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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페미니스트 선언문(1)

The Transfeminist Manifesto1)

 

에미 코야마(Emi Koyama)

백소하 옮김

 

 

 

 

역자서문

 

 

코야마의 「트랜스페미니스트 선언문」은 여태까지 번역한 글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담론, 문학, 역사의 층위에서 분석과 성찰이 이루어진 스톤, 스트라이커, 파인버그와 달리 코야마의 글은 선언문의 형식에 충실해, “트랜스페미니즘”이 활동하기 위한 구체적인 강령과 쟁점을 제시하고 있다. 물론 코야마 본인이 후기에서 거듭 술회하듯 당대 페미니즘 내 반트랜스 정서에 맞서 트랜스 여성의 위치를 모색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기에, 이 글은 트랜스페미니즘을 그 신기원으로 자신 있게 주장하면서도 이 글이 궁극적으로 모색하는 “포용적 연합 정치”로 나아갈 방도을 제시하는 데 미진하다. 그러나 루인 역시 비판과 더불어 강조하듯이, “「트랜스페미니스트 선언문」은 트랜스 정치학과 페미니즘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다시 환기시키고 그 가능성을 모색하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며, “특권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 특권과 피해의 경쟁 구도를 만들기보다, 특권을 사유하는 과정을 통해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저작이다. (루인, 「여성 범주를 통해 트랜스 페미니즘을 다시 사유하기」, 『여/성이론』 42호,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20, 12-35쪽.)

 

 

 

 

image by 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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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20세기 후반은 다양한 여성 집단의 참여의 결과로 미국 페미니스트 운동의 전례 없는 확장을 목격하고 있다. 페미니스트 운동의 주류 내에서 이전까지 주변화된 여성 집단이 그 안에서 자신의 정당한 자리를 요구하며 침묵을 깰 때, 이들은 먼저 사소한 문제로 페미니즘을 파편화한다는 혐의를 받았고, 그 뒤에야 페미니스트 사상의 값진 일부로 수용되고 환영을 받았다. 우리는 다양성이 우리의 힘이지, 약점이 아니라는 것을 점차 의식하게 되었다. 어떤 일시적 파편화나 양극화도 포용적 연합 정치의 궁극적 미덕을 무효화할 정도로 심대하지 않다.

 

이전까지 침묵을 강요당한 여성 집단이 소리 내어 말할 때마다, 다른 페미니스트들은 자신들이 누구를 대표하고 무엇을 상징하는지에 관한 생각을 재고하라는 도전을 받게 된다. 이 과정이 때로는 페미니스트로서 우리가 지닌 편견들과 내면화된 억압들에 대한 고통스러운 자각으로 이어지기는 하나, 결국 우리의 관점과 지지층을 넓혀 운동에 이득이 된다. 트랜스 여성이 페미니스트 혁명에 공개적으로 참여하여 운동의 범위를 넓힐 때가 되었다고 우리가 선언하는 것은 이러한 이해에 기초한다.

 

“트랜스”는 출생 시에 지정된 한 사람의 성별과 그녀나 그의 젠더 정체성 그리고/혹은 표현 사이의 어떠한 단절을 포함하는 넓은 범위의 젠더 규범 위반들을 아우르는 포용적인 어휘로 대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선언문의 목적을 위해, “트랜스 여성”이라는 명칭은 출생 성별이 남성으로 지정되었음에도 다소간 여성으로 정체화, 표현, 혹은 생활하는 개인들을 지칭하는 데 간혹 쓰였다. “트랜스 남성”은 마찬가지로 이들이 출생 시에는 달리 인지되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남성으로 정체화, 표현, 혹은 생활하는 이들을 설명하는 데 쓰였다. 이 운용상의 정의가 남성/여성 이분법에 순응하지 않는 많은 트랜스들이나 다른 방식으로 트랜스젠더화된 이들을 빼놓기는 하나, 우리는 이들이 우리 모두가 마주하는 쟁점들 사이에서 충분한 유사성을 인식하고 우리의 분석을 자신의 투쟁에서 어느 정도 유용하다고 여길 수 있기를 바란다.

