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인-무브

히스토리 트러블 (1/2)

조앤 W. 스콧과의 인터뷰

 

인터뷰어: 가엘 크리코리안, 필립 망조, 아델 폰티첼리 & 피에르 자우이

인터뷰이: 조앤 W. 스콧

번역: 황유경

 

* 원문 vacarme.org/article2325

 

History trouble - Vacarme

« Femme », « Homme », « Genre », « Français », « Musulman » : ces catégories, par lesquelles se constituent et s’identifient des sujets politiques, n’ont pas de sens fixe. C’est que « les mots ne sont jamais que les batailles

vacarme.org

 

조앤 W. 스콧의 사진.  사진: 세바스티앙 돌리동

 

‘여성’, ‘남성’, ‘젠더’, ‘프랑스인’, ‘무슬림’.  정치적 주체들을 이루고 식별하는 이러한 범주들에는 고정된 의미가 없다. ‘단어란 언제나 그것을 정의하기 위한 투쟁’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투쟁에 대해 연구를 해온 역사가와 만남을 가졌다.

 

 

당신은 프랑스의 노동운동에 대해 연구해왔으며, 페미니스트 담론의 역사를 다뤘고, 역사기록학에 있어 젠더의 개념을 도입하는 데에 기여했습니다. 당신이 연구를 하며 중점을 두고 있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저는 연구자로서의 제 삶에 있어 연구 대상, 방법론, 심지어는 이론에서도 어떠한 명확한 통일성을 찾아낼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지금까지의 연구 과정, 분기점, 관점의 잇따른 변화의 측면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저는 1960년대 좌파 진영의 결집과 1970년대부터 시작된 페미니즘 등 정치적 상황, 지적 흐름에 의해 수차례에 걸쳐 소환된 바 있습니다. 

 

그래도 사실상 제가 늘 품고 있던 질문은 비대칭적인 권력 관계에 대한 것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의 첫 저서는 19세기 말 카르모 시(市) 유리공들의 사회적, 정치적 조직을 다루고 있습니다. 저는 생산 기술의 기계화와 연계된 고도로 숙련된 장인의 프롤레타리아화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경제력과 정치력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서술했습니다. 이 노동자들은 어떻게, 그리고 왜 자신들의 일에서 맞닥뜨린 변화에 저항했을까요?

 

1970년대 페미니즘 운동이 활기를 띄며 제가 여성의 역사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성을 확신하게 되었을 때, 저는 불평등의 양상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했습니다. 예컨대 저는 시민의 평등이라는 보편 원리가 여성의 정치적 배제를 받아들이는 방식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저의 모든 저서에서 이처럼 저는 불평등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것을 경험하고, 생각하고, 공식화하는 방식을 서술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한편, 제가 항상 동일한 관점에서 이러한 문제를 파악했던 것은 아닙니다. 저는 노동자와 고용주, 여성과 남성, 통치자와 피통치자 사이에 존재하는 불평등의 측면을 따져보는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1980년대 초부터 저는 미국에서 소위 ‘프랑스론(論)(French theory)’이라 불리던 것에 사로잡혔습니다. 푸코, 데리다, 이리가레를 읽으며 저는 제가 대상을 파악하는 방식에 차이라는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지배에 대한 문제를 다른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는 방법들이 있다는 데에 설복됐습니다. 저는 이러한 불평등을 낳는 데에 있어 차이라는 것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데리다가 ‘차연(différance)’이라 부르는 것, 즉 본질(essence)과 우연(accident) 사이, 혹은 남성(masculin)과 여성(féminin) 사이의 본원적인 간극, 권력 관계인 동시에 시간화(temporisation)의 한 형태이기도 한 이 간극의 개념 체계에 대한 고찰이 필요했으며, 그것의 상징적 능력, 가변성, 그리고 불안정성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 또한 있었습니다. 저는 연구 대상을 바꾼 적이 없습니다. 저는 1970년대부터 여성의 역사를 연구해왔습니다. 그러나 인식론적인 관점에 있어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제 연구대상을 분석하게 된 것입니다.

