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워진 프랑켄슈타인에서 스스로를 기우는 프랑켄슈타인으로!
문희정 | 시인
“자본은 흡혈귀처럼 오직 살아 있는 노동을 빨아먹어야 살 수 있으며, 더 많은 노동을 빨아먹을수록 더 오래 사는 죽은 노동이다.”
흡혈귀, 이것은 맑스가 발명한 자본과 자본가에 대한 강력한 비유이다. 우리는 그 비유 앞에서 대책 없는 무기력함과 씁쓸함, 혹은 맥없는 악의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우리 안의 힘을 조금 잃는 일이다. 그 점에서 나는 기존의 비유를 무화시키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그에 필적하는 이편의 상징, 즉 대중과 프롤레타리아트와 ‘을’의 무리를 대표하는 상징을 찾아내는 일이 절실하다는 생각을 했고, 여러 날 그 일을 위해 골몰했다. 그렇게 하여 찾아 낸 상징이 바로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다. 메리 셀리의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그것 말이다. 이 글을 통하여 나는 차근차근 그 상징의 퍼즐 그림을 완성해 나갈 것이다. 괴물이 처한 상황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상황, 괴물이 태어나게 된 배경과 이 세계가 자본주의로 이행하게 된 배후가 얼마나 유사한가를 밝히면서, 그리고 괴물의 이름 없음이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의 기원 및 물적 기반에 대해 어떤 의미 연관을 가지는가를 살피면서.
더불어, 외부적인 힘에 의해 ‘기워진’ 괴물에서 ‘스스로를 기우는’ 괴물로 거듭나게 하는 힘, 그들, 혹은 우리들 사이를 이미 이어주고 있는 보이지 않는 실을 보이게 하는 힘, 그 연대의 실을 더욱 단단하고 유연하게 잇고 짜는 힘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그 힘은 우리가 앓아온 곤혹과 비애라는 감각의 체험을 어떻게 읽어 내느냐와 관련될 것이며, 또 그 힘은 이 시대와 구조에 대한 인식의 계기를 마련하는 일에서 비롯될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 책을 훔쳐 와 읽는 장면, 책장을 넘기며 이 세계와 자신의 탄생에 대해 그가 새롭게 인식하며 조금씩 다른 얼굴로 변모하던 장면을 재조명하면서, 우리의 거듭남의 서사와 실천의 과정을 보다 선명하게 드러낼 것이다. 나아가, 우리는 지금 이 땅 위에서 어떤 방식을 통해 자본주의적 부조리의 세계에 틈입하여 건강한 균열을 낼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나눠 보고자 한다.
1. 무명(無名)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을 만들고 괴물을 낳은 괴물의 아버지이다. 프랑켄슈타인의 손에 의해 한 존재가 빚어진 것. 존재의 탄생, 그 이후에는 흔히 작명의 과정이 따라붙게 마련이다. 한쪽에는 아버지의 성이, 다른 한쪽에는 그의 고유한 이름이 놓이는 과정. 그러나 괴물에게는 어떤 이름도 주어지지 않는다. 라스트 네임은커녕 퍼스트 네임조차도.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역사와 사건으로부터, 작명(作名)의 일반법칙으로부터 배제된 자는 단순히 그 이름이 주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박탈된 자라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는 존재와 사건의 고리 바깥에 던져진 자이다. 바깥, 그것을 자유라고 불러도 된다면, 그는 라스트 네임과 퍼스트 네임으로부터 풀려난, 이중의 자유를 가진 자다. 그는 아버지에 의한 수많은 제약으로부터도, 보살핌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트, 그들 또한 신분적 예속은 물론이고 생산수단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진 자들이다. 제 아버지의 ‘성’에 묶이지 않게 된 동시에 자신만의 고유한 이름 또한 갖지 못한 괴물. 차가운 땅 위에서 부유하게 된 자, 부유해야만 하는 자, 부유라는 텅 빈 자유를 누리도록 강제된 자.
이렇게 그는 이제 존재와 사건의 고리 바깥에 던져졌지만, 그 던져짐이라는 사건은, 그 역사적 사실 자체는 엄연히 존재한다. 사건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대량의 인간대중이 돌연히 그리고 폭력적으로 자신들의 생존수단으로부터 분리되어 ‘무일푼의 자유로운 프롤레타리아(vogelfreie Proletarier)’로서 노동시장에 투입되는 그 사건”. ‘대량의 인간대중’이란 원래는 도시 길드에 소속되었거나 농노였던 자들, 즉 공동의 땅을 가졌던 자들이었다. 그랬던 그들이 자신들의 소속과 영역을 빼앗긴 뒤로는 노동력과 노동에 대한 맥없는 의지밖에는 남지 않게 된 자들이 되었다. 혹은 이도 저도 아니고자 했던 소극적 저항의 존재인 도시의 부랑자들이 되었다. 즉 그들이 그렇게 ‘자유로운’ 자들로 거듭나게 된 것은 순전히 외부적인 힘과 타의에 의해서였던 것이다.
