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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 앞글] 


“스피노자와 정치”는 프랑스대학출판부(PUF)에서 1996년 최초로 출간되어 전세계 스피노자 연구에 한 획을 그은 저서이며(하지만 놀랍게도 이 저서는 “마르크스의 철학”과 유사하게 스피노자에 대한 ‘개론서’ 혹은 교수자격시험 대비용 ‘수험서’이다), 국내에서는 진태원 교수에 의해 한 차례 국역된 이후, 독자들은 현재 그 개정판 “스피노자와 정치”(진태원 옮김, 그린비, 2014)를 시중에서 구해 읽을 수 있다. 이 진태원 교수 번역의 “스피노자와 정치”에는 ‘스피노자, 반오웰: 대중들의 공포’, ‘스피노자에서 개체성과 관개체성’, ‘스피노자, 루소, 마르크스: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에서 정치의 타율성으로’라는 발리바르의 세 편의 중요한 논문의 번역들, 그리고 옮긴이 진태원 교수의 해제와 용어해설까지 들어있어 발리바르의 스피노자론을 이해하는 데에 매우 큰 도움을 준다. 그런데 은퇴할 나이를 사실은 훌쩍 넘긴 발리바르는, 자신의 스피노자 연구를 결산하기 위해, 이 “스피노자와 정치” 전체를 (‘정치와 교통’이라는 논문을 5장으로 포함시켜) 1부로, 그간 집필했던 스피노자 관련 논문들을 모두 모아 2부와 3부로, 그리고 ‘대중들의 공포’를 전체 서론으로 넣어, “스피노자와 정치”의 완전한 의미의 개정증보판인 “정치적 스피노자”를 역시 프랑스대학출판부에서 2018년 출간했다. 그런데 진태원 교수의 노고로 우리는 이미 이 “정치적 스피노자”에 수록된 논문들 중 상당 부분을 한국어로 읽을 수 있으며, 또한 다행히도 1부 5장으로 들어간 ‘정치와 교통’의 경우 윤소영 교수에 의해 번역되어 ‘스피노자, 정치와 교통’이라는 제목으로 “알튀세르의 현재성: 마르크스, 프로이트, 스피노자”(윤소영 편역, 공감, 1996)에 수록되어 있다. 물론 몇몇 역어들이 너무 낡았기 때문에 진태원 교수의 번역을 참조해 역어들을 조정할 필요는 있지만, 독자들은 이 책에 실린 윤소영 교수의 번역으로 “정치적 스피노자”의 1부 5장까지도 한국어로 읽을 수 있다. 참고로 이 1부 5장 ‘정치와 교통’의 경우 영어판 “스피노자와 정치”(Spinoza and politics, Verso, 2008)의 부록으로 영역되어 있다. 이 번역은 옮긴이가 “정치적 스피노자”에 실린 논문들 중 아직 국역되지 않은 ‘관개체적인 것의 철학들: 스피노자, 마르크스, 프로이트’의 일부를 번역한 것인데, 옮긴이의 사정으로 전체를 번역하지 못한 점에 대해 독자들에게 사과드리며, (“스피노자와 정치”의 옮긴이 진태원 교수와 논의된 사항은 전혀 아니지만, 옮긴이가 누가 되었든) 가능하면 “정치적 스피노자” 전체를 번역해 출간할 수 있도록 노력해보겠다. 옮긴이의 사정으로 이 논문에서 스피노자와 프로이트에 대한 논의를 번역하지 못했는데, 스피노자의 경우에는 역시 ‘스피노자, 정치와 교통’을, 프로이트의 경우에는 백승욱 교수의 저서 “생각하는 마르크스”(북콤마, 2017)에 수록된 ‘마르크스의 사유는 어떻게 확장되는가: 발리바르와 ‘정치의 개조’’를 참조하길 바란다. 또한 관개체성, 관계의 존재론, 철학적 인간학에 대해서는 “마르크스의 철학”(에티엔 발리바르 지음, 배세진 옮김, 오월의봄, 2018)의 2장 ‘세계를 변화시키자: ‘프락시스’에서 ‘생산’으로’와 재판 후기인 ‘철학적 인간학인가 관계의 존재론인가: ‘포이어바흐에 관한 여섯 번째 테제’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도 참조하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이 논문에 등장하는 발리바르의 “윤리학” 인용의 경우, 진태원 교수가 번역했으나 아직 미출간된 “윤리학” 완역본의 번역을 따랐음을 밝힌다. "정치적 스피노자"의 전체 목차는 아래와 같다.


“정치적 스피노자: 관개체적인 것”(Spinoza politique : le transindividuel)


서문

출전

서론. Terrere, nisi paveant - 대중들의 공포


1부. 스피노자와 정치

서문

1장. 스피노자의 입장

2장. “신학정치론”: 민주주의 선언

3장. “정치론”: 국가학

4장. “윤리학”: 정치적 인간학

5장. 정치와 교통


2부. 관개체적인 것

1장. 스피노자에서 개체성과 관개체성

2장. Potentia multitudinis, quae una veluti mente ducitur

3장. 관개체적인 것의 철학들: 스피노자, 마르크스, 프로이트


3부. 주체와 진리/진실(vérité) - 세 가지 유들(genres)

1장. Jus-Pactum-Lex. “신학정치론”에서 주체의 구성에 관하여

2장. “윤리학”에서의 conscientia에 대한 주석

3장. 진리/진실의 확립/제도화(institution): 홉스와 스피노자

4장. 스피노자의 세 가지 신


스피노자 연표

색인


관개체적인 것의 철학들 : 스피노자, 마르크스, 프로이트[각주:1]

Philosophies du transindividuel : Spinoza, Marx, Freud


에티엔 발리바르

배세진 옮김


1993년 네덜란드 레인스뷔르흐(Rijnsburg)에서 개최된 “스피노자의 집”(Het Spinozahuis) 총회에서 행했던, 뒤이어 ‘스피노자: 개체성에서 관개체성으로’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던[각주:2] 발표는, 최근의 여러 출판물들이 증거하듯,[각주:3] 철학, 정치학 그리고 사회과학 내에서의 그리고 여러 언어권에서의 ‘관개체적인 것’이라는 범주의 그 가능한[잠재적인] 의미와 활용을 대상으로 하는 두드러진 관심의 부분적 기원인 것처럼 보인다. 내 생각에 이는 특히 스피노자를 고전적 존재론의 역사로부터 분리시키는 스피노자 사유의 한 특징--이 특징은 이미 스피노자의 몇몇 주석가들, 특히 알렉상드르 마트롱(Alexandre Matheron)에 의해 나의 것과는 다른 이름으로 인지된 바 있다--과, 스피노자의 사유를 자기 고유의 체계의 축으로 삼았으며 이를 통해 자연에 대한 사유양식과 문화에 대한 사유양식의 동시적 전복을 희망했던 하지만 그 당시에는 제대로 알려지지(connu) 않았었고 거의 인지/인정(reconnu)되지도 않았던 동시대 철학자 질베르 시몽동(Gilbert Simondon)에 의해 채택된 용어법 사이에서 내가 작동시켰던 상호접근과 관계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때로부터 상황은 굉장히 많이 변화했다. 우선, 그리고 무엇보다도 먼저, 시몽동의 사유가 프랑스의 경계를 넘어 여러 나라에서 빛을 발하는, 그리고 많은 수의 연구의 대상이 되는 그러한 하나의 ‘거대한/위대한’(grande) 철학적 참조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시몽동의 많은 수의 미출간 유고들의 출판, 그리고 또한 그의 저작/작업에 대한 연구자들의 논의들--이 논의들 중에서, 들뢰즈가 남김없이 쏟아냈던 시몽동에 대한 격찬의 계보[즉 들뢰즈적 시몽동 해석의 계보] 내에 자리하고 있는 뮤리엘 콤베스(Muriel Combes)의 작업을 맨 앞 줄에 위치시켜야만 할 것이다(우리는, 많은 점에서, 콤베스가 시몽동을 해석하는 만큼이나 또한 마찬가지로 시몽동의 작업을 연장해 나가고 있기도 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의 증가 덕분이다. 또한 그 다음으로, 존재론적이고 형태학적인(morphologique) 보편적 범주(모든 유의 존재들genres d’êtres에 적용가능한)로서의 개체화를 중심으로 관개체적인 것을 통해 시몽동이 스스로 형성해 가졌던 관념과, 필연(nécessité)의 지배와 자유(liberté)의 지배 사이의 형이상학적 대립들을 의문에 붙이면서 생성/되기, 집합적 변형, 제도들의 가소성에 대한 동시대적인 철학이 지니는 목표들, 이 관념과 목표들 사이의 유사성(analogies)과 친연성(affinités)의 연결망이 점점 더 촘촘해졌다는 점 덕분이기도 하다. 시몽동에게, 서양철학의 역사 전체를 지배하는(심지어 유명론 사상가들에게서도 지배적인) ‘질료형상 도식’(schème hylémorphique)과는 대립적으로, 개체적 형태[아리스토텔레스 식으로 말하자면 ‘형상’]는 개체의 형성(formation)이 그 안에서 본떠지는 그러한 목표도 모델도 아니다. 개체적 형태는 그 자체 무한한 하나의 과정의 불안정한 결과(혹은, 체계들을 대상으로 하는 열역학의 용어법을 차용해 더 정확히 말하자면, ‘준안정적’ 상태, 다시 말해 결합agrégation과 해체désagrégation의 임계seuils 사이에 기입된 상태의 결과)에 불과하다. 시몽동에 따르면 개체화는 이 개체화가 표현하면서도 절대로 소진시키지는 않는 ‘전(pré)-개체적’ 포텐셜과 ‘관개체적’ 초월--개체화는 항상-이미 이 관개체적 초월 내에 관여되어 있다--사이의 중간매개적 자리를 점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개체화는 (내적이면서 동시에 외적인) 하나의 관계(relation) 혹은 관계들(relations)의 앙상블(ensemble)--이 관계를 구성하는 항들은 이 관계에 선재(préexistent)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이 항들 그 자체가 개성화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의 독특하고 순간적인(momentané) 상태로 사고되어야만 한다.     


시몽동 사유의 용어법적 혁신 뿐만 아니라 이미 확립된 철학적 질서를 위반하는 시몽동 사유의 특징들 때문에(비록 [용어법적 혁신과 질서 위반적 특징들이라는] 이 두 가지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는 하지만), 나는 시몽동에게서 ‘관계의 존재론’이라는(그리고 관계relation가 이 관계relation 자신의 항들에 대해 지니는 존재론적 우위라는) 이름으로 스피노자와 마르크스를(혹은 오히려 스피노자의 무언가와 마르크스의 무언가를) 함께 재독해하기 위한 나의 시도의 영감과 보증물을 찾았다.[각주:4] 하지만, 그 이점 전체를 잃어버리지는 않으면서도, 오늘 나는 이와 평행한 또 하나의 길을 탐험하고 싶다. 다른 이유는 차치하더라도 관개체성이 모호함 없이[확정적으로] 식별된 대상을 구성한다는 (나의 관점에서는 그릇된) 인상--오히려 관개체성이라는 이름은, 우선, 주체와 실체의 형이상학 바깥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그리고 자신들 사이에서 잠정적으로는(éventuellement) 모순된 여러 해석 가능성들을 열어젖히는 일종의 부정신학을 포함하는 강령적 이름인 반면, [이 인상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이 대상의 중심으로 하나의 철학적 ‘가족’ 전체를 집합시키게 될 것이다--을 주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보다 더욱 정확한 다음의 두 가지 이유를 원용하도록 하겠다. 첫 번째 이유는, 시몽동의 개념화가 자연이라는 관념과 관련해 (시몽동에 대한 최고의 해석가들에 의해 인지/인정된[각주:5]) 하나의 이율배반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이다. 시몽동에게서 이 자연이라는 관념은 인간적 질서에 선행하는 ‘미완성된’(inachevés) 물리적(physique)이고 생명적(vital)인 질서들로부터 출발해 이 인간적 질서를 출현하게 만듦으로써 ‘국면들’의 점증하는 복잡성을, 그리고 동시에 인간적 관계들(relations humaines)에 특수하게 내재적(immanente)인 집합체로의 성향(disposition au collectif)[‘집합’ 혹은 ‘집단’(groupe)을 이루고자 하는 인간의 성향]을 모두 함께 사고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결정론과 자유 사이의 고전적 이율배반에 대한 단순한 전위가 존재하고 있을 뿐인 것은 아닌지 [비판적으로] 질문해볼 수 있는데,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어찌 되었든 이러한 시몽동의 난점은 이에 대한 비판적 해결책을 요청한다. 두 번째 이유는, 시몽동이 그리고 더 나아가서 시몽동의 독자들이 관계성(relationalité)을 그 자체로 분석하기 위해 철학적 인간학의 지형 위에 스스로를 자리매김하기를 일반적으로는 거부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자리매김은 우리가 ‘사회적 관계들’(rapports sociaux)을 취급할 때 우리가 말하고 있는 바로서의 사회적인 것을, 단순히 기원적-공통-존재(être en commun originaire)의 또 하나의 다른 이름 혹은 하나의 이중어(doublet)로서가 아니라, 다양한 사회들, 역사적 계기들 그리고 적대의 정치적 형세들이 그 해답들--하나의 유일한 원리로는 환원불가능한 것으로 항상 남아 있는 그러한 해답들--을 가져오는 그러한 하나의 문제로 구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완성된(achevé) 개체가 아니라 하나의 과정(procès)으로 사고된 개체화로부터 출발해, 우리가 벗어나고자 노력했던 반정립[안티테제] 즉 개체적인 것과 집합적인 것 사이의 형이상학적 반정립을 다시 만나게 될 위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특히 우리는 존재론의 담론과 정치의 담론 사이의 비판적인 하나의 매개물/매개작용을 결여하게 되는 것인데, 이는 이 두 담론 사이의 절합으로 하여금 하나의 규범적 토대와 아나키적[무정부적] 비결정성 사이에서(즉 ‘존재론적으로’ 연역된 단 하나의 유일한 정치적 규범 또는 아무 규범이든 상관 없는--비교 기준 없는--그러한 규범 사이에서) 동요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로부터 나는, 나 스스로가 활용했던 ‘관계의 존재론’이라는 관념이 부조리하거나 무용한 것이라는 결론을 끌어내지는 않는다. 특히 만일 우리가 이 ‘관계의 존재론’이 포함하고 있는 역설에 계속 귀를 기울인다면 말이다([이 ‘관계’의 ‘존재론’이라는 표현은 역설인데] 왜냐하면 그 정의상 존재론은 존재에 대한 하나의 독트린, 이 존재의 관계relation는 그 상관물일 따름인 그러한 하나의 독트린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반면 이로부터 나는, 개체적인 것과 집합적인 것 사이의 혹은 특수한 존재(existence particulière)와 보편적 인간 본질 사이의 대립들(이 대립들 자신들 서로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과는 (부정négation의 모든 잠재성들virtualités을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펼쳐놓는 방식으로 - 이는 방금 전 내가 부정신학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면서 철학적 인간학을 재정초하는 서로 다른 여러 방식들을 탐험했던 고전적 담론들[즉 스피노자, 마르크스, 프로이트의 담론들]에 대한 비교 분석으로 다시 한 번 되돌아오는 것이, 철학의 범주들에 이 범주들이 일반화하고자 하는 그리고 그 언표를 문제화하고자 하는 그러한 정치적 선-전제를 통합시키는 철학을 위한 하나의 새로운 ‘문법’을 탐험하고 구축하는 단계에서, 어떠한 이점을 취할 수 있을거라 추론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스피노자, 마르크스, 프로이트 사이의 비교] 고찰에서의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질서[차원]를 특별히 염두에 두면서, 불가피하게 개략적인 방식으로 이 글의 이어지는 부분들에서 행하고자 하는 것이다.   


