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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9 이태원, 국가주의적 재난서사와 대항적 재난서사 (3/3)

 

전주희 | 서교인문사회연구실 회원

 

 

이 글은 《문화과학》 113호(2023.봄)에 실린 글입니다. 인용시 《문화과학》 출판본으로 사용 바랍니다.

 

이 글은 다음 글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1. 재난은 서사를 통해 재난이 된다」 읽기 --> http://en-movement.tistory.com/447

「2. 실패의 봉합과 국가주의 재난서사의 반복」 읽기 --> http://en-movement.tistory.com/448

 

 

3. 국가주의 재난서사의 작동 실패?: 애도의 등급화와 피해자 혐오

 

 

세월호 참사에 이어 이태원 참사에서 반복되는 피해자에 대한 비난과 혐오는 어떤 맥락에서 강화되는가. 보통 피해와 자선의 담론은 정치적 대립이나 주장보다 선호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월호 참사 피해자와 유가족에 대한 혐오는 이태원 참사에 이르러 아예 재난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완강한 거부와 함께 재생산되고 있다. 세월호 참사에 비해 사회적 논란과 관심이 줄어든 듯한 분위기는 피해자에 대한 혐오가 줄어들었다기 보다 사회적 재난으로서 이태원 참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인식과 함께 이뤄지고 있기 때문에 공적 애도를 수행할 만한 죽음이 아니라는 인식이 깔려있다. 부주의한 피해자, 불운으로서의 재난서사가 다시 강화되어 회귀한 것이다. 

 

이와 함께 이태원 참사에서는 ‘재난=국난’ 서사가 작동되지 않는다. 세월호 참사의 경우 유가족과 사회운동이 수행한 ‘국가 부재-참사에 국가는 없었다.’ 서사가 이전과 같은 국가 주도 재난서사의 작동을 삐거덕거리게 만들었다. 반면 이태원 참사에서는 ‘국가애도기간’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국가 차원에서 참사에 대한 ‘도의적’ 수준에서조차 책임이 회피되고 국가 차원의 조기 수습을 참사 초기부터 포기 혹은 철회하면서 국가 주도의 피해자 비난 혐오가 적극적으로 유포되고 있다. 

 

이러한 피해자 혐오는 국가주의 재난서사가 작동하는 양상이 이전과는 다르게 구성되면서 강화되는데, 국가가 참사 수습을 통한 국민 통합의 주체로 위치짓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의 위치를 탈취하게 된다. 재난을 피해자의 위치에서 경험하는 국민들은 피해자가 된 국가의 위치에서 참사 피해자들을 비난하게 되는데, ‘국가가 언제까지 끌려다녀야 하냐’ ‘놀다 죽었는데 왜 국가가 책임져야 하냐’ ‘국민의 세금으로 왜 지원해야 하냐’는 식의 비난을 국가의 위치에서 수행하게 된다. 즉 피해의 부정이 아니라 피해의 언어가 이전 참사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기 시작했으며 온정주의적이고 인도주의적인 피해의 서사 대신 애도의 불평등한 할당과 생명정치적 권력의 작동 위에서 재난 피해가 국가 차원에서 선별화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단지 세월호 참사로부터 본격화된 유가족 운동과 재난에 대한 사회운동의 실천에 대한 반동적인 저항으로만 설명할 수 있을까? 물론 수십 년 동안 반복된 재난에 대한 ‘공적 기억상실’과 ‘선별된 망각’은 공적 애도와 대항적 서사 구축과 더불어 생명정치에 대한 대안적 상상이 얼마나 사회적으로 수용되기 어려운 것인가를 이해하게 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월호 참사부터 지속되어온 피해자 혐오는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매겨지는 신자유주의적 생명권력이 수행하는 ‘애도의 등급화’와 관련된다. 

 

버틀러는 푸코가 제시하는 생명 권력과 주권 권력과의 관계를 통해 애도의 불평등한 분배와 차별적 등급이 매겨지는 방식을 이야기한다. 버틀러가 주목하는 것은 신자유주의 통치성이 작동되는 장에서 재설정되는 주권 권력의 역할이다. “지금 우리가 직면하는 것은 전술로서 주권의 활용”이며, “주권이 시대착오적 권력 형태라고 선언하고 싶을지라도 새로운 권력의 배열 속에서 시대착오적인 것들을 다시 순환하게 만드는 수단이 무엇인지 파악해야 한다.”[각주:1] 푸코는 생명권력을 주권권력과 대비해 정의하면서, 생명권력을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두는’ 권력으로 정의한다. 그러나 이는 생명권력이 주권권력을 대체한다기보다 법을 토대로 하는 주권권력 이외에도 생명권력이라는 또 다른 형태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각주:2] 버틀러는 주권권력과 생명정치적 차원을 분리하고 주권권력의 시대 이후 생명정치의 시대가 온다는 식의 구별은 푸코의 의도와는 먼 것이라고 설명한다.[각주:3]

 

주권 권력은 통치성의 장에서 법 밖의 인구집단을 관리하는 데 활용된다. 즉 법에 순응적인 주체를 생산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인구집단을 관리하는데, 이는 법 바깥의 인구를 탈주체화하는 과정을 통해서 관리된다.[각주:4] 이를 통해 버틀러는 “생명권력 하의 인구군은 잠재적 ‘애도가치’를 가진 존재로 인지되는 경우에만 생명권을 주장할 수 있다.”[각주:5]는 논지를 통해 삶과 죽음의 차원을 관통하는 ‘애도의 등급화’를 제기한다. 