“일어났더니 어둑어둑해져 있더군. 한기도 느껴졌고, 이렇게 적막한 곳에 있으니 본능적으로 두려웠어. 추워서 당신 집을 떠나기 전에 옷으로 몸을 가렸어. 하지만 이 옷으로는 밤이슬을 피할 수 없었어. 나는 불쌍하고 무력하고 비참한 괴물이었지.”
낯선 숲으로 도망치고 떠밀려 갔던 프랑켄슈타인은 짧은 잠에서 깬 뒤 이렇게 내뱉는다. 꺼져 가는 목소리로, 무력하고도 비참한 모습을 하고 말이다. 이 같은 존재는 어떤 연유로 그런 존재가 되는가. ‘돌연한’, 그리고 ‘폭력적인’ 힘에 의해 주물러지고 기워지고 벌거벗겨지는 과정이 바로 연유의 핵심이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존재로 되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이름과 영역의 예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새(vogeltreie)로서, 균질화되고 표백된 자본의 세계에 토해내어지게 된 사건. 더 나아가, 사건의 그 폭력적이고 극악무도한 주무름의 과정, 즉 자본 ‘형성’의 역사는 이제 숨겨지거나 지워지고, 자본의 현재적 역사, 그 말끔한 일반적 축적 메커니즘만 남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이름 없는 괴물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고 있다. 넌 애초부터 왜 그리 게으르고, 왜 그리 못났으며, 왜 그리 자유롭고, 왜 그리도 가난했냐며.
가난한 자들은 가난하지 않습니다. 부자가 아닐 뿐입니다.
그들에게는 의지도 없고 세계도 없습니다.
마지막 불안의 표시를 지닌 채
그저 시들고 보기 흉할 따름입니다.
도시의 온갖 먼지가 밀려와
오물이란 오물은 다 몸에 붙습니다.
천연두 환자의 침대처럼 배척당하고
깨진 접시 조각처럼, 해골처럼,
낡은 달력처럼 버림을 받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대지가 고난을 당하는 때가 오면
대지로 하여금 그들을 실에 끼워 목주를 만들어
부적처럼 몸에 지니게 하여 주십시오.
가난한 자들은 처음부터 가난한 자가 아니었다. 하나의 척도에 의해 가난한 자 쪽으로 밀려난 자들이다. 여기에서 ‘척도’란 추상적인 의미가 아닌 지극히 물리적이고 구체적인 의미이다. 척도라는 말 앞에서 나는 딱딱한 ‘울타리’를 떠올린다. 울타리 치기(엔클로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피와 불의 낙인들을. 가난한 자들은 원래 가난하지 않았다. 가난한 손과 발을 가진 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공동체를 이루어 살았고, 언제라도 맞잡을 수 있는 손들을 서로의 곁에 두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오히려 부유한 자였다. 울타리치지 않은 땅 위에서 그들은 공동의 생산수단을 가지고 저마다의 생산물을 거두어들이며 생활해 왔다.
막강하고 무차별적인 힘에 의해 그들은 벌거벗겨졌다. 그렇게 벌거벗겨짐으로써 그들은 더욱 절대적으로 무력한 자가, 어떤 요구 앞에서도 반대하거나 저항할 수 없는 자가 되었다. 툭툭 불거진 동맥과 근육들이 누런 피부 아래에서 제멋대로 꿈틀거리도록 아무렇게나 짜깁기된 괴물은 세상에 토해내어지자 마자 자신의 벌거벗음과 흉측함과 가난이라는 죄에 대한 물음 앞에도 마주서야만 했다. 그에 답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해 하던 자유로운 맨손의 괴물은 대답 대신 자신의 산 노동을, 질문이 흘러나온 죽음의 공장에 바쳐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2. 맹목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은 기계제 대공업이 심화시킨 부품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와도 닮아 있다. 기계 체계 아래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단지 ‘인간재료(Menschenmaterial)’로 쓰일 뿐이며, 그들 앞에 기계가 배분되는 것이 아니라 ‘기계들의 체계에 따라 할당된 장소에 노동자들이 분배’된다. 그들은 더 이상 ‘생산주체’가 아니다. 이제 생산의 부분 과정을 ‘어떻게 수행하고 통합하느냐의 문제는 기계학, 화학 등의 기술적 응용에 의해 해결된다’. 기계 체계가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기계가 원하고 이끄는 대로 노동자라는 하위 기관 혹은 부품을 취하게 된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의 이름 없음은 기계 체계가 한 부품으로서의 노동자를 빨아들이는 행위와도 연관된다. 그것은 일종의 맹목이다. 기계는 개별 부품들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것이 부품이라면 무엇이라도, 그 각각의 부품 안에 무엇이, 어떤 개별적인 생의 서사가 녹아 들어갔는지와는 상관없이, 맹목적으로 기계 속에 빨려들어 가게 되어 있다. 그 앞에서 개개의 이름은 지워진다. 이름을 주장하거나 이름 부여받기를 내세우는 것은 그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일과 같다. 이름 없음의 영역 안에 고요히 머무는 자만이 기계 앞의 한 부품으로써 할당되는 행운을 누릴 수 있다.
