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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데리치 대 마르크스 Federici versus Marx

- 질 도브 Gilles Dauvé -



번역 : 정강산 | 망원사회과학연구실



[번역자 소개글]

마르크스는 <자본> 1권에서 “자본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온몸의 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쏟으며 태어났다”는 유명한 표현으로 자본의 시초축적Primitive Accumulation of Capital(논자에 따라 ‘원시축적’, ‘본원적 축적’으로 번역되기도 한다)의 단계를 설명한 바 있다. 이때 그가 “피”와 “오물”이라는 수사적 표현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자본주의가 그 내적 법칙에 의해 자연스럽게 이행해온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피와 오물과도 같은 적나라한 폭력을 통해서 발전되어온 비합리적인 체제이기도 하다는 점일 것이다. 산업적 생산을 통해 본격적으로 전화되기 이전 시초축적이 이뤄지던 시기의 폭력을 강조하는 일의 중요성은 거듭 강조될 필요가 있는데, 이유인즉 자본주의적 문화대혁명이라 할법한 인클로저 운동으로 소농들로부터 토지를 갈취하고 대규모의 무산자를 야기하여, 구빈원을 통해 생산수단을 빼앗긴 이들에게 노동의 규율과 도덕을 강제하고 생산의지가 없는 이들을 처형함으로써 “산업역군”의 형상을 빚어낸 15-18세기말의 자본주의를- 깔끔하게 포장된 상품들이 배열되어 있는 상점의 선반으로부터 추리해내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허나 이는 초기 자본주의에 그치는 문제만은 아니다. 

즉 상품과 화폐의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법칙성을 전 지구적으로 관철시키며 그 논리적 구심, 합리성을 경유하여 전자본주의적인 인격적 예속과 직접적인 지배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킴과 동시에 새로운 예속과 종교를 설립했다는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설명은, 동시에 그것이 항상적인 폭력이 병존할 수밖에 없는 체제라는 지적과 함께 숙고되어야 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양차대전이 자본축적을 위해 시장을 확장하는 국가 간의 경쟁에서 인류역사상 최악이자 최초인 총력전을 수행하도록 유도되었던 전쟁이었고, 극단적인 테러리즘으로 치닫는 이슬람 근본주의와 지금껏 이어지고 있는 아프리카 대륙의 내전이 노골적인 폭력으로 점철된 제국주의적 식민통치의 효과가 아니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세계도처의 인종주의적 갈등과 폭동, 이유를 알 수 없는 살인이 상품의 원활한 세계적 순환 및 이윤 실현의 메커니즘의 부정적인 양태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는데, 이러한 극단적인 폭력은 발리바르로 하여금 반폭력을 관철시킬 시민인륜의 정치의 가능성을 모색하도록 했으며, 조금은 다른 측면에서, 착취가 아닌 강탈과 수탈에 주목하는 이들의 논의와 논리적으로 조응한다.

한편 실비아 페데리치는 그 자신의 저서 <캘리번과 마녀>를 통해, 피와 오물을 뒤집어쓴 자본의 시초축적에 생산과 재생산의 분리와 계층화를 추가하는 논쟁적인 작업을 선보인다. 허나 그의 작업 또한 시초축적에만 해당되진 않고, 외려 자본 축적이 위기에 처하게 될 때 필연적으로 심화되는 문제로서 여성에 대한 폭력을 조명한다. 여기서 페데리치는 자본주의의 역사와 여성억압의 역사를 연결하여 16, 17세기에 걸쳐 유럽 전역에서 자행된 마녀사냥이 여성을 고립된 재생산 영역으로 몰아넣음으로써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의 구축에 큰 역할을 했음을 역설한다. 이와 동시에 검토되는 것은 정치경제적 맥락에서 전유되어온 여성 신체의 위상과, 여성들에게 할당되어온 재생산 영역이 노동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적 착취와 축적의 주된 공간이었음을 논하는 주장이다. 이러한 페데리치의 논의는 70년대부터 불거져 여전히 느슨하게 지속되고 있는- 마르크스주의자들과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벌어진 가사노동논쟁의 연장에서 독해될 수 있다(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정성진, 「가사노동 논쟁의 재발견: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과 페미니즘의 결합 발전을 위하여」, 마르크스주의 연구 10(1), 2013). 

세부적인 쟁점은 논자들마다 다르나, 대강의 논의 구도를 요약하자면, 가사노동논쟁의 쟁점은 가치를 생산하는 사회적 총노동으로 승인된 임노동과 재생산 노동이 동일한 위상을 갖느냐, 재생산 노동이 가치를 산출하느냐의 여부였고, 마르크스주의자들과 페미니스트들은 각각 일관되게 상이한 답변을 제출했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가사노동이 가치를 산출하지 않는다고 보는 반면, 페미니스트들은 가사노동이 가치를 산출한다고 보았는데, 달라 코스타 등 이탈리아 자율주의 계열의 페미니스트들이 주축이 된 “가사 노동에 임금을” 운동은 위와 같이 가사노동논쟁의 결과로부터 도출된 실천이었다. 페데리치 또한 재생산 영역을 기꺼이 ‘노동’으로 호명하며, 그것이 착취의 원천이 된다고 역설한다는 점에서 여느 페미니스트들과 유사한 결론에 다다른다.

허나 정치경제학 비판의 관점에서 이러한 결론은 상당히 문제적일 수 있다. 첫 번째로, 당시의 경제학에 대한 내재적 비판으로 출발한 마르크스의 가치 개념에 혼란을 초래한다. 마르크스에게 가치는 긍정적 의미를 담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에서 착취가 이뤄진다는 점을 암시하는 개념이지만,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재생산 노동이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는 주장을 가사노동을 열등한 것으로 치부하는 주장과 동류로 설정한다. 두 번째로, 한 부문이 임노동의 영역에 포섭되는 것이 지니는 의미는 부분적으로 해방적일 수 있으나 그 자체로 시장을 확장하는 경제영역의 팽창 효과로서 사고되어야 하는데, 위와 같은 접근은 이를 망각할 수 있다. 세 번째로, 재생산 노동이 노동력상품을 재생산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과, 그것이 경제영역에서 승인되고 집계되고 합산되는 총노동은 아니라는 사실은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가치를 생산하지 않지만 동시에 자본주의의 재생산에 가정의 재생산영역이 필수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은 맥락에서 본인은 마르크스주의와 페데리치의 작업(<캘리번과 마녀>)을 대질시키며 페데리치의 논의가 갖고 있는 한계와 아포리아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 정치학자 질 도브Gilles Dauvé의 글을 번역하였다.

물론 이러한 비판을 통해 페데리치의 작업이 가진 문제설정과 그 비판적 함의가 전부 청산될 수는 없다. 페데리치는 분명히, 동시대의 여느 페미니스트들과는 달리 반자본주의 정치와 페미니즘적 정치를 종합적으로 사고하려고 분투하는 명민한 학자이며, 그의 작업은 중요한 쟁점과 사유를 던져주기 때문이다. 다만 그녀의 작업이 지닌 부정성을 정치경제학 비판의 관점에서 조명해볼 필요 역시 있으리라 생각했고, 질 도브의 서평은 이를 잘 수행해주고 있다는 점이 감안되었으면 좋겠다(더불어 이 글을 함께 읽자고 제안해준 친구 나성채에게 감사한다).  




