라미드에 대해 이야기한다. 본 논문은 브뤼노프의 논의에서 한국 사금융에 대한 국가 개입과 이후 진행된 다층적 위계구조를 지닌 금융시장 형성을 설명하는 데, 어떤 이론적 가능성을 시사해주는지 검토해보려 한다.

 

 

1) 브뤼노프의 화폐에 대한 국가관리논의

 

   자본주의 화폐에 관한 문제의식을 금융시장의 다층적 위계구조 형성과 연결시켜 논의한 대표적인 학자로 쉬잔느 드 브뤼노프가 있다. 브뤼노프는 국가와 자본의 제2장에서 화폐의 국가관리에 대해 설명한다. 브뤼노프는 M-C-M'으로 표현되는 자본순환 도식의 작동에서 국가는 어떤 역할을 하는지 규명하고자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자본순환을 보장함으로써 자본축적을 지속하기 위해 국가가 노동력과 화폐 재생산에 개입한다고 본다. 다시 말해, 자본순환 과정의 전후, 그리고 순환에 속한 요소들 각각의 관계에 국가가 개입하여, 자본순환이 순조롭게 작동되도록 보장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노동력 관리 측면에서는 보다 쉽게 이해된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노동시간에 대한 국가규제다. 무제한적인 노동시간 연장은 노동력 상품 자체가 재생산될 수 없도록 하는 사태를 낳을 수 있기에, 노동시간을 규제함으로써 노동력 상품의 재생산을 국가가 관리하려 한다. 이는 자본순환 전 단계에서의 국가개입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화폐에 대한 국가관리는 도대체 어떤 지점에서 어떻게 이뤄지는 것일까? 자본주의에서 상품은 단지 경제적 대상이 아니라 종별적인 사회적 관계를 내포한다. 자본주의 하에서 사적 노동은 시장에서 화폐로 판매됨으로써, 노동상품의 교환가치가 확립된다. 이처럼 사적 노동이 일반적 등가물이 되기 위해선  사회적으로 인정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 브뤼노프는 이를 자본주의 화폐의 측면에서 재규정한다. 자본주의에서 화폐가 일반적 등가물로 존재한다면, 일반적 등가물로서 지배적 생산양식에 의해 부과되는 제약이 있다. 이를 가리켜, 브뤼노프는 자본주의 품생산의 사회적 조건에 의해 부과되는 화폐제약이라고 부른다. 나아가 이러한 제약 속에서 자본주의 화폐가 일반적 등가물로 기능하도록 뒷받침하는 자본주의에 특유한 금융체계가 있으며, 그 금융체계의 형성 및 작동에 국가가 개입한다고 본다. 달리 말해, 국가가 화폐를 발행(창조)하지 않지만, 국가가 금융체계를 형성 및 작동시킴으로써 자본주의 화폐가 자본주의화폐로서 존재하도록 하는 데 기여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브뤼노프 1992, 60-63).

 

   특정 화폐가 보편적으로 통용되기 위해서는 '사적 노동에 대한 사전인정'이 이뤄져야 한다. 이는 해당 화폐의 '태환성'이 확보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일반적인 자본순환 가운데에는 다양한 화폐형태들이 존재한다. 그럴 때 화폐가 자본주의 생산양식 하에서 기능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일반적 등가물이 되어야 한다. 다양한 화폐형태들이 어떠한 주어진 순간에도 주어진 비율로 서로 교환 가능해야 하는 것이다. 나아가 그 태환성이 언제 어디서나 보장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자본주의 화폐의 태환성을 보장하기 위해 국가가 필연적으로 개입한다. 국가는 사적으로 화폐를 주조하거나 발행하는 행위를 전면 금지하거나, 사적으로 발행할 수 있도록 허용하면서도 국가의 규제를 받도록 제한한다. 이런 식으로 국가는 자신의 영역 내에 유통 중인 다양한 종류의 화폐들을 자신이 보증하는 특정한 화폐형태로 태환할 수 있도록 관리한다. 그럼으로써 그것들이 자본주의 화폐로서의 성질을 가질 수 있도록 보장한다. 나아가 하나 이상의 국가가 존재하므로, 상이한 국민통화들이 태환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다양한 국민국가들에 의해 확립된 규칙에 따라 발행되는 국제화폐 또한 존재하게 된다. 그리하여 은행에서 사적으로 발행되는 화폐, 국가가 보증하는 통화, 그리고 국제화폐라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세 가지 주요한 화폐형태가 '3층 피라미드'와 같은 모양으로 접합된다(브뤼노프 1992, 63-65).

