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두기] 본 원고는 2022년 8월 15일 《텍스트 뷔페》에서 전시했던 글을 일부 수정했습니다. 『도서관 환상들』 내 본문 페이지 출처는 대괄호 안에 표기했습니다.
4. 체계
“책의 처음과 끝이 일직선으로 연결돼있다고 상정하는 ‘성공’은 책을 평가하는 알맞은 기준이 아니라고 본다. 책은 선형적으로 만들어지지도, 경험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각주:1]
『도서관 환상들』은 순서대로 읽히기를 거부한다. 물론 책을 읽는 방식은 독자의 자유다. 그러나 이 책을 기존의 방식대로 읽는다면 외려 더 난해하게 느껴진다. 왼쪽과 오른쪽 페이지가 펼침면으로 연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책은 서문에서 왼쪽 다음 오른쪽 페이지로 이어지지만 이후 왼쪽과 오른쪽 페이지는 독립되어 왼쪽에는 인터뷰나 〈스캔옵스〉 이미지가, 오른쪽에는 에세이가 위치한다. 그러다 비주얼 에세이 부분에서 마주보는 페이지는 다시 연속되고 비주얼 에세이가 끝나면 다시 떨어진다. 그래도 양쪽 페이지가 각자 독립되는 구성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기에, 왼쪽 페이지를 먼저 읽는다면 눈이 오른쪽 페이지로 가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하면서 페이지를 넘겨야 한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왼쪽으로 두어야 이어지는 내용을 읽을 수 있다. 책의 문법에 익숙한 독자일수록 왼쪽 페이지를 읽고는 자연스럽게 오른쪽 페이지로 눈이 가게 된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는 보수적이고 완고하게 행동할수록 가장 급진적이고 실험하는 독자가 된다.
책을 읽으면서 왜 왼쪽 다음에 오른쪽 페이지를 읽어야 하는지 묻는 사람은 없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응당 그래야 하는 관행이다. 관행은 질문을 받지 않는다. 어떤 관행은 너무나 익숙하여 순수하게까지 느껴진다. 아나소피는 제럴딘 후아레스의 말을 인용해 순수를 가장하는 식민화를 폭로한다. “정보를 조직하는 일은 결코 순수할 수 없다. (…) 순전한 무력 침략이 아니고서야 모든 식민화는 반드시 아카이브 작업을 수반한다.”[p.9] 여기서 ‘아카이브’는 단순한 정보의 모음이 아닌 체계화한 정보의 모음이다. 정보 이용자는 체계화된 정보를 전달받는 것이고 그렇기에 언제나 만들어진 체계 아래 종속된다.
그렇다면 아무리 다른 체계를 만들어도, 독자가 만들어진 체계 속에 갇히게 되는 것은 마찬가지 아닐까? 이 책에서 왼쪽과 오른쪽 페이지가 독립적으로 진행된다는 규칙은 서문 이후 목차부터 71페이지까지 지속되다가 갑자기 끊어진다. 비주얼 에세이가 끼어들며 규칙이 깨지기 전 마지막 페이지인 71페이지 하단에는 화살표와 함께 “121쪽으로 이어집니다”라는 지시문이 보인다. 이를 따르지 않을 경우 독서 흐름이 끊기기에 반항심 없는 독자라면 기꺼이 지시문을 따르게 된다. 분명 이러한 지시문은 독서 행위에 체계를 부여하고 독자가 체계를 따르도록 명령한다. 그러나 기존 독서 행위와 다른 행위를 하도록 체계를 만드는 일은 독자에게 기존과 다른 방법의 독서가 가능함을 암시한다. 독자는 다양한 체계를 경험하면서 관행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체계를 상상하게 된다.