첫 번째로, 이 세 철학자들--우리는 이 철학자들의 담론의 한 계기 혹은 다른 계기에서 이 철학자들이 관개체적인 것(혹은 관개체적 조건으로서의 인간적 조건)에 대한 하나의 이론화를 예시(préfiguré)하거나 개시(initié)했다고 말할 수 있다--은 인간학으로 하여금 인간의 본질을 공동체를 희생시키면서 개체[개인] 안으로 위치시키거나(이 경우 이 공동체는 부차적인, 의지적이거나 의지적이지 않은, 계약적이거나 관습적인, 개체[개인]의 구축물에 불과할 것이다) 개체[개인]를 희생시키면서(이 개체[개인]는 자신의 기원으로부터 다소간 완전하게 ‘소외가능’하거나 분리가능한 그러한 산물에 불과할 것이다) 사회적 존재 안으로 위치시키거나의 양자택일을 강제하는 ‘추상화들’[추상작용들](abstractions)에 대한 이중적 거부의 과정을 작동시켰다. 그러므로 이 철학자들의 탐구에 그 추동력을 부여하는 논리적 형상은 대립적 항들(개인주의와 전체론 혹은 집합주의라는 대립항)을 대상으로 하는 ‘~도 아니고 ~도 아니다’(ni… ni…)이며, 이로부터 도출되는 문제는 어떠한 형태하에서, 어떠한 한계 내에서, 어떠한 정치적(혹은 더욱 일반적으로 말해서는 실천적) 기능과 함께 하나의 양극성(polarité)이 재구성되어야 하는지의 문제이다. 


두 번째로, 세 철학자들에 대한 논의의 의미/방향 그 자체와 탐구의 방향설정은 우리가 (‘고전적’이라고 [일반적으로는] 이름 붙이게 되는) 비교 패러다임을 구축하는 방식에 의존한다. “관개체성의 정치학”에서 리드는 존재론적 추상화의 세 가지 ‘비판적’ 담론들(즉 스피노자, 헤겔, 마르크스의 담론들)을 맞세우는 하나의 기원적[원초적] 장면을 구성(institue)한다. 공통적으로 이 세 가지 담론들은 (스피노자의 유명한 정식을 좇아 말하자면 ‘또 다른 왕국 속에 있는 하나의 왕국’으로 전제된) 고립된 개체성이 하나의 외양--이 외양은 이 외양의 담지자들 자신들의 눈에는 사회적 관계의 기능작용에 의해 생산된 것으로 보이며, 또한 이 외양은 역으로 이 사회적 관계를 오인의 ‘주관적’ 양식 위에서 기능작용하도록 만들 수 있게 해준다--이라는 점[쉽게 말해 고립된 개체성이란 허상이라는 점]을 증명하고자 한다. 나는 리드의 이러한 테제에 반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만일 내가 리드와는 달리 헤겔을 프로이트로 대체한다면(이것이 헤겔을 프로이트의 관점에서 다시 읽을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이는 내가 여기에서 언급된 모든 저자들에게서 특수하게 무의식적인 하나의 결정작용(détermination)이 현존하고 있다는 점을, 혹은 (다음과 같은 표현을 원한다면) 사회적 관계의 정의에 그 이중적 바탕(double fond)이 깔려있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는 특정한 방식으로 프로이트에게 하나의 특권을 (하지만 다른 이들의 위치/입장들을 프로이트의 위치/입장으로 환원하지는 않으면서) 부여하게 되는데, 이것이 프로이트에게서 이중적 거부에 대한 언표행위가 가장 명시적이라는(“집단심리학과 자아분석”의 서문이 명시적으로 지적하듯, ’심리학’도 ‘사회학’도 억압, 전이, 동일시/정체화라는 현상들을 사고할 수 있게 해주지 ‘않는다’ - 그렇기 때문에 프로이트에 따르면 우리는 또 하나의 다른 분과학문[즉 정신분석학]을 발명해야만 하는 것이다) 사실과 관계가 없을 수는 없을 것이다.[각주:6] 


세 번째로, ‘관계’(rapport) 혹은 ‘관계’(relation)라는 개념(이 두 용어들은, 예를 들어 영어에서 그렇지 않듯, 대부분의 언어에서 명확히 구별되지는 않는다)은 철학에서 본질적으로 다의적이다. 아마도 ‘관계’는 존재 그 자체가 그러하듯 여러 다양한 방식으로 ‘말해’지는 것 같다. pollakhôs legomenon…[각주:7] 방법론적 결단을 통해, 우리는 관계 일반의 ‘사회적 관계’로의 결정이 이러한 다의성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오히려 이는 이 다의성을 그 자체로 펼쳐놓는 것이라는 점을 전제해야만 한다. 특히 우리는 우리가 구성(instituons)하는 가상적 논쟁의 주인공들(마르크스 뿐만 아니라 또한 스피노자 혹은 프로이트) 중 한 명이 ‘사회적인 것’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진리/진실을 소유하고 있다고 결정해서는 안 된다. 사실 우리의 작업가설은 사회적인 것 혹은 사회적 존재관계의 범주로 다시 포섭되어야(reconduit) 한다는 것, 하지만 현대라는 시기에는 [정관사] 관계를 전제하는(혹은 ‘비-관계’ 또한 엄연히 [관계의] 하나의 양태인 그러한 ‘관계가 존재한다’고 전제하는) 여러 방식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각주:8] 정확히 이것이 바로 ‘관개체적인 것’이라는 일반 관념이 그 강령적 열림/출발(ouverture) 내에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나는 앞에서 언급한 작업가설을 염두에 두면서 나의 질문이 포함하는 지점들을 하나씩 하나씩 다시 취해보도록 하겠다. 나는, ‘사회적 관계’에 대한 질문이 그 동시대의 정치적 쟁점들과 함께 그 자체 무매개적으로 주제화될 수 있도록, 그리고 동시에 나의 [마르크스에 관한] 이전 정식화들 내에서 불완전한 것으로 남아 있었던 바를 정정하기 위해, 마르크스에서부터 출발할 것이다. 그 다음 나는 이로부터 스피노자로 다시 거슬러 올라갈 것인데, 이 논쟁에서 스피노자의 개입은 ‘존재론적’ 문제설정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다리’를 명백히 구성해왔기 때문에 그러하며, 또한 스피노자에게서 관개체성의 도식을 보편적으로 확장하는 것에 대한 저항으로 존재하는 바를 표시하기 위해서 그러하다(과거에 그러했던 것보다 지금의 나는 이렇듯 스피노자에게서 관개체성의 도식을 보편적으로 확장하는 것에 대한 저항으로 존재하는 바를 더욱 명확히 의식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나는 프로이트로 내려올 것인데, 내 관점에서 프로이트는 이전의 관점들에 대한 하나의 ‘종합’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이 지점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바와 이 지점들을 서로 구별해주는 바로 접근하기 위한 최상의 길을 대표하는 것으로 보인다. 


마르크스의 물신숭배: 소외된 관계에서 관계로서의 소외로


[마르크스에 관해] 이전에 개진했던 설명들에서, 나는 무엇보다도 1845년의 ‘포이어바흐에 관한 열 한 가지 테제들’의 중심에 등장하는 언표에 대한 한 가지 재독해에, 우리가 마르크스에게서 발견하는 관념 즉 ‘관계의 존재론’이라는 잠재적으로(potentiellement) 혁명적인 개념을 연결지었다. “그러나 인간적 본질[das menschliche Wesen]은 독특한/개별적 개체(individu singulier)에 내재하는(inhérente) 추상물(abstraction)[kein dem einzelnen Individuum inwohnendes Abstraktum]이 아니다. 그 유효한 현실(réalité effective)[Wirklichkeit]에서, 인간적 본질은 사회적 관계들(rapports sociaux)의 앙상블(ensemble)[das ensemble der gesellschaftlichen Verhältnisse]이다.[각주:9] 블로흐로부터 유래하는 해석 제안들을 알튀세르로부터 유래하는 해석 제안들과 결합하면서(이는 너무 과감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정식화--이 정식화 내에서 ‘본질’이라는 통념은 사실은 ‘반(anti)-본질주의적인’ 하나의 의미를 부여받는 것으로 보인다(스피노자의 욕망에 대한 그 유명한 ‘정의’, 즉 “욕망은 인간의 본질 그 자체”라는, 다시 말해 욕망은 인간을 개체[개인]로서 독특화하는 것이라는 ‘정의’ 내에서, [마르크스의 경우에서와는] 다른 수단들을 통해 그러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우리가 말할 수 있듯[각주:10])--가 내포하는 의도적 역설을 강조했다. 특히 나는, ‘추상물’(혹은 보편적인 것)을 개체성의 중심에 ‘기거케’(loger) 했던 서구 형이상학의 두 가지 전통(즉 아리스토텔레스적 자연주의의 전통과 아우구스티누스적 유심론의 전통)을 동시에 ‘전도’함으로써, 마르크스가 관계(rapport) 혹은 관계(relation)(즉 독일어로 Verhältnis)를 가지고서, 각각의 주체에게서 하나의 고유한 개체성--다소간 갈등적인 방식으로 체험(vécue)되는--을 ‘생성’하거나 구성하는 바, 그리고 이러한 개체성을 다른 개체성들에 무매개적으로 ‘의존적’인 것--이 다른 개체성들이 스스로를 (예속화로까지 나아갈 수 있는 일반화된 ‘의존성’으로, 혹은 이와는 정반대로 해방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젖히는 실천적 연대성으로) 확립/제도화하는 방식에 따라--으로 만드는 바, 이 두 가지 모두를 동시에 만들어낸다는 점을 강조했다.[각주:11] 바로 이러한 이중적 구성[앞 문장에서 언급된 ‘이 두 가지’]을 나는 ‘관개체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또한 바로 이러한 이중적 구성을, 어떠한 하나의 철학적 인간학의 잔해(ruines) 위에서, 내가 유물론적 의미/방향에서의 ‘관계의 존재론’의 출발점으로 간주하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이미 앞에서 언급된 이중적 거부의 제스처, 그러니까 개체성이 하나의 ‘일차적 실체’(substance première) 혹은 하나의 ‘기원적 주체성’(subjectivité originaire)으로 고립된(séparée) 방식으로 개념화가능한 ‘자율적’인 것이 아니며, 더욱이 이 개체성이 자신을 포함하는 총체성으로 환원가능하지도 않다(이 총체성이 하나의 유적 본질로 추상적으로 개념화되든, 혹은 그 통일성이 실체화hypostasiée된 하나의 사회 혹은 공동체로 분명 더욱 구체적인 방식으로 개념화되든)는 이중적 거부의 제스처의 역행불가능성[즉 이 이중적 거부의 이전으로 회귀할 수 없음]을 명확히 표시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관개체성이 어떤 의미에서는 공리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관개체성은 무매개성 혹은 소여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바로 이 관개체성이 ‘기원적’인 것이다(우리에게는 뒤에서 이러한 명명notation의 중요성에 대해 논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특징이 도출된다. 첫 번째 특징은 마르크스주의의 모든 해석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것이며, 두 번째 특징은 더욱 감추어져 있는 것으로, 나는 이 특징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고자 노력했던 바 있다. 마르크스의 ‘비판적’ 의도의 핵심을 명확히 구성하는 첫 번째 특징은 인간의 ‘관계적’(relationnelle) 본질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실현양식을 지닌다는 사실이다. 본래적인 것 혹은 ‘참된 것’이라고 우리가 부를 수 있을 첫 번째 실현양식에서, 각각의 개체에게 이 각각의 개체의 생명의 내용을 부여하는 상호적 의존의 관계들(relations)은 그 자체로서 체험되고(vécues) 받아들여지는데(assumées), 이는 또한 각각의 개체의 실천(그것이 노동이라는 실천이든 문화라는 실천이든)에 하나의 ‘사회적’ 차원--주체들은 이 ‘사회적’ 차원의 의식적 담지자들로 스스로를 형성한다(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에 관한 열 한 가지 테제들’ 바로 직전에 집필했던 텍스트들[각주:12]에서 자신이 체계적으로 정교하게 구성했던 유적 본질이라는 관념과 바로 이 지점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을 부여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르크스 스스로가 ‘소외된’ 혹은 ‘자기-소외된’(auto-aliéné)([selbst]entfremdet) 것으로 지시하는 두 번째 양식에서, 개체들은 자기 스스로에 대해 그리고 자기 스스로 안에서(zerrissen, entzweit)[각주:13] 찢어진(déchirés) 주체들인데, 왜냐하면 이 개체들은 자신들의 존재 그 자체에서의 경쟁 상태 내에 놓여지게(mis en concurrence) 되기 때문이며, 정확히 바로 이것이 이 개체들이 스스로를 고립된(séparées) 혹은 ‘추상적인’ 개체성들로 지각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사회적 관계는 ‘탈사회화’되거나 혹은 그 본질로부터 고립(séparé)되며, 이것이 사회적인 것의 (재)사회화--동시에 이는 이 사회적인 것의 ‘인간화’(열 번째 테제)이기도 할 것이다--의 기획을 향한 길[가능성]을 열어젖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소외된 사회적 관계들’(rapports sociaux aliénés)이 더 이상 사회적 관계들이 아니라는 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이 ‘소외된 사회적 관계들’이 그 담지자들(그러니까 ‘부르주아’ [시민]사회의 주체들)에게 그 반대물의 형태 속에서(아주 명확하게 소유적 개인주의의 형태 속에서[각주:14]) 실현되고 나타난다(apparaissent)는 점을 의미한다. 이는 이 주체들에게 그리고 [이 주체들이 구성하는] 사회에 어떠한 참을 수 없는 긴장을 만들어내는데, 혁명적 프락시스(praxis)는 바로 이 참을 수 없는 긴장으로부터 자신의 자양분을 얻는다. 하지만 마르크스에 대한 가장 강한 독해에서, 이러한 프락시스는 하나의 주체적 선택 혹은 하나의 우발적 결정이 아니며, 오히려 이 프락시스는 사회적 관계들에 내재하는(inhérent) ‘변형가능성’(transformabilité) 혹은 ‘변화’(change)(즉 독일어로 Veränderbarkeit)의 활성화 이외의 그 무엇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Veränderbarkeit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다른 의미/방향이 존재하는데, 나는 마르크스가 ‘포이어바흐에 관한 열 한 가지 테제들’(특히 여섯 번째 테제)에서 구성적인/구성하는(constituants) ‘사회적 관계들’(rapports sociaux)에 하나의 정확한 사회적 혹은 제도적 영역을 부여하지 않도록 매우 조심했다는 사실을 해석하면서 이를 보여줄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이 또 하나의 다른 의미/방향이란 사회적 관계들의 내용과 대상을 (최소한 이 내용과 대상의 ‘기원적’ 양태 내에서는) 변용하는, 그리고 이 내용과 대상을 이렇게 ‘가소적’인 것으로 만들거나 다수의 ‘상호능동적’(interactionnelles) 상황들 내에서 차례를 바꿔가며 실현될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 그러한 비결정성이다.[각주:15] Veränderbarkeit에 대한 이러한 두 가지 독해 가능성은 마르크스의 텍스트의 문면 내에서 서로 배타적이지는 않다고 해도 최소한 서로 경쟁하고 있으며, 이 두 가능성 모두 동등하게 ‘관개체성’이라는 이름에 의해 열어젖혀진 존재론적이고 윤리-정치적인 질문을 제기하는 데에 기여한다. 


