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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질서의 변동과 사회운동의 공간(1/2)

 

박기형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이 글은 <다른세계로길을내는활동가모임_3차 쟁점토론회>에서 발표된 내용을 수정 보완했다. 

 

 

 

왜 다른 세계로 길을 내는 사회운동은 국제질서의 변동을 예의주시해야 하는가? 세계를 돌아보면, 이전과 다를 바 없이 온갖 상품을 교역하고 금융시장은 분주하며 국민국가와 국제기구 시스템이 건재한 듯 보인다. 하지만 2023년 현재 국제질서는 큰 틀에서 유지되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전쟁과 학살, 에너지·식량 위기, 바이러스의 창궐 등이 연이어 벌어지면서 우리는 막연하게나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국제질서가 예전과 같지 않다고 느끼고 있다. 이 감각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불확실한 미래 앞에 서 있다는 일종의 불안감일지도 모른다. 그런 막연함 속에서 우리 사회운동은 국제질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우리가 놓치고 있는 건 뭐고, 주시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1. 21세기 국제질서의 변동,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최근 국제질서의 변동 속에서 우리 사회운동은 어떤 곤경에 빠진 것처럼 보인다. -중 갈등 속에서 어떤 외교 노선을 따를 것인가 갈팡질팡하는 한국 정부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사회운동도 누구의 편에 설 것인가를 정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고민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신장 위구르나 홍콩에 관해 얘기하면서 중국 정부의 탄압을 비판하는 이들은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 질서를 재수립해야 한다고 보기도 하고, 미국의 달러 패권이나 군사 개입 등 각종 행태를 비판하는 이들은 중국을 필두로 하여 서구 선진국의 지배 질서에 대항하는 새로운 국제질서가 형성되어야 한다고 보기도 한다. 미국이냐 중국이냐 (그리고 러시아냐)는 두 선택지만이 우리 앞에 주어져 있다고 본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양자택일이 우리에게 주어진 전부일까? 누구의 편을 들래?라는 물음에서 벗어나서 다르게 물어볼 수는 없을까? 중국에 대한 비판이 미국에 대한 옹호가 되고, 미국에 대한 비판이 중국에 대한 옹호가 되는 이 구도를 어떻게 탈피할 수 있을까?

 

국제질서의 변화를 평가하고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묻는 기존의 담론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국제질서를 국가 간 경쟁의 무대로 보고 국가를 최소 단위의 행위자로 본다는 점이다. 물론 일찍이 이러한 국가중심적 태도에 관한 이론적, 경험적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래서 요즘엔 국제기구나 다국적 기업, ISIS와 같은 단체 등 비국가 행위자들을 국제정치의 주요 행위자로 포함하는 경향이 많아졌다. 하지만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확대되는 국제질서의 변동에 관한 담론은 이러한 비판적 관점을 잃어버린 채 국가중심적 태도에 기초한 지정학적 틀에 갇혀 있다. 그로 인해 국제질서의 변동과 관련해 유효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는 국가뿐이라고 본다. 즉 행위성(agency)을 지닌 유일한 존재로 여긴다. 이 때문에 국제질서의 변화가 펼쳐지는 공간, 그러한 변화에 영향을 받거나 그러한 변화에 대응하는 행위들이 일어나는 공간은 국가 간 경쟁의 무대로 국한된다. 나머지 현실 속 공간들은 은폐되고, 국제질서 변동에 관한 담론에서 배제된다.

 

그러면서 사회운동의 주체들 또한 국제질서의 변동과 관련해서는 자신들이 별다른 역할을 맡을 수 없다고 여긴다. 국제질서에 관해 고민한 건 너무 큰 얘기만을 반복할 뿐이기에 무용하고, 당면한 현실을 바꾸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다. 그런 건 외교의 영역이지 우리의 몫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차별과 폭력에 맞서 연대하자는 움직임이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그때도 저들의 문제와 우리의 문제가 어떻게 긴밀히 연관되는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감각하기란 쉽지 않다. 저들의 아픔에 공감하거나 도덕적 명제에 호소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다. 국제질서의 변동은 단지 저곳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이곳과 저곳을 가로지르며 작동하는 것이다. 이를 날카롭게 포착하여 저곳에서의 저항에 연대하고 이곳에서의 변화에 대응해나가는 공동전선을 구축하는 데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제질서의 변동 속 사회운동의 공간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사유하며 창출해나가야 한다.

 

현재 변동하고 있는 국제질서에 관한 담론은 국가중심적 관점과 지정학적 사고에 기초한다. 여기서 사회운동의 공간은 인식의 지평에서 사라진다. 분명 현실에서 존재하지만, 그 의미와 역할을 박탈당한다. 이러한 국가중심적 담론의 한계는 국제정치학에서 통용되는 국제질서와 안보라는 두 가지 개념적 요인과 긴밀히 연관된다.