5. 형식·개념 체계로서 디자인
“텍스트와 이미지를 어떻게 연결할지 고민하는 일 역시 일종의 번역이자 큐레이팅이다. (…) 그러나 최근 50–60년 사이 학술서는 흰 종이 위에 검은 글자가 찍힌 책이라는 기본 형식으로 획일화되고 말았다. 많은 인문학자가 자기 책의 내용에만 신경을 쓰지 형식에는 관심이 없다. 우리는 책을 생각을 담은 하나의 사물로 보고 인문학계에 시각성을 다시 소개하고자 했다. 부록에 이미지 몇 장 끼워 넣는 관행을 벗어난 시도를 통해서 말이다.” [각주:2]
텍스트와 이미지의 연결방식을 고민하고 인문학계에 시각성을 소개하려는 철학자 조아나 질린스카의 태도는 디자인 행위와 목적을 단적으로 설명한다. 형식에 관한 그의 주장은 디자이너 입장에서 대체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이지만, 다음의 말은 그가 이성과 감각, 개념과 물질의 이분법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게 아닌지 의구심이 들게 한다. 그는 책의 디자인을 개념과 분리한다. “(…) 그래야만 디자인뿐만 아니라 개념 차원에서도 혁신이 이뤄질 수 있다. 여러분이 정말 실험하려는 것은 단순히 책의 레이아웃이나 폰트가 아니라 그 이상의 무엇이 아닌가?[p.150]” 여기서 나는 그가 디자인을 작고 사소한 하위 요소로, 개념을 크고 중요한 상위 요소로 간주함을 발견한다. 이는 텍스트와 이미지의 관계를 고민하는 일이 번역이자 큐레이팅이라는 그의 말과 모순된다.
그런 점에서 『도서관 환상들』의 디자인은 형식과 개념(내용)을 나누는 이분법에 저항한다. 독자의 시선에서 편집저작물의 디자인과 편집을 구별하기 쉽지 않지만, 내지를 원서와 비교해보면 원서의 인상을 유지하려는 의도가 느껴진다. 인터뷰가 등장하는 왼쪽 페이지가 2단, 에세이가 자리하는 오른쪽 페이지가 1단으로 짜여 있는 점, 그리고 각각 왼쪽에 산세리프, 오른쪽에 세리프 글꼴을 사용한 점이 원서와 유사하다. 그러나 소개 글과 대화가 각각 1단과 2단인 원서와 달리, 번역서는 소개 글과 대화 모두 2단으로 통일했다. 두 개의 열이 흐르는 인터뷰는 한 개의 열로 구성된 에세이와 극명한 시각적 대비를 이룬다. 인터뷰 소개 글의 위계를 대화에 참여하는 한 명의 화자로 만듦으로써 2단 구성은 인터뷰 저자보다 구성원으로서의 성격을 강화하고 화자의 복수성을 드러낸다.
이번에는 글꼴을 살펴보자. 책의 오른편 에세이에 사용된 부리 글꼴(명조체)의 이름은 〈최정호체〉다. 최정호는 오늘날 한글 글꼴 디자인에 큰 영향을 준 1세대 디자이너다. 지금까지 많은 글꼴이 최정호의 원도를 참고했다. 그중 최정호체는 그의 마지막 원도를 바탕으로 하며 올드스타일과 유사한 영문 글꼴과 한 벌로 제작된 글꼴이다.[각주:3] 다른 한편, 책의 왼쪽 페이지에 사용된 민부리 글꼴(고딕체)은 〈지백〉이다. 지백 또한 최정호의 보진재 고딕을 본으로 했으나 원도가 아닌 인쇄된 지면을 참고한 결과물이다.[각주:4] 두 글꼴 모두 과거를 오늘날의 관점으로 해석한 결과다. 이때 디자인적 해석은 일종의 환상이다. 종이에 그려진 원도나 인쇄된 지면으로부터 글자를 디지털화하는 과정에서 형태는 오늘날 디자이너의 의도에 따라 다듬어진다. 이때 디자이너는 체계의 근원을 찾아 과거로 돌아가며, 체계와 체계 사이 여백에서 앞으로 올 형태를 상상한다.
그런데 지백과 최정호체 모두 최정호가 그린 자형을 참고했다면, 왜 어느 것은 “최정호체”라 부르고 다른 것은 그렇게 부르지 않는가? 물론 두 서체 모두 과거의 유산을 오늘날 디자이너가 재해석한 결과물임은 분명하다. 원도가 존재한다는 이유로 디자이너의 해석이 덜하거나 더하다는 판단 또한, 디자이너의 해석을 임의로 수치화하는 일일 뿐이다. 그러나 한 단어가 문장 속 다른 단어와 관계를 맺으며 새로운 의미를 갖듯 두 요소가 등장한다면 둘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발생한다.