 

애도가치를 인정받는 사람이라는 말은 죽을 경우 애도받을 사람이라는 뜻이다. 반면에 애도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말은 죽을 경우 죽음의 흔적을 거의 혹은 전혀 남기지 못할 사람이라는 뜻이다.[각주:6]

 

이러한 버틀러의 설명은 세월호 참사 이후 심화되고 있는 피해자 혐오를 생명권력의 작동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인도한다. 애도가치가 차별적으로 분배되는 삶이 지속되고 강화되는 삶이란 곧 삶의 불평등과 죽음의 차별적 인정이 이뤄지는 지배적 규범이 관철되고 수용되는 삶이다. 인구집단을 가르는 온정주의적 분할은 취약집단을 고정시키고 낙인화하는 효과를 발휘하며 국가의 세금으로 겨우 생존하는 삶에 대한 낙인과 비난은 재난참사 피해자들에게로 확장된다. 

 

이와 함께 세월호 참사 이후 수행되는 “전투적 애도” 혹은 “애도시위”가 강남역 여성살인 사건, 구의역 ‘김 군’ 사망사고, 김용균 사망사고를 거쳐 이태원 참사에 이르면서 지속되는 정치경제적 맥락을 이해할 수 있으며, 사회적 애도가 단지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과 기억의 문제를 넘어 생명권력에 대항하는 공통의 지반 위에 놓여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 대항적 재난서사는 어떻게 구성될 수 있는가?

 

 

유가족과 시민운동이 주도하는 대항적 재난서사는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이라는 고전적 구호 곁에 ‘안전사회 건설’을 추가했다. 그러나 국가 부재에 대한 책임을 국가에게 요구할 수밖에 없는 곤란함은 이러한 운동이 국가권력의 강화로 귀결될 위험을 안고 있다. 동시에 피해-가해의 강력한 이분법적 논리 역시 강화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피해의 언어를 전적으로 제외한 채 대항적 재난서사를 구축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피해의 언어가 혹은 ‘가족’ 중심의 고통서사가 온정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인 권력 형태의 논리를 강화할지라도 그것은 조직화된 저항의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봉쇄하지는 않는다. 대항적 재난서사는 피해의 담론이 어떤 방향으로 작동하는지, 그것이 누구의 이익에 기여하고 있는지를 평가해야 한다.[각주:7] 

 

이태원 참사에서 피해서사는 이태원이라는 난잡하고 카니발적인 장소성에 대한 부정적 서사 안에서 형성되고 있다. 피해자는 ‘난잡한 놀이’가 아니라 ‘성실한 노동’과 ‘전도유망한 미래’를 담보한 주체들로 서사화되면서 ‘놀다가 죽은’ 생명에 대한 공적 애도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는 지배적 규범의 장 안에서 대항서사가 일차적으로 구성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태원 참사 1주기에 우리는 다시 이태원 핼러윈 축제를 맞이해야 한다. 핼러윈 축제의 난잡함을 긍정하는 재난서사는 어떻게 구성될 수 있을까?

 

 보다 근본적으로 국가권력을 강화하지 않은 채 국가에 재난의 책임을 묻는 시민의 집단적인 역량은 어떻게 확보되고 강화될 수 있을까? 신자유주의 생명권력을 약화시키면서 대안적인 생명정치를 구성하기 위해 생존권과 애도, 삶과 죽음은 더 많이 연루되어야 한다. 

 

윤석열 정부는 이태원 참사의 책임을 회피했을 뿐만 아니라 재난을 국가안보와 결합시켜 화물연대 파업을 진압하고 중대재해처벌법을 무력화하는 시도로 이어갔다. 이는 이전 정부 하에서 수행된 사회운동의 ‘전투적 애도시위’의 성과를 전면 부정하면서 이뤄진다. 그러나 이것이 문재인 정부와 윤석열 정부를 가르는 차이는 될 수 없을 것 같다. 문재인 정부가 강조한 ‘생명존중과 안전’은 노동자와 사회운동, 재난 · 산재 피해가족들의 투쟁으로 끌려나온 것에 불과하고, 그 힘이 미치지 못한 부분은 대부분 폐기되거나 멈추었다. 나아가 코로나19를 경과하면서 오히려 국가 주도의 생명권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윤석열 정부가 취임했을 때 그 수중에는 이미 문재인 정부가 쥐여준 권력이 있었고, 그는 그것을 통째로 적폐청산이라는 명분으로 폐기처분했을 뿐이다. 때문에 이태원 참사를 문재인 정부와 윤석열 정부의 차이로 귀속시키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반드시 짚어야 할 것이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재난’의 반대항에 ‘안전’을 놓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신자유주의와 안전담론이 얼마든지 결합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는 안전사회에 대한 국가적 책임을 묻기 전에 ‘위험’을 둘러싼 정치적인 논의를 더 심화시켜야 하며, 이것을 바탕으로 대항적 재난서사의 가능성을 실천적으로 구축해야 한다.

 

 

 

 

 

 

  1. 『위태로운 삶』, 144-145. [본문으로]
  2. 진태원, 앞의 글, 156-159. [본문으로]
  3. 주디스 버틀러, 『비폭력의 힘: 윤리학-정치학 잇기』, 김정아 옮김, 문학동네, 2021, 147. [본문으로]
  4. 『위태로운 삶』, 145. [본문으로]
  5. 『비폭력의 힘』, 152. [본문으로]
  6. 같은 책, 100. [본문으로]
  7. 주디스 버틀러·아테나 아타나시오우, 『박탈: 정치적인 것에 있어서의 수행성에 관한 대 화』, 김응산 옮김, 자음과모음, 2016, 18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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