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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 참사에서 책임의 해체적 구성:

10‧29 이태원 참사를 중심으로(1/2)

 

조지훈(서교인문사회연구실 회원)

 

 

*이 글은 10월 4일 서교연 생명안전포럼에서 처음으로 발표된 원고입니다. 

 

 

1. 탄핵 기각 판결 이후, 국가의 법적 책임 부인 앞에서

 

10.29 이태원 참사 1주기를 한 달 가량 앞둔 현재, 그간의 국가의 대응은 적극적인 책임 회피로 요약된다. 특히 놀라운 점은 역대 재난 참사에서 정부가 보여주었던 조기 수습을 위한 문책성 경질과 같은 책임자 처벌조차 없었다는 것이다.[1] 이태원 참사 특별수사본부가업무상 과실치사혐의로 송치한 공무원은 모두 16명이었으나 단 1건의 처벌도 없었으며, 김광호 서울경찰청장은 아예 기소 여부도 결정되지 않았다.[2] 기소된 이임재 전 용산서장을 포함한 경찰 5명과 박희영 용산구청장 등은 더딘 재판에 보석으로 풀려났는데, 특히 이태원 참사에 대해하나의 현상이라는 발언으로 공분을 샀던 박희영 용산구청장의 구청 복귀는 상식적으로도 받아들이기 힘든 결과였다. 하지만 이는 참사 초기부터 정부가 시종일관 유지했던 기조인법적 책임의 부인에 따르면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지난 7월에 있었던 이상민 행안부장관의 탄핵 기각은 예고된 결과이기도 했다. 헌법재판관 9명 전원은 어떠한 소수의견도 없이 기각 판결을 내렸다. 국회에서 탄핵 소추안이 가결된 시점부터 “의회주의의 포기”라고 비난하며 법적 책임의 결백함을 주장하던 정부와 거의 동일한 결론을 헌법재판소에서 내린 것이다. 판결문은 헌법, 재난안전법, 국가공무원법에 입각하여 이상민 행안부장관이 이를 중대하게 위반했다고 보기 어렵다로 요약된다.[3] 예컨대 사전 예방조치에서 다중밀집사고에 대한 구체적인 예방·대비 조치를 마련하지 않은 것은 문제가 될 수있으나세계 각국의 압사사고 사례 대부분은 구조물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재난안전법에 대한 위반이라고까지 볼 수 없고, 피청구인이 사후 대응조치에서 중대본 및 중수본의 설치·운영에 대한 지연 및 미실시가현저히불합리하다고 볼 수는 없으며, 사후 발언에 대해서도 사건을 왜곡할 의도가 아닌신속한 정보제공에 무게를 두려다 경솔한 발언에 이르렀다고 볼 여지가 없지 않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4] 이러한 법정의견에 대해 김기형·문형배·이미선 재판관 3인은 피청구인이 재난대응에서의 성실의무 위반 및 일부 사후 발언의 품위유지위반을 별개의견으로 제시하기도 했다.[5]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국가공무원법 위반에 해당하지 재난안전법이나 헌법의 위반으로 해석하지 않고, 더 나아가 탄핵 요건으로 인정하지 않다는 점에서 법정의견과 크게 다르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처럼 헌법재판소는 이상민 행안부장관의 이태원 참사에 대한 법적 책임을 면책시켜주면서, 일부 품위유지에 관한 지적을 한 것 외에는 이태원 참사의 책임 문제에 대해서 정부와 별다를 바 없는 결론을 내렸다. 이는 2017년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결정문에서도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정부의 성실의무 위반은 탄핵 사유가 되지 않다는 결정의 반복이다. 그때에도 피청구인(박근혜 대통령)이 국민의 생명과 신체의 안전 보호를 충실하게 이해할 의무를 부담함에도 불구하고, 재난 상황에서 특정한 행위 의무가 부과되는 것은 아니기에 사법적 판단 대상이 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린 바 있었다. 이는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과 별개로 세월호 참사에 대한 정부의 법적 책임을 면책시켜주는 판결로 평가되었었다.[6] 어떤 면에서는 이번 판결은 피청구인의 재난 참사에 대한 대응이현저히 불성실했다고 판단하며 대통령의 성실한 직책 수행 의무를 법적 의무로 지적한 보충의견이 있었던 박근혜 대통령 탄핵 판결 때보다도 후퇴했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헌법재판소의 판결은 재난 참사의 책임을 묻는 문제를 헌법이 아닌 재난안전법과 국가공무원법으로 축소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안전과 재난의 총괄적 책임을 현재의 행안부장관에게 맡길 수 있는지의 문제를 마치 형사 사건처럼 구체적인 재난안전법 위반 여부로 따졌다는 점에서[7] 헌법 재판에 충실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헌법 재판은 단순히 법의 위반 여부를 따지는 형사 재판이 아니라기본권을 침해 받은 당사자가 보호를 청구하거나 회복을 요청하는 헌법 소원의 성격을 띠기도 하기 때문이다.[8]

 