그리고 그 기계 체계 안에는 어떤 윤리도 없다. 자본이 만들어낸 기계는 자본을 고스란히 빼닮아, 자본의 유일 원리인 자기증식이라는 또 하나의 맹목만을 가질 뿐이다. 자기증식을 위해 기계 체계는 빠르게 고도화되었고 앞으로도 점점 더 고도화될 것이다. 그 안에는 인간과 자연에 대한 철학과 미학이라는 느림의 공백이, 혹은 제 걸음의 뒤를 돌아보는 반성의 시간이 들어찰 자리가 없다.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 어떤 정교함이나 사려 깊음도 없이 단지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필요에 의해서만 빠르게 빚어지고 불거져 나온 것처럼. 그의 모습이 과학 기술의 실현, 혹은 인간의 성취나 효용이라는 명목 하에, 자연이라는 미감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끔찍함만을 갖고 태어난 것과 같이.
괴물의 몸 곳곳에는 온갖 종류의 멈추지 않는 시계가 덕지덕지 접붙여져 있을 것이다. 자본가들의 소중한 시간을 그들이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도록. 다른 것은 다 잊어도 초침 소리만큼은 잊지 않도록. 생이 선물한 비정하고 삭막한 음악 소리를 들으며 그 규칙적이고도 정확한 리듬에 맞추어 기계처럼 손발을 놀리는 일이 괴물의 의무이자 임무이므로.
괴물에게 또 하나의 일반명사를, 즉 그들 모두를 통칭하는 이름을 부여한다면 Full-life-timer란 단어가 가장 적합하지 않을까. 그의 육신이자 생명에 다름 아닌 초침의 움직임, 얼굴 없는 시간의 재단(裁斷)에 의해 그의 삶은 쉬지 않고 잘게, 잘게 쪼개질 테니까. 초침 소리는 그가 잠깐 숨을 돌리며 쉬는 동안에도, 투명하게 맑은 하늘을, 광활하게 펼쳐진 수평선을,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별들을 바라다보는 동안에도 이어질 테니까. 찬 바닥 위에서 몸을 만 채로 찰나의 단꿈을 꾸는 동안에도 그 소리는 그의 귓전에서 집요하고도 은은하게 울려 퍼질 테니까 말이다. 적어도 그가 생의 마지막 숨을 토해내기 직전까지는.
우리를 위로하고 살게 해주는 것은, 슬픈지고! 죽음이다.
죽음은 삶의 목적이자, 유일한 희망,
선약처럼 우리에게 원기를 주고, 우리를 취하게 하여,
우리에게 저녁때까지 걸어갈 용기를 준다.
폭풍을, 눈을, 서리를 가로질러,
그것은 우리의 캄캄한 지평선에 깜박거리는 불빛.
그것은 책에 적혀 있는 그 이름난 여인숙,
거기서는 먹고 자고 앉을 수 있으리.
3. 거듭남
“숲에 머물러 있는 동안, 밤이 되면 달이 사라졌다가 더 작은 모습으로 나타났지. 이때쯤에는 감각이 또렷해져서 날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였어. 눈이 빛에 익숙해져서 사물의 형상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지. 벌레와 약초를 구분했고, 약초 사이의 차이도 조금씩 구분하게 됐어. ~ 나는 점차 훨씬 더 위대한 순간을 발견하게 되었어. 이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의 경험과 감정을 서로 분명하게 전달하는 방법이 있다는 걸 깨달은 거야. 그들이 가끔 어떤 단어를 말하면 그 단어가 듣는 사람의 마음이나 얼굴에 즐거움이나 고통, 미소나 슬픔을 가져온다는 걸 깨달았지.”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 그의 탄생지에서 빠져나와 숲을 헤매고 다니던 날들의 독백이다. 발걸음 하나를 내딛을 때마다 그는 빠짐없이 놀라움의 시간을 맛보았을 것이다. 거기에 우리가 익히 아는 괴물의 본성 따위는 담겨 있지 않다. 그의 외양이 괴물이라는 존재를 표상할 뿐, 그의 안에는 다만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과 무엇이든 담겨도 좋을 법한 오목한 그릇이 있었던 것이다. 그 그릇이란 그의 잠재성이다. 무엇이든 담기어, 그는 다른 것이, ‘더 좋은 다른 것’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시시때때로 그 그릇에는 무언가가 새로 담기어, 그는 정녕 자유롭고 다재다능한 변신의 초인이 될 수도 있었다.
그가 딛고 섰을 대지를 상상한다. 그것은 어쩌면 이런 풍경들이 널린 대지가 아니었을까. “아무도 배타적인 영역을 갖지 않고 각자가 원하는 어떤 분야에서나 스스로를 도야시킬 수 있는”, “사냥꾼, 어부, 양치기 혹은 비평가가 되지 않고서도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오늘은 이것을, 내일은 저것을, 즉 아침에는 사냥을, 오후에는 낚시를, 저녁에는 목축을, 저녁식사 후에는 비평을 할 수 있게” 되는 풍경. 스스로 빛나며 그 빛으로 맞은편의 얼굴 또한 빛나게 하는 세계의 풍경.
그러나 우리의 ‘위대한’ 자본주의 체제는 그가 그 풍경 아래에 놓이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모든 상품에서 사용가치, 혹은 잠재적 사용가치를 깨끗하게 걷어냈던 것처럼 그에게서도 자유로이 들끓던 그의 잠재성을 앗아가 버렸다. 외양 안에 또아리 튼 그의 무한한 내면을, 그를 둘러싼 모든 시선들은 묵살해 버렸다.
