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한 일’ 없는 세상 만들기
-『굴뚝 속으로 들어간 의사들』을 읽고
김명준 | 대학생 & 알바 노동자
저는 항상 월요일이 쉬는 날입니다. 주말마다 어느 예식장에서 식기세척을 하고 있기 때문이죠. 주말 내내 세제, 락스, 고춧가루 냄새를 맡고, 쨍강쨍강 그릇 부딪치는 소리를 듣습니다. 쉼 없이 돌아가는 식기세척기에 그릇 하나라도 더 넣겠다고 열기 나는 증기 속에 고개를 밀어 넣고, 허리를 왼쪽 오른쪽 돌려가면서 그릇을 걸어놓습니다. 그래도 도저히 2천 명 분량의 그릇을 마감시간까지 다 닦지 못합니다. 거기다 관리자들에게 하대 당하면서 일하는 게 만만치는 않습니다. 이렇게 이틀을 꼬박 일하고 나면 월요일에는 몸이 너무 무거워서 무언가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당장은 부양할 사람이 없어 저 먹을 만큼만 벌면 되니 이 책, 『굴뚝 속으로 들어간 의사들』에 나오는 생업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무게만큼 무겁지는 않습니다. 그런데도 메틸알코올에 노출되는지 몰라 시력을 잃었다는 이야기와 식당에서 하루 종일 반복된 행동으로 근육이 찢어지며 일한다는 조리급식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정말 제 이야기를 누가 써놓은 것 같다고 느끼면서 읽었습니다. 정말 이렇게 일하다가는 골병이 나는 게 아닐까 겁이 났습니다. 안 그래도 하루에 몇 번이고 그만두고 도망가고 싶었는데 그만둘까요? 하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약값도 없지만, 밥값도 없습니다.
‘직업병’이라는 개념이 우리 사회에 들어오기 전까지, 그리고 사실 지금까지도 우리는 ‘골병’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골병이라는 단어의 유래에 대해서는 뼛속(골骨)까지 깊이 스며든 병이라서 또는 곯아 생기는 병이라서 또는 ‘골초’에 쓰이는 것처럼 지긋지긋하게 낫질 않아서 등등 여러 설이 있는데, 어느 쪽이 되었든 쉽게 고쳐지진 않는 병입니다.
일전에 땅에 묻혀 있는 분들을 모시는 일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레 뼈를 볼 일이 많았는데, 뼈를 보면 이 사람이 신체적으로 어떤 상태였나를 꽤 많이 알 수 있습니다. 가장 쉽게는 충치나 골절, 관절염 같이 직접적으로 뼈에 손상이 가는 병이 있었는지, 출산이나 수술을 하였는지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세히 보면 자주 사용하는 부위도 알 수 있습니다. 자주 사용하는 부위에는 근육이 발달하는데, 근육이 뼈를 잡아당겼다 놓기를 반복하면서 인대가 연결되어 있던 부분이 불룩 튀어나오기 때문입니다. 초보자인 저는 겨우 이 정도밖에 모르지만, 전문가가 성분 분석을 하면 영양 상태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골병이 정말 뼛속에 스며서 ‘골병’이라 이름 붙었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사람이 무리하게 움직이면 뼈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그 단단하다는 뼈에도 고통의 흔적이 새겨지는데 하물며 근육과 신경과 피부, 그리고 마음에는 어떻겠습니까.