*글의 출처

http://www.troploin.fr/node/85

(이 글은 프랑스어로 ddt21.noblogs.org에 게재된 ‘페데리치 대 마르크스’의 확장된 버전입니다.) 



일러두기: 로스 울프의 노트


Dauve의 글은 캘리번과 마녀의 문제들과 관련된 것이다. 몇 부분-예컨대 "페데리치는 마르크스주의를 페미니즘화 한다. 그리고 그것이 아마 그녀를 유명하게 했을 것이다", " '재생산적 노동'이란 주제는 여성의 이론이 아니라, 단지 가정주부의 이론일 뿐이다"-들은 단지 공격적일 뿐이다. 다른 부분들은 내가 그녀 작업의 핵심에 전체적으로 부적합하다고 느끼는 Carla Lonzi에 대한 첨언처럼, 요점을 빗겨나 있다. 허나 시초축적에 관한 페데리치의 설명과 <자본>에서의 마르크스의 설명의 상반성에 대한 지적은 이들 구별되는 설명들이 드러내는 상이한 우선순위에 대한 지점이기에 매우 중요하다. 그는 심지어 캘리번과 마녀의 더 괴이한 주장들에 관해서도 다소 가볍게 넘어간다. 예를 들어, 그녀가 다루는 기간 중 유럽에선 "5-6백만"이란 완벽히 입증되지 않은 수의 여성들이 마녀사냥 중에 처형당했다는 부분이 그것이다. 어쨌든, 그 비판의 많은 부분은 매우 유효하고, "가사노동에 임금을" 운동("생산적 노동"의 순수하게 경제적 범주에 대한 도덕적 차원에 집착하길 고집했던) 만큼이나 일반적으로 자율주의적 마르크스주의의 아래에 있던 실천의 빈곤과 이론적 오해를 폭로한다.

내가 제시하려는 한 가지 비판은 Dauve가 탈-봉건적 이행기와 세계 "체계"이론에 대한 그녀의 관념 사이의 평행선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시초축적에 대한 페데리치의 설명은 특히 앙드레 군더 프랑크, 사미르 아민, 그리고 이매뉴얼 월러스틴과 연관된 종속이론에 상당부분 빚지고 있다. 이들 이론가들은 새롭게 등장하는 세계적 경제 체계를 중심부-주변부의 관계에서 분석했는데, 이때 과잉 개발된 중심부는 "불평등 교환"의 계속되는 과정에 있는 저개발된 주변부의 희생으로 그 자신의 개발을 지탱한다. 캘리번과 마녀에서, 페데리치는 재생산 영역과 생산영역을, 후자가 전자의 희생으로 이익을 얻는 것으로 간주하며 유사한 주장을 펼친다. 그녀는 그녀의 주장과 세계 체계이론가들의 주장 사이의 유질동상을 쉽게 인정한다. 온건한 Brennerite로서, 나는 자본주의의 형성기 뿐 아니라 현재에까지 내려오는 경제 외부의 강제의 형식들에 관한 그녀의 강조는 상당부분 이와 연관을 갖는다고 본다. 더욱이, 페데리치의 정치적 포지션의 많은 부분은 "공유지"의 이론가들이 종종 걸려드는 공동체주의의 함정들 모두에 빠지는 일종의 제 3세계주의자의 서사에 가까워 보인다.



[본문]


“(..)내가 맹세하고 폐기하는 거친 마법(..)”_윌리엄 셰익스피어, 템피스트(1610) 中


캘리번과 마녀는 중세과 근대 사이의 중요한 시기에서의 사회운동, 자본주의의 발전과 그것의 성적차원, 여성의 처우, 작업 기계로의 남성과 여성의 신체 전환 등에 관해 그 밖의 다른 것들을 따라 우리의 이해에 부정하기 어려운 흥미를 유발한다. 그러나 그 책은 또한 과거와 현재에 대한 하나의 전망을 제시하는데, 이는 그 전망이 포함하는 정치적 관점만큼이나 의문스럽다.(1)


실비아 페데리치에 따른 시초축적


페데리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정통파적 관행에 대항하여"(p.6)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캘리번과 마녀는 주로 맑스의 <자본>- 특히 part.VIII에 대한 보충설명으로서(혹은 몇몇 독자들에겐 대안으로서) 읽힌다. 페데리치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시초축적에 관한 내 설명은 마르크스에겐 부재하나 자본의 축적에 있어 매우 중요했던 일련의 역사적 현상을 다루고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1)여성의 노동과 노동력의 재생산에 대한 여성의 재생산적 기능을 종속시키는, 노동에 관한 새로운 성적 분할의 발달 2)임노동으로부터의 여성의 배제와 남성에 대한 여성의 종속에 기반한 새로운 가부장적 질서의 구축 3)프롤레타리아의 신체의 기계화와, 여성의 경우-새로운 노동자들을 생산하기 위한 기계로의 몸의 변형"(p.11)

특히 역사에서 여성이 배제된 작문의 전통이 있어 왔기 때문에, 우리는 승인된 주인서사에서 놓치는 중이었던 것을 그녀의 작업으로부터 읽을 것이라 기대한다. 문제는 대항-헤게모니적 역사가 우리를 이끄는 곳이 어디냐는 점이다. 페데리치의 경우에, 저자는 단지 마르크스의 격차를 메우고 있지 않다. 시초축적에 관한 그녀의 분석은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구상과 구별될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에 반대되는 것에 그칠 뿐이다. 자본주의의 기원을 이해하기 위해, 그녀는 사회적 집단들, 특히 여성들이 복속되었던 특정한 압력을 강조한다. 그것이 그녀가 목표로 삼는 것이고, 그녀의 접근은 특정한 요소를 우선시하고, 다른 것들은 경시한다.

문제는, 무엇이 역사의 저울을 기울이느냐는 것이다.

17세기에 인도 면직물 제작소에서의 임금은 유럽에서의 가격에 비해 1/7의 비율을 가졌던 것으로 측정 되었다. 동인도 회사는 영국에 인도산 면직물을 다량으로 수입하고 팔았는데, "인도산 면직물 수출의 규모는 영국의 의류산업을 압도할 만큼 위협적이라, 영국의 의류산업은 보호관세를 통해 상업적 안전을 추구했다."(2) 2세기 후 19세기 중엽엔, 세계 전체서 생산된 면상품의 절반이 영국의 북부에서 제조 되었고, 당대의 사람들은 오늘날 사람들이 상해나 센진구역을 방문할 때 그러는 것만큼이나 맨채스터(cottonopolis라는 별칭이 붙은)의 성장에 감동받았었다. 반면, "면 방적공의 뼈대는 인도의 원주민을 창백하게 만드는 중이(었)다".(3)

2세기 동안 무슨 일이 생겼던 것인가? 어떻게 영국 부르주아들은 힘의 균형을 변동시켰을까? 거칠게 말하자면 자국의 노동원가를 낮춤으로써, 동일한 물건을 더욱 싸게 제조함으로써다. 심지어 군사적 영역에서도 유럽인들의 우세는 19세기에만 효과를 볼 수 있었는데 이유인즉 산업혁명과 근대적 임노동 덕택에 더 나은 군대와 무기로부터 서구가 이득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계총의 파괴적 능력은 동력직기의 능력과 함께 이루어진 것이었다. 역사는 단순 평범한 것이 아니지만, 몇 국가들을 상승시킨 추동력은 수백만명을 생산적 노동으로 밀어 넣을 수 있는 그들의 능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대조적으로, 페데리치는 강탈을 주요원인으로 꼽는다. 농부들로부터 그들의 땅을, 주민들로부터 그들의 공동체의 연결을, 여성으로부터 그들의 손재주와 기술을 강탈하는 것은 불충분한 조건이었음에도, 유일하게 부정적인 조건이었고, 필수적인 것이었다는 것이다. 캘리번과 마녀는 근본적인 "압력"기제를 누락함으로써 엉터리가 되었다. 그 역사적 설명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것은 <자본>을 보충하지도, 풍부하게 하지도 않았다. 즉, 그것은 완전히 다른 노선을 향한다. 