 

 

차이에 대한 이러한 질문이 사회적 불평등과 노동운동에 대한 당신의 연구에서 빠져 있던 건 당신이 자신의 우선적인 학문적 배경으로 삼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였기 때문일까요?

 

저는 마르크스주의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쓰는 말로 하자면 저는 ‘레드 다이어퍼 베이비 red diaper baby’[각주:1]였죠. 마르크스주의가 정치철학이론이라는 것을 이해하기도 전에 저는 부모님으로부터 유물론적 변증법의 기초, 사회적 관계에 대한 경제결정론의 개념을 배웠습니다. 따라서 다름 아닌 계급의식과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저는 과거에 접근해 갔습니다.

 

조앤 W. 스콧, 1963년, 위스콘신 대학교,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   사진: C. 클락 키신저

 

1960년대에 저는 학생 운동가였고, 모든 시위에 참여했습니다.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 핵무기 반대 시위, 노동 운동 혹은 시민권 획득을 위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운동과의 연대 등등이 있었죠. 그때, 저는 홉스봄(Hobsbawm)의 『반란의 원초적 형태(Social Bandits and Primitive Rebels)』, E.P. 톰슨(Thompson)의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The Making of the English Working Class)』, 찰스 틸리(Charles Tilly)의 『방데: 1793년 반혁명의 사회학적 분석(The Vendée: A Sociological Analysis of the Counterrevolution of 1793)』 등 영국과 미국의 신좌파(New Left) 역사가들의 저작을 탐독했습니다. 당시는 역사학 분과라는 것이 문제시되던 시기였습니다. 또한 우리가 우리의 연구와 사회 참여에 대해 명확하게 표명하려 시도하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노동계급의 역사를 연구하고, 이런저런 시위나 폭력 행위가 전략적인 것이었으며, 일관적이고 심지어는 조직적인 이해관계에 의해 선도되었다는 것을 증명해나가며, 저는 제 주위에서 관찰한 사회 저항 운동과 도시에서의 시위들을 합법화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정부나 고용주들이 뭐라던 간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저는 이러한 결집이 합법적이며 합리적인 정치 형태를 구성한다는 것을 입증하려 노력했습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역사상 분명히 중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찰스 틸리의 ‘집단행동(collective action)’ 개념을 통해 우리는 공식 역사에서 하부정치적이라 여겨지는 일련의 전투적인 행위들을 모두 밝혀낼 수 있었습니다. 정치 개념의 이러한 확장은 역사적 행위자로서 여성의 역할에 대한 재평가는 물론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생각까지 가능케 했습니다.

 

 

당신은 이런 식으로 노동자의 역사에서 여성의 역사로 연구 분야를 옮긴 건가요?

 

이는 역사적인 상황과 맞물린 일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1969년 대학에 채용되었고, 당시는 캠퍼스 내에서 페미니스트 운동이 폭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던 때였습니다. 제 부모님께서는 여자아이와 남자아이 사이의 차이를 두지 않고 저를 기르셨지만 그렇다고 페미니즘 정치학이 제가 받은 정치적 유산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성을 사회 정의를 위한 투쟁의 파트너로 간주하는 것이 제가 가진 하나의 사안이었고, 사회주의 전통에서 개인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한 부르주아적 캠페인으로서 항상 대표되어 왔던 것에 참여하는 것이 또 다른 사안이었습니다. 1970년대부터 제가 여성 운동에 의해 제기된 질문들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은, 제 존재의 모든 측면, 즉 학문적, 개인적, 정치적 측면이 모두 그 질문들을 통해 수렴되었기 때문입니다.

 

여자 대학생들은 여성의 역사, 이른바 ‘허-스토리 her-story’를 써 달라고 요구하곤 했습니다. 저는 그 일에 착수했습니다. 저는 루이즈 틸리와 함께 『여성 노동 가족(Women, Work, and Family)』을 썼습니다. 저희는 여성이 유급노동에 진입하는 것이 해방의 한 방법이라고 주장하는 너무나도 단순한 방정식을 복잡하게 만들었습니다. 산업화가 이루어지기 훨씬 이전, 장인계급과 농민계급에서 여성은 가정경제의 필수적인 생산 활동에 참여하고 있었다는 점을 특히나 강조해서 보여주며 말입니다.

