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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공화국이라는 종교적 대상:

스피노자 『신학정치론』의 종교-정치적 전략(2/2)

 

김강기명

경희대학교 비교문화 연구소 전임연구원

 

 

(계속)

 

IV. 다른 신앙을 가진 동료 시민을 몸처럼 사랑하라

 

또한 종교의 외적 실천, 도덕적 행위, 공적 예식 등의 영역 역시 통상적인 해석에서처럼 단순히 국가가 교회나 신앙공동체에 대한 절대적 우위를 가지고 무언가를 금지하거나 허용하는 영역으로 수는 없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스피노자가참된 종교라고 부른 성서의 도덕 신학에 대해 설명할 , 사랑, 정의, 순종이라는 계명을 언급하면서도 그것의 구체적인 내용을 정의하는 것을 피했다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유는 무엇일까? 『신학정치론』에 명시적인 이유가 등장하지는 않지만, 스피노자는 도덕 신학의 내용이 구체적으로는 정부 형태나 역사적 사회 구성에 따라 달라진다고 가정한 것처럼 보인다. 책의 여러 곳에서 그는 신구약 성서 그것의 유대-기독교적 해석 전통 안에서사랑정의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특히 그것들이 서로 다른 정치적 맥락에서 쓰여졌고 해석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1] 이로부터 우리는 군주제 국가에서의 사랑, 정의, 특히 순종의 의미와 형식이, 민주정에서와 같을 없다는 결론을 내릴 있다. 스피노자에게 중요한 것은 민주정과 호환될 있는 참된 종교 계명들에 대한 해석을 위한 조건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무엇보다 순종 대한 해석에서 나타나는데, 그는 신에 대한 순종이 이웃을 사랑하는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며, 성서적 근거를 『요한서신』와 『바울서신』에서 찾는다.

 

이제 신에 대한 순종은 단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웃을 사랑하고 그 안에서 신에 대한 순종이 성취되는 것을 보는 사람은 바울이 『로마서』 13장 8절에서 말한 것처럼 율법을 성취한 것이기 때문에)으로 구성되므로, 성경에서는 모든 사람이 이 교훈에 따라 신에게 순종하는 데 필요한 것과 그것을 알지 못하면 필연적으로 사람들이 무질서하게 되거나, 적어도 자제력이 없어지는 것들 외에 다른 학문은 권장되지 않는다(TTP 13:3)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요한1서』 4장 13절에서도 이 점을 분명히 가르친다: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도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은 그가 우리에게 그의 영, 곧 자비를 주신 줄을 앎이니라”. 그는 이전에 참으로 신은 이웃사랑이라고 말했고, 이것으로부터 (거기에서 발전된 그의 원칙들로부터) 이웃사랑을 가진 사람은 진정으로 신의 영을 가지고 있다고 결론짓는다. 아무도 신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서 그는 심지어 이웃 사랑에 기초하지 않고는 아무도 신을 경험하거나 인식 할 수 없으며, 따라서 우리가 이 사랑에 참여하는 한 이러한 형태의 사랑 외에는 신의 다른 속성을 알 수 없다고 결론짓는다 (TTP 14:7).

 

우리는 이렇게 이웃사랑과 순종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정치영역으로 확장될 있다는 것을 쉽게 생각할 있다. “이웃사랑 순종 정치학의 용어로 번역하자면 박애(혹은 연대)” 충성심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람의 국가를 향한 충성심이나 신을 향한 신실함은 오직 그의 행위, 그의 이웃사랑 안에서만 인정될 있다는 점에 주목해 보자”(TTP 20:9). 이웃사랑이 신에 대한 순종이라면, 스피노자의 민주주의 이론에서 동료 시민을 향한 사랑과 공화국을 향한 충성심 역시 같은 것이 되는 것이다. 테제는 종교 영역은 물론 정치 영역에 있어서도 그것이 순전히 권위적인 -다운top-down 영역으로 추락하지 않을 있는 성찰적 계기를 제공해 준다. “[…] 우리는 최선의 국가가 모든 사람에게 우리가 […] 신앙이 모든 사람에게 허락하는 것과 똑같은 철학함의 자유를 모든 사람에게 부여한다는 것을 의심할 없다”(TTP 20:9).