이토록 강력한 직관이, 그것이 ‘경제적’이라는 이름이든 ‘정치적’이라는 이름이든 혹은 ‘철학적’이라는 이름이든(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이러한 구별은 마르크스의 문제설정과 관련해서는 매우 부적절한 것이다) 어떠한 이름을 달게 되었든지간에, 마르크스의 이후의 저작/작업에서 어떠한 식으로 발전/전개되었는지 질문해보지 않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마르크스-이후(postmarxien)의 모든 [이론적] 원동력은, 내가 방금 소묘했던 딜레마를 사회적 노동분할[사회적 분업]과 자본주의에 의해 재촉된 이 사회적 노동분할의 역사적 진화(évolution)의 용어들로 재번역하면서, 이 딜레마로부터 출발해 펼쳐지는 것이다. 잠재적(potentielle) 비결정성으로의 회귀가 개체들의 활동(과 이 개체들의 삶)의 자본의 가치화/가치증식(valorisation) 논리 아래로의 포섭에 의해 이 개체들에게 강제된 소외적(aliénante) 특수화/전문화(spécialisation)[즉 ‘파편화’]를 극복할 ‘생산력’에서의 혁명의 지평을 명확히 구성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말이다. 일반 지성(general intellect)의 출현에 대한 “그룬트리세”(1857년 원고)의 이론적 전개들이, 그리고 더욱 일반적으로는 부정의 부정이라는 형태하에서의 ‘공산주의’의 정의에 대한 소묘들 전체가 마르크스로 하여금 관개체적인 것의 관점을 이중적 거부(‘~도 아니고 ~도 아니다’)의 형태하에서라기보다는 ‘~도 그렇고 ~도 그러하다’(혹은 대립물들 간의 동시적 확인/긍정affirmation)의 형태하에서(즉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적 사회화의 결과들이라는 토대 위에서 개체성을 복원하는 것이다”) 다시 확인/긍정하도록 이끄는 것이다.[각주:16] 따라서 유적 존재(Gattungswesen)는 자본주의를 (가설적으로) 그 부정으로 이끌어가는 역사적 발전의 결과로 다시 사고되는 것이다. 나는 마르크스의 텍스트들에 대한 이러한 [해석] 계보가 그것이 포함하고 있는 일련의 이론적 발전들(enrichissements)과 함께 지니고 있는 중요성에 대해서는 전혀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의 나에게 중요한 이론적 관점 내에서, 나는 마르크스가 또 하나의 완전히 다른 방향을 개념적으로 취하기도 했다는 점을 보여주면서 하나의 대안의 존재를 정당화하고자 하는데, 이 대안은 관개체적인 것이라는 관념에 훨씬 더 거대한 복잡성을 부여하며, 관계의 소외(그러니까 ‘사회적인 것’의 소외)가 아니라 정반대로 관계로서의 소외(혹은, 이러한 표현을 원한다면, ‘사회효과’effet de société의 실정적 개념으로서의 소외된 관계)를 문제화함으로써, 명백히/표면적으로는(apparemment) 해소된 것처럼 보이는 인간학적 질문을 다시 열어젖히는데에 기여한다.[각주:17] 나에게 이러한 대안은 본질적으로, ‘상품물신숭배’에 관한 저 유명한 이론적 전개를 하나의 고발 혹은 경계(물론 분명 이 또한 마르크스의 의도 중 하나이다)로서가 아니라 (자본주의 내에서, 그러니까 자본주의의 기원origine 혹은 가설적 종말fin에서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현재성actualité 내에서) 역사적으로 활동적인(agissante) 하나의 구조에 대한 기술(description)로 독해한다는 조건에서, 바로 이 ‘상품물신숭배’에 관한 이론적 전개에서 등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상적으로는(그러나 이는 우리를 터무니없이 과도한 우회를 하도록 만드는 일일 것이다), 이 명제의 모든 의미를 포착하기 위해 상호-주체성(그러니까 ‘인정reconnaissance’)에 관한 헤겔적 현상학의 궤적 내에 이 명제를 일종의 대항-현상학(contre-phénoménologie)--이 대항-현상학 내에서 ‘주체’의 개체적 심급(즉 ‘나’)과 집합적 심급(즉 ‘우리’) 사이로의 분열과 보편적 공동체라는 관념 내에서의 그 화해(Versöhnung)라는 질문은, 주체와 그 실체적 생성/되기의 편에서만 배타적으로 다루어지는 대신에, 객체/대상과 객체들/대상들의 편으로, 다시 말해 대상성/객체성/객관성과 ‘객체들/대상들의 세계’와 이 ‘객체들/대상들’의 (주체들 사이에서의 중간매개자들--이 중간매개자들은 우회할 수 없는 수단들이며, 사실은, ‘주체들’ 즉 ‘인간들’이 자신들 사이에서 맺는 모든 관계들relations에서 결정적인 것이다--로서의) 우회할 수 없는 역할(예를 들어 이 ‘객체들/대상들’의 ‘상품’으로서의 역할)의 장 안으로 전위될 것이다--으로 기입할 시간을 가지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이러한 주장 전체를 이 글에서 전개할 수는 없기에, 나는 마르크스가 물신숭배론에서 구축한 이러한 ‘상호-대상성/객체성/객관성’의 관점을 단숨에 취해, ‘포이어바흐에 관한 열 한 가지 테제들’의 정식화들과 비교해 어떤 점에서 이 물신숭배론이 관개체적인 것에 대한 새로운 통념을 구축하는 것인지를 보여주고자 시도하겠다.[각주:18] 특히 나는, 마르크스주의 내의 모든 전통이 (이 절을 수용하든 거부하든) 짧은 철학적 논고(traité)--이로부터 출발하여 ‘자본의 논리’ 전체를 해석할 수 있을 그러한 논고--로 간주함에서는 모두가 동의하는 “자본”의 이 절[즉 “자본” 1권 1편 1장 4절 ‘상품의 물신적 성격과 그 비밀’]에서 마르크스가 분석했던 자본주의 사회에 고유한 ‘사회효과’가 사실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 보완적인 두 가지 수준으로, 그렇지만 부정의 부정으로서가 아니라 일종의 이중화된(redoublée)[배가된/중첩된] 소외 혹은 소외 속의 소외로, 그러니까 ‘사물의 물신숭배’(상품)와 ‘인격의 물신숭배’(법[률]적 주체)로 펼쳐진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다. 이로부터 관개체적 관계(relation)가 이 지점에서 개체들을 ‘관계 내에 자리매김’(met en rapport)하고 이 개체들을 형성하거나 이 관계 자체 내에서 공형성(conforme)하는 하나의 단순한 관계(relation simple)가 아니라 두 얼굴[면]의 이중적 관계(relation double)로 제시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논의를 축약하기 위해, 이를 서로가 서로에 대해 구별되지만 동시에 분리 불가능한, 하나의 장소와 그 이면인, 하지만 또한 각각이 다른 편의 하나의 유효한/현실적(effective) ‘매개물/매개작용’인, 그러한 경제적 얼굴[면]과 법률적 얼굴[면]이라고 말하도록 하자.[각주:19] 이 두 측면들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보도록 하자. 


첫 번째 측면은 (물신숭배에 관한 장에서 가져온) 다음과 같은 명제 내에 본질적으로 위치해 있다.  


오직 이 관계들(relations)을 통해서만 교환은 노동의 생산물들 사이에서, 그리고 이 노동의 생산물들의 중간매개(intermédiaire)를 통해, [직접]생산자들 사이에서 확립(instaure)되는 것이며, 또한 사적 노동들이 유효하게(effectivement), 현행적으로(en acte), 전체(global) 사회적 노동의 구성원들[Glieder]이 되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직접]생산자들에게는 그들의 사적 노동의 사회적 관계(relations sociales)가 그러한 대로(pour ce qu’elles sont), 즉 그들이 노동을 통해서 맺는 인격들(personnes) 간의 직접적인[무매개적인] 사회적 관계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인격들 간의 물적/비인격적(impersonnels) 관계와 물적/비인격적 사물들(choses impersonnelles) 간의 사회적 관계로서 나타난다(apparaissent)[als unmittelbar gesellschaftliche Verhältnisse der Personen in ihren Arbeiten selbst, sondern vielmehr als sachliche Verhältnisse der Personen und gesellschaftliche Verhältnisse der Sachen].[각주:20] 


우리는 이 명제를 (‘가치-형태’에 대한 이론적 전개에 할애된) 이전 절들[즉 “자본” 1권 1편 1장의 1, 2, 3절]이 확립했던 바 전체로 보충해야만 한다. 즉, 이러한 ‘외양’ 혹은 더욱 정확히 말해 이러한 활동적 ‘나타남(apparaître)’의 양식은 무매개적으로 물질적 사용대상인 상품들이 자신들의 교환가치(최종적인 수준에서는 이 상품들의 생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의 특정한 수량을 표상하는)를 다른 하나의 사용가치의 형태(발전된 상품생산 내에서, 달리 말해 자본주의적 생산 내에서, 이 형태는 항상 화폐 즉 ‘보편적 상품’ 혹은 모든 상품들의 ‘일반적 등가물’이다) 내에서 표현한다는 사실 위에 기초해 있다고 말이다. 결과적으로, 화폐로 ‘표현되는’ 교환가치로서의 상품들의 나타남은 사회적 관계에 외재적인 것(extrinsèque)이 아닐 뿐만 아니라, 또한 이러한 나타남 없이는 혹은 (허구적 방식으로 말해) ‘이러한 나타남 바깥에서는’ [직접]생산자들과 그들의 활동들(즉 그들의 ‘사적 노동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최소한 자본주의가 발전한 사회 내에서는) 이와는 다른 사회적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모든 사회적 관계들은 상품 형태와 화폐를 통과/경유(passent)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문장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소외된 형태(그러니까 개체들[개인들]이 상품과 화폐의 소유자로서가 아닌 한에서는 ‘서로를 인식하지connaissent 않는’ 그러한 상품 교환의 형태) 내에서, 사회적 관계들은 ‘그러한 대로’(als das, was sie sind) 나타난다고 말이다. 사회적 관계들은 (사회의 ‘구성원들’ 사이에서) 무매개적이지 않으며, 이 사회적 관계들은 상품 교환과 가치-형태의 요소 내에서 상품들 그 자신들 사이의 등가 관계들로 원격적 방식으로(à distance) 구축된다. 그리고 이와는 다른 사회적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을 관개체성의 관점에서 재정식화해보도록 하자. ‘사회적 관계’를 그 외양(다시 말해 그 ‘형태’)과는 독립적으로 주어지는(혹은 사고가능한) 하나의 현실적인 것(réel)으로 혹은 하나의 이상적 상황--그 안에서 ‘인격적 관계들’이 ‘사물들’(상품적 등가성) 사이의 하나의 관계의 형태로 표현될 필요가 없을 만큼 ‘무매개적으로 사회적인’ 그러한 이상적 상황--으로 간주하는 그러한 오류에 빠져서는 안 된다. 따라서 개체들[개인들]에게 ‘사회’--이 개체들[개인들]은 바로 이 사회의 구성원들이다--를 보이게 만들 뿐만 아니라 또한 이와 동일하게 이 ‘사회’를 확립/제도화하기도 하는(왜냐하면 이러한 표상과 이 표상의 교환 내 활성화 바깥에서 개별 생산자들은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는pour 존재하지 않을 것 혹은 ‘사회’를 형성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것은 바로 서로가 서로에 대하여(contre) 교환되는, 화폐적 표현 내에서 그리고 더욱 일반적으로는 ‘감각적이며 초감각적인’(sensible suprasensible) 가치-대상의 표현 내에서 대상화/객체화/객관화되는 그러한 사물들의 체계이다. 이 상황이 하나의 소외 혹은 (무매개적으로 ‘인격적인’) 하나의 이상적 관계(relation)의 ‘전도’로 사고되어야만 한다는 것은 관개체성을 파괴하지 않을 뿐만 아니로 오히려 이 관개체성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마르크스의 독자들에게 충분히 잘 알려져 있는 것인데(비록 이 마르크스의 독자들이 이를  종종 다른 용어법을 통해 해석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내 견해로 이 모든 것은 마르크스의 구축물의 첫 번째 절반만을 구성하고 있을 뿐이다. 분명 ‘상품물신숭배’에 관한 마르크스의 설명은 이러한 방식으로 명명된 필연적 허구(illusion nécessaire)가 경제적 대상성/객체성/객관성에서 구성적이라는 점을 증명하기를 원한다. 동일한 범주들을 활용하는, 유능한 칸트주의 철학자라면 대상적/객체적/객관적 인식에 대한 ‘분석론’과 이데올로기에 대한 ‘변증법’으로 구별했을 바를 도발적인 방식으로 융합시키면서, 마르크스의 구축물은 대상성/객체성/객관성의 중심에, 경험의 가능조건으로서, 하나의 근본적 오인을 확립한다. 이 근본적 오인은 다음과 같은 정식 내에서 요약된다. (노동의 사회적 분할에서부터 출발해 형성되는) 개체들[개인들] 고유의 사회적 관계들은 이 개체들[개인들](‘생산자-교환자들’)에게 사물들(즉 상품들) 사이의 (가치)관계들로 나타난다(apparaissent). 하지만 ‘경제적’ 형태들을 목표로 하는 이러한 증명은 ‘인격의 물신숭배’에 대한, 달리 말해 ‘인격’이라는 법률적이고 도덕적인 통념에 내포되어 있는 ‘사물의 물신숭배’에서만큼이나 필연적인 허상에 대한 또 하나의 대칭적 증명을 통해 보충/완성(complétée)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인격의 물신숭배’라는 상관항은 마르크스에 대한 전통적 주해에서 훨씬 더 어렵사리 포착되었는데, 이는 한편으로 이 상관항이 고립된(séparé) 하나의 이론적 전개[각주:21]에서 등장하기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는 이 상관항이 사실은 용어법의 문제를 훨씬 넘어서는 문제를 내포하는 ‘인격’이라는 통념과 관계된 하나의 딜레마를 해결(trancher)하도록 강제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때로는 사회적 관계들의 자연적 혹은 준-자연적 ‘담지자’(Träger)--이러한 의미에서 상품들의 가치를 담지하는 ‘유용대상’과 유사한--로서의 인간 개체[개인] 일반을 지시하기 위해, 때로는 (그 아래에서 이 인간 개체[개인]가 서로서로를 상호적으로 주체로 지각하고 인정의 과정 내에 진입하는 그러한) 법률적 형태--‘가치-의-형태’와 혹은 교환가치와 유사한--를 지시하기 위해, 독일어 페르조넨(Personen)에 대해 언급한다. 결국 이는 인격들 그 자신들의 ‘인격적’ 외양의 수수께끼를 푸는 것과 관련되는 것이다… 그런데 진실을 말하자면 이러한 대체보충물(supplément)의 존재 이유는, 마르크스가 ‘이중적’ 대상으로서의 상품들에 의해 담지되는 사회적 대상성/객체성/객관성 효과가 하나의 단순한 수동적 ‘지각’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나의 실천 즉 교환이라는 실천(이러한 교환이라는 실천의 장소는 바로 ‘시장’이다)으로부터 도출된다(이러한 의미에서 보자면, 최소한 우리가 전통적인 인지적 의미로 이 단어를 취한다면, 외양이라는 용어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용어이다)는 점을 설명하는 이전 이론적 전개의 한가운데에 [이미] 지시되어 있다. 왜냐하면 상품들은 “시장으로 자기들 스스로 걸어서 갈 수 없”으며, 이 상품들은 이 시장에서 서로가 서로에 대해 교환되기 위해서는 시장에서(그리고 사실 항상 화폐의 중간매개를 통해 - 교환자들은 바로 이 화폐의 소유자들이다) [생산자-교환자들에 의해] 담지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관계들이 사물들 사이의 관계들로 제시된다는 점을 보여준 뒤, 이제 마르크스는 사물들 사이의 관계들이 ‘인격들’--이 ‘인격들’은 또 하나의 다른 사회적 관계에 의해 혹은 이전 사회적 관계의 또 하나의 다른 측면에 의해 자신들 사이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의 개입 혹은 매개작용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어야 한다. 