이상민 행안부장관의 탄핵 심판이 이태원 참사와 관련된 책임 규정 문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할 수는 없다. 많은 재난 연구자들의 지적대로 이태원 참사는 한국 사회에서 오래 누적되어온 재난 참사의 구조적 문제가 다르게 반복된 결과다. 따라서 책임 추궁의 정치가 법적 처벌에만 국한될 경우 재난 참사의 구조적인 발생 요인을 해명하는데 방해가 될 수 있다.[9] 하지만이태원 참사에 대한 사회적 이해와 새로운 의미의 생성이 차단되고 해결과정이 답보 상태에 놓인 지점에 바로 정부의책임의 부인이 놓여있다는 점에서, 행안부장관의 탄핵은 이태원 참사의 구조적 책임을 묻기 위한 출발점이었다고는 할 수 있다.[10]

 

따라서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순순히 받아들이거나, 정부와 사법부가 원래 한통속이라고 비난하는데 그치거나, 어차피 재난 참사가 법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고 체념할 수는 없다. 재난 참사의 구조적 발생요인을 규명하고 정치적 책임을 묻기 위해서라도, 법적 책임의 의미를 구성하는 문제를 헌법재판소를 비롯한 사법부에만 떠넘길 수 없다. 무엇보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처럼 실정법의 위반에만 주목하면, 재난 연구자들의 지적처럼 자칫 법적 책임의 의미를 법적 처벌로 환원시킬 위험이 있다. 이태원 참사에 대해 법적 책임을 묻는 것은 기소된 혹은 기소되어야할 고위 공직자들을 처벌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책임을 법적인 형식으로 묻기 위함이다. 정부가 정치적 책임과 법적 책임을 분리하는 방식으로 재난 참사에 대한 책임 전반을 회피하고 있다면, 역으로 우리는 정치적 책임과 법적 책임을 연결시키는 방식으로 책임의 의미를 확장시킬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를 위해서는 법적 책임과 정치적 책임을 개념적으로 검토해야할 뿐만 아니라, 정부와 사법부, 특히 헌법재판소가 이번 판결에서 얇게 기술한책임의 의미를 두텁게 만들어야 한다.

 

 

 

2. 정치적 책임과 법적 책임의 개념적 분리: 법적 책임 개념의 공백

 

법의 위반 여부를 따지는 것을 넘어서 법적 책임을 어떻게 물을 수 있을까? 이는 비단 헌법재판소의 판결과 다른 방식으로 법 논증을 따지는 것일 수만은 없다. 법이 사법부의 전유물이 아니기에 우리는 사법부의 논리 바깥에서 법적 책임이 무엇인지 개념적으로도 따져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책임의 여러 종류 중에서 법적 책임과 한 쌍으로 언급되고 있는 정치적 책임과의 관계 속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책임 개념은 어떻게 정치적 책임과 법적 책임으로 분화될 수 있는가? 이를 위해선 정치적 책임과 법적 책임을 개념적으로 구분한 정치학자 아이리스 매리언 영(Iris Marion Young)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매리언 영은 정치의 문제를 (사회)정의의 문제와 일치하는 것으로 파악하고[11] 책임을구조적 부정의와 연결시킨다. 여기서 말하는 구조란과거의 한 행동과 과거에 내렸던 결정이 누적되어 물질세계에 흔적을 남긴[12]으로서 개인들의 행위를 제약하는 제도적·사회적인 규칙이다. 따라서 구조적 부정의란 개별 행위자의 잘못이 아닌 허용된 규칙규범의 범위 안에서 집합적인 행위자와 제도가 상호작용한 결과로 나타난다.[13]

 

따라서 매리언 영에 의하면 정치적 책임은광범위한 국민 대중에게 영향을 끼치는 조치나 사건에 관해 공적인 자세를 취하고 거대한 해악이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집단행동을 취하고자 노력하거나 더 나은 방향으로 제도적 변화를 촉진해야 할 의무로 정의 내려진다.[14] 그러고 이러한 정치적 책임은 책임에 대한사회적 연결 모델로서 책임을 시민사회에 폭넓게 연결시키는 문제의식으로 뻗어나간다. 그리고 이때 강조하는 것이 법적 책임 모델의 한계다.[15] 왜냐하면 법적 책임 모델은 구체적인 개인의 과실을 따지는 것으로 구조적 부정의를 특정한 개인의 책임으로 고립시키고 책임의 사회적 확산을 막기 때문이다.[16]

 

이러한 관점에서 매리언 영의 중요한 문제의식은 정치적 책임을 (개인의 과실 책임에 따른 법적 처벌로 정의되는) 법적 책임과 분리하고 책임 개념을 정치적 책임 개념 아래 정초시키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이때 핵심적으로 참조하는 논문이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집합적 책임」이다. 매리언 영에 따르면 아렌트는 이 논문에서 정치적 책임을 법적 책임과 개념적으로 구분한다.

 

“내가 의도하는 바는, 한편으로 정치적(집합적) 책임을, 다른 한편으로 도덕적 그리고/또는 사법적(개인적) 유죄를 좀 더 명확히 구분하는 선을 긋고자 하는 것이다.”[17]

 

사실 아렌트는 정치적 책임과 법적 책임의 구분 이전에 책임과 죄를 분리하고, 죄를 법적 책임으로 환원하는 방식으로 아예 법적 책임을 책임 개념으로부터 분리하고자 시도한다.

