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인-무브

"민주화제체의 '정치적인 것'과 포스트-민주화의 '스캔들': 집권민주화세력의 헤게모니 실천과 그 패착에 관하여"(2/2)

 

김현준 | 서교인문사회연구실

 



※ 본 원고는 지난 2022년 6월 14일 서교인문사회연구실에서 진행한 [2022 서교연 연속포럼 체제전환을 위한 정치학적 모색2]에서 김현준 회원이 발표한 내용의 일부를 녹취 형식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https://en-movement.net/381?category=720246 이어서 시작합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는 것인데요. 첫 번째, 진보 좌파 역시 보수 우파에 대한 도덕성 검증을 정치적 무기로 사용했습니다. 두 번째로는 이제 도덕 정치 비판이라고 이 사람들이 가리키는 도덕 정치 비판은 대중이 무지하고, 도덕 정치에 취약하다는 전제를 하고 있는 겁니다. ‘대중은 도덕을 들이대면 다 거기에 속아 넘어간다’ 이런 전제죠. 그래서 정치적 주체들의 비판적 견해들을 ‘좁은 의미의 도덕’이라는 말에 가두는 거예요. 이것도 일종의 ‘프레이밍 정치’인데 알고서 하는 정치일 수도 있죠. 상당히 똑똑한 정치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좁은 의미의 도덕에 가두어서 무언가 비판을 하면 다 그걸 도덕의 잣대로 얘기를 하게 됩니다. 사실은 이 사람들이 볼 때, 진보적 지식인들이 하는 것은 ‘정치를 도덕화’하고 있다고 비판하지만 제가 볼 때는 오히려 그 반대라고 생각을 해요. 오히려 이 사람들이 하는 것이 ‘대중이 무지하다는 걸 전제하면서 정치를 도덕화하고 있다’라고 생각을 하죠. 

 

 

그리고 제 생각에 조국의 사례는 탈 정치적 개인 윤리로 보면 안 됩니다. 이것은 지배계급의 특권과 정당성 문제라고 생각해요. 조국은 개인이라기보다는 지배 계급의 특권의 상징입니다.

지배계급이 최소한의 정당성은 있어야 돼요(물론 문제는 조국을 비롯한 집권 민주화세력이 자신들을 여전히 지배계급이라기보다는 억압받는 비주류 민중이라고 믿는 것에 있겠지만). 근데 그 정당성이 조국으로 인해 의심받기 시작하는 거거든요. 

 

또 ‘반 조국 현상’은 제가 볼 때는 불평등에 대한 대중의 정치적 감각이에요. 이것은 약간 미학적이거나 감정적인 감각일 수도 있어요. 치밀하게 계산된 것이라기보다는 끓어오르는 분노인데 이런 거는 우리가 일상에서 정치적 불평등을 감각하는 방식이거든요. 제가 생각할 때는 상징자본의 불균등 이런 거는 우리가 이론적으로 설명하긴 어려워도 동물적으로 알거든요. 그래서 반 조국 현상을 무시하면 안 된다는 거죠. 

 

‘조국 수호’자들은 조국 사건이 단지 ‘법’의 위반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의 문제임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하는데 사실은 ‘사회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조국의 행위는 도덕적인 연대라든지 사회적 신뢰의 문제를 파괴하는  문제거든요. 이제 사람들은 교육 제도, 엘리트도, 법조인도, 정치인도 믿을 수 없다는 분명한 사실에 절망합니다(본래부터 알고 있었지만 현실을 정당한 것으로 인증하게 된 셈이죠).  

 

 

그래서 저는 그람시, 스튜어트 홀, 아도르노의 얘기를 가지고 와서 반론을 한번 생각을 해봤습니다. 스튜어트 홀은 이제 이런 얘기를 하는데요. 헤게모니는 다 아시다시피 ‘대중의 정치적 동의’, ‘자발적 동의’라고 하는 것인데요. 이 자발적 동의라고 하는 건 사실 도덕적 헤게모니라는 말이에요. 그니까 도덕이라는 말이 헤게모니 개념 안에 숨어 있는 거예요. 포함돼 있는 거예요. 물론 여기서 말하는 도덕은 좁은 의미의 개인 윤리만을 얘기하는 게 아닌데 어쨌거나 이 헤게모니라고 하는 것. 그러니까 스튜어트 홀이 얘기하고 있는 거는 그람시를 해석하면서 ‘도덕적인 헤게모니라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 이거를 부차적으로 여기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가 스튜어트 홀이나 그람시의 생각을 한번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조국 사태 국면에서 성찰의 근거로 삼을 만한 얘기는 아도르노의 주장인데요. 아도르노는 도덕 철학의 문제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올바른 삶을 추구하려면 그릇된 삶에 대한 저항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도덕적으로, 규범적으로 뭔가 행동하는 거는 어떻게 보면 자기 자신 그리고 사회에 대한 수행적인 행위라는 겁니다. 도덕성을 만들고 정치를 하기 위한 수행적 행위요. 아도르노는 말해요. “이 세계가 우리에게서 만들어낸 것에 대한 저항은 단지 우리가 온전히 저항할 자격이 있다는 이유에서 외부 세계에 대항한다는 뜻이 전혀 아니”라고.  그리고 “우리는 그 세계에 가담하고 싶은 유혹에 빠진 우리의 일부분에 저항하기 위해서 우리가 가진 저항의 권력을 동원해야 된다”라고. 그러니까 조금 범박하게 해석을 하자면 ‘내가 나는 할 수 없어. 나는 도덕적으로 못 살겠지만 저런 거 보고 분노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어느 정도 그런 삶을 추구하는 힘이 생겨’ 이런 거거든요. 