“자본” 1권 1편의 2장을 독해했다면 혹은 [우리의 논의 맥락에 따라] 다시 독해했다면, 우리는 이 관계가 소유(propriété)와 계약(contrat)이라는 ‘추상적’(다시 말해, 모든 구체적 상황과 모든 개별적particulière 개체성에 적용가능한, 보편적) 범주들--이 범주들이 형성하는 체계는 전유와 등가성의 ‘경제적’ 관계들(relations)의 거울상과 같은 것이다--을 중심으로 구축된다는 점을 파악하게 될 것이다.[각주:22] 따라서 상품들 사이의 등가성에는 구매와 판매 계약의 당사자들 사이에서 요구되는 법률적 평등(이것이 형식적인 평등이든 혹은 ‘권리에서의’(en droits)[즉 정당한 혹은 실제적인] 평등이든)이 조응한다. 그리고 이 법률적 평등의 경우 이는 계약자들의 자유에 의해서만 존재가능한 것인데, 이는 부정적으로는 계약자들이 그들 사이에서 의존 혹은 복종의 관계 내에 있지 않다는 점을, 실정적으로는 이 계약자들이 소유자(propriétaires)로, 특히 (로크로부터 유래하는 정치[철학]적 정식화를 따르자면) ‘자기 자신의 인격의 소유자’로 간주된다는 점을 의미한다. 결국 바로 이 수준에서 하나의 상호-주체성/주관성이, 혹은 오히려 상호-주체성/주관성의 하나의 (제도적) 효과--법권리(droit)라는 수단에 의해 구축된(주체들은 자신들 고유의 ‘경제적인’ 사회적 관계들의 실천의 실행mise en œuvre과 유효화effectuation 속에서 자신들의 역할Charactermaske을 수행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 법권리와 스스로를 동일시한다)--가 재돌발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쓸 수 있었던 것이다. “인격들이 서로에 대해 쓰는 경제적 가면은 경제적 관계들의 [법률적 - 발리바르] 인격화(personnification)와 다른 것이 전혀 아니며, 바로 이 관계들의 담지자들로서 이 인격들은 서로서로 만나게 되는 것이다.”[각주:23] 절대로 경제적 행위자들(즉 자본가, 임노동자, 상인 등)은 ‘살아있는’ 단순한 인간 존재로서의 기원적 나체 상태(nudité)로 서로를 만나지(gegenübertreten) 않는다. 경제적 행위자들은 그들이 (우선적으로[이미]) 자율적인, 개성화된[개인화된], 그 자체로 인지/인정된 인격들이 된다는 조건에서만 유용하게 즉 사회적으로 이를 행할 수 있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 인격들이 ‘사물들’과 혼동[결합]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각주:24] 마르크스의 문제설정 내에서, 이는 교환을 위해(그리고 필요한 경우에는 착취를 위해) 개체[개인]를 해방시키는 법률적 형태들이 첫 번째 수준만큼이나 본원적(original)이며 첫 번째 수준과 상관적인 소외의 두 번째 수준--소외의 첫 번째 수준은 소외의 두 번째 수준의 실현을 보증하기 위해 실천적으로/현실적으로 이 소외의 두 번째 수준에 기입된다--을 구성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경제적인 것은 법률적인 것을 형성(informe)하고 법률적인 것은 경제적인 것을 활성화한다.[각주:25]


이제 우리는, 바로 이러한 복잡한 형태, 더욱 정확히는 상호적(réciproque)이면서 동시에 비대칭적인 이러한 이중적 구조화가 바로 마르크스의 이론 내에서 ‘관개체적인 것’으로 전개된 새로운 개념으로 간주하자고 내가 제안하는 것이라는 점을 이해했을 것이다. 이러한 복잡한 형태 즉 이중적 구조화는 포이어바흐에 관한 여섯 번째 테제에서 소묘된 관념들로부터 가져온 다음과 같은 중심적인 철학적 직관을 이론의 여지 없이 명백히 보존하고 있다. 개인주의적이고 전체론적인(유기체론적인) 존재론들에 대한, 그리고 이 존재론들이 산출하는 사회정치적 결론들에 대한, 관계(relation)의 혹은 구성적/구성하는 관계(relation constituante)의 우위를 취하는 방식으로 행해지는, 이중적 거부라는 철학적 직관 말이다. 하지만 이렇듯 복잡한 형태를 취하는 이중적 구조화는 그 소외된 역사적 형태들 내에서 소멸할 관계(relation)의 ‘본래성’이라는 관념에 대한 전도를 특정한 방식으로 실행한다. 이 전도로 인해 이제는 바로 이 소외된 역사적 형태들이 (어떠한 하나의 특정한 역사적 인간학과의 연관 속에서) 관개체적인 것을 구축하는, 혹은 앞에서 내가 알튀세르의 표현을 통해 제안했듯, ‘사회효과’를 개체들[개인들] 자신들을 위해 생산하는 그러한 역할을 떠맡게 된다. 분명 나는 사태를 바라보는 이러한 방식이 마르크스의 모든 독자들로 하여금 일련의 문제들을, 심지어는 일련의 난점들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모르지 않는다. 한편으로, 이러한 방식은 ‘비-상품적’ 혹은 ‘비-자본주의적’ 사회들--이 사회들에서 이중적 소외는 존재하지 않는다(혹은 보편적으로 구조화하는 그러한 [‘상품적’ 혹은 ‘자본주의적’ 사회에서와 같은] 동일한 역할을 수행하지는 않는다)--내에서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특히 가설적 공산주의--자신의 설명 내내 마르크스는 생산의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조직화와 사회적 노동 지출의 (시장을 중간매개로 하는) ‘간접적’이고 ‘무의식적’인 조직화 사이의 차이를 이해시키기 위해, 그리고 또한, 마지막으로 하지만 가장 중요하게는(last not least), 이러한 조직화가 언젠가는 역사적으로 소멸할 수 있다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 바로 이 가설적 공산주의에 끊임없이 준거했다--내에서의 관개체적인 것에 대한 이해를 불확실(incertitude)한 것으로 만든다. 도대체 어떠한 의미에서 공산주의는 관개체성의 차원 내에서, 그리고 심지어는 ‘사회적 관계’의 한 양태로 사고될 수 있을 것인가? 만일 이 ‘사회적 관계’라는 것이 앞에서 기술된 것과 같은 이중적 소외와 구조적으로 일치(coïncider)하는 것이라면 말이다. 오늘날 공산주의라는 관념은 관개체적인 것의 관념에 대한 완성이 아니라 하나의 예외 혹은 더 나아가 이 관개체적인 것의 관념의 논리로부터의 도주점을 표상하는 것으로 보인다(나는 뒤에서 이 문제로 다시 돌아오겠다). 다른 한편으로, 현실 혹은 사회적인 것의 유효성/효과성(effectivité)을 형성하는 관계를 이러한 방식으로 소외의 관점에서 다시 사고하는 것, 이는 (그 자체가 ‘망상’이나 ‘착각’ 혹은 환각이라는 통념들과 무매개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물신숭배라는 이름이 지시하는 사회적 형태들의 ‘환상적’ 특징에 대한 마르크스의 강조를 너무 가볍게 다루는 것은 아닌가?[각주:26] 나는 이 질문에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고자 하며, 오히려 사태는 이와 정반대인데, 그러나 이는 사회적 관계에 내재하는(inhérent) 대상적/객체적/객관적 상상(imaginaire objectif)이라는 관념을 극단으로까지 밀어붙이는 이 모든 용어들이 어떠한 의미에서 관개체적인 것이 개체들[개인들]에게 하나의 전도된 형태하에서(개체들[개인들]을 주체들로 구조적으로 구성하는 바로서의 형태가 아니라 이 개체들[개인들]이 확립/제도화하기를 혹은 그러지 않기를 결정할 수 있는 바로서의 형태하에서) 제시되어야 하는 것인지를 (초월론적 허상의 문제설정을 넘어 - 하지만 이 용어들은 이 초월론적 허상의 문제설정과 부인할 수 없는 친연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로 하여금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바로 그것이라는 조건에서 그러하다. 혹은, 리드가 정당하게 강조하듯, 구조는 어떠한 의미에서 ‘사회적 관계’가 자율적 개체들[개인들] 사이의 하나의 관계(relation)의 형태 내에서 발현되는지를 설명해준다.[각주:27] 사회적 현실은 하나의 환각적 특징을 취해야만 하며, 혹은 그 자체로서 존재할 수 있기 위해, 역사적이고 실천적인/현실적인 방식으로, 상상을 재료로 짜여져 있어야만 한다.[각주:28] 아마도 바로 이 지점에서 ‘스피노자를 통한 우회’가 새로운 방식으로 계발적일 수 있을 것이다. 


스피노자와 도시의 이중적 구성


[생략]     


프로이트와 Massenbildungen: 동일시/정체화와 확립/제도화


[생략]


관개체적인 것은 하나의 준-초월론적인 것인가?  

    

내가 스피노자, 마르크스, 프로이트에 대한 이러한 비교 논의에 어떠한 결론을 부여할 수는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게다가 나의 이러한 비교 논의는, 특히 리드와 앞서 언급된 집단 작업의 논문모음집들이 제안했던 분석들을 다시 취하면서도, 우리가 소환해야만 하는 저자들 혹은 저작들/작업들 중 일부분만을 포함하고 있을 뿐이다). 더욱이 나는 ‘관개체적인 것’에 대한 하나의 ‘철학’--마르크스, 스피노자 그리고 프로이트의 독트린들이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우리에게 그에 대한 예증을 제시해주는 것일 그러한 ‘철학’--이 존재한다는 느낌을 독자들에게 전혀 주고싶지 않다. 오히려 나는 [철학적] 인간학을 대상으로 하는 더욱 일반적인 유효범위를 지니는 주제들을 중심으로 취하는 논의를 개시하기를 원하며, 동시에 이 주제들에 접근하고 이 주제들을 정의하기 위한 최고의 용어법을 찾고자 할 뿐이다. 


우선 나는 스피노자의 철학과 마르크스 혹은 프로이트의 철학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점들(analogies)과 대립점들(oppositions)을 염두에 두면서 스피노자를 다시 독해했다는 바로 그 유일한 이유로 나에게 나타났던 (정확히 말해) ‘존재론적인’ 하나의 특징을 무대의 전면에 등장시키고 싶다. 우리가 이중적 관계(혹은 개성화하면서individualisante 집합화하는collectivisante ‘이중적 관계relation’)를 고전적 존재론의 딜레마들을 극복하는 관개체성의 구축에서의 중심으로 형성하자마자, 이 이중적 관계를 이러한 관점과 결합하는 것이 역설적이지만 첫 눈에는 훨씬 더 어려워지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정념적 관계들(relations)과 이성적 관계들(relations)의 ‘혼합물’(composé)--스피노자에 따르면 이 ‘혼합물’이 개체들[개인들]의 서로 다른 자율성 정도를 결정함과 동시에 정치사회들의 서로 다른 안정성 체제를 결정하는 것이다--이 개체[개인]를 이 개체[개인] 자신의 내적 관계들(relations)에서의 부적합성에서 적합성으로 밀어붙이는 이 개체[개인]의 그러한 행위 역량(puissance d’agir)의 증가 경향 내부에서 생명을 얻게 된다(animé)는 사실과 관계된다. 그러므로 만일 적합성의 최대화가 목표라면, 이 적합성의 최대화는 하나의 한계(limite)--이 한계 내에서 정념들의 내재적(intrinsèque) 양가성은 소멸하는 경향을 지니게 될 것이다--에 조응해야만 한다. 우리가 (스피노자적 전통이 ‘슬픈 정념’에 대한 ‘기쁜 정념’의 승리라고 부르는 바와 조응하는) 이러한 체제 또한 관념들의 차원(plan)에서와 동시에 정서들의 차원에서도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 두 번째 요소가 개입해 들어오는데, 이 두 번째 요소는 첫 번째 요소보다 훨씬 더 문제적이다. 스피노자가 3종의 인식(이는 동시에 삶의 한 종류genre이기도 하다)의 출현이라고 기술하는 바--상상[1종의 인식]과 이성[2종의 인식] 모두와 동시에 구별되는--는 convenientia(합치)와 인간들의 상호적 유용성에 대한 “윤리학” 4부의 정리들에서 자신의 완성을 발견했던 그러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설정 바깥으로의 도약(saut)을 표상한다.  특히 이는 지복지혜라는 어휘를 위해 우정(이 우정은 유용성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이다)이라는 어휘를 스피노자가 포기한다는 사실로 표현된다.[각주:29] 