 

“죄는 책임과 달리 항상 누군가를 지목하는 특성이 있다. 죄는 엄격히 개인적인 특성을 띠기 때문이다. 그것은 의도나 잠재성이 아니라 특정 행위를 지목한다.”[18]

 

아렌트가 죄와 책임을 구분하는 맥락은 나치 집권 시기의 국가 폭력에 대한 책임을 어떻게 집합적으로 물을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에서 비롯된다. 즉, 직접적으로 나치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나치를 지지하거나 수동적으로 받아들였던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시민들에게 어떻게 책임을 물을 수 있을지의 여부가 관심사였던 것이다. 이때 아렌트가 경계한 것은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는 식의 집합적 죄의식이다. 이러한 집합적 죄의식은 사실상 모두가 죄인이니 아무도 특별히 죄와 관련해서 더 나을 것도 부족할 것도 없다는 식의 면책 효과를 가져온다.[19] 개념적으로 죄는 오직 특정한 개인에게 적용되었을 때에만 유의미할 뿐이기 때문이다.

 

아렌트에게 죄는 아예 책임 개념에 해당하지 않는다. 아렌트가 개념화하는 책임은 집합적인 책임으로서 정치공동체의 소속된 것을 근거로 하는 성원권에 한정된다.[20] 매리언 영의 사회적 연결 모델로서의 정치적 책임은 아렌트의 책임 개념을 바탕으로 구성된 것이다.

 

이처럼 국가 폭력과 구조적 부정의에 관련하여 아렌트와 매리언 영은 정치적 책임을 법적 책임과 분리시킨다. 물론 이들이 법적 책임을 묻는 것에 중요성을 부인하는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국가 폭력과 구조적 부정의에 대한 책임이 재판 이후에 처벌로 귀결되는 것으로 한정지어지는 사태를 우려하여 법적 책임과 구별되는 정치적 책임을 강조한 것은 분명하다. 정치적 책임이 정치 공동체의 성원권이나 사회적 연결 모델로 확장되는 것과 별개로 이들에게서 법적 책임은 단지 개별적으로 죄를 묻는 것 이상으로 탐구되지 않는다. 사실상 이들에게 법적 책임은 주류 법이론에서 주장하는 과실 책임의 원칙이라는 개인주의적 책임원리로서 받아들여지고 있을 뿐이다.[21] 

 

하지만 법적 책임이 정치적 책임 개념과 분리된 개인적 책임의 의미로만 한정될 수 있을까? 만약 아렌트와 매리언 영을 따라 개인의 과실 책임에 근거한 법적 책임만이 유일한 법적 책임의 의미라고 한다면 우리는 (실현 가능성의 여부와 별개로) 이태원 참사에서 직접적인 과실 원인을 제공했다고 인정할 수 있는 공무원들을 처벌하는 것 이상으로 법적 책임을 묻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법적 책임을 묻는 것을 생략하고 곧바로 정치적 책임의 문제로 이동할 수 있을까? 매리언 영을 다소 고약하게 인용하여 어차피 법적 책임은 재난 참사의 원인을 개별 행위자에게 귀속시키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저 구조적 부정의로서의 재난 참사를 막기 위한 정치적 책임을 다하면 되는 것일까? 물론 아렌트와 매리언 영도 그렇게까지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22] 하지만 분명 아렌트와 매리언 영의 책임 개념에는 법적 처벌과 개인의 과실 책임 개념을 넘어설 수 있는 법적 책임의 개념이 공백으로 남아 있다.

 

 

3. 법적책임의 일상적 의미: 계약에 종속되는 부채로서의 책임

 

사실 아렌트와 매리언 영이 사용하고 있는 법적 책임의 개념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책임의 의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한국어에서 책임의 사전적 의미[23]어떤 일에 관련되어 그 결과에 대하여 지는 의무나 부담. 또는 그 결과로 받는 제재내지는맡아서 행해야 할 의무나 임무. 또는 그것에 대한 추궁이나 의무를 지게 되는 제재로서 의무와 그 의무의 불이행에 대한 처벌을 함께 포괄하고 있다. 사전에서도위법한 행동을 한 사람에게 법률적 불이익이나 제재를 가하는 일과 같은 법률적 차원에서의 의미도 명시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책임 앞에 붙은법적이라는 수식어는 의미상으로는 반복이라고도 할 수 있다.

 

책임의 한자어는 責任인데 이때 쓰인 責에는꾸짖다의 의미만이 아니라 부채를 뜻하는의 의미도 있다. 이는 니체가 독일어로 과실과 연관된 책임을 뜻하는 단어 Schuld의 어원을 부채를 뜻하는 Schulden과 연결시키며, 책임을 부채와 같은 물질적인 개념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관점과 (우연히) 상통한다.[24] 아렌트라면 책임이 아닌 죄라고 불렀을 Schuld는 어떠한 법도 전제하지 않는 도덕적인 악행이 아니라, 법이라는 계약을 위반한 결과물이다. 나에게 Schuld가 있다면 이는 나와 연루된 어떤 계약이 있었기 때문이고, Schuld에 따라 내가 처벌을 받아하는 이유는 계약의 불이행 때문인 것이다. 니체는 Schuld를 계약에 따른 부채로 개념화하면서, 법적 처벌은 계약에 의한 손익 계산서를 따져 묻는 것이지 악행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 법적 책임은 오로지 계약에 따른 계산의 문제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법적 처벌은 기원적으로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벌을 주는 것이 아니라, 계약 불이행에 따라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손해에 대한 보상을 받는 과정으로 니체는 해석한다. 과연 아렌트와 매리언 영이 정치적 책임을 두텁게 개념화한 것과 달리, 법적 책임을 언급할 때 사용된 책임의 의미가 니체가 해석한 부채의 의미를 넘어선다고 할 수 있을까?  

