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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자본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해오기만 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에 그치지 않고 자본 변형하기도 해야만 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변형할 것인가[각주:1]

 

자크 비데(Jacques Bidet) 지음

배세진 옮김

 

 

자본 철학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해오기만 했는데, 이제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형하는 것이다.”[각주:2] 청년-헤겔주의자들의 용어로 말하자면, 천상에 있던 철학을 지상으로 내려오게 만들기. 이것이 1845년부터 마르크스가 결연히 걸어나가기 시작했던 그러한 새로운 길이다. 마르크스의 이러한 도전[기획] 스스로를 하나의 부름(adresse)으로, 하나의 호명(interpellation)으로, 하나의 명령(injonction)으로 정립(se donne)한다. Es kommt darauf an, sie zu verändern… 하지만 마르크스의 이러한 도전은 도전이 실재(réel) 결정태들(déterminations) 응답할 때에만 합당한 것이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발화내적 행위에서, 현실(réalité) 대한 주장(prétention) 이성(raison) 대한 주장(prétention) 서로가 서로에 대해 분리 불가능한 것이며, 또한 호명자의 자기(soi) 위치(position)와도 분리 불가능한 것이다.[각주:3]

 

중요한 것은 인간의 본성을 변형(transformer)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하나의 인간적 세계가 도래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프로그램이 마르크스가 1857년의 원고인 그룬트리세에서 윤곽을 그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기나긴 연구의 종착점에 이르러서만이, 그로부터 출발해 현재의 지배적인 사회질서 -그러니까, 그룬트리세 초판 서문과 재판 후기의 용어들을 따르자면, ‘자본주의적 생산’(production capitaliste) 지배하는 현대 사회(société moderne)라는 사회질서- 사고될 있고 또한 현재의 지배적인 사회질서가 변형을 위한 비판(critique transformatrice) 복속될 있는 그러한 지점을 어렴풋이 보게 되는데에 성공할 있다. 진정, 우리가 그로부터 출발(partir)해야만 하는 그러한 하나의 지점이 분명 존재하는데, 왜냐하면 우리 사회 내의 모든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대립은 바로 지점 위로 모이게 되기 때문이다. 바로 지점이 시장 할애된 자본 1 1 1장에서부터 자본 할애된 자본 1 3 7(독일어판 기준으로는 5)으로 나아가면서 펼쳐지는(se déploie) 개념적 장치(dispositif conceptuel) 수단으로 마르크스가 자본 시작점(commencement)에서 확실히 설명해내고자 시도하는 것이다.[각주:4]

 

자본 설명(exposé)에서 전제들(préalables)이라는 질문

 

마르크스는 모든 특수한(particulière) 사회에 대한 연구의 문턱이 되는(préliminaires) 인간학적[인류학적](anthropologiques) 일반성들(généralités) 관심을 가졌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전제들(préalables) 가지 서로 변별되는 측면들(volets)(ERC, pp. 29-44) -하지만 글에서 우리는 이를 함축적인 방식으로만 다룬다- 따라 정의하고자 시도했다.[각주:5]

 

번째 측면은 생산 일반 관계된다. 자본에서 생산 일반은 부수적으로만 언급된다. 예를 들어, 자본 1 1 1장의 4절에서 등장하는 로빈슨 크루소라는 인물에게서 나타나는 인간 개인 일반과 같이 말이다. 로빈슨 크루소라는 인물로 대표되는 인간 개인 일반은 살기 위해 생산을 해야만 한다. 합리적 존재로서, 인간 개인 일반은 자신의 생산적 활동을 구체 노동 관점에서, 다시 말해 서로 다른 사용가치들 자신이 필요로 하는 다양한 생산물들 사이로의 자신의 노력들에 대한 합당한 배분에 따라 이해하며, 또한 이와 상관적으로 추상 노동 관점에서, 다시 말해 필요한(nécessaire) 시간에 따라, ‘노동력 필요한 지출(dépense) - 주어진 하나의 생산을 위한 가능한 최소한의 지출- 따라 이해한다. 따라서 추상 노동/구체 노동이라는 쌍은, ‘사용가치혹은 노동력이라는 개념들이 그렇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현대적 사회형태에 고유한 것이 아니다.[각주:6] 바로 지점에 합리적 활동 형태로서의 노동 일반 대한 정의 내에 함축된 일반 개념들이 놓여있다. 또한 일반 개념들은 자본 1 3 7(독일어판으로는 5) 1, 철학자들이 종종 주석을 달곤 하는 사용가치의 생산이라는 제목의 절과 관계되어 있다. 독일어 원문에서, 절의 제목은 Arbeitsprozess 노동 과정(le procès de travail)’ (일반)이다.  

 

다른 한편으로, 다음이 바로 번째 측면인데, 마르크스는 우리가 교환, 분배, 재생산 등과 같은 다른 범주들을 함축하는 사회적 맥락 내의 생산을 연구하지 않는다면 [이론적] 조악함 속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는 점을 끊임없이 강조했다. 그리고, 나아가, 총체적인(total) 사회적 현상을 형성하는 정치적, 법률적, 이데올로기적 관계들의 맥락 내에서 고유하게 경제적인 과정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바로 이러한 적절한 총체성(totalité) 마르크스는 1857 그룬트리세 서문에서 윤곽을 그리고자 시도했다. 그리고 1861년의 정치경제학 비판[아마도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1분책을 말하는 듯하다] 서문에서 마르크스는 이러한 사회적 생산양식일반이라는 초역사적 문제설정을, 테크놀로지 항상 규정된(définis) 사회적 관계들(rapports sociaux) -소유, 통제(contrôle), 배분- 테크놀로지가 맺는 관계들(relations) 내에서 고려되어야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그리고 생산력들 생산관계들이라고 불리는 쌍은 쌍이 선전제(présuppose)하는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형태들 관계맺어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하나의 최소주의적(minimale) 정식화로 종합했다.[각주:7] 이것이 바로 하나의 하부구조 하나의 상부구조사이의 통일체로서의 사회적 구조라는 유명한 마르크스적 형상(figure)이다.

 

그런데 자본에서 마르크스가 이러한 개념적 전제들(préliminaires) 사전적으로(en préalable) 설명하기를 포기한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한다. 마르크스는 단숨에 특수한(particulier) 하나의 생산양식으로, 그러니까 현대적 사회형태라는 맥락으로서의 법률-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맥락 내에서 이해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으로 나아간다.[각주:8] 따라서 지점에서 마르크스가 확립하고자 시도하는 시작점(commencement) 현대성의 담론(discours de la modernité) - 현대성의 담론 내에서 자본주의 사회 혹은 현대 사회에 고유한 것이 무엇인지가 말해진다- 시작점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앞서 지적한] 일반적(généraux) 개념들을 함축시키지 않고서는 이러한 시작점에 도달할 없다. 시작점의 작업은 특수한(particulier) 사회의 유형, 그러니까 여기에서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고유한 최초(premier) 개념들이 생산되는 방식으로 전제적(préalables) 개념들을 결정’(déterminer)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결정된 작용(opération déterminée) 마르크스가 실행하는 것인데, 그러나 마르크스는 이를, 이러한 결정된 작용에 동반되는 난점들로부터 항상 명료하게 빠져나오지는 못하면서, 종종 암묵적인 것으로 남아있는 그러한 방식으로 행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마르크스가 우리에게 남겨준 텍스트는 그의 탐구가 행하는 암중모색의 표지를 여전히 지니고 있다. 그래서 가지 개념적 차원들이 다소간 뒤섞여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전제들(préalables) 개념성인 일반적(générique) 개념성과 시작점(commencement) 개념성인 특수한[종적](spécifique) 개념성을 제대로 구분하는 것이 본질적이다. 예를 들어 현대적 사회형태에서 생산이라는 통념(notion) 어떠한 의미를 취하는지, ‘노동력 생산이라는 통념에서 어떠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지, 그리고 나아가 어떠한 특수한(particulière) 논리에 따라 구체 노동 추상 노동 생산이라는 통념 내에서 절합(articulent)되는지를 분석하는 것이 중요하다.[각주:9] 마르크스에게 변형’(transformer)해야 하는 것은 인간 일반이 아니라 우리의 세계, 우리의 자본주의 사회라는 점을 잊지 말자. 그래서 마르크스는 자기 세계 고유의 형태 [사전에] 정의해(défini) 놓아야만 했다. 

 

자본 1 1 1장이 헤겔적인 [대문자] 논리 의미에서[혹은 헤겔의 대논리학 의미에서] 절대적 시작점(commencement absolu) 아니라는 점은 굳이 덧붙일 필요가 없다. 자본 1 1 1장은 [대문자] 정신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규정된(définie) 하나의 사회형태에 대한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철학자-주석가들이 행하는] 대논리학 설명 순서(ordre d’exposé) 자본 설명순서 사이의 상호접근(rapprochement) 전체가 굉장히 문제적인 것으로[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각주:10][각주:11] 이성에 관한 어떠한 특정한 개념과 현대적 사회형태 사이에 유의미한 하나의 관계(relation) 분명 존재하고 있다. , 현대성의 담론의 시작점이라는 질문을 결정하는 하나의 관계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앞으로 보게 것이듯, 관계는 마르크스의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시작점이라는 혹은 최초의(premiers) 개념들이라는 질문

 

그렇다면 우리는 특수하게 현대적인 사회형태에 대한 설명을 어떻게 시작’(commencer)해야만 하는가? 우선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은 본질적인 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믿었다. 한편은 생산수단들을 소유하고 다른 한편은 착취당하는 그러한 계급들 사이의 관계(rapport)로부터 말이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의 관점에서 가정되기를(censément), 모든 다른 사회적 관계들(relations) 지배하고 결정하는 것인 그러한 계급관계(rapport de classe)로부터 말이다.[각주:12] 하지만 마르크스는 이러한 방식으로 [이론적 작업을] 진행시켜나갈 수는 없다는 점을 결국 깨닫게 된다. 실제로 우리가, 자본 1 1편에서 우선적으로 설명되어야 하는 개념인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해 알고 있지 못하다면, 자본 1 3편의 대상이 잉여-가치(plus-value) 혹은 잉여가치(survaleur) 대해서 말할 없다는 점은 명확하다.[각주:13] 그런데 이는 우리가 직접적으로 계급구조 그러니까 계급들 사이의 관계(rapport)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 사이의 관계(relation) 그러니까 현대적 사회형태의 특수한 간개인적 관계(relation interindividuelle) 관련되어 있는 더욱 일반적인 하나의 계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점을 함의한다. 지점에 관련된 관계란 현대성에 확실히 고유한 그러한 하나의 관계(relation), 하지만 마르크스의 용어법을 따르자면 계급구조보다 더욱 추상적인[각주:14] 그러한 관계이다. 바로 이러한 메타구조[각주:15]로부터 출발해서만이 우리는 계급구조에 도달할 있을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현대사회의 상품적인 (간개인적) 메타구조 할애된 자본 1 1편에서부터 자본주의적인 (계급) 구조 할애된 자본 1 3편으로 (1편에서 3편으로의 이행을 형상화하는 자본 1 2편을 거쳐) 나아간다. , 간개인적 관계에서부터 계급관계로, 그러니까 마르크스의 분석의 용어들에 따르면, ‘시장에서 자본으로 말이다.[각주:16]

