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인-무브

사라 아메드의 <Affective Economies>




번역: 박구비

감수: 단   





공포, 신체들, 그리고 대상들(Fear, Bodies, and Objects)  

  나는 이제 정동 경제로서의 나의 감정 모델을 특히 공포(fear)와 신체의 물질화에 연결하고자 한다. 특히 공포는 종종 그 대상에 관한 특징을 갖고 이에 따라 내가 앞에서 정의한 경제적 감각 안에서는 작동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공포는 대상이 있다는 이유로 불안과 대조되곤 한다. 예를 들어 스탠리 라흐만(Stanley Rachman)은 불안이 “위협이지만 모호한 사건에 대해 긴장된 예측”이나 “편안하지 않은 긴장감”이라고 설명하는 반면, 공포는 “인식 가능한 위협에 대한”[각주:1] 감정적 반응이라고 설명한다. 


  나는 이 모델에 대해 공포가 대상의 “지나감(passing by)”과 연결되어 있다고 제시함으로써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국가를 “뒤덮는(swamping)” 난민에 대한 서사가 공포의 서사로 작동한다고 볼 수 있다. 공포는 어느 대상 안에서 억압되기보다는 압도되는 감각을 만들어 내기 위해 작동한다. 공포는 억제 불가능성으로 인해 강화된다. 만약 공포에 찬 타자들이 “지나가면(passing by)”, 타자들은 공동체 안으로 들어와 어디에나 있을 수 있게 될 것이다. 하이데거 역시 접근하는 대상으로 인해 공포가 더 이상 가둬지지 않을 때 그것이 강화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를 위협하는 해로운 것이 눈에 띄는 거리 안에 있지는 않지만, 가까이 다가온다.... 그것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이 “그것은 가능하지만, 아닐 수도 있다”는 악화된다. 우리는 “그것은 무서워.”라고 말한다. 이는 다가오고 있는 해로운 것이 멀찍이 떨어져 있을 수도 있고 우리 곁을 지나갈 수도 있는 확실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무서움을 줄이거나 없애는 대신 그 공포감을 높인다.[각주:2]


  결정적으로 하이데거는 지금 여기의 공간적 혹은 시간적 감각, 모두의 현재에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과 공포를 연결한다. 공포는 이미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접근하고 있는 것에 대한 반응이다. 이는 공포의 미래성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보다는 우리 곁을 지나갈 가능성이 있는 것이 공포의 대상이 되게 한다. 그러나 공포의 대상이 지나간다고 해서 공포를 극복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다가오는 대상의 상실 가능성은 무서운 것들을 더욱 무섭게 만든다. 만약 공포가 대상이 있는 것이라면, 공포는 대상에 의해 억제될 수 있을 것이다. 공포의 대상이 지나가면서 위협한다면, 공포는 더 이상 대상에 의해 억제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공포는 어느 대상과 중요한 관계를 가지며, 대상을 향한 매우 강렬한 직접성(directness)을 가진다. 그 때문에 공포는 그 대상의 상실에 의해 강화된다.        


  우리는 이 부재의 특징을 불안보다는 존재하지 않는 것, 어디에도 없는 것으로 묘사할 수 있다. 불안은 특정한 대상에 붙는다. 그 대상은 불안의 근원으로서가 아니라 대상이 이동하는 효과로서 삶에 온다. 불안에서 어떤 이의 생각은 종종 다른 대상 사이를 빠르게 이동하고, 이 이동은 불안의 감각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누군가는 불안을 느끼는 더 많은 “것”을 생각한다. 하나의 주어진 대상으로부터 떨어져나오는 것(detachment)은 불안이 축적되게 한다. 다시 말해서 불안은 대상에 접착되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서, 대상의 접근으로 인해 생기는 공포와 달리, 불안은 대상을 향한 접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공포와 불안 사이의 미끄러짐은 대상을 “지나가는” 것들에 의해 정확히 영향을 받는다.  


  더욱이 공포와 대상의 잠재적인 사라짐과의 관계는 공포의 대상과의 관계보다 더욱 심오하다. 공포의 위험에 처한 것은 단지 공포가 아니다. 프로이트에게 공포 그 자체는 증상으로서, 위험에 대응하는 자아의 방어를 위한 매커니즘으로 기능할지 모른다. 프로이트는 에세이 「억압들, 증상들 그리고 불안(Inhibitions, Symptoms, and Anxietiy)」에서 꼬마 한스의 사례로 돌아간다. 한스는 말 공포증을 가지고 있었다. 프로이트는 그의 공포는 자아를 훨씬 더 심각하게 위협하는 또 다른 공포, 즉 거세 공포의 “장소에 놓여” 있던 증상 그 자체라고 주장한다.[각주:3] 한스는 말을 회피함으로써 말에 대한 공포를 “다스릴” 수 있었지만, 그 방식으로 아버지에 대한 공포를 다스릴 수는 없었다. 프로이트의 무의식의 감정 모델에서 정동 그 자체가 억압되지는 않는다는 점을 떠올려보라. 오히려 억압되는 것은 그 정동이 고착되었던 그 생각이다. 그래서 공포의 정동은 대상들 사이의 전위(displacement)를 통해 유지된다. 


