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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장애인야학 박경석 활동가 인터뷰

정리: 노의현, 장희국, 정정훈, 

 

 

 

 

* 본 인터뷰는 2017년도에 만들어진  「 한국 '진보적 인권운동'의 역사에 대한 인권활동가 인터뷰 자료집: 1993년부터 2012년까지의 시기를 중심으로」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출처: 전장연

 

 

 

 

 

[인권활동가가 되기까지]

 

Q. 박경석 활동가가 장애운동을 하게 된 과정에 대해서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A. 저는 83년도에 장애를 입었습니다. 대학 내 행글라이더 동아리에서 활동하다가 사고를 당했어요. 제대 후에 복학해서 활동하고 있었죠. 군대는 80년도 해병대에 지원해서 수색대에 있었어요. 어차피 고생할 거 즐겁게, 짜릿한 걸 해보자는 주의여서요. 거기서 낙하산, 스킨스쿠버 등을 배워서 노는 것에 관심이 많았어요. 군대 가기 전에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논 기억밖에 없어요. (하하) 저는 79학번인데 인문계열로 들어갔고, 공부를 하도 못 해서 2학년 때 학교에서 학점으로 찍어주는 과를 갔는데, 거기가 문화인류학과였어요. 제가 2학년이었을 때 광주사태가 일어났어요. (Q. 박경석 활동가는 소위 ‘운동권’ 학생이 아니셨나요?) 이 시기의 대학생들은 사실 모두 운동권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매일 데모하고… 그런데 저는 그 속에서도 유독 참여를 안 했었어요. 관심이 없었거든요. 70~80년대에는 데모를 하면 학생들이 다 같이 나가는 분위기였는데, 저는 그런 곳에 잘 안 나가는 학생이었어요. 술 먹고 놀고… 그중에 급진적인 활동들을 했던 사람들도 일부 있었어요. 대표적으로 유시민이 있을 텐데, 저보다 1~2년 정도 선배였죠. 그 당시는 대학에 들어가면 무조건 머리를 빡빡 깎고 1주일 동안 교련에 들어갔어요. 저도 그 교련 반대투쟁에는 참여했었어요. 고등학교 끝나고 겨우 길러놨는데 깎고 오라고 하니까… (하하) 갔더니 저만 머리를 안 깎았더라고요. 교관이 머리를 왜 안 깎았냐고 뭐라고 했어요. 우리 동네 이발소가 놀아서 그랬다고 하니까 저를 패더라고요. 그래서 ‘머리로 들이받고’ 도망쳤어요. 그래서 이게 병역 거부가 됐죠. 입소 거부로… 당시에는 아마 운동권이어도 교련 학점을 0점 받은 학생은 없었을 거예요. 하지만 데모에는 잘 참여하지 않았어요.

우리 집안이 장사를 하다가 망했어요. 7남매인데 제가 다섯째이고, 그중 대학생은 4명 있었죠. 집은 망했는데 등록금은 비싸고, 공부도 못 하고, 입소 거부해서 강제징집을 당할 처지가 된 거죠. 이런 상황에서 끌려가느니 지원하자고 해서 들어간 게 해병대였어요. 그게 광주사태 끝난 직후인 6월이었어요. 광주사태를 몸으로 느꼈던 것은, 당시에 군대 간다고 형한테 인사하려고 찾아갔을 때였어요. 형이 경희대 학생이었는데, 학교가 군인들한테 점령당한 상황이었죠. 그걸 신기하다고 구경하다가 경희대 안으로 잡혀 들어갔어요. 당시에는 지나가던 사람들도 젊은이면 다 잡아갔거든요. 그렇게 1시간 동안 두들겨 맞았어요. 다 때리고 나서야 여기 왜 왔냐고 물어보더라고요. 그래서 입영 영장을 보여주니까, 그런데 여기 뭐 하러 들어왔냐면서 또 두들겨 맞고 다시 나왔었죠. 저에게 광주사태는 이런 경험이었어요.

제대하고 주일날 엄마한테 교회 헌금 받아서 행글라이더 대회에 갔어요. 엄마 말을 안 들어서 ‘뚝 떨어졌죠.’ 이게 83년도 8월 9일입니다. 다치고 나서 5년 동안 집에만 혼자 있었어요.