 

이는 정말 거대한 도전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개념적 장치는 현대 정치철학의 문제들 전체뿐만 아니라 경제이론, 법권리(droit) 토대들, 현대성의 사회학적이고 역사()적인 이론의 문제들 전체 또한 자기 안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마르크스가 이러한 문제들을 [완전히] 해결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는 마르크스가 이러한 혁신 -메타구조로부터 구조로( 다음으로는 구조에 내재적인 경향들로) 나아가는 길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현대적 사회형태를 이해하도록 해주는 그러한 혁신- 통해 도입하는 이론적 공간의 새로운 배치(disposition) 현대의 문화와 정치를 심원하게 쇄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의 발명은, 단순히, ‘계급투쟁으로서만 존재한다는 의미에서의 사회계급들 대한 발명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분리 불가능하게, 간개인적 관계들(rapports interindividuels) 계급관계들(rapports de classe) 사이의 이러한 정초적 관계(relation)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현대적 계급관계(rapport moderne de classe) 개인들을 - 개인들을 자유롭고 평등하며 합리적인 동류의(semblables) 인격들(personnes) 놓음(posant)으로써- 그들 사이에서 구분(distingue)하고 분할(divise)하며, 개인들을 적대적인 집단들 안으로 분배(range)한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지점에서 시작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태를 용이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이러한 시작점이 극도로 단순하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신이 요청하는 바에 공통적 의미(sens commun) 부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이는, 마르크스에 대한 속류적 독해가 주장하는 것처럼 마르크스가 표면’(surface)으로부터, 그러니까 나타나는’(apparaît) 것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 아니다. 분명 마르크스는 착취와 지배의 성격을 지니는 자본주의적인 사회적 관계들(rapports sociaux capitalistes) 어떻게 교환의 관계들(rapports d’échange), 그러니까 평등과 자유의 관계들로 나타날(apparaître)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기적인) 단순한 외양(apparence) 질서에 대한 분석이 따라야만 하는 그러한 질서를 취하지 않는다. 마르크스는, 고유한 방식으로, 나타나는(apparaît) 것으로부터가 아니라 스스로 정립되는(se donne)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 마르크스는 주장(prétention) 질서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메타구조는, 매우 정확히, 메타구조에 속하는 현실(réalité) 지위 - 지위가 도대체 무엇인지는 여전히 결정해야 하는 것으로 남겨두면서- 함께 주장(prétention) 현대적 허구(fiction moderne) 지시한다. 분명 마르크스의 주석가들은 이러한 존재(être) 나타남(apparaître)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가 어떠한 의미에서는 실재하는 (réelle)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을 잊지 않고 강조했다. 하지만 정확히 어떠한 의미에서 그러한 것인가?[각주:17] 우리는, 이러한 나타남(apparaître) 선언(déclaration)으로서, 그러니까 주장’(prétention)으로서 출현한다는 사실에 대해 질문해보지 않는 한은, 이러한 질문에 대답할 없다.

 

우리는 마르크스가 자신의 담론(discours)[ 이론] [객관적으로] 적절하게 평가하리라 기대할 수는 없다. 모든 진정한 발명가들이 그러하듯, 마르크스는 자신이 만들고 있다고 믿는 것과는 분명히 다른 것을 만든다.[각주:18] 이는 마르크스가 확립 혹은 정식화하는 언표들(énoncés) 다른 선전제들(présuppositions) 함축하고 있으며 마르크스 자신이 목표했던 것과는 다른 결론들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자신이 지점에서 상품 취급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분명 여기에서 마르크스는 상품 요소(élément)라는 사회적 사물(chose sociale)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상품생산의 사회적 관계(rapport social de production marchande) 자체로 정의함으로써만 이를 행할 있다. 그리고 겉보기에는(apparemment) 역설적인 것으로 보이는 바로 상품생산의 사회적 관계라는 개념을 무엇보다도 먼저 고찰해보는 것이 우리에게 적절하다.

 

그런데 이러한 고찰에서의 난점은 바로 개념의 대상을 결정하는 것과 관계되어 있다. 자본 시작점이라는 지점에서 마르크스가 목표하는 것은 (pré)-자본주의적인 단순상품생산이 아니다. 게다가 점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에 따라 마르크스가 자본 1권의 번째 편에서 정확히 무엇에 관해 말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 또한 여전히 남아있게 된다. 마르크스에 관한 수많은 주석가들에게서 확인할 있듯, 철학자들은 마르크스의 철학적 사유(argument) 더욱 풍부하고 더욱 명확하게 드러나는 그룬트리세 속에서 자본 해석의 열쇠들을 찾고자 하는 유혹에 자생적으로(spontanément) 빠져든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자본 1 1편이 벌써 생산(production) 관련되는 것은 아니고 단지 유통’(circulation) 관련되는 것이라는 저속한(triviale) 관념으로 종종 인도되곤 한다. 그룬트리세 원고는 화폐’(argent), 일반적으로는 유통그러니까 상품교환들의 체계에 할애된 장과 자본’(capital) 할애된 장이라는 장들 분할된다. 그리고 생산이라는 질문은 번째 장의 범위 내에서, 그러니까 고유하게 자본주의적인 생산과정’(procès de production) 대한 분석이라는 맥락 내에서만 접근된다. 이와 반대로 자본 1권에서, 그리고 특히 자본 1권의 최종 판본들 -조제프 루아 불역판 자본 1권도 포함해서- 에서, 마르크스는 이론적 설명을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개시(engager)해야 한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마르크스는, 자본 1 1편에서, ‘상품생산 하나의 순수한 논리 정의함으로써 시작해야만 했다. 자본 1 3편에서, 생품생산의 하나의 순수한 논리가 자본의 논리 아니라는 -하지만 그럼에도 자본의 논리는 시장의 논리를 자신의 내재적 참조점(référence)으로 함축한다- 보여줄 있기 위해서 말이다.

 

이때부터 자본 시작점은 사회적 논리 -어떠한 하나의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우리는, 최종심급에서, 바로 사회적 논리를 참조하는 것인데- 설명하는 것을 자신의 대상으로 취하게 된다. 이러한 사회적 논리는 자본 가장 일반적인 선전제(présupposé)인데, 선전제에 따라서 생산자들은, 자신들 스스로의 생산[] 소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장의 논리에 따라 생산[] 교환하기 위해서 생산하면서, 자신들의 생산수단들에 대한 사적 소유 상호적으로(mutuellement) 스스로/서로 인지한다(se reconnaissent).[각주:19] 이러한 조건들 내에서, 생산자들은, 한편으로는 부문 내에서 그러니까 가능한 가장 적은 시간에 생산하도록 떠밀리면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문들 간에서 그러니까 자신들의 생산물이 (다양한 구체적 생산물들을 생산물들이 요구하는 노동지출의 추상적 기준에 종속시키는 하나의 동일한 시간적 제약contrainte 아래에서) 유효수요의 대상이 되게 보증하도록 인도되면서, 자신들 사이에서 경쟁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조건들 내에서, 상품들을 생산하는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시간(temps socialement nécessaire) 조응하는 하나의 (상품들의) ‘가치 지배적이게 되는 경향을 가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시장의 고유한 합리성이다. 바로 시장 고유의 합리성을 통해 시장의 하나의 순수한 논리가 정의된다. 여기에서 순수, 이론적 구축의 질서 내에서, 자본주의적 관계(rapport capitaliste) 이윤 논리에 대한 고찰의 전제(préalable) 의미한다. 이것이 유명한 노동가치론’(théorie travail de la valeur) -그토록 많은 논쟁들의 대상인- 대상을 제시해주는 그러한 개념적 맥락이다(ERC, pp. 51-62).

 

시초적 형상(figure initiale) 합리성(마르크스는 자본 1 1 1장을 이미 지배하고 있는 경쟁개념을 -전혀 명시하지는 않으면서- 도입함으로써 자본 3 10장에서 시초적 형상의 합리성을 사후적으로 다시 취한다)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많은 수의 철학자-주석가들은 가치와 시장의 모순들 대한 궤변들 속에서 소진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경제학자-주석가들은 마르크스가 정교구성한 형상의 일관성 강조하는 경향을 철학자-주석가들보다는 더욱 본성적으로 가지고 있다. 하지만 경제학자-주석가들은 형상을 고전파 경제학의 전통에 조금은 성급하게 재연결시키고 마는 경향을 종종 보여준다.[각주:20]구체적질서[ 현실적 차원] 내에서 상품들이 자신들의 가치에 따라 교환되지 않고 가치와는 다른 가격에 따라 교환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우리에게 제기되는 질문은 노동가치’(valeur travail) 불리는 바의 관점에서 무엇이 과연 분석의 적절성(pertinence) 있는지이다. 분석은 무엇에 쓰일 있으며, 분석의 정당한 대상은 무엇이며, 우리는 분석에 어떠한 종류의 현실주의(réalisme) 부여할 있는가? 그런데 이러한 질문은 경제() 고유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이다. [각주:21]

 

철학자들 마르크스가 바로 지점에서 경제적담론을 전복시킨다는 사실로 인해 놀라지 않을 없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의 이러한 상품생산 이론은 법권리(droit) 인정(reconnaissance) 언어 내에서 단번에 정식화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품적인 경제적 합리성의 파트너들(partenaires) 자신들의 수단들과 생산물들에 대한 소유자, 상호적으로(mutuellement), 스스로를/서로를 인지한다. 파트너들은 자유롭고 평등하며 합리적인 이들로 스스로를/서로를 인지한다. ‘자유!’, ‘평등!’이라고 마르크스는 쓴다.[각주:22] 물론 분노(rage) 함께 말이다. 왜냐하면 마르크스는 벤담의 비호하에 ‘[대문자] 소유!’로까지 이어지는 그러한 하나의 시퀀스 내에서 그러하다는 점을 논박(contester)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논박 가능한(contestable) 주장(prétention)으로부터 우리는 출발해야만 한다. 마르크스가 강조하듯, 자신의 위대한 전임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제의 시대를 살아갔기 때문에 이해할 없었던 그러한 주장(prétention)으로부터 말이다. 마르크스는 자유와 달리 평등은 하나의 인민적 편견’(préjugé populaire), 다시 말해 하나의 공통의 주장(prétention commune) 되지 않았다고 쓴다.