  대상 사이의 전위는 또한 그 대상들을 서로 연결하기 위해서 작동한다. 그러한 연결은 공포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상상 속 장소에 이미 존재한다. 프로이트의 모델에서 대상들 사이의 이동은 정신 내적이며(intrapsychic) 회고적이다. 이는 거세라는 주요 공포로 회귀하여 참조한다. 더 구체적으로는 정동(거세의 위협)이 원래 부착되어있던 생각을 억압했기 때문에, 대상(이 사례에서는 말과 아버지) 사이를 옆으로 이동하게 되었다고 설명할 수 있다.[각주:4] 나는 대상들 사이를 옆으로 움직이며 대상을 위협의 기호로 한데 부착시키는 이 이동이 다양한 역사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본다. 기호들 사이의 움직임은 정신 안에서 이동의 기원을 갖지 않지만, 현재에 살아있는 역사의 흔적이다. 


  예를 들어 인종차별의 언어가 전위를 통해서 공포를 유지시키는 방법이나 신체를 통해서 표면화하는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Black Skin, White Masks)』의 인용문을 살펴보자.


  눈 내리던 겨울날 내 몸은 비통함에 늘어지고(sprawled out), 뒤틀리고, 재색칠되었다. 검둥이는 짐승이다. 검둥이는 나쁘고, 검둥이는 비열하고, 검둥이는 못생겼다. 봐, 검둥이야. 춥나 보네. 검둥이가 추워서 몸을 떨고 있네. 어린 소년은 검둥이가 무서워서 몸을 떨고, 검둥이는 추위에 떨고, 그 추위는 당신의 뼛속으로 스며든다. 잘생긴 소년은 검둥이가 분노에 몸을 떤다고 생각하고 몸을 떤다. 어린 백인 소년은 엄마의 품으로 달려간다. 엄마, 검둥이가 나를 잡아먹으려고 해.[각주:5]    


  여기에서 공포는 추위로 감지된다. 공포는 신체를 추위에 떨게 만들고, “당신의 뼛속으로 스며드는” 추위처럼 피부 표면에서 몸 깊숙한 곳으로 이동한다. 공포는 마치 외부에서 안쪽으로 이동하기라도 하는 양, 공포를 느끼는 신체를 휘감기도 하고, 공포에 휘감겨있고 억눌려 있는 신체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이들이 마주칠 때, 공포는 신체를 함께 데려오지 않는다. 공포는 서로에게 공유되는 감정이 아니다. 공포는 백인의 신체와 흑인의 신체를 구분하기 위해 작용한다. 백인 아이는 흑인의 신체가 분노에 차 떨고 있는 것이라고 오인한 결과, 이를 공포의 “근거”로 삼는다. 다시 말해서 타자는 단지 오인을 통해서만 무서운 것으로 독해된다. 이 독해는 백인 주체의 공포로서, 이 공포의 반응을 통해서 흑인 타자에 의해 돌아오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마치 백인의 신체가 그 공포의 기원(그리고 그것의 저자)이기라도 하다는 듯 공포가 백인의 신체에서 온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공포는 현재에 들러붙어 있는 과거의 역사들을 열어 보이며(사회적 규범의 가치를 타자에 대한 “진실”로 “받아들이는” 의미에서 어린 시절에 “잡아먹히는 것”에 대한 환상으로 리허설했던 그대로), 그리하여 백인의 신체를 흑인의 신체와 구별되는 것으로 구축한다. 


  여기서 공포가 무언가를 한다는 것에 주목하자. 공포는 신체 간의 거리를 재설정한다. 그 차이는 표면에서 읽히며 그 독해는 표면을 만들어낸다(몸떨기, 재색채하기). 그러나 여기에서 분명한 것은 공포의 대상은 여전히 흑인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공포가 자신의 존재를 위협하면서 그 역시 공포를 느끼게 된다. 공포는 주체의 내부로부터 오는 것도 아니고, 대상 안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타자가 무섭기 때문에 그들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공포 기호의 순환을 통해서 흑인 타자는 두려운 존재가 “된다”. 그러나 이 사례는 공포가 대상에 의해, 이 경우에는 흑인에 의해 억제된다는 점을 보여주지 않는가? 어느 정도는 옳다: 공포 기호의 순환은 누군가에게는 견제하도록, 다른 누군가에게는 이동하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공포는 어느 한 신체 안에 억눌려, 이후 그 신체를 공포의 대상으로 만든다. 실제로 백인 아이의 분명한 공포는 억압되지 않고 확장된다. 그는 세상에 대한 포용을 자신을 집에 있는 상태로 재구축하는 방식(“귀가”로서의 엄마의 포옹)을 통해 제안한다. 더 적은 공간을 차지하는 몸 안으로 갇힘으로써 백인 아이의 공포의 “효과(impact)”를 두려워하는 자, 백인 아이의 공포에 짓밟히는 자는 흑인 주체이다. 다시 말해서 공포는 타자의 이동이나 확장을 통해서 어떤 신체를 제약하기 위해 작동한다.   