그러다 88년도에 집 밖으로 나오게 됐어요. 나오는 과정에서 만났던 친구에게서 ‘서울장애자종합복지관’을 소개받았고요. 강동구에 있는 곳이었는데, 집 근처였죠. 휠체어로 30분 정도 걸리는 곳이었어요. 거기 입학해서 만난 친구가 정태수였어요. 장애운동가는 아니었지만, 굉장히 반항적인 친구였어요. 거부하는 것 좋아하고, 처음 만나자마자 저는 생판 처음 들어보는 운동권 노래나 부르고 있고요. 또 장애자종합복지관 선배가 있는데, 88년도 장애인올림픽 거부하는 위원회를 했던 박흥수였어요. 장애운동을 해야 하는데 같이 할 사람이 없으니 자기가 졸업했던 장애자종합복지관에 찾아온 거죠. 와서 하는 일이 뭔고 하니 태수 같은 애, 저 같은 애 꾀서 술 사주는 거였어요. 처음에는 많이 사주었지만 나중에는 같이 냈어요. 가난했으니까요… (하하) 태수 같은 경우는 굉장히 저항적인 친구라 장애인 문제와 관련된 운동을 바로 같이 했어요. 저는 운동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그냥 놀 사람도 없고, 또 제가 해병대를 다녀온지라 ‘의리’로 같이 돌아다녔던 것 같아요. 그게 89년도였어요.

89년도에 졸업하고 동문회 활동을 했어요. 그러다가 태수랑 장애자종합복지관을 점거했어요. 왜 그랬냐면, 복지관 다녔던 학생들이 취업을 하는데, 동문회 활동 중에 이 사람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했어요. 취업해서 잘살고 있냐, 이런 걸 물어봤던 거죠. 그 설문 내용을 보니까 취업해서 6개월 동안 일을 했는데, 월급은커녕 용돈 수준으로 2~3만원 주고, 데리고 다니면서 사적인 일 시키고, 상관 집에서 허드렛일을 했다 하더라고요. 힘들어서 나오면 복지관 선생님들은 우리 마음을 이해해주는 게 아니라, 너가 장애인인데 그런 데 취직하는 게 쉬운 줄 아냐고 쿠사리 주고 다시 들어가는 일이 반복됐었어요.

그걸 가지고 태수와 제가 소식지를 발간하려고 다 해놨는데, 복지관 선생님이 와서 그걸 훔쳐가버렸어요. 그래서 “도난 사건이 발생했다!”고 하면서 흥수형이 동을 뜨고, 태수는 옳다구나 하고 바로 삭발한 다음에 우리가 졸업했던 장애자종합복지관의 직업훈련소를 점거해버렸어요. 저는 흥수형이 하자고 하니까 했지, 선생님들이랑 굉장히 친해서 딱히 하고 싶진 않았어요. 이 일이 끝나고 흥수형은 태수랑 같이 장애운동조직인 장애인청년운동연합회(이하 장청) 활동을 계속했어요. 이후 90년대 정립회관 비리사건 투쟁 같은 것들을 함께했죠. 저는 공부해야겠다, 학교에 가야겠다 싶어서 재수를 했어요. 처음에는 태수도 손가락 꼭 걸고 같이 재수하기로 했었는데, 그걸 못 참고 중간에 데모하는 데 쫓아다녔죠. 저는 안 쫓아다니고 열심히 공부해서 91년도에 숭실대 사회복지학과에 갔어요. 제가 운동을 하게 된 계기는 이런 경험들이 토대가 되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의리나 인간적 관계 때문에 단순히 참여했던 것이기 때문에, ‘내가 이 운동을 통해서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은 별로 없었어요. 공부 잘하고 학점 잘 받아서, 79학번 때 공부 못 했던 설움을 씻고 ‘착한’ 사람이 되어서 좋은 데 취업해자, 사회복지사가 되어서 월급 잘 받아서 우리 엄마한테 효도하자고 생각했어요.