 

미국 엘리트가 주도하는 주류 국제정치학, 특히 현실주의 국제정치이론에서는 국제질서를 무정부 상태로 간주한다. 국가들 사이에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벌어진다고 본다. 이렇게 국제질서를 무한경쟁 그 자체로 보는 태도는 다음 요인인 안보라는 독특한 국제정치학적 개념과 연결된다. 안보를 규정하는 다양한 입장이 있지만, 전통적인 현실주의 패러다임에서는 안보를 국가의 생존과 안전의 문제로 규정한다. 이 패러다임에 따르면, 국가는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유무형의 위협, 언제 어디서 생겨날지 모르는 불확실한 위협을 제거하고자 한다. 그 결과, 국제질서 변동이 제기하는 과제는 생존과 경쟁의 문제로 왜곡된다. 물론 안보 개념에 관한 비판적 연구들 덕분에, 최근 들어서는 안보를 국제적 차원에서 확대해서 국제질서의 안정을 회복하는 과제로 설정하기도 하고, 식량안보와 같이 기아나 빈곤과 같은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것까지 확대하기도 한다. 다만, 그럴 때도 여전히 안보에 대응하는 주체는 국가이고, 안보 개념은 국가 내외부의 안전을 저해하는 불확실한 위협이 끊임없이 제기되는 상황을 전제한다. 잠재적 위협을 가정하고 그것을 준-전시상황이나 전쟁과 같은 형태로 실현함으로써 국가가 통제하는 (이른바 베티 리어든(Betty A. Reardon)전쟁 체제라고 명명한)[1] 경쟁적인 사회 질서를 재생산한다.

 

그렇다면, 국제질서 변동 속 사회운동의 공간은 어떻게 확보될 수 있는가? 우리의 인식 지평에 나타나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국제질서와 안보를 기각해버리는 건 국가중심적 태도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안보를 여전히 국가의 몫으로 남겨두는 것에 불과하다. 대신 우리는 국제질서와 안보를 다르게 개념화해야 한다. 우리의 몫으로 그것들을 새롭게 전유해야 한다.

 

코로나19를 계기로 안보라는 개념을 부정적으로만 볼 게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대표적으로 샹탈 무페(Chantal Mouffe)는 안보를 엘리트나 우파의 전유물로 남겨두지 말고 좌파들만의 관점에서 재전유할 것을 제안한다.[2] 다양한 의제가 안보 이슈로 규정되는 경향 자체를 거부하기보다는 그러한 경향이 생겨나는 현재의 조건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조건을 말하는 걸까?

 

오늘날 안보라는 개념이 겨냥하는 문제들을 돌이켜보자. 그것들은 생명의 위협과 긴밀히 연관된다. 안보 개념은 군사적 위협에서부터 가난과 빈곤 그리고 여러 경제적 불평등, 나아가 재난과 전염병, 심지어 기후위기 등으로 확장되고 있다. 이러한 확장 경향은 생명에의 위협이 국가의 생존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걸 함의한다. 예컨대, 기후정의에 대한 요구는 국경을 가로지른다. 전 지구의 생명을 위협하는 기후위기는 인간공동체로서의 세계(World)와 환경적 조건으로서의 지구(Earth)라는 이분법을 넘어선, 이른바 행성적(Planetary) 차원[3]에서 대응해야 하는 과제다. 나아가 전쟁과 재난, 전염병 등의 위험은 더 낮은 계층으로 더 쉽게 향한다. 그렇기에 국가 그 자체의 생존이 아니라 어떤 계층과 집단의 생명이 위협받는지를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안보를 사회운동의 몫으로 전유하는 것은 두 가지 정치적 효과를 가져온다. 첫째, 위험에 맞서자는 요구가 국가의 생명정치(Biopolitics)적 권력의 강화로 귀결되지 않도록 견제할 수 있다. 국가는 특정 집단의 불공정한 삶의 조건을 그대로 내버려 두기도 하고, 그들에 대한 사회보장을 철폐해 위험에 처하도록 하기도 한다. 또는 사회를 보호하겠는 명목으로 자신에게 저항하는 세력을 탄압 및 처벌하고, 특정 집단을 위험군으로 분류해 격리할 수도 있다. 현 체제를 신자유주의라 부르든 전쟁 체제라 부르든, 지금 이 체제는 법과 제도를 통해 이미 불평등한 위치에 놓인 존재들에게 취약성이 불평등하게 재분배하고 있다.[4] 그것도 국가의 생존과 이익을 위해선 불가피한 일이라는 이유로 말이다. 이를 내버려 둘 경우, 폭력과 재난의 폭증에 힘입어 국가폭력이 강화되고 그로 인해 또 다른 차별과 죽음이 증식하는 악순환에 빠져들 수 있다. 안보 이슈는 취약성의 불평등한 재분배라는 쟁점을 함축한다. 이러한 쟁점을 드러내고 그에 관한 사회적 요구를 조직해내는 것을 통해 우리는 국가의 생명정치적 권력에 맞선 대항적 흐름을 구성할 수 있다.