 

계약에 따라 도출되는 부채로서의 책임 개념. 이는 일상적으로 사용되는(재난 참사를 둘러싼 상황에서도 적용되는) 법적 책임을 잘 설명해주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법적 책임을 확인할 때 법이라는 계약서를 살펴보는데 열중한다. 계약의 내용에 따라 채무자(정부)의 부채를 인정할 수 있는지, 그가 약속의 불이행을 통해 채권자(희생자, 유가족, 시민)에게 손실을 끼쳤는지, 그리고 그 약속은 계약서에 명시되었는지를 살피는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부채로서의 책임 개념의 핵심은 반드시 계약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책임이 이렇게 계약에만 의존해야 하는가? 책임이 계약을 통해서만 도출된다면 이를 진정한 의미에서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떤 면에서는 책임을 계약에 떠넘기는 것은 아닐까? 책임의 사전적인 의미에는맡아서 해야 할 의무나 임무와 같은 책임 주체의해야 한다라는 당위적인 실천의 뜻도 있다. 책임이 계약을 전제할 때만 가능하다면 계약 이전에는 혹은 계약의 내용에 없는 것이라면(계약서의 내용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면), 책임은 아예 성립될 수 없는 불가능한 개념이 된다. 하지만 계약이 상호 책임을 지우기 위한 강제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책임에 대한 욕망을 전제하지 않고는 도리어 계약을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책임이 오로지 계약 이후에만 생각될 수 있는 개념이라면, 우리는 계약의 기원을 이해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책임은 계약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권리상 계약에 앞서서 계약을 가능하게 한다고 봐야 한다.

 

이처럼 계약을 전제하는 책임 개념, 다시 말해 일상적으로 사용될 뿐만 아니라 아렌트와 매리언 영도 거의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법적 책임 개념은 계약에 따른 부채로서의 책임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법적 책임을 기존의 실정법에 종속되는 것을 넘어서 사고하기 위해선, 계약에 따른 부채로서의 책임 개념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4. 계약을 넘어서는 응답가능성으로서의 책임

 

계약을 전제하지는 않지만 책임 개념을 니체와 동일하게 Schuld로 사유한 사상가로는 하이데거가 있다.[25] 하이데거에게 책임은 근본적으로 계약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부터 발생한다. 책임은 현존재가 자신이 죽음을 향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직시하여 죽음을 향해 미리 달려가 봄으로써 자신이 어떻게 살 것인지를 결단하는 것을 뜻한다. , 현존재로서의 나는 자신의 존재 방식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인데, 이때 Schuld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서 자신의 삶을 결단하는 것을 자유의지가 아닌 부채로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러한 결단을 촉구하는 동기, 즉 빚을 갚을 것을 요구하는 자는 당연히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다. 이때의 부채는 어떠한 계약 관계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나의 결단을 촉구하는 현존재의 목소리에 의해 의식되는 것이다. 이러한 하이데거의 ‘자기 결단’으로서의 책임 개념은 분명 계약 관계를 넘어서는 차원에서 정의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자기 결단으로서의 책임으로는 오로지 자신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법적 책임 뿐만 아니라 정치적 책임도 설명할 수 없다. 이태원 참사에서 우리는무한 책임이라는 언표 아래 정부의 자기 결단적 책임 공언을 지겹게 들은 바 있다.[26] 이들에게무한 책임은 재난 참사의 희생자·유가족·시민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로 귀속될 뿐임을 우리는 정부의 수많은 발언과 행동을 통해서 확인했다. 일찍이 아도르노는 이러한 하이데거식의 자기 결단으로서의 책임을 책임 윤리보다는 확신 윤리에 가깝다고 비판한 바 있다.[27] 이러한 확신 윤리는 결국 자기보존의 윤리이자 순수한 자아 윤리로서 도덕적 나르시시즘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정부에게 책임이란 계약()의 위반 여부에 따른 계산가능한 부채의 수준으로 한정되거나, 오로지 자신만을 대상으로 하는 자기 결단의 책임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정부의 책임이 불충분했다고 비판하는 것에서 그칠 수 없다. 근본적으로 다른 책임을 요구해야 한다.

 

이는 책임 개념을 관계론적인 것으로 바꿔야함을 의미한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자기 결단으로서의 책임 개념은 책임의 주체와 대상이 모두 자기에게로 향한다는 점에서 그 어떤 관계도 상정하지 않는다. 그 이전에 살펴보았던 부채로서의 책임 개념은 계약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얼핏 상호작용하는 관계를 함축하는 것 같지만, 책임의 내용이 오로지 나의 부채로 환원되고, 부채의 변제가 책임의 해소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자기중심적인 책임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자기 결단으로서의 책임은 계약을 초월하지만 관계를 포기한다는 점에서, 부채로서의 책임은 철저히 계약에 근거함으로서 책임의 관계를 계산 가능한 것으로 환원시켰다는 점에서 한계를 갖는다. 따라서 재난 참사와 같은 계산 불가능한 사건에 대한 책임을 정치적인 차원으로 확장하기 위해선 책임을 타자와의 관계에서 파악하는 시도가 필요한 것이다. 