 

   이제 브뤼노프는 화폐 피라미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럴 때 화폐를 관리하기 위해 국가에 의해 어떤 조절이 취해지는지를 설명한다. 다만, 본 논문과 관련해서는 '은행에서 사적으로 발행되는 화폐와 국가가 보증하는 통화 간의 관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화폐 피라미드의 제1층과 제2층 각각과 그 층의 관계에 대한 브뤼노프의 설명을 좀 더 살펴보자. 은행에서 사적으로 발행되는 화폐들의 태환성이 보장되기 위해선, 화폐 각각의 교환과정이 어떤 규칙에 부합되어야 한다. 해당 규칙이 모든 화폐 교환과정에서 지배력을 획득하도록 하려면, 개별 화폐들이 특정 지점에 특정 순간 집중되는 게 선결과제로 제기된다. 만약 집중이 되지 않는다면, 사적 은행들 사이에서 경쟁이 벌어진다. 지불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화폐유통이 혼란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 결과, 자본의 순환과 축적을 방해할 것이다. 그래서 국가 내 다양한 화폐들 간의 태환성을 일률적으로 조절하기 위해, 사적 은행들과 중앙은행이 긴밀한 연관을 맺게 되는 '금융체계'가 만들어지게 된다(브뤼노프 1992, 66; 69).

 

   이러한 금융체계에서 은행들이 하는 역할은 크게 두 가지다. 브뤼노프는 금융()자본(capital financier) 개념을 통해서, 은행의 기능은 화폐자본을 집중시켜 산업자본에 투자하거나, 지불수단을 집중시켜 자본주의적 상품유통을 원활하게 한다고 설명한다. 전자의 경우 화폐자본가와 산업자본가 간의 관계에서 매개자로서 역할을 하는 것이라면, 후자의 경우 자본가들 간에 그리고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에서 일어나는 화폐의 유입-유출의 시간적 간격과 그 간격의 가변성을 조절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은행은 지불수단의 관리와 화폐자본의 관리를 결합시키고, 그럼으로써 자본순환의 각 요소들과 그 관계들을 연결시킨다. 그럼으로써 은행은 자본순환을 촉진하고 자본축적을 지속하도록 해주는 국가장치의 일부로 기능한다. 이때 화폐 피라미드 내 중앙은행은 이 국가장치 중 사적은행이 잘 작동될 수 있도록 태환성을 보장한다. 요컨대, 은행이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화폐자본과 지불수단 양자의 집중화가 이뤄져야 한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 화폐에 대한 국가관리는 양자의 집중화를 필수적으로 요구한다(브뤼노프 1992, 82-83).

 

 

1977년 세종로 정부청사로 들어가는 박정희 대통령과 8.3조치를 비밀리에 추진했던 김용환 재무부장관(오른쪽).

 

2) 화폐자본 집중 및 지불수단 집중으로서의 사금융 제도화

 

   이상에서 살펴본 브뤼노프의 화폐에 대한 국가관리가 한국 사금융의 제도화에 무엇을 시사해주는가? 반대로 한국 사금융의 제도화는 브뤼노프의 논의에 어떤 함의를 갖는가?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브뤼노프가 화폐 피라미드와 국가장치로서의 은행체계를 설명할 때 전제하는 바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를 검토함으로써 브뤼노프의 화폐에 대한 국가관리 논의를 보다 확장시킬 수 있는 단초이자 한국 사금융 제도화를 이자 낳는 자본에 대한 국가관리라는 문제설정 속에서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한마디로 브뤼노프의 논의와 한국 사금융이 제기하는 이자 낳는 자본의 관리 간의 연결고리를 찾는 작업을 해보려는 것이다. 문제는 브뤼노프의 자본주의 화폐와 국가관리에 대한 논의는 시간적인 측면에서 은행체계가 갖춰진 이후라는 점이다. 자본주의 생산양식 속에서 은행체계가 자리 잡은 이후에 이 은행체계가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어떤 기능과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아가 그러한 기능과 역할을 조정하는 데 국가의 통화정책이 왜 필수적인가를 논증하는 데 있었다. 그런 점에서 브뤼노프의 논의를 한국 사금융의 제도화라는 문제에 직접 끌어오는 일은 다음의 문제를 검토한 후에 가능할 것이다. 한국 사금융의 제도화는 한국에서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자리 잡아가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며, 브뤼노프가 설명하고자 했던 국가관리 또한 은행체계의 작동과 관련된 것이지 은행체계의 형성에 대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화폐자본의 집중과 지불수단의 집중이라는 상이한 화폐적 실천을 은행이 수행하지만, 반대로 은행체계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화폐자본의 집중과 지불수단의 집중 양자가 필수적이라는 점에 주목함으로써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자본주의의 이자 낳는 자본과 고리대 자본 간의 불분명한 경계를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자 낳는 자본이 은행으로 집중되기 위해서는 은행을 매개로 해서 그것이 유통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은행이 아닌 다른 기관 등을 통해 유통이 될 수 있고 그러한 경로로 더 많은 이자를 수취할 수 있다면, 이자 낳는 자본 입장에서는 은행을 매개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더욱이 은행 입장에서도 위험부담이 큰 이자 낳는 자본(현대적인 의미에선 신용등급이 낮은 화폐자본)의 경우엔 예·대업 등을 하는 데 있어서 기피하려고 할 것이다. 만약 이자 낳는 자본의 입장에서 이자율(일반은행 예대금리)이 낮고 인플레이션이 높은 상황이라면, 더욱 은행을 매개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럴 때 다른 자본주의적 금융활동이 가능한 영역(예컨대, 주식시장, 채권시장, 각종 금융파생상품 등)이 갖춰져 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고금리 사채시장을 통해 이자 수취를 하려는 유혹(그리고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가계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필요)은 더욱 커진다. 이는 이자 낳는 자본 자체뿐만 아니라 산업자본에게도 마찬가지다. 물론 고금리 사채시장을 통해 생산부문에 재투자가 된다면(기업에의 투자 또는 노동자 생계증진), 자본순환과 축적에 차질이 발생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혹여 생산부문에서의 투자이윤이 불확실하거나 이자 수취의 몫이 더 투자이윤보다 크다면(나아가 부채상환을 위한 부채라는 악순환을 만들어낸다면), 이는 고리대 자본으로 전환되고 말 것이다. 다시 말해, 은행체계가 형성되고 나아가 안정적으로 기능하기 위해선 화폐자본 및 지불수단의 집중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그러한 집중화는 언제나 자본주의의 이자 낳는 자본이 고리대 자본으로 전환할 가능성에 의해 위협을 받는다.