 

따라서, 계급관계들(rapports de classe) 문제에 도달하기 이전에, 마르크스는 (이미!) 자유주의의 주장(prétention) - 자유주의의 주장에 따르면, 현대성 내에서는 하나의 시장경제 지배적인 것이 된다- 맞서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떠한 의미에서는, 시작점은 본성적으로 자유주의자들에게 완전한 만족을 선사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이후에 말하는 것처럼, 마르크스는 시장은 하나의 경이로움(merveille)이라고 설명한다. 왜냐하면 최종적으로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자본 1 1 1 3 가치형태 독해해야만 하기 때문이다(ERC, pp. 63-74). 게다가 우리는, 하나의 판본에서 다른 판본으로 나아가면서, 마르크스를 헤겔화하는 주석가들을 기쁘게 만들어주었던, 그리고 마르크스가 상품관계(rapport marchand) 내에서 식별할 있다고 처음에는 [잘못] 믿었던, 사용가치와 가치 사이의 유명한 모순이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된다. 결국 모순은 시장 자체가 아니라 사용가치와 잉여-가치(가치가 아니라) 사이의 모순의 규정된(définie) 형태하에서의 자본 관계된 모순이라는 점이 나타나게 것이다. 시장과 관련하여 마르크스는, 이러한 분석 단계에서, 사용가치와 가치 사이의 문제적 긴장과 동시에 긴장의 해소 위한 작동방식(mode opératoire) 소묘한다. 하지만 시장의 법칙 하나의 허구라는 , 그렇다면 어떠한 의미에서 그러한 것인지, 가지는 시작점에서는 주어질 없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자본 1 1편이라는 천상의 경제-법률적 프롤로그 -마르크스는 프롤로그를 자신의 설명의 필수적 시작점으로 만들어낸다- 자유롭고 평등하며 합리적이라고 가정된(supposés) 파트너들 사이의 상품교환 관계들에 기초한 사회의 현대적인 (메타구조적) 허구와 다른 것이 전혀 아닌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놓아진] 선전제(présupposé) 설명하고자 하는 목적을 지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자본 1권의 1편에 이어지는 논의들이 사태가 전혀 그렇지 않다(rien) 점을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점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우리는, 마르크스를 통해서, 전혀 그렇지 않음(rien) 무언가’(quelque chose)라는 점을 단번에 인식하게 되기도 한다.

 

시작점에서 마르크스가 저지른 오류

 

그럼에도 나는 시작점이 하나의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오류란 바로 변증법적 불충분함인데, 변증법적 불충분함은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경제학과 사회학, 그리고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현대사에 대한 해석, 또한 최종적으로는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affectent) 결함들(déficits) 복합체 전체와 몸을 이루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심지어 자본 1 1 내에서도, 1 4절인 상품의 물신적 성격과 비밀에서 상품적 자유 이러한 현대적인 메타구조적 형상에 대한 비판을 개시한다. 우리는 이러한 표상이 어떻게 자유주의 이데올로기 내에서 전개되는지를 알고 있다. 시장에서 -사람들이 말하듯- 그렇게(ainsi) 자유롭고 평등한 인격들(personnes)이라는 조건에서 우리는 우리가 공통의 합의(commun accord) 통해 선택한 그리고 그것에 대해 우리가 공통의 통제권(contrôle) 가지는 그러한 권위 이외의 다른 권위는 인지(reconnaître)하지 않는 그러한 위치에 서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알렉시스 토크빌이 말한 바이다. 고유한 의미에서의 자유주의는 경제적 자유주의와 정치적 자유주의 사이의 합일에 대한 믿음이다. 물신숭배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은, 매우 정확히, 바로 자유주의 대한 비판이다. 만일 진정 시장이 이렇듯 경제의 자연적 [ 자연법]이라면, 우리는 상품이라는 재화들의 생산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스스로에게 명령하는 그러한 세계 내에 있는 것이다.[각주:23] 마르크스가 쓰듯 교환을 통해서만 서로 접촉하게 되는개인들(individus) 자신들을 초월하는(transcende) 자연적 체계의 행위자들(agents) 불과하다. 합리적으로 행위(agir)하기 위해서, 행위자들에게는 가격의 운동 고려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가격의 운동은 행위자들이 자신들의 생산적 활동들을 어디로 향하게 해야 하는지를 지시해준다. 상품들의 체계 - 상품들의 가치 상품생산 관계들에 의해 정의된다- 상품들이 추는 춤을 인도해 나간다. 따라서 모든 것은 마치 상품들 자신들 사이의 (affaire) 것처럼 진행된다. 우리는, 우리를 초월하고 우리를 제약하는 이러한 질서와 마주해 우리가 우리’(nous) 말할 있는 능력을, 우리가 협력(concerter) 있는 능력을, 함께 미래를 기획할(projeter) 능력을 집합적으로(collectivement) 박탈당했기(dépossédés) 때문에, 소외된다(ERC, pp. 75-84).[각주:24] 그렇지만 마르크스가 모든 지점들과 관련해 상품생산에 대한 실체적 비판을 전혀 제출하지 않는다는 점은 우리의 주목을 요한다. 마르크스의 설명의 이러한 메타구조적 단계 -여전히 계급구조도, 자본주의 구조적 논리도, 순수 이윤의 논리도 확립되지 않은 단계- 에서, 시장의 결함(tare) 사용가치와 가치 사이의 모순 관점에서가 아니라, 오직 사물들의 질서에 대한, 그러니까 (인간) 본성에 내재적인 자연적인[본성적인] 것으로 가정된(supposé) 질서에 대한 인격들의 소외라는 관점에서만 정의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자연적인[본성적인] 것으로 주어진 상품생산 관계들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점에서, 우리는 소외되어 있다.

 

그런데, 그럼에도 우리는 이러한 소외 담론의 종착점에서 매우 놀랍게도 마르크스가 소외된 자들인 우리에게 말을 걸고(s’adresser)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상황에서 탈출하도록 권유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제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협력된 계획(plan concerté) 따라 (…) 공통의 생산수단들을 가지고 노동하는, 자유로운 인간들의 연합(association) 상상해보자(représentons-nous), 등등.” 결국, 사회주의적 질서를 상상해보자(ERC, pp. 208-218 보라).

 

마르크스의 설명의 시작점 이렇게 위치지어진 이러한 상상’(représentation)[ 표상] 종착점(terme) 사전에 명시적으로 선고한다. 왜냐하면 자본 1권의 목표 전체는, 정확히 말해, 어떻게 자본주의 사회[스스로]가 민주주의적으로 협력되고(concerté) 계획화된(planifié) 그러한 사회적 질서의 조건들을 생산하는 경향을 역사적으로 지니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계급들 사이의 하나의 관계일 뿐만 아니라 또한, 각각의 계급들 내부에서의, 개인들 사이의 하나의 경쟁관계 -마르크스의 분석은 경쟁관계로부터 시작되었다- 이기도 하다. 자본가들 사이의 경쟁은, 역사적으로, 공장의 기계화와 거대 기업(entreprise)으로의 발전으로 인도된다. 이를 통해, 자본가들 사이의 경쟁은 자신의 반대물을 출현하게 만든다. 반대물은 바로 공장의 질서를 지배하고 있는, 그리고 기업들 사이의 상품적 조정(coordination marchande) 위에서 점진적으로 지배적인 것이 , 조직적이고 계획화된 하나의 조정양식(mode de coordination)이다. 자본가들 사이의 경쟁은, 산업적 수단들을 전유하도록 그리고 사회 전체의 수준에서 모두 사이에서(entre tous) 협력된 하나의 계획에 따라 조직된 생산을 작동시키도록 이미 경향지어져 있는(prédisposée), 생산과정 자체에 의해 조직된, 그러한 노동자 계급이 상관적으로(corrélativement) 돌발(surgir)하도록 만든다. 이것이 바로 자본 1권의 진정한 결론을 구성하는 32장의 주제이다.[각주:25]

 

역사의 흐름을 고려해본다면, 바로 지점에 진단에서의 어떠한 오류(erreur)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오류가 어떤 점에서 저질러진 것인지는 명확하다. 그리고 오류를 찾는 보다 철학자들에게 친숙하지 않은 일은 없다. 공통적으로[일반적으로] 철학자들은 테제들(thèses) 대면하는데, 그러나 테제들은 다소간 풍부하거나 정당화된 것들이라고 하더라도 정확히 말하자면 참인 것도 거짓인 것도 아니다. 그런데 지점에서 철학은 철학과 직접적으로(d’emblée) 대면하는 것이 아니라 특수한(particulier) 하나의 경험적 대상인 현대적 사회형태에 대한 이론과 대면한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은 진실 혹은 오류에 관한 질문을 피할 없다. 그러나 철학자들은, 그들이 마르크스를 표방하든 그렇지 않든, 자본 자본 자체만으로 아무런 문제 없이 괜찮으며 그렇기에 단지 자본 읽고 해석하는 것만이 중요하다는 점에 거의 대부분 합의했다. 어떤 다른 근심거리를 가지고서 철학자들을 귀찮게 하지 말기를. 철학자들이 철학자의 자격으로서 관계맺고 있는 것은 자본 안에 존재하고 있는 마르크스의 철학이다. 철학자들에 따르면, 자본주의적 혹은 현대적 세계에 관한 마르크스의 이론 자체만으로 아무런 문제 없이 괜찮다. 혹은 오히려, 마르크스의 이론은 마르크스의 이론 자체일 뿐이지 다른 무엇도 아니다. 그리고 주석의 대상이라는 자격으로 마르크스의 이론이 자체로서 (철학적인) ‘과학[학문] 공동체’ - 과학 공동체의 주석적 기능이 정당한 학문 활동의 경계를 결정한다-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철학자들의 독해들이 비판적일 없다는 것도, -해석들로서의 이러한 철학자들의 해석들이 풍부한 이론적 혁신들을 만들어낼 없다는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결국 철학자들은 만일 마르크스의 이론에서 무언가를 수정해 개선해야 한다면 이는 경제학자들 혹은 역사학자들의 일이라고 생각해버리는 경향을 지니게 된다.

 

나의 입장에서, 나는 자본 경제학자들에게 맡겨두기에는 너무도 진지한[심각하고 중요한] 대상이라고 말하고 싶다. 철학적 비판은 자본 자신의 것으로 취해야만 한다. 철학적 비판만이 자본 현대적 사회형태를 자신의 대상으로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 자본 하나의 경제() 비판이라는, 다시 말해 규정된(défini) 하나의 사회적(sociétal) 맥락 내에 명시적으로 착근되어(embedded) 있는 그러한 경제에 관한 하나의 이론이라는 점에서- 필요로 하는 급진적 변형으로 나아갈 있다. 하지만 이는 철학자들이 자신들의 도그마적 에서 탈출하기를, 그리고 철학자들이 마르크스의 뒤를 이어 다음과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제기하는 위험을 감수하기를 진정으로 원한다는 것을 가정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특수한(particulière) 형태로서의 현대성이란 무엇인가?

