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인-무브

웹진 인-무브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코너 <신탁의 정치학>은 현대 자본주의를 구성하는 법제도와 사회조직에 관한 연구들을 소개한다. 현대 자본주의로의 전환은 새로운 유형의 관념에 기반한다. 법적 인격과 그것들이 맺는 관계, 거기에 결부된 권리들의 체계가 자본주의에 특유한 소유 형태를 가능케 했다. 전통적인 자본주의 비판에서는 주식회사, 은행, 중앙은행, 각종 영리 및 비영리 법인체들의 형성 과정과 본질에 상대적으로 관심을 덜 기울였다. 그럼에도 우리는 막스 베버, 에밀 뒤르켐, 소스타인 베블런, 루이스 멈퍼드와 같은 이들, 독일역사학파나 오스트리아학파와 같은 이들로부터 자본주의를 법제도와 사회조직을 중심으로 탐구하는 길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한 길 중 하나가 "신탁(trust)"에 관한 정치경제학적 탐구다. 신탁은 현대 가족과 상속, 주식회사와 각종 계약, 국민국가와 대의제 등을 구성하는 철학적 원리이자 법적 형태다. 신탁은 주로 영국의 다원주의 또는 공화주의 정치철학과  영국 수정주의 역사학 및 법제사에서 논의되었다. F. W. 메이틀란드, 알란 맥팔레인, 퀀틴 스키너, 데이비드 런시먼 등이 대표적이고, 한국에서는 김종철이 이들에 기반해 자본주의 비판을 전개했다. 이번 코너에서는 자본주의와 근대 사회를 "신탁"의 측면에서 다룬 국내외 연구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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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탁의 제도화: 화폐, 회사 그리고 국민국가

 

 

김종철 / 서강대학교

번역: 박기형 /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이 글은 <Modern Money and the Rise and Fall of Capitalist Finance: The Institutionalization of Trusts, Personae and Indebtedness(2022, Routledge)>의 저자인 김종철이 작성한 것으로, 책의 문제의식과 주장을 압축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저자 소개: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의 부교수다. 캐나다 요크대학교 정치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독일 쾰른에 있는 막스플랑크 사회연구소, 스페인 마드리드에 있는 카를로스3세 왕립대학의 경제사학과, 미국 뉴욕에 있는 컬럼비아법대에서 연구 교수로 재직했다. 한국어 저서로 금융과 회사의 본질(2019, 개마고원), 기본 소득은 틀렸다(2020, 개마고원) 등이 있다.

 

 

 

특정 시대에 사회과학자들은 서로 다른 주제를 연구하더라도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공통된 철학적 관점을 공유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주류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철학적 관점에 문제가 있어서, 자본주의 금융 시스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한다면 어떨까?

 

전통 경제학은 근대 서양 철학에서 인격(person)과 재산권(property)이라는 두 가지 핵심 개념에 기반을 둔다. 놀랍게도 이 두 개념이 어떻게 현대 화폐의 본질을 형성하는지에 관한 학문적 탐구가 없었다. 이러한 이론적 탐구가 부재한 탓에, 현대 화폐의 진정한 본질을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예를 들어, 비주류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화폐의 신용 이론(the credit theory of money)은 화폐가 채권자와 채무자 관계를 표상하는 신용이라고 주장한다. 불행하게도 이 이론은 근대 이전 형태와는 다른, 자본주의의 채권-채무 관계가 지닌 독특한 본성을 간과하고 있다.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는 수천 년 동안 존재해 왔지만, 현대에는 이러한 관계가 전례가 없을 정도로 널리 퍼져 있다. 자본주의적 채권-채무 관계가 광범위하게 생겨나도록 하는 요인은 대체 무엇인가? 이 관계는 자본주의 이전의 형태와는 어떻게 다른가? 내 책 『현대 화폐와 자본주의 금융의 흥망성쇠(Modern Money and the Rise and Fall of Capitalist Finance: The Institutionalization of Trusts, Personae and Indebtedness)』는 현대 화폐가 단순한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를 넘어선다고 주장한다. 현대 화폐가 세 가지 페르소나(personae)--즉, 근대 국가(the modern state), 회사 법인(business corporation), 개인주의(individualism)--와 채권자-채무자 관계가 결합해서, 혹은 재산권과 채권자-채무자 관계가 결합해서 출현했다는 것을 입증한다.

 

이들 결합을 가리켜 신탁(trust)이라 부른다. 법학 교과서는 신탁을 두 가지 방식으로 정의한다. 첫 번째 정의에 따르면, 신탁은 동일한 자산에 대해 두 개의 배타적 소유권이 주장되는 경우, 즉 수탁자가 주장하는 법적 소유권(legal ownership)과 수익자가 주장하는 형평법적 소유권(equitable ownership)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이중 소유권(a double-ownership)이다. 두 번째 정의에서는 신탁을 재산권과 부채의 이종교배(a hybrid between property and debt)로 설명한다. 신탁의 주요 목적은 소유자가 특권적인 재산권을 향유하되 그 권리에 수반되는 법적 책임은 회피하는 것이다. 소유자는 부동산의 법적 소유권을 수탁자에게 이전하면서도 형평법적 소유권은 유지하는데, 그럼으로써 소유권에서 비롯되는 이득을 계속해서 누릴 수 있다.