 

책임을 타자와의 관계의 관점에서 탐구한 대표적인 사상가로는 에마뉴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자크 데리다(Jacque Derrida)를 꼽을 수 있다.[28] 우선 레비나스에 따르면, 근본적으로 나와 타자와의 관계는 동등한 주체들 간의 계약관계와 같은 것이 아니다. 내가 타자의 부름에 응답하고 책임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본래적인 관계의 양상인 것이다.[29] 즉 나와 타자의 관계는 비대칭적이며, 타자는 나의 주권적 삶을 문제 삼으며 책임을 명령하는 자다. 그리고 이러한 책임은 나 자신의 한계를 넘어 나를 타자의볼모에 까지 이르게 한다는 점에서 무한의 특징을 띤다.[30] 이러한 레비나스의 책임론은 데리다가 『죽음을 주다』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레비나스는 책임이 첫 번째로 나 자신에 대한 책임이 아니라, 마치 나 자신이 두 번째인 것처럼, 나 자신의 동일성이 타자로부터 파생되었다는 것을 환기시키고 싶어 한다. 이는 마치 자신의 자기성이 타자에 비해 이차적이고, 타자 앞에서의 나의 책임, 타자의 죽음에 대해 그리고 나의 죽음 앞에서의 나의 책임으로부터, 책임이 있고 필멸적인 것으로 자기 자신에게 도래하는 것과 같다. 애초에 나의 책임이 단수적이고 ‘양도할 수 없는’ 것은 타자가 필멸적이기 때문이다.”[31]

 

이를 바탕으로 데리다는어떤 조건에서 책임이 있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타자에 대한 관계, 타자에 대한 응답이라는 조건에서만 책임이 가능하다고 답한다.[32] 하이데거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것과 대조적으로 타자와의 관계를 강조하는 레비나스를 따라 데리다는 책임을 타자에 대한 응답가능성(responsabilité)으로 개념화한다.[33] 데리다는 책임이라는 단어를 프랑스어 responsabilité를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 단어에는 한국어의 책임과 마찬가지로 배상책임이라는 뜻이 있긴 하나 다른 한편으로 프랑스어로 응답하다를 뜻하는 réponse와 같은 어근을 갖는다는 점에서 책임의 개념을 대화적관계론적인 차원에서 모색해볼 수 있게 한다. 영어의 responsibility는 프랑스어 responsabilité와 거의 동일하게 이해될 수 있으며, 유사하게 독일어에서도 책임이라는 단어군 중에서 해명답변의 의미가 포함된 Verantwortung가 있다. 이처럼 책임은 (자신의) 부채를 뜻하는 Schuld와 다른 응답가능성으로 재의미화 해볼 수 있는 responsabilité의 차원에서 모색해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책임은 의지를 배양하는 문제가 아니라 타자에 반응하고 응답하기 위해 민감성을 키우는 문제다.[34] 이때의 민감성은 단순히 타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레비나스가 언급하는 타자의 고통에 대한 호소에 대한 민감성이다.[35]

 

여기서 데리다는 (타자에 대한 응답가능성으로서의) 책임의 대체 불가능성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타자에 대한 응답은 다른 누군가가 하는 것이 아닌 바로 책임 있는 주체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책임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단독적인(singulier) 결단(décision)이다. 하지만 이때의 결단은 자신의 삶을 책임지는 자기 결단이 아니다. 자기 결단에서 출발하여 타자에 대한 응답으로 나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기 결단을 통해 스스로가 책임 있는 주체로 변화하고 세워진다고 해도, 이는 결국 자기 자신의 실현일 뿐이다.

 

“어떤 하나의 결단이 그 현상 형태에 있어서 전적으로 ‘나의 것’이며 능동적이고 자유롭더라도, 그게 단순히 나의 잠재성 혹은 적성이 전개된 것, 즉 ‘나에게 가능한’ 것이 전개된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의 결단인 이상, 이 ‘가능한’ 것을 중단하고, 나의 역사를 갈가리 찢어야, 그러니까 우선 일정한, 어떤 이상한 방식으로 내 안의 타자의 결단이어야 합니다. 그 결단은 내 안의 타자의 시각에서 타자로부터 도래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결단은 역설적인 방식으로, 모종의 수동성을 담고 있어야 합니다.”[36]

 

데리다에 따르면 책임은 타자와의 비대칭적인 관계에 놓이며 타자의 호소에 대한 응답이자 타자로부터 도래하는 결단으로, 과거의 나 자신과 단절된 상태로 구성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단 한 번의 응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무한히 응답 해야한다는 점에서, 책임의 범위 뿐만 아니라 기간에서도 무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엄밀한 의미에서 책임 개념을 고려한다면 정부의무한 책임은 무한 책임의 개념을 위반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책임의 절대적 무한성은 데리다보다는 특히 레비나스가 강조하는 것으로 그에 따르면 타자에 대한 책임은 대체 불가한 것이자 한계 지울 수 없는 성격을 띤다.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관계, 타자를 책임지는 것이야말로 분배와 같은 계산가능한 정의를 넘어서는 것으로 보았는데,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책임의 주체를객관적 법에 의해 고정된 모든 한계 너머에 위치시킨다.[37]

