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품의 사회계약과 화폐의 마르크스적 구성: 화폐의 보편성이라는 문제에 관하여
상품의 사회계약과 화폐의 마르크스적 구성:
화폐의 보편성이라는 문제에 관하여
에티엔 발리바르
번역: 배세진 (파리 7대학 ‘사회학 및 정치철학’ 학과 박사과정)
[옮긴이]
1) 이 텍스트는 마르셀 드라흐(Marcel Drach)가 책임편집하였으며, 에티엔 발리바르, 미셸 아글리에타, 장-조제프 구, 자크 데리다 등의 학자들이 화폐에 관해 집필한 텍스트들을 모은 L’argent: Croyance, mesure, spéculation, La Découverte, 2004에 실린 에티엔 발리바르의 글 ‘Le contrat social des marchandises et la constitution marxienne de la monnaie (contribution à la question de l’universalité de l’argent)을 번역한 것이다. 이 동일한 텍스트는 ‘상품의 사회계약: 마르크스와 교환의 주체’(Le contrat social des marchandises: Marx et le sujet de l’échange’라는 제목으로 발리바르의 논문모음집 “시민주체”(Citoyen Sujet et autres essais d’anthropologie philosophique, PUF, 2011)에 수록되었다. 하지만 저작권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에 발리바르의 요청대로 “시민주체”에 실린 판본이 아니라 L’argent: Croyance, mesure, spéculation에 실린 판본을 번역했다(이와 관련하여 아직까지 라데쿠베르트 출판사의 답변을 받지 못 하긴 했으나, 발리바르와 역자 모두 여러 차례 라데쿠베르트 출판사에 연락을 시도했음을 밝힌다). “시민주체”에 실린 판본은 소제목을 통해 내용별 구분이 이루어져 있고 새로 추가된 각주들이 몇 개 있으며, 특히 텍스트의 맨 앞에 이 텍스트를 간단히 소개하는 하나의 단락이, 그리고 텍스트의 맨 뒤에 ‘후기: 상호-객관성’이라는 제목의 짧지 않은 몇몇 단락이 추가되어 있다. 번역 대본은 L’argent: Croyance, mesure, spéculation에 실린 판본으로 하되, 독자들을 위해 “시민주체”의 절 구분을 반영하고 “시민주체”에 추가된 각주들 또한 번역했으며, 특히 텍스트 앞뒤의 새로 추가된 단락들 또한 번역했다. 발리바르와 라데쿠베르트 출판사가 양해해 주리라 믿는다. 우선 프랑스에서도 미간행된 논문인 ‘수탈자에 대한 수탈에 관하여’(이 또한 옮긴이가 번역하여 공개할 예정이다)을 보내주면서 번역을 허락해준 발리바르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이 텍스트는 마르크스의 “자본” 1권의 1편을 많이 인용하고 있는데, 이 인용문들은 발리바르가 이 텍스트에서 활용하고 있는 장-피에르 르페브르(Jean-Pierre Lefebvre) 책임번역의 프랑스어판 “자본” 1권에서 직접 번역하지 않고 강신준판 “자본” 1권의 번역으로부터 인용하되, 이 둘을 비교하면서 문맥에 따라 적절하게 수정했다. 참고로 장-피에르 르페브르(앙리 르페브르의 아들이자 현재 프랑스 최고의 독문학자) 책임번역의 프랑스어판 “자본” 1권은 현존하는 최고의 마르크스주의자로 알려진 발리바르가 적극 참조하는 최고의 “자본” 1권 번역서이다(아쉽게도 2권과 3권은 이 프로젝트에서 제외되었다).
2) 참고로, “마르크스의 ‘두 가지 발견’”에서도 옮긴이가 지적했듯, 발리바르는 “마르크스의 철학”에서 이데올로기론과 물신숭배론을 상당히 객관적으로, 하지만 거의 완벽에 가깝게 비교하는 3장 ‘이데올로기 또는 물신숭배: 권력과 주체화/복종’의 집필 이후 꽤나 긴 시간 동안 물신숭배론에 대해 ‘침묵과 유보’를 고수해 왔으나, 2000년대 이후 물신숭배에 관해 상당히 중요한 몇몇 텍스트들을 집필한다(이러한 ‘침묵과 유보’가 물신숭배론에 대한 알튀세르의 굉장한 불신과 관계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억측일까?). 물론 여기 우리가 소개하는 ‘상품의 사회계약’을 제외한다면 다음의 텍스트들이 전적으로 물신숭배에만 할애되어 있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어쨌든 이 텍스트들을 나열해보자면, (1) “마르크스의 ‘두 가지 발견’”, (2) “공산주의의 현재성에 관한 몇 가지 언급”(이 때에는 제목을 조금 의역했으나 서관모 교수님의 지적대로 제목을 제대로 옮기자면 “공산주의에 대한 시의성 있는 몇 가지 언급” 정도가 제목으로 더 적절하다는 점을 이 기회에 지적하자), (3) 여기에 소개되는 “상품의 사회계약”, (4) “수탈자에 대한 수탈에 관하여”, (5) “미셸 푸코의 반-마르크스”(헤겔의 ‘추상법’과 관련한 발리바르의 중요한 언급이 들어있다). 이렇게 다섯 가지 텍스트가 존재하며 옮긴이의 생각엔 이 다섯 가지 텍스트를 하나로 묶어서 독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미셸 푸코의 반-마르크스”의 매우 일부를 아래에 번역하여 소개한다.
3) 사족 같지만 발리바르의 텍스트가 워낙 독해하기 복잡하고 까다로우므로, 번역어에 대해 간단히 몇 마디 하겠다. 우선 argent과 monnaie 모두 화폐로 옮겼으나 argent의 경우만 원어를 병기했다. 한국어로는 모두 화폐이지만 프랑스어에서 이 둘은 구분된다. 이는 이 텍스트의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는데, 제목에서 앞의 화폐는 monnaie이지만 뒤의 화폐는 argent이다. 사실 프랑스어에서 argent에는 ‘은’이라는 뜻도 있는데, 이를 통해 알 수 있듯 사실 argent으로서의 화폐는 금이나 은과 같은 귀금속이 일반적 등가물로서의 화폐의 지위를 얻은 것이다. 반면 monnaie는 지폐를 프랑스어로 papier-monnaie라고 부르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사실은 엄밀히 말하면 국가가 보증하는 ‘불환화폐’, 즉 쉽게 말해 ‘지폐’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화폐적’이라는 말을 쓰기 위해서는 monnaie의 형용사형인 monétaire를 써야 하기도 하고, 또 사실 프랑스어에서도 argent과 monnaie를 엄밀하게 구별하지는 않으므로(하지만 프랑스어에서 이 단어들이 일상적으로 사용될 때의 뉘앙스를 생각해보면, 확실히 argent은 구체적인 물질을, monnaie는 추상적인 의미의 돈 또는 지폐를 더 많이 지시한다), 발리바르도 이 둘 사이의 엄밀한 구분이 필요한 단락이 아니라면 이를 정확하게 구분해서 쓰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어쨌든 argent에 원어를 병기해줌으로써, argent이 의미하는 화폐가 사실은 (정확하게 대응되는 것은 아니지만) 구체적인 물질로서의 ‘돈’임을 나타내고자 노력했다. développement의 경우, 맥락에 따라 발전, 전개, 이론적 발전, 이론적 전개 등으로 옮겼다. construire는 구축하다, construction은 구축으로 옮겼다. circulation은 순환이라는 의미와 (상품 또는 화폐의) 유통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모두 담고 있으나 여기서는 유통으로 통일했으며, 문맥에 따라 가끔 순환이라는 표현을 썼다. crise는 여기서 경제위기를 의미하므로 경제위기라고 옮겼다. immédiatement은 ‘직접적’이라는 의미로 일상에서도 많이 쓰는 말인데, 이 텍스트에서는 직접적이라는 일상적 의미에 더해 médiation(매개작용)이 없다는, 즉 무매개적이라는 의미 또한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어로는 조금 어색하더라도 몇 군데를 제외하고 모두 ‘직접적’보다는 ‘무매개적’(그리고 ‘직접성’보다는 ‘무매개성’)이라고 옮겼다. abstraction의 경우 추상이라는 뜻도 있지만 추상화(이 추상화라는 말을 추상과 구분하여 프랑스어로 abstractifier이나 abstractionner라는 동사를 활용해 쓸 수도 있으나 이는 프랑스어 용례상 매우 어색하다)라는 뜻 또한 포함하고 있다고 봐야 하므로, 맥락에 따라 추상 또는 추상화로 옮겼다. 마르크스가 자신의 물신숭배론에서 활용하는 용어인 fantasmagorique의 경우 강신준 교수를 따라 ‘환상적’이라고 옮겼고, 대신 illusion은 ‘허상’, illusoire는 ‘허구적’으로 옮겼다. 사실 illusion에는 허상, 허구, 환상, 착각, 기만의 의미가 모두 들어 있다고 봐야 하기에 ‘허상’이라는 번역어는 너무 협소하다. personne 또는 personnel의 경우 강신준 교수는 ‘사람’으로 번역했지만, 여기서는 법률적 인격과 사물 사이의 전도에 대한 논의가 핵심이기 때문에 어색하더라도 전부 ‘인격’으로 번역했다. besoin의 경우 욕구와 필요라는 두 가지 뜻 모두 들어있으나 여기에서는 필요로 통일했다. 프랑스어에서는 Aufhebung, 즉 지양의 번역어로 dépassement과 relève를 모두 쓰는데, 사실 dépassement의 경우 극복하고 넘어선다는 의미가 조금 더 강해서 그런 식으로 의역한 부분도 있다(관련하여 관심이 있는 독자는 알랭 바디우의 Second Manifesto for philosophy의 영어판 옮긴이 서문을 보라). sujétion의 경우 서관모 교수의 지적대로 ‘주체화/복종’으로 옮겼다. 이 단어에는 이 두 가지 의미가 모두 들어있다. 관심이 있으신 분은 또한 역자가 번역한 발리바르의 텍스트 ‘무한한 모순’의 국역본을 찾아 보길 바란다(곧 학술지 “문화과학”을 통해 소개될 예정이다).
“… 이 보이지 않음이라는 속성들은, 어떠한 상황이 현실로부터 그 속성들을 없애버릴 정도로, 현실에 너무나도 들러붙는다.”
마르셀 프루스트, “소돔과 고모라”(Sodome et Gomorrhe), I, 21.
상품과 화폐의 “물신숭배”에 관한 마르크스의 이론은 그 등장과 동시에 단숨에 마르크스적 정치경제학 “비판”의 가장 찬사를 받는 동시에 가장 거부당하는[비판받는] 지점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 상품과 화폐의 물신숭배에 관한 마르크스의 이론은 놀라운 방식으로 주권(souveraineté, 지배)과 주체화/복종(sujétion)의 상관관계를 근대적 “사회관계”(표면적으로 봤을 때, 이 근대적 사회관계는 자유로운 개인성[자유주의적 개인성]의 승리를 표현하는 것이다)의 핵심에 복권시킨다. 이러한 복권을 위해, 상품과 화폐의 물신숭배에 관한 마르크스의 이론은 상품교환의 표상적이고 실천적인 공간 내에 “계약”에 관한 고전적 도식을 개념적으로 재기입해야만 했다. 그리고 마르크스의 이론은 이 공간 안에서 모든 잠재된 “형이상학”(이 형이상학은 또한 인간학/인류학이자 정치학이기도 하다)을 발견함으로써 이 상품교환의 무매개성(immédiateté)을 폭로한다. 이 논문에서 나는 화폐에 관한 논의에 있어 거의 독보적인 이론으로 남아 있는 이러한 보편적인 것에 대한 비판적 구축물[즉, 상품과 화폐의 물신숭배론]의 계기들을 전개하는 시도를 행할 것이다 1 2.
‘상품의 물신적 성격과 그 비밀’(Der Fetischcharakter der Ware und sein Geheimnis)이라는 제목의 이론적 발전[즉, 1편 1장의 마지막 4절]이 “자본” 1권 1편의 경제학에서 점하고 있는 위치는 명백히 매우 의도된 것이다 4 5. 하지만 이 4절이 점하는 위치는 마르크스가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던 변증법적 설명순서의 관점에서 봤을 때 상당히 놀라운 것이며(우리는 마르크스가 이 설명순서에 특별한 중요성을 부여했음을 알고 있다), 마르크스는 이 설명순서에 (자신의 기준에서 봤을 때) 완전히 만족스러운 형태를 부여하는데 전혀 성공하지 못 했다 6. 이 이론적 발전(1편 ‘상품과 화폐’의 1장 ‘상품’의 4절)은 한 편으로, 보편화된 상품교환의 형태들이 사회적 관계에 부여하는 “의미”(또한 이는 비의미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마르크스의 눈에 무엇보다도 이는 진정성authenticité의 상실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에 관한 역사철학적 성찰을 1장의 이론적 발전에 추가하는, 이 이론적 발전에 붙이는 일종의 후기 또는 주석인 것처럼 보인다. 다른 한 편으로, 이 이론적 발전은 일반적 등가물(예를 들어 아마포와 같이 어떠한 상품이든 간에 일반적 등가물로 기능하는 하나의 상품은 교환 내에서 모든 다른 상품들의 [교환의] 반대항이 되며, 이 각각의 상품들과 즉시 교환 가능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일반적 등가물 고유의 나누기 또는 나머지 없는 몫은 모든 개별 상품들의 가치를 직접적으로 표현한다)이 화폐(monnaie ou argent)(화폐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기 스스로를 상품으로 구성할 수 있었지만 이제부터는 모든 가치들의 척도로 역사적으로 기능하기 위해 상품유통으로부터 “배제”된다)로 변형되는 상품 변증법의 마지막 계기와 직접적으로 관련된다.
그런데 1편 3장에서 이러한 변형은 화폐의 새로운 변증법의 시작점이 된다. 이 새로운 화폐의 변증법은 “척도”(마르크스가 “이상적”이라고 부르는)와 유통(이 유통 속에서 화폐는 점점 더 화폐 자신의 “기호”로 표상된다)의 연속적인 형상들을 통과하여 마지막에는 세계시장에서 자율적인 방식으로 유통되는 “육체성”(Leiblichkeit)에 도달하게 된다. 이 때부터 교환은 이중의 유통으로, 즉 첫번째 유통인 개별 상품들의 흐름과 두 번째 유통인 (“보편적 상품”의 자격으로 수요와 공급이 이루어지는) 보편적 상품의 흐름이라는 반대되는 방향의 이중적 흐름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 두 유통은 이 유통들 각자가 상대편 유통의 “매개항”(moyen terme)으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서로 상관적이다(다시 말해, 상품들은 화폐argent를 매개로 한 7 상품들 사이의 교환을 통해 순환하며, 화폐argent는 상품들이 지니는 교환가치의 대표자로서 순환한다). 하지만 이 상품들은 스스로 자율화될 수 있으며, 특히 유통 중인 화폐(argent)의 양은 생산되고 소비되는 상품들의 양과는 독립적일 수 있다. 그래서 화폐는 “그 자체”가 하나의 부로 나타날 수 있는데, 그러나 정반대로 경제위기 하에서 상품들과 화폐 사이의 고리가 극단적으로 끊어질 경우 급격하게 가치의 평가절하가 발생할 수도 있다.