 

 

3) 1950~60년대 사금융시장이 자본축적에 미친 영향

 

   이러한 위협은 1950~60년대 한국 사금융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50년대의 경제적 과제는 전쟁복구와 생산능력의 회복을 통한 자립적 경제구조를 수립하는 것이었으나, 이에 필요한 자금은 원조를 통해서 조달되고 있을 뿐 독자적으로 국가 내부에서 화폐를 발행 및 관리하진 못했다. 한국전쟁기간 발행된 통화는 투자되거나 소비자금으로 활용되지 못한 채 떠돌고 있었고, 농민을 비롯한 일반대중은 현물화폐를 활용함으로써 이원화된 물가와 경제권이 형성되었다. 통화정책의 운영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발권력를 장악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를 위해 휴전이 되기 전 기습적인 액면가 절하변경(리디노미네이션)의 통화개혁이 단행되었다. 하지만 전쟁 중에 과잉공급된 통화를 충분히 수요할 만큼의 생산능력이 부족한 상황이었고, 원조경제를 통해 외국산 소비재 수입으로 축적된 자본은 높은 인플레이션 속에서 외화를 확보함으로써 지대차익을 얻었고, 이를 바탕으로 고리대 자급의 공급경로 일부를 형성하였다. 한편, 일반대중의 필수재는 자급자족적 현물경제 영역에서 공급되고 소비되었으며, 이 영역에서 통화는 공과급 등에 소량 사용될 뿐이었다. 더구나 원조자금의 배분구조에서 소외된 서민, 소상공인, 중소기업 등은 공금융기관을 통한 자금조달이 불가능하였다. 이에 이들이 축적한 민간자본 중 저축자금은 계와 무진 등을 통해 사금융시장으로 유입되었으며, 공금융기관을 통한 자금공급경로가 차단되어 있었기 때문에, 생계자금 및 투자금 마련 등을 위해서 사금융시장에서 자금을 공급받았다. 은행으로부터 투입된 자금도 상품유통과정에서 높은 인플레이션에 따른 지대차익을 얻게 됨에 따라 산업자본으로 전환되지 않고 상업자본에 머물렀다. 더구나 이렇게 상업자본들이 공금융으로부터 저금리로 대출받은 자금을 사채시장의 고금리와의 차이를 이용해 많은 이자수익을 챙겨갈 수 있었기 때문에 사금융시장으로 자본 공급도 빈번히 일어났다(이명휘 2009, 87-91). 결국 민간은 현물화폐를 지불수단으로, 외화를 가치저장수단으로 이용하였고, 단기운영자금과 가계의 소비자금은 사금융시장에서 조달되는 이중구조가 심화되고 있었던 것이다(이명휘 2009, 92).” 나아가 이러한 이중구조는 계, 무진을 비롯한 사금융시장의 확대 및 단기적인 화폐투기를 성행시켰다(이명휘 2006).