 

중요한 것은 『신학정치론』에서 이웃사랑과 시민적 연대의 성격이 무엇보다 다른 이들 향한 사랑의 맥락에서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종파들이 성경 말씀을 자신의 의견을 따라 변형한다고 해서 경건하지 않다고 비난하지는 않을 것이다. 성경이 한때 사람들의 이해력에 맞게 변용되었던 것처럼, 정의와 이웃사랑의 문제에서 더 큰 의지로 신에게 순종하는 데 적합한 수단이라고 생각한다면 각자가 자신의 의견에 맞게 변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들을 비난하는 것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이러한 자유를 부여하기를 거부하고, 그들이 얼마나 명예롭고 덕성이 있건 자신과 같이 생각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신의 적으로 박해하면서, 반대로 자신에게 동의하는 사람들은 신이 선택한 사람들로 존경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국가에 대해 이보다 더 위험하고 신성모독적인 것은 상상할 수 없다 (TTP 14:1).

 

스피노자는 나아가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핍박하는 이들을적그리스도라고 지칭하기도 한다(TTP 14:7). 맥락에서 정치적 종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애국심의미도 변화하는데, 신정국가에서 애국심이 자신의 동족 혹은,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 사랑으로 나타나는 반면(TTP 17:23), 공화국에서는 무엇보다 다른 생각과 신념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관용의 실천이 애국심 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시민종교 구상은 (성서 종교적인) 이웃 사랑의 교리를 급진적으로 재해석하고 실천함으로써 공화국 안에서 서로 다른 정체성과 신념을 가진 사람들 사이의 평화로운 공존을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이데올로기적 전략이라 있다.

 

 

 

V. 공통의 신앙(Fides Universalis)

 

그런데 스피노자의 이러한 관용론의 핵심은 로크의 관용론에서처럼 서로 다른 정체성 그룹 사이의 상호 인정이나 평등에 있지 않았다. 스피노자는 결코 유대인이 유대인으로서, 카톨릭교도가 카톨릭 교도로서, 칼뱅주의자가 칼뱅주의자로서 존중받아야 한다거나 각각의 종교적 정체성 안에서 관용을 누려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종교적 정체성 그룹은 많은 경우 내부적으로 성직자들과 그들의 종교적 판단이 정통의 이름 하에 신도들을 지배하며, 평신도의 판단이나 비정통적 신학자들의 자유는 억압받는 작은 신정국가처럼 기능하기 때문이다.

 

로크 식의 이러한 관용론 대신, 스피노자는 종교적 자유와 관용에 대한 공화주의적 사유를 제시한다. 그가 주장한 신학적, 종교적 판단의 자유는 어떤 집단이나, 사적 개인의 안정적이고 고유한 정체성을 지지해주는 어떤 것이 아니다. 관용이란 그보다는 서로 다른 신앙의 내용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마주치게 하고, 그리하여 그들의 정체성을 변화시키는 도구라 있다. 이러한 만남 속에서 스피노자는 공화국 안에서 새로운 종류의 종교적 집단성의 가능성을 찾는다. 주권자의 권력은 한편으로는 성직자들의 자유를 제한할 있을 만큼, 다른 한편으로 개인들의 신앙의 자유와 자유로운 의견의 교환을 보장할 있을 만큼 강해야 한다. 이를 통해서 종교의 교조화와 신앙 그룹들이 정체성안에 고착화되는 것을 막을 있다(TTP 19:22, 20:16).

 

우리는 『신학정치론』의 세기 뒤에 똑같은 주제에 대해 스피노자의 공화주의와 비교되는 자유주의적인 응답을 발견하게 된다. “보이지 않는 사상가 아담 스미스는 정치적 당파들과 연결된 종교들, 특히 국가교회 제도로 인해 국가의 평화와 안전이 위협받는다고 생각했다(Smith 2010, 511-512).[2] 위협에 대한 그의 대답은 일종의 종교의 자유시장이었다. 여기서 자유시장은 정치경제학에서와는 달리 번영과 성장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정확히 반대, 종교의 점진적인 사멸을 위한 것이다. 스피노자와는 달리 스미스는 종교의 파편화 전략으로 제시한다.  

 

종교 교사들의 관심과 적극적인 열심은 오직 그 사회에 단 하나의 종파만 용인되는 경우, 혹은 사회 전체가 두세개의 큰 종파들로 나뉘고, 각 종파의 교사들이 일치되게 행동하고 규칙적인 규율과 종속 아래 있는 경우에만 위험하고 골칫거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한 사회가 이삼백 개, 또는 수천 개의 작은 종파로 나뉘어져 있고, 그 중 어느 누구도 공공의 평온을 방해할 만큼 중요하지 않은 곳에서는 그 열심이 전적으로 결백함에 틀림없다(Smith 2010, 513).