 

이 책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저는 차별, 그리고 남성과 여성 사이의 자연적, 생물학적, 문화적 차이에 대한 강조가 역사적으로 계속되어 왔다는 것에 대해 강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권리의 평등이 보장된 후에도 지속되는 여성에 대한 억압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왜 개혁은 임금 격차에 대해서는 그토록 피상적으로 적용됐을까요? 내가 자주 사용하던 마르크스주의의 틀은 남성과 여성간의 불평등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는 거의 쓸모가 없었습니다. 저는 아직 공식화할 수는 없었지만, 만일 우리가 남성과 여성 개념의 의미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방법을 알게 된다면 이러한 질문들에 더욱 적절한 답변을 찾게 되리라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그리고 그 직감은 역사적이면서도 동시에 정치적인 것이었습니다.

 

 

당신이 프랑스론을 만나게 된 게 그때였나요?

 

정확합니다. 그것을 알게 된 것은 1980년, 제가 브라운 대학교에 갔을 때였습니다. 거기선 일군의 페미니스트 여성 연구자들이 매우 활동적으로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은 문학을 공부했고, 포스트구조주의(바르트, 푸코, 데리다, 드 만), 정신분석학(프로이트, 라캉, 라플랑슈), ‘프랑스 페미니즘’(이리가레, 식수, 크리스테바)에서 도구를 차용하고 있었습니다. 이 만남이 제게 어떤 것이었는지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아!”, 미국에서 말하듯 말이죠! 그들이 쓴 글을 읽으며 저는 이전의 연구에서 제가 부딪쳤던 질문들을 다시금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말과 사물』이 제게 중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푸코는 르네상스부터 고전주의 시대까지 구성되었던 역사적, 정치적 논쟁의 범주 자체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역사는 물론, 인간의 속성으로서의 이성, 개인의 타고난 권리로서의 주권, 개인이 바라는 조건으로서의 자유, 혹은 진리, 섹슈얼리티, 인간, 성차(性差) 등등 유연하고 유동적이긴 하지만 이해와 지식이 정립되는 근간이었던 용어들이 되었던 모든 범주들 말이죠. 이로부터 역사적 사건이라는 개념 자체가 뒤집혔습니다. 사건이라는 것은 그때부터 제게 가치, 의미, 주제를 생성해내는 담화의 뱃머리이자 개념의 변화를 의미했습니다. 저는 이 책이 제게 선사한 느낌, 엄청난 불안감과 뒤섞인 저항할 수 없는 유혹의 그 느낌을 절대 잊을 수 없습니다. 제게 이 두 감정은 종종 함께 찾아오곤 하죠! 역사에 대한 저의 애착은 그때까지 이성적인 것이었으나, 그때부터 저의 열정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일군의 여성들에게 합류했습니다. 이렇게 저는 제 동향인들에게 ‘프랑스식 페미니스트’가 되었습니다.

 

 

아이러니한 일이군요! 최근 프랑스에서 벌어지는 논쟁에서 당신은 ‘미국식 페미니스트’로 분류되곤 했는데요.

 

그래서 저는 DSK 사건[각주:2] 당시, 제겐 성별(sexe) 간 관계의 위계적 구조를 과소평가하는 것으로 보이던 ‘프랑스식 페미니즘’의 지지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들처럼 페미니즘이 ‘국가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페미니즘은 늘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으며, 따라서 페미니즘들이라고 복수형으로 말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아울러, 이러한 국가적 비교는 참을 수 없을 지경입니다! 미국에서 어떻게 ‘프랑스식’ 페미니스트와 ‘미국식’ 페미니스트를 구별했는지 아시나요? 그들의 신발로 구분했습니다! 전자가 훨씬 더 유행에 따랐다는 거죠! 브라운 대학교에 도착했을 때 저는 운동화를 두고 와야만 했습니다!