소설에서, 사람들은 괴물의 깊은 안쪽을 보지 않는다. 그것을 봐 주었던 유일한 이는 숲속 오두막의 한 눈먼 노인뿐이었다. 눈이 멀지 않는 한 닿을 수 없는 그의 너무 아득한 내면. 그것은 그의 내면이 실제로 너무 멀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내면이 너무 멀다고 느낄 수밖에 없게 하는, 혹은 그 내면 쪽으로 진입하기를 가로막는 우리 안의 인식 때문일 것이다. 그 인식은 다름 아닌 시대의 것이다. 그리고 그 인식이 다시 세계를 이룬다.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일단, 한 번 괴물로 태어난 괴물은 괴물 아닌 다른 것이 되기 어렵다.
~ 이곳은 너무 캄캄해. 웨이터, 웨이터, 목소리는 빛처럼 칠흑을 따라 번져 가는데, 웨이터는 없고, 목소리로만, 우리는 기다리고, 웨이터, 웨이터, 조금만 더 우리는 기다려도 되나요. 보이지 않는, 만져지지 않는 우리를, 우리가 찾아 돌아오도록, 부르면서 우리는, 웨이터, 웨이터, 다른 것이 될지도, 더 좋은 다른 것이, 될지도 모르죠.
노인은 괴물에게 말하라고 한다. 그 안의 진정과 순수와 사랑을 간곡하고도 정성스럽게 설명하면 사람들이 그에게 마음을 열 것이라고 했다. 물론 사람들은 그러지 않았다. 말의 포문을 열 잠깐의 시간조차 괴물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눈으로 그를 맞닥뜨리는 순간마다 그의 잠재성은 번번이 한줌의 재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런 장면, 그런 경험이 거듭되면서 그의 ‘괴물 되기’라는 ‘거듭남’의 과정 또한 완성된다. 그의 안간힘이나 가느다란 희망 또한 그 한줌 안에 섞여 들어갔다는 사실 역시 중요하다.
숙명 같은 한숨을 쉬며 그는 자본의 소용돌이 속으로 어쩔 수 없이, 필연적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 것이다. 검은 공장 앞으로 축 처진 어깨의 괴물들이 매일같이 새롭게 모이는 진풍경은 자본주의라는 시대가 불러온 것인 동시에, 다시금 자본주의의 역사를 완성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듯 괴물의 외양, 즉 그 다름과 흉측함은 부르주아의 손에서 비롯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는 자신의 손때 묻은 작품을 자신에게서 예리하게 분리해 내어 균질과 추상과 교환가치의 세계로 밀어 넣어 버렸다. 잠재성에 대한 무차별적 세탁. 그러한 과정은 다름과 흉측함이라는 낙인의 책임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여유 있게 떠넘기면서 이루어졌다. 여유 있는 떠넘김의 정중앙에는 자본가의 욕망이 반영된, 그러나 그 욕망을 은폐하고도 남는, 등가교환과 같은 세련된 축적의 원리가 있다.
그리고 그것을 단단하게 받쳐주고 있는 것이 근대의 정치경제학이라는 ‘학문’ 혹은 ‘지식’이다. 자본가와 국가권력이 합동으로 계획하고 출산한 괴물의 외양과는 판이하게, 그들의 문서와 책들은 흰 바탕 위에 검고 단단한 단어와 법칙과 수사와 논리가 너무도 정교하고 교묘하게 잘 박히고 조합되어 페이지마다 넘치도록 빛을 발하고 있다.
4. 역전의 거듭남
그러나 빛은 공평하다. 빛에는 눈이 없고 스스로 의도하는 방향이 없다. 빛을 발하는 사물이 누구에게서 빚어졌는가와는 별개로, 빛에게 이끌리는 것은 빛을 발견하는 자들 모두의 권리이다. 책이라는, 지식이라는 문명은 권력과 자본에서 비롯되었을지 몰라도 그것의 향유는 그밖의 모든 방향으로 뻗어나갈 수 있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자본 편의 자양분들은 그 맞은편에도 다르지 않은 영양소로, 무기를 가는 숫돌로 쓰일 수 있는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은 숲속 오두막에서 숨어 지내는 동안, 인간이 쓰는 언어의 아름다움과 힘에 놀라고 그 언어를 조금씩 배워 나가게 된다. 『실낙원』, 『플루타르크 영웅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등의 책을 접하게도 된다. 『실낙원』을 읽는 동안 괴물은 인간과 싸우는 전지전능한 신의 모습에 대해 묘한 흥분을 느끼는 동시에, 자신의 처지와 책 속 인물의 상황을 비교하는 등의 비판적인 독서를 하기도 한다. 신에 의해 창조된 아담, 신의 특별한 보살핌을 받는 아담과는 다르게 자신은 비참하고 무력한 외톨이일 뿐이라고, 자신은 사탄이라는 상징이 더 잘 어울리는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펼쳐 들게 된 것이 자신의 주머니 속에 든,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실험 일지였다.