‘골병 권하는 사회’
왜 우리는 이렇게 몸에 고통을 새겨가며 일해야 할까요? 인류는 아주 오래전부터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해왔습니다. 생산력이 낮았던 옛날에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기술도 발전하고 물건이 넘쳐서 문제인 시대에도 여전히 우리는 ‘뼈 빠지게’ 일하고 있습니다. 그건 아마 내가 일한 만큼 얻는 자급자족의 사회가 아니라, 내가 일해서 만든 것을 팔아서 내 몫뿐만 아니라 나를 취직을 시켜준 사람 몫까지 만들어주어야 하는 임금노동 중심의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일의 양도, 일의 속도도, 일의 대가도 일을 한 사람이 거의 조정할 수 없습니다. 적은 돈으로, 빨리, 많이 일해야 하다 보니 먹고 살자고 하는 일임에도 하면 할수록 ‘못 살겠다’, ‘죽겠다’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이렇게 고통스러운 노동을, 텔레비전 같은 대중매체에서는 그 대신 보람을 얻는다며 미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업종에서 달인이나 대가가 된 사람들은 굳은살 배겨가며 하다 보니 이렇게 일을 많이, 빨리, 잘 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굳은살만 생겼다면 다행이지만 보통은 다들 병 하나씩을 갖고 있습니다. 텔레비전에서는 이런 직업병들을 ‘영광의 상처’처럼 묘사해 멋지고 감동적인 이야기로 엮어가지만, 사실 이들은 돈과 시간이 모자라서 일을 더 빨리 더 많이 하다가 병들었고 그 병 때문에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삶 속에서 보람이라는 건 직업병의 고통을 잊기 위해 모르핀을 맞는 것일 뿐입니다.
고용주에게 노동자들은 제품을 만드는 도구일 뿐입니다. ‘클린룸’이 노동하기에 깨끗한 환경이 아니라 제품이 깨끗하게 가공되는 곳이라는 점에서 드러나듯이 이들의 건강은 곧잘 소외되고 맙니다. 아무리 착한 고용주라도 노동자들 중에 누가 병이 든다면 당장 비용이 드는 곤란한 내색을 안 하기 어려울 텐데, 조금만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지게차에 치였던 노동자에게 고용주가 그랬듯 보험료 걱정 때문에 병원도 제대로 못 가게 하거나, 삼성반도체 피해자들에게 삼성이 그랬듯 협박하겠지요. 더욱 안타까운 점은 이 책에서 여러 차례 등장하는 석면이나 석탄, 돌가루를 많이 마셔서 폐질환에 걸린 환자들처럼 그렇게 소모되다가 버려지는 사람들은 직업병이 들었음을 병원에 인정받아야 겨우 생계를 유지할 수 있고,「건강진단의 모순 : 예방하려다 배제되는 불편한 진실」의 어린 예비노동자의 사례처럼 경제가 어려워지고 고용이 불안정해지면서 그렇게 고통 받는 일조차도 못하고 배제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약한 사람들일 수록 더 나쁜 환경에 노출됩니다. 상대적으로 더 낮은 임금을 받는 여성 노동자들, 이주 노동자들, 장애인 노동자들, 어린 노동자들은 그 돈이라도 벌어야 하기 때문에 더 많이 일하면서도 더 권리를 주장하기 어렵습니다. 결국 이 사회는 다들 살아남기 위해 직업병이 들어야만 하거나, 직업병이 들도록 일을 해야 하는 사회인 것입니다.
이 ‘골병 권하는 사회’는 몸만 해치는 것이 아닙니다. 서비스업을 중심으로 감정노동을 하는 이들이나 도시철도 기관사들처럼 큰 사고를 겪은 이들은 마음에 병이 듭니다. 우울증이나 그로 인한 자살은 직업병으로 인정받기 어렵고, 이들의 피해로 인해 옆에서 마음앓이를 같이 하는 가까운 이들의 상황은 고려 대상이 아닙니다. 임신을 계획하는 여성 노동자들의 경우, 불임, 유산, 기형아 출산 등의 고통까지 떠안아야 합니다. 물론 어쩔 수 없이 당연히 겪어야 하는 ‘골병’같은 것으로 여겨졌던 시기에 비하면, 그동안의 노동자 · 환자 · 의사 등등의 노력으로 여러 가지 안전 보장 제도들이 도입이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주 형식적인 검열과, 책임 소재가 모호하고 오히려 급할 때 방해가 되는 몇몇 독소조항, 솜방망이 처벌 등은 이 사회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기보다는, 당장 닳아 없어지는 것들을 조금 아껴 써보자는 게 목적이 아닐까 의심하게 합니다. 아직 정말로 갈 길이 멉니다.