왜일까. 페데리치의 시초축적에 관한 전망은 자본주의에 대한 정의, 그러나 마르크스의 정의와는 떨어져있는 세계에 의해 추동되기 때문이다.


페데리치에 따른 자본주의


캘리번과 마녀는 책의 주제를 정확히 요약하는 장점을 가진 훌륭한 세익스피어식 제목이다.(4) 즉, 자본주의는 과거 노예와 여성의 종속에 기초하여 세워졌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에 기초하여 그 자신과 군인들을 계속 영속시켜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페데리치는 양가적인 대상을 마련한다.

그녀의 설정에서는, 노예와 여성은 남성 혹은 여성 노동자보다 더 결정적인 부분을 수행하며, 여성 노동자는 그녀가 직장 혹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것 때문이라기보다 가정에서의 그녀의 역할 때문에 더 필수적인 부분을 수행한다. 노예제와 여성의 종속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은 사실로 기록된 것이 아니다. 노예제는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의 자본주의의 발전에서 없어선 안 될 역할을 수행했으나, 그 중요성은 거대한 규모의 산업화와 함께 크게 감소했고, 산업혁명의 선구자, 노예무역 노예제 자체의 선두였던 당시 영국은 처음엔 노예의 거래를, 나중엔 노예 자체를 폐지하는 주요 국가 중 하나였다. 21세기에도 노예제의 다양한 형태들이 있지만, 그들이 자본주의적 경제에 필수적이었던 것은 오래전의 일이다. 성적불평등에 관해 말하자면, 그것은 확실히 사라지지 않았고, 대다수 "진보된" 국가들에서 감소하는 중이다. 반면 그것은 여전히 여성을 차별하고, 자본주의는 점점 더 그들을 노동현장으로 포섭하며, 전통적으로 남성이 지배했던 교역에 그들을 고용하고, 높은 임원직에 그들을 채용한다. 존재하는 모든 사회적 체계인 자본주의는 최소한의 불평등한 방식으로 성들을 다루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것은 여성을 해방하지 않지만, 여성들의 종속에 대한 기초가 되지도 않는다.(5)

이러한 사실은 페데리치에겐 중요한 것이 아닌데, 이는 그의 분석이 가정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역사적 전환점이 시작점으로 선택되는 데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해 그녀는 생산의 자본주의적 양식의 출현을 중세와 르네상스 사이의 교차로에, 즉 산업혁명 이전에 위치시켜야만 하는데, 이유인즉 그녀가 자본주의의 탄생을, 일의 세계 즉 가치 있는 생산적 노동으로부터의 여성의 배제와 동일시하고, 15세기에서 16세기엔 "재생산" 영역으로, 나중엔 임금이 낮은 일로 여성을 추방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페데리치는 임노동 그 자체에 기초하여 접근하는 게 아니라, 그것의 외부인 것, 즉 작업장 바깥에 자리하고, (그녀에 따르면) 임노동을 가능케 하는 것에 기반 하여 접근한다. 이때 재생산은 키워드가 된다. 실로 적절한 착상이다. 불행히도, 그것이 모든 것을 향해 확장 될 때, 인구 재생산, 자본 재생산, 계급질서 재생산, 그리고 전체 사회의 재생산 간의 구별은 흐려지고 과잉 확장된 개념은 부적절함으로 나아간다.

노동자에 초점을 맞춘 구 마르크스주의는 공장을 강조하는 일에 전념했다. 비록 다른 편견이지만 페데리치 또한 선입견을 지니고 있다. 즉, 초점은 생산에서 아이의 재생산을 의미하는 재생산으로 변화되었다. 필수적인 역할은 이제 여성에게 수여된다. vital은 가장 정확한 단어인데 왜냐하면 여성들은 생명의 수여자이기에 페데리치는 여성이 자본주의에서 주요한 역할을 수행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는 존재다.


“(..)여성은 가장 근본적인 자본주의적 상품의 생산자이자, 재생산자였다. 그 근본적인 상품은 바로 노동력이다.(..)가정에서의 여성의 비지불 노동은 임노동자에 대한 착취에 대한 기둥이었고(..)이는 그 생산성의 비밀을 구축해왔다.”(P.7)


캘리번과 마녀는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에 대한 파격적인 연구로서 유명하나, 모든 페데리치의 조사에 관해 말하자면, 그녀의 설명은 반복된 가정에 기반하고 있다. 독자들은 역사적 자료의 풍부함에 감동받기 때문에, 그들은 저자의 가설을 인정하는 경향이 있다. 즉 두개의 근본적이고 상호 연결된 특징들에 기초한 자본주의에 대한 정의, 바로 강탈과 억압이 그것이다.

인클로져 운동이 수백만의 시골가구들에게서 그들의 생계수단을 박탈하는 동안, 수백만의 여성들은 그들의 손기술과 전통적인 공동체의 지식을 강탈당하고 있었고, 이제는 공식경제라고 불리는 것의 외부로 내몰리고 있었다. 허나, 이 중요한 조건은 자본주의를 정의하진 않는다.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의 기반은 증명할 방법이 없는 전제다. 


"재생산"노동에 관한 이론


캘리번과 마녀는 어떤 이론을 유효하게 하기 위해 쓰여졌다. 저자가 시작부터 명확히 하듯, 초판(1984)은 "시초축적에 관한 마르크스의 분석을 페미니스트의 관점에서 재사유하기 위한 시도였"고, 2판(2004)은 그 범위를 넓혔다. 그 책은 논쟁을 위한 사실들을 이용한다. 페데리치는 왜 캘리번과 마녀에서 귀착된 역사적 작업에 착수하기 시작했는지 설명했다.