 

그런데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우리를 이렇게 호명함으로써 - 자유로운 인간들의 연합을 상상해보자…”- 마르크스가 하나의 허구(fiction) 다른 하나의 허구로, 그러니까 하나의 표상(représentation) 다른 하나의 표상으로 대체하는 이외의 다른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게 된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이것이 허구라는 개념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단지 나는 마르크스가 현대적 허구를 자유주의의 허구와 사회주의의 허구로 분할(divise) 때에 현대적 허구를 적절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마르크스가 중간매개적인 것일 3 찾아야 하기 때문이 아니다. 이는 그렇게 일면적으로 놓아진(posées) 이러한 허구들이 개념적으로 지지 불가능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식화된 허구들은 수행적 모순들(contradictions performatives)이다. 실제로 수행적 모순들은 상호적이고 내재적인 관계 내에서만 수용 가능한 것이다. 수행적 모순들은 적대(antagonisme) 내에서 전체를 함께 사고해야만 하는 것이다.

 

시장의 모순은 자연적[]으로 놓아진(posée) 것으로서의 상품생산 논리가 안에서 인간들이 스스로를/서로를 자유롭고 평등하며 합리적인 자들로 인지하는 그러한 논리로서와 동시에 인간들에게 [강제적으로] 부과되는(s’imposant) 자연적-초월적 [] -이는 시장의 []’인데, 그에 따르면 우리의 경제적 상호관계들(interrelations) 경제적 상호관계들이 상품의 형태를 취하는 한에서만 정당하고(légitimes) 합리적인(rationnelles) 것이 된다- 으로서도 스스로 정립한다(se donne) 점에 놓여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수행적 모순으로 지시하는 바이다. ‘복종(servitude) 자유로운 계약’ -루소는 복종의 자유로운 계약이 계약 자체로서 언표됨으로써 계약으로서는 무효화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현대성의 하나의 사실로, 일반적인 하나의 사실로 드러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물신숭배라는 주제 속에서 정식화되는 것이다. 그러한 시장의 []’ 언표함으로써, 우리는 시장의 [] 우리에게 자연적으로 부과되는 것으로 우리 머리 위에(au-dessus) 놓는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사회계약에 대한 놀라운 리메이크(remake) 자본 1 1 2장이 오래된 홉스적 도식을 다시 취해 이를 <요한 묵시록> 언어 속에서 황금송아지 숭배라는 용어로 전도시키는 것이다. ‘태초에 행동이 있었다’(Au commencement était l’action), 하지만 행동은 시장의 질서에, 상품가치에 스스로 복종(se soumettre)하겠다는 공통의 결정(décision commune) 이외의 다른 것이 전혀 아니다. 그리고 화폐(argent)(그러니까 화폐monnaie로서의 ) 기호와 보증그러니까 자발적 복종(servitude volontaire) 기호와 보증이다.   

 

그러므로 소외는 초월적인 하나의 물신적 대상 내에 우리의 사회적인 합리적 주체성을 투사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더욱 급진적으로 하나의 박탈’(dépossession) 이해되어야만 한다. 무엇에 대한 박탈인가? 바로 모두 사이에서 자유롭게 협력된 방식으로 행위하고 생산하는 우리의 능력에 대한 박탈. 결국 이것이 바로 자본 1 1 1 4 상품의 물신적 성격과 비밀 가르침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물신숭배를 이렇게 시장의 관점에서 일면적으로 개념화할 없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내가 마르크스에게서 반대하는 점이다. 왜냐하면 조직된 협력’(concertation organisée) (versus) ‘상품적 자유라는 형상 -마르크스의 아래에서 하나의 양자택일로 표상되는- 이와 유사한 변증법적 비판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형상은 조직 시장 동일한 인식론적 지위를, 그러니까 사회적 차원에서의 합리적 조정 양식(mode de coordination) 지위를 제시하는 곳으로서의 현대성이라는 이론적 맥락 내에서 하나의 수행적 모순을 만들어낸다. 인간들은, 인간들이 그에 따라 스스로를/서로를 통치하는 그러한 규칙들과 원칙들을 함께 확립할 있는 능력을 지닌 것으로 스스로를/서로를 인지하는 한에서만 스스로를/서로를 자유롭고 평등한 이들로 유효하게(effectivement) 인지하게 된다. 각자(chacun) 자유를 상품적 자유-교환의 가정된(supposées) 규범들 안으로 제한하는 하나의 초월적 법에 복종하는 이들로서가 아니라 말이다. 이는 분명한 것이다. 하지만, 이와 상관적으로, 이러한 규칙들(règles) 규칙들이 (모두 사이 관계들을, 또한 각자에서 각자로의 관계들을 각자의 자유와 합리성과 대화상대자interlocuteur로서의 존엄dignité이라는 관점에서 해결하는réglant 것으로서) 각자에게 수용 가능한(recevables) 것인 한에서만 수용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없다면 모두-사이는 각자를 박탈하게 된다. 매우 정확히 바로 지점에 현대성의 원형의 사각형화(la quadrature du cercle), 현대성의 허구의 십자가(croix), 현대성의 주장(prétention) 공유(partage)하는 적대의 원리가 놓여있다.[각주:26]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을 시작점에서부터 다시 취해야만 한다. 만일 앞서 말한대로 사태가 실제로 그러하다면, 현대성의 메타구조는 마르크스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복잡한 것이다. 현대성의 메타구조는 각자에서 각자로의 관계를 형상화하는 극과 모두 사이의 관계를 표시하는 극이라는 개의 극들 포함한다. 그리고 극들은 경제적 합리성(rationalité)이라는 면과 법률-정치적 정당성(légitimité)이라는 면이라는 분리 불가능한 면들 제시한다. 이것이 바로 자유-평등-합리성의 현대적 주장(prétention) 내포하는 메타구조적 정사각형이다. 바로 이러한 허구로부터, 그러니까 이러한 주장(prétention)으로부터, 우리는 현대성의 담론을 시작해야[나아가게 해야] 한다.[각주:27]

 

글에서 우리가 이러한 시초적 개념성(conceptualité initiale) 복잡성 전체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발전시킬 수는 없다. 나는 바로 지점에 마르크스의 정초적 테제 - 테제에 따르면 현대적 사회형태의 고유성은 현대적 사회형태가 인간들 사이의 불평등에 대한 참조가 아니라 인간들의 자유, 평등, 합리성에 대한 주장(prétention) 위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점에 놓여있으며, 현대적 계급구조들의 특수성(particularité) 하나의 전도(retournement), 그러니까 이성의 도구화(instrumentalisation de la raison) 정확히 이해된다- 기대하는 만큼의 적합한 수준을 지니는 유일한 시작점이 놓여있다는 점을 주장하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 만일 사태가 정말로 그러하다면, 우선적으로(d’abord) ‘이성이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우리에게 적절하다. 그리고 바로 지점에 이러한 현대성의 원형의 사각형화 내에서 스스로 정립되는(se donne) 바가 놓여있다.

 

결국, 바로 지점에서 나는 마르크스가 제시하는 시작점 시작점이 내포하는 오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떠한 방식으로 다시 시작하는 것이 그러니까 이론을 재구축하는 작업에 착수하는 것이 적절한지를 보여주고자 했다. 이제 나는, 앞서의 이러한 분석을 계속 염두에 두면서, 마르크스의 설명의 실을 다시 잡아 따라가볼 것이다. , 시장에서 자본으로의 이행(passage) 그러니까 변형(transformation) 관한 마르크스의 이론의 실을 말이다.  

 

화폐(혹은 시장) 자본으로의 변형[각주:28]

 

겉보기에는(apparemment) 모든 것이 손쉽다. 자본 1 2편은 명료하다. 현대사회에서 상품들 가운데 하나는 바로 노동력이다. 노동자는 임금을 위해(contre) 자신의 노동력을 판다. 노동자는 자신을 고용하는 자본가에게 자신의 노동력의 사용가치를 규정된(déterminé) 시간 동안 양도(aliène)하며,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en contrepartie) 자신의 노동력에 대한 교환가치를 획득한다. 이렇게 노동자는 [언제든 지금의 고용주를 떠나] 다른 고용주에게 있는 상품으로서의 자신의 상품[ 노동력] -항상 미래의 정해진 기한까지(à terme)[ 필멸의 신체로 인해 유한하게]- 소유하고 활용할 있는(dispose), 자유롭고 평등하며 합리적인 상품적 파트너(partenaire marchand) 남게 된다. 노동자는 자신의 임금으로 생존하는데, 이것이 자신의 사적인 삶의 자율성을 보장해주는 것이다. 노동자는 주인을 바꿀’(changer de maître) 있는데, 이것이 노동자의 자본가에 대한 의존성을 제한한다. 바로 지점에서 헤겔이 어떠한 유보도 없이 원용된다. 간단히 말해, 임노동제에 토대를 두고 있는 사회인 자본주의 사회는 하나의 상품사회로, 하나의 시장경제 스스로를 정립할(se donne)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이미 알다시피, 이보다 더욱 세심한 분석은 자본주의 사회가 또한 이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기도 하다는 점이 드러나도록 만든다. 등가교환이라는 관점 내에는 분명 착취가 자리하고 있다. 상품으로서의 노동력의 가치 노동력의 생산의 조건들 내에 포함된 노동시간에 의해, 다시 말해 임금이 획득 가능하게 해주는 재화들의 생산에 필요한(nécessaire) 시간에 의해 정의[결정]된다. 그런데 하루마다 임금노동자가 자신이 평균적으로 매일마다 소비하는 재화들의 생산에 요구되는(requis) 시간보다 시간동안 노동할 있다는 점은 명확하다. 명백히 바로 때문에 우리는 노동력을 고용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서 말이다. 여기에서 다시 , 누구도 이러한 형상 - 형상은 노동-가치라 불리는 것에 대한 이론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인데- 형식적 일관성(cohérence) 논박하지 않아왔다.[각주:29] 우리에게 주어지는 유일한 질문은 형상의 적절성(pertinence), 형상을 가지고서 우리가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질문뿐이다.

 

그런데 형상의 적절성이라는 문제는 바로 시장에서 자본으로의 이행’(passage)이라는 마르크스의 질문을 가리키고 있다. 마르크스의 이론은 분명히도 마르크스의 설명 한가운데에서 실현되는 바로 이러한 이행 내에서 현대적인 사회적 관계의 차원들 사이의 존재론적 관계(relation ontologique) 정의한다. 여전히 다듬어지지 않은 다음과 같은 질문제기 정도로 만족하자면, 우리는 [마르크스가 실현하는 이러한 이행에 대립해] 시장을 자본으로부터 분리(dissocier) 있다고, 다시 말해 잠재적으로는 시장을 보존하면서도 동시에 자본주의를 지양(dépasser) 있다고 개념화할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시장과 자본이라는 형상들은 자본주의를 폐지하는 것이 시장 또한 폐지하는 것을 전제(suppose)하는 것일 정도로까지 서로가 서로에 대해 내재적(immanentes) 것일까? 이는 잠정적인 정식화일 뿐이지만, 동시에 이는 현대성의 근본 문제들 메타구조와 구조 사이의 관계라는 문제들의 위에 우리가 있게 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자본 1 2편의 대상인 시장에서 자본으로의 변증법적 이행 정교구성하려는 목적에서 마르크스가 이끌어간 기나긴 탐구를 둘러싼 실제 쟁점이다.