 

트랜스페미니즘은 자신의 해방이 모든 여성과 그 너머의 해방과 본질적으로 연결되어있다고 보는 트랜스 여성에 의한, 트랜스 여성을 위한 운동이다. 이는 또한 트랜스 여성의 필요에 동정적이고 트랜스 여성과 자신의 협력이 자신의 해방에 필수적이라고 여기는 퀴어, 인터섹스, 트랜스 남성, 비트랜스 여성, 비트랜스 남성, 그 외의 이들에게도 열려 있다. 역사적으로, 트랜스 남성은 트랜스 여성보다 페미니즘에 더 큰 공헌을 하였다. 우리는 우리의 해방을 위해 트랜스 여성이 다른 이들과 나란히 페미니스트 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하는 것이 긴요하다고 믿는다.

 

트랜스페미니즘은 기존의 페미니스트 제도를 장악하는 데 관한 것이 아니다. 대신, 페미니즘 전체를 우리의 해방과 다른 모든 이들과의 연합 작업을 통해 확장시키고 발전시킨다. 또한 트랜스 및 비트랜스 여성 모두의 편에 서며, 대신 비트랜스 여성에게 트랜스 여성의 편에 서줄 것을 요청한다. 트랜스페미니즘은 다른 배경의 여성들이 서로의 편에 서는 페미니스트 연합 정치를 체현한다. 우리가 서로의 편에 서주지 않는다면, 누구도 그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요 원칙

 

트랜스페미니즘의 주요 원칙은 간단하다. 먼저, 우리는 모든 개인에게 그녀나 그의 정체성을 정의하고 사회가 이를 존중하도록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이는 아울러 차별이나 폭력에 대한 두려움 없이 우리의 젠더를 표현할 권리를 포함한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몸에 관해 결정을 내릴 권리가 우리에게만 있고, 어떤 정치적, 의학적, 종교적 권위도 우리의 의지에 반해 우리 몸의 온전함을 침해하거나 우리의 몸으로 뭘 할지에 관해 우리가 내린 결정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여긴다.

 

그러나 누구도 제도화된 젠더 체계의 사회적이고 문화적이며 실재하는 역학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가 우리의 젠더 정체성이나 표현에 관해 결정을 내릴 때, 우리는 우리가 이런 결정을 가부장제적 이원(二元) 젠더 체계의 맥락에서 내린다는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 특히 트랜스 여성은 누가 충분히 진정한 여성이고 누가 아닌지의 결정권자를 자처한 의학계에 인정되고 합법화되기 위해 여성성의 전통적 정의를 취하도록 권장되고, 때로는 이를 따를 것이 요구되기도 한다. 트랜스 여성은 흔히 여성으로 인정받고 호르몬 및 외과 조정을 받기 위해, 젠더 정형을 내면화함으로써 자신의 여성성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이러한 관습은 각 여성의 독특성을 부정하기에, 트랜스 및 비트랜스 여성에게 유사하게 억압적이다.

 

트랜스페미니즘은 누구도 “진짜” 여자나 “진짜” 남자가 되기 위해 그녀 혹은 그의 젠더 정체성이나 표현에 관한 개인적 결정들을 내리거나 내리지 않도록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고 여긴다. 또 우리는 “진짜” 페미니스트의 자격을 얻기 위해 이러한 개인적 결정들을 내리거나 내리지 않도록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트랜스 여성으로서, 우리는 우리의 안전이 대개 우리가 “평범한” 여성으로 얼마나 잘 “패싱”할 수 있는지에 달려있음을 알게 되었다. 트랜스페미니스트로서, 우리는 항상 안전과 안녕을 위한 우리의 요구를 우리의 페미니스트 원칙들에 맞서 협상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트랜스페미니즘은 우리 모두가 어떻게 이성애주의적이고 가부장제적인 젠더 계율을 내면화하고 어떤 세계적 영향을 우리의 행동이 수반하는지를 검토하고자, 트랜스 여성을 포함한 모든 여성에게 도전한다. 동시에, 우리는 여성성의 가부장제적 정의를 연상케 하는 것을 자신에게서 하나도 남김없이 지우는 게 페미니스트 한 명의 책임이 아님을 명확히 한다. 이런 결정들이 특정한 젠더 역할에 순응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여성은 개인적 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 젠더 정형을 강화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아서는 안 된다. 그런 순결 시험은 우리의 행위주체성을 부정하기에 여성의 힘을 빼앗으며, 트랜스건 아니건 여성 대다수를 페미니스트 운동에 참여하는 것으로부터 소외시킬 뿐이다.