 

스미스는 정부가 종교적 자유시장에 상응하여 어떠한 종파도 공적으로 인정하지 말고 모든 상이한 신앙고백이나 신앙공동체를 동등하게 다루면서 각각에 그들의 생각에 따라 성직자를 임명하고 신앙고백문을 체택할 것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달리 표현하면 그들 모두가 홀로 되도록 하기, 그리고 그들이 다시금 다른 모든 이들을 홀로 두도록 의무짓기”(같은 ) 정부의 과제인 것이다. 스미스는 이를 통해서 성직자들이 추종자들을 얻으려는 열망이나 종교의 확산이 멈추게 것이라 보았는데 왜냐하면 각각의 공동체의 종교 교사들은 이러한 종파적 고독함 속에서 솔직함candour 온건함moderation 배우게 것이기 때문이다(같은 ). 그는 당시 미국 펜실베니아주의 헌법을 이러한 이상이 실현된 예로 보았다. 하지만 우리가 오늘날 미국의 종교적, 정치적 상황을 바라보고 있자면, 스미스의 이상이 너무나 낙관적이었다는 것을 있다. 종파 지도자들과 추종자들의 종교적 열정은 자유방임Laissez-faire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원처럼 사멸하지 않았다. 오히려 종교의 자유시장은 열정적인 부흥사와 전도자들을 낳았고, 기독교 근본주의, 혹은 복음주의는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종교의 영향력을 확장하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정치적인 위협이 되고 있다.[3] 

 

스피노자 역시 종교 해석에 대한 자유를 지지하고 있지만, 그것은 종교의 파편화를 향하고 있지 않다. 대신 스피노자가 내세우는 것은 공화주의적인 공통의 신앙이었다. 『신학정치론』 14장에서 그는 공통의 신앙 일련의 교리들을 제시한다. 그런데 거기에는 성서의 도덕적 계명만 아니라 신과 신의 속성, 그리고 신의 상급과 형벌에 대한 교리들까지 포함되어 있다(TTP 14:10).[4]공통의 신앙속의 신은 유대-기독교적 전통의 인격적 신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러한 인격신 개념은 스피노자가 다른 책들, 이를테면 『윤리학』에서 참된 종교 말할 때는 강하게 부정한 것이었다. 따라서 스피노자가 교리들을 정말로 믿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우리가 스피노자의 공통의 신앙전략에서 주목해야 것은 그가 제시하는 교리들 자체라기 보다는 이런 교리들을 제시한 동기와 방법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사람들의 감성은 일반적으로 매우 다르며 모든 사람이 모든 것에 똑같이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견해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한 사람에게 경외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웃음과 경멸로 이어질 뿐이다) 보편적으로 유효하다는 의미에서의 공통의 신앙에는 의로운 사람들 사이에서 논쟁의 여지를 줄 수 있는 교리는 포함되지 않는다. 이런 종류의 교리는 교리가 행위로만 판단될 수 있다는 게 유효한 한에서 어떤 사람은 경건한 것으로, 다른 사람은 경건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할 것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편적으로 유효한 교리에는 신에 대한 순종이 절대적으로 전제하는 것, 그것을 무시하면 순종이 완전히 불가능 해지는 교리만이 속한다. 다른 모든 교리들은 각 사람들이 – 각자는 자기 자신을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에 – 정의에 대한 사랑을 강화하는 데 가장 적합해 보이는 만큼 지켜져야 한다. 사람들이 이 원칙을 지킨다면 교회 분쟁의 여지가 남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TTP 14:9, 강조는 필자).

 

스피노자가 공통의 신앙을 설계하면서 목표로 것은 무엇보다 서로 상이한 신앙고백들과 집단들 사이의 갈등과 폭력을 억제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갈등은 대중들이 갖는 자연스러운 신앙과 의견의 견해차들을 특정한 종파적 정체성으로 고착화함으로써 개개인이 갖는 신앙의 자유를 제한하게 된다. 『윤리학』이나 『정치론』에서 나타나는 그의 존재론이나 사회계약론의 사유방식은 종교문제에서도 나타나는데, 그것은 개개인의 자유와, 권위와 위계를 벗어난 평등은 파편화, 개인화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오직 공통-되기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공통의 신앙은 대중들을 공통되기와 종교적 자유로 이끌기 위한 전략이라 있다.

