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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저명한 철학자이자 퀴어 페미니스트로 널리 알려진 뉴욕 대학의 종신 교수 아비탈 로넬Avital Ronell은, 대학 당국으로부터 ‘교내 성폭력에 대한 법’(타이틀 IX)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조사를 받는 처지에 놓였다. 이는 그녀가 3년간 지도했던 대학원생인 님로드 라이트먼Nimrod Reitman이 그녀로부터 ‘지속적인 성추행과 성폭행’을 당했다며 그녀를 기소했기 때문이다. 이 기소가 앞으로 그녀의 명성에 끼칠 영향보다도 사람들이 더욱 주목하고 놀라워했던 것은, 바로 아비탈 로넬이 공공연히 ‘레즈비언’이라고 알려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천박하게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레즈비언과 게이 간의 성폭행이라는게, 성립이 가능하긴 한거야?’ 


동시에 이 사건에 관심을 가지던 몇몇 커뮤니티를 놀라게 했던 것은, 주디스 버틀러와 가야트리 스피박, 슬라보예 지젝 등이 포함된 수십 여명의 페미니스트이자 철학자들이 뉴욕 대학으로 ‘비밀스럽게’ 보낸 한 통의 편지였다. 우회적이지만 또한 분명하게 아비탈 로넬의 종신 교수직 박탈을 반대하는 그 편지가 언론에 공개가 되자, 몇몇은 거세게 분노했고 몇몇은 조용히 동의를 표했다. 그들의 편지에 대한 분노는 다음에 가까웠다. ‘어떻게 소위 페미니스트라는 사람들이 위계에 의한 성폭력에 그다지도 무감각하게 굴 수 있어? 어떻게 #Metoo가 한창인 지금의 페미니즘에 대해 이렇게나 반동적으로 굴 수가 있어?’ 여기에 대해서 나는 어떠한 개인적인 의견을 표하는 대신에, 리사 두건Lisa Duggan의 글을 하나 소개하려 한다. 이 글은 2018년 8월 18일, 리사더건 자신을 포함한 주디스 할버스탐Judith Halberstam과 몇몇 이론가/비평가들의 공동블로그인  https://bullybloggers.wordpress.com/에 게시되었다. (2019년 7월 현재 아비탈 로넬은 뉴욕 대학으로 돌아갔다.)




완전한 재앙

THE FULL CATASTROPHE




리사 두건(Lisa Duggan)

연숙(리타) 옮김


섹스는 절대 좋은 생각이 아니다. 그것은 엉망진창이다. 그것은 욕망과 환상, 권력과 폭력, 지배와 상호관계에 대한 장면이다. 때로 이것들은 한꺼번에 오기도 한다. 섹스는 우리가 추구하고 피하고 기뻐하고 절망하는 나쁜 생각이다. #MeToo가 탄력을 얻었을 때, 이것이 사용하는 사회적 프로세스 또한 여전히 엉망진창이다. 그것은 페미니스트 사회 정의 운동의 한 부분으로, 섹스를 지배전략으로 사용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압도적으로 남성) 권위자들을 부르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신자유주의를 홍보하는 스턴트의 한 부분이다. 왜 그것이 신자유주의적일까? 왜냐하면 비난이 주로 권력 구조가 아닌 나쁜 개인에 대한 언론 개입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며, 책임지는 방식 또한 기업 조사와 해고, 홍보수단의 금지(넷플릭스 계약이나 tv출연 등)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회 정의 페미니즘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신자유주의적 감옥carceral 페미니즘(형사 사법 제도를 강화하여 여성을 '보호'하는)에서, 페미니즘의 사유화(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기업 이사회에의 의존하는)로의 전환에 가깝다. 


