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히려 인식하라
오히려 인식하라(SED INTELLIGERE)
에티엔 발리바르
번역: 배세진 (파리7대학 ‘사회학 및 정치철학’ 학과 박사과정)
[옮긴이 앞글: 출전은 다음과 같다. 혁명의 욕망(Désir de Révolution), Ligne, 2001/1, n.4 (https://www.cairn.info/revue-
lignes1-2001-1.htm). 위의 링크로 들어가면 발리바르가 언급하는 베를의 정식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다. 미셸 쉬르야(Michel Surya)의 서문에 따르면, 베를(Berl)의 정식은 “refus pur et simple opposé par l’esprit au monde qui l’indigne”, 즉 “정신을 분노케 하는 세계에 대하여 정신이 대립시키는 순수하고 단적인 거부”이다. 진태원 교수님은 ‘qui l’indigne’를 조금 의역하여 ‘정신을 지닐 만한 자격이 없는 세계’로 번역했으나, 여기에서는 ‘분노케 하다’라는 의미로 번역했다(digne는 ‘자격이 있는’, indigne는 ‘자격이 없는’이라는 의미의 형용사이지만, 동사로는 일차적으로 ‘분노하게 만들다’라는 의미를 지닌다는 점을 감안했다). 참고로 이 글은 진태원 교수님이 2004년에 번역하여 블로그에 공개한 적이 있으나, 옮긴이가 중요한 텍스트라고 판단하여 재번역했다. 예전에 진태원 교수님 번역본으로 여러 번 읽었기 때문에 번역이 너무 비슷해질 수 있어서 가급적이면 진태원 교수님 번역본은 참조하지 않았음을 밝힌다. 이 텍스트의 존재를 최초로 알려주신 진태원 교수님께 멀리서나마 감사드린다.]
잡지 “리뉴”(Ligne)의 편집진이 보여준 [혁명에 대한] 대의(intérêts)와 [혁명을 위한] 정치참여(engagements) 전체의 훌륭함을 인정하면서도, 저는 잡지 “리뉴”가 우리의 성찰을 위해 제안했던 정식화들에 관해 어느 정도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마 근본적으로는 이것이 단어들의 문제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제가 이 단어들에 물신의 가치를 부여한다고 사람들이 믿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마 이 단어들에 대한 설명(그리고 무엇보다도 우선은 제가 이 단어들을 활용하는 저만의 방식에 대한 설명)은 여기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관념들을 우리가 더욱 명확히 이해하도록 도울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질 것 같은데, 이 단어들은 바로 혁명과 욕망입니다.
끝에서부터 시작해보자면, 저는 우선 [위에서 옮긴이가 설명했던] 베를의 정식의 의미에 대해 질문해 보겠습니다. 우리 “글쓰는 이들”(écrivants)(저는 “글쓰는 이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왜냐하면 제가 저 스스로를 작가écrivain라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은 프랑스어에서 관계사가 “설명”과 “한정”이라는 두 가지 용법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베를의 정식에서 관계사가 설명의 의미로 쓰인 것이라면] 세계 그 자체가 정신을 분노케 하고 정신은 이 세계를 거부하는 것이거나, [베를의 정식에서 관계사가 한정의 의미로 쓰인 것이라면, 세계 그 자체가 아니라] 특정한 세계가 정신을 분노케 하고 정신은 이 특정한 세계를 거부하는 것이거나, 이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관계사가 설명의 의미로 쓰였다는 첫 번째 주장대로] 세계가 그 존재 자체만으로, 그리고 그 물질성 자체만으로(즉 세계의 “산문”, 세계의 공리주의) 정신을 분노케 한다는 관념은 전혀 부조리한 것이 아니며 심지어는 아마도 세계를 정의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관념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이것이 두 번째 의미에 관한 것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어떤 특정한 세계는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고요(그런데 어떤 특정한 세계를 말하는 것일까요? 부르주아 도덕의 세계? 또는 부르주아 세계 전체?). 정신에 대해서 논쟁하지는 맙시다(우리들 중 일부는 정신보다는 아마도 신체, 대중, 인민, 게다가 프롤레타리아를 더 선호할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을 선호하느냐에 따라 본질적인 부분이 변화할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대신 혁명에 대한 열망의 “최소공배수”([우리가 혁명의 열망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가장 최소한의 엄밀성”)로서의 “순수하고 단적인 거부”에 대해 어떻게 사고할 것인지에 대해 논의해 보죠.