글꼴 이름은 작품의 제목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 글꼴 이름은 글꼴이 지향하는 바를 간접적으로 나타낸다. 최정호체가 특이한 점은 글꼴을 만든 디자이너의 이름이 아닌 재료가 되는 원도의 저자를 밝힌다는 점이다. 이때 원도의 저자는 현재 국내 디자인계에서 글꼴 디자인 여사에 권위 있는 인물로 평가받는 최정호다. 최정호체는 글꼴을 새롭게 해석한 디자이너가 아닌 원도의 저자를 글꼴 이름으로 사용함으로써, 과거와 현재를 엮는 동시에 과거에 방점을 찍는다. 해석보다 전통을 강조하려는 의도는 한 벌로 제작된 올드 스타일 로만의 형태로도 짐작할 수 있다.
반면에 지백이라는 이름은 대다수 글꼴 이름과 다른 성격을 보여준다. 글꼴은 보통 흰 종이에 검은 글자로 인쇄된다. 독자에게 흰 공간은 후경으로, 검은 글자는 전경으로 인식된다. 물론 글자를 그릴 때 디자이너는 글자의 흰 공간을 검은 공간만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글꼴 이름은 대체로 검은 공간이 차지하는 형태를 따른다. 글꼴 이름 몇 가지만 떠올려봐도 형태든 디자이너 이름이든 배경이 되는 시대나 장소든 검은 공간을 생각하며 지은 이름이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때 “종이 본연의 백색”이라는 지백의 의미를 다시 떠올려보면 자기를 드러내기보다 자기가 엮이는 공간, 즉 다른 존재와의 필연적 엮임을 상정하고 있음에 감탄하게 된다. 저자의 자리를 엮은이로 채우는 이 책의 표지가 지백의 겸허함을 헤아리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도서관 환상들』의 디자인은 글꼴에 담긴 역사와 의미를 통해 형식과 개념의 번역을 동시에 시도한다. 최정호체를 부리 글꼴로, 지백을 민부리 글꼴로 사용한 디자인은 원서의 산세리프 로만을 민부리 국문으로, 세리프 로만을 부리 국문으로 치환한 기계적인 결과가 아니다. 미래의 도서관을 꿈꾸며 과거의 도서관으로 돌아가는 『도서관 환상들』의 형식·개념 체계를 파악하고 이를 디자인으로 소환해 디자인에서 형식·개념 체계를 동시에 재구축한 결과다. 형식 체계는 개념 체계와 분리할 수 없게 되고, 디자인은 책의 지향을 향해 나아간다.
6. 공간으로서 디자인
“책이 장소라면 페이지는 일종의 전시장”[각주:5]이라는 아나소피의 말을 듣고 표지의 거친 표면을 손으로 쓸어보면 하얀 페인트로 칠해진 전시장 벽이 떠오른다. 전시장으로 치면 책 표지는 전시장 입구쯤 될까. 중앙 정렬된 목차는 ‘도서관’과 ‘환상들’이라는 제목을 지면 양 끝으로 밀어내고 책을 열기도 전에 책이 꿈꾸는 환상들을 열어 보인다. 책장을 넘기면 특이하게도 반표제지부터 페이지 번호가 시작된다. 표지에 민부리 글꼴(고딕)이 쓰인 것과 달리, 반표제지에는 부리 글꼴(명조)로 위쪽에 ‘1’이라는 페이지 번호와 ‘도서관 환상들’이라는 제목이 본문이 시작하는 지점에 본문의 위계로 쓰여 있다. 사실 이 공간은 공간(空間)이 아니다. 다시 말해 여백은 비어 있지 않은, 공간 아닌 공간이다.