이 지점에 상품물신숭배에 관한 이론적 발전을 삽입함으로써, 마르크스는 이 두 가지 운동을 정확하게 해명하고자 노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 편으로[(1)], 마르크스는 “화폐물신(fétiche argent)의 수수께끼는 우리 눈에 드러날 정도로 가시화된 상품물신의 수수께끼일 뿐”(p.106)이라는 점을, 그리고 사회적 노동의 생산물이자 노동분할의 결과인 상품들 자체의 유통은 최종심급에서 화폐유통의 표면적으로는 자율적이고 비합리적인 형태들을 결정한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한다. 다른 한 편으로[(2)], 마르크스는 “가치척도로서의 화폐가 상품들이 지니는 가치의 내재적 척도, 다시 말해 노동시간의 필연적인 현상형태(notwendige Erscheinungsform)”(p.107)라는 점을, 그리고 물질적인 독립성(그것이 최소한의 일시적인 독립성이라 할지라도)의 맹아를 담고 있는 이러한 형식의 자율화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회적 생산의 조건들에 대한 재생산이 (최소한 상품사회의 조건들, 더욱 정확히 말해 자본주의적인 상품사회의 조건들이라는 주어진 역사적 조건들 내에서는) 불가능할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고자 한다. 한 편으로[(1)], 마르크스에게는 화폐경제의 “법칙들”이 근본적으로는 상품생산의 법칙들과 전혀 다른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며, 상품생산이 포함하고 있는 수수께끼들 또는 모순들이 (이 모순들이 “경제위기”를 통해 교환의 자유에 이상을 일으키고 그 교환의 목적에 반하는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를 포함하여) “상품형태”를 직접적으로 특징짓는 모순들로부터 출발하여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점을, 또는 노동생산물이 역사적으로 상품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다른 한 편으로[(2)], 마르크스에게 이는 상품유통이 -프루동과 같은 다양한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들”이 믿었던 바와는 정반대로- 화폐추상(그리고 이 화폐추상이 생산해내는 보충적인 추상들, 즉 신용, 불환화폐 등등) 8, 그러니까 사회 전체에 이 추상의 지배(이 추상의 지배는 명백히 자기 자신이 가진 고유한 힘에 기초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를 강제하기 위해 (이 추상의 도구적 기능으로부터 반드시 벗어나 있는) “외부적” 매개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과 관련된다. 이 이중의 운동에 대한 준-현상학적인 묘사는 “상품물신숭배”라는 개념(notion)의 핵심에 놓여 있는 것 같으며, 또한 마르크스의 이론적 발전이 겪는 그 유명한 곤란함을 우리가 명확히 인식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같다 9.
그러므로 “상품물신숭배”는 마르크스의 텍스트의 주변부에 위치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변증법적 “중심”의 가장 가까이에, 다시 말해 (이 논의에 있어 자신에게 가장 핵심적인 모델로 마르크스가 따르고 있는) 헤겔적 모델 내에서의 매개작용(médiation)이 차지하고 있는 바로 그 지점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 이 때부터, 오히려 이러한 마르크스의 이론적 발전이 (“자본”이 제시하는 이론적 맥락에서) 형태 -이 형태 안에서 개인들과 인간 집단들은 보편사의 특정한 계기 또는 국면에 그들 고유의 사회적 소우주와 그들의 상호의존을 서로서로에게 표상한다- 라는 문제, 다시 말해 주체성이라는 문제에 대한 접근법들 중 제일 처음으로 등장하는 접근법을, 그리고 아마도 가장 중요한 접근법을 형성하기도 한다는 점에 놀라서는 안 될 것이다. 사실 마르크스는, 자신의 텍스트에 대한 (끊임없이 다시 시작하기를 멈추지 않은) 엄밀한 재집필 과정 속에서, 최초의 현상(Erscheinung) 형태에 대한 상품의 경험적 무매개성과 “세계시장”을 상품유통 또는 그 구체적 형상이라는 개념(Begriff)이 실현되는 장소 그 자체와 동일한 것으로 만드는 그러한 전개(progression)의 지표들을 활용했다(“세계시장에서 비로소 화폐는 완전한 범위에 걸쳐 상품으로 기능한다. 즉 자신의 현물형태가 무매개적으로 추상적인in abstracto 인간노동의 직접적인 사회적 실현형태가 되는 그런 상품으로 기능한다. 여기에서 화폐의 존재양태는 화폐의 이상적인 개념과 그대로 들어맞는다.” p.160) 10. 그래서 이를 통해 우리는 추상적 존재 또는 감각적 무매개성을 성찰 또는 주체성의 계기를 경유하여 구체적 보편성으로 이끌어가는, 완전히 전형적일 뿐 아니라 자신이 속해 있는 유형 내에서 가장 완벽한 변증법적 전개(progression)를 재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게 된다.
이렇듯 추상적 존재 또는 감각적 무매개성과 구체적 보편성 사이의 일치는 11 마르크스가 이러한 분석 전체에 비판적 기능 -이 비판적 기능은 상품생산의 형태들이 가지는 소외라는 특징(특히 이 상품생산의 형태들이 자본주의적 생산의 형태들이 되었을 때)과 그 역사적 한계를 명확히 밝히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을 부여하기를 원했다는 점에서 역시나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러한 비판은 외재적인 비난이 아니라 바로 사회적 관계 고유의 “논리”에 따라(헤겔이 말했듯이 변증법은 “주관적 사고 외부의 활동”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대신 “내용의 영혼 그 자체”를 표현해야 한다 12) 고찰 대상이 되는 사회적 관계에 고유한 그 형태의 전개를 통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매개작용(médiation)의 변증법적 계기 -이 계기 내에서 최초의 관념은 주체와 대상, 개별자와 보편자 사이의 분리와 상호적 외부성에 의해 소외된다- 는 “소외된 주체성”에 대한 개념화(présentation) 내에 존재한다.
주체성의 형상들: 경제와 법
상품물신숭배론을 “상품형태”의 변증법(또는 상품의 화폐로의 전환)이 지니는 하나의 필연적 계기로 간주한다는 관념은, “자본” 1편이 지니는 형식적 구성의 관점에서 봤을 때 매력적인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이 동일한 텍스트가 가지는 구성의 여러 가지 난점들을 제거하지 못 한 채로 계속 남겨두고 만다.
첫 번째 난점과 관련하여, 우리는 추상적인 수준에서 언급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첫 번째 난점은 바로 이 “변증법”을 “자본”이라는 저작 전체와 결합하는 것이 내포하는 어려움이다. 이러한 난점은 한 세기 이전부터 셀 수 없는 논쟁들을 야기했으며, 또한 이는 (마르크스가 자신의 집필 계획에 따른 “자본” 전체의 플란에 관한 몇 가지 기획들을 우리에게 남겨주었음에도) 이 저작이 미완성인 채로 남아 있다는 점에서 그만큼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다 13. 마르크스는 자신의 이론적 “원환”을 제대로 추적하지 않았다(그런데 결국 우리가 선택한 시작점의 궁극적 의미를 발견하게 될 곳은 바로 이 이론적 원한 안에서이다). 더욱 고약하게도, 마르크스가 추적해야만 했던 길은 여러 가지 모순적인 방식들로 소묘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자본”이 미완성되었다는 사실에는 시간의 부족, 작업의 방대함, 이러저러한 단계에서의 예기치 못 한 어려움, 저자의 완벽주의가 아니라 “구체적 총체성” 또는 “다수의 결정요인들의 종합”으로서의(1857년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의 서문 14) “자본주의 사회”(또는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체)라는 개념에 상관적인 내재적 아포리아라는 원인이 놓여 있다고 사고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물신숭배”에 관한 1편의 이론적 발전이 다양한 사회구성체들에 대한 분류에 대한 논의가, 그리고 (이 사회구성체들의 역사 내에서) 이 사회구성체 고유의 기능과 위치의 메커니즘을 파악할 수 있는 가능성에 관한 논의가 소묘되는 곳에 정확히 위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1편의 이론적 발전은 마르크스의 기획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어떠한 난점을 밝혀내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대로 말하자면, 마르크스가 이 물신숭배에 관한 이론적 발전을 따로 떨어져 있는 “보충적인” 하나의 단편으로 제시했다는 사실은 그가 자신의 두 가지 위대한 “발견”이라고 간주했던 바 -[➀] 가치형태의 “논리”에 대한 해명, [②] 착취 또는 계급적대의 연속적인 형태들에 대한 분석(여기서 이 착취 또는 계급적대는 사회적 노동의 해방으로 이어지는데, 모순적이게도 자본 자신이 이 해방의 도래를 준비하게 된다)- 를 엄밀하게 결합하고자 원했을 때 그가 맞닥뜨려야 했던 반복적으로 출현하는 (“자본” 1권 1편의 바로 한 가운데에, 또는 상품 변증법의 바로 한 가운데에 존재하는) 난점들의 지표로 생각될 수 있다.
하지만 두 번째 난점은 더욱 직접적으로 여기에서의 우리 논의와 관련된다. 이 난점은 물신숭배론과 화폐라는 문제 둘 사이의 관계 자체에 대한 것이다. 한 편으로, 자신의 연구 과정 중에 마르크스가 “물신”이라는 은유를 상품형태 전체로, 그리고 그 지점에서 경제적 범주들 전체로 확장하고 심화하기 위해 현대사회의 “물신”을 화폐와 동일시하는 매우 고전적인 방식으로부터 출발했다는 점을 우리는 이미 지적했다. 다른 한 편으로, 물신숭배에 대한 분석은 화폐(argent)의 특수성을 상품의 기초형태로 “환원”하고, 동시에 이 상품의 모순들을 특수한 추상화 또는 이상성(이 추상화 또는 이상성은 최종적인 분석에서 화폐라는 도구가 “본성적으로” 소유하는 것처럼 보이는 속성 또는 권력과 동일시된다)에 “투사”하는 그러한 이중의 운동을 함의한다고 우리는 이미 지적했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마르크스의 이론적 발전들에 포진하고 있는 어떠한 하나의 문제계가 지니는 핵심을 비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여기서 이 문제계는 물신숭배를 신비로운 것(mystique) 또는 신비함(mysticisme), 더욱 정확히 말해 상품사회에 고유한 “세속적 신비함”과 관계맺도록 한다(그리고 이 신비로운 것 또는 신비함을 단순한 수사학적 형태로 간주하는 것은 정말이지 극도로 환원론적인 사고에 불과할 것이다) 15.
마르크스의 텍스트를 주의 깊게 읽은 독자라면 누구나, 마르크스가 가치의 담지자로서의 “사물”, 달리 말해 상품의 이중적 성격 그 자체, 즉 “감각적이면서 동시에 초감각적인”(sinnlich übersinnlich) 성격 그 자체를 환기시키기 위해 두 가지 용어를 동시에 활용한다는 점을 인지했을 것이다. 한 편으로 마르크스는 비밀 또는 수수께끼라는 용어를 활용하는데, 이 용어는 비밀 또는 수수께끼를 꿰뚫는다, 혹은 비밀 또는 수수께끼의 합리적 의미를 밝혀내려 한다는 점을 뜻한다. 다른 한 편으로, 마르크스는 “신비한 베일” 또는 “환상”(phantasmagorie)이라는 용어를 활용하는데, 이 용어는 마르크스가 합리적 의미보다는 인간 개인들의 정신 또는 영혼에 미치는 암시 효과를 밝혀내려 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신비”라는 단어의 특수한 활용을 통해, 그리고 상품물신숭배와 종교의 역사 사이에서 마르크스가 추적해낸 유비를 통해, 마르크스는 이 두 가지 차원 사이를 연결하는 길을 확보한다. 그러므로 이 종교의 역사 내에서 상품물신숭배는, 사물들 자체 또는 더욱 정확히 말해 초자연적인 기능을 지니게 된 특정한 사물들에 속하는 마법 같은 힘을 신적인 것과 동일시하는 방식으로 되돌아감으로써(그러므로 이는 세계에 관한 “탈주술화”라기보다는 “재주술화”인데, 이 재주술화는 교환관계 전체를 보편적으로 수량화함으로써 그 절정에 달한다), 더욱 추상적이며 -믿음의 세속화라는 점에서, 또는 믿음의 종교로부터 분리되는 과정의 최후 단계라는 점에서- 동시에 역설적으로 더욱 비합리적인 새로운 단계로 나타난다 16. 하지만 사실 이러한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유비는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이 난점을 초래하는 이중성, 다시 말해 마르크스가 동일한 이름으로 지시하는 표현 현상(그 원초적 난해함을 넘어 이해해야만 하는 “언어” 또는 “해독이 필요한 상형문자”)과 상징화 현상(상징화 현상은 이상화의 차원과 육체화의 차원을 동시에 포함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자기의 감각적인 또는 “가시적인” 물질성 내에 무매개적으로 육화하는 이 사물에 속하는 놀라운 힘, 즉 사회적 역량 그 자체는 각자가 이 역량에 대한 전유를 사고하는 것을 가능케 해준다)이라는 이중성을 다른 영역으로 이전시킬 뿐이다 17. 분명, 이상화의 차원이라는 첫 번째 측면은 상품들 사이의 가치비율이 상품들을 생산했던 노동이 구성하는 “사회적 실체”를 표현하는 동시에 은폐하는 방식으로(다시 말해, “기호”의 방식으로) 그 개별성 내에서의 현상형태를 지시하는 것 같으며, 반면에 두 번째 측면은 현상 영역 그 자체 내에서 보편적인 것의 표현(manifestation)으로서의 화폐(argent)를, 다시 말해 특정한 하나의 사물이 어떤 의미에서 자기 자신의 이상성을 제시한다는 사실(이 특정한 사물이 이 이상성을 “보이지 않는 것”의 표현으로서 “보게 만든다”는 사실 - 이것이 바로 그 고유한 “신비로운” 계기이다)을 지시하는 것 같다. 혹은, 첫 번째 측면은 마르크스가 “인격의 객관화”(Versachlichung der Personen)라고 부르는 것을 지시하는 것 같은 반면에, 두 번째 측면은 “사물의 인격화”(Personifizierung der Sache)라고 부르는 것을 지시하는 것 같다(p.129). 만일 우리가 이 지점에서 마르크스가 “자본” 1권의 1편 전체에서 지속적으로 활용하는 사물의 언어라는 은유를 개입시킨다면(그런데 이는 은유인가? 오히려 이는 은유의 가능성 자체에 대해 성찰하는 한 가지 방식인 것은 아닐까?), 첫 번째 측면은 상품들이 기호라는(기호와 같다는) 사실 -인간 노동이 지니는 사회적 성격은 이 기호를 통해 표현된다- 을 지시하는 것 같으며, 반면에 두 번째 측면은 몇몇 상품들이 말하는 주체라는(말하는 주체와 같다는) -데리다라면 환영적 또는 “유령적” 주체라고 불렀을 이 말하는 주체는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버렸거나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원래부터 가지고 있지 않았던 노동자 또는 생산자로서의 인간들에게 목소리를 통해 호명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한다- 사실을 지시하는 것 같다 18 19.