 

하지만 사실 지점에서 마르크스의 시도는 실패로 결론난다. 마르크스는 자본 1 2편에서 순전히 분석적인 이행만을, 그러니까 매개적인 방식을 통해(par la bande) 일종의 간접적인 연역적 과정(procédure) 제시할 뿐이다. 마르크스는 자신이 생산하고자 노력했던, 그리고 시장의 한가운데에서 하나의 모순 - 모순의 전개(développement) 자본으로의 변증법적 이행 개시(engagerait)해주는 그러한 모순- 드러나게 만드는 것을 자신의 핵심으로 취했을 그러한 변증법적 설명에 도달하지 못한다.[각주:30] 앞서 우리는 이것이 가능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물론 분명히 상품생산의 보편적 논리로 이해된 시장의 모순 존재한다. 시장의 모순은 (우리가 스스로 복종하는se soumet 어떠한 하나의 [] 자유로운 위치position libre로서의[각주:31]) 물신숭배가 지시하는, 하나의 메타구조적 전개 그러니까 메타구조의 극들(pôles) 면들(faces) 따라 메타구조에 대한 완전한 전개를 요청하는 그러한 모순이다. 결국, 시장 형태의 내재적 모순으로부터 출발하는 시장 형태의 변증법적전개는 자본 개념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메타구조개념으로 나아가는 것인데, 메타구조는 자본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용가치 가치 사이의 모순으로 이해된 모순인 시장의 모순을 전개함으로써 마르크스의 설명이 자본을 향해 전진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마르크스는 - 지점은 마르크스의 순수 주석가들이 거의 지각하지 못하는 것인데-, 우리가 이미 확인했듯 시장의 내적 모순 - 시장의 내적 모순은 시장이 초월적 []으로, 그러니까 물신으로 자신을 스스로 부과할(s’impose) 때에만 나타난다(apparaît)- 적절히 표현하기에는 부적합한 그러한 정식화를 결국 포기하게 된다. 물론 분명 우리는 가치의 질서 그러니까 시장의 질서가 사용가치들[만으] 구성된 인간세계를 구축하는 것을 가능케 하지 않는다는 점을 의미하기 위해 시장의 내적 모순을 계속 유지하고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에 따르는 위험은 이러한 [마르크스가 포기하게 되는] 정식화와 (조금 뒤에서 우리가 다루게 ) 다른 정식화 사용가치와 잉여-가치 혹은 잉여가치 사이의 모순을 언표하는 그러한 정식화 사이의 거대한 혼동이다. 일반적으로 마르크스 주석가들이 제시한 독해들은 이러한 함정에 빠지고 만다. 그들이 이러한 함정에 빠지는 이유를 찾는 것은 글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다.[각주:32] 하지만 우리가 시장의 모순들로부터 출발해 자본으로 변증법적으로 접근해 나가지 않는다는 점은 이미 명확히 짚어져 있어야 한다.

 

마르크스의 설명 내에서 시장(혹은 화폐)으로부터 자본으로의 이행은 분명 모순에 대한 고찰에 의거하고 있다. 하지만 모순은 시장 형태(forme marché) 모순 자본 형태(forme capital) 모순(혹은 자본주의의 모순도) 아니다. 자본 최종 판본들에서 우리가 확인할 있듯, 모순은 완전히 다른 , 그러니까 자본 정식(formule du capital) 모순이다. 다시 말해 모순은 이데올로기적 정식 상식[공통의 의미](sens commun) - 이데올로기적 정식 혹은 상식에 따르면, 자본은 화폐를 생산하는 화폐이다- 내재적인 모순이다.[각주:33] 왜냐하면 바로 이것이, 우리가 이미 알다시피, A-M-A이라는 시퀀스의 의미[방향]이기 때문이다.[각주:34] A-M-A 시퀀스는 시퀀스가 가치에서의 일련의 등가교환들 가치의 증가 발생시킨다는 것을 언표한다는 점에서 모순적이다. 자본 1 2편에서 제시된 분석은, 또한 우리가 이미 알다시피, 이러한 모순을 매우 손쉽게 제거해버린다. 하지만 분석은 우리를 정확히 자본 1 1편에서 설명된 이론으로 되돌려 보내면서(renvoyant) 이를 행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확인했듯, 유일하게 노동력만이 가치를 생산하는, 게다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보다 많은 가치를 생산하는 이러한 상품 x 있다. 그리고 바로 지점에 자본 1 3편의 대상인 임노동제적 관계가 놓여있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적 착취이론의 토대이다.

 

우리는 이것이 일관된(cohérent) ‘경제주의 요구들에 조응하는 순전히 분석적인 설명이라는 점에 동의할 있을 것이다. 설명에서 시장과 자본 사이에서는 어떠한 변증법적 관계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러한 변증법적 관계는 다른 곳에서 제시될 것이다. 예를 들어, 프랑스에서 자본 미간행된 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텍스트에서[각주:35] 마르크스가 상품들 -마르크스는 상품들로부터 자신의 설명을 시작한다- 결국 자본의 생산물들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할 말이다. 아주 오래 전부터 존재해왔던 것인 상품생산은 자본주의의 역사적 선전제(présupposé) 불과한 것이 아니다. 현대적 사회형태 내에서 -최소한 마르크스적 분석에 따라서 보자면 현대적 사회형태는 시장을 자신의 절대적 참조점(référence)으로 만든다-, 상품생산은 설명이 그로부터 시작해야만 하는 그러한 논리적선전제 또한 구성한다. 하지만 사실(de fait) 상품생산은 하나의 놓아진 선전제(présupposé posé)이다. 이는 자본주의의 전개(développement)만이 시장을 보편적 참조점으로 놓을(pose)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시장을 발생시키는 것은 시장이 아니다. 바로 자본주의가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시장을 놓는(pose) 것이다.[각주:36] 그러나, 앞서 내가 상기시켰던 마르크스의 증명에 따르자면, 마르크스는 상품적 평등을 평등을 반대물로 전도시킴으로써만 (pose)는다. , 계급관계로, 비자유와 비평등[불평등] 비합리성의 관계로 전도시킴으로써만 말이다. 따라서 자신이 서있는 동일한 위치(position) 내에서 자신의 반대물로 전도된 놓아진 선전제라는 개념은 시장과 자본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에 대한 진정한 개념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발명한 이러한 변증법적 형세(configuration dialectique), 나의 관점에서는, 우리가 시장 개념을 확장(élargisse)한다는 조건에서만, 그러니까 시장을 메타구조의 복잡성 내에 통합한다는 조건에서만 변증법적 형세 자신의 [존재]근거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구조에 의해 놓아진(posé) 그리고 이러한 놓아짐(position)[ 위치] 자체에 의해 전도된 선전제[ 놓아진 선전제’] 바로 극들( 면들) 따라 우리가 앞서 정의했던 바로서의 메타구조이다. 자본은 자신의 상품적 선전제를 놓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조직적 선전제를 놓는다. 자본은 절대로 조직 없이는 시장을 앞으로 나아가도록 만들지 못한다. 자본은 시장과 조직 간의 상보성(complémentarité) 적대성(antagonisme)으로부터 형성되는 사이의 다수의 상호관계들(multiples interrelations) 속에서 시장과 조직을 (pose)는다. 바로 지점에서 굉장히 많은 수의 메타구조적 질문들이 돌발하는데, 질문들 몇몇, 그러니까 자본 1 1 3장의 주요 대상인 화폐 혹은 메타구조적 국가라는 질문과 같은 것들은 마르크스가 명시적으로 취급했던 것이기도 하다(ERC, pp. 94-97). 그러나 글에서 우리가 질문들 전체를 다룰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글에서 [시장과 조직이라는] 메타구조적 양극성은 취급하지 않는데, 그러나 사실 바로 메타구조적 양극성으로부터 출발해 자본 대한 필수적인 재구축의 윤곽이 소묘되는 것이다. 글에서 나는 마르크스가 제시했던 분석에 머무르는 것으로 만족한다. 자본 1 3 7(독일어판으로는 5) 설명은 착취라는 측면만큼이나 동일하게 중요한 하나의 다른 측면을 포함하고 있다. 자본가의 목표는 시장의 논리가 최소한의 시간 내에 사용(usage)가치를 생산하는 것에 정향되어 있다는 의미에서의, 시장의 가정된(supposée) 합리성 -[자본 ] 경쟁관계와 연관되어 있는- (richesses) 생산할 있는 이러한 능력에 놓여있다는 의미에서의 상품적 목표가 아니다. 자신의 설명 전체의 중심축인 7장에서 마르크스가 설명하기를, 자본가의 목표는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연 그리고 문화에 어떤 결과들을 초래하든지 간에, 교환(échange)가치를, 이윤(profit) 축적하는 것이다. 자본가의 목표가 지니는 논리는 구체적 부의 논리가 아니라, 무한하게도, 추상적 부의 논리이다. 그러니까 착취할 있는 순수한 권력을 항상 많이 축적할 있는 수단으로서의 이윤의 논리이다. 바로 이것이 시장의 경쟁논리가 자본의 구체적맥락 내에서 추동하는 것이며, 이렇게 해서 시장은 추상(abstraction) 파괴(destruction) 논리로 전도된다.[각주:37]

 

아마도 바로 지점에 마르크스의 분석의 가장 결정적이고 가장 명백하게 현재적인 측면이 놓여있는 으로 보인다. [마르크스의 철학자-주석가들이 주목하는] 측면은 처음에는 소비사회 대한 문화적 비판을 통해, 이후에는 자본주의에 대한 생태학적 비판 -2008 시작된 금융위기를 통해 개시된 경제() 비판에 의해 오늘날 다시 재활용되고 있는- 통해 지난 십년을 지나 유명해지게 것이다. 하지만 개념은 7(혹은 5)에서 마르크스 자신이 개념의 원리 내에서[ 개념이 취하는 원리 자체 내에서] 제시한 것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목적성은 인류가 자연과 맺는 생태학적 신진대사 관계 내에서 이해된 그러한 인류의 필요에 응답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궁극 목적은 상품생산 자체의 가치인 사용가치가 아니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궁극 목적은 인간과 자연을 파괴하는 이윤의 악무한이다.