 

그렇다면 공통의 신앙은 정치적, 사회적 현실 속에서 어떤 모습을 하게 될까? 스피노자의 마지막 저작인 『정치론』에는 이러한 공통의 신앙이 정치적으로 제도화되는 방식이 제시되고 있다. 여기서는 다른 모든 작은 종파들보다 높은 권위를 갖는 공통적 신앙의 교회(교단) 등장하는데, 교회의 구성원은 국가를 통치하는 귀족들이다.

 

첫째로 모든 귀족이 같은 종교, 즉 지극히 단순하고 가장 보편적인 종교에 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종교가 어떤 것인지는 그 책[신학정치론]에서 묘사했다. 왜냐하면 먼저 귀족들이 종파들로 나누어지지 않도록, 그리고 어떤 이들은 이 종파를, 다른 이들은 다른 종파를 더 선호하지 않도록, 다음으로 미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신민들에게서 자기 생각을 말할 자유를 박탈하기 위해 애쓰지 못하도록 조치가 취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각 사람에게 자기 생각을 말할 자유는 주어져야 하지만, 큰 회합은 금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원하는 만큼 많은 교회를 짓는 것이 허락되어야 하지만 그것은 일정한 규모의 작은 교회여야 하며, 서로 어느 정도 떨어진 장소에 세워져야 한다. 그러나 조국의 종교와 관련해서는 다음의 것이 중요하다. 이 종교를 위한 교회당은 크고 호화로워야 한다. 그리고 이 종교의 중요한 의례를 집전하는 일은 오직 귀족이나 원로에게만 허락되어 있어야 한다(TP 8:46).

 

포이어(Feuer 1958, 175-179) 플루스(Fluss 2016) 등은 이러한 국가종교 형태의 공통의 신앙 프랑스 혁명기에 자코뱅당의 로베스피에르 등에 의해 입안 되어 1794 한해라는 짧은 시간동안 수행되었던 최고 존재의 제전La fête de l'Être supreme” 비슷하거나 똑같다”(Feuer 1958, 177) 주장한다. 자코뱅 국가종교의 핵심은 이신론적인 신관과 도덕적 삶이었는데, 플루스(Fluss 2016) 로베스피에르가 자신보다 급진적인 반종교주의자였던 자크 에베르Jacques Hébert 일파의 극단적 반기독교화 운동을 억제하고, 프랑스 대중의 종교적 성향을 혁명을 위해 활용하기 위해 최고 존재의 제전 제정했다는 점에서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과 『정치론』의 문제의식을 이어받는다고 평가한다.  

 

물론 우리가 사이에 일정한 유사성을 발견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스피노자의 공통의 신앙 현상형태가 최고 존재의 제전 같은 위로부터top-down 국가종교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너무 성급한 것이다. 왜냐하면 위의 인용문은 스피노자가 『정치론』에서 분석한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 정치형태 오직 귀족정aristocracy 형태의 국가의 종교정책만을 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귀족정은 국가의 인구가 지배하는 신분계급과 지배 받는 신분계급으로 나눠진 국가형태다. 여기서 종교는 위에서 보았듯이 이중적 형태를 갖는다. 우선 귀족들 모두가 구성원으로 등록된 국가 교회가 있고, 평민들이 자유롭게 설립한 사적이고 비정치적인 여러 종파들이 있다. 그런데 국가 주권이 사람의 손에 놓인 군주제에 대한 서술에서 종교는 귀족정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게 된다.

 

종교와 관련해 언급하자면, 어떤 교회당도 결코 도시의 비용으로 건설되어서는 안 되며, 종교적 견해에 관한 어떤 법도 그 견해가 분란을 일으키고 정치공동체의 기초를 흔들지 않는 한 제정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종교를 공개적으로 실천하는 일을 허가 받은 사람들은 그들이 원한다면 자기들의 비용으로 교회당을 세울 수 있다. 그러나 왕은 자기가 고백하는 종교를 실천하기 위해 궁전 안에 자기를 위한 전용 예배당을 가져야 한다 (TP 6:40).