하지만 [‘인격의 객관화’라는 극과 ‘사물의 인격화’라는 극이라는] 물신숭배의 두 측면 사이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러한 분열은 마르크스가 자신의 가장 위대한 발견(상품에서 화폐로의, 또는 경제학자들의 언어로 말하자면 가치이론에서 화폐이론으로의 변증법적 “이행” 20)이라고 항상 자랑했던 이 이행을 작동시키는 과업에 그가 정말로 성공했던 것인지 우리가 의심하도록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이론적 발전의 불확실성이라는 유명한 문제로 또 다시 되돌아오게 된다. 드디어 찾아낸 변증법적 매개작용이 해명해주는 바가, 가치라는 개념(notion) 자체에 부재하고 있는 상징적 요소의 내적 구성을 전제하고 (이 상징적 요소의 도입을 통해) 부르주아 세계의 사회관계 형태에 관한 일반적 해석으로 스스로를 제시하는 것인가, 아니면 매개작용을 여기에서 찾아내야 한다는 곤란함 또는 여기에서 이러한 이행을 “변증법적으로” 작동시켜야 한다는 곤란함 자체가 점하는 철학적 공간 내에서의 전위가 이를 전제하고 제시할 뿐인 것인가? 간단히 말해, “화폐의 기원/발생”(genèse)에 있어 물신숭배라는 허상(illusion) -이 물신숭배라는 허상은 화폐적 상징과 그 상상적 권력 내에 본질적으로 육화되어 있다- 에 대한 비판을 덧붙이는 것은 어떠한 차이를 생산해 내는가? 그리고 이로부터, 마르크스가 종교적 “망상”과 비교했던 이러한 “허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경제형태는 스스로 절대 작동하지 못 할 것이라는 결론을 어느 정도로 확실하게 내려야 하는가? 21
하지만 이 지점에서 이러한 두 번째 난점은 우리를 세 번째 난점으로 인도한다. 우리는 물신숭배 분석이 (현실적이고 동시에 망상적인 표상들의 장 -교환관계 또는 더 낫게 말해 “상품생산” 관계라는 규정된 사회적 관계의 “담지자들”Träger은 이 표상들 내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또한 이 표상들은 개인들과 그들 고유의 사회적 활동 또는 공동작업 사이의 필수적인 매개항으로 삽입된다- 을 전개한다는 의미에서) 주체성에 대한 성찰의 변증법적 자리를 형식적으로 차지했던 순간이 있었다고 지적했다(그런데 마르크스에게 있어 이 매개항은 동시에 “베일”이기도 한데, 이 베일의 존재가 밝혀주는 것은 사실은 베일 자신이 무언가를 은폐하고 있는 채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일 뿐이다…). 하지만 매개작용을 수행하는 이러한 “자리”는 마르크스의 설명에서 지금까지 우리가 전혀 언급하지 않았던, 즉 “자본” 1권 1편의 2장 ‘교환과정’이 대표하는 이론적 발전이 이미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간략하지만 매우 농밀한 이 장은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그 예외 중에는 스탈린적 공포정치의 희생자인 불행한 법학자 파슈카니스가 있는데, 그는 이 장을 부르주아 법을 이론화하는 데 있어 그 기초로 삼았다 22) 마르크스 주석가들의 관심을 별로 끌지는 못 했지만 그럼에도 이 2장 ‘교환과정’의 내용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형식적으로, 마르크스가 따른 전개는 다음과 같다. 1. 상품, 2. 교환, 3. 화폐. 달리 말해, 1. 상품세계의 기초형태, 2. 과정(이 과정 내에서 이러한 기초형태가 구성되며, 또한 이 과정을 통해 이 기초형태가 끊임없이 새로운 대상들 또는 영역들로 확장된다), 3. 자기 자신 안에 형태와 과정의 (역사적이고 제도적인) “구체적” 통일성을 포함하고 있는 개념(이 통일성은 우리가 시장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인데, 마르크스는 특히 이를 세계시장이라고 정확히 지시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마치 형태를 운동하게 만드는 것과 이 형태운동의 역사적 총체화가 기초형태 자체에 “즉자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긴장 또는 모순을 산출하는 것처럼) 이러한 변증법적 전개(progression)를 직접적으로 읽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헤겔에서와 같이 역행적인 방식으로, 그러니까 이를 자신의 종말/목적으로부터 그 기원으로 되돌아오는 운동으로 읽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그러므로 이러한 방식을 따라, 이 운동은 시장의 구조 또는 형상의 전제들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이 구조 또는 전제들은 더 “추상적인 것”에서부터 더 “구체적인 것”으로 나아가면서 점진적으로 자신의 자리를 잡아간다). 이러한 관점에서 “자본” 1권 1편 2장의 내용은 특별히 의미심장해지는데,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주체성의 형상들을, 하지만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우선 이는 마르크스가 교환의 경제적 범주들의 상관물 또는 “반영”의 자격으로 마르크스가 도입한 인격(소유자)과 계약(의지들의 통일성)이라는 법률적 범주들 -이 범주들이 없다면 정확히 말해 교환은 이루어질 수조차 없는데, 왜냐하면 “상품은 혼자 힘으로는 시장에 나갈 수도 없고 또 스스로를 교환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p.96) 23- 이 된다. 그 다음으로 마르크스는 간단한 역사적 스케치에서(또는 오히려 역사적 변화évolution의 일반적 방향을 제시해주는 상품유통의 이상적 발생에 있어서) 어떻게 공동체들 사이의, 그리고 개인들 사이의 교환의 실천이 (화폐argent의 제도화에까지 이르는) 상품형태의 발전을 점진적으로 필연적인 것으로, 그리고 결국에는 비가역적인 것으로 만들었는지를 보여주는 기획에 착수한다. 그러므로 결국 우리에게는 (상품형태가 특수한 행동을 통해, 그리고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집단적인 실천을 통해 사회적으로 지배적인 것이 되기 위해) 구조들 또는 형태들 뿐만 아니라 인간들 또는 더욱 정확히 말해 점진적으로 법률적 인격의 성질을 획득하게 되는, 그리고 이러한 법률적 인격을 통해 상호적인 방식으로 서로를 인정하는 인간들 또한 필요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번에는 더 이상 경제적 관계와 이 관계에 조응하는 표상의 담지자로서가 아니라 법률적 제도들의 언어 내에서 개인화되고 표상된 법적 주체라는 “주체”에 관한 새로운 규정과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주체성의 이러한 두 가지 형상을 연결시켜주는 관계의 본성은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이 두 가지 형상을 서로 경쟁하는 것으로 간주해야 하는가? 아니면 우리는 앞에서 이 “경제적 표상들”의 현상학과 “법률적 표상들”의 현상학(이 경제적 표상들과 법률적 표상들은 구조로서의 시장이라는 관념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을 내적인(그리고 근본적으로는 허구적인illusoire) “의식”의 하나의 형태로서, 또는 제도적 반영으로서(그리고 사유 자체를 위한 사회적 객관성이 주어진 반영으로서) 병치했으므로, 마르크스가 바로 그러한 이유로 (상품적 주체성 또는 상품생산의 사회적 관계를 통해 구성되는 주체성의 보완적인 측면들로서) 이 두 가지 현상학 사이의 절합을 사고하고자 했다고 간주해야 하는가? 24
일반적 등가물의 구성
여기에서는 위에서 살펴본 이 광범위한 질문들을 다루지는 말고(이 광범위한 질문들은 훨씬 더 정교한 분석을 요하기 때문이다), 대신 고유한 의미의 화폐(argent)의 보편성과 이 보편성이 맺는 정치철학의 몇몇 고전적 모델들과의 관계에 대한 이론적 발전이라는 문제에 집중하자 25.
첫 번째 의미로 상품“물신숭배”는 “상품생산양식”에, 다시 말해 사회적 생산을 조직하는 모든 형태(이 형태 내에서 개인들의 필요 노동은 생산자들 공동의 결정이 아니라 생산물 -이 생산물의 교환가치는 그 생산을 위해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의 양을 통해 내재적인 방식으로 “측정된다”- 의 구매와 판매라는 간접적 메커니즘에 따라 서로 다른 부문들과 생산과정으로 분배된다)에 내재하는 것으로 마르크스가 간주했던 “실제적” 관계들이 전도라는 현상을 비교-역사학적 관점 내에서 연극적인 방식으로 제시하고 위치짓는 기능 이외에는 어떠한 다른 기능도 가지지 않는다.
사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이중의 전도 또는 연속적으로 이루어지는 두 가지 전도에 관해 이야기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마르크스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보여주고자 하기 때문이다. 한 편으로, 상품사회 내에서 사회적 노동이 개인적 또는 집단적 생산자들이 독립적인 방식으로 행하는 “사적 노동”으로서만 존재한다는 사실이 있다(여기서 이 생산자들은 서로의 존재를 알지 못 한다). 이 사실로 인해, 양적이고 질적인 측면에서 한 사회가 자신의 재생산에 있어 활용할 수 있는 노동과 그 재생산을 위한 필요 사이의 조응은 직접적인 방식이 아닌 [서로의 존재를 모르는 생산자들 각자가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행하는] 암중모색의 조절을 통해서만 성립될 수 있는데, 이 조절을 가능케 하는 지표는 바로 생산물들의 교환가치라는 “외부의 척도”이다. 마르크스의 관점에서 우리는 전도에 대해 말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최종적인 분석에서 노동과 필요는 사회적 현실로 남아 있으며, 또한 사회는 개인적 실천들 -여기에서 개인적 실천들은 사회의 존속을 위해 필요한 바를 (자신들이 이를 행한다는 것은 전혀 인지하지 못 하면서) 행한다- 의 진정한 “주체”이기 때문이다 26. 하지만 마르크스는 상품의 양적 형태 또는 “가치-형태”, 그리고 특히 화폐형태 내에서 또 하나의 전도가 발생한다는 점을 동시에 보여주고자 한다. 생산자들 간의 상호의존으로 이루어진 사회적 관계들이 인격들 또는 인격들의 집단 -이 인격들이 형성하는 집단 전체는 공통의 이해관계를 가지는 하나의 집합체(collectivité)를 형성한다- 사이의 관계로 제시되는 대신에, 이 관계들은 (상품들 내에 “본성적으로” 속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사회적 속성” -즉 상품들 각각이 서로 교환될 때 따라야 하는 비율을 정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규정된 교환가치- 을 통해) 사물들 자체 사이에서 자생적으로 또는 자동적으로 성립되는 관계들로 제시된다. 더욱이, 이 사회적 속성이 상품의 가치를 측정하고 그 상호관계를 결정하는 능력을 역시 본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화폐(argent)에 집중되어 있을 때, 개인들이 그들 자신의 사회적 존재조건들과 맺는 관계는 외부에 존재하는 객관성의 형상에 완전히 투사되기 때문이다(그러므로 결국 이 관계는 개인들이 자신들 스스로와 맺는 관계인데, 왜냐하면 최종적인 분석에서 이 관계는 개인들의 노동이 그들의 필요의 충족에 기여하는 방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산자들에게는 그들의 사적 노동의 사회적 관계가 사실 그대로, 즉 그들이 노동을 통해서 맺는 인격들간의 직접적인 사회적 관계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인격들간의 물적 관계 또는 물적 존재들간의 사회적 관계로서 나타난다.”(p.83-84) 27
우리가 여기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 사회적 관계의 사적 관계로의 전도 또는 해소라는 관점에서 묘사된 첫 번째 전도, 그리고 인간적 또는 인격적 관계의 사물관계 또는 “객관적” 관계로의 전도라는 관점에서 묘사된 두 번째 전도라는 두 가지 연속적인 “전도”라는 점이 우리 논의에서 결정적이다. 마르크스의 눈으로 봤을 때, 이 두 번째 전도가 자신의 전도 이후 첫 번째 전도를 무효로 만드는 것이 전혀 아님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무효로 만들기는커녕, (역사적이고 물질적인 주어진 조건들 내에서) 왜 물신숭배가 극복 불가능한 것인지, 왜 “수수께끼”, “신비” 또는 “불가해함”(obscurité, 어둠)(이 불가해함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절대적으로 투명한[clarté, 빛] 형태로 제시된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그토록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이 상품에 존재하는 것인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첫 번째 전도이다. 만일 우리가 노동의 사회적 분할 -이 분할 속에서 개인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 사이에서 그들의 노동에 대한 사회적 인정을 “협상”하는 것이다- 만을 다룬다면, 우리는 사회적 유대(lien)가 이 개인들을 위해 그들 스스로가 만든 것으로 보여진다고 계속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는 (개인들이 자신들의 역량과 이해관계를 대면한다는 점을 함의하는) 하나의 계약 또는 하나의 협약의 도식 그 자체이다. 하지만 사물들 그 자체가 사회적 필요성으로, 특히 이 “물신숭배화된” 대문자 사물(이 대문자 사물은 감각적이면서 동시에 초감각적인, 물질적이면서 동시에 비물질적인, 개별적이면서 동시에 보편적인데, 그래서 이 대문자 사물은 강생 신학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떠한 매개도 없이 직접적으로 인간과 신으로 동시에 제시되듯, 또는 유령이 산 자와 죽은 자로 동시에 제시되듯, 어떠한 매개도 없이 직접적으로 “대립물들의 통일”로 제시된다)로 육화하자마자, 개인들은 (개인들이 사물들의 “가치”와 맺는 관계에 의해, 그리고 이 사물들이 개인들에게 강요하는 제약에 의해 항상 결정되는) 그들의 상호관계 속에서 더 이상 사물들 자체의 속성 또는 사회적 역량의 결과 이외에는 그 무엇도 보지 못 하게 된다. 28
바로 이것이 마르크스로 하여금 무엇보다도 역설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는 방식으로 물신숭배를 상품생산의 어떠한 “진실”을 표현하는 것으로 제시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상품생산은 개인들로부터 그들의 사회적 정체성을, 그리고 생산의 집합체에 대한 소속을 실제적으로 빼앗는데, 이러한 의미에서 개인들을 서로 대립하도록 만들고 이들의 공동체에 대한 표상을 자신들 바깥에 위치시키는 상품관계 내에서 “그들의 사적 노동이 맺는 사회적 관계가 생산자들에게 그러한 관계로 나타나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가치가 하나의 사물이라는 물질적 형태로 육화되는 것(이 육화는 그 자체로 사회적 관계이다)은 개인들이 “자신들이 보고 있는 것 이외의 것을 볼” 수 없는, 다시 말해 역사적으로 규정된 사회적 관계 내에서 경제적 삶의 규칙성(또는 경제위기와 같은 파국)에 대해 설명할 수 없는 그러한 불가능성을 의미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또한 마르크스는 고전경제학자들이 주창한 “노동가치”에 관한 이론이 “인류사에서 획기적인 발견”이라고 할지라도(왜냐하면 이 발견은 상품들의 가치를 그 생산을 위해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의 양과 관련지어 사고하기 때문이다), 이 발견이 이러한 외양을 생산하는 사회적 구조를 전혀 변화시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것은 결코 노동의 사회적 성격이 지닌 대상적 외양(gegenständlichen Schein)을 완전히 벗겨낸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p.85) 29. 정반대로, 이 발견은 사물들의 본성(이 발견은 사물들이 가지는 본성을 불변의 법칙이라고 선언하려 한다) 내에 각인된 메커니즘의 장구한 역사적 변화의 결과일 뿐인 것을 제시하면서 이 외양을 강화시킬 뿐이다. 사실대로 말해, 고전경제학자들의 담론은, “노동”을 어떤 때는 내적 결정 또는 가치 “실체”로 제시하려 하고 어떤 때는 다른 여러 상품들 가운데 존재하는 하나의 상품(이 노동의 고유한 보편성이 상품으로 하여금 “가치들의 척도”로 기능하게 만든다 30)으로 제시하려 하는 이 담론의 경향이 보여주듯이, 여기서 과학적 설명과 외양의 재생산 사이를 진동하거나 신비화라는 형태 자체 내에서 탈신비화를 생산할 뿐이다.
마르크스 자신이 직접 제시한 지표들을 따르면서, 우리는 상품사회의 노동분할 그 자체를 대체하는 관계를 사회계약이라는 이름으로 표상할 수 있다(이 사회계약은 암묵적으로 또는 실제적으로 상품들 자체 사이에서 맺어진 것이다). 이 관계가 사실상 “일반적 등가물”(allgemeines Äquivalent) -이 일반적 등가물은 “사물들”의 집단적 행동으로 스스로를 제시한다- 의 구성 메커니즘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등장하는 형상이다. 이 일반적 등가물이라는 개념을 처음 제시하면서부터,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새로이 얻어진 형태[일반적 가치형태 - 원문]는 상품세계에서 분리된 하나의 단일한 상품종류(예를 들어 아마포)를 통해서 상품세계의 가치를 표현하며, 따라서 모든 상품의 가치를 그 상품이 아마포와 같다는 방식으로 나타낸다. 각 상품의 가치는 아마포와 같은 것으로서 이제는 그 상품 자신의 사용가치로부터 구별될 뿐만 아니라 모든 사용가치로부터도 구별되며, 바로 이를 통해서 그 상품과 모든 상품 사이에 공통적인 것으로서 표현된다. 그리하여 이 형태가 비로소 실질적으로 상품들을 가치로 연결시킨다. 바꾸어 말하면 상품들이 서로 교환가치로서 나타나게 만드는 것이다(lässt sie einander als Tauschwerte erscheinene).(p.75) 31
각각의 상품이 하나의 상품 또는 다수의 다른 상품들과의 교환 내에서 고립적인 방식으로 또는 우연한 방식으로 자신의 가치를 표현할 때, “어떤 경우이든 개별 상품이 자신에게 가치형태를 부여하는 것은 말하자면 개별 상품의 사적인 일(das Privatgeschäft)이었으며, 개별 상품은 다른 모든 상품의 도움 없이 이 일을 해낸다.”(p.76) 32 하지만 모든 노동생산물 사이의 교환이 일반화된 결과 모든 가치를 유일한 하나의 사물로 표현해야 하는 필요성, 또는 “일반적 등가물”로 표현해야 하는 필요성이 등장하자마자, 표현의 과정 그 자체는 자신의 본성을 바꾼다.