 

따라서 책임을 타자에 대한무한한응답과 타자에 의한결단으로만 개념화한다면 법적 책임은 성립되기 어렵다. 근본적으로 무한 책임은 법을 초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38] 더불어 집합적 책임을 사고하기도 어렵다. 레비나스의 의도와 무관하게 책임은 타자에 응답하는 단독적인의 문제로 귀속되기 쉽기 때문이다. 이러한 책임 개념만으로는 재난 참사와 같은 사건에 대해 국가에게 책임을 묻기는 어렵다. 특히 법적 책임은 법이라는 한계를 설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무한 책임과는 모순적인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무한 책임의 중요성을 주장하면서도 무한 책임의 한계를 설정하는, 결단의 조건으로서 선제하는 규칙과 지식을 강조하며 책임의 아포리아를 제시하는 데리다의 주장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어떠한 지식에 기초하여 책임 있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책임의 가능성의 조건(과학이나 의식 없이는, 또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떤 이유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보고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면 책임 있는 결정을 내릴 수 없다)을 정의하는 동시에. 이는 책임의 불가능성의 조건(만약 결단이 이러한 지식을 따르거나 전개되는 것에 만족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책임 있는 결정이 아니라, 그것은 인지적 장치의 기술적 작동, 즉 단순한 기계적 전개인 것이다)을 정의할 것이다.[39]

 

앞서 데리다가 언급된 책임의 불가능성의 조건으로서의 규칙과 지식은 레비나스의 결론과도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데리다 역시 레비나스처럼 객관적 법이나 규칙의 한계 너머에서 책임이 구성되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레비나스라면 이태원 참사에서 책임의 한계를 법의 위반 여부로 한정짓는 정부의 사법부의 태도를 강하게 비판했을 것이다. 데리다 역시 레비나스와 마찬가지로 기계적인 판결로중대한 책임이 없음이라는 결론 내린 헌법재판소에 비판적이었을 것이다. 데리다에게도 책임은 미리 전제된 규칙에 따른 동일한 과정과 원리에 의해 도출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40] 따라서 책임의 불가능성의 조건으로서의 규칙과 지식을 언급하는 부분에서는 레비나스와 데리다가 큰 차이를 보이고 있지는 않다. 

 

데리다가 레비나스와 갈라지는 부분은 앞서 인용된 구절의 앞부분, 책임 있는 결단이 모종의 규칙과 지식에 입각해야 한다고 말하는 대목이다. 책임이 가능하게 위해서는 선행하는 규칙과 지식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어찌 보면 상식적인 주장과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또는 앞서 부채로서의 책임 개념에서 전제하는 계약의 선차성을 언급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하튼 책임의 가능성의 조건은 책임을 근거 지을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는 뜻인데, 이는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규칙과 지식뿐만 아니라 그것에 따른 책임 의식도 포함한다.[41]

 

“책임을 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고, 이에 대한 충분한 지식이나 의식이 부족하다면, 그것은 책임의 위반이다. 책임을 지기 위해선 책임이 진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응답할 수 있어야 한다.”[42]

 

, 타자에 대한 책임은 단순히 타자의 호소에 도취되는 것이 아니다. 책임 주체는 타자에 대해 책임지는 내용을 인식해야 하며 그 근거를 알고 있어야 한다. 이는 데리다가 책임과 다이몬(daimon)적인 것을 구분하며 책임의 계보학을 전개하는 얀 파토츠카(Jan Patoĉka)를 인용하면서 전개하는 부분과 연결된다. 그리스어 daimon은 사전적으로 신에 가까운 존재 또는 신과 인간과의 중간적 존재를 뜻하는데 기독교에서는 악령·악마 혹은 이교의 신을 지칭한다. 이를 차용하여 파토츠카는 다이몬적인 것을 기독교의 입장에서 이교도의 악마적이고 열광적인 의례(예컨대 디오니소스 재전처럼), 어떤 신령적인 것에 의한 넋 나감, 일종의 종교적 열광에 의해 자아를 잃어버리는 상태로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한다. 이러한 다이몬적인 것에 의한 탈아(脫我) 상태에서는 책임 개념이 등장할 수 없다. 탈아 상태에서는 응답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이몬적인 것은 근본적으로 무책임으로 규정된다. 혹은 비-책임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아직 응답하라는 명령이 울려 퍼지지 않고 있는 공간에 속해 있다. 거기에서는 아직 자기, 자기의 사유, 혹은 자신의 사유에 책임을 지라는 호소가 들리고 있지 않다.[43]

 