 

자본주의의 기원과 본성을 다룬 카를 마르크스와 막스 베버의 고전적 저술에는 신탁에 관한 내용이 거의 없다. 그러나 F. W. 메이틀런드(Frederic William Maitland)와 R. S. 닐(Ronald Stanley Neale)은 자본주의의 기원과 본성 모두에서 신탁이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음을 강조하는 설득력 있는 논증을 펼쳤다. 메이틀런드는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전환은 “신분에서 계약으로의 전환(from status to contract)”이 아니라 “계약에서 신탁으로의 전환(from contract to trusts)”이라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선 신탁으로 대표되는 특유한 형태의 소유권과 집단주의(collectivism)를 인정해야 했다. 메이틀런드는 유한책임 주식회사의 설립과 제국주의적 신탁 통치(trusteeship) 개념을 포함해 신탁이 경제와 정치 전반에 미친 광범위한 영향을 밝힌다. 또한, 닐은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전환에 관한 고전적인 이론적 설명이 시장과 부르주아지의 역할을 지나치게 강조한다고 비판한다. 그는 지주 계급과 그들의 이데올로기인 신탁이 영국에서 산업 자본주의의 발전을 촉진하는 데 필수적인 법제도적 틀을 제공했으며, 부르주아 계급이 신탁을 크게 고치지 않고서 받아들였음을 입증한다. 메이틀런드와 닐은 자본주의의 등장에 미친 신탁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그들의 주장은 엄격한 분석보다는 직관에 더 많이 의존했다. 이 책은 현대 화폐, 유한책임 주식회사, 근대 국민국가라는 세 가지 자본주의 제도를 종합적으로 분석함으로써, 그 공백을 메우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리고 이러한 분석을 통해 자본주의의 본질을 신탁으로 규정하는 새로운 자본주의 이론을 제시한다.

 

아래 그림은 이 책에서 논의하는 주요 개념을 요약한 것이다. 인격-재산 존재론(The ontology of person-property)은 신탁의 철학적 배경을 형성하며, 결과적으론 세 가지 자본주의 제도를 포괄한다.

 

 

 

화폐, 회사, 국민국가라는 세 가지 자본주의 제도를 신탁으로 규정함으로써 우리는 어떤 통찰과 이점을 얻을 수 있을까?

 

첫째, 현대 은행업이 유럽 대륙이 아닌 영국에서 시작된 이유를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영국법에 깊이 묻어 들어가 있는 신탁 개념은 유럽 대륙에 널리 퍼져 있던 로마법의 전통과는 다른 특징을 보인다. 유럽 대륙에서는 재산과 부채를 엄격하게 분리했고 두 권리를 혼합하거나 혼용하는 일을 범죄로 간주했다. 따라서 요구불예금을 수탁자(depositaries)의 명의로 제3자에게 대출하는 등 재산과 부채를 이종교배하려는 모든 시도는 오랫동안 횡령으로 간주되었다. 반면, 로마법의 영향을 덜 받은 영국은 이러한 이종교배를 금지하지 않았다. 런던의 금세공 은행업자들은 이러한 유리한 법적 환경 속에서 17세기 후반 현대 은행 화폐(modern bank money)의 탄생을 선도했다.

 

둘째, 현대 화폐의 본성에 대한 이해를 높인다. 현대 은행은 대출자의 은행 계좌에 요구불예금을 만들어 화폐를 창출한다. 이 때문에 은행 화폐의 본질을 둘러싸고 계속된 담론은 주로 요구불예금의 본질에 대한 탐구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1848년 영국의 획기적 소송이었던 <Foley v. Hill and Others>에서 상원은 은행에 예치된 요구불예금이 예금주가 은행에게 제공한 대출이라고 선언했다. 그 이후로 법은 요구불예금을 은행이 예금자로부터 빌린 부채로 간주해 왔다. 포스트 케인지언 경제학을 포함한 금융 이론들은 이러한 지배적인 견해를 지지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통념은 부채이면서도 재산인 현대 은행 화폐의 이종교배적 본성(the hybrid nature)을 간과한 채 한 측면만을 포착하고 있기에 잘못된 이해다.