 

신발이 예쁘든 안 예쁘든, 우리는 밤낮으로 토론하곤 했습니다. 그때 같은 시절은 제 인생에 또 없었습니다! 이걸 나이를 어느 정도 먹은 여자의 향수 쯤으로 여길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오늘날의 논쟁들이 날카롭거나 자극적인 면에 있어 그 시절에 비해 훨씬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레이건 대통령 시절은 미국 페미니스트계가 서로 갈라서던 때이기도 했지요...

 

맞습니다, 저희는 포르노, 매춘 등의 문제 등으로 인해 매우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분열 자체는 활기를 띠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여러 여성 공동체는 합의나 갈등의 형태로 입장을 공식화하고 설명할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저희는 생각을 해야만 했습니다. 페미니스트 역사가들 사이에서 이는 열정적인 이론적 논쟁이었습니다. 저희는 ‘여성’이라는 범주로 간주되는 보편성에 대한 도전에 직면했습니다. 저희는 정치적 투쟁이 요구하는 통일성을 완전히 잃지 않으면서도 그 용어를 복수화하기 위해, 역사화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여기에는 생산력 있는 긴장감이 있었습니다.

 

 

그때가 당신이 그 유명한 논문인 「젠더: 역사 분석의 유용한 범주(Gender: A Useful Category of Historical Analysis)」[각주:3]를 썼던 때인가요?

 

젠더 개념으로 인해 생물학에 대한 사회적 성 역할의 귀속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남성’ 주체와 ‘여성’ 주체는 어떻게 정립된 걸까요? 규범 시스템은 어떻게 작동하는 걸까요? 사람들은 행동 규범을 넘어선 스스로를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까요? 그럴 경우,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구체적인 담화 자원으로는 무엇이 있을까요? 페미니스트 비평이 제기한 이러한 정치적 질문들은 역사적 자료들에도 적용될 수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제가 젠더를 ‘역사 분석의 유용한 범주’로 받아들이게 된 이유입니다.

 

 

당신은 방법론에 있어서의 이러한 변화로 인해 당신의 학문 분과에 대한 비판적인 담론 또한 수반하게 되었죠...

 

이 두 가지 차원은 연결된 것입니다. 저에게 이들은 독특한 인식론적 변형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전통 역사가로서 여성의 역사를 다루는 것은 이 역사를 생산하는 것에 있어 자신의 역할에 의구심을 갖지 않고 그들의 삶, 그들의 착취에 대한 자료를 모으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제가 역사가들이 스스로 역사를 생산해내는 방식에 의문을 품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저는 『젠더와 역사의 정치(Gender and the Politics of History)』라는 제목 하에, 역사에 대한 남성주의적인 접근 방식을 다룬 일련의 논문을 썼습니다. E.P. 톰슨의 예를 들어봅시다. 그는 계급의식의 남성적 성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그것을 보편적인 것이라 여겨 제게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가 참조했던 기록물들에서 노동계급의 의식은 여성과의 차별, 노동자중심주의의 남성성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는 것, 이것이 그의 접근 방식에서의 맹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차원을 무시한다는 것은 이를 재생산한다는 것 또한 물론 의미했습니다.[각주:4] 톰슨은 너무나도 화가 난 나머지 제게 다시는 말을 걸려 하지 않았습니다!

 

 

푸코를 읽는 것이 어떤 부분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지 이해합니다. 그러나 역사적 실천이 데리다의 이론에 준거하는 경우는 더욱 드뭅니다. 데리다의 해체주의 연구는 형이상학적 역사의 지평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죠...