 

둘째, 사람들이 자신의 일상에서 경험하는 다양한 형태의 지배와 위협에 맞서 싸우도록 할 수 있다. 도덕적 명령이나 추상적 관념에 기대는 건 이론의 정교한 발전에는 도움이 될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을 행동에 나서도록 하고 결집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정치적 실천은 대중의 일상 경험과 구체적 열망을 토대로 공통의 감각을 형성하는 것에 출발하며 지속해서 그것을 자신의 기초로 삼는다. 따라서 우리 사회운동은 안보로 지칭되는 다양한 일상 속의 위험과 그로 인해 촉발되는 정념과 요구를 국가나 외교 및 행정 관료의 몫으로 남겨두기보다는 어떻게 자신의 과제로 삼을지 고민해야 한다. 이는 위험이 특정 집단에 가중되거나 전가되는, 이른바 위험의 불평등에 맞설 정치적 연대를 구축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이러한 실천이 가능하기 위해선 변화하는 국제질서를 다르게 바라보아야 한다. 그동안 사회운동은 신자유주의에 맞서 개인주의가 상정하는 개인이 실재하는가를 되물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국제질서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로서의 국가, 국경이라는 닫힌 테두리로 둘러싸인 어떤 몸을 지닌 실체로서의 국가라는 관념 또한 물음에 부칠 수 있다. 물질적 영토와 수적인 인구로 실체화된 국가들만이 국제질서를 구성하고 변화시키는 게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 국제질서의 공간은 국가를 비롯하여 국제기구, 기업과 재단, NGO나 사회운동단체, 여러 조직이나 집단, 개인과 심지어 비인간 행위자인 동물과 식물, 미생물과 바이러스 등으로 가득하다. 이러한 행위자(actor), 행위소(actant) 모두가 나름의 행위성을 띠고서 국가와 함께 국제질서를 이루고 있다.

 

그중에 사회운동의 공간도 분명히 존재한다. 아래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지만, 사회운동은 역사적으로도 국제질서의 변화를 추동하는 동력 중 하나였다. 때론 제1차 세계대전 전후로 유럽의 노동조합운동이 제국주의적 수탈에 조력했던 것처럼 부정적인 방향으로 활동하기도 했고, 때론 냉전 이후 핵무기 위협과 냉전적 군사 대결 구도에 맞서 군축 및 평화 운동을 펼치거나 제3세계를 중심으로 식민지 해방 이후 정치적, 경제적 주권을 쟁취하는 데 힘을 보태는 사회운동이 존재했다. 지금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 팔레스타인의 해방과 우크라이나의 평화를 요구하고, 동북아시아에서 고조되는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고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모색하는 활동이 이뤄지고 있다.

 

국제질서의 공간을 다양한 행위자, 행위소로 구성된 것으로 사유하는 것 외에 다른 식의 접근도 가능하다. 국가를 의인화하되 국가가 행동할 때 준거하는 국제 윤리의 판단 기준과 행동 규범을 세우는 작업이 대표적이다. 즉 국제정치에서의 윤리()을 설정하는 시도[5]라 할 수 있다. 여기엔 크게 두 가지 길이 있는데, 하나는 국가들 사이에서 도덕이 존재할 가능성을 타진해보는 세계시민사회 논의 또는 코스모폴리턴한 시각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로 환원할 수 없는 국가 내외의 다양한 사회집단들의 연대와 연합을 통한 윤리적 실천을 구상해보는 시도다. 전자는 주권이나 자유·평등, 평화와 같은 가치를 국제규범으로 삼으면서 유엔과 같은 국제기구에서 각 국가가 자신들의 정당한 권리를 자유롭고 평등하게 행사할 수 있도록 국가들 사이의 민주주의를 고취하는 데 방점을 둔다. 그럼으로써 세계적 차원에서 공동으로 진력해야 할 목표, 이를테면 기후정의나 경제적 평등 등을 실현해나가야 한다고 본다. 가장 이상적 버전이 세계정부에 대한 구상이다.[6] 후자는 앞선 국가중심적 시각의 해체와 안보 이슈의 재전유와 직접 연관된다.

 

현존하는 사회운동의 공간은 국제질서의 변동을 논하는 담론의 장에서 끊임없이 지워지고 있다. 심지어 세계시민사회라 할 수 있는 공간도 존재하지 않는 걸로 무시되거나 별다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명목적인 것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이러한 두 공간 모두 국제 정세를 인식하는 지평에서 배제되고 은폐되고 있다. 대신 국가와 이념의 대결이라는 구도, 자유주의에 기반한 국가들의 다자주의적 협력 질서와 그것의 붕괴라는 틀이 전제하는 국가중심적 시각으로 국제질서를 구성하는 다양한 존재들을 환원해버린다.