대학은 특정한 종류의 기업이다. 심지어 공립 대학들도 국가의 지원보다는 등록금과 민간 자금에 더 많이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각 주state는 연방 정부의 자금배분을 통해 대학운영에 있어 여전히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대학에서는 타이틀 IX 에 따른 연방의 위임 절차가 성희롱 불만사항의 판결을 위한 절차를 지배한다. 이러한 것들은 각 대학마다 각자의 과정과 혼합되어 있으며, 교직원 핸드북에 설명되어 있다. 조사와 처벌의 과정은 절차들의 혼합과 그것들을 수행하는 것에 책임이 있는 개인 관리자들에 따라서 매우 다르다. 그러나 전반적인 규칙은 기밀이다. 고소한 사람, 고소를 당한 사람, 그리고 모든 대학 직원들은 비밀을 지킬 의무가 있다. 어디까지 비밀을 지킬 것인가는 학교에 따라 다르다.


기밀 요구는 주로 학생들인 힘 없는 고발자들을 힘 있는 교수진의 복수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고안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실제와는 거리가 멀다. 혐의자들은 피고인에 대해 취하거나 취하지 않은 행동에 대해 종종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가 된다. 기관들은 피고를 자주 보호한다. 하지만 우리는 사실을 알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기밀 유지로 인해 상황에 대한 재현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국 기밀 유지는 기관들을 보호한다. 변호사들은 정의를 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러한 목적을 위해 사건을 검토한다. 우리는 기관들에게 책임을 요구할 수 없다. 바로 이것이 요점이다. 기업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비공개 협약과 다른 수단을 통해 기밀을 강요하는 것을 좋아한다. 대학의 기밀 요구는 이러한 관점에서 봐야만 한다. 


나는 성희롱으로 기소된 퀴어 교수진들의 사례를 수집하고 있다. 내 가설은 다음과 같다. 종종 호모포빅하거나 성적으로 혼란스러운 학생들에 의해, 때로는 "특별한" 대우에 대한 요구가 좌절된 퀴어 학생들에 의해, 퀴어들이 불균형하게 기소된다는 것이다. 물론 나는 퀴어 교수진들도 유죄일 수 있으며,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모은 이야기들은 많은 경우, 환상, 투사, 혹은 복수를 포함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퀴어들은 대중의 상상 속에서 지나치게 과잉성화hypersexualized되어 있기 때문에, 성적 혐의의 대상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 퀴어 여성은 유혹적으로 굴었다는 이유로 기소되었는데, 이는 그녀가 치마를 입고 "무서운 목소리"로 교실에서 말했기 때문이었다. 한 트랜스맨은 '부적절한 접근'으로 동료를 고발했는데, 그는 학생도 아니고 같은 기관 소속도 아니었다. 한 교수는 퀴어 연구 수업의 내용을 요구했다. 작지만 점점 늘어나고 있는 나의 콜렉션의 대부분이 교수진의 인종, 특히 흑인 교수진과 연루되어 있다는 점이 주목할만하다. 하지만 나는 기밀요구로 인해 내 사건들의 익명성을 지켜야 한다. 나는 이러한 케이스들이 얼마나 흔하고 전형적인지, 또는 특정 기관이 그들에게 있어 '핫스팟'인지 아닌지를 판가름 할 수 없다. 