“나는 가사노동이 전-자본주의 시대로부터의 유산이나 잔존물이 아니라, 그것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본주의에 의해 구축되었던 특정한 유형의 활동이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역사적일 뿐 아니라 이론적인 기초를 갖길 원했다.(..)가사노동, 가정적인 일, 그리고 우리 전체의 삶을 재생산하는 행위들의 전체적 집합은 사실상 노동의 자본주의적 조직화에 근본적인 일이다. 그것은 식사와 깨끗한 옷들만을 생산하는 게 아니라, 노동력까지 재생산하며, 그러므로 이런 의미에서 자본주의에서 가장 생산적인 일이다. 이런 일이 없이는, 어떤 다른 형태의 생산도 자리를 잡을 수 없었다.(..)그것은 근본적이고, 중추적인 일이다(..)”(6)

“(..)페미니즘적 이론과 투쟁의 가장 중요한 기여중 하나는, 노동에 대한 재정의, 그리고 여성의 비지불 노동을 자본주의적 축적의 주요원천으로서 인지하는 것이다. 가사노동을 개인적 차원의 서비스가 아니라 노동력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일로 재정의 하면서, 페미니스트들은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완전히 무시했던 중요한 착취의 기반을 발견했다.”(7)


이것은 1960년대~ 1980년대의 기간에서 이탈리아 자율주의와 급진 페미니즘의 기념비적 발견 중 하나였고, 1970년대 초 리볼타 페미닐Rivolta Femminile의 선언에 의해 표현되었다. "우리는 비지불되는 가정의 일에서 개인과 자본주의 국가 양자가 생존할 수 있게끔 하는 기여를 확인한다."(8)

이 이론은 급진 페미니즘에 일반적인 교의들 중 하나를 남겼고, 혹독한 시험을 거친 강령이라는 명성을 누리기에, 이에 다른 소리를 내려는 어떤 시도도 많은 서클들로부터 반드시 격한 논쟁을 끈다. 

이는 잉여노동의 개념을 작업장에서 가정으로 확장하기에, 다음의 개괄적인 상기는 도움이 될 것이다. 마르크스는 임금을 받는 이가 그의 노동력에 대한 가치, 다시 말해 노동력의 재생산에 드는 비용을 지불받는다고 주장한다. 허나 이 상품은 상당히 특수하다. 즉, 그것은 하나의 물체가 아니라,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활동적인 능력이다. 일하는 날의 한 부분은 노동자들이 살아가기 위해 필수적인 생계수단들을 재생산 하는 데에 쓰일 것이다. 그 밖의 부분은 노동자가 그의 몫을 벌어들였던 시간 뒤에 올 것이다. 즉 이 부분은 지불되지 않는, 추가적인 것(즉 "잉여노동"이란 개념)이다. 그것은 고용주의 이윤의 원천이다.

(여성의)"재생산노동" 개념의 요점은 가정주부에 의해 수행되는 활동들 속에서 "무상의"노동에 대한 또 다른 원천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 논제에 따르면, (여성에 의해 수행되는) 가정의 일은 노동력의 비용을 낮춘다. 즉, 만약 (남성)노동자가 외식 혹은 미리 포장된 식사를 사야만 하고, 세탁소에 빨래를 하러 가야만하고, 그 밖의 일들을 해야 한다면, 여성이 그를 위해 집에서 요리와 빨래를 하는 경우보다 더 많이 소비하게 될 것이다. 그 여성의 지불받지 않는 활동 덕분에, 고용주는 돈을 절약한다. 즉, 그는 이 일로부터 이익을 얻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남성 임노동자를 유지하고 양육하는 것의 비용을 여성에게 전가하기 때문이다. 그 논제에 있어 가사노동은 자본가들에게 주어진 공짜 선물 같은 것이고, 자본의 물가안정책의 근본적인 영구적 자원들 중 하나이다.

그것은 논리적으로, 자본가들의 부의 "비밀"이 작업장으로 알려진 곳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가정에서 또한 발견된다는 점으로 이어진다. 정신의 도약이 더욱, 또한 거의, 페데리치가 가사노동을 "가장 생산적인", "근본적인", "중추적인" 이라 부르는- 위에서 제시되었던 예들에 적합해진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었다면, 임금은 노동력의 생산비용을 지불하기 때문에, 홀로 사는 남성 노동자는 결혼한 동료들보다 더 많은 비용이 들 것이고, 그는 더 많이 받아야 한다. 사실, 동일한 논리가 독신의 여성노동자에게 적용되고, 그녀의 고용주는 그녀가 가족과 살고 있었을 때 보다 그녀에게 더 많은 임금을 줘야만 할 것이다. 허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많은 남성들이 집에 와서, 두발 펴고 티비를 보는 중에 아내가 저녁을 갖다 주길 기다리는 건 비루하고, 억압적이지만, 가족(제)이 공장 작업장은 아닌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원한다면 무엇이든 노동이라 부를 수 있으나, 자본을 재생산 하는 유일한 일은 기업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다.

게다가, "평등하게 공유되고 있는지(이는 거의 없는 경우다)아닌지, 남편이 그의 아내로부터 이득을 취하는지 아닌지는 자본의 재생산에서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않는다. 남성은 확실히 여성으로부터 이익을 얻지만, 이는 한 기업체의 이윤과 아무런 공통점을 지니지 않는다. 가사노동은 잉여가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며, 그것은 시장에 팔리는 상품을 발생시키지도 않는다.

덧붙여, "재생산적" 노동이론은 짝지어 사는 것이 노동자들의 표준이라 가정하는데, 이 역시 사실이 아니다. 임금노동자의 삶의 방식은 매우 다양하다. 어떤 이들은 가족과 살고, 다른 이들은 독신이며, 그와 또 다른 이들은 커플들이 독신자들과 뒤섞이는 판의 넓은 블록에 거주하고, 누군간 여전히 막사형 기숙사에 거주한다. 전통적인 광부들은 그들의 광산 가까이에 가정생활을 꾸리는 반면, 노천채굴은 고용계약의 기간 때문에 집과 멀리 떨어진, 조립된 숙박설비에 노동자들을 거주하게 한다. 이와 동일한 것이 유전굴착 직원들에게도 적용된다. 수백만의 동양인 남녀들은 중동의 빌딩단지나 서비스 구역에서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그들의 가족을 떠나고, 캠프나 컨테이너 거주지를 만들어야 하거나 그들 고용주의 집에 머물러야 한다.

더욱이, 어떤 관계에도 참여하지 않고 홀로 사는 독신의, 자녀 없는 여성의 경우는 어떤가(이들은 다수가 아니지만, 마찬가지로 중요한 집단이다): 그녀가 수행하는 "재생산적 노동"이란 무엇인가? 엄밀히 말해, "재생산 노동"이란 주제는 여성일반의 이론이 아니라, 단지 가정주부의 이론이다. 

당신이 어느 관점으로 그것을 보든, 여성의 가사노동은 구조적으로 자본에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사실, 엥겔스는 "(가부장)가족 내부에서 남편은 부르주아이고, 아내는 프롤레타리아를 대표한다"(9) 라고 썼다. 이것은 비유를 복잡한 이론으로 전환시키는 증명서가 아님에도, 자율주의 페미니즘은 이로부터 유비추론을 하는 것을 상당히 즐긴다.

페데리치는 가치이론을 베낌으로써 논의를 전개 한다. 즉 그녀에게 잉여가치는 단지 회사의 이익을 위해 행해진 생산적 노동으로부터 나온 결과가 아니라, 또한-그리고 사실 거의- 가사노동으로부터의 결과다. 그것은 모두 결국 생산과 재생산에 의해 의도된 것이 된다. 개념들은 여기서 의미론적 변동을 겪는다. 