 

이에 맞서 사회운동의 공간을 중심에 둔 새로운 인식 지평을 어떻게 열어젖힐 것인가? 사회운동이 바라보는 국제질서의 변동에 관한 담론을 어떻게 재구성해낼 것인가? 이 물음은 인식의 문제를 넘어선다. 어떤 변화에 관한 담론은 추상적인 관념 속 얘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건 현실에서 분명하고도 구체적인 힘을 갖는다. 현 상황에 이르게 된 원인을 평가하고 그 평가에 기반해 무엇을 요구할지,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법제도적 수준에서든 구조적 수준에서든 특정 담론에 근거해서 재편이 이뤄진다. 요컨대, 현 상황을 어떠한 인식의 틀로 바라보는가에 따라 물질적인 효과가 달라진다.

 

담론 구성에서부터 이미 지배와 피지배 사이의 권력 투쟁이 일어나고 있다. 주류 국제정치학, 지정학적 틀, 국가중심적 접근은 더 많은 권력을 가진 집단에 의해 현 정세가 규정되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대응하게 되는 경향을 충분히 견제할 수가 없다. 누구의 시선에서 현 정세를 규정할 것인가는 체제 전환을 지향하는 진보적 사회운동의 주된 과제다. 지구적, 행정적 변화가 제기하는 각종 안보 이슈를 행정 관료나 정치 엘리트들이 좌우하기 쉬운 정책적 차원의 문제로 남겨두어선 안 된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운동은 어느 지점에서 어느 정도로 어떻게 개입할 수 있을까? 우선은 국가중심적 시각을 벗어나는 것에서 출발해보자. 그래야 누구의 편에 서서 국가의 생존과 이익을 극대화할 것이냐는 질문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우리만의 물음과 답을 찾기 위한 여정을 시작할 수 있다.

 

 

2. 전후 질서 붕괴론과 신냉전론

 

아래에서는 현재 우리의 인식을 규정하는 기존 담론을 비판적으로 살펴본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국제질서의 변동을 설명하는 논의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7] 하나는 전후 질서 붕괴론이고, 다른 하나는 신냉전론이다. 각각의 주요 내용을 정리하고, 이들은 어디서 결을 달리하거나 같이 하는지를 살펴본다. 그럼으로써 현재 국제질서 변동에 관한 주류 담론은 국가중심적 시각을 공통된 기반으로 삼고 있음을 밝힌다. 나아가 현 담론 지형의 공통 기반이 어떤 한계를 노정할 수밖에 없는지, 그러한 기반을 흔든다면 무엇을 달리 얘기할 수 있을지 따져보려 한다.

 

1) 신냉전론 되짚기

 

 먼저 신냉전론을 살펴보자. 신냉전론은 탈냉전 이후 다시금 냉전과 유사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소련 붕괴 이후 1990년대와 2000년대에는 미국 주도의 단극 질서가 수립되고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진전되었다. 그러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2021년 우크라이나 전쟁 등을 계기로 2010년대와 2020년대에는 국가들 사이에서 보호무역주의가 증대하거나 산업과 무역 경쟁이 격화하고 있으며 중국과 러시아 등의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다극 질서로 전환하고 군사적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고 본다. 특히, -중 경쟁 또는 미-러 경쟁이 강화되는 것에 주목한다.

 

흥미롭게도 신냉전론은 해당 논의가 전제하는 대결 구도의 양측 모두에서 제기된다. 바이든 행정부부터 북한의 김정은 정권까지 현 정세를 신냉전으로 규정한다.[8] 먼저 미국의 주류 외교·안보 엘리트들의 신냉전론을 보자. 여기엔 일말의 진실과 일말의 획책이 담겨있다. 그들은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비난하면서도 해당 사태를 위기가 아닌 기회로 여긴다. 러시아가 국제사회가 지지하는 주권이라는 규범을 위반했다고 규탄하고 잠재적으로 중국과 이란 등의 국가들이 다른 국가의 주권을 침탈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를 표명한다. 그럼으로써 반()러시아 나아가 반중국을 내건 국제 여론을 조성하고자 한다. 미국으로 표상되는 민주주의와 러시아와 중국으로 표상되는 권위주의의 대결 구도로 판을 짜는 것이다. 바이든 행정부는 과거 냉전 시절의 자유세계를 수호하자는 수사를 소환하여 나토를 강화하고자 한다. 이러한 움직임은 러시아와 중국을 동시에 제압하려는 전략적 판단하에 이뤄지고 있다. 또한, 미국 주류 엘리트들은 신냉전이 도래했기에 앞으로 미-중 간 충돌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하며, 유사시에 전쟁이 벌어질지도 모르기 때문에 이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냉전에서처럼 자유주의 국가들의 동맹과 군사 안보 태세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바이든 행정부가 상정하는 신냉전의 구도는 정말 현실에 부합하는 걸까? 과거 냉전과 오늘날에는 분명 다른 점이 있다. 이데올로기 대결의 유효성이 과거에 비해 약화했고, 경제적 상호의존이 유례없는 정도로 심화했다. 미국 주류 엘리트들의 신냉전 담론은 이러한 변화를 반영해 나름의 논리를 펼친다. 그들에 따르면, 세계화가 이뤄지는 가운데 중국과 러시아 등이 경제적으로 성장하였고, 그 결과 미국의 지위를 위협하게 되었다. 아직까진 미국의 군사적 우위가 확고하므로 이를 활용해서 중국과 러시아 등 신흥국들을 견제하는 한편, 미국의 부흥을 다시 한번 꾀할 수 있도록 정치적, 경제적 질서를 재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입장은 바이든 행정부가 내건 더 나은 재건의 기치에 정확히 반영되어 있다. 미국 주류 엘리트들의 신냉전 담론은 일정 부분 현재 벌어진 사태에 발 딛고 있다. 바로 미국을 비롯한 서구 선진국 내 제조업이 쇠락하였고 중산층이 붕괴했으며, 그 결과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했다는 사실이다. <그림1>과 같이 세계화 이후 선진국 내 불평등의 심화는 통계적으로도 확인된다.