‘fantasy’의 어원인 그리스어 φαντασία는 ‘상상, 이미지’를 뜻한다. 환상(fantasy)의 영역인 공간은 숫자로 매겨질 수 없다. 이 책에서는 ‘공간’과 ‘장소’를 페이지 번호로 구분한다. 숫자는 순서를 매겨 질서를 만들고 동선을 안내한다. 이미지가 끼어드는 페이지인 〈스캔옵스〉와 비주얼 에세이에는 페이지 번호가 등장하지 않는다. 디자이너에게 이 책에서 모든 이미지는 이성의 틈새를 파고드는 환상(fantasy)인 셈이다. “공간은 본디 장소로부터 빠져나가는 혹은 열리는 것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지금 여기’를 빠져나가 ‘다음 거기’에서 열리지 않는 것은 공간이 아니다. 집처럼 우리를 안온케 하는, 구체적으로 규정지어져 질서 잡힌 ‘장소’와 달리, ‘공간’은 무한하고 추상적이어서 규정할 수 없다.”고 건축 비평가 이종건은 말한다.[각주:6] 이러한 의미에서 이 책은 장소보다 공간에 가깝다. 일직선으로 읽히기 거부하는 이 책은 파편으로 지각되며 전체를 파악하기 힘들다. ‘책’이라는 오랜 매체는 지금까지 많은 시도를 해왔다. 단순히 왼쪽과 오른쪽 페이지가 나란히 이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서로 다른 레이아웃과 글꼴이 쓰였다고 해서, 반표제지부터 페이지 번호가 시작하고 이미지가 등장하는 페이지에는 페이지 번호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 책이 실험적인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은 구성을 이 책에서 처음 본다면 생소할 수는 있겠지만 모두 이전에 시도된 형식일 뿐이다.
그러나 이 책에는 새로운 시도가 있다. 그 시도는 페이지 번호로도, 왼쪽과 오른쪽 페이지로도, 민부리와 부리 글꼴로도, 화자의 복수성과 단일성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체계 실험이다. 일관된 형식으로 전개되는 듯 보이던 페이지 번호는 반표제지와 심지어 판권면에까지 적용되지만 비주얼 에세이인 「리딩 룸 리딩 머신」에 이르기 전부터 등장하지 않는다. 「리딩 룸 리딩 머신」은 73(오른쪽) 페이지부터 시작되는데, 왼쪽 페이지가 번호 없는 백면으로 비워져 있다. 이 책에서 페이지 번호가 없는 백면이 등장함은 꽤 이상한 일이다. 컨트리뷰터가 등장하기 전인 164페이지도 마찬가지로 백면인데 번호가 매겨져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책이 여백을 빈 공간이 아닌 채워진 공간으로 생각했다면 이 면에 반드시 페이지 번호가 있어야 한다. 아니라면 그전에 「리딩 룸 리딩 머신」에 민부리 글꼴이 사용되므로 책의 다른 체계처럼 왼쪽 페이지부터 시작되어 이 에세이의 페이지 번호가 72로 표기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다시 15페이지의 목차에서 「리딩 룸 리딩 머신」의 위치가 왼쪽으로 옮겨 가야 할 것이고, 부리 글꼴이 아닌 민부리 글꼴로 수정되어야 한다. 이는 화자의 단일성과 복수성 문제로도 생각할 수 없는데 컨트리뷰터 파트가 목차의 오른쪽 페이지에 부리 글꼴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체계처럼 보였던 요소가 체계로 설명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다시 질문하게 됐다. 나는 디자인이 하나의 목표를 위해 체계를 만드는 행위라 믿었고 이 글을 쓰면서 믿음을 수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통일된 체계로 이 책을 설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로 표지를 덮어야 했다. 그러자 처음에 단순히 전시장 벽처럼 보였던 종이가 다르게 느껴졌다. 알 수 없는 체계가 믿었던 모든 것을 다시 의심하게 했다. 그때 거칠고 빳빳한 표지는 독자를 환상으로 호출한다. 표지에 빛나는 틈을 낸 적박은 마치 양피지 살갗을 긁어내 붉은 잉크로 채우던 중세 코덱스의 주서를 닮았다.[각주:7]그러고 보니 페이지 번호 반대편 빗금 친 네모들이 같은 모양임을 깨닫는다. 양 끝으로 멀어진 도서관과 환상들은 이 책에서 구별할 수 있는 개념일까? 디자인은 정말 체계를 만드는 행위일까? 그러고 보면 책과 도서관에 대한 이 책의 관계는 메타적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주석일 뿐이다. 그런데 이 책이 도서관에 꽂히는 모습을 상상하면 이 책과 도서관의 관계는 계속해서 반전된다. 책이 도서관을 담는 걸까, 도서관이 책을 담는 걸까?