 

여기서 공통의 신앙 기초한 국가 종교라는 관념은 완전히 사라져 있다. 국왕 조차도 오직 자기 자신의 신앙고백과 자신과 가족들이 출석하는 궁정 교회를 가질 뿐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공통의 신앙 반드시 어떤 국가교회의 형태를 띄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에는 어떤 종교 형태가 알맞는가?

 

 

 

 

VI. 종교적 공화주의

 

아쉽게도 스피노자는 미완으로 남은 『정치론』에서 민주정에서의 구체적인 종교제도에 대한 언급을 남기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추측해볼 단서들은 충분히 주어져 있다. 종교 정책에 관한 군주정과 귀족정 사이의 차이로부터 우리는 스피노자가 종교정책을 구상할 가지 일반적인 원칙을 세우고 있음을 있다. 1) 주권이 사람의 손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회의체에 놓인 경우, 공통의 종교적 토대는 국가 정치에서 반드시 필요하다. 왜냐하면 통치자들 사이의 종교적 다양성은 매우 중대한 갈등 요소 하나이기 때문이다. 2) 대중들의 신앙의 자유는 결코 폐지될 없다. 왜냐하면 대중들의 종교적 다양성의 규모와 그들의 권력(혹은 적어도 그들의 잠재적 권력) 크기가 자유의 완전한 폐지를 언제나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귀족정에서는 지배층인 귀족들의 국가 교회와 평민들의 다양한 종파들이 공존하며, 다만 국가 교회가 우위를 갖게 되는데, 군주정에서는 (주권자가 명이니) 국가교회는 필요 없고, 평민들의 종교적 자유가 강조된다. 이것은 위에서 살펴본 아담 스미스의 종교관과 비슷해 보인다.[5] 하지만 민주정은 대중들이 지배자인 동시에 피지배자인 정치형태다. 말인 민주정에서 원칙이 대중들이라는 하나의 평면 위에서 관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귀족정에서 나타나는 이중의 종단 체제는 불가한데, 동시에 하나의 국가교회로 모든 대중들을 포섭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대중들의 공통의 종교적 토대라고 있는 것은 국가교회와 같은 어떤 제도라기보다는 다종교적, 다종파적으로 남는 사회 안에서 공통적인 the common 공간을 만들고 실천하려는 일종의 시민 종교 운동과 그것을 보장하고 후원하는 민주공화정부의 정책의 결합으로 이해될 있지 않을까? 이러한 문제의식은 『신학정치론』의 곳곳에서 모세와 이후 시대의 히브리 신정을 다룰 이미 등장하고 있다. 스피노자는 히브리 민중들이 종교를 통해 정서적 차원, 그리고 상상적 차원에서 국가만들기 프로젝트를 수행할 있었고, 과정에서 사회적 평등(군사적 의무의 평등한 분배, 토지의 평등한 분배와 7, 50년마다의 부채탕감과 재산 회복 (TTP 17:25) 대한 종교적 강조가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음을 지적한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히브리 신정에서 평등과 이웃사랑이 같은 신앙을 가진 동료 시민만을 향하고 있으며 외세 혹은 외국인에 대한 강한 혐오감을 동반하고 있었다는 점을 몰락의 근거로 꼽고 있다. 신정에서는 대중들을 하나의민족으로 통일시키는 것이 강조되었다면, 스피노자가 구상한 민주정에서의 종교-정치적 전략은 다종다양한 이들multitudo 공통되기를 핵심으로 한다고 있다.

 

민주정이라는 헌정 형식의 특수성(모두의 모드에 대한 지배) 고려했을 , 공통의 신앙 형태는 어떤 것일까? 우선 스피노자의 민주정에 대한 정의를 고려하였을 그것이 로베스피에르나 레닌과 같은 일종의 철학자 사변 속에서 위로부터 고안되는 어떤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민주정에서 공통의 신앙 아래로부터와 위로부터의 두가지 움직임이 하나로 나타난 것이라 보아야 것이다. , 기성의 종교들이나 종파들, 그리고 개개의 신앙인들의 시민적 협력 속에서 형태와 내용이 결정되는, ‘아래로부터bottom-up’ 만들어지는 어떤 것인 동시에, 이러한 협력의 조건을 창출하는 위로부터의top-down 정부의 정책, 위에서 보았듯 신의 왕국 이름 안에서(19:5) 상이한 배경의 신앙인들간의 관용과 협력을 요구하고 후원하는 종교 정책(TTP 20:6) 포함한다. 스피노자가 홉스의 영향 아래에서 제시한 사회 계약(TTP 5:7-9; 16:5-6) 민주주의의 규범적 토대를 이룬다면, 공통의 신앙 그것의 실제 수행에 반드시 필요한 상상적이고 정서적인 토대를 이룬다.