 

<그림1. 1988~2008년 전 세계 소득 수준별 1인당 실질소득의 상대적 증가율>[9]

 

 

언뜻 보기엔 바이든과 트럼프 사이에 큰 차이가 있어 보인다. 한 명은 예측 불가능의 포퓰리스트고, 다른 한 명은 나름대로 합리성을 갖춘 노련한 정치인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국제질서를 대하는 전략적 태도에 있어서는 둘 사이에 별다른 차이가 없다. 물론 트럼프와 바이든의 외교 전략에서 주요한 차이점이 하나 있다. 그건 미국이 국제질서의 조정자로서 나서야 한다는 기조가 다시금 전면에 등장했다는 점이다. 트럼프는 미군의 해외기지를 축소하고자 했다. 현 미국 엘리트들이 보기에 이러한 트럼프 행정부의 행태는 1823년 먼로 독트린 이전으로 되돌아간다는 의미에서 대단히 퇴행적이었다. 오히려 그들은 위대한 미국을 재건하는 일은 곧 미국의 전 지구적 리더십을 복원하는 일이었다. 2008년은 미국의 경제뿐만 아니라 외교에서도 하나의 분기점이라 할 수 있다. 2008년 이후 오바마 행정부 시절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의 주도로 아시아로의 회귀 전략(Pivot to Asia)을 추진했다. 이를 계기로 민주당 계열의 자유주의 매파와 과거 부시 행정부 시절 공화당에서 활동했던 네오콘은 상호 협력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이 네트워크가 바이든 행정부의 외교 정책을 수립하고 실행에 옮기고 있다.[10]

 

정리하자면, 바이든 행정부는 트럼프 행정부와는 달리 국제질서 조정자로서의 역할을 자임하면서도, 트럼프 행정부와 마찬가지로 국내 경제를 부흥시켜 미국 내 중산층을 안정시키려 한다. 트럼프 행정부 때부터 추진한 리쇼어링(reshoring)과 보호무역주의의 기조는 지속되고 있다. 기후위기 대응과 사회복지 증진이라는 명분을 내걸었지만 산업 재편과 자국 경제 활성화의 의도도 포함하고 있는 인플레이션 감축법(Inflation Reduction Act IRA)으로 그러한 기조는 더욱 큰 힘을 얻고 있다.

 

하지만 과연 미국이 국내적 이익을 도모함과 동시에 국제적으로도 리더십을 안정화할 수 있을까? 여기엔 의문이 제기된다. 바이든 행정부는 무역과 산업 관련 규제 및 보조금 정책 등을 시행하는 등 인플레이션[11] 우려에도 불구하고 재무부와 FED 사이의 국채 사고팔기를 통해 막대한 돈을 시중에 풀고 있다. 통화량 팽창에 따른 여파를 조절하려고 이자율을 인상하거나 테이퍼링(tapering)과 양적 긴축을 시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코로나19 이후 사회복지부터 산업 유치까지 국고 보조금을 더 확대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리고 있다. 이를 줄일 경우, 인플레이션에 따른 경제적 부담과 통화량 팽창으로 되려 심화하고 있는 자산 불평등을 조금이라도 상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정을 감안할 때, 국내적 목표를 달성하는 것 또한 쉽지 않다.