지성(intelligence)을 수단으로 하여 실행되는, 그리고 이 지성이 우리의 사고와 정서 안으로 진입하도록 해주는 그러한 질서(ordinare ad intellectum)를 따르는 이러한 새로운 이행과 결부되어 있는 [3종의 인식에 대한] 해석의 문제들은 우리에게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오랫동안 나는 이 문제들을 ‘3종의 인식’ 그 자체를 하나의 삶의 종류(genre)로서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의 ‘교통양식’으로서도 정의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고 믿어왔으며 또 그렇게 글을 써왔다.[각주:30] 하지만 나에게 이러한 가능성은, 우리가 영혼의 (‘부분적’) 영원성을 고유한 신체의 변용된 존재의 능력의 증대와 조응하게 만드는 “윤리학” 5부 정리 39의 함의들을 그 근본에서까지 고찰한다면 곧장 더 이상 유지 불가능한 것으로 드러나게 된다.[각주:31][각주:32] 이는 (오히려 스피노자가 거부했던 스토아주의적 전통에 조응하는) 스피노자적 ‘현자’(sage)가 고립된 하나의 존재 혹은 자기 자신을 사회로부터 스스로 고립시키는 그러한 하나의 존재로 개념화되어야 한다는 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각주:33] 오히려 “윤리학” 5부의 독트린에서 언급된 역량의 증대가 ‘동류’라는 심급을 개입해 들어오도록 만드는 관계(relation)를 강화하는(intensifie) 것이 아니라(최소한 직접적인 방식으로는 말이다) 개체성 그 자체를 강화한다는 점을 의미하는 것이다.[각주:34]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3종의 [인식이라는 것의] 존재(existence)가 스피노자에 의해 3종의 인식에 대한 논의 바로 직전에 분석되었던 관계적(relationnelle) 구조로부터의 도주점을 구성한다는 점과 이 3종의 존재가 관개체성 그 자체에 대한 과잉(en excès)일 그러한 어떤 하나의 개체성의 가능성을 폭로(혹은 발명)한다는 점을 동시에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다른 저자들[즉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에게로 되돌아가볼 필요가 있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이 저자들에게서 동일한 종류의 문제설정을 탐지할 수 있는지 검토해볼 수 있다. 그런데 프로이트에게서 이 질문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해결된 것이다. 사실은 ‘도주선’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점, 그리고 우리가 관계하고 있는 이 과잉(excès)이 (그 자체 ‘죽음충동’의 수용admission에 기초해 있는) 프로이트적 인간학의 심원한 비관주의에 조응하는 방식으로 부정적 혹은 심지어 파괴적 특징을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다는 점[각주:35]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한편으로, 이 두 가지 ‘도주선들’ 중 하나는 제도적[구성적](institutionnel) 의미에서 ‘대중 형성체’(formations de masse)의 측면에(이 ‘대중 형성체’가 탈유대déliaison와 폭력의 현상들--이 탈유대와 폭력의 현상들에 대항해 ‘대중 형성체’가 구성되는 것이다--을 항상 혹은 완전히 억압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일 때) 스스로를 위치시킨다(이 탈유대와 폭력의 현상들은 공포panique 혹은 더욱 일반적으로는 그 서로 다른 여러 형태들하에서의 사회적 불안전성,[각주:36] 그리고 종교적 유형의 혹은 더욱 일반적으로는 이데올로기적 유형의 불관용 혹은 광기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두 가지 ‘도주선들’ 중 다른 하나는, “집단심리학과 자아분석”에서 프로이트가 활용했던 용어법에서의 수수께끼 같은 한 가지 동요(flottement)가 이 지점에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드러나게 만들면서 내가 강조했듯, 신경증(이 신경증이라는 것은 결국 현대 세계 내 개체성의 ‘정상적’ 상태이다)으로부터 정신병(즉 삶/생명과 결부되어 있는 충동들의 만족을 죄의식화하는 ‘초자아의 난폭성’으로부터 개체들[개인들]이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을 제거하고 이 개체들[개인들]을 교통불가능성 혹은 방어적 ‘나르시시즘’의 상태로 떨어지게 만드는)으로 나아가는 (최소한) 가설적인 길이다.[각주:37] 분명 우리에게는, 신경증과 정신병 사이의 비교로 인해, 신경증적 특징이 또한 실정성(심지어 이 실정성이 ‘제약 없는 주이상스’의 유토피아가 거짓임을 폭로하는 그러한 억제에 의해 중단될 때에서조차)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신경증자의 고립을 통해 ‘대중’의 한계-형상(figure-limite)을 만들어내는 프로이트적 관념에 대한 또 하나의 다른 정당화를 가져오는 것[이 프로이트적 관념을 다시 한 번 정당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우리는 ‘도주선’이라는 은유의 편에서 또 하나의 다른 은유, 즉 관개체성의 극한적 가장자리(bord extrême)--‘관계’(relation)가 자신의 반대물로 전도되는 경향을 지니게 되는 장소로서의 극한적 가장자리--라는 은유를 도입하도록 촉구된다.[각주:38]       


이러한 관점에서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경우는 물론 마르크스의 경우인데, 마르크스의 경우 관개체성에 대한 개념화는 ‘존재론적으로’ 가장 일의적인 것으로 혹은 (다음과 같은 표현을 원한다면) 가장 덜 우연적(aléatoire)인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특히 최근에 게오르그 루카치로부터 유래하는 영감을 재발견하면서, 그리고 이 영감을 영미 분석철학으로부터 유래하는 개념들과 함께 필요에 따라 결합함으로써, 새로운 세대의 마르크스 주석가들이 마르크스에게서 하나의 사회적 존재론을 읽어내려 시도하는 이유이다.[각주:39] 이 상황은 마르크스가 자신의 청년기에 정교하게 구성했던, 그리고 ‘포어이바흐에 관한 열 한 가지 테제들’에서 관계의 존재론--앞에서 내가 그 주해를 제시했던--의 관점에서 재정식화된 그러한 개념화에 머무른다면 해결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 상황은 ‘전부 아니면 전무’의 상황인 것인데, 이 상황 안에서 인간 개체[개인]의 사회적(혹은 ‘관계적’relationnelle) 본질(das ensemble der gesellschaftlichen Verhältnisse)은 하나의 ‘소외된’(다시 말해 탈사회화된) 형태 혹은 하나의 ‘해방된’ 형태--이 형태는 마르크스에게는 결국 공산주의 사회인 것인데, 이 공산주의 사회에서 개체들[개인들]은 서로가 서로를 마주하여 (자신들 모두가 함께 구성하는) 공동체의 담지자로서 행동한다(se comportent)--하에서 제시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상품물신숭배’(그리고 특히 내가, 경제적 소외의 형태들과 법률적 소외의 형태들 사이에서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구성적 교착어법chiasme과 함께, ‘사물’과 ‘인격’의 이중적 물신숭배라 부르는 바)의 문제설정은 새로운 가능성들을 우리의 논의 속으로 도입한다. 물론 이 ‘상품물신숭배’의 문제설정은, 마르크스의 전투적 설명/서술(exposition) 내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상품사회에 현존하며(présente) 내재하는(inhérente) (자본주의에 의해 그 극한으로까지 밀어붙여지는) 소외와 도래할 공산주의 사회의 상--이 상에서 사회적 노동의 분할[사회적 분업]과 이에 조응하는 ‘개체성의 형태들’은 계획화의, 그리고 더욱 일반적으로는 의식적 조직화의 대상이 될 것이다--사이의 반정립에 기초해 있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분석 내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이 ‘사회적인 것’의 구성적 관계로서의 소외에 대한 하나의 (비판적) 인간학이라는 관념을 전제로 삼으면서(이 ‘사회적인 것’의 구성적 관계 바깥에서는, 역사적으로, 개체들[개인들]은 존재하지 않는데, 이는 비록 이 개체들[개인들]이 이 ‘사회적인 것’의 구성적 관계로부터 ‘스스로 낯설어진/멀어진étrangers’[즉 ‘소외된’] 것으로 항상 느낄 수밖에 없으면서도 그러한 것이다), 우리는 도주선이 마르크스의 분석 내에서의 물신숭배에 대한 표상과 끊임없이 교착되는 유토피아적 공산주의에 대한 표상에 의해 표상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각주:40] 하지만 소외의 전도에 대한 이러한 가능성이 마르크스에게서는 변형[변혁] 운동에, 다시 말해 역사적 과정--이 역사적 과정 내에서 모순들이 전개되며 사회적 관계의 잠재성들(virtualités)이 조금씩 조금씩 실현된다--에 내재적인(immanente) 것으로 동시에 제시되기 때문에,[각주:41] 우리는 공산주의가 자본주의의 내부적 초과(excédent)를 구성한다고, 혹은 이 공산주의 개념이 관개체성--마르크스는 자신의 상품적 물신숭배에 대한 분석에서 이 관개체성의 역사적 구조를 정의했다--의 극한적 가장자리를 표상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개념화는 위반 혹은 지양(Aufhebung)을 (고전적인 ‘진화주의적’ 마르크스주의가, 도래할 공산주의 혁명을 넘어,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사회적 관계들이 어느 날 돌발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방식으로) 연대기적 교체로 개념화하기보다는 오히려 (유토피아라는 관념의 ‘활동적’이고 ‘수행적’인 의미에 조응하는[각주:42]) 사회효과 그 자체의 변화(mutation)로 개념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젖힌다.[각주:43] 마르크스를 이해하는(혹은 마르크스를 정정하는) 이러한 방식은, 만일 우리가 공산주의를 가지고서 부르주아(그리고 상품적) 개인주의에 대한 공동체 관념의 일면적 ‘복수’[공격]를 형성해내기보다는 대립물들의 진정한 통일--이 대립물들의 진정한 통일 내에서, 사회화(socialisation)와 개성화(individualisation)는 서로가 서로를 상호적으로 배제하는 대신 하나의 유일한 사회적 관계의 구성요소들이 될 것이다(혹은 서로가 서로를 상호적으로 끊임없이 강화할 것이다)--을 형성해낸다면, 자신의 의미 전체를 지니게 될 것이다. 이러한 관념은 내가 유토피아적 관개체성이라고 부르고자 하는 바와 동일시될 수 있는데, 이 유토피아적 관개체성에서 이중적 비판의 논리적 정식(즉 개인주의적 혹은 원자론적이지도 않고 집합주의적 혹은 유기체론적이지도 않은 그러한 관계의 존재론)은 (개체들[개인들]의 자율성 이 개체들[개인들]의 상호적 의존 모두를 함께 전제하는 하나의 ‘관계relation’로서의) 가설적 이중 긍정에 자신의 자리를 양보한다. 이러한 유토피아의 정치적 의미는 또 하나의 다른 세계를 상상한다거나 잃어버린 어떤 하나의 기원을 복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닐 것이며, 대신 경향을, 혹은 더욱 정확히는 자본주의 내 인간 주체들의 ‘프락시스’(마르크스주의는 이를 ‘투쟁’이라고도 부른다)를 내부적으로 ‘정향’하는 실천적 과업--아마도 불가능할, 하지만 지속적으로 현재성(ordre du jour)을 지니며, 소멸하게 만드는 것은 불가능할 그러한 과업--을 항구적으로 표상하는 것일 것이다. 공산주의, 그것은 [정관사] 인간들(혹은 [부정관사] 인간)이 자신들의 삶 속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그리고 이 실현을 위해 자신들의 투쟁 속으로 동시적으로 스스로를 투여하는(investissent) 그러한 이율배반적 존재양식들의 역설적 통일체이다.[각주:44]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관개체적인 것의 한계 혹은 가장자리에 대한 가설--프로이트의 ‘비관주의’와 마르크스의 ‘유토피아주의’ 사이의 맞세움으로부터 도출되는--에 우리가 부여할 수 있는 의미/방향에 대한 이러한 명료화는 우리로 하여금 스피노자에 대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검토해보는 것을 허락해줄 것이다. 나는, 스피노자가 “윤리학”의 4부에서 5부로 나아가면서, 인간적 본질의 정념적 힘(forces)과 이성적 힘 사이의 ‘비율’(proportion)에 대한 분석론을 ‘지성(entendement)의 역량’으로서의 ‘자유’에 대한 직관--이 직관은 독특한 개체[개인]를 위해 분명한 방식으로 특권화되어 있는 그러한 하나의 ‘대상’, 즉 독특한 개체[개인]의 변용들이 국지화되는 장소인 고유한 신체(그리고 이 독특한 개체[개인]의 정신이 그에 대한 다소간 적합한 관념들을 형성하는 것으로서의 고유한 신체)에 무매개적으로 적용된다(왜냐하면 이 [고유한 신체라는] ‘대상’은 이 독특한 개체[개인]의 역량의 자리임과 동시에 그 ‘비역량impuissance’[무력함]의 자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으로 대체했다는 점을 지적했다.[각주:45] 물론 이는 정확한 설명이다. 하지만 이는, 이 “윤리학” 5부 정리 39의 증명과 주석에 대한 세심한 재독해가 보여줄 수 있듯, 불완전한 것이다. 분명 스피노자는 이 “윤리학” 5부 정리 39의 증명과 주석에서 이전에 제시했던 관개체적 ‘비율’--이 ‘비율’ 안에서 정념들의 한가운데 존재하는 이성이라는 심급과 이성의 한가운데 존재하는 정념들이라는 (이성이라는 심급과 등가적인 것은 아니라고 해도 대칭적인 것이기는 한) 심급은 각각의 개체[개인]가 자신의 ‘동류들’과 항상-이미 맺고 있는 관계로부터 유래한다--을 한켠으로 치워놓고[즉 무시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스피노자는 이로부터 또 하나의 다른 관개체적 ‘비율’을, 이번에는 자연 일반과 함께(혹은, 이러한 표현을 원한다면, ‘능산적 자연’으로 개념화된 신과 함께 - 그런데 이 신 자신이 바로 이 ‘능산적 자연’의 효과이다), 확립한다.[각주:46] 3종의 인식을 형성하는 것, 그것은 바로, 지성(entendement)을 통해, 개체[개인]가 자기 자신의 신체적 독특성을 다수의 변용들의 체계의, 무한한(다시 말해 열려진) 총체성으로서의 자연 전체를 정의/규정(définissent)하는 운동들 사이의 교통들의 체계의 (자신의 유genre에서 유일한unique, 하지만 다른 모든 부분들과 동등한) 한 ‘부분’으로 개념화하는 데에 성공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스피노자가 또 하나의 다른 관계적(relationnelle) 양태를, 각각의 개체들[개인들]을 자연의 다른 모든 부분--그 자체 개성화된(individualisées) 혹은 개성화가능한(individualisables)--과 상호적 구성의 관계 내에 있는 자연의 한 부분으로 만드는 그러한 양태를 열어젖히기 위해서만 사회성(sociabilité)의 양식으로서의 관개체적인 것에 대한 분석을 중단 혹은 제한했다고 해석하는 것이 완전히 가능한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스피노자의 문자 그 자체를 따르고 있는 것이지만, 이 여세를 몰아, 스피노자가 우리로 하여금 (최소한 하나의 문제로서) 사고하도록 허락하는 바를 뛰어넘는 것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그가 말하는 바를 뛰어넘어 한걸음 더 나아가보는 것은, 스피노자주의 그 자체의 가장자리의 가장자리를 그러니까 그 ‘유토피아적’ 계기를 아마도 형성해낼, 굉장히 매혹적인 작업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우리는 복합적이며 갈등적인 준-개체들[개인들]--이 준-개체들[개인들]은 자신들의 독특한 ‘체제들’을 취하고 있는 혹은 다소간 안정적인 사회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자신들의 결합(combinaisons) 즉 자신들의 ‘역사’를 취하고 있는 (자신들 스스로가 자연의 고유한 부분들을 혹은 신의 역량의 ‘독특한 효과들’을 형성하고 있는) ‘도시들’--을 영원성의 관점에서(sub specie aeternitatis) 개념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는지(그리고 누구를 위해, 어떠한 ‘인식의 종류genre’를 위해, 혹은 오히려 어떠한 ‘인식의 노력’을 위해 그러한지를) 질문해볼 수 있다. 또한 우리는 도시 자신의 ‘시민들’에 의해 이 도시의 내부에서 생성된 그러한 인식이 이 도시의 삶에서 변양시키는(modifierait) 바가 무엇인지 질문해볼 수 있다…[각주:47]