 

이러한 점에서 『신학정치론』에서 공통의 신앙 교리들이 여전히 유대교적이고 기독교적인 신학과 유사한 점을 갖는지를 이해할 있게 된다. 이러한 시민종교적 운동은 현실에 주어진 것으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스피노자가 제시한공통의 신앙 모습은 스피노자의 종교에 관한 사유 자체를 담고 있다기 보다는 당시 네덜란드 혹은 유럽의 현존하는 일신교적 종교들의 공통점에서 추출된 어떤 것이라 있다. “공통의 신앙 교리 목록에서도 유지되는 유일하고, 전지전능하며, 편재하며, 도덕적인 신에 대한 상상은 거의 모든 인구가 이런 저런 유대교적, 기독교적 신앙 그룹들로 이뤄진 어떤 국가에서는 대중들의 상상적이고 정서적인 연대에 종교적 영감을 주는 역할을 있을 것이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공통의 교리들을 지적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신이나, 신의 정신이 어떤 모습을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사변들은 다양할 수밖에 없으며 서로 관용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TTP 14:11).

 

따라서 공통의 신앙 교리들은 이러한 관용의 강조를 통해 기존의 종교적 관계들의 변화가능성 역시 담고 있는데, 왜냐하면 종교적 실천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 , 그리스도, 혹은 예언자가 아니라 무엇보다 순종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순종 율법은 위에서 살펴보았듯 대중들의 종교적-정치적 권위에 대한 복종적 관계보다는 그들의 다른 생각을 가진, 다른 믿음을 가진 동료 시민을 향한 사랑과 그들이 구성하고 있는 국가 공동체에 대한 충성을 향하고 있다.

 

 

V. 결론을 대신하여: 신학정치론의 현재적 함의

 

이러한 스피노자의 종교 정치적 전략은 오늘날 우리 시대의 종교적,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현실에서 어떤 의의를 가질 있을까? 유럽의 다문화적, 종교적 갈등을 다룬 발리바르의 강연 원고(Balibar 1993)에서 우리는 민주주의의 정서적이고 상상적인 양상에 대한 스피노자주의적 사유의 현대적 발전형태를 발견하게 된다.

 

재차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관습이나 전통이 아니라 상징적인 경계선들입니다. 그리고 제도와 강력한 국가장치들의 건설과 실천에 기입되어 있는 이 경계선들은 불평등과 배제, 불균등한 사회적 조건들과 경제적 기회들을 통해 “과잉결정”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제 생각에는 지난 시간 동안 - 적어도 ‘의식적 차원’과 공적 토론에서 - ‘문화적인’ 공동체들과 국가의 대립으로 되어버린, 이 정치를 파괴하는 ‘시민사회’와 ‘국가’ 사이의 대립을 깨트리는 것 뿐만 아니라 세번째 개념을 도입하는 것, 즉 정치적 운동(정당이나 조직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의 개념을 도입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 예를 들어 프랑스에서는 이슬람 종교나 문화(물론 이들이 통일된 어떤 것은 아닙니다)가 더이상 공적인 “교회와 국가의 분리”라는 이름 하에 제도적으로 차별받아선 안 됩니다. 하지만 동시에 – 저는 이것 말고 다른 어떤 것이 도달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 민주주의는 다시금 하나의 데모스demos를 가져야 합니다. 어떤 하나의 인민ein Volk가 아니라, 오 년 전 라이프치히에서의 데모에서 선언 되었듯, “그 인민das Volk” 말입니다. 좀 더 분명하게 말해 봅시다. 민주주의적 운동들, 시민운동들, 특히 간문화적 운동들(심지어 “간문화적 문화운동들”) 말입니다. 문화적 경계를 넘나드는 운동들, 문화적 정체성의 모멘텀을 넘어서는 운동들, 즉 민족적이거나 “종족적”인 식별체계와는 다른 정체성들을 가능하게 하고 체현할 수 있는 운동들을 말합니다 (Balibar 1993, 132. 강조는 본문).