 

   만성적인 재정적자와 원조물자의 불안정한 공급 등은 1950년대 중후반 경제불안을 야기했고, 그러던 중 1958년 미국이 원조정책에서 달러방위로 목표를 전환하면서, 환율인상과 긴축정책을 요구함에 따라 경기침체가 장기화되었다. 그러다 5.16 쿠데타가 일어났고, 군사정부는 1960년대 초반 일련의 경제조치를 취했다. 1961년에는 농어촌 고리채 정리사업을 시행하고 농협을 설립했으며, 중소기업은행 및 국민은행 설립했고, 1962년에는 통화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경제조치의 효과가 충분치 않은 채, 1963년 초에 외환부족으로 인한 경기침체가 발생했다. 이에 박정희 정부는 외화자금이 부족하고 국내저축이 빈약한 상황을 타개함으로써 경제개발을 수행하고자 금융자본 배분에 직접 개입하기 위해 은행에 대한 정부 통제를 강화하였다. 이후 1964~67년에 걸쳐 환율현실화, 금리현실화, 무역자유화를 추진하였다. 특히 금리현실화 조치를 통해 유휴자본과 민간저축을 공금융시장으로 유입시키려 했다. 하지만 여전히 서민과 소상공인, 중소기업 등에게 제도권 내 금융기관의 진입장벽은 높았고, 정부가 일반은행을 직간접적인 장기설비자금 공급기관으로 산업정책에 동원함에 따라 이들에 대한 금융공백은 더욱 심화되었다. 더구나 금리격차 또한 해소되지 않은 상황이었고, 높은 인플레이션이 지속되고 있었다. 그러다 경제여건이 악화되자, 박정희 정부는 여섯 번에 걸친 금리인하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고, 금리현실화 이전 수준으로 금리가 회복되고 말았다(이명휘 2009, 95-100). 이런 경제적 여건 속에서 사금융시장은 줄어들지 않았고, 산업자본 중의 유휴자본, 서민과 소상공인 등의 저축자금, 은행으로부터의 대출자금 등이 계속해서 유입되고 있었다. 은행체계의 안정적 확립, 즉 화폐자본 및 지불수단의 집중이 충분히 이뤄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산업자본으로의 전환, 이자 낳는 자본의 생산적 기여 등이 제대로 되지 않은 채, 고리의 이자를 취하는 고리대 자본으로의 퇴행이 벌어지는 상황이었다.

 

1972년 8.3 긴급조치 공동기자회견 당시의 사진.

 

4) 8.3조치와 사금융양성화3법 등 사금융 제도화 정책 재해석

 

   이렇게 한국 사금융의 존재가 은행을 매개로 한 자본순환을 제약했지만, 외자 도입을 통한 수출 중심의 경제성장 정책으로 자본축적을 지속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정책은 수출주의 부채경제라는 모델을 탄생시키면서, 수출을 통한 산업발전과 그 과정에서 계속해서 불어나는 부채라는 결과를 낳았다. “1960년대 후반까지 차관을 통한 지속적인 부채의 공급과 수출의 증가가 서로 상승작용을 거치며 급속한 경제성장에 기여했지만, 1970년에 접어들면서 부채경제는 조금씩 균열을 보이기 시작했다. 1960년대 중반까지 진행된 지대수입을 위한 기업들의 과도한 차관규모의 확대는 1970년대 초 만기가 도래하면서 원리금상환가능성에 대한 국내외의 우려를 낳았고, 1970~1년 수출성장률둔화가 나타나자 이러한 우려는 현실화되었다(박찬종 2014, 74).” 무엇보다 1968년부터 전후 국제통화였던 달러의 지위가 흔들리면서, 국제통화제도가 붕괴하기 시작했다. 19683월 파운드화의 평가절상, 1971년 달러의 금태환 정지 선언을 계기로 금본위제가 무너지고 변동환율제로 이행하게 되었고, 세계 자본주의는 구조적 불황기에 접어든다. 이러한 국제적 변화는 한국 수출주의 부채경제에 막대한 부담을 안겨주었다. 우선 국제적으로 금리가 높아지면서, 차관도입조건이 악화되었고 외자도입이 축소되면서 국내 경기가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1년 미국의 신경제정책, 특히 10% 수입부가세 징수 등의 조치로 인해 한국의 수출이 큰 타격을 입었다. 마지막으로 일본 엔화의 변동환율제로의 이행과 평가절하로 인해 한국의 총 수입액의 40% 이상을 차지하던 원자재·중간재·자본재의 가격이 상승하게 되어 생산조건이 악화되었고, 일본으로부터의 외자도입에 대한 상환부담도 증가했다. 그리하여 국제수지는 지속적으로 악화되었다. 이때 이러한 위기상황을 더욱 가속화시킨 것은 1969년 말부터 시행된 박정희 정부의 재정·금융·외환 면에서의 안정화정책이었다. 외자도입이 어려워지고 국제수지 개선을 위해 수입규제 및 금융긴축정책을 시행하자 경기침체가 가속화되었고, 이런 상황에서 차관원리금 상환압박이 심해지자 기업들의 자금난과 부실화가 더욱 심화되었다(이성형 1985, 248-251). 이러한 기업들의 어려움은 사금융시장에서의 단기자금조달로 인해 더욱 가중되었다. 수출주도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은행은 장기 설비자금을 공급하는 역할을 담당했고, 단기운융자금을 조달하는 공식적 금융시장은 공백상태였다. 급전이 필요한 기업이나 가계는 사금융시장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고, 금리격차와 높은 인플레이션을 활용해 이자 수익을 극대화하려는 투기적 움직임도 지속되었다. 더욱이 1960년대 후반 물가안정과 국제수지 개선을 위한 유동성 규제가 이뤄지자, 시중에서는 담보력이 부족한 소상공인이나 중소기업뿐만 아니라, 차관 등을 통해 장기자금을 대출받은 기업들도 단기운영자금을 사금융을 통해 조달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국내외 경기 침체가 심화되자, 부채위기에 대한 우려와 그로 인한 부실기업들의 연쇄도산과 경제위기에 대한 우려가 팽배했다(이명휘 2009, 103).

