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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그리고 우리 자신―를 바꾸려는 공산주의적 욕망


에티엔 발리바르

번역: 장진범 | 사회학도

   [옮긴이] 원제는 'The Communist Desire to Change the World – and Ourselves'(2017)이며, VIEWPOINT MAGAZIN에 실린 인터뷰를 번역한 것이다. 이 인터뷰는 'Una grande politica della transizione aperta all'imprevisto. Intervista a Étienne Balibar'(2017)를 토마소 만프레디니(Tommaso Manfredini)가 번역한 것이다.

키아라 조르지(이하 조르지): 칼 맑스는 공산주의를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표상했고, 그 대안의 근거를 실은 자본주의가 이미 마련했다고 보았다. 이 발상에서 공산주의의 주요 질문 중 하나가 시작되었는데, 이행이라는 통념 자체가 그것이다. 『맑스의 철학』에서 당신이 관찰한 바에 따르면, 맑스가 예견한 이행이란, 진화주의 시각을 받아들인 것과는 거리가 멀고 정반대로 “역사적 시간의 스스로에 대한 ‘비동시대성’을 표상하는 정치적 형상, 그러나 잠정성 안에 기입된 채 머물러 있는 형상”이다. 예견불가능한 것, 과정들의 다중성, 그리고 혁명적 단절에 준거하는 이 반(反)진화주의에서 공산주의의 필수적 요점 중 하나가 발견되는 게 아닌가?

에티엔 발리바르(이하 발리바르): 우리가 맑스에게 상속받은 공산주의 이념은 그 역사가 유구하여, 근대성을 가로지르고, 종교적 이단 및 사회적 반란과 깊숙이 얽혀 있다. 맑스 자신이 애초 확신에 차 수용한 것은 연합이라는 낭만주의 유토피아로, 이들 사조는 산업혁명에 대응하면서 화폐가 폐지되고 평등과 합리성 원칙으로 고취된 사회 조직화라는 기획을 내놓았다. 이후 맑스는, 공산주의적 희망이 과학적 토대를 부여받으려면 역사적 진화 안에 미래의 ‘생산양식’으로서 기입되어야 한다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었고, 이 진화의 방향을 따라 필연적으로 계급에 기초한 사회에서 계급 없는 사회에 이를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 때문에 ‘이행’이라는 관념은 맑스의 후계자들의 사상에서뿐만 아니라 맑스의 사상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넓게 보자면 이 관념은 역사의 형세를, 자본주의가 그 최종적 발로인 계급투쟁에 의해 가능해진 공산주의를 향한 거대한 이행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었다. 좀 더 자구(字句)적으로 해석하자면,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에서 자본주의의 모순들이 틀림없이 폭력적인 형태로 스스로를 표출하고 그 ‘해결책’을 찾아냄으로써, ‘이행’을 탁월한 정치적 장소로 만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의미에서 정치의 유일한 기능은 예정된 경향을 실현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대안이라는 관념은 약한 의미로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 당신이 앞서 인용한 나의 말로 하자면, 나는 맑스에게서 이런 형태의 근본적 진화주의와 경합하는 요소들을 찾는 중이었고, 몇 가지를 찾아냈다. 내 의도는 한편으로 정치에 속하는 불확실성과 창조성의 차원을 복원하는 것이었고, 다른 한편으로 대안을 최종목적지라기보다는 접합 지점(junction)으로 사고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나는, 20세기 사회주의 경험들이 구현한 ‘진화주의적 공산주의’의 파국적 실패를 넘어서는 현재의 혁명적 접근들 쪽으로 맑스를 근접시키려고 노력했다.

조르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에서 “우리 자신을 변혁하는 것.” 공산주의적 질문의 가장 중요한 측면 중 하나―대명사의 복수적 차원―를 가리킴으로써 당신의 이 문구는 ‘공유재’(common)를 위한 공통의 참여라는 공산주의적 욕망을 압축하고 있다.