이게 91~94년도에 했던 생각이었죠. 물론 태수와 흥수형이 활동을 하니까 아르바이트 삼아서 문서 작성하거나 행정 관련된 일들을 했어요. 흥수형은 말은 열심히 잘하는데, 문서를 만든다거나 행정 일은 잘 못 했어요. 나머지 뒤치닥거리는 제가 다 했죠. 설문조사하고, 발행하고, 태수도 말만 하고… 실무는 나한테 다 떨어졌었죠. 제가 걔들보다 컴퓨터나 문서 작성하는 건 잘했거든요. 억울하지 않습니까? (하하) 대신 저는 매일 술을 얻어먹고 함께 놀았죠. 그러다 운동을 하게 된 계기는 93년에, 그러니까 대학 4학년 때 태수가 야학을 만들고 있는데 도와달라고 왔었어요. 그 야학이 지금의 노들장애인야학(이하 노들야학)이죠. 당시 정립회관에 야학을 만드는데 와서 선생님을 해달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이제 졸업해야 해서 못 한다고 했어요. 대신 잘하는 사람들을 소개해주기로 하고, 공부에 뜻이 없고 운동에 관심 있는 숭실대 학생 몇 명을 꾀서 교사로 투입했죠. 저는 조직자 역할을 했던 거예요. 저는 안 하고. (하하)

그런데 제가 졸업을 했는데 갈 데가 없더라고요. 학점이 평점 4점이 넘었는데도 말이죠. 두 군데에 넣었는데, 하나는 한국장애인고용촉진공단이었어요. 거기 가서 제가 장애인으로서 얼마나 능력이 있는가를 다 보여주었었어요. 제가 실습도 거기서 했거든요. 그런데도 저를 떨어트리더라고요. 왜냐하면 당시 한국장애인고용촉진공단은 준공무원조직이라 나이제한이 있었어요. 그러고 나서 정립회관에도 지원했는데 면접 보고 떨어졌어요. “12살 어린 애들과 어떻게 사회생활을 하겠냐”는 질문에 잘할 수 있다고는 했는데, 떨어진 거죠. 그래서 할 게 없었어요. 그러다 94년도에 대학원에 다시 갔어요. 그리고 이때부터 노들야학에서 교사로 활동하게 됩니다. 제가 야학에 소개시켜주었던 숭실대 사회복지과 선배인 안신연이 “나를 블랙홀에 집어넣었다”고 하면서 울며불며 저를 꾀러 왔었거든요. 이때 했던 노들야학 교사활동이 재밌었던 거예요. 흥수형도 있고 태수도 있고 했지만, 학생들이랑 교사들이랑 술 먹는 게 제일 좋았어요. 밤새 술 먹고 놀러 다녔죠. 그렇게 야학 활동을 했었어요. 그러다 대학원 다닐 때 교수님 소개로 성남장애인종합복지관에 총무과장으로 추천을 받아요. ‘빽’으로 사원도 안 하고 졸지에 총무과장으로 취직하게 된 거죠. 이게 95년? 96년인데 대학원도 휴학하고 1년을 다녔어요. 1년 정도 다니고 났을 때쯤, 제가 맨날 땡치고 야학에 가니까, 관장이 와서 “신생 복지관인데 여기서 좀 전망을 갖고 일을 해달라”는 말을 했어요. 땡치고 야학 가지 말라는 소리였죠. 그래서 고민을 했어요. 월급이 200만원이고, 살아서 20년을 일한다고 했을 때, 월급을 다 모아봤자 1억을 못 벌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기껏 1억 벌려고 이 개고생을 하냐’는 생각에 때려쳤어요. 그러고 나서 무급으로 일하는 야학에 갔죠. 또 그 당시 태수는 결혼도 하고 지치기도 했던 터라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이하 전장협) 조직국장을 자기 대신 맡아달라고 했어요. 이게 96~97년쯤 일이었던 것 같아요. 이렇게 2000년까지 가요. 93년도에 장청이 전장협과 합쳐져요. 또 96~97년도에 제가 조직국장을 할 때 전장협과 DPI가 통합을 하죠. 전장협 조직국장인 저와 전장협 회장, 상임활동가 30~40명이 모여서 논쟁을 했어요. 그때 최민이 갑자기 등장해요. 서울대 출신 장애인인데, 혜성처럼 나타나서 모든 것을 다 평정했어요. 그것이 DPI로의 통합이었어요. 이 통합에 반대했던 사람이 딱 1명 있었는데, 상근활동가인 저였습니다.

 

[노들장애인야학의 역사와 박경석]

 

Q. 노들야학의 역사를 다룬 『노란들판의 꿈』이라는 책을 보면, 통합을 반대하셨던 게 전장협이 가진 현장 중심성, 투쟁성이 사라지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라고 나와 있는데요. 실제로 이러한 생각을 갖고 계셨던 건가요?