"가치 생산은 실로 사실 어떤 특정한 위치의 상품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결정된다.(..)당신은 넓은 사회적 조립라인을 가지며(..)그것은 잉여가치의 생산에 실로 필수적이다.(..)임노동자가 재생산되는 행위들은 그 사회적 조립라인의 일부이다. 즉 그것은 잉여가치를 결정하는 사회적 관계의 부분이다. (이는) 공장 그 자체를 뛰어넘는 하나의 사회적 공장이다.(..)여성에 있어서, 가정은 공장이다; 그것은 어떤 생산의 장소이다.(10)


"(..)자본주의적 사회속의 여성에게 신체는, 공장이 남성 임노동자들에게 그랬듯, 그들의 착취와 저항의 주요한 기반이었다.(..)" (p.15)

이러한 사고방식에서, 재생산은 전부, 그리고 모든 것, 자본, 계급, 인구, 노동력, 부르주아 남성과 여성, 프롤레타리아 남성과 여성, 그 밖의 것들을 포함한다. 여기서 다시 유비를 통해 추론하면서, 페데리치는 정의가 너무 느슨하여 의미가 상실되는 지점까지 개념들을 확장시킨다. 일반적으로 수많은 행위들에 "사회적"이란 말이 붙을 수 있겠지만, 모든 재생산적 행동이 가치를 생성시키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페데리치는 마치 모든 것이 착취였고, 모든 것이 노동이었고, 모든 것이 가치를 생산했던 것처럼 쓰고 있다.

아, 모든 것은 아니다. 페데리치는 하나의 재생산이 그들 모두를 압도한다고 주장한다. 자녀를 낳고 양육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여성은 아이를 생산하고, 그들이 없이는 사회도, 자본주의도 없을 것이기에, "재생산적 노동"이론은 그들에게 다른 투입요소들과 비슷한 것으로 여겨지는 생산적인 역할을 부여한다. 비록 이 이론이 그들에게 사실상 결정적인 역할을 준다 할지라도 말이다.

캘리번과 마녀의 정부의 풍부함은 한 가지 의도에 종사 한다. 즉 개념 속에서 자본주의 체제가 여성의 과거와 현재의 종속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을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그 저서는 ".(..)이제 노동력의 재생산, 가장 중요한 상품의 재생산으로 여겨지는 가사노동"에 초점을 둔다.(11)

이렇게 페데리치는 마르크스주의를 페미니즘화 한다. 그리고 그것이 아마 그녀를 유명하게 했을 것이다.


"가사노동에 임금을": 어떤 정치적 슬로건


만약 한 사회운동이 여성들의 가정활동에 대가를 지불하게 할 만큼 강했다면, 여성 혹은 남성 프롤레타리아들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요구가 관철되는 걸 환영하면서, 우리는 기뻐할 것이다. 허나 "전부가 아니면 그 무엇도 의미 없다"는 원칙은 우리의 정치학이 아니지만, "차악이거나, 차선이거나" 역시 우리의 것은 아니다.

허나, 이 방법의 제안자는 다른 무언가를 기대한다.

그것의 지지자들 몇몇에게, 가사노동에 임금을 지급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급진적인 표어였다. 이탈리아 자율주의자들은 전통적인 "노동계급"과 좁게 정의된 임금 문제를 넘어 모든 피착취집단들을 통합하고 움직이게 할 무언가를 모색하고 있었다. 예컨대 Lotta Feminista가 1973년에 내놓은 것처럼 말이다: "급여를 받는 계급의 한 부분, 급여를 받지 않는 다른 부분이 있다. 이 구별은 급여를 받는 쪽과 그렇지 않은 쪽 간의 힘의 계층화의 기초가 되었고, 계급의 약점의 뿌리가 되었다.(..)"(12)

그래서 "가사노동에 임금을" 활동가들은 모든 피착취자들을 재결합 시키는 것에 목표를 두는데, 왜냐하면 이 표어는 "사람들을 분할 되도록 유지하는 데에 엄청난 힘을 가져온 전체사회의 구조를 해체하기 때문이다.(..)"(13) 노동계급은 자율주의자들이 제시했듯, 충분하지 않다. 다른 실패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여성의 종속에 관해 거의 신경 쓰지 않는다. 따라서 정치학은 포괄적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 "정치적인 임금문제"를 위해 싸우는 것은 실업자, 주부, 학생, 병자 혹은 입원한 환자 역시 고용된 노동자가 으레 그런 것처럼 급여를 받아야함을 요구하는 것과 같다. 자본주의는 오직 그것이 급료지불명부에 올려놓은 소수에게만 삶의 수단들을 주기에, 그러한 요구는 체제의 불합리하고 지리멸렬한 논리를 폭로하도록 의도되었다.

사실, 그 아이디어를 띄운 이들은 결코 그 요구가 충족될 거라 기대하지 않았고, 나아가 그리되는 것을 원하지도 않았다. 외려 그 계획은 자본가들이 그 요구를 이행할 의지도 없고 이행할 수도 없기 때문에 그 요구를 충족시키라는 사회적 압력이 체제를 파열시킬 것이라는 결과를 함께 알리는 인식 운동의 시작이었다. 아르케메데스의 격언을 빌리자면, "아주 긴 장대와 그걸 올릴 수 있는 지레받침만 있다면, 나는 세상을 움직일 수 있다"는 식이었던 것이다. 현재의 경우, 그 장대는 임금을 받지 않는 이들에게 임금을 지급하라는 요구를 모두 포용하는 것이 될 것이고, 사실상 한정되지 않은 프롤레타리아 다수는 지레받침을 제공할 것이다. 허나 역사가 물리학에서와 같은 원리로 작동한다면, 그 추론은 억지가 될 것이다. "비지불 영역에 임금을" 운동은 (넓은 의미에서의)피착취자들에게는 보편적으로 느껴지고 지배자들에게 수락하기 어려운 것으로 간주되는 요구를 혁명가들이 고안할 수 있다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었다. 기적의 해법에 대한 이 질문은 좌파정치학의 상수이기도 하다. 허나 활동가들은 대게 더딘 채로 남아있는 일반인들의 투쟁에 그들의 마법의 구제법을 인위적으로 접목한다. 이탈리아의 사회적 격변은 그와 함께 낡은 강박을 초래했다. 즉, ‘어떻게 피착취자들에게 진보를 향한 압력을 넣을 것인가? 어떻게 역사의 기관차를 낡은 브레이크로부터 자유롭게 할 것인가? 어떤 통일자, 힘의 배율이 그 책략을 시행할 것이다’라는 식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운동이 발생했을 때, 활동가들은 이 날카롭게 논리적인 공식을 현실로 만드는데 실패했다. 여성에 대한 투표, 출생조절, 낙태, 평등한 구직기회와 동일임금 요구와 달리, 초기의 "가사노동에 임금을" 운동은 사실 현실의 투쟁들에 기반하지도 않았고, 실제로 이 주제를 그들의 거점의 주요한 부분으로 선택한 정치적 집단에 의해 여성단체들에 부과되었었다. 

게다가, 차라리 수백만의 사람들이 거리를 점거하고 삶에 충분한 돈을 요구하는 것, 즉 적어도 소위 최저임금만큼 많거나 어쩌면 그 이상을 요구하는 것을 가정하면, 그 수백만의 여성과 남성들은 이미 전부를 위해 돈을 요구하는 단계를 지났을 것이고, 어떻게 돈이 없는 세상을 만들 수 있는지 그들 스스로 묻기 시작했을 것이다.

분기점이었던 1977년 이후, 혁명적인 노력 위에서 사건들이 종료되고 있었다. 활동가들이 종종 그러듯, 실천이 이론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 확실해졌을 때, 그들은 그들의 표어를 계속해서 반복하면서 그들의 전술을 고수하고 성공을 바랐다. "비임금 영역에 임금을 지급하라는" 운동은 과열상태에 빠졌고, 예상대로 미미한 결과를 냈다.