 

   이에 박정희 정부는 상업차관 도입 시 심사절차를 강화하고 부실차관기업체를 정리하는 동시에, 수출물량의 무조건적 확대보다는 외화가득률중심으로 수출육성책을 보완하는 등 다양한 조치들을 통해 대응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이정은 2010; 박찬종 2014, 75 재인용).” 결국 고리사채의 이용도가 높은 기업을 중심으로 부도가 확산되자 박정희 정부는 197283일에 경제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소위 8.3조치)를 통해 긴급해결에 나섰다. 이 조치를 통해 우선적으로 사금융시장이 동결되었고, 당시 기업들이 보유하고 있는 모든 사채를 신고하도록 하고, 사채의 금리를 월 1.35%(16.2%)로 강제적으로 대폭 하향조정하였으며, 사금융시장에서 기업들이 조달한 단기대출금 잔액의 30%를 장기저리대출금(3년 거치 5년 분할 상환 조건)으로 전환시켰다. 추가조치로 기업들의 금융비용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일반은행대출금이라 기존의 연 20%에서 연 16.5%로 인하되었다. 결국 8.3조치는 1970년대 초반 경기침체로 인해 기업들의 부채상환부담이 커지자, 이를 줄여주기 위해 국가가 강력하게 개입하여 채권채무관계를 전환하도록 해줌으로써 부채상환부담을 완화시켜준 것이었고, 이후 취해진 통화정책도 기업들의 금융비용을 줄여주기 위함이었다(이성형 1985; 이명휘 2009, 103; 박찬종 2014, 75).

 

   하지만 8.3조치와 추가적인 금리인하 조치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8.3조치 실시 이후에 석유위기로 인한 스태그플레이션이 발생하자, 위험프리미엄까지 포함된 높은 이자율의 사금융시장이 복원되었다. 이후 금리현실화 기조가 중단되고 이전의 통제적인 저금리 기조가 회복되었으며, 실질이자율 마이너스 상태가 지속되었고, 금융기관의 예금잔고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기업들도 자금조달의 어려움이 다시 가중되자, 사금융시장을 찾기 시작했다. 이에 정부는 사금융시장에 대한 완화된 통제방식으로 사금융시장을 제도금융권 내로 흡수하기 위한 사금융양성화 3(단기금융업법, 상호신용금고법, 신용협동조합법 등)을 제정하여 양성화, 제도금융화하고자 했다. 이를 통해 한국투자금융주식회사(1972) 등의 단기금융회사가 설립되어 그동안 공백상태였던 기업의 단기자금조달시장이 생성되었고, 통화정책의 실행력도 더욱 커지게 되었다(이명휘 2009, 104). 또한 1960년대 초반 서민금융안정을 목표로 제도화되었던 국민은행과 마을금고(정한아 2015, 40-52) 외에 소상공인과 가계를 중심으로 번성하던 서민금고와 계, 그리고 중소기업들도 이용했던 사설무진까지 제도금융권 내로 흡수시키고자 했다. 이에 사금융양성화3법을 통해 마을금고, 신용협동조합, 상호신용금고 등을 체계화했다. 그리고 고리사채자금 중 일부가 조합상호금융을 설립함으로써 제도화되었다(이명휘 2009, 104).

 

1972년 8.3조치가 시행된 당일의 동아일보 신문기사.