“그 안에 저주받은 나의 기원에 대한 기록이 전부 있어. 나라는 존재를 만든 끔찍한 상황이 모조리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추악하고 끔찍한 내 몸이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그 언어는 당신 자신의 공포를 표현하고 나 자신을 지울 수 없는 공포스러운 존재로 만들었어.”
이것은 괴물에게로 건너온, 문명과 지식이라는 빛이 괴물에게 새로운 깨우침의 선물을 안기는 순간에 대한 묘사다. 괴물로 태어나고 괴물이라는 외양을 넘겨받았다는 이유로 어쩔 수 없이 괴물로 살아가야만 했던 괴물이, 어찌 하여 그가 괴물로 태어날 수밖에 없었는지에 관한 자신의 기원과, 자신이 소외받을 수밖에 없었던 연원을 마주하던 순간이므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으며 알 수 없는 이유로 눈물짓던 괴물, 제 존재에 대한 슬픔만으로 자신의 기워진 몸을 메우던 괴물은 이제 그 슬픔의 숨은 물길을 따라 내려가 그것의 원인을 길어 올리는 작업에 착수하게 된 것이다. 꾹 닫혀 있던 괴물의 입술은 비로소 열릴 것이다. 질문은 이제 시작되었다. 침묵하던 신체에서 질문하는 신체로, 기워진 신체에서 스스로를 기우는 신체로 그는 ‘다시 거듭’날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그 역전의 거듭남에 대한 표현이란 이런 것 아닐까. 『자본』에서 맑스가 말한 바대로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의 메커니즘 그 자체에 의해 그 수가 항상 증가하며 훈련되고 통일되며 조직되는 계급인 노동자 계급의 반항도 더불어 성장한다”는 현실적 상상. “수탈자가 수탈당한다”는 꿈. 사실 그것은 꿈이 아니다. 맑스는 끝없이 읽고 썼다. 그의 꿈이 꿈으로 끝나게 하지 않기 위해, 자신이 써내려간 것이 꿈 실현의 무기가 되도록, 역전과 역습의 매듭점이 되도록, 그는 그의 대부분의 호흡을 읽고 쓰는 데 할애했다. 그 결과로써 맑스는 이제 우리 주위를 “배회하는” 하나의 강력한 “유령”, 실체보다도 더 강력한 유령으로 우리 머리와 가슴의 모든 틈들 속에 잠입하게 되었다.
누군가 꿨던 꿈을 함께 꾸는 이들이 늘고, 그것이 하나의 무리가 되고, 그 무리의 물결이 점점 더 거세어질 때 꿈은 꿈을 넘어설 것이다. 이러한 연대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기우는 일과도 같다. 파편화되어 버린, “자신을 조각조각 팔아야 하는” 프롤레타리아트가 “노동의 역겨움”이라는 고통을 체험하고 그 고통이 점점 더 강하게 그들을 옥죄어 올 때, 그런 역겨움의 기원을 아는 일이야말로 그들 스스로를 긴 한숨과 무기력함에서 건져내는 힘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아는’ 일이란 다름 아닌 자본이 낳은 과학적, 논리적 지식 문명을 통해 가능해진다.
이를 테면 맑스의 책과 보들레르와 파울 첼란의 시구(詩句)가, 그들의 조각난 몸을 잇고 여기저기에 흩어져 맥없이 한숨 쉬는 영혼들을 이어붙일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슴에 지식과 철학이 스며들 때 그들은 스스로 몸을 기우고, 일어나 걸을 것이다. 다음과 같은 맑스의 외침처럼. “사유의 번개가 인민의 이 천진난만한 대지를 정면으로 때리면, 독일인들의 인간 존재로의 해방이 일어날 것이다. ~ 이 해방의 머리는 철학이며, 그 가슴은 프롤레타리아트이다.”
아무도 흙으로 진흙으로 우리를 다시 빚어 주지 않는다
아무도 우리의 티끌에 혼을 불어넣어 주지 않는다
아무도.
찬양하세, 그 누구도 아닌 이.
당신을 위하여
우리가 꽃피려 하노니,
당신을 바라보며.
우리가 하나의 무(無)
였고, 무이며, 언제까지이고
무일지니, 꽃피며,
무의―
그 누구도 아닌 이의 말로
이제 괴물은 자신 안에 스며들어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된 언어와 지식으로 스스로 꽃피어날 것이다. ‘그 누구도 아닌 이의 장미’로 돌아갈 것이다. 자신을 빚은 동시에 내팽개친 자를 위한 노동으로 하루를, 1년을, 평생을 강탈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것이고, 자신을 빚은 자가 그 일과 동시에 빚어 낸 검은 관인 공장과 기계에게 조금씩 제 생명을 내어주며 비참하게 시들어가는 현재의 일을 기억해 낼 것이다. ‘그 누구도 아닌’, 바로 그 자신의 기억을 찾아 낼 것이다.