하지만 다른 편의 "가사노동에 임금을"운동의 수호자는, 이 주제를 정치조직들과 미디어에서 토론되는 문제로 만들어 놓았다. 그들은 보다 성공적이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급진주의자 또는 개량주의자의 관점에서, 혹은 양자가 혼합된 관점에서 덜 극단적이었고, 더 단순하게 여성에 초점을 맞췄다. 예를 들어 셀마 재임스Selma James는 수십년간 풀뿌리 조직을 결합하고 활동가들에게 자금을 지원해왔다.(14) 비지불 노동에 대한 공식적인 인정에 찬동하는 그녀의 운동은 정부기구들과 유엔에게 양육자들(여성과 함께 시작하는)이 경제적, 정치적 생활에 필수적이라는 점을 납득시킨다. 그들의 정책에 영향을 주기 위해 그녀가 정책입안자들을 만나는 중에, 그녀의 행위는 여전히 종종 계급의 용어로 표현된다.(15) 허나 그러한 급진적 언사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노력들은 자본주의가 오랫동안 해왔던 것 이상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가족, 아이, 일하지 않는 어머니 혹은 독신 부모에게 지원금을 주는 것 따위의 일들 말이다. 임금체계를 전복시키는 것으로부터 멀어져서, 이들 추가적 이익들은 간접적으로 이제 자본/노동관계의 부분이 된 사회적 임금에 기여한다. 그것의 최신 버전에서, 자본주의는 아이의 육아와 양육을 맡는 이들의 복지를 무시할 수 없고, 그러므로 그것은 이전에 배제된 자들-즉 가정의 여성들-을 그것의 전반적인 재생산 범주 내부에 포함시킨다.

급진좌파 페미니즘은 으레 공장노동자들에 의존하고 작업현장 외부에서 발생하는 일을 무시하는 전통적인(남성지배적인)좌파 정치학과 조합주의에 대한 비판으로서 시작 되었다. 허나 이전에 급진주의였던 것은 이제 단지 노동조합 개혁주의를 보충하고 있을 뿐이다.

그럴듯한 비판을 피하기 위해, 개혁주의는 우리에게 모욕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도록 하자. 셀마 제임스의 경우가 그런 것처럼, 물론 개혁과 혁명 사이의 차이를 못 보지 않는 한, 그것이 존재하는 장소는 인정되어야만 한다는 점은 하나의 현실이다. 캘리번과 마녀는 페데리치 자신의 작업에 대한 주요 영감으로서 고집스레 셀마 제임스를 언급한다. 모든 증거들이 셀마 제임스의 완고한 정치적 결정들의 가장 문제적 측면에 대한 결함을 페데리치가 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우리는 그녀에게 있어 개혁/혁명 사이의 구분이 낡은 것이라는 점을 가정해야만 한다. 


"공유지the commons"의 이론가로서의 실비아 페데리치


캘리번과 마녀는 그 저자가 어떤 의심의 여지도 절대 남기지 않는 어떤 의제의 윤곽을 그린다. 어떤 독자들은 아마 이해가 더뎠을 테지만, 그녀의 정치적 입장은 수년간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유일한 차이는 이제 페데리치가 분명히 "공유지"이론에 대해 자신의 역사적 해석과 지지 사이의 연결을 짓는다는 것이다. 그녀는 천연자원의 사유화에 대한 동시대의 저항운동들을 추적하여 16세기에서 18세기의 인클로저에 의해 붕괴된 과거의 "공유지"에 대한 투쟁에 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자본주의적 근대성의 도래에 의해 그들이 붕괴되기 전의, "여성이 남성에게 맞설 수 있게 하는 여성의 강한 집단성과 연대"의 갱신을 호출한다.(p.24) 페데리치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부상에 의해 좌절되었던 공동의 노력은 이제 더 큰 차원에서, 더 나은 성공의 기회와 함께 지구화에 맞서 반향하고 있다.

캘리번과 마녀의 주요 맥락중 하나는 폭력의 역사적 중요성인데, 페데리치는 마르크스가 그것을 경시했다고 믿는다. 즉, 자본주의에 대한 전환에서 잔인성과 강제력의 사용은 생산력을 조직하는 부르주아의 능력보다 훨씬 중요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폭력자체가 가장 생산적인 힘이 된다"는 것이다.(16)

우리는 외려 폭력이 이 획기적인 변신을 촉진한다고 생각할 충분한 역사적 이유가 있다고 주장하는 게 낫다. 이 논리는 허나 페데리치의 방법론을 거스를 것이다. 그 책의 전문은 인간의 발전이 무엇보다 권력의 문제라는 가정에 기초 한다. 다시 말해, 광범한 다수에 대한 지배하는 소수의 통치 혹은 민중의 협동적인 자기-조직화의 여부가 관건이고, 따라서 사회적 변화는 새로운 권력의 형식과 공간을 창조하거나, 재창조하는 것으로 이뤄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자본주의 체계의 근본적인 특징은 거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즉 그들이 집단적으로 관리되는 한, 화폐, 일, 임금노동은 자연히 변화를 겪고, 착취적이고 억압적이길 그칠 것이라는 말이다. 만약 자본이 강제로서 정의된다면, 우리는 오직 그것을 폐지하기 위해 자유롭게 행동해야만 한다.

그리고 만약 자본이 강탈로서 정의된다면, 세계와 이 공동의 집단적 재전유는 현재 존재하는 것을 변형시키기에 충분할 것이다.(17)

페데리치는 자본주의를 사회에 대한 어떤 외부의 힘으로서 간주하며, 착취를 약탈로 축소시킨다. 이때 자본가들은 공동체를 약탈하는 강도들과 비슷해서, 변화는 공동체가 함께 뭉칠 때 찾아올 것이다. "common"은 단지 ‘사회적’이란 말과 ‘항상 잠재적으로 거기에 있는 어떤 것’의 다른 표현이며, "공유제"는 그것 자체를 다시 회복하고, 자본주의의 마수로부터 탈출하는 사회인 것이다.

우리가 구하려 분투하는 사회가 이미 현재의 사회에 존재한다면, 그것은 그것이 전복되기 전까지 현재의 사회 내부에서 자라날 수 있을까? 양 질문에 대한 페데리치의 대답은 '그렇다'는 것이고, 그것이 캘리번과 마녀가 강조하는 메세지이다. 바로 거기에 개혁과 혁명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유지하는 자들과의 갈림길이 있다. 제니 마르크스는 언젠가 "나는 미봉책을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쓴 바 있다.(18) 제임스와 페데리치는 오늘의 절반의 변화가 내일의 완전한 변화로의 한 걸음이라고 믿는다. 시민사회에 침투하는 것에 대한 그람시의 전략은 현대의 집단 사고가 되었다.