 

이러한 민주정부와 간문화적 시민운동이 수행하는 이데올로기 정치는 개별 신앙인들이 자신의 종교 공동체와 갖는 견고한 연결은 느슨하게 만들고, (여전히 하느님 나라 이름 아래에서) 다양한 민족적, 문화적, 종교적 정체성 그룹과의 협력과 연대에 나설 있게 독려한다. 대중들의 종교적 정체성이 공화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시민적 관계 안에서 새롭게 해석되는 것이다. 시민적 평등과 자유는 이러한 공통의 종교혹은 보편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동기부여된 정치를 통해서, 대중들이 자신의 종교적 정체성 자체에 대한 손상감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동료 시민들에 대한 연대와 관용에 찬성하게 함으로써 실천적으로 가능한 것이 된다.

 

스피노자는 국가의 이름으로 공적 영역에서의 신앙적 정체성 표현을 억압할 종교에 기반한 정체성 집단들은 그들의 정체성 속으로 파고들며, 국가에 대한 반발을 조직한다고 주장한다.(TTP 20:11-12) 실제로 오늘날까지 프랑스나 20세기 튀르키예 등에서 입안되었던 강한 세속주의(Laïcité) 정책이 여러 형태로 종교의 복수를 불러왔던 것을 우리는 목도한 있다. 반대로 종교적 신앙을 사적이거나 문화적인 영역으로 치부하여 자유경쟁 시장에 맡긴다고 종교가 파편화되거나 온건화되는 것이 아니라는 역시 분명하다. 종교의 자유시장에서 예언자형 종교 엘리트들은 동원할 있는 모든 수단을 가지고 자신의 종교의 우월성을 홍보하는데, 거기서 가장 효과적인 것은 혐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학정치론』이 제안하고 있는 시민 종교적 해법은 민주정부의 적극적인 종교 정책과, 그에 호응하는 연대적, 관용적 시민운동을 동시에 요구한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섬세한 종교-정치적 전략이 느리더라도 종교의 권위와 정체성의 구심력을 실질적으로 약화시키고, 종교가 마치 하나의 정신에 의해 인도되는”(TP 2:16) 것과 같은 화합의 관계 속에 살아가는 민주적 시민을 만드는 시민교양으로 있을 거라 보았다. 그의 시대에 제안은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였다. 칼뱅파 성직자들은 책의 종교 이론 자체를 이단시하고, 공화국 정부를 공격하면서 스피노자와 같은 무도한 무신론자를 관용하고 있다는 것을 비판근거로 삼았다. 1672년에 공화정부는 쿠데타에 의해 엎어졌다. 하지만 종교나 우익 정체성 정치의 이런 폭력성을 민주공화국이 어떻게 다뤄야 할지 책은 여전한 영감을 주고 있다. “차별금지법”, “학생인권조례 대한 반대로 개신교도 세력이 정치적으로 결집하고 있는 지금, 『신학정치론』은 연대와 인권을 종교적 주장의 전면에 내세우는 대안적인 기독교 운동과, 이에 호응하여 종파주의적 공격성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민주정부의 역할의 필요성에 대한 전망을 제시해주는 고전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평가할 있을 것이다.

 

(끝)

 

 

 

참고문헌

 

스피노자의 저작

스피노자, 베네딕투스 . 공진성 . 2020. 정치론』. 서울: 도서출판 .

Spinoza, Baruch de. 2010. Politischer Traktat. Wolfgang Bartuschat, ed. Sämtliche Werke, Bd. 5b. Hamburg: Meiner Verlag.

Spinoza, Baruch de. 2012. Theologisch-politischer Traktat. Günter Gawlick, ed. Sämtliche Werke, Bd. 3. Hamburg: Meiner Verlag.

Spinoza, Baruch de. 1999. Ethik in geometrischer Ordnung dargestellt. Wolfgang Bartuschat, ed.. Sämtliche Werke Bd. 2. Hamburg: Meiner Verlag.

Spinoza, Baruch de. 2017. Briefwechsel. Wolfgang Bartuschat, ed. Sämtliche Werke, Bd. 6. Hamburg: Meiner Verlag.

 

 기타 참고 문헌

김기명. 2021. “스피노자, 『신학정치론』의 공화주의 관점에서 바라본성서해석 정치적 성격과 엘리트-대중 관계 문제.” 철학사상 82. pp. 3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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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ibar, Etienne. 1993. “Gibt es einen »europäischen Rassismus«? Elemente einer Analyse und einer Handlungsorientierung.” Etienne Balibar and F Balke, ed. Schwierige Fremdheit: über Integration und Ausgrenzung in Einwanderungsländern. Frankfurt am Main: Fischer Taschenbuch Verlag. pp. 119–36.