5. 무명(無名)에서 무명(明紬)으로
맑스는 『자본』에서 ‘보이지 않는 실’의 비유를 세 번 사용했다. 첫 번째는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묶여 있는 상황을 말하기 위한 것이었다. 물리적 자유 뒤에 도사린 무시무시한 공장 회귀의 사슬을. 두 번째는 대공업과 가내수공업의 사이를 잇는 실이다. 대공업 쪽에 연결된 실에 의해 가내수공업의 시계는 더 빠르게 달리고 더 열악한 벽에 매달려 있을 수밖에 없게 돼 있다는 것. 세 번째 비유는 ‘집중’이 일어나게 하는 힘의 하나인 신용제도를 설명하기 위함이다. 신용제도가 사회에 흩어져 있는 소액의 돈을, 보이지 않는 실에 의해 자본가의 검은 주머니에 은밀히 넣어 준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실의 세 경우는 모두 자본주의 체제를 비유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 실은 세상의 어떤 칼이나 가위로도 쉽게 끊어낼 수 없는 실일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중요한 점은 그것이 ‘보이지 않는’ 실이라는 데 있다. 자본의 관심은 그것을 보이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다. 보다 잘 은폐하여 보다 자연스럽게 자신의 체제를 유지하고 점진적으로 그 덩치를 키워가고자 하는 것이 그들의 주된 목적이다.
그런데 이런, 자본가와 자본주의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한 실만 있는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실은 이편에도 있다. 그것은 바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라는 괴물을 기우고 있는 실이다. 그 실은 무명실(明紬)이다. 무명(無名)인 자들의 사이를 잇고 있는 가느다란, 그러나 그 무엇보다 윤리적이고 건강한 실. 그 실 또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은폐가 아니다. 단지 움츠러듦에 의해, 숨어버림에 의해 그렇게 되었을 뿐이다. 또 그들 계급을 조각내고 벌거벗기고 엉망으로 주무르는 거대한 힘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방법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
이편의 보이지 않는 실은 우리가 자아낸, 알게 모르게 우리 자신으로부터 흘러나와 기어이 우리들 사이를 잇게 된 실이다. 우리를 엮고 있었던 실이다. 그것은 우리가 함께했던 연대의 기억이다. 공유의 기억이다. 몸의 기억이고 생의 기억이다. 승리와 환희를, 고통과 비애를 함께 겪어온 우리 공동의 육화된 역사이자 연대기이기도 하다. 그 실은 잘려나가지 않았다. 우리가 살아있는 한, 그것은 잘려나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몸이자 우리 안에서 아직도 흐르고 있는 시간의 웅성거림이므로.
이것은 맑스가 『자본』에서 “19세기에는 농민과 공유지 사이의 관련에 대한 기억조차 사라졌다”라고 스치듯 언급한 바로 그 ‘농민과 공유지 사이’를 다시 기억해 내는 일과도 관련된다. 공유지라는 공동의 땅 위에서 그들은 수탈자와 피수탈자로도, 착취자와 피착취자로도, 노동자와 자본가로도 나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 머릿속은 ‘우리’라는 단어만으로 차고 넘쳤을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는 그 단어를 지우고 우리의 기억을 지웠다. 아니, 지웠다고 믿었을 뿐이다. 그 기억은 끝끝내 지워지지 않고 우리 기억의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보이지 않게 되었을 뿐 그것이 영영 존재하지 않게 된 건 아니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생애의 마지막 15년을 고대적, 공동체적, 전자본주의적 형태들에 대한 집약적인 연구에 썼다고 한다. 북미의 대초원에서 러시아 스텝 지대의 촌락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을 대상으로 말이다. 그가 이렇게 한 것 또한 ‘우리’라는 ‘기억’을 되찾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 아니었을까. 그런 촌락들과 부족들이야말로 우리의 기억이자 우리의 미래를 담고 있는 장(場)임에 틀림없다고 그는 생각했던 게 아닐까.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이어받은 숙제는 우리의 기억이자 미래인 그 보이지 않는 실을 보이게 하는 일이다. 그 실을 보이게 하는 기술의 발명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들 사이사이로 촘촘하게 엮인 무명실을 알아보는 깊은 눈, 그 새로운 눈을 심어 넣는 기술의 발명. 그 기술은 지금 여기의 경험, 지금 여기에서의 감각의 체험만으로는 제대로 구성될 수 없다. 기술을 완성하게 하는 것은 인식일 것이다. 숨죽이거나 소리 내어 우는 목소리, 그 목소리들 곁에서 함께 울거나 혹은 가만히 다독이는 목소리 사이로 스며드는 또 다른 힘 말이다. 이를 테면 다시 책장을 넘기게 하는 힘, 가슴 속에 책을 품고 밤의 풀숲으로 뛰쳐나오도록 하는 힘, 프랑켄슈타인이 그랬듯, 주머니에 쑤셔 넣어 둔 쪽지를 끄집어내도록 하는 힘이 바로 그것이 아닐까.
그 힘은 애초부터 완결된 채로 흘러온 듯 보이던 이 사회의 볼품없는 시작점을 발견하게 할 것이고, 너무도 단단하게 우리를 조이고 있던 이 체제의 이미 부서져 내리고 있는 부실한 틈들을 찾아 그 한 점 한 점을 정확히 가리키도록 할 것이다. 더불어, 우리 스스로가 공동의 대지 위에 서 있음을, 우리는 혼자가 아니고 그 슬픔은 자신만의 것이 아니며, 무엇보다 그런 고통과 참혹이 우리 자신의 잘못 또한 아님을 알아차리게 할 것이다.