 

A. 그런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게, 제가 겪어왔던 현장이 그것밖에 없었던 거예요. 노들야학에서 현장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하고, 야학운동에 학생과 교사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하려고 했던 노력들이 있었던 거죠. 그게 아주 커다란 목표를 가지고 있지는 않더라도, 자신들이 참여하고 운영하는 공간의 주인이 되려는 노력이 있었던 거예요. 또 장애인들이 노점상을 많이 했는데 노점상에서도 생존의 조건을 만들기 위한 자체적인 투쟁이 있었어요. 공부방에도 자체적으로 생존하고 살아가려 했던 주체들이 있었던 것이고요. 지금은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이하 발바닥)이 중심이 되어서 하고 있는 탈시설운동도 대표적인 현장운동이라고 할 수 있어요. 장애인들이 다 시설에 있으니까 활동가들이 시설에 직접 침투하려는 운동을 하려고, 사람들을 꾀서 또박이라는 대학생 자원활동조직을 만들었었어요. 그냥 보면 한 달에 한 번 시설에 가서 빨래하고 목욕시켜주는 자원봉사조직인데, 사실은 장애인시설 실태를 조사하고, 시설에 있는 ‘착한’ 장애인들을 꾀서 시설 밖 삶을 알려주는 활동을 했던 거였죠.

 

Q. DPI와의 통합과정에서 어떤 문제가 있었던 건가요? 

 

A. DPI와의 통합은 ‘이제 옛날과 같은 운동 방식으로는 안 된다. 국제조직이 필요하다’는 생각과 함께 ‘변호사, 교수 같은 인텔리가 조직에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이뤄진 거였어요. 당시 DPI는 이런 몇몇 명망가들의 모임에 불과했지, 현장조직이나 하부조직이 있는 곳이 아니었어요. 우리는 정부랑 매일 싸우니 재정이 열악했는데, 야학도 1년 전체 예산이라고 해봤자 천만원이 넘질 않았었죠. 그걸로 교재 몇 개 사면 끝나고… 거기서 상근활동가라고 하는 이들의 삶은 굉장히 열악했어요. 활동비도 잘 받아봐야 10~20만원밖에 못 받았던 거죠. 이렇게 물적 토대가 굉장히 약했기 때문에, 변호사나 교수 같은 이들과 결합하면 해결될 거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던 거죠.

또 하나는 옛날과는 다른 방식으로 운동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물론 그것이 필요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제가 모르는 영역이고, 제가 해왔던 영역은 아니었어요. 새로운 운동 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에 대해 반대할 논리는 없었는데, 그들이 현장조직을 정리해가는 과정을 보니 동의할 수 없더라고요. 노들야학은 그 당시 전장협의 부설기관이었고 교장도 교사와 학생이 선출하는 조직이었어요. 그런데 통합을 하면서 회의에서 회장이 교장을 임명하겠다는 이야기까지 나오더라고요. 그리고 우리에게는 “노들야학은 학생들 꾀서 데모라도 한 번 더 나가려고 하지 말고 공부나 잘해라”라는 어투로 이야기들을 했어요.

 

Q. 그렇다면 그런 이야기에 반대할 때는 장애인의 권리를 위해 싸워야 한다는 생각이 있으셨던 건가요?

 

A. 그때도 아니었어요. 그 당시에 제가 조직국장을 하기는 했지만, 오히려 태수가 운동을 조직하는 역할들을 했었어요. 조직국장 할 때에도 제가 이것을 가지고 목적에 맞게끔 확 조직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일이 떨어졌으니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과 애초에 싸움꾼 기질이 있어서 싸움을 잘했던 것뿐이에요. 그 당시에는 운동 조직화에 대한 고민을 많이 안 했었죠. 하지만 DPI와 통합하면서 그들이 조직을 정리하는 방식에 일단 감정적으로 동의가 되지 않았어요.