따라서 응답가능성의 조건은 다이몬적인 상태가 아닌 특정한 사태와 자신의 행위를 인식할 수 있는 규칙과 지식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이러한 선제된 앎은 앞서 언급했듯이 타자에 대한 응답을 그저 규칙에 따르는 것으로 자동화시킬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책임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이기도 한 것이다. 책임의 아포리아(aporia)[44], 이는 책임을 식별하기 위해선 책임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지식과 규칙을 전제할 수밖에 동시에, 이러한 전제를 넘어서야 비로소 책임이 가능하다는 모순적 상태를 뜻한다. 가능성의 조건이 곧 불가능성의 조건이 되는 아포리아, 이는 데리다가 해체(déconstruction)를 전개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이기도 하다. 데리다는 레비나스처럼 전제된 규칙과 지식을 초월하여 타자에 대한 무한 책임을 전개하기보다는, 무한 책임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규칙과 지식이 바로 책임의 조건이기도 한 아포리아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책임 개념에 대한 해체론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책임의 아포리아 혹은 해체론적 접근은 물론 책임에 대한 회의주의적 결론을 내리기 위함은 아니다. 오히려 이를 통해 데리다는 책임의 어려움과 엄중함을 환기하는 동시에, 현재 전제되어 있는 지식과 규칙에 의해 기계적으로 도출될 수 있는 책임을 넘는 동시에 책임이 어떠한 앎도 전제하지 않는 독단적인 것으로 빠지지 않는 방식으로 책임 개념을 구성하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책임의 아포리아의 관점에서 법적 책임은 어떻게 구성될 수 있을까? 이는 데리다가 정의와 법의 아포리아를 전개하고 있는 후기 저작들, 특히 『법의 힘』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이는 정치적 책임을 정의의 문제로 다루고 있는 매리언 영과도 연결되는 문제다.

 

(계속)

 


참고문헌
 

[1] 전주희, 10·29 이태원, 국가주의적 재난서사와 대항적 재난서사」, 『문화과학』, 113, 2023, 152~153.

[2] 정혜민·김가윤, “이태원 참사 9개월, 책임자 처벌 0오늘 이상민 탄핵 선고”, 《한겨레신문》, 2023.7.26

[3] 「보도자료: 행정안전부장관에 대한 탄핵심판 사건」, 2023, 18

[4] 같은 글, 8.

[5] 같은 글, 13~17

[6] 박상은, 『세월호, 우리가 묻지 못한 것』, 진실의 힘, 2022, 230~231.

[7] 오동석, “헌법재판소는 스스로를 탄핵했다”, 《오마이뉴스》, 2023.07.27

[8] 미류, 미생상태의 생명권을 살려낼 헌법재판소의 역할」, 37.

[9] 전주희, 10·29 이태원, 국가주의적 재난서사와 대항적 재난서사」, 154, 미류, 10‧29 이태원 참사와 책임 규명의 정치」, 『문화과학』, 113, 2023, 188, 박상은, 「재난의 사회적 원인과 의미 구성」, 92~93, 《경제와 사회》, 통권 제138, 2023, 92~93.

[10] 전주희, “ '정치적 실패' 반복할 건가... 이상민을 파면하라”, 《오마이뉴스》, 2023.07.19

[11] 아이리스 매리언 영/김도균조국 옮김, 『차이의 정치와 정의』, 모티브북, 2017, 91.

[12] 아이리스 매리언 영/허라금김양희천수정 옮김, 『정의를 위한 정치적 책임』,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2018, 111.

[13] 매리언 영이 예시로 들고 있는 구조적 부정의 대표적인 사례로 주거 불평등이 있다. 주거 불평등은 단순한 개인의 노력 부족이나 불운이 아니라 소득 불평등이라는 구조적 부정의의 결과이기 때문에 이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릴 것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 책임을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 매리언 영의 주장이다(아이리스 매리언 영, 『정의를 위한 정치적 책임』, 95~110).

[14] 아이리스 매리언 영, 『정의를 위한 정치적 책임』, 144.

[15] 같은 책, 179.

[16] 법적 책임 중에서도 태만죄와 같은 법·규범을 위반한 범죄가 아닌 비행위에 대해 책임을 묻는 방식도 있으나 이 역시도 개인의 비행위를 구조적 부정의의 원인으로 소급시킨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같은 책, 179.

[17] 한나 아렌트, 「집합적 책임」, 『책임과 판단』, 필로소픽, 2019, 282.

[18] 같은 책, 278.

[19] 한나 아렌트, 「독재 치하에서의 개인적 책임」, 『책임과 판단』, 필로소픽, 2019, 89.

[20] 본문에서 언급한 것처럼 집합적인 책임을 개념화하기 위해 아렌트가 핵심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성원권이다. 집합적 책임이란 내가 저지르지 않은 일로 책임이 요구되는 상황인데, 이는 다름 아니라내가 나의 자발적인 행위로 해체시킬 수 없는 어떤 집단에 속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한나 아렌트, 「독재 치하에서의 개인적 책임」, 『책임과 판단』, 280). 나는 특정한 정치적 공동체에 속해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 공동체의 혜택을 본 것과 동일하게 그 공동체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것들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인데, 정치적 책임이란 바로 이러한 정치 공동체의 성원권을 지닌 주권자들에 한정된다. 매리언 영은 정치적 책임을 개념화하기 위해 아렌트의 집합적 책임 개념을 대부분 수용한다.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단순히 성원권을 지녔다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공동체의 체계적 재생산을 위해 능동적이든 수동적이든 일정한 참여를 전제할 수밖에 없다는, 구성원들의 행위성에서 책임 소재를 끌어낸다는 차이점을 제외하면 말이다(매리언 영, 『정의를 위한 정치적 책임』, 159).