발리바르: “우리 자신”이라는 대명사에 집단적 의미를 부여해 준 점에 감사해야겠는데, 나는 이 대명사를 포괄적이고 자기지시적인 의미로 사용했었다. 나는 당신이 질문을 제시한 방식에 전반적으로 동의하는데, 괜찮다면 두 가지 단서를 달겠다. 첫째로, 맑스의 공산주의는 개(인)성이라는 이념을 폄하하면서 ‘공유재’와 ‘공동체’라는 이념에 일의적인 특권을 부여한 적이 결코 없었다. 바로 이 점에서 맑스는 낭만주의자 및 (개인이 총체성에 직접적으로 종속되었던) 전(前)자본주의 사회를 갈망하는 사람들과 구별된다. 자본주의가 개인주의를 소외의 수단으로 사용하기 때문에(오늘날 이는 신자유주의 담론, 그리고 개인들 간의 세계적 경쟁이라는 훨씬 더 극단적인 모델에 의해 고도화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이 ‘공유재’에 가치를 부여하는 쪽으로 흐르는 건 불가피하나, 맑스가 추구한 것은 (『공산주의자 선언』에서처럼) 각인의 발전이 공동체의 발전의 조건이 되고 그 역도 성립하는 실존적 정식이다. 내가 달고 싶은 두 번째 단서는, ‘공산주의적 욕망’이라는 문구에 강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는 점이다. 공산주의적 욕망은 공산주의적 참여의 동력으로, 그것이 없다면 공산주의 정치도 없다. 어떻게 보면 이 욕망은 가없다는 점에서 충족이 불가능한 것이긴 하지만, 이를 ‘유물론적’ 견지에서 사고해 볼 수도 있는데, 여기서 유물론적이라 함은 이 욕망이 조건에 매여 있다는 뜻이 아니라 이 욕망 안에 자기 자신을 떠받치는 조건에 대한 염원이 담겨 있다는 뜻으로, 이는 ‘세계를 변혁하기’라는 문구를 알레고리적으로 요약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공산주의적 욕망은 한편으로 은총이 흘러넘치는 ‘새로운 인간’을 염원하는 기독교적 욕망, 다른 한편으로 미셸 푸코가 ‘자기돌봄’이라는 정식으로 적절히 포착한 니체적 욕망과 구별된다.

조르지: 공산주의, 그리고 공산주의에 이르는 길에 관한 여러 가지 심상이 있다. 그 중에서 당신 스스로 언급한 바 있듯, 루이 알튀세르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전개된 좀 더 유물론적인 심상을 선택했는데, 이에 따르면 공산주의는 “현존하는 상태를 폐지하는 현실적 운동”이다. 당신은 이 심상을 공유하는가?

발리바르: 우리는 같은 문제로 돌아온 셈이다. 이 아름다운 문장은 (신학적 뿌리가 없지 않은) 진화주의적 용어로 해석될 위험에서 자유롭지 않은데, 말하자면 공산주의는 역사의 궁극적 방향이고, 역사는 공산주의로 향하는 큰 길이라는 식이다…. 다행히도 이 문장은 애매하다. 어떤 경우든 공산주의를 단순한 규제적 이념으로 해석하는 경향을 제거하는 한편, 동시대적 투쟁들 및 이 투쟁들이 사회와 그 행위자들에 초래하는 변혁들에 공산주의가 ‘내재함’을 단언한다. [그렇다면] 이 문장을 다음과 같이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공산주의는 역사 안에서 스스로를 현행화하는 힘이고, 여기에는 결정된 ‘목적/끝’이 없다고.

조르지: 민주주의에 대한 광폭한 공격이라는 현재적 맥락에서, 평등자유의 새로운 사례라는 기치 아래 이른바 초과적 주체성들이 가담한 갈등들에서 시작하는 재의미화가 가능한 것인가? 봉기는 또 다시 시민권―시민권을 정치적 주체화의 실천/관행이자 끝없는 투쟁의 장으로 이해한다면―의 능동적 양식인가?

발리바르: 내가 평등자유 명제에서 중요시하는 것은, 이 명제가 불가피하게 혁명적이고 봉기적이며 초과적인(또는 ‘과장된’) 차원을 동반하는 근본적으로 부르주아적(또는 시민적-부르주아적) 이념이라는 점이다. 새로운 형태의 저항이나 해방이 계급 지배, 또는 좀 더 일반적으로는 사회적 위계화에 입각한 제도적 양식들과 갈등을 빚게 될 때마다 우리가 평등자유로 되돌아가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부르주아적 봉기 이념과 공산주의적 정치 형태들 사이의 계보학적이고 변증법적인 관계란 쉽지 않은 문제다. (‘영속혁명’ 이론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고 믿었던) 맑스에게도, 다른 공산주의자에게도 말이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전략적으로 단순해지는 경우도 있다. 가령 오늘날 ‘협치’(governance)라는 이름으로 전개되고 있는 류의 ‘포스트민주주의’는 능동적 시민권 이념 일체에 반하기 때문에, 정치를 이 부르주아 전통에 기입하는 것만으로 이미 전복적이 되고, 기성 질서가 용납할 수 없는 것으로 입증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평등자유는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권리와 능력에 관해 말하는바, 이것만으로는 우리가 ‘공산주의적 욕망’이라고 불렀던 것을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런 의미에서 평등자유는 추상적 주체성이라는 특성만을 지닌다 할 것이다.