과거의 맑스주의자들은 이러한 인식을 확보하고 그것을 노동자 대중들 안에서 확산시키기 위해 전위당이라는 형태를 사유했었다. 파리 코뮌이 끔찍한 실패로 돌아가고 많은 이들이 피를 흘리게 되자 맑스는 사회주의자들의 당을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또한 레닌은 혁명운동을 지도할 전위당을 조직하기 위한 방편으로써 전국적 정치신문(이스크라)을 창설하여 그것이 계속 공장으로 흘러들도록, 그리하여 그것이 노동자 대중에게 배포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당을 진리의 장소로 삼고자 했던 이런 시도는 어김없이 실패하였다. 당 형태를 통한 운동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가 아닌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국가-당의 독재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나는 발리바르가 맑스의 『공산주의자 선언』으로 돌아가자고 제안하면서 했던 말을 빌려오고 싶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은 기존의 당들과 분리된 자기만의 당을 만들지 않고 기존의 노동자 당들 안에서 가장 단호한 분파로서 활동한다.’는 맑스의 테제에 집중한다. 발리바르는 이 테제에 몇 가지 수정을 가하는데, 그에 따르면 이 테제는 단순히 정당 정치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다양한 조직들에 적용될 수 있으며, 공산주의자들은 바로 이 다양한 조직들 사이를 넘나들면서 갈등을 분석하고 연대를 생산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발리바르는 맑스가 말하는 ‘공산주의자들’을 ‘여행하는 자’로 읽어낼 수 있다고, 따라서 자신의 ‘장소’와 ‘언어’와 ‘이름’을 바꾸는 자로 읽어낼 수 있다고 말한다.
구체적으로 짚어 말한다면 그들은 정치적, 자율적, 유목적 지식인일 것이며, 인권운동가들일 것이며, 시민단체의 활동가들일 것이며, 그들 외에도 자신의 땅 위에서 어떤 식으로든 이 땅의 모순과 부조리를 외치는 자들일 것이다. 그런 외침이 지속적으로 도처에서 출몰할 때, 그 외침들이 모이고 모여 확고한 하나의 소리의 뼈가 되어 우리 내부로 침투할 때, 우리는 다시금 우리를 돌아보게 될 것이다. 우리들 사이의 실들을, 이미 있었고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우리들의 것일 그 실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나는 발리바르가 말한 ‘여행하는 자’를 목소리 자체에 대한 비유로도 읽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그것은 ‘맑스의 유령’과도 같은 목소리일 것이다. 혹은 문학과 예술과 미디어, SNS, 그 밖의 숱한 형태로 우리 주위를 떠다니는, 단편적이지만 이 세계의 진의 혹은 원리를 담은 목소리이기도 할 것이다. 그 목소리는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장소에서, 각기 다른 이름을 생산해 낼 것이다. 그러나 이미 너무 확정적인 이름으로 자신의 땅에 울타리를 치고 말뚝을 박아 넣은 자에게 이 이야기는 해당되지 않으리라.
‘여행하는 자’는 이름 없는 자와 접속한다. 그는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고, 그는 우리이다. ‘이중의 자유’로써 ‘강제’된 자는 이제 장소와 언어와 ‘이름’을 바꾸는 자로 다시 태어난다. ‘이름 지어지지 않은’ 존재에서 ‘이름의 유목적 탈바꿈’을 일삼는 존재가 된다. 새로운 눈을 심어 넣은, 우리 사이에 이어진 무명실들을 선명히 보아 내는, 그리하여 우리 자신의 미래를 기억해 내는 존재가 되는 것. 기억, 이름, 실, 이 모든 것은 연대에 관한 이야기다. 이러한 연대를 이 시대에 맞게 조직하는 것, 함께 실천하는 것, 함께 더 깊이 알아가는 것, 알아내고 다시 앓아내고 마침내 아름다워지는 일을 향해 우리는 함께 나아가야 할 것이다.