 

아도르노가 또 이런 얘기를 하는데 세 번째로, 우리가 오늘날 도덕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이건 세계를 조직하는 문제로 융합된다는 겁니다. “올바른 정치 형태가 오늘날 우리가 성취할 수 있는 것의 영역 안에 놓여 있다면 심지어 우리는 올바른 삶에 대한 추구가 곧 올바른 정치 형태에 대한 추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올바른 삶은 올바른 사회적 조건 및 정치적 행태와 결부되어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올바른 삶의 문제를 현실 정치에서 사적인 도덕으로 축소하는 것은 올바른 삶을 구성하는 조건들을 무시하는 것이며, 그것은 곧 정치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올바른 삶의 가능성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조국의 문제를 개인의 윤리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불평등의 사회적 조건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그것에 대해서 계속 말하고, 그것에 대해서 계속 문제 제기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이죠. 

 

또는 랑시에르적으로 보자면, 정치장에 기존 권력 지형과 구조는 사회 부정이나 고통, 불평등에 대한 감각과 인지를 불평등하게 배분합니다. 기존의 정치적인 구조 속에서 우리는 그걸 반격하는데, 민주당의 정치에는 조국의 고통과 검찰에 대한 분노만이 정당한 정치적 이성으로 인정이 됩니다. 반면에 그 외의 정치적 요구들은 이성으로 인정되지 않아요.

 

여기서 말하는 이성이란 뭐냐면 민주화와 계급 투쟁에 부합하는 합리성. 그것만이 합리성이죠. 도덕이나 다른 요구들은 도덕 감정이나 원한 감정으로 치부가 됩니다.그래서 조국의 도덕 스캔들은 민주당을 위시한 소위 범진보 자유주의 정치 세력 역시 지배의 정당성에 대한 감시와 심판의 예외적인 존재가 될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보여주는 건데요. 따라서 이 사태는 지배의 정당성과 도덕적 정당성에 대한 광범위한 규범적 동의가 한국 사회에 어떻게 보면 구축되어 있는 긍정적인(?) 시그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즉 진영 논리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죠. 이따가 다시 말하겠지만 진영 논리의 두 가지 축이 있는데, 이 두 가지 축으로 해결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이는 앞으로의 정치에 진영 논리를 초과하거나 교차하는 새로운 정치적 전선들의 출연을 시사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도덕을 외면하는 정치가 아니라 새로운 도덕적 요구를 민주적으로 수용해서 정치를 재구성하는 일이죠. 그러니까 홀이나 아도르노의 조언을 받아들인다면요. 조국 사태는 어떻게 자기 폐쇄적인 진영 논리의 팬덤 정치를 극복하고 해결의 이론을 구축할 것인지 정치적인 것이 어떻게 사회적인 것을 통과해야만 하는 것인지 어떻게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을 함께 구축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 같습니다.  

 

집권 민주화 세력의 진영 논리 두 가지를 정리하자면, 하나는 '성 정치'를 악용한다고 주장하는 것이고요. 또 하나는 '도덕'을 악용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에서 민주당은 큰 패착이 있었다라는 것이고요. 그래서 우리는 이제 일상의 정치와 도덕적 연대라는 사회적인 것을 재구축함으로써 정치의 기반을 강화시켜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이제 앞으로의 정치적 이데올로기 장을 새롭게 분할하고 재편하는 시금석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굉장히 많을 텐데. 크게는 페미니즘과 성폭력 성차별에 대한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이게 굉장히 중요하고요. 지금은 그렇게 됐죠. 이것이 중요한 시금석이고 중요한 편 가르기의 방식입니다. 그러니까 편 가르기를 잘해야 되는 거죠. 적대의 정치는 편 가르기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편가르기를 잘해야 됩니다. 하지만 집권 민주화 세력은 87체제의 양당구도만을 여전히 편가르기의 절대규범으로 믿고 또 사용합니다.  진보는 페미니즘을 일상의 정치와 소수자 정치에서 어떻게 강화하고 확장해야 되는지 생각을 해야 되는 거고. 아까 김보명 선생님도 얘기하셨지만 종교의 보수적인 정치학(문화전쟁) 이런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할 필요가 있어보입니다. 세대 간 불평등을 세대 내 불평등과 계급 문제로 설득적 있게 매개 하는 작업도 있어야 되고요. 다양한 사회적 고통들과 불만이나 요구들을 도덕주의로 비난하거나 훈계하지 않으면서 진보적 실천으로 전환시키는 운동이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끝)

댓글 로드 중…

최근에 게시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