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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키치 사이의 일상: 공통의 장소: 러시아, 일상의 신화들서평

 

 

김무겸 |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세미나회원

 

 

1.

 

공통의 장소: 러시아, 일상의 신화들는 소비에트 시절 레닌그라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살다가 미국으로 망명한 문화비평가 스베틀라나 보임의 책이다. 이 책은 1994년에 미국에서 처음 출판되었고, 2002년에는 러시아어 판본이 출판되었다. 한국에서는 러시아 문학 연구자인 김민아의 번역본으로 2019년에 나왔다.

 

출판 직후, 서구의 비평가들은 하나같이 외부자가 된 옛 소련인이라는 보임의 이중적 정체성에서 글의 독특한 힘을 보았다. 서구 유럽의 지적 담론과 소비에트인의 문화적 감각을 동시에 가질 수 있었던 보임의 이중적 정체성이 해당 문화 내부에 사는 사람들의 관습화된 지각으로는 보지 못하는 러시아의 일상 영역을 경계 지을 수 있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또한 보임의 논의는 이념 중심의 일원론적인 소비에트 문화 이해에서 벗어났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었다. 오늘날 서구에서 공통의 장소는 소비에트와 포스트소비에트 문화 담론의 고전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보리스 그로이스, 알렉세이 유르착 등 소비에트 문화 연구자들의 논의와 비교 연구되고 있다.

 

한국에서 공통의 장소와 관련한 서평은 출판사 서평이 유일한데, 보임의 책이 러시아의 과거와 미래가 어떠한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라는 식의 표면적인 소개에 그치고 있다. 한편, 번역자인 김민아는 논문 공통의 장소로서의 기념비(2020)에서 보임의 논의를 확장하면서 현대 러시아의 기념비에 은닉된 일상 신화를 분석하기도 했다.

 

만약 공통의 장소가 일상 신화가 무엇인지를 목록화한, 평범한 백과사전식 서술이었다면 서구 평론의 지금과 같은 관심을 이끌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서구 평론의 열광은 해당 책이 내장하고 있는 독특함에서 비롯한다. 독특함은 보임이 설정하고 있는 철학적 개념 및 전제에서 비롯되며, 크게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 번째로는 신화에 관한 보임의 이해이다. 저자는 신화를 굳어진 명제가 아니라 역사에 따라 유동적으로 만들어지는 담론 조직으로 이해하며, 알아차리게 힘들게 은닉되어 있으면서도 문화를 합리적으로 만들어지는 무언가로서 쓴다. “신화들은 해당 문화권에서 자연스러운 것으로 지각되지만, 실상은 잊히거나 위장된 역사적, 정치적 혹은 문학적 근원들을 자연스럽게 만들어 주는 순환적 서술이자 공통의 장소들이다.”(18) 두 번째로는 근대의 성립 이후의 역사를 문화적, 사회적 병리화의 과정으로 바라보는 보임의 역사철학이다. 보임은 근대화의 과정에서 개인이 공동체로부터 이탈되어 가는 것, 그리고 키치가 문화를 지배해가는 것을 현대의 병리적인 문화 현상으로 진단하고 있다. “우리는 오늘날 상투화된 사회에 살고 있다. 이는 우리가 처한 피할 수 없는 문화적 난국이다”(35)

 

신화나 키치와 같은 개념은 보임이 사용하는 공통의 장소라는 개념을 매개로 하여 드러난다. 2에서는 보임이 '공통의 장소'를 어떤 방식으로 사용하는지 간단하게 알아보고자 한다.

 

 

2.

 

일상과 문화적 신화에 관한 보임의 논의는 공통의 장소(common places)’라는, 역사적으로 부침을 겪은 개념에서 출발한다. 물리적 공간과 담론 조직을 동시에 가리키는 공통의 장소는 본래 역사적, 정치적, 혹은 문화적 근원들로서 본받아야할 공통 감각이자 공통 취향의 근원에 해당했다. 그러나 근대의 수립 이후 공통의 장소는 그 의미가 격하되며, 본받아야할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 토포스(topos)가 키치(kitch)가 되어 버렸다는 보임의 말은 공통의 장소의 위상이 근대 이후 재조정된 상황을 지시한다. “유럽 역사를 통털어 공통의 장소에 대한 많은 관점들이 기억술과 함께 서서히 잊혀졌다. 공통의 장소는 더 이상 세계에 대한 수사학적 조직이나 고대 예술의 한 부분으로서 평가되지 않은 채, 평가 절하되었다.”(36)

 

보임이 일상과 신화라는, 일견 대립되는 것으로 보이는 두 항을 근친 관계로 설정하며 일상의 신화들이라는 말을 쓸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만약 신화가 공유된 문화 기억의 장소이자, 공통의 정체성과 애정의 장소, 공통의 장소라고 한다면, 일상은 키치나 평범함, 클리셰 등으로 평가절하된, 바로 그 공통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보임에게 일상은 키치화된 신화의 다른 이름이다. 일상과 신화는 분리되지 않는다.