Bayle, Pierre. 1965. Historical and Critical Dictionary, Selections. Indianapolis: The Bobbs-Merrill Comp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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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uss, Harrison. 2016. “Revisiting the Cult of the Supreme Being.” Jacobin. https://jacobinmag.com/2016/01/robespierre-rousseau-religion-separation-church-state-kim-davis/. (검색일 2023. 01.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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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auss, Leo. 1996. Die Religionskritik Spinozas und zugehörige Schriften. Stuttgart: Metzler.



각주

 

[1] 스피노자의 성서해석 연구, 특히 성서 내부의 다양성이 갖는 정치적 의미에 대해서는 김기명 (2021) 참조

[2] 스코틀랜드 개혁파(칼뱅파) 교회 전통과 당대의 계몽주의 철학 고전 과학의 발전이라는 다채로운 배경 속에서 전개된 스미스의 신학적 사유에 대한 개요를 제시하는 책으로는 Oslington (2011) 참조

[3] 스미스의 종교관과 비슷하게 현대에 종교 시장 비유를 사용하여, 종교적 다원주의가 세속화로 연결될 것이라는 희망을 표현한 이로는 Berger(1967) 있다. 이에 반대하여 Stark & Finke(2000) 스미스에서 시작된 합리적 선택의 논의를 종교 시장에 적용하여 경쟁이 치열한 시장 상황에서 집단은 고유한 틈새 시장을 개척하여 특정 사회 집단에 호응하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동기를 갖게 되고, 열광적인 지지자들과 대체제와의 경쟁을 위한 명확한 정체성에 몰두하게 된다고 보았다. 흥미로운 것은 스미스가 자신의 종교 파편화론을 주장하면서 반박한 것이 데이비드 흄이 History of England (1454-1761)에서 주장한 국가종교 옹호론이었는데, 역시 경제적 용어를 사용하여 종교가 규제되지 않는 시장속에 놓일 설교자들은 고객들의 수를 최대화하기 위해 진리, 도덕, 품위를 팽개치고 일반 민중의 정념과 맹신에 호소하게 된다고 보았다는 점이다(Anderson 1988에서 재인용).

[4] “1. 지극히 정의롭고 자비로운 , 최고의 존재가 있으며, 안에 참된 삶의 모델이 있다. 그가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거나 믿지 않는 사람은 그에게 순종하거나 그를 심판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2. 신은 유일하신 분이다. 이것 역시 의심 여지없이 최고의 경외심과 존경과 사랑을 그에게 보여주기 위해 없어서는 안될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다. 다른 모든 존재를 능가하는 존재만이 정도로 숭배하고 존경하며 사랑받을 있기 때문이다. 3. 그는 편재하거나 모든 것이 그에게 명백하다. 그에게 숨겨진 어떤 것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그가 모든 것을 본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가 모든 것을 다스리는 그의 정의의 공평성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오인하고 있는 것이다. 4. 그는 만물에 대한 최고의 권리와 권능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것을 어떤 다른 권리의 압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자유에 따라 그리고 자신만의 은혜로 행한다. 5. 신에 대한 숭배와 그것이 함축하는 순종은 오직 정의와 이웃사랑이라는 사랑으로만 이루어진다. 6. 삶의 방식에 따라 신에게 순종하는 모든 사람은 구원받지만 정욕의 지배 아래 사는 다른 사람들은 구원에서 멀어진다. 사람들이 이것을 굳게 믿지 않는다면 정욕보다 신에게 순종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7. 신은 회개하는 자의 죄를 용서한다. 죄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모든 사람이 구원에 대한 희망을 잃고 신의 자비를 믿을 이유가 없어진다. 신이 만물을 다스리시는 자비와 은혜에 근거하여 사람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을 굳게 믿고, 안에서 신을 사랑할 동기를 찾는 사람은 성령을 따라 그리스도를 참으로 알고 그리스도가 안에 있다(TTP 14:10)”.

[5] TTP TP에서 군주제의 모습은 특히 종교와 관련하여 상당히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TP에서는 TTP 나오는 종교정책이나 이데올로기적 통치 기술의 영향력에 대한 서술이 완전히 축소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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