   그러나 이 억압은 기호들뿐만 아니라 신체들 사이의 이동의 효과이다. 그러한 이동은 연합의 과거 역사들에 의지한다. 검둥이, 짐승, 나쁜, 비열한, 못생긴. 기호들 사이의 이동은 타자들이 감정의 가치를 가지도록 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두려운 것으로서, 이 자질은 “붙어 있는”, 언명될 필요가 없는 역사에 기대고 있다. 이 억압은 잠정적이다. 흑인이 공포의 대상이 된다면, 그는 옆을 지나갈 것이다. 사실 그의 물리적 “지나감”은 공포가 기호들 사이로 지나감과 관련될 수 있다. 이것은 정동을 강화하는 이동이다. 그가 지나간다면, 흑인은 심지어 더욱 위협하게 된다. 그의 근접은 미래에 있을 상처의 가능성으로 상상된다. 공포 경제는 타자들의 신체를 억압하면서 작동한다. 억압의 “성공”은 그것의 실패에 의지한다. 그것은 공포의 중요한 근원들을 열어두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아무리 대상을 향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해도 공포는 정동 경제로서 작동한다. 공포는 특정한 대상이나 기호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거주의 결핍이 공포가 기호들과 신체들 사이를 가로질러 미끄러지도록 한다. 이 미끄러짐은 신체에 붙은 기호의 고착 그 자체 안에 그저 일시적으로 붙어 있게 된다. 그 고착으로 인해 기호는 신체를 공포의 대상으로 구성하고, 또한 신체에 의해 구성되며, 신체에 붙으며, 그것을 자신의 것이 되어버린 공포로 둘러싼다.


  공포는 옆으로 이동하기도 하고(이때는 기호들 사이에 환유적이고 접착되는 관계가 있다) 뒤로 이동하기도 한다. 공포의 대상은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를 대신하게 된다. 이 대리는 주체가 그로부터 달아나는 것처럼 보이는 대상의 옆을 지나가는 것과 관련이 있다. 공포와 불안은 대상으로부터의 방향 전환의 바로 그 영향을 통해 “내가 아닌 것”의 효과 자체를 만들어 낸다. 그럼에도 그 대상은 그것이 옆을 지나가거나 배치될 때 위협한다. 이렇게 공포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방어의 경계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포가 대상들을 만들어 내어 그 경계를 발명하는 것이다. 그 대상은 두려움으로 인해 주체가 거리를 두려고 하는 대상들이자, 주체가 그로부터 달아나는 것처럼 보이는 대상, 즉 “아닌/없는 것(the not)”이다. 공포를 통해서 자신과 정동되는 타자 사이의 바로 그 경계뿐 아니라, 두려움의 대상들 사이의 관계(단순히 주체와 대상들 간의 관계라기보다는) 역시 구성된다. 이는 대상에 “들러붙은” 과거의 역사들로 인해, 어떤 대상들을 다른 대상들보다 더 무서워 보이게 만듦으로써 구성된다.  













  1. Stanley Rachman, Anxiety (Howe, U.K.: Psychology Press, 1998), 203. [본문으로]
  2. Martin Heidegger, Being and Time, trans. John Macquarrie and Edward Robinson (London: SCM Press, 1962), 180. [본문으로]
  3. Sigmund Freud를 보라. “Inhibitions, Symptoms, and Anxiety,” in The Standard Edition of the Complete Psychological Works of Sigmund Freud, trans. James Strachey, vol. 20 (London: Hogarth, 1964) [본문으로]
  4. 확실히 프로이트의 “무의식적 감정들”에 대한 논의는 기원의 모델 혹은 생각과 느낌 사이의 “true connection”에 의존하고 있다. “무의식적인 것” 110쪽을 보라. [본문으로]
  5. Frants Fanon, Black Skin, White Masks, trans. Charles Lam Markmann (London: Pluto, 1986), 114. [본문으로]
댓글 로드 중…

최근에 게시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