조르지: 정치적으로 볼 때, 공산주의적 ‘노력’―스피노자의 코나투스처럼―은 어디로 향하는가? 역사적 측면과 예언적 측면은 어떻게 결합하는가? 조직의 문제는 공산주의에 여전히 중심적인 문제인가?

발리바르: 자, 여기에서 우리는 동시대 ‘포스트맑스주의’ 사상가들의 가장 흥미로운 분기점과 수렴점에 천착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스피노자에 준거하지만, 모두가 스피노자를 동일한 방식으로 읽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의 경우에는 코나투스를 예정된 목적 없는 ‘역사적 잠재력의 발휘’―우리는 앞서 『독일 이데올로기』과 관련하여 이를 언급한 바 있다―로 해석하는 데 아무 문제를 느끼지 않는다. 데리다의 유명한 문구를 취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는데, 말하자면 우리가 상대하고 있는 것은 ‘예언 없는 예언주의’, 또는 자기 스스로의 ‘노력’, 자신의 행위 역량과 자율성의 증가에서 오는 것 말고는 어떤 예언도 갖고 있지 않은 예언주의라는 것이다. 스피노자에 준거하는 것은 유용한데, 왜냐하면 스피노자가 아주 잘 보여준바 대중운동은 상상으로 가득 찬 예언이 필요하고 따라서 더욱 양가적이기 때문이다. 대중적 상상 없는 정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공산주의 역사가 보여주는 바다. 가장 깊은 갈등은 조직의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다. 나는 스피노자의 코나투스가 ‘관개체적’이라고 주장한 바 있는데, 그에 반해 네그리는 그 주체가 ‘다중’이라고 말한다. 이에 내가 도달한 결론은, 스피노자에게 있어 정치는 (목표는 다르겠지만, 맑스와 레닌에게 있어서처럼) 늘 조직되어 있고 제도적 매개를 요구하는 데 반해, 네그리에게 있어 정치는 자율성과 조직 사이의 발본적 대립에 의거하여 ‘야생적’ 특성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정치적 불화이지만, 근본적으로는 형이상학적 불화이기도 하다. 내가 합리론적 스피노자에 더 관심을 갖는다면, 네그리는 생기론적 스피노자에 더 관심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많은 일을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조르지: ‘평등 속 차이에 대한 권리’라는 목표는 차이들을 중화시키는 대신, 당신이 썼던 것처럼, “자유의 다양화에 대한 요구이자 그 조건”이 되는 유형의 평등을 창출하는 것이다. 이 이념과 공산주의는 어떤 식으로 관련되는가?

발리바르: 바로 이 주제 때문에 우리는 ‘부르주아-혁명적’ 평등관에서 공산주의적 평등관(이는 맑스보다는 푸리에에게 있어 더 필수적이지만)으로의 이행을 사고할 수 있는 것이다. 정확히는 등식의 이면으로, 그러니까 평등을 과잉결정하는 자유관으로 넘어가야 한다. 부르주아적 자유는 보편적이고, 따라서 보편화할 수 있지만, 사실 차이를 유발(differential)하지는 않는다. 이는 부르주아적 자유가 인간학적 차이들에 대한 차별적(discriminatory) 활용에 맞서 반역할 때 인류의 공통적 권리를 명분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부르주아적 자유는 이들 [인간학적] 차이들 및 차이들의 자유로운 놀이를 평등의 내용과 존재론적 짜임(texture)으로 실정적으로 전환하지 않는다. 차이의 긍정을 공산주의 이념 안에 포함시키는 것은 문헌학적 몸짓이 아니라 수행적 몸짓이다. 그러니까 공산주의의 전통적 의미를 구부려 우리의 보편주의 구상에 맞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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