반면 일반적 가치형태는 상품세계의 공동사업(gemeinsames Werk der Warenwelt)으로만 성립한다. 어떤 상품이 일반적인 가치표현을 획득하는 것은, 동시에 다른 모든 상품이 자기의 가치를 동일한 등가물로 표현하고 또 새로 등장하는 상품 역시 이를 그대로 따르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상품들의 가치대상성(Wertgegenständlichkeit)은, 그것이 순전히 이들 상품의 ‘사회적 현존재’[프랑스어판: être-là social]이기 때문에 오로지 상품들의 전면적인 사회적 관계를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다는 사실, 그래서 결국 상품들의 가치형태는 사회적으로 타당한 형태여야 한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p.76) 33
자신의 분석을 계속 이어나가면서, 마르크스는 일반적 등가물의 형성 메커니즘이 (상품들의 소우주 또는 상품들의 “세계”로부터) 하나의 상품이 추출되도록 만드는 배제의 메커니즘이라고 설명한다. 이 하나의 사물은 가치의 표상을 “독점”하자마자 모든 다른 상품들을 “위해” 가치를 가지게 되거나 표상하게 된다(역으로 모든 다른 상품들은 이 유일한 형태 내에서만 자신들의 가치를 표현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상품들 서로서로가 더 이상 직접적인 방식으로는 교환 가능하지 않으며, 이 상품들이 일반적 등가물과 맺는 관계(심지어 순전히 “이상적인” 관계)의 매개를 통해서가 아니라면 더 이상 교환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의미한다(다르게 말하자면 이 관계는 일반적 등가물의 객관적 언어 내에 존재하는 그들의 “공통의 척도”인데, 이를 실행하는 것이 바로 화폐argent이다).
끝으로 마지막 형태, 즉 제3형태는 단 하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상품세계에 속하는 모든 상품이 일반적 등가형태에서 배제되기 때문에, 또 반드시 그럴 경우에만, 상품세계에 보편적이고 사회적인 상대적 가치형태를 부여한다. 따라서 아마포라는 한 상품이 다른 모든 상품과 직접 교환될 수 있는 형태를 취하거나 직접적으로 사회적 형태를 취하는 것은 다른 모든 상품이 이 형태를 취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고, 또 반드시 그럴 경우에만 가능하다.(p.78) 34
그 시작에서부터 상품의 형태 자체에 내재하는, 그리고 사회적 부의 “기초형태”로서 각각의 상품 내에 존재하는 이중성을 언급함으로써 우리가 여전히 표현할 수 있는 바는 개별적 특징(규정된 필요에 조응하는 물질성과 유용성)과 보편성(상품을 다른 모든 것과 비교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사회적 노동생산물의 특징)이라는 이중성이 이제 분리되었다는 점이다. 각각의 상품이 다른 모든 상품들과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것 또는 모든 다른 상품들에 대해 상대적인 “등가성”을 이 상품을 위해 표상하는 역할을 맡자마자 마치 각각의 상품이 자신의 일반성을 추출하고 (이 일반성을 “등가성”을 지닌 하나의 유일한 상품에 전달하기 위해) 자신의 바깥으로 투척하듯이 말이다.
하지만 물신숭배에 대한 설명 이후, 마르크스는 이러한 보편화가 상품들 자신들의 행동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항상 이미 이 보편화는 (고유한 의미에서의 역사적인 “선행성”보다는) 구조적인 “선행성” 내에서(물론 우리가 이 선행성의 흔적을 역사에서 발견할 수는 있지만) 인간 소유자(또는 생산자-교환자)의 등 뒤에서, 그리고 이 보편화가 상품들에 지시한 운동을 매개로 해서 진행된다.
상품소유자는 누구나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사용가치를 가진 다른 상품들에 대해서만 자신의 상품을 양도하려고 한다. 그런 점에서 교환은 그에게 그저 개인적인 과정에 불과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는 자신의 상품을 가치로서 실현하고자 한다. 즉 동일한 가치가 있는 다른 상품의 소유자라면 누구하고라도 -그 사람이 자신의 상품에 대하여 사용가치를 갖든 갖지 않든 개의치 않고- 가치를 실현하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제 교환은 그에게 일반적인 사회적 과정이다. 그러나 동일한 과정이 모든 상품소유자들에게 동시에 개인적일 수만도 없고, 또 동시에 보편적이고 사회적일 수만도 없다. (…) 우리의 상품소유자들은 파우스트처럼 낭패스러운 고민에 빠진다. 태초에 행동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생각하기에 앞서 벌써 행동을 해버렸다. 상품의 성질에서 비롯되는 법칙은 상품소유자들의 타고난 본능을 통해서 관철된다(betätigten sich)[프랑스어판: s’actionnent]. 그들은 자신의 상품을 일반적 등가물로 다른 어떤 상품과 비교함으로써만 그것을 가치관계 속으로, 또 그럼으로써 상품간의 관계 속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 우리는 상품의 분석을 통해서 이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오직 사회적 행위만이(gesellschaftlich Tat) 어떤 상품을 일반적 등가물로 만들 수 있다. 즉 다른 모든 상품의 사회적 행동(gesellschaftlich Action)이 어떤 특정한 상품을 따로 떼어내어, 이 상품을 통해 다른 모든 상품이 자신의 가치를 표시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이 상품의 현물형태는 사회적으로 유효한 일반적 등가형태가 된다. 일반적 등가물이 되는 것, 그것이 사회적 과정에서 따로 분리된 이 상품의 특수한 사회적 기능이 된다. 그리하여 그 상품은 화폐가 된다.(p.98-99) 35
여기서 우리는 “자연법” 전통 속에서(마르크스는 스피노자, 로크, 루소에 대한 독해를 통해 자연법 전통을 직접적으로 알고 있었거나, 또는 헤겔에 대한 비판을 통해 이를 간접적으로 알고 있었다) 고전주의 시대 철학자들이 발전시켰던 “계약” 형태의 전형적인 세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로, 사회적 보편성은 개인들의 공통행동의 생산물(그러므로 이는 그들의 결정 또는 의지의 산물인데, 하지만 이 결정 또는 의지는 “암묵적”일 수도 있으며 심지어는 이것이 진정으로 원초적인 계약일 때에는 필연적으로 암묵적이어야만 할 수도 있다)이다. 그런데 역으로 이 사회적 보편성은 개인들을 사회체의 구성원들(“시민들”)로 규정하는데, 다시 말해 이 사회적 보편성은 개인들의 상호인정(또는 그들의 “평등성”)을 보장해준다. 두 번째로, 이 공통행동은 사회적 개인들의 표상권력을 정립한다. 이 표상권력은 개인 내에서 (또는 개인의 “육체” 내에서) “이상화”됨과 동시에 “육화된” 것으로, 이로 인해 개인은 이 개인이 사회를 초월하는 한에서 사회에 속하게 되며(다시 말해, 개인은 사회에서 배제되는 한에서 사회에 포함된다), “이중의 육체”(신학으로부터 물려 받은 유산으로서 세속화된, 그리고 신체적인 동시에 정신적인 “신비한 육체”)라는 형상 내에서 스스로를 제시하게 된다. 마지막 세 번째로, 이 전체 과정은 선가정(présupposition)의 논리적 도식에 종속되어 있는데, 왜냐하면 이 과정의 결과 -시민적 또는 사회적 공동체에 대한 인정, 개별 존재와 이해의 보편성으로의 이행- 는 항상 이미 이 인정 또는 이행의 실현 조건(최소한 “자연법”이라는 또는 암묵적 의도라는 형식적 필연성으로서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 계약에 대한 마르크스의 개념화(우리에게 보여지는 바 그대로의 개념화) 또는 계약-형태에 대한 마르크스의 변형태에 매우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이해당사자로 계약에 참여하는 “개인들”이 인간 개인들이 아니라 개별상품들이라는 사실, 그리고 우리가 여기서 다루고 있는 바로서의 “행동”이 상품들의 행동(또는 최소한 상품형태의 단순한 담지자로서 상품 유통의 논리를 실행할 뿐인 인간들의 행동)이라는 사실이다. 이제부터 여기서 개념화되는 “사회”는 인격들의 사회가 아니라 생명을 얻어 살아 움직이게 된 “사물들”의 사회로 간주되어야 하며, 이 사회를 설립하는 “계약”은 상품들의 진정한 사회계약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자본” 1권의 첫 번째 프랑스어 번역본(마르크스가 전체를 재검토했던)에 등장하는 “위대한 상업공화국”에 대한 마르크스의 참조를 이러한 의미로 해석해야 하는 것 같다.
상품들의 가치가 보편적으로 실현되는 것은 바로 국가들 사이의 무역에서이다. 그리고 또한 바로 여기에서 이 상품들의 가치 형상이 제임스 스튜어트(James Steuart)가 그렇게 불렀듯이 보편적 화폐-세계의 화폐(money of the world)라는 상 아래에서, 또는 스튜어트 이후 아담 스미스가 그렇게 불렀듯이 거대한 상업 공화국이라는 상 아래에서 서로를 마주하는 것이다… 36 37
이러한 “공화국” 안에서는 무엇보다도 상품들 자신이 바로 “시민들”이다! 38
하지만 이러한 재구성에 우리가 완전히 만족할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이 재구성은 정확히 “신비함” -이 신비함은 (물신숭배에 대한 마르크스의 서술에서) 그의 서술이 신비 그 자체(simple mystère)를 무매개적인 방식으로 이상적 물질성 또는 이상화된 물질성[즉, 화폐] 내에서 보여준다는 조건에서 도입되는 것이다- 이라는 요소를 무시하기 때문이다(데리다라면 “유령적” 요소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런데 마르크스의 서술에서, 이 대체보충물은 특히 화폐가 생산하는 효과로, 또는 더욱 정확히 말해 단순한 일반적 등가성(원리상, 모든 상품들이 마련해주는 “배제된 상품”의 빈 자리를 차지하는 한에서 어떠한 상품이든 일반적 등가물이 될 수 있다)과 고유한 의미에서의 화폐(화폐는 자신의 역사적 특이성 내에서 귀금속의 “육신”으로 물질화[육화]된다) 사이의 “형태” 차이로 특징지어지는 것 같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명해야 하는 것은 상품들의 “유통화”(mise en circulation, 유통 또는 순환하게 만드는 것)가 가지는 실제적 또는 실천적 역량과 동시에 그 상상적 역량(또는 더 낫게 말해, 상상에 미치는 그 역량)으로서 화폐가 가지는 특수한 권력(pouvoir)인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특수한 역량이 “단순상품”에 대해(심지어 모든 단순상품들의 보편적 형태로 개념화된 추상적 단순상품에 대해서도) 행사하는 화폐의 (이 용어의 서로 다른 의미에서의) 초과권력(excès de pouvoir)으로 제시된다는 점을 앞으로 확인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초과권력을 설명에 추가하는 것이 상품의 사회계약이라는 “평등한” 도식을 전복시키킬 수도 있다는 위험, 그리고 “상업공화국”을 화폐의 왕국 또는 화폐의 지배로 대체할 수도 있다는 위험이 분명히 존재한다(그럴 경우 이러한 화폐의 왕국 또는 지배의 기원은 최종적인 분석에서 설명 불가능한 것으로 남을 것이다). 이것이 아마도 여기에서 마르크스의 설명을 모호하게 만드는 지점일 것이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의 설명은 한 편으로 “화폐의 권력” -이 화폐가 가지는 권력은 상품들이 위임한 것에 불과한데, 왜냐하면 화폐의 모든 경제적 기능은 일반적 등가물이라는 개념으로부터 산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을 상품들 자체의 권력과 연결하려는 시도와 동시에, 다른 한 편으로 화폐-형태가 담지하는 것(이는 다른 상품들이 형성한 “사회”로부터 배제된 하나의 상품이 지니는 단순히 “기능적인” 개념으로는 환원될 수 없다)을 보여주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가성은 (물신숭배론을 따랐을 때) 우리가 여기에서 사회적 외양(apparences)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로 전혀 환원되지 않는다. 정반대로, 이 외양들 자체 사이에서 (일종의 겹침redoublement을 통해) 이 두 형태들 중 어떠한 한 형태가 다른 한 형태의 “진실”로 간주되어야 하는지의 문제,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상품의 유통이 최종적 분석에서 “실물경제”로 간주되어야 하는지 또는 “화폐경제”로 간주되어야 하는지(이 실물경제와 화폐경제는 끊임없이 경제학자들을 고통스럽게 하면서 이들을 이쪽 편 아니면 저쪽 편으로 대립하게 만든다)의 문제가 제기된다 40.
비록 마르크스가 (경제학자들과 동일한 지반 위에서) 첫 번째 해석을 채택하기 위해(즉, 모든 형태의 화폐주의에 반대하기 위해) 특정한 방식으로 입장을 취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그는 본질적으로 화폐형태가 상품들의 가치-형태에 대한 단순한 “일반화”는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41. 화폐는 그 자신이 교환가치를 가지는데, 이 화폐의 교환가치는 화폐로 하여금 모든 다른 상품들과 교환 가능하도록 해주는 것이다. 상품들의 교환가치와 마찬가지로, 화폐의 교환가치는 “최종심급에서” 화폐의 생산에 대한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화폐가 상품-형태와 상품들의 세계 “내에” 존재한다 -화폐는 이 상품들과 함께 유통된다- 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에서, 화폐만이 “즉자적” 가치를 육화하기 때문에, (그래서 결과적으로) 화폐만이 가치들의 보편적 척도이며 모든 상품들의 지불수단이기 때문에, 상품들은 화폐의 도입에 의해서만, 또는 화폐의 보편적 구매력의 작용에 의해서만 현실에서(effectivement) 유통될 수 있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에서 마르크스가 주장했듯, 화폐만이 “보편적 필요”의 대상이 된다 42. 하지만 개인들이 시장에서 판매하려는 목적에서만 생산을 하는 사회에서, 하나의 상품은 이 “보편적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목적을 위해서만 공급된다. 보편적인 상품유통이 필연적으로 화폐적일(monétaire) 뿐만 아니라, 상품들(과 그 가치)의 “사회적” 성격 또한 화폐와의 접촉을 통해서만 자신을 나타내며, 바로 이 화폐의 매개를 통해(또는 최소한 미래에는 화폐로, 또는 지폐와 같은 화폐의 대리물로 이루어져야 하는 구매와 판매과정의 “정산”에 대한 참조가 예상 가능해야만) 상품들은 현실의 운동 과정 속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화폐의 사회적 역량의 자율화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발전을 통해 극대화될 것이다. 왜냐하면 화폐의 축적으로부터 출발해서, 그리고 화폐 축적의 끝없는 증가를 목적으로 해서, “생산요소들”에 대한 구매와 판매의 작동 전체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43.
우리는 마르크스의 분석에서 화폐의 초과권력이 존재하는 세 가지 이유를 발견할 수 있는데, 초과권력은 이 세 가지 이유를 유일하게 자신의 본성으로부터만 끌어내는 것으로 보이며, 또한 이 세 가지 이유는 현실에서 유통의 기능들과 관련을 맺고 있는 것 같다. 첫 번째 이유는 화폐형태를 띠고 있는 일반적 등가물의 결정작용(cristallisation)이 세계시장의 실제 형성에 조응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일반적 등가물의 형태가 잠재적 보편성 내에 개별적인 모든 상품들을 위한 (그리고 이 모든 개별 상품들을 생산하는 노동들을 위한) 등가형태 -이 등가형태 확장의 한계는 정해져 있지 않다- 를 소묘한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에 현실에서 화폐는 구체적으로 보편적이다(“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는 “금과 은이 그 화폐 개념 내에 자신들의 존재에 대한 가능성이 달려있다는 점에서 세계시장을 창조하는 것을 돕는다”라고 설명했다. 왜냐하면 이 화폐 개념은 어떠한 국경에 의해서도 제한받지 않으며, 이 화폐 개념은 “공동체적” 표상과 연결된 모든 제한을 위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물신숭배 분석의 용어들을 미리 제시하면서,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는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금과 은의 이러한 마법과도 같은 효과는 부르주아 사회의 유년시절에 제한받지 않는다. 이 효과는 상품세계의 행위자들이 자신들 고유의 사회적 노동을 통해 획득한 완전히 전도된 이미지로부터 필연적으로 산출되는 것이다. 19세기 중반에 금광이 가득한 새로운 나라들을 발견한 것이 세계 무역에 미친 엄청난 영향력이 그 증거이다.” 44) 두 번째 이유는 화폐(argent)가 역사적으로 귀금속으로 육화되고 결정된 “물질”을 정확히 의미하는 한에서, 이 화폐만이 “탈물질화” 될 수 있다는 점, 다시 말해 [사람들 사이의] 협약에 따라 “화폐적 기호”로 유통 내에서 표상될 수 있다는 점이다(지폐, 신용장, 수표 등등) 45. “자본” 1권 1편의 3장에서 마르크스는 이러한 변형이 국가의 개입과 그 “화폐주권”의 제도화를 요구한다고 설명한다 46. 그러므로 이러한 변형은 화폐에 대한 이전의 표상과는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화폐의 존재는 세계시장에 달려 있는 것인데, 그러나 세계국가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곤란함은 우리가 현실에서 “상품들의 사회”는 국경없는 세계공간으로서의 “보편적 상업공화국”과도, 순수한 국민적 공간과도 동일하지 않으며 대신 세계시장의 한 가운데에 존재하는 국가주권들 사이의 결합과 동일하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다면 금방 해결된다 47. 그러므로 마르크스가 묘사한 화폐의 물질화-탈물질화-재물질화의 이중적 과정은 세계시장의 제도로서의 국가, 그리고 개별적인 주권들(이 개별 주권들 각각의 역량은 이 주권들이 세계의 한 부분에 자기 고유의 화폐 표상을 강제할 수 있는 능력을 얼마나 소유하고 있는지에 따라 “측정된”다)의 지양 또는 상대화로서의 국가가 구체적으로 출현하는 형상과 조응한다.