셀마 제임스처럼, 페데리치는 계급에 관해 얘기하지만, 그녀의 견해는 너무나 유연하게 탄력적이라, 그 속에서 프롤레타리아는 더 이상 없고, 단지 그들의 집단적 요구와 스스로 조직된 공동체와 함께 자본주의와 마주하고 있는 60억의 대중들만이 있을 뿐이다. 이 혁명이 진행 중인지 혹은 지금 바로 발생하고 있는지는 묻지 않는 게 좋은데, 왜냐하면 이것은 당신이 여전히 낡은 사고방식에 얽매여 있다는 확실한 신호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페데리치와 같은 "공유지" 이론가들은 진정한 변화는 바로 여기, 바로 지금이라는 것을 믿길 원한다. 그들은 공산주의적 혁명을 대안주의로 대체 한다. 즉 간략히 말해, 아래로부터의 참여적 직접 민주주의에 더해 새롭고 협동적인 무료 소프트웨어와 공유적 경제의 출현과 결합된, 자본주의가 아직 인계하지 않았던 오래된 공동체의 결속의 압력은 점진적으로, 그러나 확실히 자본주의를 압도 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마르크스주의의 비판은 무엇인가? 마르크스의 비판은 무엇인가?


19세기 한 독일의 사회주의자였던 J.Ph.Becker는 <자본>을 "노동계급의 성경"이라 불렀다. (마르크시언들의 생각과 연관되어 있으나 그와는 구별되는)마르크스주의는 부르주아와의 협력(사회민주주의의 변형에서) 또는 그들의 공간에서, 다시 말해 지배계급을 철폐하면서(레닌주의의 변형) 자본주의 내부에서 그 자신을 옹호하는 노동운동의 이론이었다. 현재의 주제에 관해 말하자면, 마르크스주의는 전반적으로 여성을 가장자리로 격하시킨 셈이다. 성은 마르크스의 맹점 중 하나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주의는 물론 소수이나 사회적 현실과 확신들에 도전하기로 완전히 결정했던 일부 노동자들에 의한 노동의 거부의 충격아래 1970년대에 붕괴되었다고 정의된다.(19)

1970년대는 갔지만, 이 이론적 위기의 영향은 여전히 계속해서 파열음을 낸다. 이들은 부조화의 시기이고, 마치 패배 후의 삶처럼 트라우마와 거부로 시달린다. 그 격변은 그들을 대체하기에 충분한 힘이 없는 혁명적 교의의 결과를 드러냈고, 그것은 오직 낡은 믿음 속에서 구멍에 바람을 불 수 있을 뿐이었다.

실비아 페데리치는 이러한 결과, 특히 마르크스에게서 필연적으로 부족한 것으로부터 떨어져 사는 유사 비평가들의 광범한 배열의 부분이고, 자본의 저자는 시초축적의 중요한 특징을 강조했다: 생산자와 생산수단 사이의 분리가 그것이다. 그는 여성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자연에 대한 합리화와 기계화, 신체의 강탈, 그리고 정신/육체의 이분법, 언어의 역할, 동물(학대)취급, 등등을 저평가한다. 그래서 캘리번과 마녀가 만약 마르크스가 거의 다루지 않은 것을 탐구하는 것이었다면, 사실상 페데리치는 완전히 다른 관점을 다루는 것으로 읽힌다. 허나 전체적 핵심은 과연 그것의 내부적 본질에서만큼 자본주의의 발전에서 주요무대에 여성을 끼워 넣는 것이 과연 적절한지의 여부이다. 단지 마르크스가 기본적인 요소를 무시했다거나, 그들을 주변적인 것으로 남겨놓았다는 것이 그들을 주요한 것으로 만들어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그가 속한 시대의 경계로부터 달아날 수는 없다.

템피스트의 말미에서 프로스페로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나의 책을 익사시킬 것이다". 자본을 뛰어넘는 것에서 논점은 아니지만 우리는 마르크스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가 필요하다.(20)

허나 우리는 페데리치가 그 일에 기여할 것이라 기대할 수 없다. 그녀는 1970년대 이탈리아의 사회적 격변의 가장 약한 표현과 함께한다.(21)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알았던 유일한 공산주의자들의 기획은 리볼타 페미나일Rivolta Femminile의 설립자 중 한 명인 카를라 론지Carla Lonzi가 1970년대에 "재화에 대한 공동적 소유권의 이상"으로 종합했던, 전체적으로 여성(그리고, C.Lonzi가 간파하지 못한 근본적인 지점인 남성)에게 부적합한 것으로서 규명하기에 전부 너무나 쉬웠던 기획이었다.(22) 그들이 노리고 있던 마르크스주의는 그것의 대중화 된 판본, 즉 노동계급은 찬양하고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를 노동자들이 관리하는 경제와 동일시했던 마르크스주의였다.

노동은 두드러진 쟁점이다. 탈-오페라이스모Ex-Operaismo 이론가들은 그것을 탐구할 능력도, 의지도 없다. 그들의 추진력은 거의 40년 전에 고갈되었고, 낡은 불길은 재가 된지 오래다. 마르크스를 재시험하는 것은 21세기에 달려있는 것이다. 헌데 자율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정반대의 길을 간다. 마르크스가 노동에 관해 의도했던 것을 발굴하는 대신, 그들은 여성을 여성노동자로서 승인하는 지점까지 개념을 확장시킨다. 아이를 생산하기 때문에 한 여성은 여성이 아니라 노동자라고 그들은 말한다. 급진적 페미니즘은 한 노동자로서의 여성에 대한 인정을 얻어오고 있는 것에 관해 스스로 자랑스러워한다. 다시 말해, 진정한 한 노동자로서, 즉, (남성)임금노동자와 동등한, 정말로 착취 받는 한 인간존재로서, 그녀가 이제 "혁명적 주체"의 성숙한 구성원이 될 자격을 받은 것처럼. 1970년대에 일반적인 좌파는, ‘금속노동자가 대지의 소금이었으나 그때의 소금은 염분을 잃은 것으로 여겨지니, 어떻게 그것을 다시 짜게 만들까’,라고 말했다.(23) 그것은 신선한 소금층, 다시 말해 더 착취 받는 이들을 추가함으로써다. 그리고 여성은 그 역할에 완벽하게 들어 맞는다. 즉 그들은 학대받으며, 수가 많다. 옛날의 혁명적 주체(노동자 계급)는 너무 작았고, 더 나쁜 것은, 편협하기까지 했다(성차별주의자, 동성애 혐오자, 생산주의자, 등등). 이제 우리는 더 크고 더 넓은 품성을 가진 역사적 행위자를 가질 것이다. 얼마나 간단한가.

그러한 과정에 종사한 이들은 가장 앞서보고 있는 프롤레타리아들이 착수하려 시도했던 실제적인 돌파구에서 등을 돌리고 있었다. 노동의 거부와 일상적 삶의 비판은 마르크스주의에 의해 주창된 "연합한 생산자들"의 공동체를 유발하지 못할 혁명을 가리킨다. 실제적으로 꽤 흐릿하게 남아있을 수 있던 것, 허나 그것은 적어도 부정적인 방식으로 인식되었다. 노동자 운동은 단지 그것이 대게 보수적이고 때때론 반-혁명적(실제로 그랬다)이었기 때문에 거부되었던 게 아니라, 그 미래의 세계가 노동자들의 세계가 될 수 없었기 때문에 거부되었던 것이다. 반대로 페데리치와 같은 페미니스트를 포함한 실로 소수의 자율주의자들은 공장과 사무실에 고용된 저들보다 더 많은 범주들을 포함시키기 위해 학령아동에서부터 정신병자, 물론 가장 큰 범주인 여성에까지 노동자 운동을 확장시키는 것에 대한 가능성을 기대했다. 달리말해, 당대의 문제가 노동운동의 너머로 가는 방법이었을 때, 그들은 노동운동을 확장시키고 있었다. 혁명의 인력이 혁명가들의 첫 번째 쟁점이 될 때, 그것은 언제나 그들이 길을 잃고 가는 중이라는 명백한 신호이다.