아프기 전에, 지금부터 차근차근
이런 사회는 어떻게 해야 바꿀 수 있을까요? 이 책을 읽고서 딱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내용이 여전히 어진 이들의 미담처럼 들린다는 것입니다. 이 책의 주제가 직업병이고, 노동자가 스스로 직업병이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쉽게 인정받지 못하는 게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책에서 소개된 사례들은 정말 다행스럽게도 문제의 원인을 끝까지 추적하고 싸웠던 의사들 덕분에 그나마 직업병으로 인정받거나 더 나은 제도를 만드는 데 중요한 사건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의사는 너무 적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온라인에서는 사회에 만연한 과잉진료를 고발했던 한 치과의사가 다른 치과의사들에 의해 온갖 비난을 받고 눈물을 훔치는 영상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설령 나쁜 마음을 먹은 의사가 아니라 하더라도 하루에 수십 명씩 들이닥치는 환자들의 사연을 점술가처럼 꿰뚫어볼 수도 없고 구구절절 들어줄 수 없습니다. 멋진 의사들이 나오길 하염없이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아마 그래서 에필로그에서도 의사들은 어디까지나 질병의 의미를 번역하는 ‘번역가’요, 원인을 찾아내는 ‘탐정’일 뿐이고 결국 노동자이자 환자인 사람 스스로가 자본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정치를 통해 재조직하는 문제라고 끝맺는 것이겠지요. 이 책을 읽는 우리들이 어떻게 이 질병과 죽음의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를 직접 고민해야 합니다. 가능하다면 아프기 전에 말입니다.
노동자, 환자, 의사 개인의 노력으로 직업병을 인정받을 수 있는 진단서를 끊는 것은 당장 병을 앓는 사람의 삶을 위해서 중요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노동자, 환자, 의사가 서로 힘을 모아서 이런 노동과 보건 체계 전체를 바꾸어야 합니다. 제일화학이나 청구성심병원의 사례와 같은 직업병에 대한 몰이해와 노동자들에 대한 탄압은 여전합니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를 비롯하여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사망사건이나 미세먼지로 인한 피해를 몸으로, 마음으로 겪은 시민들은 일상생활 속에서의 안전이 하나의 권리라는 인식과 그 책임을 기업과 정부에 물어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단순히 민원과 같은 방식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인 행동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삶의 현장인 일터 역시도 안전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일터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결국 먼저 의문을 제기하고 요구해야 합니다. 누구나 일하기 전에 어떤 환경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 그리고 어떤 위험이 있는지 알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구나 일 하는 동안 힘들면 숨을 고를 수 있고, 일하다가 아프면 충분히 치료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구나 아픈 원인이 전적으로 개인이 몸 관리를 소홀히 해서가 아니라 일이 험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고, 또 의사가 환자에게 “무슨 일 하세요?”라고 물어보는 수 있는 체계여야 합니다. 나아가 ‘험한 일’과 ‘편한 일’이 따로 있어서 험한 일을 하는 사람을 사후에 조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일도 험하지 않은 세상이 되어야 합니다. 이 책은 우리에게 기다리지 말고 지금부터 차근차근 문제를 밝혀나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려주는 듯합니다.
느낀 바가 있으니 바로 실천해야겠습니다. 항상 세척장 일을 끝내고 나면 피부가 좀 벗겨지기도 하고 가려웠습니다. 그동안은 찬물로 씻고 말았는데 새삼 식기세척장에 놓인 세제에 뭐가 섞여 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성분표 사진을 찍어놓고 병원에 한 번 가볼까 합니다. 어떻게 오셨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운을 떼야겠습니다.
“저 식기세척장에서 일하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