   이러한 8.3조치 이후의 일련의 사금융 제도화를 놓고 볼 때, 이자 낳는 자본의 산업자본으로의 강제적 전화라는 이성형의 주장은 일정한 한계가 있다. 고리사채로 조달한 단기부채를 저리장기부채로 강제적으로 전환한 것은 분명히 국가기구가 산업자본에게 특혜를 준 것이며, 이자 낳는 자본에 대한 강력한 규제였다. 그럼에도 최진배의 비판처럼 이성형은 두 가지 잘못된 전제를 갖고 있다. 하나는 사금융을 이자 낳는 자본으로만 전적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자 낳는 자본과 고리대 자본 사이의 불분명한 경계에 대한 문제를 놓치고 있다. 다른 하나는 그러다보니 사금융이 어떻게 재생산되는지, 자본 순환에서 사금융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명확히 설명하지 않고 있다. 그 결과, 8.3조치 이후 취해진 일련의 금융기관 제도화 정책이 갖는 의미에 대해 주목하지 못했다.

 

   사금융시장은 1970년대 중후반까지 경제위기 국면마다 계속해서 성장과 쇠퇴를 반복했다. 1973년 이후 경제침체 우려가 지속되면서, 저축성예금의 실질금리는 마이너스에 가까울 정도로 낮아졌고, 사채금리는 연 40%이상을 유지하면서 계속 상승하자, 저축자금이 은행을 이탈하여 사금융시장으로 다시 이동하기도 했다(이명휘 2009, 106). 이에 국가는 사금융시장으로의 자본유입을 통제하고, 사금융을 양성화한 금융기관들들의 역할과 기능을 보완하기 위해 1975년 상호신용금고법을 개정하고 1978년 할부금고의 3사합병 등을 통해 대기업 및 단자사들의 진출을 독려하며, 1979년 금고활성화시책을 발표하는 등 서민금융기관들의 운영을 개선하고자 노력했다(전국상호신용금고연합회 1993; 박용한 2013; 한국금융연구원 2014). 이는 이자 낳는 자본이 고리대 자본으로 퇴행하는 것을 규제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기 위함이었고, 그러한 제도적 장치의 마련은 화폐 자본과 지불수단을 강제적으로 집중시킴으로써 은행체계의 안정성을 높이는 것이었다.

 

 

   더욱이 이성형은 8.3조치에 의해 위장사채가 일소되면서 산업자본 중 일부가 지녔던 이자 낳는 자본으로서의 성격이 강제적으로 해소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산업자본의 성격상 그 일부는 언제나 유휴자본으로 지속해서 유리되고 휴식하면서, 때로는 고정자본 투자에 투입되거나 때로는 이자 낳는 자본으로 기능한다. 그렇기에 산업자본은 선택의 기로에 서는 것이다. 이러한 산업자본의 선택지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보는 것, 다시 말해 산업자본과 이자 낳는 자본을 전혀 별개의 것이자 대립하는 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역사적으로도 박정희 정부는 산업자본 등을 비롯한 경제 전반의 유휴자본이 생산부문에 투자하도록 유도 또는 강제하기 위해 사금융시장 정리와 함께 중화학공업화에 소요되는 장기설비자금조달을 위한 제도를 정비하였다. 1973년 국민투자기금법을 제정함으로써 국민투자기금을 설치하여 중요산업에 집중투자하도록 하였고, 기업공개와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직접금융시장을 육성하고자 국내기업 공개를 유도하는 자본시장육성법(1968)에 이어 기업공개촉진법(1972)를 공포하였으며, 1975종합금융회사에 관한 법률을 만들어 민간 중심의 외자조달 창구이자 기업에 대한 종합적인 금융서비스를 제공하는 종합금융회사를 설립할 수 있도록 했다(이명휘 2009, 105; 김대호 2014).

 

   요컨대, 이상에서 살펴본 일련의 조치들은 자본주의의 이자 낳는 자본으로의 생산적 전환, 산업자본 중 일부인 유휴자본, 그 외에 자본순환에서 축장된 화폐자본들이 자본순환에 계속해서 유통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1970년대 사금융의 제도화를 이자 낳는 자본의 순환을 매개하는 역할을 은행체계가 담당하도록, 국가가 강제수단 또는 유인책을 통해 지불수단과 화폐자본을 집중시키는 조치였다고 명명할 수 있다. 사금융으로부터 은행으로 자본순환의 중심적 매개를 옮기고 자본의 배치전환을 이끌어냄으로써 화폐 피라미드를 공고히 하고, 해당 피라미드들 간의 접합관계를 조절하는 데 국가의 통화정책이 갖는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것이었다. 그럼으로써 자본축적,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재생산의 안정성을 높일 수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당시 대한늬우스 제892호 영상(1972년 8월 12일 제작)의 캡쳐본.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FuxEm-Ip-BQ

 

5. 결론 : 시론적 분석의 의의와 한계

 