침침한 눈에는 눈물도 마르고
베틀에 앉아 이빨을 간다
독일이여 우리는 짠다 너의 수의를
세 겹의 저주를 거기에 짜 넣는다
우리는 짠다 우리는 짠다
첫째 저주는 신에게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우리는 기도했건만
희망도 기대도 허사가 되었다
신은 우리를 조롱하고 우롱하고 바보 취급을 했다
우리는 짠다 우리는 짠다
둘째 저주는 왕에게 부자들의 왕에게
우리들의 비참을 덜어 주기는커녕
마지막 한 푼마저 빼앗아 먹고 그는
우리들을 개처럼 쏘아 죽이라 했다
우리는 짠다 우리는 짠다
셋째 저주는 그릇된 조국에게
오욕과 치욕만이 번창하고
꽃이란 꽃은 피기가 무섭게 꺾이고
부패와 타락 속에서 구더기가 살판을 만나는 곳
우리는 짠다 우리는 짠다
북이 날고 베틀이 덜거덩거리고
우리는 밤낮으로 부지런히 짠다
낡은 독일이여 우리는 짠다 너의 수의를
세 겹의 저주를 거기에 짜 넣는다
그러나 이런 물음도 가능하다. 이 땅이 자본주의 체제에 의해 잠식된 땅이라는 것, 현재의 역사는 자본주의의 역사라는 것을 우리가 익히 알고 있을 때, 또한 그에 의거하여 자본주의의 바깥은 없다는 사실을 아프게 받아들일 때 우리는 하나의 실천을 위해 어떤 공간을 찾아 떠나야 하는가. 윤리적이고 건강한 실을 드러내 보이고 ‘세 겹의 저주’와 함께 그 실을 다시 짜 넣을 땅은 대체 어디란 말인가. 자본주의의 빗줄기가 빠짐없이 스며든 흙바닥 깊숙이에 뿌리를 내린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우리의 목소리를 다시금 생성하고 모을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은 바로 그 질문을 응시하는 일로부터 찾아질 것이다. 질문은 지금, 이 바닥 위에 던져졌다. 이 바닥이 아닌 무중력과 무균의 공간 속에서는 질문 자체가 생산될 수 없다. 우리들의 입술에서 비어져 나온 질문은 포물선을 그리며 이 땅 위에 떨어질 것이다. 지식과 사유에 힘입은 질문들. 그것은 자본주의가 심어놓은 습기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하나의 씨앗이다. 그 씨앗은 빠르게 움터 싹을, 열매를, 꽃을 기어이 드러내 보이고 말 것이다.
『공산주의자 선언』에서 맑스는 노동자들의 승리가 일시적인 승리로 끝날 뿐이더라도, ‘투쟁의 참된 성과는 직접적인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단결이 계속 확대되는 데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단결은 자본주의가 만든 문명의 산물인 통신수단의 발달의 기여 덕분에 가능해진 것이라고도 했다. 상품의 유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철도 시설 또한 노동자 투쟁에 박차를 가했다. 여기서도 우리가 들여다보게 되는 지점은 그들이 태어난 땅 위에서 모든 운동이 이루어지며, 그 땅 위에서 빚어진 산물, 혹은 장치들은 이편과 저편 모두에게 도구로도, 무기로도 쓰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지금 나의 발이 디디고 있는 바닥이며, 그 바닥에 대한 인식이며, 그 바닥에서 우리가 건져 올릴 수 있는 도구와 무기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장치의 재발명이 관건이 되는 것이다. 한 가지 예로, SNS라는 바닥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SNS는 원래 CIA에서 만들어졌다. 즉 그것은 기득권자들의 전유물이었는데, 이제 우리 모두의 것이 되었다. 물론 그 장치 안에는 무시하지 못할 여러 위험들도 있다. 그것은 서로 다른 힘과 힘, 무수한 얼굴의 힘들이 동시에 생산되는 장소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적어도 있는 목소리를 없는 것으로 만들지는 못한다. 입장과 입장이,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가 만나 서로에게 생채기를 내고 피 흘리는 장면이 펼쳐지기도 하겠지만, 그것은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기 위한 과정으로서의 부딪힘일지 모른다. 언론이라는 잘 마름질되고 표준화된, 그리하여 특정한 한쪽의 목소리로만 가늠되어 왔던 민심 또한, SNS를 비롯한 많은 민간 매체들 덕분에 예상치 못한 곳곳의 사이버 거점들로부터 유령처럼 출몰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언론조차도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몇몇 언론 매체는 크고 작은 대중 안의 부딪힘들과 흐름을 읽어 내려는 예민함을 가지고 있고, 그 결과에 따라 자신의 방향을 바꾼다.
그람시는 투쟁을 두 가지 형태로 분류한 바 있다. 진지전과 기동전이 그 둘에 해당하는데, 그는 언론사, 사회적 단체, 웹사이트 등을 거점으로 하는 일상적 진지전이, 혁명적 시기의 기동전에 대해 우위를 차지한다고 말했다. 진지를 점거하고 그 안에서 끝없이 목소리 내는 일이 모든 운동의 토양과 빛, 그리고 씨앗이 된다는 것이다. 그의 말은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이와 더불어, 바로 앞에서 인용했던 맑스로부터의 또 하나의 외침인, 운동의 ‘계속’에 대한 강조 역시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항목일 것이다. 지치지 않고 걸어가는 일, 우리들의 걸음에 대한 지속적 발명, 그리고 지금 여기라는 바닥에서 우리의 진지가 될 만한, 우리의 발끝과 손끝이 잘 닿는 장치들을 끝없이 살피고 들여다보는 일, 장치들을 재발명하고 재배치하는 일 속에서 우리들의 무명실은 분명 더욱 촘촘해지고 유연해질 것임을 나는 믿는다.
먼 길을 걸어온 우리의 인식이, 새로 갈아 끼워진 우리의 눈과 만나는 날에 대한 상상은, 지금 여기에 나란히 멈추어 서서 이 땅을 돌아보고 이 바닥에 대해 이것이 우리가 첫발을 디딘 땅이며 앞으로도 딛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대지임을, 누구의 전유물도 아닌 우리 모두의 것임을 함께 기억하고 성찰하는 일과 나란히 가야만 할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