 

근본적으로도 유의해야 할 문제가 있다. 통화 팽창에 따른 이득과 손실은 언제나 차등적이다. 자산과 소득에서 상위 계층일수록 통화량 증대에 따른 이득이 더 크며, 통화량 감소에 따른 손실은 더 적다. 이는 사회 내에서뿐만 아니라 국가 간에도 마찬가지다. 이런 부정적 효과에도 불구하고 지난 신자유주의 세계화 국면에서 신흥국의 소득 증가로 인한 선진국 중하층의 쇠퇴를 만회하기 위해, 바이든 행정부는 자신들의 경제를 재건하려는 기조를 놓지 않을 것이다. 또한 적자 재정과 양적 완화 등 각종 정책 수단으로 동원해 지속해서 필요한 재원을 마련할 것이다. 그러나 타국에 경제적 부담을 가중하면서까지 중산층을 회복시킬 수 있을지 불확실하며, 오히려 금융 부문과 자산 소유 계급, 특정 대기업 집단의 배만 불리는 건 아닌지도 우려된다. 만약 미국 내의 경제적 안정을 높였다 하더라도, 국내외 여건상 이러한 방식이 지속 가능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더욱이 바이든 행정부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군사적으로 지원하는 데 상당한 재정을 사용하고 있다. 그 규모는 당분간 줄어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앞선 미국 내 불평등 완화에 필요한 자원 분배를 저해하거나 군수업체 등 미국 내 특정 집단의 이윤만 키워줄 뿐 정작 정부의 경제적 여력을 갉아먹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렇게 해서라도 바이든 행정부가 목표로 하는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견제 등이 충분히 달성된다면 다행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동안의 간접적, 직접적 개입이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하는데 유효할지는 불확실하다. 이미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직접적인 방식의 군사적 개입에는 한계가 드러났다. 이에 미국 정책 당국자들도 우크라이나에 2014년 유로 마이단 혁명 이후 군수물자 지원과 군사 고문단 파견 등의 형태로 간접적으로 개입해왔고, 전쟁 발발 이후에는 러시아를 상대로 SWIFT 제재, 해외 자산 동결 등 각종 경제제재를 시행하는 걸로 전략을 바꿨다.[12] 그럼에도 미국의 이러한 개입이 전 세계적으로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지는 못하다.

 

바이든 행정부가 이념적으로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확실히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국가들은 자신의 군사동맹에 속한 서구의 유럽과 아시아 몇몇 국가들이다. 서구 유럽은 나토 가입국들이 주를 이루며 아시아에서는 일본, 호주, 한국이 해당한다.[13] 그에 반해, 다른 수많은 국가가 미국과 중국, 미국과 러시아의 대결 구도 사이에서 양 진영의 경계에 자리하고 있다. 결국, 광범위한 반러, 반중 전선 또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로 똘똘 뭉친 연합이 결성되지 않고 있다. 미국이 내건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공세가 한계에 부딪혔다는 걸 함의하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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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러시아, 미국과 중국으로 표상되는 진영의 경계 사이에는 여러 국가가 자리하고 있다. 이들은 군사적 긴장의 고조와 경제 불안정의 심화를 우려하고 있다. 그러면서 남미와 아프리카, 중동, 동남아시아 등에서는 바이든 행정부와 미국 주류 엘리트들이 설정한 신냉전 담론에 맞서 또 다른 버전의 신냉전 담론을 제기한다. 이는 신냉전을 통해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 재편을 반대하려는 움직임에 해당한다. 이들 지역의 사회운동들은 신냉전 하에서 심화할 군사주의를 견제하고 핵무기 사용의 위협을 낮추며 국가 간 경쟁 속에서 기후·생태 위기에 맞선 지구적 연대가 무력해질 가능성을 피하고자 한다. 그렇기에 신냉전 구도로 진입하고 있다는 위기의식을 갖고서, 신냉전을 막아설 과거 냉전 시절의 비동맹 운동과 같은 제3세계 운동을 새롭게 시도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신냉전 담론을 좌파 버전으로 전유하는 과정에서 미국 제국주의만을 비판하고 중국과 러시아에 대해서는 충분히 비판적으로 성찰하지 못하는 한계가 나타나기도 한다. 중국을 금융자본주의에 맞서는 산업자본주의 국가로 설정해서 대안적 체제로 간주하고 중국 내의 경제불평등이나 구조적 위험을 무시하거나, 중국과 러시아를 미국에 대항할 주요 거점이기에 이들과의 연대해야 한다고 하면서 정작 중국과 러시아의 권위주의적이거나 반인권적 행태에 눈감아버릴 위험이 있다. 여전히 국제질서를 국가 대 국가의 대결 구도로 바라보기 때문에 생겨난 한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비서구 국가들과 일부 반제국주의-반자본주의 기치를 내건 좌파들에서 제기하는 신냉전론(또는 신냉전 반대론)은 현 국제질서 변동에 관한 또 하나의 진실을 가리키고 있다. 먼저 세계 곳곳에서, 심지어 유럽과 미국에서도 민주주의가 쇠퇴하고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더 이상 정답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게 도대체 무엇인지를 되묻고 있다. 과거 냉전에서처럼 독재가 아니면 민주주의라는 식의 부정적 규정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재발명해야 한다는 얘기가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미국 자신조차 자유주의나 민주주의 또는 국제적으로 합의된 규범을 제대로 이행하고 있지 못하다는 비판도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비서구 국가들은 핵군축과 기후위기 대응, 주권 보장 등 다양한 측면에서 미국 행정부의 행동에 의문과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이러한 비판으로부터 미국과 대치하고 있는 중국과 러시아 또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얘기다.