반면 상품들의 사회계약이라는 형상은 일반적 등가물의 형태로부터의 화폐의 자율화를 표현하는 세 번째 결정요인[위에서 말한 세 가지 이유 중 마지막 세 번째 이유]을 통해 자신의 유효성의 한계에 도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세 번째 결정요인은, 직접적으로는(immédiatement) 계약의 “이해당사자”가 아닌 상품들마저도 창조해낼 수 있는 화폐의 능력인데, 왜냐하면 상품들은 애초에는 사회적 노동 또는 분업화된 노동부문들의 생산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다시 말해, 동일한 비유를 계속 따라가 보자면, 이 화폐의 능력은 상품들의 공화국에 “새로운 시민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러한 능력은 “자본” 1권 1편에서, 또는 조금 더 넓은 시각에서 보자면 “자본” 1권 전체를 통해 마르크스가 상기시키는 두 가지 방향을 따라 주로 행사된다 48한 편으로 “허구적” 상품 -이 허구적 상품들이 노동의 생산물이 아니라 생산 전체의 가능조건을 형성하는 자연적 대상(무엇보다도 물, 땅 공기, 광석 등등과 같은 [자연적] 요소들의 경우가 그러하다)의 전유 또는 독점으로 인해 유통 과정에 편입된 것이라는 점에서 이 허구적 상품의 가치는 소위 “비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의 구성이라는 방향이, 다른 한 편으로는 더욱 심원한 수준에서, 다시 말해 가치의 “실체” 그 자체에 더욱 가까운 수준에서, 자연적 대상과 마찬가지로 인간 “노동력” 또한 상품으로 변형(이는 개인들이 자신에 대한 사용을 화폐argent와 교환할 때에만 가능한 것인데, 이 화폐라는 수단을 통해 교환 이후에 개인들은 자신들의 생존수단들을 시장에서 획득한다)된다는 방향이 존재한다 49
그러므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으로 인한] “사회적 노동자”의 해체는, 자신의 “초자연적 역량”이 인격을 사물로 변형하는 그 화폐의 능력, 또는 최소한 인격과 사물 사이의 구분(이 구분을 통해 생산자는 자기 고유의 노동력의 “소유자”, 또는 자신이 “자유롭게” 양도할 수 있는 노동력으로서의 그 육체와 정신의 “소유자”로 나타나게 된다)이 개인성 자체의 한가운데에서 발생하도록 만드는 그 화폐의 능력을 통해 드러나게 됨과 동시에, (각 개인의 노동능력의 재생산 내에서 그리고 각 개인의 생산과업의 활용 내에서) 각 개인이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의 매개항이 되는 화폐의 매개작용을 통해 표현된다(exhibée) 50. 여기서 우리는 화폐가 세계적 유통수단이라는 외연적 보편성(universalité extensive)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또한 (상품형태가 자신의 지배 바깥에서는 “그 무엇도” 살아남을 수 없게 만들면서 상품에 대한 최초의 정의에 포함되지 않는 대상들까지도 포함하여 51 잠재적 대상들 전체를 내포한다는 점에서) 내포적 보편성(universalité intensive)의 행위자가 되기도 한다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상품생산이 (다른 모든 생산양식들을 파괴하거나 흡수하면서) 세계 전체로 확장된다고 말할 수 있다는 점을 의미하는, 하지만 또한 상품-형태는 하나의 세계를 구성하거나 세계를 구성하는 하나의 형태(“사물들”의 지배 하에 놓인, 다시 말해 “환영들”fantômes의 지배 하에 놓인 인간과 사물의 총체성이라는 하나의 형태)를 표상한다는 점을 의미하는 그러한 의미 지표를 가지게 된다 52.
후기: 상호-객관성
위에서 우리가 수행한 분석을 근대 주체성의 문제설정에 관한 탐구 내에, 특히 이 문제설정이 헤겔의 명제들과 맺는 관계 내에 더 잘 위치짓기 위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언급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53.
1) 첫 번째로, “상품의 사회계약”이라는 이름으로 소묘된 구조가 “상호-주체성[주관성]”이 아니라 오히려 “상호-객관성”의 형상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왜냐하면 바로 대상들(상품들) -사회적 노동의 역량을 담지하는 대상으로서의 상품들- 의 수준에서 알튀세르가 “사회효과”(effet de société)라고 불렀던 효과를 생산하는 관계들이 정립되기 때문이다 54 55. 하지만 여기에서 즉시 이러한 상호-객관성이 그 자체로 주체성의 양식 또는 주체의 구성을 형성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이는 주체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진다”(devenir étranger à soi, Entfremdung)는 의미에서 마르크스가 “소외”라고 부르는 것이다. 소외된 주체성은 그럼에도 엄연히 하나의 주체성이다. 아마도 심지어 이 주체성은 역사적으로 이 개념(notion)을 일반화했으며 이 개념에 존재론적 유효범위를 부여했던, 주어진 사회적 구조 내에서 전형적인 주체성이기까지 할 것이다. 이제 이 상호-객관성 -마르크스는 이 상호-객관성의 구조를 역사적 관점에서 기술하고 해석했다- 이 “사물”이라는 범주와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 “인격”(personne)이라는 범주와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질문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여기서 우리는 마르크스의 텍스트 내에서 “인격”에 대한 참조가 가지는 모호성과 맞닥뜨리게 된다. 한 편으로, 인격이라는 범주는 소외에 선행하는 주체들(그러니까 실제로는 상품관계들)에 적용되거나 또는 정반대로 소외에 대한 (잠재적인) 지양으로부터 출현하는, 다시 말해 주체들의 “사회적 관계들”이 사물들 사이의 관계라는 형태로 “전도되어” 나타나는 과정 외부에 있는 누군가에게 적용된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특히 “자본” 1권 2장, 즉 “교환 과정” -나는 위에서 이 장 전체가 헤겔적인 의미의 “추상법”이라는 범주들 위에 기초하고 있음을 상기시켰다- 이 설명하듯) “인격”은 사물의 물신숭배의 또 다른 면을, 즉 상품 유통에 필수적인 소유와 교환의 권리에 의해 형상화된(configuré) 인간의 “분신”(인간적인 분신이라고 말하지는 않더라도)을 지시한다. 이것이 내가 “사물의 물신숭배”와 평행하는 “인격의 물신숭배”에 대해 언급했던 것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마르크스에게 있어 인격의 물신숭배는 사물의 물신숭배의 한 측면일 뿐이다. 물론 이러한 모호성(amphibologie)을 계속 유지할 수는 없다. “인격”이라는 범주의 의미들 중에 우리는 하나의 의미 또는 다른 하나의 의미를 선택해야 하며, 마찬가지로 여기에서 제시된 소외의 현상학의 두 가지 가능한 독해들 중 하나 또는 다른 하나에 유리한 방식으로 선택을 해야만 한다. 만일 우리가 “인격”을 소외로부터 자유로운 주체성(상품 교환의 일반화에 선행하는 것이든 후행하는 것이든)으로 부르기로 선택한다면, 우리는 (이론적으로) 탈소외된 사회성 -이 탈소외된 사회성 안에서 순수한 “상호주체성”이 부정의 부정을 통해 상호-객관성을 희생시키는 방식으로 재구성될 것이다- 을 다룰 수 있는 수단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인격”을 (마르크스가 다른 곳에서 언급하듯) “상품의 사회계약”이 규정한 기능들을 이행한 주체들이 담지해야 하는 “법률적 가면”으로 간주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어떠한 탈소외도 언급하지 않는 것이며(최소한 이러한 표상구조의 출현이 가지는 역사적 조건들 -이 역사적 조건들은 이러한 표상구조를 필연적으로 형성할 뿐만 아니라 이 표상구조에 그 한계를 부여하기도 한다- 이 정확히 규정되지 않을 만큼 오랜 시간동안), 대신 우리는 어떠한 구조의 주체-효과를 분석하는 것이다 56. 이러한 두 번째 가능성은 첫 번째 가능성만큼이나 역시 비판적인데, 왜냐하면 이 두 번째 가능성은 예속화(assujettissement)의 논리를 드러내면서도 훨씬 덜 “혁명적”이기 때문이다. 부차적으로 또 하나 지적하자면, 이 두 번째 가능성은 마르크스의 구축물의 (개념적인) 이론적 결과를 가장 잘 기술한다는 점을, 하지만 그럼에도 마르크스가 의식적으로 증명하려 노력했던 바와는 조응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자. 아이러니하게도 “이성의 간지”는 철학적 글쓰기에서도 작동할 수 있는 것이다…
2) 두 번째로, 우리는 마르크스적 “사회계약”이 사회계약의 고전적 모델들과 가지는 유사성이라는 문제로 돌아와야 한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우리는 (주권의 기원/발생과 그 “절대적”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 홉스가 최초로 구축했던) “총체적 소외”의 문제설정 내에서 루소가 수행한 “전도”를 특별히 중심적으로 고찰하는 더욱 정교한 해석을 이 마르크스적 사회계약에 부여해야 한다. 내가 위에서 제안했듯이, “인격”이 “사물”로 예속화되는 바를 포함하는 방식으로 마르크스가 제안한 Tun aller und jeder 57의 현상학(이 현상학에서 “인격”은 “사물”로 전환된다)은 허가라는 (구조적) 과정(이는 상품들의 사회에서 하나의 상품을 “착출”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일반적 등가물의 구성 과정인데, 이러한 구성은 일반적 등가물로서의 하나의 상품을 통해서만 배타적으로 교환되겠다는 상품들 전체의 동시적 결정에서 기원한다), 그리고 이 과정의 뒤를 이어 나타나는 표상 과정(이는 일반적 등가물 -일반적 등가물이라는 것은 순수한 기능일 뿐이다- 이 화폐argent의 “육신” 내에서 육화 또는 물질화되는 것인데, 이 육화 또는 물질화는 이 일반적 등가물이 보편적 수요의 대상으로 자신을 자율화하고 새로운 상품들을 창조할 수 있는 자신의 고유한 권력을 발전시키는 과정과 동시에 행해진다)을 기술함으로써 시작된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루소에서 홉스로 거슬러 올라가는 패러다임적 역행을 작동시키는데, 이는 (헤겔과 관련하여 - 그런데 헤겔의 Sache selbst 58의 모델들 중 하나는 루소적인 “일반의지”였다) 주권의 신비롭고 환상적인 상상적 역량(바로 “물신”이라는 이름이 이 주권의 상상적 역량의 이름으로 꼭 알맞은 것이다)에 대한 자신의 강조와 조응하는 것이다. 이렇듯, 주권의 구성을 (의지 또는 의식conscience의 효과보다는) “사물들이 가지는 초자연적 권력”이라는 표상과 연결짓는 심원한 친화성을 정교하게 이론화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마르크스가 소묘했던 바가 상품의 사회화가 취하는 “민주적” 도식(이 도식 안에서는, 심지어 자율화된 경우라 할지라도, “모든 것”의 권력은 집합적 구성의 표현 이외에 다른 것일 수 없다 59)에 여전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만큼 놀라운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우리는 마르크스가 설정했던 비판적 목표(그리고 심지어는 “탈소외”의 정치라는 의미에서 정치적 목표)와 관련해, 이전의 것과 유사한 애매성 또는 모호함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상호-객관성의 구성을 떠받치는 허가와 표상의 과정을 명확히 해명함으로써) “물신”의 매혹을 제거하고 어떤 의미에서 지적인 방식으로 주체들을 “사물” -주체들이 타자와 맺는 관계를 독점하기 위해 이 관계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는- 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인가? 혹은 이는 사회적 노동이 교환에 종속된다는 사실 또는 노동의 사회적 유용성이 “가치형태”로 표현된다 -화폐(argent)는 이 가치형태의 필연적 전개를 구성한다- 는 사실로부터 산출되는 준-초월론적인 허상(illusion)의 효과들에 대한 연역을 통해 (상품 교환의 지양을 통해 만들어질) 자유와 연대(또는 이 둘 사이의 상호 인정)를 상상하게(그리고 이러한 상상을 넘어 꿈꾸게…) 만드는 것인가? 이러한 양자택일은 마르크스 자신의 지표들을 따라 물신숭배에 대한 분석을 상품사회와 공산주의 사회 사이의 차이라는 문제설정과 연결짓는다면 전혀 부차적인 문제가 아닐 것이다.
3) 바로 이것이 정확히 나의 세 번째 언급 대상이 되는 것이다. 세 번째 언급은 공동체와 보편적인 것 사이의 관계에 대해 마르크스가 제기하는 질문에 영향을 미치는 (그리고 바로 이 수준에서 작동하는) 비결정성에 관한 것이다. 분명히 이 질문은 마르크스에게 있어 적지 않게 집요한 질문이었으며, 또한 “모순들의 지양”으로 향하는 변증법적 전개(progression)의 방향설정을 위해 적지 않게 결정적인 질문이었다(하지만 마르크스와 달리 헤겔에게는, 특히 “정신현상학”의 헤겔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헤겔에게 있어 “공통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이 반정립적인 두 개의 극 -Wir(“우리”)라는 극과 Sein(“존재” 또는 “범주”)라는 극- 과 같은 것(상호-주관성은 이 두 개의 극 사이에서 움직인다 60)인 반면에,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이는 두 가지 보편성 사이의 경쟁으로 나타나는 “역사의 종말/목적”이라는 관념과 관련되는 것처럼 보인다. 첫 번째 보편성은 (모든 “사회” 또는 “사회성”은 아니라고 해도) 모든 현실적 공동체로부터 근원적으로 배타적인 보편성(이는 상품들의 유통과 생산에 고유한 보편성인데, 그 “매개체”는 화폐, 다른 말로 표현하면 추상노동들 사이의 일반화된 양적 등가성의 물질화이다)이며, 두 번째 보편성은 “생산작업의 합리적 조직화”, 그리고 주체들 사이에서의 노동과 그 노동생산물의 분배 메커니즘의 “투명성”으로 구성되는 진정한(authentique) 공동체의 실현과 동일시되는 보편성이다. 우리가 이러한 두 가지 보편성 사이의 경쟁을 보편성과 공동체 그 자체 사이의 확정적 분리와 다시 연결시킬 수도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보편성이 표상적 추상화와 분리 불가능한 것으로 사고되고 이와 반대로 공동체가 구체적으로 보편적인 것(이 보편적인 것 내에서 “공통적인 것”은 모든 개인을 다른 개인들과 관계 맺도록 해주는 자유와 평등의 법칙 그 자체이다)에 대한 추구의 극단으로 사고되는 한에서 말이다. 하지만 어쨌든 우리는 공통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 사이의 변증법의 “해소” -이는 헤겔에서와 같이 두 항 사이의 점증하는 구분 불가능성 위에 기초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두 항의 제거 불가능성 위에 기초해 있는 것이다- 에 도달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최소한 헤겔의 몇몇 텍스트에 있어서는 -특히 무엇보다도 이러한 변증법적 운동의 “객관적인” 국가적 종합을 제시하지 않도록 경계하며 그 대신 공동체에 대한 아포리아적이고 비극적이며 동시에 신비로운 형상(이 형상의 원동력은 개인들을 상징적 죽음, 그리고 이 상징적 죽음이 약속하는 화해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61으로 이어지는 “정신현상학”이 그러하다- 이러한 “근접성”(proximité)이 어떠한 의미에서는 속임수이거나 또는 결여(역사는 이 결여의 충족을 무한히 지연시킨다)를 은폐한다는 점 또한 알고 있다. 정반대로, 마르크스에게 있어 역사는 아마도 믿음이라는 행위를 통해서만(또는, 그다지 다른 것은 아니지만 [1] 계급투쟁, [2] 상품형태를 인간들 그 자체의 재생산으로 확장하는 것에 기초해 있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내적 모순의 발전, 마지막으로 [3] 노동의 집산화와 관련하여 “공리주의적” 반경향에 대한 “사회주의화” 경향의 장기적 관점에서의 우위, 이 세 가지가 만들어내는 “필연적” 효과들을 변증법적 전제로 간주함으로써) 보편적인 것의 두 가지 양태 사이에서 더 이상 동요하지 않고 이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가지 아포리아 중 어떤 아포리아가 다른 아포리아보다 (이 아포리아라는 단어의 고유한 의미대로) 더욱 유지하기 불가능한 것인지를 밝혀내는 문제는 분명 논리적 증명에 속하는 문제는 아니다. 이 두 가지 아포리아 모두를 고려한다면, 이 아포리아들이 또한 공통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을 정의하기 위한 새로운 양식을 요청할 수도 있을 것이다(그리고 “주체”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이 양식에 대응될 수밖에 없다) 62. [끝]
[옮긴이]
헤겔의 추상법과 마르크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을 위해, 발리바르의 논문 ‘미셸 푸코의 반-마르크스’의 한 절을 번역하여 인용해 보겠다.