 

보임이 일상 신화 탐구를 통해 겨냥하는 바는 바로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 '일상'이라는 이름의 공통의 장소는 "연대감의 위기에 대한 근대적 지각과 다양한 형태와 형식을 취하는 잃어버린 공동체"(30)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토양이기도 한 것이다. 보임의 글쓰기 전략은 키치화된 러시아와 소비에트의 일상 신화를 조망하고 동시에 이 키치에 저항하는 '무언가'를 쓴다는 데 있다.  

 

 보임이 분석하는 알렉산드르 락티오노프의 작품 <새 아파트>(1952)

 

3.

 

보임에 따르면 러시아 문화 지형에서 키치는 그 밖의 공간을 주장할 수 있는 "슈퍼맨이 없을”(41)만큼 일상 곳곳에 깊이 침투해 있다. 심지어, 일상적이고 범속한 모든 것을 거부한 소비에트 문화의 경우, 표면상 키치에 저항하고 있는 것으로 비치지만 실상은 키치화된 문화 자체이다. 저자는 그린버그의 키치 개념(“키치란 진짜 문화에 대한 저하되고 아카데믹한 시뮬라크르로 정의되며, 그 기능은 삶과 예술 사이의 경계들을 희미하게 하면서 대중을 조작한다, 키치란 원본 없는 모방이다”(206-7))을 가져와 소비에트의 문화 지형에서 스탈린의 교조 예술과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키치로 해석한다.

 

"모방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것은 사회주의 리얼리즘 예술의 기능이 아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예술의 상투어들(commonplaces), 슬로건과 깜짝 놀라게 하는 어구들은 어떤 예측가능한 감정적인, 심지어 행위적인 유사 파블로프적 반응을 실제적으로 불러일으키는 마법적 힘으로서 집단적으로 기능한다."(206)

 

스탈린 체제 시기의 노랫말에 표현된 새로운 언어("우리나라는 아름다움의 땅, 우리나라는 기쁨의 땅"(208))도 마찬가지이다. 보임은 이런 노래의 언어가 현실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가설적인 상투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키치라고 말한다.

 

만약 보임의 논의가 이것으로 그친다면 공통의 장소가 시도한 것은 키치 혹은 일상 신화의 목록화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논의를 더 밀고 나가 일상 신화의 이면에 은닉하고 있는 잃어버린 공동체, ‘공통의 장소'향수(nostalgia)'라는 이름으로 탐구한다. 가령 소비에트 시대의 대표적 주거 공간인 코무날카에서 보임은 혁명의 유토피아적 꿈에 대립하는 물건들(고무나무나 사적 공간, 서랍장)에서 향수를 건져낸다. "사적 수집품들은 문화적 신화들 속으로 깊이 스며들어 있다. 그것은 한낱 베니어합판 파티션에 의해 지배적인 담론들로부터 분리되어 있다. 물건들/기념품들은 개인적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최소의 저장고이다. 고가품과 저가품, 눈에 띄는 것과 사적인 것, 이 모두는 서랍장 이론이라는 어떤 평범함에 대해 질문하게 만든다."(276-7) 보임은 어떤 평범함을 향수와 연결 지으며 잃어버린 공동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암시한다. 잃어버린 문화적 과거와 관련된다는 점에서 향수는 문화적 관성과 같은 무언가다. 향수는 키치화로 말해지는 문화 현상에 대한 관성 작용이며, 저항의 힘이다. “나는 향수라는 단어가 고대의 것들과 근대의 것들 사이에 유명한 싸움이 있었던 시대인 17세기에 고안되었고 따라서 이것이 다만 유사 그리스적이거나 향수에 젖은 그리스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486)

 

4.

 

공통의 장소에서 보임은 러시아 문화 지형에 나타난 키치화된 일상 신화를 지목하면서도, 그 안에서 동행하고 있는 문화적 관성, 향수를 동시에 읽어내고 있다. 공통의 장소(아마도 벤야민의) 역사철학, 바르트의 신화학, 보들리야르의 시뮬라크르 개념 그리고 향수에 대한 보임의 독특한 쓰임새 등이 복잡다단하게 얽혀있어 읽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이 지면에서 필자의 부족함으로 미처 톺아보지 못한 보임의 문제의식이나 내용은 다른 독자의 몫으로 남기며 글을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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