저는 혁명에 대한 열망의 “최소공배수”가 “순수하고 단적인 거부”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래서 “리뉴”와 저 사이에 의견의 불일치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저는 다른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어떠한 핑계 하에서도 우리가 원하지 않는 모든 의미, 용법, 전통, 강령으로부터 우리 스스로가 벗어나기 위해서만이라도 오히려 정확한 의미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소한 처음에는 우리에게 “욕망할 만한 것”(désirable, 바람직한 것)이라는 관념을 (단순화하는 것이 아니라) 복잡화하기 위해 그에 대한 정확한 의미가 필요한 것입니다. 만일 레지스 드브레(Régis Debray)가 최근에 유행시킨 정식을 (다른 이들이 저에 앞서 그러했듯) 활용할 수 있다면, 혁명이라는 관념을 “혁명 속의 혁명”이라는 관념으로부터 분리 가능하지 않도록 만들기 위해서라고 말하겠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사회주의적” 혁명이라는 관념과 “공산주의적” 혁명이라는 관념을 구분합니다. 이 두 가지 관념 모두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바에 따르면 부르주아 시민사회(société bourgeoise)에 대립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두 관념은 동일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 두 관념은 “국면” 또는 “계기”에 따라 필연적으로 절합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두 관념을 대립시키지는 않는다고 해도 어쨌든 분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산주의는 “사회주의적” 또는 “집산주의적”(collectiviste)이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개인주의적” 또는 “자유주의적”(libéral)이지 않습니다. 공산주의는 이러한 구분을 넘어서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결국 그렇기 때문에 공산주의는 아마도 부르주아 시민사회에 대립하여 순전히 그리고 단순히 정의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오늘날의 세계(특히 이 세계에서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것으로, 그리고 어떠한 의미에서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바)가 어느 정도까지 “부르주아적” 세계인지에 대해 우리가 진지하게 자문해 볼 수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자본주의적인 세계가 그렇죠. 그리고 물론 이외에도 (성차별적인 세계, 인종주의적인 세계와 같은 ) 다른 것들도 존재합니다. 부르주아 시민사회를 거부하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를 “거부”하면서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공산주의를 정의하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그래서 위에서 제기했던 질문으로 되돌아옵시다. 가능한 것과 욕망할 만한 것, 이 둘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만일 제가 가능한 것이 욕망할 만한 것보다 더 명확해 보인다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제가 여기에서 단어들을 가지고 말놀이를 하고 있을 뿐이라고, 단지 제 멋대로 도발을 하고 싶어하는 것일 뿐이라고 믿을까요? 만일 19세기와 20세기의 사회주의, 마르크스주의, 무정부주의 등등의 투쟁가들이 “혁명”이라는 단어에 부여했던 의미에서의 [정관사] “혁명”(la révolution)이 가능하지 않거나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면, 이는 사람들이 말하듯 단순히 “객관적이고 주관적인” 혁명의 조건들이 오래 전부터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인걸까요? [혁명에 대한] 어떠한 향수도 어떠한 유토피아도 여기에서 그 무엇도 바꾸지 못 할 것입니다. 반면에 그 용어의 역사적 의미에서의 [여러] 혁명들은 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필연적이었으며, 우리의 질문 전체는 바로 이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여러] 혁명들이 욕망할 만한 것이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저는 나중에 가서야 선구적인 것으로 드러났던 “에밀”의 유명한 한 구절에서 루소가 “우리는 혁명의 시대로 들어서고 있다”라고 썼을 때, 그는 이를 통해서 통치의 형태와 사회질서에 대한 폭력적인 전복을 (이러한 폭력적인 전복의 형태도, 특히 그 가치도 전혀 예단하지 않으면서) 지시했다는 점을 여러분께 상기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오늘날 저는 이 문장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리고 저는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여러 가지] 혁명들의 역사([혁명에 대한] “환상”illusions으로 점철된 역사)로서의 역사(Histoire)에 대한 종말을 보았다고 자랑하거나 또는 절망하는 이들은 모두 착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도래할 혁명들 -이 혁명들은 또한 “산업적인”, “민족적인”, “보수적인”, “수동적인” 등등의 혁명일 수 있습니다- 이 (공산주의적이었든 아니든 과거의 혁명들의 상당수가 실제로 욕망할 만한 것이었던 것처럼) 정말 욕망할 만한 것인지를 우리가 확인하는 것입니다. 또는, 우리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더 선호한다면, 문제는 어떠한 조건 속에서 이 혁명들을 우리가 욕망할 만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가 입니다.