헤겔로부터 출발하는 두 가지 양립불가능한 인간학
나는 이 글의 처음에서부터 내가 예고했던, 마르크스와 푸코 사이의 시련[갈등]의 지점 또는 환원 불가능한 양립불가능성의 지점(이 지점은 푸코-마르크스적인 “종합” 안에서 이 종합의 한계를 드러내고 그 단순화를 거부하며, 또한 둘 사이의 불균형적 연역[즉, 푸코 또는 마르크스의 사상을 불균형한 방식으로 마르크스 또는 푸코의 사상으로부터 도출하려는 오류]을 범하지 않기 위해 이 종합이 항상 되돌아오도록 만들어야 하는 장소이다)을 특정한 이론적 장 내에 위치 짓고자 하는 이 글 전체의 시도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마지막 지점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나는 시련의 지점이 존재하는 이유가 형식적으로는 동일한 하나의 문제, 즉 개인화(individuation)라는 문제에 대해 마르크스와 푸코가 서로 분기하는 두 가지 인간학을, 그리고 우리 스스로가 우리 자신의 것으로 다시 취할 수 있고 취해야만 하는 그러한 양립불가능한 두 가지 인간학을 발전시킨다는 사실 때문이라고 사고하기를 제안한다.
여기서 나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같은 초월론적 방식의 인간학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는 허술한 방식으로 인간학이 인간의 조건 또는 인간사회의 역사적인 다양한 변수들에 대한 서술에 관한 것이라고 주장하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는 마르크스와 푸코 또는 푸코와 마르크스(순서는 중요하지 않다)가 중심적인 방식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개인에 대한 이론을 구축하기를, 혹은 더 낫게 말해 개인화에 대한 이론을 구축하기를, 그리고 이 개인화를 한 편에서는 주체화/복종(sujétion), 예속화(assujettissement), 주체화(subjectivation)의 양식들과 관련짓고, 다른 한 편에서는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또는 더 낫게 말하여 개인적인 것과 집단적인 것 사이의 관계(이 둘 사이의 관계는 사회적인 것 자체의 기본 세포이다)의 양태들과 관련짓기를 제안하는 것이라고 나는 주장하고 싶다. 그런데 우리가 준-초월론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 문제는 근본적으로 인간학적인 문제이며, 이는 역사적이고 동시에 철학적인 특정한 인간학에 있어 구성적이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와 푸코가 그 안에서 서로 마주하게 되는 시련의 장은 개인화(individuation)의 이론으로서의 인간학이라는 장, 또는 주체의 개인으로의 구성이라는 장이다. 그리고 그 시련의 지점은 마르크스와 푸코가 개인에 대한 동일한 개념도, 개인화(individuation)에 대한 동일한 문제설정도, 그리고 역으로 집단화에 대한 동일한 문제설정도, 그 반정립적 생성 내에 존재하는 주체에 대한 동일한 관념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놓여있다. 당연히 나는 이것이 (중심적인 이론적 대상으로서의) 계급관계와 권력관계 사이의 대립 또는 지배의 두 가지 개념화 사이의 대립 -하나는 노동에 대한 착취를 통한 지배[마르크스], 다른 하나는 신체에 대한 규율화와 행동(conduite)에 대한 통치에 따른 지배[푸코]- 과 관련이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대립을 적어도 나에게는 철학적으로 근본적인 층위인 것처럼 보이는 곳으로 다시 돌려 보내고 싶다.
주체의 개인화(individualisation)라는 질문이 푸코에게 있어서 근본적인 질문이었다는 점을 납득하는 것은 (예를 들어 개인의 주체로의 호명이라는 질문과는 달리) 그가 이 질문을 지속적으로 반복했었기 때문에 그리 어렵지 않다. 우리는 특히 (“정신의학의 권력”의 분석들의 중심에서) 이 개인화가, 개인들로부터 그들의 정상적인 또는 비정상적인 특이성에 대한 고백을 요구하면서 개인들을 구분하고 동시에 범주화하는, 그러므로 개인성을 하나의 사회형태(이 사회형태는 “개인들의 사회”의 출현을, 또는 토크빌 이후 우리가 그렇게 말하기 시작했듯, 사회적 관계의 역설적 형태로서의 “개인주의”의 출현을 가능케 한다)로 “구성”하는 이러한 유형의 규율이 가지는 특징적 효과로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된다. “통치성”의 원형인 “사목권력”의 도입이 이 질문을 보존하고 심지어는 이 질문에 또 다른 답변을 제시함으로써 (역사학을 경유하여) 이를 확장시킨다는 점을 지적하자. 그러므로 어떠한 면에서 이러한 인간학적 질문이 푸코의 질문이라는 점은 명확하다. 그렇다면 푸코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것이 마르크스의 질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가? (개인주의의 또 다른 이름인) 공리주의적 이기주의라는 부르주아 모델에 대한 청년기 마르크스의 고찰들이 남긴 끈질긴 흔적이 그에게 남아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후에 마르크스가 이 고찰들을 노동분할(그 철학적 이름은 “독일 이데올로기”가 우리에게 말해주듯 “소외”이다)의 이론과 관련지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마르크스의 질문인지는 푸코보다는 덜 명확하다. 하지만 여기에서 나는,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개인화된 개인성의 구축”(construction de l’individualité individualisée)과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될) 그 파괴의 이론이 존재한다는 점과 관련하여, 그리고 동시에 마르크스의 도식과 푸코의 도식 사이의 대립과 관련하여, 만일 우리가 이 모든 논의의 진정한 역사적 기반인 헤겔로부터 다시 출발한다면 사태는 더욱 명확해진다는 점을 제시하고 이를 주장하고자 한다.
왜 그럴까? 왜냐하면 헤겔은 “법철학”에서 “추상법”(droit abstrait)에 대한 한 부분을 집필했기 때문인데, 헤겔에게서 이 추상법은 바로 “추상적”(다시 말해 다른 모든 것과 형식적으로 동등한 보편적)이라고 불리우는 개인성(individualité)의 구축을 의미한다 63. 게다가 이러한 구축은 사회적 구축이지 단순히 법률적 논리의 설명(비록 이 법률적 논리 또한 사회적 구축물이지만)이 아닌데, 왜냐하면 추상법에 대한 헤겔적 개념화에서, 우리는 역사-정치적 제도의 형태에 대한 묘사와 그 관념이라는 양자 모두와 관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헤겔을 다른 모든 계약론자들로부터 구분하는 것은 알다시피 (그리고 각자의 방식으로 마르크스와 푸코 모두가 계약론자들에 대한 이러한 헤겔의 비판이라는 유산을 상속 받았다는 점은 명백하다) 헤겔에게 있어 “순수하고 단순한” 개인들은 주어진 것들로, 즉 생물학적인 소여로도 심리-도덕적인 소여로도 존재하지 않으며, 대신 이 개인들은 보편적인 것 그 자체로 구축되어야 한다는, (또는 우리가 이렇게 말하길 원한다면) 생산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매우 간략하게 한 가지 점을 상기시키고 싶은데, 그러나 우리 모두는 이미 이 텍스트들을 잘 알고 있다. 헤겔적 구축은 변증법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그리고 객관적 정신구조 내에 다시 기초지워진 세 가지 시간의 진행에 따라 전개된다. [첫 번째로,] 인격들(personnes)을 그들의 재산의 자유로운 소유자로 만드는 전유의 계기 -이 전유의 “의지는 사물들 위로 강림한다”(비데가 강조하듯, “자본” 1권 2장에서 마르크스는 문자 그대로 이 구절을 인용한다 64). [두 번째로,] 사회적 상호주관성의 모든 양태들의 모체인 계약이라는 계기, (그러니까 더욱 일반적으로 말해) 상호성이라는 계기, 즉 인정이라는 계기. [세 번째로,] 추상법의 형태들 내에 모순을 도입하는, 그리고 이 모순을 통해 운동을 도입하는, 그러니까 그 실현을 도입하는, 또는 (우리가 이렇게 말하기를 원한다면) 재생산을 도입하는 계기, 즉 Unrecht라는 중요한 계기 -여기서 Unrecht는 “법의 부정”(négation du droit)과 “부정의”(injustice)로, 그리고 더 낫게는 “위법성”(illégalité) 65으로 동시에 하지만 매우 힘들게 프랑스어로 번역된다-가 있다는 점을 잊지 말자. 이 추상법의 계기가 지니는, 달리 말해 헤겔에게 있어서 개인성의 구축이라는 계기가 지니는 이러한 삼중성을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이 세 계기의 연쇄 전체가 이루는 총체성은 추상적 개인성의 구축에 있어 구성적인데,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이 점에 대해 마르크스와 푸코를 동시에 바라본다면, 그리고 우리가 이 계기들을 가설적으로 “포스트-헤겔적인 것들”로 간주한다면, 이는 우리가 이 계기들 각자가 감산과 동시에 가산(이는 또한 장소의 이동, 즉 전위이기도 하다)을 동시에 실행한다는 점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이 계기들 중 그 어떤 것도 헤겔적인 형태의 완전성(intégralité)을 “보존”하지 않으며 대신 각자는 (서로 대립되는 방향으로라고 할지라도) 이 헤겔적 형태를 변형시킨다는 점을 의미한다.
사실 마르크스가 위법성, 즉 Unrecht를 다루지 않는다는 점, 다시 말해 위법성을 법률적 형태와 그 내재적 유효성 바깥으로 내보낸다는 점은 매우 명백하다. 국가론의 틀 내에서 제약, 처벌, 정의 그리고 부정의와 같은 문제로 나중에 혹시라도 되돌아오고 싶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하지만 우리는 마르크스가 이렇게 되돌아온 바가 전혀 없음을 알고 있다). 상당히 푸코주의적인 “목재절도”에 관한 청년기 논문은 이러한 위법성이라는 계기가 부재한다는 증거일 것이다. 반면 마르크스는 법률적 형태를 “경제적” 형태 또는 더 낫게 말해 “상품” 형태 -이는 거울에 반사된 법률적 형태의 이미지인데, 이 상품 형태 내에서 교환되는 상품들의 등가성이 평등한 계약의 이미지 또는 그 역이다- 로 이중화한다. 그러나 소외로 이어지는 이 상품들의 전유는 자유의지(이 전유에 내재하는)와 소유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이것이 그 유명한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의 에덴 동산”이다. 자유, 평등, 소유 그리고 벤담. 우리는 마르크스에게서, 추상적 개인성의 구축에 있어 법률적 형태들을 통해 유효성(efficacité), 더 낫게 말해 효과성(effectivité)을 만드는 것은 바로 그 법률적 형태를 상품적 형태와 한 쌍으로 만드는 것, 다시 말해 인격(personnes)과 사물에 대한 두 가지 물신숭배의 역전임을 확인하게 된다.