마지막으로, 나에게는 이러한 비교 고찰들이, 비록 이 비교 고찰들이 약간의 사변을 포함하고 있기는 하지만, (내가 고전적이라고 부르는) 관개체적인 것의 철학들에서 본질적인 한 가지 특징으로 우리에게 처음부터 나타나왔던 바에 대한 어떤 통찰을 던져주는 것으로 보인다. 이 관개체적인 것의 철학들이 ‘사회적 관계’의 객관적이고 주관적인[혹은 객체적이고 주체적인] 서로 다른 양태들 사이의 ‘교착어법’ 혹은 ‘비율’에 대한 기술(description)을 본질적 변화가능성(mutabilité)--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듯 이 변화가능성은 마르크스에게서는 Veränderbarkeit이고 프로이트에게서는 신경증적 동일시의 전이적 ‘치환’이며 스피노자에게서는 행위 역량의 증대 혹은 감소이다--에 대한 한 가지 가설과 결합하도록 만든다는 사실 말이다.[각주:48] 여기에서 난점은 여전히 동일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능성이 관계들의 어떠한 하나의 특정한 ‘구조’--이 관계들의 ‘구조’ 바깥에서는, 아주 단순히, 개체들[개인들]이 그 자체로서 존재조차 하지 않으며, 이 ‘구조’의 가시화된(observable) 체제는 항상 소외의 체제이다--에 내재적(immanente)인 것으로 남아 있으면서도 동시에 현실적(혹은 현실적 효과들을 생산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난점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개체[개인]의 구석진 공간 혹은 ‘지하 예배당’에 보존되어 있다고들 하는 기원적 자유 혹은 자생성으로의 회귀라는 손쉬운 방법들을, 그리고 또한 마찬가지로 혁명적 숙명--사회적 ‘전체tout’의 진화(évolution)가 그 본질적 발현을 구성할 그러한 혁명적 숙명--의 변증법적 허상들을 버려야만 한다. 우리가 다룬 세 명의 철학자들이 혹은 우리가 이 세 명의 철학자들에 대해 제안하는 독해들이 밝혀주는 것으로 보이는 바, 그것은 이 문제의 위치가, ‘관계’의 한가운데에서, 이 ‘관계’의 균형 혹은 그 구성적 대칭성으로부터의 하나의 도주선을 식별할 가능성을 자신의 조건으로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활용하는 또 하나의 다른 은유도 동일한 의미/방향으로 나아간다. 관개체적인 것의 변화(mutation)의 가능성을 하나의 이상적 대안을 외부에서부터 이입하지는 않으면서 식별하기 위해, 관개체적인 것의 가장자리--이 관개체적인 것이 ‘분해’(décompose)되는 장소인, 혹은 이 관개체적인 것이 확립/제도화했던 개체성과 집합성의 형상들을 탈안정화시키면서 스스로를 초과(excéder)하는 경향을 지니는 장소인--로 나아가야만 한다는 의미/방향으로 말이다. 또한 이는 나로 하여금 철학에서(그리고 정치에서) 관개체적인 것의 구축물들이 초월론적인 하나의 기능을, 혹은 더욱 정확히는 준-초월론적인 하나의 기능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기도 하다.[각주:49] 만일 이 관개체적인 것의 구축물들의 의미/방향이 개체적인 것과 집합적인 것(혹은 공동체적인 것) 사이의 기원적 절합과 그 확립/제도화에서 무한히 변화하는/다양한(variées) 경험적 양태들--때로는 집합적인 것 즉 다소간 ‘유기적인’ 연대성을 우위에 놓고 때로는 개체적인 것을 우위에 놓거나 이 개체적인 것을 최소한 허구적으로(fictivement) 고립시키고자 하는--을 사고가능하게 만드는 것일 뿐이라면, 그리고 만일 이 구축물들이 그 변이(variations)의 한계--그렇지만 우리는 이 변이의 한계선험적으로 찾을 수는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를 고정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이 관개체적인 것의 구축물들은 인간학적인 ‘초월론적인 것들’을 구성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관개체적인 것의 구축물들은 오히려 관계(relation)와 변이를 동일한 하나의 문제의 두 가지 측면들로 문제화하는 준-초월론적인 방식(다시 말해 인간 존재들로 하여금 어떠한 ‘사회효과’를 생성하면서도 동시에 ‘스스로를 개성화하는s’individualiser’ 방식)에 조응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구축물들은 개체적인 것과 집합적인 것을 서로서로에 대한 ‘관계’ 내에 확립/제도화하는 바와, 이 개체적인 것과 집합적인 것을 탈자연화(dénaturer)하거나 이 개체적인 것과 집합적인 것을 한계의 위반 혹은 양태의 발명--이 양태란 지금까지는 존재한 바 없던 새로운 것(inédites)일 그러한 양태이며, 이는 우리가 매번 그 생산성 혹은 생존가능성(vivabilité)을 평가해야 하는 것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을 통해 인식불가능한/오인가능한(méconnaissables) 것으로 만들기를 멈추지 않는 바, 이 두 가지 모두에 대해 질문하기(혹은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질문해보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끝] 