 

제가 정통적인 데리다파(坡)일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의 텍스트 분석 방식에 많은 빚을 지고 있습니다. 그의 분석 방식은 저를 이항대립의 해체로 이끌었습니다. 그의 분석 방식을 받아들임으로써 저는 ‘차연’의 작용과 그 힘, 의미의 미끄러짐에 주의를 기울이는 방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역사가는 단순히 여성이 한 일을 기술하는 데에 머물지 않고, 이런저런 관계 내부에서 여성의 주체성이 어떻게 구성되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남성과 여성, 계급이나 인종은 그들의 관계와 그 관계가 합의되는 방식을 넘어서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젠더, 계급 혹은 인종이 여성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일부임을 강조하는 것과, 이러한 속성들이 여성을 특정 관계 속에서 식별하고 위치시키기 위해 어떻게 이용되는지 질문을 던지는 것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남성’과 ‘여성’이 누구인지,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다고 믿을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들을 마주하는 역사적, 지리적 맥락 속에서 그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질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에게 언어(langage)는 주체, 사회 조직, 그리고 권력 관계가 어떻게 정립되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한 탐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당신이 데리다의 수법을 이용한 예시를 들어주실 수 있나요?

 

『젠더와 역사의 정치』[각주:5]에는 「시어즈 소송(The Sears Case)」이라는 제목의 논문이 있습니다. 임금 차별에 대해 여성 직원들이 고소를 제기했고, 백화점 측에서는 여성들이 덜 ‘어렵다’고 생각되는 업무, 혹은 파트타임 근무를 선호한다는 점을 들어 이를 정당화했던 일이 있었죠. 제가 이 소송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원고측과 고용주측 모두 페미니스트 역사가가 한 명씩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쪽은 (임금 차별 측면에서) ‘유물론적’ 해석을, 상대 쪽은 (여성의 선호 측면에서) ‘문화적’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페미니스트계는 분열되었습니다. 나는 이러한 대립 자체를 거부함으로써 이들을 중재했습니다. 이 분석들 각각은 남성이라는 것과 여성이라는 것이 [미리] 존재했다는 관념에서 유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분열된 페미니스트계가 각각 점유하고 있는 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사고를 거부하고, ‘여성이다’라는 것이 어떠한 부분에서 ‘남성이 아니다’라는 것을 의미하는지 살펴보아야만 했습니다. ‘풀타임으로 일하고 싶지 않은 노동자’, 아이들을 책임져야 하고 자신의 남편보다 더 많은 돈을 벌기를 두려워하는 노동자로서의 여성의 표상을 검토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또한 이로 인해 노동 계급에 대해 어떠한 표상이 생겨났는지 의문을 품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는 자연화(naturalisation)된 것으로 여겨지는 젠더 간의 차이에 대한 거부의 문제였습니다. 차이란 서로서로를 다르게 만들어주는 기표, 위치, 발화에 따른 것입니다. 임금 차별에 맞서기 위해선, 여성이 어떤 업무들에 대해서는 남성보다 더 낫다는 것을 입증함으로써 위계질서를 전복하기보다는 그 위계질서를 해체하는 것이 관건이었습니다. 이게 바로 데리다가 제게 가르쳐준 것입니다. 대립은 그것을 뒤집어 놓음으로써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건 남성이 무엇인지 여성이 무엇인지를 사람들이 안다고 믿는 지점에서, 차이가 어떻게 상식에 관여하는지를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 히스토리 트러블(2/2)에서 이어집니다

  1.  미국 공산당(CPUSA)원, 혹은 미국 공산당을 지지하는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을 일컫는 말. (역자) [본문으로]
  2. 2012년 프랑스 대선에서 사르코지 전 대통령의 가장 유망한 경쟁자로 주목받던 도미니크 스트로스 칸(DSK) 전 IMF 총재의 성폭행혐의 사건. (역자) [본문으로]
  3. 『젠더와 역사의 정치』(후마니타스) 2장에 실려 있다.(역자) [본문으로]
  4. 이에 대해서는 『젠더와 역사의 정치』(후마니타스) 4장을 참조.(역자) [본문으로]
  5. 『젠더와 역사의 정치』, 조앤W.스콧, 정지영 옮김, 후마니타스, 2023. 언급한 논문 「시어즈 소송(The Sears Case)」은 8장에 실려 있다.(역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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