흑인 학생에 의해 기소된 흑인 교수들과 관련된 사건에서, 행정적 처분은 퀴어 아프리카계 미국인 멘토쉽 관행에 초점을 맞췄다. 흑인 교수와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흑인 퀴어의 사교적 관행에 대해 행정 관료에게 설명하는 편지를 쓰도록 요청받았다. 지위를 가로지르는 "퀴어 친밀감"을 구성하는 비공식적 네트워크와 가까운 관계는, 대학 내에서의 흑인 퀴어의 발전에 결정적이었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적절한 교수/학생간의 경계를 침해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마르시아 오초아Marcia Ochoa는 최근 페이스북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전에는 코드화된 방식으로 운영해야 했던 주변부 공동체에 대한 제도적 개입으로 인해 변화가 생겼다. 우리의 대인관계 지도 방식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제도적인 힘의 위치를 따라잡지 못했다. 그리고 이것은 대학원생들의 '한 세대' 내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대학원에 입학하는 학생들은 연대에 대한 큰 기대를 가지고 오고 있는 반면, 기관들은 더 이상 많은 사람들이 대학원을 통과하기 위해 의존했던 비공식적인 네트워크의 종류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것이 타이틀 IX와 NYU 교수인 아비탈 로넬Avital Ronell이 휘말린 일종의 맥락 충돌이다. 처음에 로넬은 비밀 준수 요건으로 인해  손발이 완전히 묶였다. NYU가 이메일을 통한 성희롱과 성적이지 않은 접촉에 대해 그녀가 책임이 있다고 결정했을 때, 그들은 그녀의 임기를 취소하고 그녀를 제거하기 위한 결정을 발표했다. 그녀는 도움을 요청할 수 없었다. 저명한 학자들이 그녀의 사건에 대한 편지를 작성했을 때(그들이 로넬로부터 요청받은 것은 아니다), 그들은 사건에 대한 어떤 지식(로넬에 의해서가 아닌 그들의 네트워크를 통해 얻은)도 인정할 수 없었다. 그 편지의 엘리트주의는, 말 그대로 역겹지만, 지속된 혐의에 대한 모든 비율의 가혹한 처벌을 중지하도록 NYU를 설득하기 위해 서둘러 만든 무기였다. NYU의 관계자들은 지위와 권력을 이해했고 이에 대응했다. 처음에 그들이 고려한 가혹한 처벌은 고발자로부터의 위협적인 소송을 피하기 위해 채택된 것 같다(고발자의 배우자는 노암 앤드류스Noam Andrews로, 그는 부유한 뉴욕 부동산 가족의 일부이며 추정컨대 고소비용을 지불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편지는 그들에게 기밀이 그들의 행동을 완전히 감추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렸다. 돈과 학문의 중요성이 겹친 NYU는, 로넬에게 1년의 무급휴가를 제공했다.


그리고 고발자인 Nimrod Reitman님로드 라이트먼은, 더이상 NYU의 정책과 징계 절차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는 뉴욕 타임스에 문서를 유출했다. 처음에 로넬은 변호사를 통해 구체적인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서 NYU로부터 허가를 받아야 했다. 그 다음, 유출된 문서를 바탕으로 한 언론 사태는 마침내 그녀로 하여금 말할 수 있도록 금지를 해제시켰다. 마침내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완전한 재난이자 거대한 혼란, 문화의 충돌, 그리고 학계의 권력과 그 경계에 대한 이슈이다. 


이 사건에 대한 진실과 어떤 버전이 좀 더 정확한지는 차치하고, 우선 떠오르는 네 가지 일반적인 질문이 있다. 


1) 뉴욕 타임즈 기사와 로넬의 보조 자료, 라이트먼의 법적 대응 등을 통해 발췌된 이메일 교환은 사랑, 애정, 친밀감에 대한 양면적인 대화를 보여준다. 이러한 교환이 전적으로 합의된 것이며, 성적 접촉의 징후가 없는 것이라고 해도, 여전히 거기에는 조언자와 학생 관계의 경계에 대한 질문이 있다. 막강한 조언자의 권력이 이러한 표현과 양립할 수 있을까? 아니라면, 그 경계는 어디인가? 이것은 흔히 학자들을 괴롭히는 일반적인 질문이다.


2)이메일 교환의 본질은 많은 퀴어 학자들과 공명하는데, 이들의 퀴어 친밀감은 종종 바깥의 사람들에게 기이하게 보이기도 한다. 퀴어 여성과 게이 남성의 로맨틱한 관계? 성적 욕망이 나타나지 않는 로맨틱한 언어? 헤테로섹슈얼(또한 호모섹슈얼) 교제와 결혼의 바깥에 있는 친밀감은, 우정과 로맨스, 파트너쉽과 로맨틱한 우정을 분리하지 않는 퀴어들 사이에서는 흔한 것이다. 로넬과 라이트먼 사이의 대화는 문학적 암시로 가득한 동시에, 문자 그대로 성적 관계의 지표로 읽힐 수도 있다. 이것은 문화적 충돌이다(학계에서 주장하듯 그 서신이 '문제적'이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1)을 보라. 거기에 성적 관계가 없었다는 것을 입증하지는 않는다).