  1. 과도한 원어병기는 이미 그 자체로 독해하기가 상당히 까다로운 발리바르의 이 논문의 이해를 방해할 수 있다. 하지만 옮긴이는 원어병기를 하지 않을 경우 오히려 발리바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 판단해, 여기에서 몇몇 역어들의 원어를 밝히도록 하겠다. développement의 경우 ‘발전’과 ‘전개’를 동시에 의미하는 단어인데, 맥락에 맞게 ‘발전’이나 ‘전개’로(특히 모순과 관련해서는 ‘전개’로 옮겨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이론적 전개’를 의미할 경우에는 ‘이론적 전개’로 옮겼다. développement을 ‘전개’로 옮기는 곳이 있기 때문에 se déployer의 경우 ‘펼쳐지다’로 옮겼다. 모순론이나 정신분석학에서 condensation 즉 ‘응축’과 쌍을 이루어 사용되는 déplacement의 경우 (대동소이하나) ‘치환’보다는 ‘전치’로 옮기고, transposer의 경우에는 ‘전위’로 옮겼다. 출판을 염두에 둔 번역이 아닌 만큼 가독성을 해치더라도 objet의 경우 ‘객체/대상’으로, objectivité의 경우 ‘대상성/객체성/객관성’으로, sujet의 경우 ‘주체’로, subjectivité의 경우 ‘주체성/주관성’으로, ‘간’이나 ‘상호’를 의미하는 inter가 접두사로 붙었을 경우에는 ‘상호-대상성/객체성/객관성’과 ‘상호-주체성/주관성’으로 옮겼다. niveau는 ‘수준’으로, instance는 ‘심급’으로 구분해 옮겼다. 물신숭배론과 깊은 관련이 있는 개념인 apparence는 ‘외양’으로, apparaître는 원어병기한 ‘나타남’으로 통일해 옮겼다. 스피노자의 철학 혹은 알튀세르와 발리바르 철학에서 일반적으로 그러하듯, notion은 ‘통념’으로, concept는 ‘개념’으로 옮기고, conception은 ‘개념화’로, concevoir는 ‘개념화하다’로 옮겼다(사실 프랑스어로는 ‘디자인’을 conception이라고 하므로 ‘개념화’라는 번역어가 어떤 면에서는 ‘인식’이나 ‘관’보다 나은 면이 있다). médiation은 ‘매개물/매개작용’으로, ‘매개물/매개작용’이 없어 ‘직접적’이라는 의미의 immédiatement은 어색하더라도 ‘무매개적으로’로 옮겼다. 불필요해 보이더라도 intermédiaire는 ‘중간매개’로 옮겼다. institution은 ‘제도’ 혹은 ‘확립/제도화’로 옮겼는데, 동사형 instituer는 ‘제도화’ 이전에 ‘확립’, ‘정립’, ‘구성’ 등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여기에서 크게 중요하지는 않다고 판단해 argent과 monnaie는 구분 없이 ‘화폐’로 옮겼다. pratiquement은 ‘실천적으로’라는 의미도 있지만 더욱 정확한 뉘앙스로는 ‘실제 행해지는 바’라는 의미를 지니므로 ‘실천적으로/현실적으로’로 옮겼다. rapport와 relation은 구분 없이 ‘관계’로 옮기면서도 relation의 경우 모두 원어를 병기해주었다. 사실 영어이든 불어이든 이러한 구분이 명확한 것은 전혀 아니지만, 영어의 relation은 불어의 rapport에, 영어의 relationship은 불어의 relation에 ‘어느 정도’ 대응된다. 즉, rapport가 ‘통상적’이고 ‘구체적’인(물론 여기에서 ‘구체적’이라는건 순전히 relation에 비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의미의 ‘관계’라면, relation은 ‘특수’하고 ‘추상적’인 ‘관계’이다. 하지만 ‘관계의 존재론’의 경우 모두 ontologie de la relation이기 때문에 이 경우에만 ‘관계’에 원어 relation을 병기하지 않았다. corrélatif는 ‘상관적’으로 옮겼고 corrélat는 ‘상관물’로 옮겼다. individu는 시몽동 철학에 대한 발리바르의 재전유를 고려해 불필요한 경우에도 굳이 ‘개체[개인]’로 옮겼고, individualité는 ‘개체성’으로, individualiste는 ‘개체론적’으로, individuel은 ‘개체적’으로, individualisme만 ‘개인주의’으로, individuation은 ‘개체화’로, individualisation은 ‘개성화’로(individuation과 individualisation 사이의 역어 구분은 진태원 교수를 따른 것이다), trans가 붙을 경우 (윤소영 교수의 ‘초’나 서관모 교수의 ‘과’라는 접두사도 분명 근거가 있지만 옮긴이의 자의적 선택으로) ‘관’을 모두 붙여주었다. 그래서 le transindividuel을 옮긴이는 ‘관개체적인 것’으로 옮겼다. 방금 지적했듯 individualisme은 ‘개인주의’, holisme은 ‘전체론’, organicisme은 ‘유기체론’, tout는 원어병기한 ‘전체’, totalité는 ‘총체성’으로 옮겼다. authenticité는 ‘본래성’으로 옮겼다. 들뢰즈의 개념인 ligne de fuite는 ‘도주선’, point de fuite는 ‘도주점’으로 옮겼다. 스피노자 철학과는 달리 mode는 ‘양식’으로, modalité는 ‘양태’로 옮겼으며, modifier의 경우에만 스피노자 철학에서의 관행을 따라 ‘변양’으로 옮겼다. transformation은 ‘변형’ 혹은 ‘변혁’, mutation은 ‘변화’로 옮겼다. imaginaire는 ‘상상’으로, passion은 ‘정념’으로, rationnel은 ‘합리적’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puissance는 ‘역능’이 아니라 ‘역량’으로, affect는 ‘정서’로, affection은 ‘변용’으로, affecter는 맥락에 따라 어떤 때는 ‘변용’으로 어떤 때는 이 동사의 일반적 의미대로 ‘영향’으로 옮겼다. 역시 스피노자와 관련해 augmentation은 ‘증대’로 diminution은 ‘감소’로, cité는 ‘도시’로 옮겼다. constitution은 ‘구성’으로, construction은 ‘구축’으로 옮겼다. système은 ‘체계’로, régime은 ‘체제’로 구분해 옮겨주었다. transcendantal은 ‘초월론’으로, quasi-transcendantal은 (‘유사-초월론’으로도 많이 번역되지만) ‘준-초월론’으로(즉 quasi- 는 ‘준- ’으로), a priori는 ‘선험적’으로 옮겼다. interne는 ‘내적’, externe는 ‘외적’, intérieur는 ‘내부적’, intrinsèque는 원어병기한 ‘내재적’, extrinsèque는 원어병기한 ‘외재적’, immanent은 원어병기한 ‘내재적’, inhérent도 원어병기한 ‘내재적’으로 옮겼다. 윤소영 교수의 지론대로 insécurité는 ‘불안전성’으로, instabilité는 ‘불안정성’으로 옮겼다. 시몽동 철학에서의 번역어를 따라 métastable은 ‘준안정적’으로 옮겼다. potentiel과 virtuel 모두 ‘잠재적’으로 옮기면서도 원어를 병기해 구분했으며, possible 또한 ‘가능한’이라는 의미 이외에 ‘잠재적’이라는 의미도 들어있어 필요한 경우에는 대괄호로 적시해주었다. 시몽동 철학의 맥락에서 사용되는 potentiel은 영어식으로 음차해 ‘포텐셜’로 옮겼다. origine은 모두 ‘기원’으로 옮겼다. rapprochement은 ‘상호접근’으로 옮겼다. connaître는 ‘인식’으로, reconnaître는 ‘인지/인정’으로 옮기면서도 맥락에 따라 조금씩 수정했고 méconnaissance는 ‘오인’으로 옮겼다. œuvre는 ‘저작/작업’으로 옮겼다. être는 ‘존재’로, existence는 원어병기한 ‘존재’로, devenir는 ‘되기/생성’으로 옮겼다. plasticité는 ‘가소성’으로 옮겼다. (사회과학의 관습을 차용해) collectif의 경우 ‘집단적’이 아니라 ‘집합적’으로, 그래서 collectivisme도 ‘집합주의’로 옮겼다. genre는 ‘유’ 혹은 ‘종류’로 옮겼다. dépassement은 ‘지양’보다는 ‘초월’로, surmonter는 ‘극복’으로 옮겼다. singulier는 ‘독특한’, 그래서 singularité는 ‘독특성’(물론 ‘특이성’이라는 번역어도 가능하지만)으로 옮겼다. présence는 ‘현존’으로, 그러나 se présenter는 굳이 ‘현존’으로 구분해 옮기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해 간단히 ‘제시되다’로 옮겼다. programmatique은 ‘강령적’이란 뜻과 ‘프로그램’이라는 의미(사실 이 두 의미는 유사한 것이다)가 모두 있지만 ‘강령적’으로 옮겼다. transgression은 ‘위반’으로 옮겼다. portée는 ‘유효범위’로 옮겼다. via négativa는 ‘부정신학’으로 옮겼다. univoque는 ‘일의적’, équivoque는 ‘다의적’(sans équivoque의 경우에는 고정된 숙어이므로 ‘모호함 없이’로), ambiguïté는 ‘모호성’, ambivalence는 ‘양가성’으로 옮겼다. phase는 ‘국면’으로, stade는 ‘단계’로 구분해 옮겼다. configuration은 ‘형세’로 옮겼다. articulation은 ‘절합’으로 옮겼다. anthropologie philosophique은 ‘철학적 인간학’으로 옮겼다. présupposé는 ‘선-전제’로, poser는 ‘전제하다’로 옮겼다. 독일어 Träger는 불어에서 porteur와 support 둘 모두로 옮길 수 있는데, 그래서 porteur와 support 모두 ‘담지자’로 옮겼고 동사 porter의 경우 필요한 경우에만 ‘담지하다’로 옮겼다. sens는 대부분 ‘의미/방향’으로, signification은 ‘의미’로 옮겼다. isolé는 ‘고립된’으로, séparé는 필요에 따라 원어병기한 ‘고립된’이나 원어병기 없는 ‘분리된’으로 옮겼다. fonctionnement은 ‘기능작용’으로 옮겼다. détermination은 ‘결정’, ‘결정요소’, ‘결정작용’ 등으로 필요에 따라 달리 옮겼고 déterminisme은 ‘결정론’으로, indétermination은 ‘비결정성’으로 옮겼다. position은 ‘위치’ 혹은 ‘위치/입장’으로 옮겼다. énoncé는 ‘언표’로, énonciation은 ‘언표행위’로 옮겼다. 프로이트 정신분석학과 관련해, identification은 ‘동일시/정체화’로, refoulement은 ‘억압’으로, transfert는 ‘전이’로, moi는 ‘자아’로, soi는 ‘자기’로, scission은 ‘분열’로 옮겼다. vérité는 ‘진리/진실’로, vrai는 ‘참된’으로 옮겼다. engendrer는 ‘생성하다’로 옮겼다. assujettissement은 ‘예속화’로, servitude는 ‘복종’으로 옮겼다. hypothétique은 ‘가설적’으로 옮겼다. actif는 ‘활동적’으로, activer는 ‘활성화’로 옮겼다. surgir와 resurgir는 ‘돌발’과 ‘재돌발’로 옮겼다. 스피노자 철학에서 그러하듯 adéquation은 ‘적합성’으로, inadéquation은 ‘부적합성’으로 번역했다. ‘동류인’을 의미하는 semblable은 ‘동류’로 옮겼다. vie는 ‘삶’ 또는 ‘생명’으로 옮겼다. mutuel은 ‘상호적’으로, réciproque는 원어병기한 ‘상호적’으로 옮겼다. 이 글에는 émanation이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manifestation은 ‘발현’으로 옮겼다. [본문으로]
  2. Spinoza: from Individuality to Transindividuality, Mededelingen vanwege het Spinozahuis 71, Eburon Delft; 불역 Individualité et transindividualité chez Spinoza, 본서의 2부 1장, pp. 199-244. [본문으로]
  3. 특히 나는 각각 이탈리아와 그리스에서 출간되었던 두 개의 논문모음집을 언급하고자 한다. 이탈리아에서 출간된 논문모음집은 Étienne Balibar, Vittorio Morfino (책임지도), Il transindividuale. Soggetti, Relazioni, Mutazioni, Milan, Eterotopie/Mimesis, 2014 (Muriel Combes, Augusto Illuminati, Mariana de Gainza, Warren Montag, Frédéric Lordon, Étienne Balibar, Vittorio Morfino, Jason Read, Andrea Cavazzini, Felice Cimatti, Patrice Maniglier, Guillaume Sibertin-Blanc, Francisco Naishtat, Bruno Karsenti의 논문 수록)이며, 그리스에서 출간된 논문모음집은 Transindividuality, Essays for an Ontology of Relation, Bartsidis Michalis 편집, Loukia Mano-Christidis 번역, Editions Nissos, Athens, 2014이다(이 논문모음집은 그리스어로만 출판되었으며 영어 제목은 발리바르가 붙여준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언급된 ‘번역’은 그리스어로의 번역을 의미하는 것이다. 발리바르는 이 논문모음집의 그리스어 제목도 병기해 주었으나 옮긴이가 생략했다 - 옮긴이). 또한 분명 나는 제이슨 리드의 저서 “관개체성의 정치학”(The Politics of Transindividuality, Jason Read, Leyde/Boston Brill, 2016)을 특별히 언급해야만 하는데, 고전가들에 대한 독해에서의 나의 제안들에 대한 다수의 참조들을 넘어, 나 자신의 ‘테제들’에 대한 하나의 온전한 이론적 전개 전체를 할애하는 영광을 (이 저서에 수록된 ‘Transindividuality as Politics in the Thought of Étienne Balibar’라는 글에서) 나에게 선사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또한 이 저서가 ‘세계의 변형’을 목적으로 ‘철학’에서의 하나의 거대한 ‘변형’을 구축하기 위해 고전적인 참조점들과 동시대적인 참조점들 전체를 소환하면서(하지만 그는 프로이트만은 소환하지 않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 둘 사이의 분기점을 지시해주는 적절한 지표로 기능한다) 관개체적인 것의 문제설정에 대한 하나의 훌륭한 전유를 구성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그의 저서를 독해함으로써 정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으며, 그의 저서로 인해 나의 이전 분석들을 확장하고픈 욕망을 강하게 느끼게 되었다. 이 저서의 울림은 이 글 곳곳에 존재해 있다. [본문으로]
  4. 내가 여기에서 언급하는 두 가지 평행하는 시도들이란 각각 다음과 같다. a) 앞에서 이미 언급된 나의 시론 Individualité et transindividualité chez Spinoza, b) From Philosophical Anthropology to Social Ontology and Back: What to do with Marx’s Sixth Thesis on Feuerbach?, Postmodern Culture, 22/3, 2012년 5월 (Special Issue: The Citizen-Subject, Guest Editors : Jennifer Greiman and Kir Kuiken)(이탈리아어 번역 in É. Balibar, V. Morfino 책임지도, Il transindividuale, op. cit.; 프랑스어 번역 in Étienne Balibar, La Philosophie de Marx, Paris, La Découverte, nouvelle édition revue et augmentée, 2014). 각각의 시도에서 나는 관개체적인 것의 용어법이 시몽동과는 다른 원천들, 특히 알렉상드르 코제브와 자크 라캉(그러니까 헤겔에 대한 하나의 특정한 독해와 프로이트에 대한 하나의 특정한 독해)이라는 원천들 또한 지니고 있음을 지시하고자 했다. 물론 이 원천들 모두가 관개체적인 것의 용어법에 동일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Il transindividuale라는 집단저작의 기고자들은 마르크스주의와 더욱 가까운 다른 원천들 또한 지적했는데, 이는 바로 비고츠키와 골드만이다. (옮긴이 앞글에서 이미 언급했듯 a는 진태원 교수 번역의 “스피노자와 정치”에 수록되어 있으며, b는 배세진 번역의 “마르크스의 철학”에 수록되어 있다 - 옮긴이) [본문으로]
  5. M. Combes, Simondon. Individu et collectivité (“시몽동: 개체와 집합성”), Paris, Puf, “Philosophies” 총서, 1999, pp. 24, 92. [본문으로]
  6. S. Freud, Psychologie des masses et analyse du moi (Massenpsychologie und Ich-Analyse, 1921, in Sigmund Freud Studienausgabe, Bd. IX, Fragen der Gesellschaft, Ursprünge der Religion, Francfort, Fischer Taschenbuch Verlag, 1974), 1장(Einleitung)을 보라. [본문으로]
  7. [옮긴이] pollakhôs legomenon이 ‘존재는 여러 다양한 의미에서 말해진다’라는 뜻이다. [본문으로]
  8. [옮긴이] 참고로 ‘관계가 존재한다’에서 ‘관계’는 le rapport가 아니라 du rapport를 옮긴 것으로, le rapport는 ‘정관사 관계’이고 du rapport는 ‘부분관사 관계’이다. 한국어에는 존재하지 않는 문법이라 이해하기가 쉽지 않지만, 간단히만 설명하면 ‘부분관사’란 (예를 들어 밀가루와 같이) 셀 수 없는 명사 전체를 나타낼 때 쓰는 말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단수로 표기되어 있지만 사실상 ‘불특정한 수의 모든 관계들’을 (이 ‘관계’를 밀가루와 같은 재료로 취급하겠다는 뉘앙스와 함께) 의미하는 것이다(왜냐하면 ‘관계’라는 것은 하나, 둘, 셋… 이렇게 셀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본문으로]
  9. Georges Labica, Les Thèses sur Feuerbach, Paris, Puf, 1987. 나는 이 주석서 자체가 지니는 가치, 그리고 이 주석서가 제시하는 해석이 지니는 가치에 대해 강조하고 싶다. 특히 나는 이 주석서가 제시한 길 위에,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의 ‘포이어바흐에 관한 열 한 가지 테제들’에 대한 해석 제안들과 루이 알튀세르의 해석 제안들을 동시에 원용하면서, 나의 해석을 자리매김한다. 앙상블(ensemble)이라는 단어는 마르크스의 원문에서 프랑스어 그대로 쓰여 있는 것이다. (관련해서 역시 “마르크스의 철학”의 재판 후기를 참조할 수 있으며, 또한 “마르크스의 철학” 2장 후반부에는 조르주 라비카의 ‘포이어바흐에 관한 열 한 가지 테제들’ 불어 번역을 저본으로 삼아 번역한 테제들 전체 번역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앞 문장에서 대괄호의 독일어 원어병기는 발리바르의 것이다 - 옮긴이) [본문으로]
  10. Éthique (“윤리학”) 3부. [본문으로]
  11. Étienne Balibar, La Philosophie de Marx (“마르크스의 철학”), op. cit. [본문으로]
  12. 1844년 수고. (1844년의 “경제학-철학 수고” 혹은 “파리원고” - 옮긴이) [본문으로]
  13. 여기에서 ‘자기 스스로에 대해’는 avec eux-mêmes을 옮긴 것이고 ‘자기 스스로 안에서’는 en eux-mêmes을 옮긴 것이다. [본문으로]
  14. 우리는 개인주의라는 관념 내부에 사적 소유에 대한 ‘이기적’ 관계를 재통합시키는(토크빌의 경우 그는 이 사적 소유로부터 그 ‘이기적’ 관계를 제거했다) ‘소유적 개인주의’라는 통념이 C. B. 맥퍼슨의 고전적 저서에서 형식화되었다는 점을 알고 있다. The Political Theory of Political Individualism. Hobbes to Locke (Oxford, Clarendon Press, 1962). 나의 연구인 ‘Le renversement de l’individualisme possessif’, in Étienne Balibar,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Essais politiques, Paris, Puf, 2010을 참조하라. (맥퍼슨 저서의 국역본으로는 “홉스와 로크의 사회철학”, 황경식, 강유원 옮김, 박영사, 2010을 참조하고, 발리바르의 저서의 경우 “평등자유명제”, 에티엔 발리바르 지음, 진태원 옮김, 그린비, 근간을 참조하라 - 옮긴이) [본문으로]