페데리치의 실패는 그녀의 것만은 아니다. 즉 그들은 최후의 프롤레타리아의 흐름의 한계를 표현한다. 슬프게도, 정책들과 정치적 기획들로 재구축 되었을 때, 역사적 부적합성은 장애물로 굳어진다. 마치 노동자의 지위를 모든 이들에게 확장시키는 것이 전체 체계를 산산이 날려버릴 수 있다는 듯, 노동에 대한 비판 대신 우리는 그것의 보편화를 얻는다. 공장에 대한 비판에 착수할 실천의 무능력은 이론상으로 ‘가정에까지 확장되는 공장’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1970년대의 급진주의자들은 그들의 시기에 발생하고 있었던 조건의 경계 내부에서 행위하고 생각하길 강요받았고, 실비아 페데리치의 현재의 인기는 이 시기가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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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lles Dauve

2015년 11월


각주

(1) Autonomedia, 2009 (초판 2004). 본 에세이에서 쪽수 표기는 2009년 판을 따른다.

(2) J. Darwin, After Tamerlan. The Rise & Fall of Global Empire 1400-2000, Bloomsbury Press, 2008, p. 154.

(3) Marx, quoting the Governor-General of India in his 1834-45 Report, Capital, vol. I, chap. 15, § 5.

(4) "자유로운 캘리번"이 거리 벽에 그려지는 경우도 있지만, 그의 어머니인 "빌어먹을 마녀 시코랙스"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다. 흥미롭게도 2010 년에 촬영된 줄리에 테르모Julie Taymor의, 젠더적으로 현명한 <The Tempest>은 공작이자 마술사인 프로스페로우를 헬런 미렌Helen Mirren이 연기 한 여성 프로스페라Prospera로 변모시킨다.

(5)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조만간 “여성 문제”에 관한 에세이를 출판하려 한다.

(6) The Making of Capitalist Patriarchy: Interview with S. Federici, December 2013, Black Sheep. A Socialist Podcast.

(7) S. Federici, Precarious Labor and Reproductive Work (2010), excerpt from “Precarious labor: A feminist viewpoint”, a 2006 lecture. 이는 "돌봄 노동 아카이브"사이트에 "보호자- 즉 따라서 계급에 대한 힘"이라는 제목으로 나와 있다. 이는 모든 걸 말해준다. 말하자면 계급은 간병을 담당하는 모든 사람들(즉 여성들)로 구성되는 것을 의미한다.

(8) Full text on columbia.edu site.

(9) Origins of the Family, Private Property & the State, 1884, Chap. II, Part 4. The idea originated with the early socialist and feminist Flora Tristan (1803-44).

(10)Interview in Black Sheep.

(11) S. Federici, Precarious Labor and Reproductive Work (2010).

(12) Quoted by G.Katsiaficas, The Subversion of Politics: European Social movements & the Decolonization of Everyday Life, Chap. 2, eroseffect.com.

(13)Interview in Black Sheep. 

(14) 페데리치가 설명하듯, <캘리번과 마녀>는 델라 코스타M.Della Costa와 제임스의 <여성 그리고 공동체의 파괴>(1972), <섹스, 인종, 계급>(1975)에 기대고 있다. 21세기 급진주의의 마법의 트립틱tryptic인 “젠더 더하기 계급 더하기 인종”은 이미 40년 전에 있었던 것이다.

(15)S. James, interview in The Guardian, April 25, 2012.

(16) Caliban & the Witch, p. 16. 여기서 다시 그 개념이 과도한 의미로 드러난다. 페데리치는 이렇게 주장한다. 여성은 최고의 생산력인데, 이는 어머니이자 양육자로서의 그들의 역할 때문이다. 여기서 폭력은 본질적인 생산력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폭력은 체계에 비해 동등하게 중요한가 혹은 더욱 중요한가? 유사한 정신적 혼란이 계급 개념을 둘러싼다. 즉 우리는 여성이 착취 받는 계급의 부분인지 혹은 착취하는 계급의 부분인지 모르며, “ ‘여성의 역사’는 ‘계급의 역사’ ”이기에, 젠더는 우리가 말하듯 “계급관계의 구체화로 다뤄져야만 한다”(p. 14)는 것이다. 이제 구체화가 의미하는 것을 이해하는 일은 독자에게 달려있다. 결국 지적인 변동shift들이 이 책을 구성하는 재료인 것이다.

(17)S. Federici, “Feminism & the Politics of the Common in an Era of Primitive Accumulation”, 2010 article, in Revolution at Point Zero: Housework, Reproduction & Feminist Struggle, PM Press, 2012. 

(18)Letter to Louise Weydemeyer, March 11, 1861.

(19) Red Notes, Italy 1977-78: Living with an Earthquake (highly recommended). Also Robert Lumley, States of Emergency: Cultures of Revolt in Italy from 1968 to 1978. Both readable on libcom.

(20)A contribution to such a critique: Value, Labour Time & Communism: Re-Reading Marx, on this site (a chapter of Eclipse & Re-Emergence of the Communist Movement, PM Press, 2014). 더 자세한 분석에 대해서는 2016년에 출판될 Bruno Astarian & G. Dauvé’의 Everything Must Go ! Abolish Value를 참조. 말할 것도 없이, 진정한 돌파구는 말 이상의 의미를 필요로 한다.

(21) Regrettably and perhaps inevitably, this is the case with other Italian Autonomia ex- luminaries, Toni Negri for example, who grew out of extremism to moderate politics, the school’s naughty boy turned teacher. As the Italian class and daily life offensive went quite deep, its opposed reformist tendencies naturally also developed, especially with the ebbing of the wave. Far-left leaders are quite good at de-radicalising themselves. 유감스럽지만 이는 아마도 명백히 다른 이탈리아 자율주의자 안토니오 네그리와 같은 유명인사의 경우이기도 할 텐데, 그는 정치학을 온건화하기 위해 극단론으로 성장한, 교사가 된 학교의 장난꾸러기 소년과도 같다. 이탈리아 계급과 일상 생활 공세가 상당히 깊어짐에 따라, 특히 1970년대 그 운동의 쇠퇴와 함께 반대로 개혁 주의적 성향도 자연스럽게 발전했다. 좌파 지도자들은 스스로 근본적으로 자신을 탈-급진화하는 데 능숙하다.

(22)Let’s Spit on Hegel (blogue.nt2.uqam.ca/hit/files/2012/12/Lets-Spit-on-Hegel-Carla-Lonzi.pdf). C. Lonzi는 여성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의 폄하를 플라톤에서 헤겔을 거쳐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불가피한 그람시(파네쿠크Pannekoek와 보르디가Bordiga를 무시한 사람들에 관한 공산주의 표준 이론의 명백히 극단적 인 것)까지 이어지는 사고방식으로 거슬러 올라가 추적한다.

(23) Matthew, 5 : 13. More religious undercurrent flows under political attitudes than meets the e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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