 

다음으로 이미 경제적으로 국가 간 상호의존이 증대한 상황에서 중국이나 러시아 등과의 경쟁이 격화되어서 에너지와 식량, 광물 등의 수출입 등에 제약이 생길 경우, 많은 국가가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우려 또한 만만치 않다. 반면, 미국은 FED의 단계적 금리 인상에도 불구하고 경제성장률이 2022 3분기 3.2%로 회복한 데 이어 민간 소비, 재고 투자, 정부 지출 등에 힘입어 2023 3분기에는 4.9%를 기록했다. 이를 가리켜 나홀로 호황이냐는 얘기도 있다. 지난 경험에 비춰볼 때 미국의 금리 인상에 따른 경제적 여파는 언제나 개발도상국과 빈곤국에 먼저 영향을 미치고 주변부의 경제가 악화한 이후에야 비로소 선진국 경제에 다다르며 가장 마지막에 미국 경제에 타격이 가해지는 식이었다. 그 와중에 미국 사회 내에서도 가장 불평등한 사회집단에서부터 경제적 타격을 입는다.[14] 덧붙여, 러시아에 대한 미국의 경제제재를 지켜보면서 언제든 우리도 경제제재를 당할 수 있다는 불안도 높아졌다.

 

바이든 행정부가 재편하려는 신냉전 구도에 관해 서구 진영 내에서도 균열이 포착된다. 유럽 내부에서 현재 미국의 행태를 비난하며 반발하는 일이 심심치 않게 나타난다. 탈냉전 이후 유럽의 국가들은 유럽연합을 중심으로 지역 내 정치적, 경제적 질서를 새롭게 구성하고자 했다. 이러한 유럽연합의 경제 전략은 러시아의 노드스트림, 중국의 일대일로 프로젝트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 내 에너지 공급망과 생산-무역 네트워크를 구축하려던 계획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전복되었다. 과거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이라크 전쟁을 계기로 유로화는 기축 통화 또는 대안 통화로서의 전망과 역량을 잃어버렸다. 그런 일이 다시 한번 반복된 것이다. 한 마디로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유럽은 지정학적으로 재편되었다. 유럽과 러시아 그리고 유럽과 중국이 탈동조화(decoupling)되기 시작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삼아 독일-러시아-중국의 경제적, 정치적 네트워크 구축을 견제하고자 했다. 돌아보면, 나토의 장기적 확대 경향은 유럽연합을 미국의 영향력 아래로 옭매는 결과를 낳았다. 러시아를 배제하고 독일을 통제하며 유럽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제도화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러시아의 군사적 침공 위협이 실질화하면서 독일을 비롯한 국가들에서 군축이 아닌 군비 증강 기조로 전환되었으며, 미국을 도와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분담하면서 자국의 재정 부담이 증가하였다. 그에 반해, 러시아의 천연가스를 기반으로 해 에너지 전환을 시도하려는 기획은 무산되었다. 미국과 (미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중동에 대한 에너지 의존도는 더욱 높아졌다. 나아가 중국과의 교역을 위한 여러 경로로 이전에 비해 전망이 나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유럽을 둘러싼 대내외적 환경이 변화하면서 나토에서의 군사적 역할 강화와 기존 정책 노선의 전환이 강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유럽에서 전쟁과 경제위기에 대한 우려가 증대하면서 국제적으로도 핵무기 레짐(비확산, 핵군축, 핵억지 등을 포함하는)에 대한 지지가 약화하는 등 국제질서의 안정을 위한 여러 노력이 퇴행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계속)

 

 


[1] 베티 리어든 지음. 황미요조 옮김. 2020. 『성차별주의는 전쟁을 불러온다』. 나무연필.

[2] 샹탈 무페 지음. 이승원 옮김. 2022. 『녹색 민주주의 혁명을 향하여』. 문학세계사.

[3] 박명림·조소현. 2022. 안전하고 공정한 세계-지구시스템을 위한 행성성과 행성적 통로. 『공간과 사회』 제32 4, p.173-210.

[4] Dean Spade. 2011. Normal life : administrative violence, critical trans politics, and the limits of law. Duke University Press.

[5] 이에 관한 논의는 구갑우의 『국제관계학비판』(2008, 후마니타스)을 참고하길 바란다.