 

그러나 강력한 힘을 지닌 7장은 어떠한 의미에서 보자면 실망스럽다. 왜냐하면 바로 이러한 추상의 논리(logique de l’abstraction) 현대적 계급관계 내에서 사회적 투쟁에 의해 논박된다(contestée) , 그리고 이것이 현대적 주장(prétention) 향한 자유 -선전제présupposition 내재적인- 용어[관점]에서 피착취자의 메타구조적 호명으로부터 자양분을 공급받는 구조적 논박(contestation)이라는 점을 7장이 직접적으로 드러나게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렇게 구조는 메타구조로 되돌려 보내어지기(renvoie) 때문이다. 구조는 메타구조를 메타구조의 적대적이고 모순적인 복잡성 전체 내에서 (pose)는다. 그리고 마르크스가 적절히 정교구성할 몰랐던 것이 바로 이러한 [구조와 메타구조 사이의] 변증법이다. 이러한 추상의 논리의 상관항[대립항] 계급투쟁이 자기 자신에 대해 의식적인 한에서 계급투쟁이 구체적인 사용가치 그러니까 좋은 삶을 위한 하나의 투쟁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모두 사이에서 사회적으로 협력된 (목적들fins 수단들moyens) 배치(agencement) 토대를 두고 있는 좋은 삶에 관한 이러한 관점은 마르크스의 설명에서는 훨씬 나중에서야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확인했듯, 거대 기업의 발전을 향한 자본주의의 역사적인 구조적 경향 함께, 하나의 새로운 사회적 조정 양식이 출현한다. 조정 양식은 독립적인 사적 생산들 사이의 사후적인(a posteriori) 재균형화들(rééquilibrages) 내에서 끊임없이 다리를 절뚝거리는 시장 맹목적 질서가 이상 아니다. 조정 양식은 바로 목적들과 수단들을 사전적으로(a priori) 조절(arrange)하는 조직이다. 조직은 처음에는 기업의 독재적 체제하에서 도래한다. 하지만 정확히 바로 이로부터 출발해서, 그러니까 마르크스의 관점에서는 협력된 조직을 위해 시장을 점진적으로 주변화시키는 경향을 지니는 이러한 역사적 경향으로부터 출발해서, 추상의 논리를 무찌르는 것을, 그리고 모두 사이에서 구체적으로 협력되고 계획된 사용가치의 하나의 질서를 구상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그러한 혁명적 변화가 생산된다. 그리고 [그러니까 4 상품의 물신적 성격과 비밀 포함된 1] 부름, 그러니까 자유로운 인간들의 연합을 상상해보자 부름이 예고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종착점이다.

 

이제 우리는 종착점[목적](fin)에서의 오류를 설명해주는 시작점에서의 오류 무엇인지 확인하게 된다. 현대성의 담론의 출발점은 마르크스가 (자유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원했듯 시장의 위치(position) 아니라 내가 메타구조라 지시한 양극적인 더욱 넓은 위치이다. 왜냐하면 역사적인 구체적 경향 안이 아니라 자유-평등-합리성에 대한 메타구조적 주장(prétention) 안에 있는 추상적 출발점에서부터 모두 사이의 협력된 하나의 질서라는 이러한 표상, 이러한 허구가 스스로 정립되기(se donne)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현대 정치철학이 증거하는 , 그리고 언어의 행위들과 현대사 자체 행위자들 고유의 행동들이 천가지 방식으로 증거하는 바이다. 또한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시장의 소외된 자들 마르크스의 호명에 따라, 그러니까 안에서 소외된 자들이 상품관계들 내에서와 마찬가지로 스스로를/서로를 가정적으로는(censément) 자유롭고 평등한 것으로 인지하는 그러한 상상해보자…(Représentons nous)”라는 호명에 따라 이러한 협력된 질서를 상상(se représenter) 있는 것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정당한 시작점은 바로 상품적인 간개인적인 (interindividuel) 협력되고 계획된 모두-함께(tous-ensemble) 형성하는 양극성 내에서 이해되어야만 하는 현대성에 고유한 것인 이러한 메타구조적 상호-호명(inter-interpellation) 내에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우리가 받아들일 없게 되는 것은, 섬세한 미끄러짐을 통해 논리적 설명을 하나의 목적론적 이야기로 그러니까 유명한 거대 서사 변형함으로써(ERC, pp. 157-208), 우리를 시장에서 (민주주의적으로 계획화된) 조직으로 인도하는 마르크스의 글쓰기 전략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오류는 시작점 내에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만일 우리가 이러한 선전제된 메타구조적 호명이 계급적 구조 내에서, 그러니까 계급들의 투쟁 내에서가 아니라면 절대로 놓아지지(posée) 않는다는 점을 상상하지(se représentait) 못한다면, 우리는 마르크스에서 하버마스로 [이론적으로] 퇴보하고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선전제된 메타구조적 호명이 심원하게 양의적(amphibologique) 것이다.[각주:38]우리는 자유롭고 평등하며 합리적이다.” 위에 있는 이들[ 지배계급], 우리가 이상 자유롭고 평등하며 합리적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실제적으로(effectivement) 자유롭고 평등하며 합리적이라고 말한다. 아래에 있는 이들[ 피지배계급], 우리가 실제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하고 합리적이며, 위에 있는 당신들에게는 불행하게도 우리가 자유롭고 평등하며 합리적이라는 점을 [앞으로] 보여줄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우리는 자유롭고 평등하다라는 하나의 동일한 언표작용(énonciation) 내의 가지 대립되는 언표들(énoncés)이다. 이것이 바로 현대성의 메타/구조적 쟁론(différend) 중핵이다.[각주:39]

 

계급구조, 그리고 그로부터 도출되는 모든

 

바로 이렇게 설명을 시작함으로써만이, 그러니까 메타구조를 시장과 조직이라는 양극성 내에서 펼침(déployant)으로써만이, 우리는 시장을 통제(contrôle)하는 소유(propriété)라는 극과 조직을 통제하는 역량(compétence)이라는 극이라는 개의 극들을 포함하는 현대적 계급구조를 이해할 있다. 마르크스의 이론 전체는 이러한 확장된(élargi) 시작점 위에서 재정초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협력된(concertée) 것으로 가정되는(supposée) ‘조직 용어들[관점들] 내에서 선고되는 것은 바로 다른 계급요인(facteur de classe), 시장의 유사물(analogue)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계급관계들로부터의 해방은 계급요인들로서의 시장과 조직이라는 가지 괴물들 - 시장과 조직은 가지 계급요인들임과 동시에 우리 공통의 사회적 이성(notre raison sociale commune) 동일한 형태들이기도 하다- 대한 통달(maîtrise) 통해서만 이루어질 있다. 자유로운 인간들의 연합(association) 시장 형태가 구성하는 자신의 공통 지성(intelligence commune) 이러한 (part) 박탈(déposséder)당하는 것을 내버려둘 없다. 그러나 시장과 조직은 사회적으로 평등하지[동일한 차원 위에 있지] 않다. 우리의 목표는 시장을 철폐하는 것일 없으며, 대신 조직을 통해 시장을 통달(maîtriser)하는 , 그리고 평등하게 공유된 담론(discours également partagé) 통해 [시장의 통달 이후에는] 조직을 통달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달리 말해, 계급요인들로서의 시장과 조직은 철폐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이는 계급투쟁의 효과[로서 생산되는 ] 수밖에 없다.

 

아마도 계급 분석에 대한 이러한 매우 간략한 입문은 우리가 앞서 설명한 메타구조적 분석 위에 스스로를 정초하지 않는다면 사회적 해방과 정치적 투쟁이라는 질문들을 적절히 탐구할 없는지를 이해하도록 해주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아래(en bas) 존재하는 근본 계급’(classe fondamentale) 행위자들이 금융’(finance)이라는 극과 엘리트(élite)라는 극이라는 극들로 분할되는 그러한 적대적 지배계급과 대립한다(ERC, pp. 234-245). 하지만 글에서 나는 메타구조만을 취급했지 구조도, 변증법적 관계 내에서 정의되는 [구조 ] 실천들도, 게다가 정치적 투쟁의 조건들도 전혀 취급하지 않았다[각주:40]

 

우리가 지점에서 고찰하고 있는 시작점 내에 하나의 핵심적인 문제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만을 지적하는 것으로 만족하도록 하자. 핵심적인 문제를 자본 1 1편의 존재론적-유령론적 지위의 문제라고 지시하도록 하자.[각주:41] 1편은 지배적인 논리들 시장과 조직 사이의 적대(antagonisme) 의해 표시되는, 그리고, 사전적으로(par avance), 계급들 간의 모순(contradiction) 의해 표시되는 그러한 하나의 참조적(référentiel) ‘토대 정의한다. 나는 사전적으로라고 말하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메타구조 계급구조 전개(développement) 내에서만이 놓아지기(posée) 때문이다. , 이러한 구조에 고유한 역사적 경향들 - 경향들이 실천들 (cadre)로서 존재하는 한에서- 내에서만이 말이다. 항상 언어적인(langagières) 것으로서의 이러한 사회적 실천들만이, 그러니까 항상 언어적 행위들(actes de langage)이기도 것으로서의 이러한 사회적 투쟁의 행위들만이, 실체적 내용 -투표, 낙태, 건강, 교육, 안정된 일자리(CDI) 등등에 대한 권리와 같은, 자유롭고 평등하며 합리적인 것을 구체적으로 정의하는- 투쟁들, 유토피아들, 봉기들 그리고 혁명들의 시간 내에서 이렇게 구축되는 그러한 메타구조 놓는것이다.

 

몇몇 혼동들을 피하기 위해, 나의 이러한 설명이 어떠한 현대성에 대한 일반이론’(théorie générale de la modernité)으로 직접적으로 나아가지는 않는다는 점을 덧붙이도록 하자. 왜냐하면 나의 이러한 설명은 국민-국가의 용어들[관점들] 내에서의 현대적 사회형태라는 하나의 형상 위에서 스스로 닫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국가(État-nation) 분명 서구의 정치적 형이상학 모체이다. 그렇지만 이는 그저 형이상학 뿐이다. 왜냐하면 현실적 총체성(totalité effective)으로서의 현대 세계는 하나의 국민-국가가 아니며 대신 [복수의 국민-국가들로 구성된] ‘세계-체계(système-monde)이기 때문이다. 세계-체계는 국민-국가와는 완전히 다른 본성을 지니고 있는, 무한히도 더욱 공포스러운 그러한 기계류(machinerie)이다. 이로부터 출발해, 하나의 다른 비판, 제국주의로서의 현대성( 시작점에서부터 출발해 포스트-식민적인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대한 비판을 형성하는 과업이 여전히 남아있다. 이러한 비판은 제국주의로서의 현대성에 대한 비판일 뿐만 아니라 국민적 공동체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지렁이가 과일 속에 있듯 전체(tout) 부분(partie) 내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 다른 장소에서의 하나의 분석을 요하는] 다른 챕터에 속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이론에 대한 이러한 메타/구조적 재구축은 이러한 재구축이 어제와 오늘의 경제적, 사회학적, 문화적 그리고 정치적인 현실성들을 밝혀주는데에 기여하는 한에서만 가치가 있는 것이다. 다른 곳들에서 나는 다양한 지형들 위에서 재구축이 취하는 다산성[창조성] 보여주고자 시도한 있다. 글에서 나는 철학 제도가 특권화하는 [마르크스의 이론에 대한] 박물관 지식적 접근에 반대해 재구축을 [이론적] 원리 내에서 정당화하고자 시도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  