결론으로 빨리 나아가기 위해서 두 가지 정식을 대립시켜 보겠습니다. (1792년 11월 4일) 자신의 유명한 연설에서 로베스피에르는 지롱드파를 향해 “시민들이여, 당신들은 혁명 없는 혁명을 원하십니까?”라고 외쳤습니다. 이전에 저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한 토론에서 이 정식을 인용했었습니다[“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하여”]. 제가 봤을 때 이에 대한 대답은 자명한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그 당시 저는 “혁명”이라는 단어가 일의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믿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저는 혁명적 폭력(이 혁명적 폭력은 최종적 분석에서 여전히 일종의 “내전”에 속합니다)이 그 정치적 목적에 도달하든 그렇지 않든 절대로 자기 자신에 반하여 퇴보할 수는 없다는, 달리 말해 “파시스트적인 폭력이 될” 수는 없다는 관념을 저 자신에게 허락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더 이상 이러한 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지금 저는 이와는 다른 정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초현실주의 선언”에서 아마도 “욕망의 혁명”이라는 표현을 문자 그대로 발견하지는 못 할 것인데(이 표현을 “초현실주의 선언”에서 찾아보려 했으나 찾지 못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표현이 제가 새로이 가지게 된 정식의 의미를, 또는 “정신”을 잘 요약해준다고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 두 가지 정식을 다음과 같은 가설 내에 결합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욕망의 혁명 없이 혁명의 욕망은 없다! 이에 따라, 특히 “혁명의 욕망”의 혁명 없이 혁명의 욕망은 없는 것이 되죠.
이는 혁명의 욕망이 그 자체로 일차적인 수준에서 “욕망되는 것”으로 사고될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합니다(왜냐하면 의지의 의지가 존재하듯 욕망의 욕망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혁명의 욕망은 반사적인 것(réflexif)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곳에서 저는 로자 룩셈부르크를 인용하면서(그녀에게 러시아혁명의 근본 문제는 어떻게 러시아혁명이 자신의 “야만성”을 극복하는 것인지 였는데, 러시아혁명에 있어 자신의 “야만성”은 자본주의와 국가로부터 유래한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혁명의 욕망은 더 많은 민주주의, 더 많은 시민다움(civilité), 더 많은 상상력 -이것들이 없다면, 혁명은 그저 이 혁명이 “거부”하는 세계에 대한 전도된 이미지, 그리고 (이 세계가 혁명의 도구가 되지 못 할 때) “혁명 자신을 분노케 하는”그러한 세계에 대한 전도된 이미지에 불과합니다- 에 대한 욕망이라는 점을 제시하면서 이를 “혁명을 문명화하기”(civiliser la révolution)라고 불렀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이차적 수준의 욕망은 자신의 실현을 스스로 (재)부정하거나 두려워하는, 무한히 지연된 욕망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는 증명해 보아야 할 문제로 남아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스스로를) 사고하는 것은 욕망이라고,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스스로를) 사고하려는 욕망이 되어 버린 그러한 욕망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1982년 에밀리아 지안코티(Emilia Giancotti) -“스피노자 용어사전”(Lexicon spinozanum)의 저자, 1992년 사망- 가 조직했던 최초의 대규모 스피노자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이탈리아의 우르비노(Urbino)에 갔을 때, 저는 철학과 강의실의 칠판 위에 “우리에게는 반역할 이유가 있다”[조반유리]라는 마오의 구호가 지워지지 않게 쓰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놀랐습니다. 이 뒤에 에밀리아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습니다. “오히려 인식하라”(Sed intelligere)라고 말이죠. 타협 없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