책이 장소라는 아나소피 스프링어의 말 또한 이 책에 적용되지는 않는다. 이 책은 장소가 아닌 공간이다. 계속해서 움직임을 촉발하고 다른 지평을 열어내는 공간이다.[각주:8] 완벽하고 단순한 하나의 체계로 이 책을 설명하는 일은 나에게 불가능하다. 아비 바르부르크가 연상작용을 추구하며 장서를 “옮기고 또 옮기”듯[p.65]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해 페이지를 계속해서 옮겨 다녔다. 그럼에도 이 글은 결론과 마무리가 불가능한 채 계속해서 옮겨 다녀야 할 운명이다. 이 책의 체계를 찾으려는 사람은 누구든 닫히지 않는 체계로 인해 끝없이 움직여야 한다. 나는 다만 이 책이 요소들의 엮음, 체계들의 엮음이라고만 말할 수 있다. 단일한 체계가 아닌. 여러 체계의 엮음. 그저 하나와 다른 하나와 또 다른 하나와 같은 하나들이 있고 그들이 열린 공간에서 서로 엮여있다고. 그러나 그 엮음의 체계를 설명할 수 없기에 이 설명은 또 한 번 실패한다. 나는 이 책을 무엇의 엮음인지 모를 엮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무엇을 완벽하게 정의하거나 설명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정의하려는 시도 속에서 말은 말의 꼬리를 물고 사라진다. “디자인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역시 반드시 실패할 것임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무엇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은 생각을 시작하려는 물음이다. 아름다움을 정의하려는 시도가 미학에서 실패가 아닌 복수의 답이듯, 양자역학의 등장에도 물리학이 상대성이론을 폐기하지 않듯, 디자인을 정의하는 불가능성에 주석을 다는 일은 디자인을 풍요롭게 할 뿐이다. 이제 우리는 질문을 희구한다. 질문하는 이유는 질문을 시작하기 위함이며 다시 질문하기 위함이다. 글자와 글자, 글줄과 글줄, 책과 책이 엮인 사이사이에서 환상이 피어난다. 불안한 공간이 우리에게 묻는다. 무엇이 불가능한가? 그제야 우리는 미래를 환상하여(喚想) 과거를 환상한다(幻想).
조아나 질린스카, 「인류세 시대, 책의 윤리」, 『도서관 환상들』, p.152 [본문으로]
“〈최정호체〉는 한글 디자이너 최정호가 설계한 부리 계열의 글꼴로, 1988년 안상수의 의뢰를 받아 설계한 그의 마지막 원도이다. 당시에는 이 글꼴의 이름이 지어지지 않았지만, 수많은 글꼴을 설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을 딴 글꼴이 없어, 마지막 작업인 이 글꼴의 이름을 〈최정호체〉라 지었다.” 노민지, 정하린, 요아힘 뮬러 랑세, 『최정호체 글꼴보기집』, 안그라픽스, 2017, p.6 [본문으로]
“붉은 잉크는 저작 전체나 장의 표제에 썼다. 오늘날 난이나 항목을 나타내는 뤼브리크(rubrique), 즉 주서라는 말은 라틴어로 붉은 색을 나타내는 루베르(ruber)에서 온 것으로, 이처럼 표제를 붉은 글씨로 쓰던 관행에서 생겨났다. ‘차례’라는 것이 아직 없던 시절에 주서는 독자들이 특정한 대목을 좀더 쉽게 찾도록 도와주었다.” 소피 카사뉴-브루케, 『세상은 한 권의 책이었다』, 2013, p.27 [본문으로]
“무한하고 추상적이지 않은 것은 공간이라 할 수 없다. 바로 그러한 까닭에 공간이란, 우리의 모든 움직임을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지평이 끊임없이 열리는 카오스라 할 수 있다. ‘지금 여기’를 초월하는 공간은 그리우면서도 두렵다” 이종건, 『시적 공간』, 궁리, 2016, p.21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