  1. 옮긴이 주: 이 텍스트는 프랑스의 차세대 마르크스 연구자이자 마르크스 불어 번역가인 프랑크 피슈바흐(Franck Fischbach)가 감독한 논문모음집 『마르크스의 ‘자본’을 다시 읽자』(Marx. Relire Le Capital, PUF, 2009)에 실린 자크 비데의 논문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자본』을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해오기만 했다. 하지만 왜 이러한 해석에 그치지 않고 『자본』을 변형하기도 해야만 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변형할 것인가>(Les philosophes n’ont fait jusqu’à présent qu’interpréter diversement Le Capital. Pourquoi il faut aussi le transformer. Et comment)을 번역한 것이다. 참고로 이 논문모음집에는 비데 이외에 에마뉘엘 르노(Emmanuel Renault), 기욤 시베르탱-블랑(Guillaume Sibertin-Blanc), 프랑크 피슈바흐, 모이쉬 포스톤(Moishe Postone)(영어로 쓰여진 그의 논문을 불역해 실음), 스테판 르그랑(Stéphane Legrand)의 글들이 실려있다. 비데와 포스톤을 제외한다면, 나머지 필자들은 모두 프랑스의 새로운 마르크스주의 연구를 주도하는 젊은 연구자들(물론 지금은 ‘중견’ 학자들이 되었지만)이다. 비데의 이 텍스트는 한국어로 최초로 번역된 비데의 저서 『‘자본’의 경제학, 철학, 이데올로기』(원제는 『‘자본’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와 이 저서의 매우 발전되고 확장된 개정증보판인 『‘자본’의 설명과 재구성』(Explication et Reconstruction du Capital, PUF, 2004)의 핵심, 그러니까 비데의 『자본』 독해의 핵심을 잘 보여준다. 독자들은 옮긴이가 번역과 (재)출간을 기획하고 있는 이 두 저서에서 비데가 전개한 마르크스의 『자본』에 대한 메타구조론적 독해의 요체를 이 텍스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출판을 염두에 둔 번역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옮긴이가 최근 번역과 출간을 준비 중인 비데의 저서 『마르크스의 생명정치학』(자크 비데 지음, 배세진 옮김, 오월의봄, 2020)과 『마르크스와 함께 푸코를』(자크 비데 지음, 배세진 옮김, 생각의힘, 2021), 그리고 비데의 논문 <호명된 주체: 알튀세르와 버틀러를 넘어서>(자크 비데 지음, 배세진 옮김, 미출간)의 이해를 돕기 위한 번역이기 때문에, 『마르크스의 생명정치학』에서와 마찬가지로 다수의 원어를 병기해두었음을 밝힌다. [본문으로]
  2. 옮긴이 주: 이 구절의 원어는 다음과 같다. “Les philosophes n’ont fait, jusqu’à présent, qu’interpréter diversement le monde, il s’agit maintenant de le transformer.” 알다시피 이는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에 대한 열 한 가지 테제’의 열한 번째 테제에 대한 비데 식의 프랑스어 번역이다. 프랑스에서 열 한 가지 테제들에 대한 표준적인 번역으로 통하는 조르주 라비카(Georges Labica)의 『Karl Marx. Les Thèses sur Feuerbach』(Syllepse, 2014)에 따르면, 열 한 번째 테제의 프랑스어 번역은 “Les philosophes ont seulement interprété différemment le monde, ce qui importe, c’est de le changer”이다. 이 라비카의 번역을 따르는 에티엔 발리바르(Étienne Balibar)의 『마르크스의 철학』(에티엔 발리바르 지음, 배세진 옮김, 오월의봄, 2018)의 한국어 번역 131쪽에 따르면, “테제 11: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왔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여기에서 엥겔스는 ‘뿐이다.’와 ‘중요한’ 사이에 ‘그러나’를 추가한다. 『마르크스를 읽자』(에마뉘엘 르노, 마이클 뢰비, 제라르 뒤메닐 지음, 나름북스, 2020)에 실린 르노의 논문 <마르크스의 철학>에 수록된 포이어바흐에 대한 열 한 가지 테제들에서 르노의 열 한 번째 테제에 대한 프랑스어 번역은 다음과 같다. “Les philosophes n’ont qu’interprété différemment le monde, il importerait de le transformer.” <마르크스의 철학>의 번역자 황재민은 이를 다음과 같이 옮긴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3. 옮긴이 주: 여기에서 ‘주장’은 원어병기했듯 프랑스어 prétention을 옮긴 것으로, 이는 ‘남들이 뭐라 하든 자신이 그렇게 주장하는 바’의 의미의 ‘주장’, 더 강하게는 ‘참칭’이다. 그래서 이를 ‘거들먹거림’으로 의역할 수 있는 경우도 존재한다. 비데에게서 이 ‘주장’은 특수한 의미로 쓰이는 것이기에 모두 원어를 병기한다. 이 용어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는 <호명된 주체: 알튀세르와 버틀러를 넘어서>를 참조하라. 또한 ‘발화내적 행위’는 프랑스어 illocutoire를 옮긴 것으로, 발화 내적 기능(fonction illocutoire)의 가장 대표적인 예를 들어 이를 간단히 설명해보자. 식사 중에 누군가가 “거기 소금 좀 있어?”라고 말한다면, 이는 테이블 위에 소금이 있는지 없는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내 음식에 소금을 조금 더 쳐서 간을 맞추고 싶으니 소금을 달라는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문장은 그 발화의 표면적인 뜻과는 다른, 그 발화에 내재하는 특수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으로]
  4. 옮긴이 주: 권수와 편수는 옮긴이가 넣어준 것이다. 그리고 강신준판 『자본』 기준으로는 7장이 아니라 5장, 즉 ‘노동과정과 가치증식과정’이다. 프랑스에서는 독자적인 프랑스어판인 조제프 루아(Joseph Roy) 판과, 독일어 4판의 번역을 따른 장-피에르 르페브르(Jean-Pierre Lefebvre) 판이 함께 사용되기 때문에 사실 혼동의 여지가 많다. [본문으로]
  5. 옮긴이 주: 여기에서 ERC는 비데의 저서 『Explication et Reconstruction du Capital』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저서에서 깊이 있게 다루어진 이 전제들에 대한 설명을 여기에서는 압축적인 방식으로만 간단히 취급하겠다는 의미이다. [본문으로]
  6. 옮긴이 주: 여기에서 ‘현대적 사회형태’는 forme moderne de société를 옮긴 것인데, 이는 비데가 근대 자본주의 사회를 자신의 이론틀 내에서 더욱 엄밀하게 지칭하기 위해 사용하는 개념이므로 지적해두도록 한다. [본문으로]
  7. 옮긴이 주: 조금 불필요할 수 있지만 ‘생산력’과 ‘생산관계’는 원어대로 복수명사로 번역한다. 특히 ‘생산관계’가 단수가 아니라 복수라는 점은 루이 알튀세르가 『재생산에 대하여』에서 강조하는 바이다. 또한 기술적 관점에서 ‘생산력’ 또한 단수가 아니라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본문으로]
  8. 옮긴이 주: 비데는 『마르크스의 생명정치학』에서 지금까지의 내용을 L1, L2, L3(L은 niveau 혹은 level, 즉 ‘수준’이다)으로 정리한다. 『마르크스의 생명정치학』을 참조하라. [본문으로]
  9. 철학자들에 의해 제시된 표준적인 해석이 보여주는 혼란들 중 상당 부분이 자신들의 기원을 이러한 구분을 올바르게 수행하지 못하는 무능력, 다시 말해 현대 사회, 이 현대 사회의 모순들 그리고 이 현대사회의 잠재성들을 고유하게 구성하는 바를 올바르게 식별하지 못하는 무능력에서 발견한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본문으로]
  10. ‘신변증법’과 내가 이에 대해 제시한 비판을 보라. , 『Historical Materialism』, 2005, 13권의 2, Brill Publishers. [본문으로]
  11. 옮긴이 주: 비데가 명시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본』의 설명순서와 관련해 비데가 준거하는 것은 바로 알튀세르의 설명이다. <제라르 뒤메닐의 저서 “‘자본’의 경제법칙 개념”의 서문>, 루이 알튀세르 지음, 배세진 옮김, 웹진 인무브(www.en-movement.net)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12. 바로 그렇기 때문에 마르크스의 1849년 텍스트 『임금노동과 자본』이 ‘임금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13. 옮긴이 주: Mehrwert의 번역어로 발리바르는 ‘잉여가치’(survaleur)를, 비데는 ‘잉여-가치’(plus-value)를 채택하는데, 그 이론적 쟁점에 대해서는 <잉여가치>, 에티엔 발리바르 지음, 자크 비데 부록, 배세진 옮김, 『문화/과학』 2019년 여름호, 통권 98호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14. 여기에서 ‘추상적’은 경험적인 것이라는 의미에서의 ‘구체적’, 그러니까 관념들에 대립해 존재하고 있는 사물이라는 의미에서의 ‘구체적’과 대립되지 않는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이론적 구축물의 한가운데에서, 개념적 정교구성물들(élaborations)에 대립해 가장 일반적인 계기(이 개념적 정교구성물들은 더욱 규정된 현상들을 정의하는 이 가장 일반적인 계기에 뒤따라오는 것인데)를 정의(qualifie)한다. [본문으로]
  15. 이전의 작업들에서 나는 이 ‘메타구조’라는 용어를 제안한 바 있다. 하지만 사실 나는 단지 마르크스가 발명한 개념에 그 이름을 붙여주었을 뿐이다. 그렇지만 내가 붙여준 바로 이 이름이 마르크스의 개념을 증거해주는 것이다. 이 이름은 이 개념의 내용과 인식론적 지위를 결정해야 할 필요성을 나타낸다. [본문으로]
  16. 옮긴이 주: 여기에서 비데는 ‘간개인적 관계’에서 ‘관계’를 relation이 아닌 rapport로 표현하고 있는데, 단순한 오류일 수도 있고, 그것이 아니라 해도 큰 의미를 두지는 않아도 될거 같다. 왜냐하면 비데는 체계적으로 간개인적 relation과 계급적 rapport를 대립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17. 옮긴이 주: 여기에서 한 줄 더 앞에 등장하는 ‘어떠한 의미에서’는 de quelque façon을 옮긴 것으로, 직역하면 ‘의미’가 아니라 ‘방법’이다. 그러므로 이 문장은 정확히 어떠한 ‘방법’으로 그러한지로도 옮길 수 있다. [본문으로]
  18. 옮긴이 주: 여기에서 ‘만들다’는 프랑스어의 faire 동사를 옮긴 것이기 때문에, ‘만들다’ 대신 ‘하다’로 옮길 수도 있다. [본문으로]
  19. 옮긴이 주: 앞으로도 프랑스어 대명동사 se reconnaître는 ‘스스로’ ‘서로’를 ‘인지한다’로 번역한다. [본문으로]