야학을 저렇게 정리하고, 장애인자립추진위원회(이하 장자추)는 기계적으로 잘라버렸어요. 장자추는 빈곤 문제를 중심으로 노점조직과 장애조직이 만나는 공간이었는데, “왜 거기가 장애운동을 하고, 노조운동을 하냐”고 하면서 회원을 다 탈퇴시켜버렸어요. 조직과 조직이 만나는 이런 공간은 다 없애버리면서, “DPI의 회원이 될 거면 되고, 말라면 말라”는 식으로 나간 거죠. 또박이 같은 경우에도 “무슨 운동이냐, 자원봉사나 잘하게 해라”라고 하면서 날려버렸어요. 이게 뭔가 싶었죠. 그렇다고 해서 반대할 논리는 많이 없었어요. 아무래도 말빨이 달리니까요. 그 당시 장애운동권 20~30명 정도가 모여서 회의를 하는데 저 혼자만 통합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어요. 나머지는 다 찬성하고 통과시켜버린 거죠. 총회에서 투표까지 하고 졌어요. 투표 결과는 공개하지도 않았어요. 만장일치로 통과될 거라고 생각해서 총회시간도 1시간밖에 안 잡았어요.

그때 통합에 반대했지만, 노들야학은 통합된 이후에도 그 조직에 남아 있었어요. 그러나 쪼잔하게 예산 문제를 갖고 말이 나오더라고요. 포항제철에서 야학에게 이동권 문제 때문에 봉고 2대를 주기로 했었는데, DPI가 “이제 통합됐으니 그 소유권을 내놔라”라고 했어요. 조직적으로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때 이 결정이 이뤄졌던 방식이 노들야학의 구성원에게 동의도 구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했던 거였어요. 그리고 2대 중에 1대만 등하교에 사용하라고 했죠. 그게 결정적으로 나오게 된 배경입니다. 그렇게 분리됐죠.

 

Q. 1997년 6월 노들야학의 교장선생님이 되십니다. 자원하셨다고 알고 있는데요, 어떤 생각―개인적 동기, 조직적 전망 등―으로 자원하셨는지요?

 

A. 조직국장 할 때 교장을 하게 됐어요. 노들야학이 장애운동청년연합회의 부설이었으니까 부회장이 당연직 교장을 한 게 1대 교장이었어요. 당연직이었기 때문에 이름만 교장이었지, 현장에서 교장 일을 하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교사들과 미묘한 갈등이 많이 발생했죠. 부회장은 현장에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데 웬 교장이냐고요. 그래서 야학 일을 열심히 하는 활동가를 모시고 와요. 그 사람이 2대 교장을 해요. 그 사람이 쭉 하다가 문제가 생겨서 사퇴하고, 1년 정도 공백이 생겨요. 그래서 다시 교장을 뽑아야 했죠. 상근자들이 회장과 논의를 하는데, 회장이 “노들야학 교장은 명망가가 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회장의 친구인 변호사가 있는데 그 사람이 했으면 좋겠다고요. 저는 94년부터 교사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현장에 열심히 하는 친구들이 있는데, 그들과 접촉하고 함께하다가 올라오는 것도 아니고, 어느 날 갑자기 와서 교장을 한다는 것이요. 그래서 술 먹다가 “내가 교장하면 안 돼?” 했는데, 다들 농담으로 “하고 싶으면 해~”라고 해서 교장을 맡게 됐어요.

 

출처: 한겨레

 

Q. 그럼 그때도 운동적 결의로 교장을 맡게 되신 건가요? 이때부터 운동가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A. 야학이 DPI로부터 독립하고, 당시 태수가 하려고 했던 장애인고용촉진걷기대회나 4월 20일 투쟁 등을 제가 오롯이 맡아서 조직하게 되었어요. DPI는 이런 현장투쟁을 조직하지 않았거든요. 그리고 그 당시에 에바다 투쟁도 있었고요. 그런 것들을 맡으면서 자연스럽게 활동하게 된 것 같아요. 그래서 “나는 운동가를 하겠다!”라는 결의를 특별히 한 건 아니었어요. 이런 건 흥수형이랑 태수랑 술 먹으면서 이야기하긴 했죠. 88~90년도에 우리 집에서 자주 술 마시면서 “우리 세 명은 죽을 때까지 같이 운동하자”고 결의했던 건 있죠. 우리 집 앞 정자에 모여서 ‘정자 결의’를 한 거죠. (하하) “장애해방 그날까지 투쟁!”이라고요. 당시 장애운동에서 서울장애자복지관 출신이 그나마 우리 셋이 다였어요. 나머지는 정립회관 출신이거나 각자의 노선들이 다 있었죠. 울림터라는 동호회도 그렇고 전국지체장애인대학생협회… 다 이런 식으로 족보가 있었는데, 우리 셋은 그들이 보기에는 별로 크지 않은 동문회, 친목조직의 활동가처럼 보였던 거죠. 그때 흥수형이 태수랑 나를 불러서 “우리 족보는 죽을 때까지 함께하자”고 이야기했던 것이 제가 운동에 결의하게 된 기억이에요.