 

트랜스페미니즘은 여성으로 존재하는 다양한 방식이 여성들이 존재하는 만큼 있으며, 우리에게 자신의 결정을 죄책감 없이 내릴 자유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믿는다. 이를 위해 트랜스페미니즘은 개별 여성들이 내린 개인적 결정을 가지고 이들을 탓하기를 거부하면서, 우리의 개별적 선택들을 억제하고 제한하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제도들을 마주본다. 진정한 페미니스트로 고려되기 위해 여성들이 개인적 결정을 내릴 자유를 저버리도록 요구하는 것은 이상적 여성성에 대한 경직된 가부장제적 구성물을 살짝 변형되었으나 마찬가지로 경직된 페미니스트 판본으로 대체하는 것에 불과하기에 불필요하고, 실상 억압적이다. 트랜스페미니즘은 여성들에게 가능한 선택의 폭을 제한하는 제도들을 면밀히 살피고 도전하는 동시에. 여성들의 개별적 선택들이 존중되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을 옳다고 여긴다.

 

 

남성 특권의 문제

 

어떤 페미니스트들, 특히 급진주의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들은 트랜스 여성 및 남성이 남성 특권으로 이득을 취한다고 비난하였다. 그들은 MtF 성전환자transsexual들이 소년들로 사회화되었고, 그렇기에 남성 특권이 주어졌다고 주장한다. 반면 FtM 성전환자들은 애처롭게 남성 특권을 얻고자 자매들을 저버린 배신자들로 특징지어진다. 이러한 비난은 일부 페미니스트 사회에서 트랜스 여성 및 남성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되었기에, 트랜스페미니즘은 이에 응답해야 한다.

 

이런 주장을 마주했을 때, 트랜스 여성의 자연스럽고 초기적인 반응은 자신의 삶에 어떤 남성 특권이 있었음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들이 남성으로 태어난 것을 특권보다 짐에 가깝다고 믿게 되는 것은 이해하기 쉽다. 이들 중 다수는 남성 신체를 갖고 자라면서 사내아이로 대해지는 것을 증오한다. 이들은 거칠고 사내답게 행동하도록 강요받는 게 얼마나 불편한 느낌인지 기억한다. 많은 이들이 사내아이처럼 똑바로 행동하지 않았다고 다른 소년들에게 괴롭힘과 놀림을 당했다. 이들은 부끄러움을 겪어야만 했고, 대개 우울증에 시달렸다. 성인이 되어서도 이들은 알려지는 것을 지속적으로 두려워하며 살고, 이는 이들의 고용, 가족, 관계, 우정, 그리고 안전을 위태롭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트랜스페미니스트로서, 이러한 간단한 반응에 저항해야 한다. 남성 특권이 다른 남성보다 어떤 남성들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남성으로 태어난 트랜스 여성이 이로부터 전혀 이득을 보지 않았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대부분의 트랜스 여성은 자기 삶의 특정 순간이라도 (“계집애” 같은 녀석들 취급이더라도) 남성으로 “패싱”한 적이 있고, 그로 인해 남성으로 인식되는 것에 만족하든 만족하지 않든, 예를 들자면 교육이나 고용에서 더 나은 대우를 받는다. 이들은 적극적이고 자신감을 갖도록 훈련받았으며, 일부 트랜스 여성은 트랜지션 이후에도 이러한 “남성적” 특질을, 대개 자신에게 유리하게 유지해낸다.

 

여기서 나타나는 문제는 젠더이형gender-variant으로서 겪은 억압과 남성 특권의 부재를 우리가 자주 헷갈린다는 것이다. 우리가 남성 우월주의로부터 한 번도 이득을 본 적이 없다고 하는 대신, 우리는 우리의 경험이 남성 특권과 트랜스로서의 불이익 사이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을 드러낸다고 주장해야 된다.