반면 우리가 푸코 쪽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푸코가 마르크스와는 정반대되는 선택을 한다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 한 편으로 푸코는 소유라는 질문을 상대화한다(그러나 이는 그가 소유라는 질문을 무시한다는 것은 아니다. 대신 푸코에게 있어 소유는 다른 많은 사회제도들 중에서 근본적인 우위를 가지지는 않는 정상화normalisation 실천들의 지지물support일 뿐이라는 점을 의미하며, 그러므로 또한 소유가 개인성의 구축과 내재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는 않다는 점을 의미한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푸코는 위법성과 (위법성을 억압하면서도 동시에 지속시키는) 형벌(pénalité), 그리고 Unrecht의 중요성을 과대평가하며, 동시에 그 의미를 전위시킨다. 분명히 나는 여기에서 법에 대한 서로 다른 이론가들과 비평가들이 (법률적 형태 자체 안에서) 형법의 구성적 기능에 가치를 부여하는 방식들에 대한 비교 분석에 뛰어들 시간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푸코의 관점에서(이후에 출간되는 “감시와 처벌”에서 푸코는 이에 대한 원대한 해석을 제시할 것이다) 형벌과 관련해 중요한 것은 형벌이 정당화되는 방식이 아니라, 전체적인 사회 내에서, 그리고 동시에 개인화된 신체들의 관계 내에서 형벌이 실행되는 방식과 이 방식이 이 편과 저 편에서(그러니까 법정이 아니라 감옥과 그 가능한 대체물들에, 그리고 판결이 아니라 처벌punition에 등등...) 생산하는 효과들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이 편에서, 다시 말해 법을 “정상적”(normatif)인 것이 아니라 특별히 효과적인 (그리고 하나 더 추가하자면, 잔인한) 인간학적 규범(norme anthropologique)으로 만드는 것의 편에서, 법의 효과성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 “시민주체”의 각주: 내가 낭테르 파리 10대학에서 행했던 수업의 내용을 토대로 작성한 이 논문은 L’argent: Croyance, mesure, spéculation, Marcel Drach 책임편집, Éditions La Découverte, Paris, 2004에 실린 텍스트들 중 하나로 처음 출판되었다. [본문으로]
- 옮긴이 주: 이 단락에서 화폐는 모두 argent이다. [본문으로]
- 옮긴이 주: 프랑스어에서 tome/livre는 권, section은 편, chapitre는 장이다. [본문으로]
- 옮긴이 주: “자본” 1권의 1편 ‘상품과 화폐’는 1장 상품, 2장 교환과정, 3장 화폐 또는 상품의 유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장 상품은 네 개의 절로 구성되어 있다. 1절의 주제는 상품의 이중성, 2절의 주제는 노동의 이중성, 3절의 주제는 가치형태, 4절의 주제는 물신숭배이다. 이와 관련한 최고의 해설로는, 윤소영 교수의 “마르크스의 ‘자본’”(공감, 2009)의 2장 ‘상품과 화폐’를 보라. [본문으로]
- 각주: 알다시피 마르크스는 자신의 생전에 “자본”의 1권(Das Kapital.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 Buch I : Der Produktionsprozess des Kapitals, 1864)만을 출판할 수 있었다. 나머지는 마르크스 사후에 엥겔스와 카우츠키가 취합하고 수정을 가한 뒤 출판한 것이다(“자본”은 총 세 권으로 출판되었지만, 마르크스의 다른 플란들에 따르면 이는 총 네 권이 될 수도 있었다). “자본” 1권은 파리코뮌 직후 조제프 루아(Joseph Roy)가 프랑스어로 최초로 번역했다. 독일어 원본 텍스트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지만(무엇보다도 우리가 이 논문에서 주목하고 있는 1편이 특히 그렇다) 어쨌든 마르크스가 전체를 재검토했던 이 번역본은 1872년과 1875년 사이에 44권으로 나누어 출간되었다. 바로 이 번역본이 이후 모든 “자본” 1권의 번역본으로 재출판되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프랑스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읽히는 번역본인 것이다(모스크바 출판사, 플레이아드 출판사, 가르니에-플라마리옹 출판사 번역본 등등). 마르크스 서거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유일하게 1983년에 장-피에르 르페브르의 책임 하에 구성된 일군의 번역가들이 독일어 원본 제4판(마르크스가 검토를 했던 판본들 중에선 마지막 판본)을 따라 새로운 프랑스어 번역본을 만들어 냈다. 처음에는 프랑스 공산당 출판사인 에디시옹 소시알(Éditions Sociales)에서 나왔으며 현재는 동일한 번역본이 “Quadrige” 총서 152번으로 프랑스대학출판부(PUF)에서 1993년에 출간되었다. 우리는 이 훨씬 더 정확한 프랑스어 번역본을 본 논문에서 따를 것이다. (참고로 장-피에르 르페브르가 쓴 또 다른 새로운 서문이 추가된 개정판이 2016년에 출간되며, 사실 발리바르 또한 1983년 번역 프로젝트에 참여했었다 - 옮긴이) [본문으로]
- 옮긴이 주: 이 변증법적 설명순서에 대해서는 최근에 출간된 백승욱 교수의 탁월한 저서 “생각하는 마르크스: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2017, 북콤마)와 이에 대한 탁월한 서평인 서관모 교수의 ‘알튀세르를 너무 위험시할 필요가 있을까?’(경제와사회) 사이의 쟁점(과 그 이면에 존재하는 윤소영 교수의 反알튀세르적 “자본” 해석)을 참고하고, 옥우석씨가 번역하고 서관모 교수가 감수한 알튀세르의 ‘제라르 뒤메닐의 “‘자본’의 경제법칙 개념”에 붙이는 서문’(“역사적 맑스주의”, 새길, 1993에 실림. 이는 옮긴이가 곧 재번역하여 가능하면 웹진 인무브에 공개할 예정이다)을 참조하라. 알튀세르의 이 서문은 독해하기가 매우 까다롭지만 여기에서 발리바르의 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읽어야 하는 아주 중요한 텍스트이다. [본문으로]
- 옮긴이 주: 여기서 ‘매개로 한’은 영어의 counter와 같은 의미인 contre를 의역한 것이다. [본문으로]
- 옮긴이 주: monnaie fiduciaire, 즉 불환화폐는 화폐 이외의 다른 물질로 태환되지 않는 화폐라는 의미이다. 현재 미국의 달러도 그렇고 한국의 원화도 그렇고 불환화폐인데, 왜냐하면 금본위제의 폐지 이후 원화는 말할 것도 없고 달러의 가치를 보장해주는 금이라는 물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듯 태환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불환화폐라고 부르며, 달러 또는 원화와 같은 불환화폐의 경우 그 가치는 중앙은행(미국의 연방준비제도이사회 또는 한국의 한국은행),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국가가 자신의 화폐주권으로 보장해주는 것이다. 그 국가의 구성원들 또는 그 국가의 화페를 사용하고자 하는 다른 국가의 구성원들은 이 국가를 ‘믿고’ 이 화폐에 물신숭배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 옮긴이 주: “자본” 1권 1편 1장의 ‘악명 높은’ 어려움 또는 곤란. [본문으로]
- 옮긴이 주: 강신준판 “자본” 1권의 217쪽. [본문으로]
- 옮긴이 주: 여기에서 일치는 coïncidence를 번역한 것인데, 그러므로 이 일치는 상당한 우연성과 불확실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발리바르는 의미하고 있는 것 같다. [본문으로]
- 각주: Hegel, Principes de la philosophie du droit, introduction, 31절 Rem. (장-프랑수아 케르베강Jean-François Kervégan이 번역하고 주석을 단 텍스트이며 현대화한 고증 판본, PUF, “Quadrige” 총서, Paris, 2003, p140). [본문으로]
- 옮긴이 주: 윤소영 교수의 지적대로, 플란(plan)은 ‘작업의 계획’과 ‘저작의 구성’을 동시에 의미한다 [본문으로]
- 각주: Karl Marx, Contribution à la critique de l’économie politique, 프랑스어 번역본, Éditions Sociales, Paris, 1957, p.165. [본문으로]
- 옮긴이 주: 강신준판 “자본”에서는 이 mysticisme을 ‘신비성’이라고 번역했지만 여기서는 ‘신비함’으로 옮긴다. [본문으로]
- 옮긴이 주: 탈주술화는 désenchantement, 재주술화는 réenchantement을 옮긴 것이다. 영어의 disenchantment, reenchantment와 동일한 말인데, 한국어로 상당히 어색하기는 하지만, 막스 베버 이후 사회과학에서 많이 쓰이는 용어이다. 굳이 풀어서 옮기면 ‘마법 또는 주술에서 깨어나게 하기’, ‘다시 마법 또는 주술에 빠지게 하기’ 정도로 옮길 수 있으며, 90년대에는 주술 대신 ‘주박’이라는 용어로 옮기기도 했다. [본문으로]
- 옮긴이 주: 여기서 육체화는 incorporation을 옮긴 것이고, 육화는 incarner를 옮긴 것인데, 일상에서 incorporation은 사실 육체화보다는 통합을 뜻한다. 여기서는 물질성을 통해 자신의 육체를 얻는다는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육체화로 옮겼다. incarnation은 신학에서 사용하는 의미에서의 육화인데, 발리바르가 다른 곳에서 지적하듯 이는 명시적으로 마르크스가 화폐의 육화에 신학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을 뜻한다. [본문으로]
- 각주: Jacques Derrida, Spectres de Marx. L’État de la dette, le travail du deuil et la nouvelle internationale, Galilée, 1993, p.72 이하, 238 이하. [본문으로]
- 옮긴이 주: 이 단락에 등장하는 ‘해독이 필요한 상형문자’의 의미에 대해서는 피터 오스본의 다음과 같은 설명을 참조할 수 있다. “그의 경제학 개념은 일종의 역사인류학이다. 그것은 특수한 ‘삶의 방식들’이 스스로를 표현하는 방법이고, 특히 거기에 포함될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잘못된 표상(misrepresentation) -이는 이데올로기 개념을 통해 파악된다- 이다(이데올로기들은 사회를 잘못 표상[재현/상연 - 인용자]하는 체계들로서, 본질적으로 어떤 사회적 실천들에 연관되어 있다). 이 지점에서, 마르크스가 볼 때 독일철학은 독일 이데올로기, 바로 그것이었다. 왜냐하면 독일철학은 독일 문화가, ‘물질적 조건들’을 억누름으로써, 스스로에게 세계를 (잘못) 표상하는 주요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자본』을 쓰기 시작했을 때(그러나 이때의 분석 단위는 더 이상 국민국가들nations이 아니라 추상적 경제형태들 자체였다), 마르크스는 훨씬 엄격한 결론, 즉 상품 형태는 그 자체의 이데올로기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상품이 자기 자신에 대한 잘못된 표상을 생산한다는 것은 사회적 형태로서 상품이 갖는 기능의 일부다. 이것이 [바로 - 역자] 상품의 물신적 성격이다. 이런 식의 주장은 ‘이데올로그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의 본문에서 추적했던 이들- 에 대한 이런 반박이 갖는 정치적 중요성을 급격하게 감소시킨다. 비판이 필요한 현 상태를 정당화하는 명확한 사고들의 집합이 있는 한, 그것은 철학에서 발견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정치경제학 담론 자체다.”(피터 오스본, “하우 투 리드 마르크스”, 고병권, 조원광 역, 웅진지식하우스, 2007, 강조는 오스본) [본문으로]
- 각주: Suzanne de Brunhoff, La monnaie chez Marx, Éditions Sociales, 1967와 Les rapports d’argent, Presses Universitaires de Grenoble, 1979를 보라. [본문으로]
- [각주: “사물을 통해 과정이 자신의 운동기능을 획득하는 것이, 바로 마르크스가 사물의 주체화로 지시한 바이다. 이러한 기능은 그 과정 내에서 주체에 속하지 않으며, 또한 주체와 대상 사이의 상호행동에도 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기능은 생산관계에 속하는데, 이 생산관계는 주체와 대상의 공간(이 공간에서 생산관계는 그 담지자만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에 근본적으로 외재적인 것이다(…). 이 기능의 운동으로부터 산출된 것으로서의 사물이 바로 주체로 제시된다. 주체라는 개념은 허구적 운동 내에서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기능을 지시한다.” Jacques Rancière, ‘Le concept de critique et la critique de l’économie politique des Manuscrits de 1844 au Capital’, in Louis Althuser, Étienne Balibar, Roger Establet, Pierre Macherye, Jacques Rancière, Lire le Capital (1965), 신판, Quadrige/PUF, 1996, p.183.] [본문으로]
- 각주: Evguéni Pashukanis, La Théorie générale du droit et le marxisme, EDI, Paris, 1970. 장-마리 벵상(Jean-Marie Vincent)의 서문과 칼 코르쉬(Karl Korsch)의 “서론을 대신하여”가 실린 판본. [본문으로]
- 옮긴이 주: 강신준판 “자본” 1권의 149쪽. [본문으로]
- 각주: 법률적 범주들이 경제적 범주들과 엄밀하게 상관적인 것으로 제시되자마자, 마르크스가 경제적 범주들에 관하여 말하는 바를, 정확히는 마르크스가 물신숭배에 관한 구절, 즉 “이 형태들이야말로 상품생산이라는, 일정한 역사적 성격을 지니는 이 사회적 생산양식의 생산관계에 대해서 사회적 타당성을 갖는 객관적 사유형태이다”(p.87)에서 말하는 바를 법률적 범주들에까지 확장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의 문제에 대한 피할 수 없는 질문이 사실상 제기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질문은 교환에 대한 마르크스의 이러한 이론적 발전과 추상법, 다시 말해 법률적 인격 또는 인격성, 그리고 소유와 계약에 관한 헤겔적 개념화(présentation) 사이에 존재하는 밀접한 상응성으로부터도 제기되는 것이다. (강신준판 “자본” 1권의 139쪽에서 인용했으며, 추상법에 대한 헤겔적 개념화(présentation)와 마르크스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발리바르가 집필한 ‘미셸 푸코의 반-마르크스’를 참조하라 - 옮긴이.) [본문으로]
- 각주: “상품 물신숭배”에 관한 마르크스의 분석이 가지는 인간학적 차원에 대해서는, 특히 Jean-Joseph Goux, Freud, Marx, Économie et symbolique, Le Seuil, 1973, Les iconoclastes, Le Seuil, 1978, 그리고 Alfonso M. Iacono, Le fétichisme. Histoire d’un concept, PUF, “Philosophies”, 1992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 옮긴이 주: “시민주체”에서 발리바르는 이 문장을 다음과 같이 조금 수정한 뒤 각주를 하나 추가하고 있다. “마르크스의 관점에서 우리는 전도에 대해 말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최종적인 분석에서 노동과 필요는 사회적 현실로 남아 있으며, 또한 사회는 진정한 “주체”, 또는 오히려 사회의 존속을 위해 필요한 바를 (자신들이 이를 행한다는 것은 전혀 인지하지 못 하면서) 행하는 개인적 실천들의 앙상블이기 때문이다.” 각주: (포이어바흐에 관한 여섯 번째 테제에서 마르크스가 “인간 본질/인간 존재[das menschlich Wesen]가 자신의 현실/유효성[in seiner Wirklichkeit]에 있어서 “das ensemble der gesellschaftlichen Verhältnisse”라고 말하듯) 우리는 앙상블이라고 말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이러한 실천들에 대한 총체화도 또한 강제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동일한 방식으로, 1846년의 “철학의 빈곤”에서 마르크스는 명시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회는 하나의 인격이 아니다.”(“모든 노동이 잉여(excédant)를 남겨야만 한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프루동씨는 사회를 인격화한다. 그는 사회를 인격사회(société personne)로 만드는데, 그러나 어림없게도 여기서 사회는 인격들의 사회가 전혀 아니다. 왜냐하면 사회는 사회를 구성하는 인격들과 아무런 공통점도 가지지 않으면서 자신만의 법칙들을 한 편에 지니고 있으며, 또한 인간들의 공통지성과는 다른, 즉 공통감각을 지니지 않는 “자기 고유의 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K. Marx, Misère de la philosophie. Réponse à la Philosophie de la misère de M. Proudhon, Éditions Sociales, Paris, 1961, p.100.) (이와 관련해서는 발리바르가 “마르크스의 철학” 2014년도 재판에 추가한 ‘여섯 번째 테제’에 관한 상당히 긴 해설을 참조하고, 조금은 사족 같지만 “철학의 빈곤”으로부터 ‘정치적 주체화’의 문제설정을 추출해내 초기 알튀세르의 ‘이론주의’를 비판하는 조금은 특이한 논문인 Anders Fjeld의 ‘Du problème de la scientificité à la subjectivation politique: Marx contre Althusser dans Misère de la philosophie’, Actuel Marx, 2016/2, n.60도 참조하라. 한국과 달리 프랑스에서는 프루동에 대한 연구가 상당히 활발하다 - 옮긴이) [본문으로]
- 옮긴이 주: 강신준판 “자본” 1권의 135쪽. [본문으로]
- 옮긴이 주: “시민주체”에서 발리바르는 다음의 구절과 각주 하나를 추가하고 있다. “다르게 말하자면, 여기에서 개인들은 (헤겔이라면 다음과 같이 말할 것처럼) “대문자 사물 그 자체”(Sache selbst)와 관계 맺고 있는 것이다.” 각주: Phénoménologie de l’esprit의 7장을 참조하라. [본문으로]
- 옮긴이 주: 강신준판 “자본” 1권의 137쪽. [본문으로]
- 각주: 이는 정치경제학이 상품 또는 화폐(argent)만을 “물신숭배화”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 자체(또는 상품으로서의 노동) 또한 “물신숭배화”한다는 점을 의미하며, 이 노동이 정치경제학에 있어서 외양의 존재를 해체하는 기능과 외양의 존재를 인가해주는 기능을 동시에 수행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모이슈 포스톤은 이러한 관념을 발전시켰다. Time, Labor and Social Domination: A Reinterpretation of Marx’s Critical Theor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3 참조. [본문으로]