3)이 경우에 퀴어와 여성 교수에 대한 선택적인 악마화는 매우 분명하다. 단지 로넬이 훨씬 더 심한 비행으로 기소된 남자 교수들보다 가혹하게 처리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소셜 미디어가 그녀를 악마화하고 인신공격하는 것은 숨이 막힐 정도다. 고소당한 남성 교수는 이런 상황에 보다 덜 노출되며, 그들은 주로 다수의 희생자와 신체적 폭력과 관계된 사건에 연루된다. 이것은 인터넷에 널리 퍼진 다양한 여성혐오의 일종이다. 여성혐오는 심지어 인신공격을 가하는 퀴어와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도 만연하다. 그들은 비슷한 일로 기소된 남성 교수들에게는 이런 일을 하지 않는다. 


4)로넬을 지지하는 학자들의 편지에 대한 비판은 주로 페미니스트의 위선과 이중 잣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들의 주장은 서명자들이 페미니스트 동지를 옹호하면서도 비슷한 상황에 있는 남성은 공격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은 동시대 페미니즘에 대한 역겨운 무지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거기에는 많은 긴장이 있다. 누군가는 #MeToo의 사유화를 위해, 어떤 이는 공중에 의한 재판과 소셜 미디어의 맹렬한 비난에 전념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희롱을 조장하는 권력의 구조에 대한 분석과, 기관과 절차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도 있다. 또한 공중의 분위기에 기여하는 섹스 패닉sex panic의 역사에 대해 지적하는 성적 급진주의자들도 있다. 편지에 서명한 어떤 페미니스트들(또한 서명한 사람이 모두 페미니스트인 것도 아니다)은, 타이틀 IX 위원회와 #MeToo 재판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학계 페미니즘의 긴장을 보여준다. 그 편지는 위선을 보여주는게 아니다. 이것은 성희롱에 대한 페미니스트들 사이의 분리와 다름을 반영한다. 우리는 모두 성희롱에 대해 반대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규정할지, 그것과 어떻게 대면할지에 대해 모두 동의하지는 않는다. 


이 이슈를 직면함에 있어서 "무슨 일이 실제로 일어났는지"를 알 필요는 없다. 라이트먼은 로넬이 그를 성폭행했다고 말한다. NYU는 그녀가 단지 이메일을 통한 희롱과 부적절한 접촉에 있어서만 책임이 있다고 밝혔다. 라이트먼은 우리로 하여금 성적 욕망과 실행의 증거로서 그 이메일을 말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원한다. 로넬은 그것을 문자 그대로 섹스에 대한 것이 아닌, 코드화된 채로 이해했다. 그러나 어쨌든 섹스가 왜 핵심 요소가 되어야 하는가? 중요한 점은 해가 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경계 위반이 있었는가에 대한 여부이다. 조언자의 침입이 문제가 되기 위해 꼭 성적인 것이 될 필요는 없다. 그것은 더 큰 문제다. 만약 우리가 하나의 케이스, 그것의 디테일, 이 고소인과 피고인에 초점을 맞춘다면 우리는 구조적 문제를 생각할 기회를 잃게 될 것이다. 당신이 만약 사회 정의 페미니스트이며 신자유주의자가 아니라면, 우리는 보다 광범위한 구조의 힘을 신경써야한다. 아마도 우리는 대학에 초점을 맞추고, 투명하고, 교수진에 책임을 묻고, 지역적 맥락에서 경계에 대한 질문을 평가하는 회복적인 정의의 절차를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아마도 기밀은, 그것의 필요성이 증명될 때 룰이 아니라 예외로서 강요될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는, 나는 숨을 쉬기가 어렵다. 




원문 : https://bullybloggers.wordpress.com/2018/08/18/the-full-catastrop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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