 

그녀 혹은 그에게 지정된 성별에 맞는 젠더 표현의 지향성 그리고/혹은 젠더 정체성을 지닌 사람은 비트랜스로서 특권을 지닌다. 이 특권은 다른 특권들과 마찬가지로, 지닌 이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다른 특권들과 마찬가지로, 이 특권이 없는 이들은 그게 없어 자신들이 얼마나 심하게 고통을 받는지 직관적으로 안다. 어떤 트랜스 여성은 트랜지션을 얼마나 일찍 시작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완전히 여성으로 사는지에 따라 남성 특권에 제한적으로 접근할 수 있지만, 동시에 트랜스로서 극심한 정서적, 사회적, 재정적 불이익을 겪는다. 트랜스 여성이 다른 여성들보다 선천적으로 더 특권적이라는 의견은 게이 남성 커플은 파트너 양자가 남성 특권을 지니므로 이성애 커플보다 더 특권적이라는 주장만큼이나 몰지각한 소리다.

 

가부장제로부터의 피난처가 되게끔 만들어졌다고 하는 “여성의 공간”에 트랜스 여성이 접근하려 하면 대개 긴장이 고조된다. 이러한 “여성의 공간”의 기원은 인종 차별주의나 계급 차별주의 같은 다른 억압들을 영속시키는 자신들의 역할은 대체로 무시하면서 성차별주의를 가장 근본적인 사회 불평등으로 우선시한 백인 중산층 여성들이 주로 속한, 1970년대의 초기 레즈비언 페미니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성차별주의가 다른 어떤 사회적 요소보다 여성의 삶을 중대하게 특징짓는다는 가정 하에, 이들은 성차별주의에 대한 자신들의 경험이 인종이나 계급 등과 무관히 모든 여성에게, 즉 모든 비트랜스 여성에게 보편적이라고 생각했다. 1970년대 급진주의 페미니즘에 대한 최근의 비평들은 이들의 인종 차별주의와 계급 차별주의의 편리한 등한시가 실제로는 자신들을 백인 중산층 여성으로서 특권화한 방식을 지적한다.

 

이러한 이해에 기초해, 트랜스페미니스트는 남성 특권에 대한 비난을 부인하는 식으로 대응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 가운데 백인인 이들이 백인 특권을 직접 다루듯이, 트랜스 여성이 남성 특권으로부터 (당연하겠지만 어떤 이들이 다른 이들보다 더) 이득을 보았을 방식들을 인정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 여성들의 출신 배경은 다양하기에, 트랜스페미니즘은 우리들의 차이를 공통성만큼 귀중히 여기는 것의 중요성을 믿는다. 트랜스페미니스트는 우리 자신의 특권을 마주하고, 비트랜스 여성들이 비트랜스로서 자신의 특권을 마찬가지로 인정하기를 요구한다.

 

 

뒤집힌 본질주의를 해체하기

 

제2물결 페미니즘이 한 사람의 젠더는 그녀 혹은 그의 생리적 성별과 별개이며 사회적, 문화적으로 구성된다는 생각을 대중화하긴 했지만, 이 생각은 진정한 신체적 성별이라고 하는 게 있다는 믿음을 대체적으로 질문하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성별로부터 젠더를 분리하는 것은 강제적인 젠더 역할을 무너뜨리는 데 쓰인 힘 있는 수사이기는 했으나, 페미니스트들이 최근까지 본질적인 여성과 남성의 성별의 자연성을 빠뜨린 채 문제의 절반만 질문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트랜스페미니즘은 성별과 젠더 모두 사회적으로 구성되었으며, 나아가 성별과 젠더 사이의 구분이 편의상 인위적으로 그어졌다고 판단한다. 사회적 구성물로서의 젠더 개념이 여성의 능력에 대한 전통적 태도를 해체하는 데 강력한 도구임이 입증되기는 했으나, 특정한 차별적 정책 혹은 구조에 생물학적 바탕이 있는 양 정당화할 여지를 남겨두었다. 또 이는 자신이 누구인지에 관한 본인의 내적 감각보다 신체의 성별이 더 인위적이고 바뀔 수 있는 것으로 느껴지는 트랜스 경험의 현실을 직접 다루는 데에도 실패하였다.