[21] 특히 아이리스 매리언 영에게서 이러한 판단은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한상희, 「행정안전부장관(이상민)의 탄핵을 위한 의견서(초안), 2023, 20)

[22] 매리언 영은 국가 폭력이나 구조적 부정의를 야기한 중대한 행위의 영향을 끼친 행위자에 대해선 예외적으로 법적 책임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다. 매리언 영, 『정의를 위한 정치적 책임』, 176.

[23] 표준국어대사전과 고려대한국어대사전의책임항목 참조.

[24] 이하 부채로서의 Schuld에 대한 니체의 설명은 다음을 참고, 프리드리히 니체/김정현 옮김, 『니체 전집14: 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책세상, 2002, 402~403.

[25] 이하 하이데거의 책임 개념에 대해서는 다음의 책을 참고했다. 나카마사 마시키/김상운 옮김, 『자크 데리다를 읽는 시간』, 아르테, 2016, 287.

[26] 이는 책임을 왜지지 않느냐는 사퇴 압박에도 불구하고 이상민 행안부장관이자신의 자리에서 책임을 다하는 것의 중요성을 주장하는 것에서 그리고 박희영 용산구청장이 국회에서 이태원 참사에 어떤 책임을 통감하느냐는 질문에여러 가지 큰 희생이 난 것에 대한 제 마음의 책임이라고 발언한 것에서 아주 강하게 드러난다. 물론 이들에게 하이데거가 말하는 수준의 죽음 앞에서 자신의 삶을결단하는 수준에서의 강한 실천을 찾아보기 어려우나, 재난 참사의 희생자가 아닌 공직자인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만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큰 틀에서 궤를 같이 한다.

[27] 주디스 버틀러/양효실 옮김, 『윤리적 폭력 비판: 자기 자신을 설명하기』, 인간사랑, 2013, 179~181.

[28] 매리엉 영도 정치적 책임이 구조적 부정의에서 비롯되고, 구조적 부정의는 타자의 호소에 대한 듣기로부터 식별될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참고문헌 표기).

[29] 김도형, 『레비나스와 정치적인 것: 타자 윤리의 정치철학적 함의』, 그린비, 2018,23.

[30] 같은 책, 41.

[31] Jacques Derrida(trans. David Wills), The Gift of Death,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6,  46p. 『죽음을 주다』와 관련된 구절들은 다음의 책을 참조. 나카마사 마사키, 『자크 데리다를 읽는 시간』, 2018.

[32] Jacques Derrida, The Gift of Death, pp. 50

[33] 다만 이때 데리다가 제시하는 책임 개념은 과거의 책임 개념과 완전히 단절하는 차원이 아니라, 기존의 책임 개념을 해체하여 개입하는 방식으로 도입한다는 것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우카이 사토시/박성관 옮김, 『응답하는 힘』, 글항아리, 2020, 94). 

[34] 주디스 버틀러, 『윤리적 폭력 비판: 자기 자신을 설명하기』, 160.

[35] 같은 책, 175.

[36] 자크 데리다·토마스 아스헤우어/김상운 옮김, 『유토피아가 아니다, -가능한 것: 지식인·자본주의·환대의 법』, 현대정치철학연구회, 2021, 41.

[37] 김도형, 『레비나스와 정치적인 것: 타자 윤리의 정치철학적 함의』, 64.

[38] 이러한 면에서 매리언 영이 제시하는 사회적 연결 모델로서의 정치적 책임은 이러한 타자에 응답 개념에 기초함을 알 수 있다. 다만 레비나스와 다른 점은 타자의 호소를 구조적 부정의로구조화시키고 이러한 구조에 대한 책임을 집합적으로 확신시킨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레비나스는 법적 책임을 진정한 책임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매리언 영은 정치적 책임과 법적 책임을 분리시켜 전자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법적 책임을 거의 혹은 덜 고려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 이들로부터 법적 책임 개념을 더 심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다. 

[39] Jacques Derrida, The Gift of Death, 24p

[40] 헌법재판소의 판결은 충분히 예상가능한 법·규범의 원리에 따라 그대로 도출된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프로그램화된 판결이고, 이는 책임 있는 판결과는 무관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행안부장관의 탄핵 기각이 법 논리에 따라 충분히 예상가능했다는 주장은 (현실성과 무관하게) 법적 책임을 계산가능성에 가두는 주장이기도 하다. 

[41] 이런 맥락에서 재난 참사의 진상 규명은 참사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가능성의 조건이다.

[42] Ibid, 25p

[43] Ibid, 3p

[44] 아포리아란 그리스어로 논리적 궁지를 뜻하는데, 어원적으로는 부정을 뜻하는 접두어 a와 길을 뜻하는 poros가 결합되-없음을 뜻한다(자크 데리다, 『법의 힘』, 37, 옮긴이 각주 49번 참조). 따라서 책임의 아포리아는 책임을 하나의 조건으로 논리적으로 도출될 수 있는 일방향의 길이 없음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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