[6] 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 하에서의 위협을 마주하면서 강대국 주도의 질서가 아닌 세계시민사회로의 전환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1950년대 이후 지속해서 제기되었다. 특히 에롤 E. 해리스는 『파멸의 묵시록 과학적 패러다임과 일상의 사유양식』(이현휘 옮김. 2009. 산지니)에서 기계적 유물론과 원자론적 개인주의에 기반한 근대적 사유양식이 국제질서를 규정하고 있는 현실을 비판하고, 새로운 과학적 패러다임에 근거해서 현대 문명의 회복을 위한 국제질서의 재구성을 요구한다.

[7] 신냉전론과 전후 질서 붕괴론을 구분하는 방식은 이혜정(중앙대 정치국제학과) <동향과 전망> 116호에 발표한 2022년 논문 푸틴의 우크라이나 전쟁, 바이든의 민주주의 기획, 그리고 새로운 국제 ()질서를 따랐다.

[8] 2022 12월 개최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8 6차 전원회의에서 김정은 총비서는 국제관계구도가 《신랭전》 체계로 명백히 전환되고 다극화의 흐름이 더욱 가속화된다라는 세계정세 인식을 피력하였다. 북한은 이러한 진영 대결 논리를 토대로 자신들의 핵 보유를 정당화한다. 상세한 분석은 <동아시아 연구원>에서 2023 2월에 연재한 [북한 신냉전 담론 시리즈]를 참고하길 바란다.

 https://www.eai.or.kr/new/ko/pub/view.asp?intSeq=21750&board=kor_issuebriefing&keyword_option=&keyword=&more=

[9] 신자유주의 세계화 이후 국가 간 불평등, 국가 내 불평등의 변화에 관한 상세한 분석은 브랑코 밀라노비치의 『가진 자, 가지지 못한 자』(정희은 옮김. 2011. 파이카), 『왜 우리는 불평등해졌는가』(서정아 옮김. 2017. 21세기북스)를 참고하길 바란다.

[10] 데보라 베네치알레. 미국을 전쟁으로 이끄는 것은 과연 누구인가?. 비자이 프리샤드 엮음. 심태은, 이재오, 황정은 옮김. 2022. 『신냉전에 반대한다』. 두번째테제.

[11] 최근 인플레이션의 원인에 관해선 논쟁이 진행 중이다. 주류 언론이나 주류 경제학계에서는 인플레이션의 원인으로 임금을 주로 꼽는다. 포스트케인지언 경제학이나 현대화폐이론(MMT)를 따르는 학자들은 이에 반대하며, 임금이 아닌 기업의 이윤 추구가 문제라고 비판한다. 이사벨라 베버(Isabella M. Weber)는 탐욕인플레이션(Greedflation)이라는 신조어를 통해, 기업이 고물가 기조를 틈타 상품 가격을 과도하게 올려 물가상승을 더욱 부채질했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그와 유사하게 대기업이나 대규모 투자자들의 시장 독점과 마크업(가격 설정) 행사에 주목하는 샌디 하거(Sandy Hager)나 요셉 베인스(Joseph Baines)의 연구도 있다. 본 글에서는 물가상승의 근인(近因)을 두고서 임금이냐 기업 이윤이냐를 다투는 논의는 잠시 미뤄두고, 물가가 상승할 수 있는 통화 환경을 조성한 미 재무부와 미국 연방준비은행(FED)의 통화 정책에 주목한다. 물론 미 재무부와 FED 사이의 채권 발행과 매입을 통한 화폐 발행을 문제시하는 게 타당하지 않다는 반론도 존재한다. 부분준비금은행제도가 만들어내는 통화팽창을 비판하고 정부가 직접 주권통화를 발행해야 한다는 주권통화론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정부가 직접 발행하는 화폐는 부분준비금에 기초한 은행들의 대출과 달리, 인플레이션과 부의 불평등과 같은 부정적 효과를 낳기보다 오히려 제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관해선 더 많은 논쟁과 연구가 필요하다.

[12] 2014년 유로마이단 혁명 전후 우크이나에 대한 미국의 개입에 관해서는 『당신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모른다』(메데아 벤자민, 니컬러스 J. S. 데이비스 지음. 이준태 옮김. 2023. 오월의봄)을 참고하길 바란다.

[13] 그리고 미국은 자신의 군사동맹에 속한 우방국들에 한해서 상시적 통화스와프 또는 비상시적 통화스와프를 맺고 있다. 이는 미국의 재무부나 FED가 확장적 통화·재정 정책을 시행할 경우 동맹국들에게 미칠 경제적 여파를 상쇄할 수 있도록 미국이 제공하는 일종의 특혜이자 보상이라고 할 수 있다.

[14] 2008년 이후 미국이 시행한 양적 완화와 최근 FED와 재무부 간 국채 사고팔기를 통해 경제를 운영하는 방식에 대한 비판은 김종철(서강대 정치외교학과)의 논문 글로벌 인플레이션과 제국주의 : 글로벌 인플레이션의 정치사회학적 의미(2022. 경제와사회), 발표문 화폐팽창과 제국주의(웹진 인-무브, https://en-movement.net/412)를 참고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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