 

생물학적 성의 사회적 구성은 추상적 관찰 이상이다. 이는 많은 인터섹스들이 겪는 신체적인 현실이다. 해부학적 특성이 남성이나 여성에 말끔히 맞아떨어지지 않는 이들의 존재에 사회가 어떤 것도 준비하지 않았기에, 이들은 전문 의료진에게 정해진 대로 몸을 훼손당하고 지정된 성별대로 살도록 교묘히 기만당한다. 인터섹스들에게는 어떻게 살고 싶고 수술이나 호르몬에 의한 “교정”을 원하는지 스스로 정할 기회가 대개 주어지지 않았다. 많은 인터섹스들은 자신에게 지정된 성별과 젠더 정체성이 일치하는지와 무관히, 삶의 이러한 중대 결정에 자신들의 발언권은 없다는 데 경악한다. 우리는 인터섹스 아동의 성기 훼손이 제대로 된 동의 없이 이들의 몸의 온전함을 불필요하게 훼손하기에 본래적으로 폭력적이라고 믿는다. 지정된 성별이 그녀 혹은 그의 젠더 정체성과 일치하는지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인터섹스들이 자신의 몸에 일어나는 일에 진정한 선택권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트랜스들은 자신의 동의 없이 지나치게 단순한 의료 기준에 따라 지정된 성별에 불쾌감을 느낀다. 트랜스들은 다양하다. 어떤 이들은 의료적 조치를 거치든 거치지 않든 의료 당국이 지정한 것과는 다른 성별 구성원으로 정체화하고 살며, 다른 이들은 남성 혹은 여성이라는 성별로 정체화하지 않거나 둘 모두로 정체화한다. 트랜스 해방은 자신을 정의할 권리를 의료적, 종교적, 정치적 권위자들로부터 탈환하는 것이다. 트랜스페미니즘은 성별을 지정하는 어떤 방법도 사회적이고 정치적으로 구축되는 것으로 보며, 개인이 그녀나 그의 성별(아니면 나아가, 성별 없음)을 자유롭게 지정할 사회 제도를 옹호한다.

 

트랜스들이 정치적으로 조직되기 시작하면서, 젠더 정체성의 본질주의적 관념을 취하는 데 구미가 당길 것이다. 트랜스들이 “남자의 몸에 갇힌 여자들” 혹은 그 역이라는, 대중매체가 유행시킨 진부한 표현 말이다. 이런 전략이 매력적인 이유는 명확하다. 만약 우리가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생물학적 오류에 의해 태어난다고 일반 대중을 설득한다면, 이들이 우리에게 더 우호적으로 변할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이다. 또한 이 표현은 우리에게 매우 깊고 근본적으로 느껴지는, 우리가 누구인지에 관한 우리 자신의 감각과 보통 맞닿아 있다. 그러나 트랜스페미니스트로서, 우리는 그런 표현이 함축하는 것 때문에 이러한 유혹에 저항한다.

 

트랜스들은 보통 신체의 성별이 자신의 마음이나 영혼의 젠더와 일치하지 않는 이들로 묘사되어왔다. 이 설명은 직관적으로는 말이 될지도 모르나, 그래도 트랜스페미니즘에게는 문제적이다. 누군가에게 여성의 마음이나 영혼이 있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인식 가능한 방식으로 구분되는 남성과 여성의 마음이 있다는 걸 뜻한다. 이는 결국 여성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는 데 쓰일 수 있다. 우리의 젠더 정체성을 본질화하는 것은 생물학적 본질주의에 기대는 것만큼이나 위험할 수 있다.

 

트랜스페미니즘은 우리가 주어진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제약 안에서 살아가고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우리에게 참되고 편안하며 솔직하게 느껴지는 것을 바탕으로 우리 자신의 젠더 정체성들을 구성한다고 믿는다. 이는 트랜스들은 물론, 젠더 정체성이 출생 시 성별과 불일치하는 이들에게도 유효하다. 이를 승인한다고 해서 인정과 존중을 위한 우리의 요구가 약해지는 일은 없다. 트랜스페미니즘은 우리의 존재를 뒤집힌 본질주의로 정당화하는 대신, 섹스/젠더 일치의 규범성이라는 본질주의적 가정을 해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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