  15. 나는 이러한 관점에서 여섯 번째 테제에서 마르크스가 총체성 혹은 체계에 대해 말하는 대신 (프랑스어로부터 전위시킨) das ensemble이라는 불안정한(flottant) 용어를 활용했다는 사실을 징후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 있을거라 판단했다. 하지만 이와는 비교되게도, 마르크스가 1859년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1분책”의 서문에서 ‘사회적 관계들’이라는 정초적 통념을 다시 취할 때, 이 통념은 매우 강력한(그리고 매우 제한적인) 결정작용에 의해 변용된다. “자신들의 존재(existence)의 사회적 생산 내에서, 인간들은 생산의 (…) 관계들(rapports) 안으로 들어간다(entrent)(…). (In der gesellschaftlichen Produktion ihres Lebens gehen die Menschen bestimmte, notwendige, von ihrem Willen unabhängige Verhältnisse ein, Produktionsverhältnisse - 발리바르) [본문으로]
  16. 이러한 ‘~도 그렇고 ~도 그러하다’는 마르크스가 분명 헤겔의 변증법적 동시에(zugleich)로부터 영감을 얻어 제시한 것이다. K. Marx, Le Capital. Critique de l’économie politique, livre premier : Le Procès de production du capital (“자본” 1권), J.-P. Lefebvre 책임편집, Paris, Puf, “Quadrige” 총서, 1993, pp. 856-857을 보라. (‘동시에’는 부사이긴 하지만 헤겔 철학의 명사화된 개념이며, ‘~도 아니고 ~도 아니다’는 불어의 ni… ni… 를, ‘~도 그렇고 ~도 그러하다’는 et… et… 를 옮긴 것이다 - 옮긴이) [본문으로]
  17. 나는 이 사회효과라는 표현을 알튀세르로부터 차용하는데, 그는 마르크스의 분석과 집합적 주체 혹은 개체적 행동들의 총합(agrégat de conduites individuelles)으로서의 사회에 대한 이론들 사이의 철학적 차이를 표시하기 위해, 그러니까 암묵적으로 ‘관개체론적인’(transindividualiste) 방식으로(하지만 이러한 ‘관개체론’의 지표를 발전시키지는 않으면서) 이 표현을 1965년의 “‘자본’을 읽자”의 서문인 ‘“자본”에서 마르크스의 철학으로’의 마지막 부분에서 사용했다. 참고로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에 대한 자신의 비판적 독해에서 ‘상품물신숭배’라는 주제를 다시 취하는 것에 대해 극도로 적대적이었다. (‘“자본”에서 마르크스의 철학으로’의 국역본으로는, ‘“자본”에서 마르크스의 철학으로’, 루이 알튀세르 지음, 진태원 옮김, “‘자본’을 읽자”, 진태원 외 옮김, 그린비, 근간을 참조 - 옮긴이) [본문으로]
  18. 헤겔이 객체/대상과 객체들/대상들(혹은 이 대상들이 물질성과 감각적 외양 사이에 내포하고 있는 갈등)이라는 질문을 희생시켜 주체와 객체/대상의 변증법을 주체의 역사에 내부화시키기 위해 이 주체와 객체/대상의 변증법을 ‘전치’--마르크스의 경우에, 그를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전치’의 의미를] 전도시키는 것이 적절할 그러한 ‘전치’--시켰을 것이라는 관념은 테오도어 아도르노(Theodore Adorno)의 저서 “부정변증법”에서 등장한다. 나의 경우, “시민-주체”(Citoyen sujet et autres essais d’anthropologie philosophique, Paris, Puf, 2011)에 수록된 헤겔과 마르크스에 대한 시론들에서, 나는 상호-주체성/주관성의 모델과 그 상호-대상성/객체성/객관성으로의 전도라는 모델 사이의 맞세움을 소묘했다(특히 ‘상품의 사회계약’이라는 장과 그 후기를 보라, pp. 337-342). (‘상품의 사회계약’ 논문은 “마르크스의 철학”의 부록 3번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그러나 “시민-주체”에 수록된 ‘상품의 사회계약’ 판본과 “마르크스의 철학”에 수록된 판본은 조금 다르며 특히 발리바르의 요구로 인해 “마르크스의 철학”에는 이 중요한 ‘후기’가 번역되어 있지 않다. 이 ‘후기’ 번역으로는 ‘후기: 상호-대상성/객체성/객관성’, 에티엔 발리바르 지음, 배세진 옮김, 웹진 인무브를 참조하라 - 옮긴이) [본문으로]
  19. 포이어바흐에 관한 네 번째 테제는 이미 (종교적 혹은 정치적 표상들에 의한) ‘세계의 이중화/중첩(doublement ou redoublement)’이라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데, 조르주 라비카는 특히 이 ‘세계의 이중화/중첩’이라는 개념에 대한 심도 깊은 주해를 제출한다. [본문으로]
  20. Karl Marx, Le Capital (“자본”), 1권(1867), 1편, 1장(상품), 4절(‘상품의 물신적 성격과 그 비밀’), J.-P. Lefebvre 불역, Paris, Éd. Sociales, 1983, p. 83. 르페브르가 마르크스가 의도했던 (인격과 비인격 사이의 - 옮긴이) 대칭성이 드러나도록 만들기 위해 독일어 ‘sachlich’를 (‘사물적’ 혹은 ‘물질적’이 아니라 - 옮긴이) ‘비인격적’으로 해석/번역해야만 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인용문에서 독일어 대괄호는 모두 발리바르의 것이며, ‘그러한 대로’로 옮긴 pour ce qu’elles sont의 번역에 대해서는 더 고찰해볼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발리바르의 여러 글들에서 반복해 등장하는 이 ‘그러한 대로’의 번역어로 현재 옮긴이는 ‘그러한 대로’를 잠정적으로 채택하고 있다 - 옮긴이) [본문으로]
  21. 이는 바로 상품물신숭배에 대한 설명 바로 뒤에 이어지는 “자본” 1권 1편 2장 ‘교환과정’이다. (“마르크스의 철학”에서 이미 제시한 바 있던) 나의 이러한 독해에서, 1장의 마지막 절인 ‘상품물신숭배’에 관한 절과 2장 각각은 1장 3절의 일반적 등가물로까지의 상품-형태의 전개와 3장의 화폐-형태의 속성들에 대한 분석 사이의 하나의 동일한 철학적 ‘매개물/매개작용’의 두 측면(즉 앞면과 뒷면 - 옮긴이)을 구성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22. 이 범주들은 부르주아 시대에 다시 등장하게 된 ‘로마법’의 범주들이다. 이에 대해 마르크스가 제시하는 기술은 1821년 “법철학”의 도입부에서 ‘추상법’에 대해 헤겔이 제시했던 설명을 정교하게 따른다. 이러한 기술에서 마르크스에게 고유한 것은 그가 생산과 교환의 구조들을 절합(articulation)한다는 점이다. (헤겔의 ‘추상법’과 마르크스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미셸 푸코의 반-마르크스’, 에티엔 발리바르 지음, 배세진 옮김, 웹진 인무브를 참조 - 옮긴이) [본문으로]
  23. Le Capital (“자본”), op. cit., p. 97. 서구의 철학적이고 법률적인 전통 전체에서 놀라운 운명을 겪도록 예정되어 있는 이 ‘가면’(혹은 연극에서의 ‘배역’)이라는 용어법은 스토아 철학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며, 자유로운 ‘인격들’과 의존적 ‘인격들’을 구별하는 로마법에 통합된 페르소나(persona)(불어로는 personne 혹은 personnage, 그리스어로는 prosôpon)라는 라틴어의 이중적 용법에 기초해 있는 것이다. [본문으로]
  24. [옮긴이] 여기에서 ‘혼동되다’는 불어 confondre avec을 옮긴 것인데, 불어에서 confondre는 ‘혼동’이라는 기본적인 뜻 말고 ‘일치’와 ‘결합’이라는 의미로도 자주 사용된다. [본문으로]
  25. [옮긴이] 앞에서 지적했듯 ‘활성화’는 불어의 activer라는 동사를 옮긴 것으로, 영어의 activate 동사와 마찬가지로 ‘작동시키다’ 정도로 옮기는 것도 가능하다. 또한 여기에서 발리바르가 former가 아닌 informer라는 동사를 구태여 사용한 이유는 이러한 ‘형성’의 이면이 바로 ‘왜곡’(déformer)임을 드러내기 위함인 것으로 추정된다. [본문으로]
  26. [옮긴이] ‘망상’은 délire를, ‘착각’은 quiproquo를, ‘환각’은 hallucination을, ‘환상적’은 (강신준판 “자본”을 따라) phantasmagorique을 옮긴 것이다. [본문으로]
  27. J. Read, The Politics of Transindividuality (“관개체성의 정치학”), op. cit., p. 74 이하. [본문으로]
  28. [옮긴이] ‘상상을 재료로 짜여져 있어야만 한다’는 se tisser d’imaginaire를 의역한 것으로, se tisser de는 ‘무엇무엇으로 짜여있다’라는 뜻이고, 여기에서 ‘상상’은 명백히 스피노자적 개념이다. [본문으로]
  29. [옮긴이] ‘지복’은 béatitude를, ‘지혜’는 sagesse를, ‘덕’은 vertu를, ‘우정’은 amitié를, ‘유용성’은 utilité를 옮긴 것이다. [본문으로]
  30. 특히 “스피노자와 정치”의 영역본에 부록으로 포함된 ‘교통양식들’에 대한 장(본서의 p. 165 이하)에서 그랬다. (이미 지적했듯 이 글은 윤소영 교수가 ‘스피노자, 정치와 교통’이라는 제목으로 국역한 바 있다 - 옮긴이) [본문으로]
  31. [옮긴이] ‘고유한 신체의 변용된 존재’는 être affecté du corps propre를 옮긴 것이다. [본문으로]
  32. Spinoza, Éthique (“윤리학”), 5부 정리 39: “Qui corpus ad plurima aptum habet, is mentem habet, cujus maxima pars est aeterna (celui dont le corps a de multiples capacités possède aussi un esprit (ou une âme - 발리바르) dont la plus grande part est éternelle).” (아주 많은 것을 할 수 있는aptum 신체를 가진 사람은 그 최대의 부분이 영원한 정신을 갖고 있다. - 옮긴이) [본문으로]
  33. 이러한 방향을 취하는 스피노자의 정리들이 더 존재하는데, 특히 “윤리학” 4부 정리 70이 그러하다. “Homo liber, qui inter ignaros vivit, eorum, quantum potest, beneficia declinare studet (L’homme libre qui vit au milieu de la masse ignorante, s’efforce de n’en recevoir aucun service (ou bienfait - 발리바르)).” (무지자들ignaros 사이에서 살아가는 자유인은 할 수 있는 한 무지자들의 호의beneficia를 거절하기 위해 애쓴다. - 옮긴이) [본문으로]
  34. [옮긴이] 당연히 여기에서 ‘심급’은 instance를 옮긴 것인데, 그러나 이 개념의 의미와 그 역어에 대해서는 더 논의해볼 여지가 있다. 이에 대한 발리바르 자신의 논의로는 ‘문자의 앵스탕스와 최종심급’, 에티엔 발리바르 지음, 배세진 옮김, 웹진 인무브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35. 이는 프로이트적 ‘죽음충동’(Todestrieb)을 (타자들을 향한 그리고 자기를 향한) 파괴 혹은 공격성의 관점하에서 배타적으로 독해한다는 점을 전제한다. 만일 우리가 죽음충동의 근본적으로(radicalement) ‘평화적’(pacificateur)인 측면(즉 충동적 자극excitations에 대한 제거 경향) 또한 고려한다면, 우리는 이 지점에 하나의 근본적(radicale) 양가성 또한 자리잡게 해야만 한다. [본문으로]
  36. 여기에서 나는 의도적으로 로베르 카스텔의 한 저서의 제목을 다시 취하는데, 이 저서에서 카스텔은 동시대 ‘사회 국가’(발리바르 자신의 용어법을 따르자면 ‘국민-사회 국가’ - 옮긴이)의 위기를 검토하면서 부정적 개인성(individualité négative)과 이 부정적 개인성이 생성하는 탈소속화(désaffiliation)의 형태들에 관심을 기울인다. L’Insécurité sociale. Qu’est-ce qu’être protégé? (“사회적 불안전성. 보호받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Paris, Seuil, 2003을 참조. [본문으로]
  37. 이 가설들은 ‘초자아’, ‘자아의 분열’ 그리고 우울증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이트의 텍스트들에 대한 나의 정교하지 못한 상호접근에 기반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교하지 못한 나의 논의를 대신하여, 나르시시즘의 양가성에 대한 심도깊은 정교화 작업으로 독자들은 앙드레 그린의 저서를 참조할 수 있을 것이다. André Green, Narcissisme de vie, narcissisme de mort (“삶의 나르시시즘, 죽음의 나르시시즘”), Paris, Minuit, 1983. [본문으로]
  38. [옮긴이] bord extrême의 경우 간단히 ‘극단’으로 옮겨도 충분하지만, 바로 뒤에서 bord가 독립적으로 사용되기에 독해를 조금 방해하더라도 ‘극한적 가장자리’로 풀어서 옮겼다. [본문으로]
  39. 이 지점과 관련해 나는 특히 프레데릭 몽페랑(Frédéric Monferrand)이 2015년 파리 10대학(파리 웨스트-낭테르)에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 “마르크스에게서 사회적 존재론과 비판이론”(Ontologie sociale et théorie critique chez Marx)를 염두에 두고 있다. 이 박사학위 논문이 빨리 단행본으로 정식 출간되기를 바란다. [본문으로]
  40. [옮긴이] 동어반복이지만 représentée par la représentation은 원문 그대로 ‘표상에 의해 표상된다’로 옮겼다. [본문으로]
  41. 이는 마르크스가 마지막까지도 전혀 부정한 적이 없었던, 청년기(“독일 이데올로기”)의 거대한 정식에 조응한다. “공산주의는 현재의 상태를 지양(aufhebt)하는 현실의 운동이다.” [본문으로]
  42. 본질적으로 이러한 유토피아 관념은 칼 만하임(Karl Mannheim)의 것인데, 동시대의 여러 주석가들이 이에 대해 다룬 바 있다. 특히 피에르 마슈레의 주석을 보라. Pierre Macherey, De l’utopie! (“유토피아에 관하여”), De l’incidence éditeur, 2011을 참조. [본문으로]
  43. [옮긴이] 발리바르는 Aufhebung을 불어 abolition으로 옮기는데, 옮긴이는 이를 abolition의 일반적 번역어인 ‘폐지’ 대신 Aufhebung의 일반적 번역어인 ‘지양’으로 옮겼다. [본문으로]
  44. [옮긴이] 한국어에는 존재하지 않는 문법적 장치라 설명하기 힘들지만, ‘정관사’ 인간들은 예외 없이 인간들 전체를, ‘부정관사’ 인간들은 불특정한 몇몇 인간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45. [옮긴이] 직역으로 인해 의미가 잘 전달되지 않을 것 같아 첨언하자면, 여기에서 ‘독특한 개체를 위해 특권화되어 있는 대상’이란 이 대상 즉 고유한 신체가 특히 독특한 개체의 것이라는 의미이다. [본문으로]
  46. [옮긴이] ‘능산적 자연’은 nature naturante를 옮긴 것으로, 스피노자 철학에서 일반적으로 그러하듯 ‘능산적 자연’으로 옮기지만, 이 불어 표현을 직역해본다면 이는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유명한 개념인 structure structurante가 ‘구조화하는 구조’로 번역되듯 ‘자연화하는 자연’으로 번역할 수도 있을 것이다. [본문으로]
  47. 이러한 ‘울트라-스피노자주의적인’ 가설이 “윤리학” 5부 정리 37의 주석에서 스피노자가 “윤리학” 4부의 유일한 공리에서 자신이 언표했던 조건을 ‘제거’한다고 선언한다는 사실이 초래하는 결과들에 대한 논의와 어떠한 공통점을 가질 수 있는지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시간과 공간(즉 지면 - 옮긴이)이 조금 더 필요할 것이다. “Nulla res singularis in rerum natura datur, qua potentior et fortior non detur alia. Sed quacunque data datur alia potentior, a qua illa data potest destrui.” (자연 안에는 그보다 더 역량이 크고 더 강력한 다른 것이 존재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는 아무것도 없다. 어떤 것이 주어지든 간에, 주어진 이것을 파괴할 수 있는 더 역량이 뛰어난 것이 존재한다. - 옮긴이) 만일 이러한 ‘자연주의적’ 테제가 스피노자가 자신의 사회성(sociabilité)에 대한 이론을 전개하는 장소인 “윤리학” 한 부분의 맨 앞에 등장한다면, 분명 이는 도시의 존재가 인간 개체들/개인들에게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nature environnante)의 파괴적 능력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수단을, 혹은 인간과 다른 자연적 개체들 사이의 경쟁을 희생하는 방식으로 자연과의 동맹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을 구성한다는 점을(이게 사실이라면 참 좋을텐데! 라고, 오늘날의 우리는 환경 파괴에 대한 생태학적 비판의 관점에서 기꺼이 말할 것이다…)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이 문장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개체’는 명확히 인간 개인과는 구별되는 다른 종류의 ‘개체들’을 말하는 것이므로 굳이 ‘개인들’이라는 표현을 병기하지 않았다 - 옮긴이). 하지만 이는 또한 이러한 확장과 보호가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유한성의 영향하에 있다(affectées)는 점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들이 어떻게 전치될 수 있는지, 특히 도시의 내적 경제에서의 어떠한 ‘의식적’ 변양들을 대가로 해서 이러한 전치가 가능한지를 질문해보아야 한다는 과제가 우리에게 남는데, 이러한 과제는 지금의 우리에게 어떤 현재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물론 스피노자 스스로가 imperium omnino absolutum이라는 (하지만 자연과 비교해서는 항상 ‘유한한’) 통념이 취하는 의미에 대해 오해했기 때문에, 그가 “정치론”에서 민주정을 또 하나의 다른 유형의 ‘구성/제헌/헌정’(constitution)이 아니라 정치제도들이 정서적 동요(fluctuations)의 합리화 방법으로서의 ‘권력분할’을 넘어서도록 강제될 때에 이 정치제도들이 변화하게 되는(évoluent) 그러한 의미/방향에 대한 하나의 질문으로 형식화(혹은 ‘구성화/제헌화/헌정화’constitutionnaliser)하는 데에 ‘실패’했던 것일 수도 있다. [본문으로]
  48. [옮긴이] 여기에서는 ‘전이적’ 즉 transférentiel과 함께 쓰였기에 중복을 피하기 위해 déplacement을 ‘전치’가 아니라 ‘치환’으로 옮겼다. 이미 지적했듯, 사실 정신분석학에서는 응축(condensation)의 맞짝으로서 déplacement을 ‘치환’으로 더 많이 옮긴다. [본문으로]
  49. 동시대의 철학에서, ‘준-초월론적인 것’이라는 통념은 특히 푸코와 데리다가 활용한 것인데, 그러나 푸코와 데리다는 첫 눈에 보기에는 서로 다른 것으로 보이는 두 가지 의미/방향으로 이 ‘준-초월론적인 것’이라는 통념을 활용했다. 푸코에게, 준-초월론적인 것은 가능성의 조건들(즉 ‘가능조건’ - 옮긴이)이 형성하는 하나의 체계(즉 하나의 ‘역사적 선험성’)--이 체계는 준-초월론적인 것 고유의 경험적 실현들에 의해 항구적으로 변양된다(우리는 ‘오염된다’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이다. 데리다에게, 준-초월론적인 것은 ‘가능성의 조건들’이 형성하는 하나의 체계인데, 그러나 그에게서 이 ‘가능성의 조건들’은 동시에 ‘불가능성의 조건들’, 다시 말해 구축과 파괴 혹은 (서로가 서로의 대립물인) 삶의 형태들의 불확실성(incertitude)과 사유의 형태들의 불확실성 모두에 동시에 함축되어 있는 것이기도 하다. 나의 경우, 나는 이 준-초월론적인 것을 구성적 관계 그 자체에 대한 위반 관계라는 관념과 같은 무언가에 함축시키는 방식으로 이 준-초월론적인 것을 활용하고자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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