 

셋째, 금융 위기의 원인에 대한 이해를 개선한다. 현재의 통념은 위기의 기원을 제대로 파악하는데 충분하지 않고, 금융위기의 원인으로 엉뚱한 것을 지목해 왔다. 예를 들어, 포스트 케인지언 경제학자들은 불확실성을 위기의 주된 원천으로 잘못 규정한다. 그래서 그들은 인류 문명 전반에 걸쳐 불확실성이 창의성과 다양성을 함양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걸 간과한다. 이 책은 현대 화폐의 이종교배적 본성 자체가 금융 위기의 근본 원인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넷째, 이 책은 자본주의적 채권-채무 관계의 고유한 특징이 근대 이전의 채권-채무 관계와 어떻게 다른지를 밝힌다. 수세기 동안 채권자-채무자 관계가 존재했지만, 현시대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채권-채무 관계가 만연해진 건 전례가 없는 일이다. 이러한 광범위한 현상의 중심에는 신탁이 있다. 신탁은 국가나 회사 법인과 같은 집합적 단위(collective entities)를 부유한 구성원들의 변덕에 좌우되는 채무자의 지위로 격하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신탁이 없다면, 자본주의적 채권자-채무자 관계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사회적 존재인 인간은 공동체 없이는 생존이 어렵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공동체와 상호 연결되어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가 개인이 공동체에 빚을 지고 있다는 관념이 터무니없다고 비판했던 것처럼, 공동체 자체가 구성원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 또한 똑같이 결함이 있다. 공동체가 개인에게 빚을 지도록 하는 자본주의적 채권자-채무자 관계의 특이성은 우리 정치 시스템의 지배적인 구조에 대해 깊은 존재론적 의문과 회의를 불러일으킨다.

 

다섯째, 자본주의적 채권자-채무자 관계에 대한 도덕적 비판을 가능케 한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신탁은 재산 소유자에게 배타적 권리를 부여하면서도 그와 관련된 법적 의무를 지지 않도록 제정되었다. 마찬가지로 요구불예금, 환매조건부채권(REPO), 머니마켓펀드(MMF)와 같은 자본주의의 금융 혁신은 재산권을 강화하는 동시에 그에 상응하는 법적 책임을 회피하려는 목적으로 고안되었다. 자본주의의 금융에는 권리와 책임 사이의 비대칭성이 내재해 있으며, 이 비대칭성은 그것들의 중심에 놓인 공정과 정의를 훼손한다. 이는 조화로운 사회 질서에 필요한 섬세한 균형을 무너뜨리고, 형평성과 도덕적 올바름의 원칙을 저버리는 것이다.

 

여섯째, 현대 은행업과 금융이 불평등이 영속(永續)하는 데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현대 은행업의 화폐 발행 메커니즘은 은행가와 그들 고객의 구매력을 증대시켜 다른 사회 구성원이 생산한 상품과 서비스를 비용 없이 얻도록 한다. 이 때문에 다수의 사람으로부터 소수의 특권층으로 부와 소득이 이전되는 결과가 초래된다. 이러한 부의 이전은 사회 전체가 금융가와 그들의 고객에게 지불하는 비공식 세금인 ‘인플레이션’을 유발한다. 그들은 새롭게 창조한 부를 저비용으로 조달해 전략적으로 투자하는 비즈니스 벤처(business ventures)를 통해 부를 축적한다. 이뿐만 아니라 인플레이션이 발생함에 따라 그들의 자산 가치 또한 상승한다. 미 달러가 세계 준비통화로 연방준비제도가 세계 중앙은행으로 역할을 하며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식으로 준비통화를 발행하는 한, 국제적으로도 이러한 부의 이전이 일어난다는 걸 상상할 수 있다.

 

일곱째, 근대 국가가 행사하는 강압적 권력이 은행업과 금융을 형성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강조한다. 포스트 케인지언를 비롯한 비주류 경제학자들은 현대 화폐로의 발전에서 납세 의무를 집행하는 국가의 권한을 결정적 요인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 권력이 본질적으로 강압적 성격을 갖는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카를 마르크스는 『자본』 제1권에서 공공 부채와 근대 조세 제도의 강압적이고 착취적인 특성을 명료하게 밝혔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공공 부채는 지대 추구적 유한계급(idle rentier class)을 탄생시켜 그들이 손쉽게 부를 축적하도록 해줌과 동시에, 정부에 이자 상환 부담을 가중시켜 시민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는 원인이 된다. 공공 부채의 강압적이고 착취적인 성격은 전쟁과의 연관성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그건 공공 부채가 전쟁에 필요한 자원을 대규모로 신속하게 추출하도록 해주는 매우 효율적인 기제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은행업은 공공 부채와 제국주의 전쟁 덕분에 번창해왔다. 더 넓은 사회 영역을 희생시키는 대가로 부와 자원을 군사 부문으로 효율적으로 이전하는 일을 자본주의 은행업이 용이하게 했기 때문이다. 근대 초기 영국에서 군사, 은행업, 공공 부채 사이의 연결 고리가 시작되었으며, 21세기 미국의 그림자 금융에서도 여전히 그러한 관련성이 존재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자본주의 은행과 금융을 개혁하기 위한 해법, 즉 재산과 부채의 이종교배를 폐지하고 사회복지를 증진할 때만 독립적인 단체 인격성(independent group personality)을 활용하도록 하는 해결책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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