   이상의 논의는 1950~70년대 사금융이 한국 자본주의에 미친 영향, 이러한 영향을 제어하고 한국 자본주의의 자본축적을 증진하기 위해 사금융을 제도화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 마르크스의 이자 낳는 자본 개념과 브뤼노프의 화폐에 대한 국가관리논의를 검토함으로써, 사금융에 대한 국가관리를 자본주의 재생산의 주요 문제 중 하나로 설정하고자 했다. 그럼으로써, 1950~1970년대 진행된 한국 사금융의 제도화는 국가가 지불수단과 화폐자본을 집중시키는 조치, 즉 8.3조치 및 사금융양성화3법과 같은 일련의 조치를 취하여, 자본축적에 필요한 생산과 상품유통이 원할히 이뤄지도록 이자 낳는 자본’의 형태를 일반화시켰음을 마르크스주의의 화폐론과 국가론에 입각해 설명하려 했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적 금융제도와 화폐에 대한 국가 관리가 완성되는 국면과 주요한 계기들을 분석하기 위한 단초를 마련하고자 했다. 보다 이론적인 측면에선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재생산에 기여하는 이자 낳는 자본과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재생산을 파괴하는 고리대 자본의 구별은 사회적으로 결정되는 것, 즉 사회적 위치와 맥락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을 보이고자 했다. 마찬가지로 산업자본과 이자 낳는 자본의 경계 또한 본질적인 것,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이들 자본형태 중 어느 것이 자본순환을 지배적으로 규정하는가하는 문제는 계급투쟁, 국가권력의 성격에 달려있다.

 

  하지만 이러한 의의를 충분히 실현했는지에 대해선 다음과 같은 비판이 가해질 수 있다. 우선 본 논문에서 새로운 문제설정을 도입하는 작업은 한국 사금융의 제도화 과정을 재해석할 수 있도록 해주었지만, 정작 이론적 준거로 삼고자 헀던 마르크스와 브루노프의 논의를 세밀하게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이자 낳는 자본 개념에서 고리대 자본과 자본주의의 이자 낳는 자본 간의 불분명한 경계를 도출하고, 이 경계를 확립하지 못할 경우 자본순환에 필수적인 집중화된 신용체계, 즉 지불수단의 집중과 화폐자본의 집중이라는 두 과제(반대로 은행체계가 일정 수준 발전된 이후에는 은행의 기능이 될 것임)가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를 펼치기 위해 브뤼노프의 화폐에 대한 국가논의를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 수준에 머물 뿐이었다. 브뤼노프의 어떤 개념과 어떤 논리를 더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하는지는 한국 사례를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언급하는 데 그쳤다.

 

   이에 대해 간략히 보충하자면, 한국 사금융 제도화라는 역사적 사례와 이자 낳는 자본의 개념 재규정이 브뤼노프의 논의에 다음과 같은 이론적 함의를 가질 것으로 기대된다. 우선 브뤼노프의 문제의식을 전 자본주의에서 자본주의에로의 이행기에 확장 적용시켜볼 수 있다. 다음으로 그럼으로써 3층 구조의 화폐 피라미드에서 제1층에 자리한 사적 은행들이 발행한 화폐, 국내에 존재하는 다양한 종류의 화폐형태의 범주를 더욱 넓힐 수 있다. 역사적으로 전 자본주의 시기뿐만 아니라, 자본주의가 일정 수준에 발전한 상황에서도 한국의 계와 같은 신용조직, 귀금속, 현물화폐 등이 언제나 존재한다. 다만 그러한 화폐형태들이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3층 구조의 화폐 피라미드를 현실에서 기능하고 있는 제1금융권, 2금융권 등의 다층적이고 위계적인 금융시장구조에 더욱 세밀하게 적용해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마지막으로 인플레이션 관리 등의 통화정책이 실효성을 가질 수 있는 금융영역을 구축하는 데, 지불수단의 집중과 화폐자본의 집중을 가능하도록 하는 데, 국가관리가 진행된다는 것, 다시 말해, 국가의 역할을 더욱 풍부하게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함의들이 더욱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브뤼노프의 이론 내에서 발생하는 모순은 무엇인지 내재적 비판이 선행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비판이 진행되지 못했던 것은 브뤼노프의 자본주의 화폐론, 국가론에 관한 다른 텍스트들을 본 논문에서 참고하지 못했던 탓도 크다.

 

   다음으로 본 논문에서 준거점으로 삼았던 분석틀이 일반이론이었기에, 분석 또한 추상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한계가 있다. 우선 이성형의 분석과 관련해서 검토하고 발전시키지 못한 내용 때문이다. 바로 사금융 제도화를 이자 낳는 자본에 대한 국가관리로 분석한다고 할 때, 그때의 '국가는 무엇인가'라는 문제다. 이성형은 계급갈등의 관점에서 8.3조치를 검토함으로써, 자본주의 분파들과 국가기구 간의 관계를 분석하는, 이른바 국가권력개념을 제기했다. 하지만 본 논문은 국가기구에 의한 국가장치 관리 수준으로 어쩌면, '실체론적 접근', '기능주의적 분석'을 취한 것이라는 비판(독일의 국가도출논쟁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바 대로)에 맞닥뜨릴 수 있다. 더욱이 그러한 이자 낳는 자본의 특성만으로 국가관리와 개입이 전적으로 규정되는 것 또한 아니다. 사금융이 공식적 금융기관으로 제도화되었음에도, 여전히 사금융의 영역이 잔존하며 심지어 제도화된 금융기관들(제2금융권 등)이 고리대 자본으로 유통되고 있기도 하다.