  20. 나는 이러한 동화(즉 재연결 - 옮긴이)에 대한 비판을 『Que faire du Capital ?』(즉 『‘자본’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 옮긴이)의 1, 2, 10장에서 제시한 바 있다. [본문으로]
  21. 경제학자들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가치의 생산가격으로의 전형’이라는 관점에서 제출한다. ERC, p. 138을 보라. 하지만 경제학자들의 이러한 답변(opération)은 그 정당한 대상에 대한 결정이라는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다. 가치라는 개념의 (두 면 중에서) 경제적 면 하나에 대해서조차도 말이다. 앞서 언급한 사이트에서의 장-마리 아리베(Jean-Marie Harribey)의 논쟁을, 그리고 , 『L’Homme et la Société』, n. 156-157, 2005/2-3, pp. 45-57을 보라. (오류인 것으로 보이는데, 이 사이트에 대한 언급은 앞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 옮긴이) [본문으로]
  22. 옮긴이 주: 여기에서 ‘자유’와 ‘평등’은 첫글자가 대문자로 되어있다. [본문으로]
  23. 옮긴이 주: 여기에서 ‘법’은 loi를 옮긴 것으로, ‘법칙’으로도 번역 가능하다. ‘생산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스스로에게 명령하다’는 la production se commande d’elle-même을 옮긴 것이다. commander는 ‘지배’와 ‘명령’의 의미를 동시에 가지는 동사인데, 이 문장은 한국어로는 상당히 어색하지만 다른 영역의 개입 없이 생산이라는 영역이 자율적으로 자기에게 명령을 내린다는 사실, 즉 생산 영역의 자율성을 지시하고 있다. [본문으로]
  24. 이러한 의미에서, 나는 ‘소외’(aliénation)를 ‘박탈’(dépossession)로 이해하는 프랑크 피슈바흐가 제안한 해석의 결에 위치한다. 특히 그의 저서 『La Production des hommes, Marx avec Spinoza』, Paris, PUF, 2005를 보라. (‘박탈’은 ‘탈소유’로도 옮길 수 있는데, 피슈바흐를 필두로 한 프랑스의 차세대 마르크스 주석가들이 정교구성하는 핵심 개념이므로 원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옮긴이) [본문으로]
  25. 옮긴이 주: 독일어 4판을 옮긴 강신준판에 따르면, 이 32장은 24장 ‘이른바 본원적 축적’의 7절 ‘자본주의적 축적의 역사적 경향’이다. [본문으로]
  26. 옮긴이 주: ‘원형의 사각형화’는 영어의 squaring the circle이라는 숙어와 마찬가지로 ‘실현 불가능한 일’을 의미한다. [본문으로]
  27. 그리고 이때부터 진정한 시작점은 더 높은 곳에서, 그러니까 (시장과 조직이라는) 매개들이 중계(relayer)한다고 주장하는(prétendent) 이러한 무매개적인 담론적 주장(prétention discursive immédiate) 그 자체 내에서 찾아져야 한다. 『Théorie générale』(Paris, PUF, 1999)에서 취급한 이 주제는 이 글의 각주 1번에서 언급된 저작들의 지도원리이다. (편집 오류인 것으로 보이는데 각주 1번에서는 비데의 저작들이 언급되지 않는다. 대신 <호명된 주체: 알튀세르와 버틀러를 넘어서>에서 이 저작들을 언급해주고 있으므로 이를 가져오도록 한다. “본 논문에서 나는 이러한 메타구조적 연구를 다시 자세히 설명할 수 없기에 이 메타구조적 연구를 발전시켜온 나의 저술들을 다시 참조하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 『Théorie Générale』(1999), 『Explication et Reconstruction du Capital』(2004), 『Foucault avec Marx』(2014), 『Le Néolibéralisme, Un autre grand récit』(2015), 『Marx et la Loi Travail, Le corps biopolitique du Capital』(2015)을 참조하라.” - 옮긴이) [본문으로]
  28. 옮긴이 주: 여기에서 ‘화폐’는 argent을 옮긴 것인데, 프랑스어에는 ‘화폐’를 의미하는 단어가 argent과 monnaie 두 가지이다. 비데는 이 둘을 사실상 구별하지 않기에 번역에서 특별히 지적하지는 않는다. [본문으로]
  29. 옮긴이 주: 비데가 ‘노동-가치라 불리는 것’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비데가 ‘노동-가치’라는 용어를 피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더 자세히 다룰 수는 없지만, 그래서 비데는 ‘노동가치론’이라는 표현도 거부하면서 새로운 표현을 제안한다. 하지만 한국어로 옮길 경우 큰 차이가 없고 한국에서는 ‘노동가치론’이라는 표현이 굳어져 있기 때문에 이는 옮긴이가 비데 번역에서 크게 반영하지는 않는 지점이다. [본문으로]
  30. 옮긴이 주: développement은 ‘발전’과 ‘전개’라는 의미를 모두 지니는데, 특히 모순과 관련해서는 ‘전개’로 대부분 번역된다. [본문으로]
  31. 외양(apparence)이라는 인식형이상학적(gnoséologiques) 용어(혹은 관점 - 옮긴이)를 취하는 물신숭배에 대한 전통적 독해는, 인격들 그 자신들이 (시장의 가정된supposée 법이라는 하나의 ‘자연법’에 의해 지배되는) 자연적 사물들의 지위 내에 스스로 확립(installées)되어 존재하기(sont) 때문에 인격들 사이의 관계들이 사물들 사이의 관계들로 나타난다(apparaissent)는 하나의 변증법적 존재론을 함축한다. 그러나 (나의 관점에서 - 옮긴이) 물신숭배적 수동성(passivité)은 완전한 능동성(activité)(혹은 활동 - 옮긴이)이다. 물신은 우리의 손으로 만든, 그 앞에서 우리가 고개 숙이는(inclinons)(즉 복종하는 - 옮긴이) 그러한 황금 송아지이다. [본문으로]
  32. 이 질문, 그러니까 더 넓게 보자면 고전 마르크스주의가 차지하고 있는 애매한(ambigu) 사회적 지위 -마르크스 주석가들은 이에 대한 자연적(자생적 - 옮긴이) 옹호자들이다- 라는 질문은 앞서 언급한 저서들에서 다시 다루어질 것이다. [본문으로]
  33. 옮긴이 주: 알다시피, 마르크스는 자본이 화폐를 낳는 화폐라는 ‘상식’적 정의를 비판하면서 자본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제시한다. [본문으로]
  34. 여기에서 는 투입된 화폐를, 은 구매되고 판매된 상품을, <->는 이렇게 실행된 교환을, <’>는 이로부터 결과하는 화폐의 증가(accroissement)를 나타낸다. [본문으로]
  35. 옮긴이 주: 한국에서 이 텍스트는 ‘직접적 생산과정의 결과들’이라는 이름으로 통용된다. [본문으로]
  36. 옮긴이 주: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옮긴이는 le présupposé posé를 ‘놓아진’ ‘선전제’로 옮기며, poser를 ‘전제하다’가 아니라 부자연스럽더라도 ‘놓다’로 옮기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역어 선정에는 한 가지 약점이 있는데, 이 글에서 비데가 잘 설명해주듯, 마르크스가 ‘변증법적 불충분함’을 보여주었던 지점에서, 비데는 메타구조와 구조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를 재확립하기 때문이다. 정립-반정립-종합이라는 기존 역어를 고려한다면, 구조가 메타구조를 변증법적으로 ‘놓는다’는 변증법적으로 ‘정립한다’로 옮겨주어야 한다. 고민을 해본 결과 옮긴이는, 그래도 présupposé ‘posé’라고 할 때 이 ‘posé’가 프랑스어 사용자에게 주는 뉘앙스를 조금 더 고려해 잠정적으로 ‘놓아진’으로 결정했다. [본문으로]
  37. 옮긴이 주: 비데가 비판하는 철학자-주석가들의 핵심 개념이기도 한 abstraction은 ‘추상화’로도 옮길 수 있지만 이 글에서는 ‘추상’으로 옮기도록 한다. 참고로, 바로 뒤에서 언급되지만, 비데가 철학자-주석가들을 비판하는 이유는 이들이 사용가치와 잉여-가치 사이의 모순이 아니라 사용가치와 가치 사이의 모순을 사고함으로써 도출하는 추상화 개념으로 인해 사용가치의 지위를 올바르게 확립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의 상품화, 즉 모든 것의 추상화(결국 금융화)에 대한 철학자-주석가들의 배타적 강조는 시장이라는 매개 바깥의 조직이라는 매개와 연결된 사용가치의 측면을 사고하지 못한다. [본문으로]
  38. 옮긴이 주: 비데가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행위이론’을 알튀세르의 ‘호명 이론’과의 결합 내에서 어떻게 수용하는지는 비데의 논문 <호명된 주체: 알튀세르와 버틀러를 넘어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본문으로]
  39. 옮긴이 주: 하지만 비데는 이 ‘쟁론’이 장-프랑수아 리오타르(Jean-François Lyotard)의 쟁론 개념과는 다름을 명시적으로 밝힌다. [본문으로]
  40. 옮긴이 주: 이 단락을 통해 파악할 수 있듯, 비데의 ‘메타구조론’ 혹은 ‘메타구조적 접근’에서 시장과 조직이라는 두 극들 혹은 두 매개들은 메타구조의 차원에 위치해 있는 것이며, 반면 이것이 ‘이성에 의해 도구화’되면 구조의 차원에서 두 계급요인들로, 그러니까 시장의 측면에서는 금융이라는 소유의 극과 조직의 측면에서는 엘리트라는 역량의 극이라는 두 계급요인들로 변형된다. 이 두 계급요인들 즉 이 두 지배계급들이 형성하는 관계들(rapports)이 바로 계급관계들(rapports de classe)이다. 비데에게 ‘금융’이라는 극은 소유-권력 혹은 자본-권력을 지니고 있는 자본가-소유자(propriétaire-capitaliste)로서의 지배계급이며, ‘엘리트’라는 극은 역량-권력 혹은 지식-권력을 지니고 있는 역량자-관리자(dirigeant-compétent)로서의 지배계급이다. 이들이 바로 위로부터의(d’en haut) 지배계급이며, 이와 대립되는 ‘근본 계급’(classe fondamentale) 혹은 ‘인민 계급’(classe populaire)은 아래로부터의(d’en haut) 피지배계급이다. 근본적으로 비데의 계급론은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계급이원론이며, 제라르 뒤메닐(Gérard Duménil)의 계급삼원론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뒤메닐의 계급삼원론에 관해서는, 『현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제라르 뒤메닐, 도미니크 레비 지음, 김덕민 옮김, 그린비, 2009의 7장 ‘관리직 가설’을 반드시 참조하라. [본문으로]
  41. 옮긴이 주: 여기에서 ‘존재론적-유령론적’은 ontologique-hantologique를 옮긴 것으로, 주지하다시피 hantologie는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가 만든 개념 ‘유령론’의 원어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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