 

Q. 장애운동을 하면서 어떤 이론적 학습을 하셨나요?

 

A. 이후 DPI 회장이 되는 김대성이라는 친구가 있어요. 이 친구는 건대 항쟁 당시 장애인으로서 총학생회 활동을 했던 친구예요. 그 친구가 “『자본론』을 읽자”고 해서 태수와 함께 가서 공부한 적이 있어요. 그때 읽기는 했지만 기억도 안 나고 이해도 안 갔죠. 그런 곳에 학습하자고 해서 간 적은 있어요. 하지만 모여서 장애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학습하는 과정은 특별히 없었어요. 그 당시에 만나서 이야기하고 들어본 친구들은 ‘계급해방 없이는 장애해방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이 굉장히 강했어요. ‘조국통일 없이는 장애해방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친구들도 있었고요. 그때 운동했던 친구들은 장애운동이 그런 운동의 부문운동이라고 생각했지, 독자적인 운동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던 것 같아요.

 

Q. 선생님이 장애운동이라는 것에 목적의식을 갖게 되신 시기는 언제인가요? DPI로부터 독립하던 시기인가요?

 

A. DPI와 분리되던 시기엔 생존의 문제였지, 운동의 전망을 가지고 나온 건 아니었어요. 제가 가진 운동의 전망이라면 현장투쟁에 대한 전망뿐이지, 이것이 이론으로나 소수자운동으로서 장애운동에 대한 체계적 목적의식이 있는 건 아니었던 거죠.

 

Q. 그런 이론적 체계나 전망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장애인이 겪는 문제, 가령 장애인의 이동권과 같은 문제는 장애인 스스로의 투쟁을 통해서 해결해야 한다는 의식은 갖고 계셨던 것 아닌가요?

 

A. 그건 태수나 흥수형에게서 자연스럽게 배웠어요. 흥수형은 저에게 이런 훈련도 시켰어요. 술 사주겠다고 불러서는 구호 외치는 연습을 시키기도 했죠. “요새 대학생들은 이렇게 한다, 팔을 올릴 때는 각도를 이렇게 해서…” (하하) 그래서 나보고 “니가 나가면 선동을 해라”라고 하고, 결국 못 하고 와서 욕먹고 코피 터지고… (하하) 현장에서 어떻게 투쟁하느냐는 문제를 가지고 셋이 많이 이야기했죠. 점거할 때도 그렇고요. ‘어떻게 점거할거냐’는 이야기들이 재미있었어요. 한번 점거를 하고 나면 ‘전술을 어떻게 썼느냐’에 관해 무용담을 이야기하고 좋아하던 시기였어요. 그게 제 생활의 일부였죠.

이동권 문제는 이규식이가 99년도에 노들야학에서 공부 안 하고 도망쳐서, 혜화역에서 리프트를 타고 가다가 떨어지는 사고가 나요. 공부 안 하고 도망친 것은 좀 괘씸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같이 싸우게 된 거죠. 2001년에 오이도역에서 장애인 사망사고도 있었고요. 그 당시 저에게는 다른 시설 비리보다도 장애인 노동권 투쟁이 핵심이었어요. 의무고용제도, 장애인고용촉진법 제정과 관련된 투쟁을 했고, 제정되고 난 후에도 끊임없이 자본가 집단인 전경련에서 의무고용률을 하향조정하려 했고, 그나마 제대로 고용하지도 않는 상황이었죠. 그래서 장애인고용촉진걷기대회가 중요한 투쟁이었어요. 그리고 생존의 문제에서는 노점상 문제가 중요했죠. 이런 것들이 전장협이 DPI로 통합되기 전에 가지고 있던 운동의 기조였어요. 통합된 후에는 이런 운동들이 사라지고 단절된 거죠. 97~98년에 몇 년 제대로 투쟁을 못 했어요. 그러다 이런 투쟁을 이어나가게 된 것이 ‘에바다 투쟁’이었어요. 전장협에서 에바다 투쟁을 계속 하고 있었는데, 이 투쟁을 버릴 수 없어서 결합해서 함께 싸웠어요. 생각해보면 그런 투쟁이 완성된 이론 속에서나, 소수자운동으로서 장애운동의 전망들을 가지고 이뤄진 건 아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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