 

  결국, 자본주의 화폐순환에서의 국가 관리의 문제는 제도화되었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어떤 자본형태가 지배적인가는 세력관계와 경제적 조건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국가와 자본은 기능과 형태 상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자본으로부터만 국가권력의 성격을 도출할 수도 없고, 국가에 따라 자본형태가 온전히 좌우된다고 할 수도 없다. 달리 말해, 이자낳는 자본과 고리대 자본 간의 불분명한 경계로 인한 자본주의적 모순을 관리하는 일에서 국가는 언제나 성공하기만 하는 것도 아니고, 때론 국가의 특정 조치가 역효과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렇기에 국면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등장하는 자본주의 화폐순환에서의 국가관리의 문제를 분석하는 일은 국가 일반, 자본 일반과 같은 추상수준이 높은 일반이론에만 전적으로 기대선 불가능하다 있다.

 

  향후 국가와 자본 양자 간의 관계를 보다 구체화시키고, 각각에 내재한 모순이 어떻게 작동하고 서로 교차하는지를 분석하는 방향으로 논의를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이성형이 준거한 풀란차스의 국가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보다 추상수준이 낮은 조절이론이나 발전국가론 등을 결합시키는 작업이 요청된다. 예컨대, 제솝의 전략관계적 국가론과 같은 분석모델에 입각해 더 종합적이고 구체적인 설명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다.  보다 구체적인 수준의 연구프로그램을 마련하게 된다면, 화폐 피라미드 안팎에서 지속적으로 유출입하는 사금융, 또는 은행체계 내에서도 하위를 구성하는 화폐형태와 은행업에 대한 조절이 구체적으로 한국 사회의 관계망 속에서 어떻게 이뤄지는지를 분석하거나, 나아가 신자유주의에서의 금융, 예컨대 97년 외환위기 이후나 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전후의 국면들에 대해서도 분석을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본주의 화폐론 내의 이론적 쟁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흔히 화폐는 교환의 매개, 가치의 저장, 가치의 척도, 지불수단, 부채청산 등으로 기능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화폐의 기능들 중 무엇을 자본주의 화폐의 독특성이라고 규정하는가에 따라, 이후 논의가 전개되는 방향이 달라진다. 마르크스를 따라서 브뤼노프는 화폐가 특별한 상품인 일반적 등가물로서 기능한다고 보면서, 사회적 인정의 문제인 화폐제약의 문제를 제기했고, 일반적 등가물로서의 화페자본이 더 물신화된 형태가 가상자본임을 수용했다. 하지만 이러한 마르크스의 화폐론이 교환매개 기능과 지불수단 기능을 혼동한 것이 아닌가, 또는 신용화폐라는 개념은 신용의 역할과 화폐의 역할을 개념적으로 구분하지 않은 것이라는 입장이 있다(김종철 2019). 이러한 관점에서는 신용은 부채창출, 채권-채무관계의 형성과 관련되고, 화폐는 부채청산, 채권-채무관계의 종식과 관련되는 것으로 명확히 구분된다. 자본주의 화폐가 갖는 힘은 채권자가 마치 재산권자로서 행동하게끔 해주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 근거할 경우, 8.3조치에서 사채동결 이후 취해진 고금리 단기채무로부터 저금리 장기채무로의 전환이나 화폐공급 증대 등의 국가기구의 조치를 다르게 평가할 수도 있다.

 

   앞서 한계나 비판에 대한 보충의견을 정리하면서 지적했듯이, 필자는 본 시론적 논의가 1950~70년대 한국 자본주의 분석에 머무르지 않고, 1980년대 이후 진행된 일련의 신자유주의 금융화에도 새로운 문제계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1960~70년대를 거쳐 모양을 갖춘 은행체계 중 특히 사금융을 양성화한 금융기관들이 이후 한국 은행체계의 작동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 그 기관들이 위치한 화폐 피라미드 제3층 내의 하위 영역은 어떻게 발전하는지, 이러한 발전이 신자유주의 금융화 국면에서 자본축적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등을 논의해볼 수 있을 것이다. 80년대부터 더 체계화되는 제2금융권, 서민금융, 미소금융 등과 다양한 자본시장들, 그리고 이 영역들에서도 널리 활용된 각종 파생금융상품 등의 연구대상들을 자본순환의 이론 내로 끌어들일 수 있을지, 검토해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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