- 옮긴이 주: 강신준판 “자본” 1권의 126-127쪽. [본문으로]
- 옮긴이 주: 강신준판 “자본” 1권의 127쪽. [본문으로]
- 옮긴이 주: 강신준판 “자본” 1권의 127쪽. [본문으로]
- 옮긴이 주: 강신준판 “자본” 1권의 129쪽. [본문으로]
- 옮긴이 주: 강신준판 “자본” 1권의 151-152쪽. [본문으로]
- 각주: Le Capital. Critique de l’économie politique, livre I : Le développement de la production capitaliste, 마르크스가 전체를 재검토한 조제프 루아(Joseph Roy) 번역본, Éditions Sociales, 1959, tome I, p.147. 이 구절은 독일어 4판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데, 하지만 이 구절이 번역자 루아가 지어낸 것일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이는 독일어 1판의 구절인데 나중에 마르크스가 삭제한 것이거나(스튜어트의 money of the world에 대한 참조는 두 페이지 뒤에 다시 등장한다) 또는 번역본을 다시 읽으면서 마르크스가 추가한 주석일 수 있다. 1859년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에는 이에 대응되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서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쓴다. “스스로 발전함으로써 화폐가 보편적 화폐로 변화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상품소유자 또한 세계시민으로 변화한다. 원래 인간들 사이의 세계시민적 관계는 상품소유자로서 그들이 맺는 관계와 다른 것이 전혀 아니다. 즉자적이고 대자적인 상품은 모든 종교적, 정치적, 민족적, 언어적 제약을 넘어선다. 상품의 보편어는 가격이요, 그 공동체는 돈(argent)이다. 하지만 국가 화폐에 대립되는 보편적 화폐의 발전과 함께, 인간들 사이의 실체적 교환을 구속하는 종교적, 민족적 등등으로 인한 편견에 대립하는 실천적 이성의 종교라는 형태 하에서 상품소유자의 세계시민주의(cosmopolitisme)가 발전한다. 아메리카의 이글 금화(eagles)라는 형태로 영국 땅을 밟은 동일한 금이 지배적인 화폐가 되고, 3일 뒤에 파리에서는 이것이 나폴레옹 금화의 형태로 유통되는 반면, 이 동일한 금이 베니스에서는 두카 금화라는 형태로 몇 주 뒤에 통용되면서도 항상 동일한 가치를 보존하게 된다. 그래서 상품 소유자는 화폐의 국적이라는 것이 기니 도장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상품 소유자에게 있어 (세계 전체가 비로소 그 안에서 존재할 수 있는) 숭고한 관념이란 바로 시장이라는 관념, 즉 세계시장이라는 관념이다.”(프랑스어 번역, 위의 책, p.114-115) 이는 공동체(여기서는 세계공동체 또는 세계시민적 공동체)에 대한 동일한 관념인데, 이 관념의 구성적 관계는 사물들 자체로 인해 성립되는 것이다. [본문으로]
- 옮긴이 주: ‘기니 도장에 불과하다’란 A Man’s a man for a’that 이라는 1795년 로버트 번스(Robert Burns)가 작곡한 평등주의 노래의 가사에 나오는 구절, 즉 The rank is but the guinea's stamp, The Man's the gowd for a' that 에서 가져온 말이다. 참고로 guinea는 영국의 구 금화이다. [본문으로]
- 각주: 마르크스의 설명에서 -마르크스의 설명은 헤겔의 “감각적 확실성”의 현상학과 기표작용(fonction signifiante)에 대한 구조주의 이론 사이에 위치한다- 상품들 그 자체는 그들의 “주인과 소유자”(이들은 사회적 복화술의 도구에 불과한 것이 된다)의 입을 통해 말한다. “앞서 상품가치의 분석에서 얘기된 모든 것이 이제는 아마포 자신에 의해서 그것과 다른 상품, 즉 웃옷과의 관계를 통해서 얘기되고 있다. 아마포는 단지 자신에게 익숙한 언어인 상품의 언어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인간노동이라는 추상적인 성질의 노동에 따라 자신의 가치가 형성되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하여 아마포는 웃옷이 자신과 같은 것으로서 가치라는 측면에서 자신과 똑같은 노동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이야기한다. 자신의 숭고한 가치대상성이 아마포 자신의 뻣뻣한 몸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리기 위해, 아마포는 자신의 가치가 웃옷의 모습을 띠고 있으며 가치물로서 자신은 웃옷과 쌍둥이처럼 똑같다고 말한다.”(p.59) (강신준판 “자본” 1권의 109-110쪽 - 옮긴이) 뤼스 이리가레(Luce Irigaray)는 마르크스가 기술했던 표현 형태의 또 다른 함의, 즉 유통 과정 내에 있는 상품들의 “육체”가 남성들 사이에서 “교환되는” 여성들의 육체에 대응된다는 사실(여기서 남성들은 여성들이 가질 수 있는 특성을 부여하는 위치를 점하고 있다)을 찾아내기 위해 복화술에 대한 마르크스의 논의를 채택한다(“Le marché des femmes”, in Ce sexe qui n’en est pas un, Les Éditions de Minuit, Paris, 1977.). [본문으로]
- 옮긴이 주: 주지하다시피 supplément, 즉 대체보충물은 데리다의 개념이다. [본문으로]
- 옮긴이 주: 이 단락에서 화폐는 전부 argent이다. 그리고 이 단락에서 ‘역량’으로 옮긴 단어는 모두 puissance이다. 예전에는 ‘역능’으로 번역하기도 했으나 역량이라는 단어가 한국어에서 훨씬 자연스럽기 때문에 역량으로 번역했다. [본문으로]
- 각주: “상품이 서로 양적으로 비교될 수 있는 것은 화폐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모든 상품이 자신들의 가치를 하나의 똑같은 특수한 상품으로 측정하고 그럼으로써 이 특수한 상품을 공통의 가치척도, 즉 화폐로 변형시킬 수 있는 것은 이들 상품이 가치라는 측면에서는 대상화된 인간 노동이며 바로 그런 점에서 서로 양적으로 비교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치척도로서의 화폐는 상품의 내재적인 가치척도의 필연적인 현상형태이다.”(p.107)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회계약”의 형상을 발견한다.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이 생산한 생산물로서 상품들이 가지는 사회적 속성이 바로 화폐(argent)를 통해 표현되는(présentée)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 화폐(argent)만이 보편성 그 자체를 표현할(exhiber) 수 있다. 마르셀 모스에게서 차용한 “총체적인 사회적 현상”이라는 범주에 기초하는 최근의 경제학적이고 인류학적인 분석과 비교해보라. Michel Aglietta &André Orléan, La monnaie souveraine, Odile Jacob, 1998, 또한 La monnaie entre violence et confiance, Odile Jacob, 2002를 참조하라. (강신준판 “자본” 1권의 160-161쪽 - 옮긴이) [본문으로]
- 옮긴이 주: “시민주체”에는 이 뒤에 다음의 구절과 각주가 추가되어 있다. “‘보편적 필요’라는 개념(notion)은 생명 유지를 위해 필수적인 기능으로서의 필요에 대한 “유물론적” 인간학과는 모순되는 놀라운 개념인데, 이 개념은 초과(excès)를 함의하거나 또는 오히려 일상성 자체 내에 이 초과를 각인한다.” 각주: 분명히 짐멜은 그가 1900년에 출판한 “돈의 철학”에서 돈(argent)을 “절대적 수단” 또는 “수단들 중의 수단”으로 정의할 때,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재학”과 몇몇 신학적 테마들과 함께) 이 보편적 필요라는 개념을 떠올렸을 것이다. 반대로, 내가 아는 한에서, 마르크스에게 있어 “보편적 필요”라는 개념(notion)과 케인즈에게 있어서 “유동성 선호”라는 개념(notion)을 비교하는 훌륭한 철학적 연구는 존재하지 않는다. Cf. 하지만 예외가 있다면, 이는 Bruno Théret, “L’argent de la mondialisation: en quoi pose-t-il des problèmes éthiques?”, in Sociétés politiques comparées, n.9, 2009년 1월, http://www.fasopo.org 이다. [본문으로]
- 옮긴이 주: 이 단락에서 각주를 제외하고 모든 화폐는 argent이다. [본문으로]
- 각주: Contribution à la critique de l’économie politique, 앞의 책, p114. 마르크스는 (세계적인 차원에서) “부 그 자체가 절대적으로 사회적인 방식으로 실현된 바”로서의 화폐“주권”이라는 관념을 발전시켰는데, 이는 우리가 로마제국에서 있었던 로마법의 일반화라는 문제를 다루는 헤겔 “정신현상학”의 한 부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이 로마 제국에서 주권자는 “세계의 주인”이었으며, 그는 자기 자신 안으로 신민들의 모든 자기의식을 흡수한다(Phénoménologie, 6장, c 섹션. [본문으로]
- 옮긴이 주: ‘탈물질화’는 dématérialisé를 옮긴 것인데, 참고로 프랑스어에서 dématérialisation은 직역하면 ‘탈물질화’지만 사실 일상적인 의미로는 ‘디지털화’이다. 금이나 은과 같은 귀금속으로서의 화폐로부터 신용카드나 은행 계좌상의 숫자와 같은 이른바 ‘사이버 머니’로의 이행이 이 이 프랑스어 단어의 의미 변화에 각인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본문으로]
- 옮긴이 주: 이에 대한 최고의 설명으로는 쉬잔 드 브뤼노프의 “국가와 자본”을 참조할 수 있는데, 국역본의 번역이 좋지 않기 때문에 이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독자는 윤소영 교수의 “알튀세르를 위한 강의”(공감, 1996)의 4장 ‘쉬잔 드 브뤼노프의 신자유주의 비판’에서의 간결한 설명을 참조하길 바란다. [본문으로]
- 각주: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ein)을 따라 우리는 이를 역사적 자본주의를 정치적으로 구조화하는 “세계-체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cf. The Politics of the World-Economy. The States, the Movements and the Civilization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4. [본문으로]
- 각주: 우리는 마르크스가 “상품생산의 발전과 확장의 특정한 수준에서 지불수단으로서의 기능이 상품 유통의 영역을 넘어서”는 방식(“화폐는 계약의 보편적 상품이 된다.”)을 상기시킬 때(더 나아가서는 서비스[여기서 서비스는 우리가 경제학에서 일반적으로 상품의 두 가지 종류인 ‘재화와 서비스’라고 말할 때의 상품으로서의 서비스이다], 세금, 벌금, 손해배상 등등의 방식까지도), 그 첫 번째 방향의 지표를 발견한다(p.158). [본문으로]
- 옮긴이 주: “시민주체”에는 다음 구절과 함께 하나의 각주가 추가되어 있다. “루소에게 있어 일반의지(Volonté Générale)가 “주체들이 자유롭도록 강제하는” 권력을 가지고 있듯이, 마찬가지로 화폐라는 일반적 등가물(Équivalent Général)은 필요의 대상이 되는 모든 “사물” 또는 모든 “존재”를 유통 속에 개별적으로 진입할 수 있게 하는,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를 가치의 양으로 표상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각주: “허구적 상품”이라는 표현 자체는 마르크스가 아닌 폴라니가 만든 것인데, 그는 마르크스의 “물신숭배”와의 비교는 완전히 거부하면서 이 표현을 자신의 1944년 저작 “거대한 전환”(프랑스어 번역으로는 Gallimard, 1983, 102쪽 이하)의 중심 범주로 설정한다. [본문으로]
- 각주: 여기서 우리는 임금과 그 다양한 산업적 양태들에 할애된 “자본” 1권의 6편 임금(앞의 책, p.599-632)을 자세히 다시 읽음으로써 마르크스의 분석을 따라가야 한다. 여기에서 마르크스는 “비합리적” 표상 양식으로서, 또는 노동력이 (잉여)가치화 과정으로 예속화되는 방식에 대한 “상상적 표현”으로서의 물신숭배라는 질문을 재발견한다. 또한 여기에서 마르크스가 시스몽디와 관련하여 조롱조로 사회계약에 대한 참조를 하고 있다는 점도 지적하자(프랑스어 번역으로는, 앞의 책, p.601, 각주 24.). [본문으로]
- 옮긴이 주: 가령, 이제는 상품이 된 물이나 칼 폴라니가 허구적 상품들이라고 불렀던 바를 떠올려 보자. [본문으로]
- 옮긴이 주: 이 단락에서 화폐는 모두 argent이다. [본문으로]
- 각주: 나는 LA의 캘리포니아 대학 철학과에서 2011년 2월 24일에 행한 발표 뒤에 이루어진 토론에서 이 세 가지 언급을 제시했다. 이 발표의 제목은 “헤겔의 Sache selbst에서 마르크스의 물신숭배로”였으며, 이 발표에서 나는 이 책[“시민주체”]의 7장과 9장에서 가져온 요소들을 결합시켰다. 질문과 의견을 제시해준 Joseph Almog, John Carriero, Barbara Herman과 그 학생들에게 감사드린다. [본문으로]
- 각주: “사회효과”는 루이 알튀세르가 “‘자본’을 읽자”(1965)의 서문에서 사용한 표현이다. [본문으로]
- 옮긴이 주: 사회효과 개념에 대해서는 윤종희 교수의 설명을 참조할 수 있다. “과학적 지식에 의한 인식효과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의한 사회효과(society-effect)와 짝을 이룬다. 마르크스는 현대 부르주아 사회를 연구할 때, 그것의 역사적 성격을 인식한다. 그러나 그는 헤겔의 역사성 관념과 절단하고 부르주아 사회의 기원이 아니라 그것의 동시대적 구조를 연구한다. “자본”은 역사의 생산물을 하나의 사회로 존재하게 만드는 메커니즘, 즉 ‘사회효과’의 생산 메커니즘에 관한 분석이다.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체에서 토대와 상부구조는 서로 다른 기원과 역사성을 갖는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심급들이다. 이 심급들은 특정한 방식으로 결합함으로써 사회를 구성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구성체는 헤겔의 역사철학에서처럼 단일한 기원으로 소급하여 분석될 수 없다. 서로 다른 기원들을 갖는 다양한 심급들을 결합하여 하나의 사회로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사회효과는 바로 심급들의 현재적 결합관계를 통해 분석되어야 한다. “마르크스를 위하여”에서 제시한 변증법의 두 측면, 즉 인식으로서의 변증법과 역사로서의 변증법은 “‘자본’을 읽자”에서 인식효과와 사회효과의 생산 메커니즘으로 개념화된다. 알튀세르가 철저하게 반(反)헤겔적인 입장에서 마르크스의 변증법을 종별화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개념들을 통해서이다.” “‘자본’을 읽자” 해설, “알튀세르의 철학적 유산”, 공감, 2008. [본문으로]
- 각주: 이는 특히 내가 나의 소책자인 “마르크스의 철학”(Éditions La Découverte, Paris, 1993)에서 제시했던 독해이다. [본문으로]
- 옮긴이 주: das Tun aller und jeder는 프랑스어로 옮기면 l’activité de tous et de chacun이며, 한국어로는 ‘우리 모두, 그리고 우리 각자의 활동’이다. [본문으로]
- 옮긴이 주: die Sache selbst는 프랑스어로 la Chose même이며, 한국어로 ‘사물 그 자체’ 또는 ‘실재 그 자체’이다. [본문으로]
- 각주: 이 지점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가 다시 홉스적인 리바이어던으로 되돌아가서, 이 리바이어던의 합리적 구성과 그 신비적 형상화(홉스가 스케치한 또는 주문한 표제 그림의 도상이 특히 지시하는 바) 사이의 알레고리적 간극이 마르크스적 의미로 이해된 “물신숭배”의 관점으로 얼마나 해석 가능할지 질문하는 것은 분명 흥미로운 작업일 것이다. [본문으로]
- 각주: 다음과 같은 핵심적 정식은 “정신”이라는 개념(notion)의 주관적 도식을 제시한다. “나인 우리, 우리인 나.”(Nous que je suis, je que nous sommes”) 이는 “자기의식들” 사이의 상호인정이라는 문제가 출현하자 마자 언급된다(‘자기-자신의 확실성의 진실’에 관한 “정신현상학”의 4장 도입부). [본문으로]
- 각주: “신의 죽음”이라는 관념을 공유하는 “탈은폐된 종교”의 공동체: cf. 이 책의 5장과 7장. “정신현상학”의 7장 끝 [본문으로]
- 각주: 마르크스가 “수탈자에 대한 수탈”을 자본주의적 생산이 산출하는 역사적 경향의 필연적 결과를 예고하는(또는 예고한다고 믿는) 공격적인 언표로 제시해야 한다는 강박에 스스로 굴복하는 순간들을 제외한다면(“자본” 1권, 24장, 7절), 그는 노동자들의 재생산과 이 노동자들의 필요가 축적의 논리에 “실질적으로 포섭”될 가능성(이 축적의 논리는 실질적 포섭의 형태를 무한히 영속시킨다. “‘자본’의 미간행된 장”, R. Dangeville의 편집과 번역, Paris, UGE “10/18”, 1971[G. Cornillet, L. Prost, L. Sève가 준비작업을 거쳐 제시한 새로운 번역으로는, Karl Marx, Le Chapitre VI, manuscrit de 1863-1867, Les Éditions Sociales, 2010을 보라 - 발리바르])이든 “자본주의적 형태 그 자체 내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대한 지양”(이는 생산을 노동자들의 공통행위로 제도화하지는 않으면서 생산을 사회화하거나 또는 사적 소유를 폐지한다 - “자본” 3권, 프리드리히 엥겔스 편집, 27장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신용의 역할’. cf. Marx-Engels Werke, Dietz Verlag, Berlin, 1969, Band 25, p454)이라는 가능성이든, 이러한 가능성을 서로 다른 형태로 제시했다. 이러한 “허무주의적인” 결과들은 마르크스주의 담론의 주변으로 밀려나 억압되는데, 그러나 이 결과들은 “통상적인 의미의”(exotérique) 마르크스주의가 지니고 있는 [공산주의의] 필연성과 일방향성 아래에 흐르고 있는 객관적이고 주관적인 불확실성의 요소를 드러내는 거대한 이점을 가지고 있다. 동시에 이 허무주의적 결과들은 마르크스의 성찰을 집단적 실천과 공동체의 설립[제도화]에 관한 아직 결론이 내려지지 않은 열려 있는 역사 -이 역사는 마르크스주의가 자신의 정치적 능력이 소멸될 수 있는 가능성에 영원히 노출되어 있을 것이라는 사실과도 하나를 이룬다- 내에 기입한다. [본문으로]
- 각주: Georg W. F. Hegel (Jean-François Kervégan의 프랑스어 번역), Principes de la philosophie du droit, PUF, Paris, 1998. [본문으로]
- 각주: 본 저서의 20장 “Foucault avec Marx: pouvoir-capital et pouvoir-savoir”(마르크스와 함께 푸코를: 자본-권력과 앎-권력)를 보라. [본문으로]
- 옮긴이 주: illégalisme은 위법행위로 번역한 반면, illégalité는 위법성으로 번역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