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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에게 임금을』은 연구공간L 번역모임의 성과물로, 우리 모두는 학교노동 과정에서 가치를 생산하고 있으면서도 높게 치솟는 등록금을 지불하고 있는 대학생들이다. 우리는 이 글을 번역하면서 우리 자신들이 거쳐왔으며 현재도 행하고 있는 대학입시-공부와 대학에서의 학점따기의 활동이 개인의 차원을 넘어 모두에게 강제로 부과되는 노동활동이면서도 우리 자신의 연대와 연합을 방해하는 경쟁적 활동이 되어있다는 것에 큰 인상을 받았다. 지금도 전국의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은 입시, 내신, 학점을 둘러싸고 서로를 싸워서 이겨야할 적으로 인식하면서 고통스런 자본의 경쟁적 질서에 자신도 모르게 순종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공부-노동자로서 임금을 받기는커녕 도리어 (우리 부모와 우리 자신을) 빚쟁이로 만드는 저 등록금 체제에 우리가 종속되어 있음을 알림과 동시에, 우리 모두가 그러한 동일한 교육체제 안에서 착취되고 있다는 공통조건을 제시함으로써 우리들의 연대를 위한 하나의 근거를 제시하고자 한다.
이 글은 2015년 서문, 1975년 팸플릿, 2013년의 토론회로 구성되어있다.
서문에서는 역사적 흐름과 함께 신자유주의의 여파로 인해 대학이 공공재에서 기업으로 변화해 학생들에게 등록금을 받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서술하고 있다. 이 시기 은행과 정부는 학생의 부불노동으로 자본을 축적했고, 현재는 대학을 서열화하면서 학생들을 대학쇼핑객으로 만들었다. 이에 반발한 학생들이 1975년 팸플릿을 작성했다. 팸플릿은 우리가 투자로 착각했던 교육이 실은 강제된 훈육이었음을 알리고 좌파마저 학교노동이 부불노동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본의 통제를 감지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이 때문에 좌파는 노동계급을 합리화하고 노동을 강화하고자 하는 자본의 편에 서게 된다고 주장한다. 다시 2013년으로 돌아와서, 토론회에서는 팸플릿이 부불노동과 현재까지도 진행되고 있는 신자유주의 흐름과 관련해 학생에게 임금이 지급된다면 사회 전반(의료, 가사노동, 복지, 계급갈등에 있어서)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논의한다. 부디 이 책이 한국에도 ‘학생에게 임금을’ 그룹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학생에게 임금을 번역자 일동

『학생에게 임금을』(1/5)

조지 카펜치스, 몬티 닐, 존 윌셔-카레라
/ 연구공간 L 연구자 박채원, 왕세종, 노지현, 이민주 번역

2015년판 서문


『학생에게 임금을』은 1975년 가을에 세 명의 활동가에 의해 익명으로 출판되었다. 한 명은 브루클린 대학(뉴욕시의 대학 체계에 속한)의 조교수였고, 두 명은 매사추세츠 대학 애머스트 캠퍼스의 대학원생이었다.
대학생의 처지와 요구를 담은 이 팸플릿의 진원지가 뉴욕 대도시권과 매사추세츠주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둘 다 미국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가장 밀집해 있던 곳들이기 때문이다. 당시에 디트로이트가 자동차를 만드는 노동자들의 도시였던 것처럼 뉴욕과 매사추세츠는 학생들의 도시였다.
이론적 국면으로 보든 역사적 국면으로 보든 이 팸플릿이 만들어진 시기가 놀라운 것은 아니다. 저자들은 모두 저널 『제로워크(Zerowork)』에 참여했다. 『제로워크』의 이론적 접근법은 (이탈리아에서 비롯된) “노동자주의적” 관점과 <국제 페미니스트 콜렉티브>가 1972년에 시작한 ‘가사노동임금 캠페인’을 종합한 것이었다. 노동자주의적 관점이 로스앤젤레스에서 디트로이트를 거쳐 토리노에 이르는 산업벨트 내의 공장 노동자 투쟁에서 연원하는 반면, ‘가사노동에게 임금을’은 가사노동임금을 요구하는 주부들(여성 부불노동자)의 투쟁―미국에서는 “복지권” 투쟁―에 뿌리를 둔다.
『학생에게 임금을』이 쓰여질 무렵에는 ‘사회적인 것’이 특정한 공장 유형이라는 이론적 인식이 이미 출현한 뒤였다. 이러한 이론적 국면을 통해 학생 노동에 관한 새로운 생각의 씨앗 역시 그 지형을 마련했다. 이런 이론적‧정치적 영향은 자본과 국가가 생각하는 대학의 역할 변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대학이 노동력의 생산성을 증가시키고, 신분 상승의 수단으로서 사회적 훈육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상품이나 생산방식을 산출할 연구를 후원한다는 것은 1950-60년대 국가 정치의 공리였다. 따라서 1960년대 후반까지 자본가와 노동자는 모두 교육을 “공유재”로 간주했다. 그러나 1960년대 격렬한 학생투쟁—언론자유·시민권·여성권을 옹호하고, 징병, 베트남 전쟁 그리고 대학을 군사적 연구에 이용하는 것에 반대하는—의 결과로 대학 교육에 대한 자본가 계급의 태도에 결정적인 변화가 있었다.
미국의 캄보디아 침공과 켄트주립대와 잭슨주립대 학생들을 군인과 경찰이 살해한 것에 반대해 일어난 1970년 전국 학생파업은 이 점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새로운 자본주의적 합의는 미국의 대학들(이들은 1950년대와 1960년대 초반 매카시즘적 숙청을 당한 좌파 교수들을 최근에 “사면시켰다”)이 공장‧사무실‧군대에서 일할 믿을만한 숙련된 노동력을 생산하는 대신, 반제국주의적이고 반자본주의적인 졸업생을 대량으로 배출한다는 점이었다. 묘한 것은 이 반란자들이 기업 쪽에서 거둬들인 주세나 연방세에서 나온 보조금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이런 일은 중단되어야 했다. 1970년대 무렵에는 정부 당국과 기업들이 “갈등이 들끓는” 대학의 보조금 지급을 철회하고 학생들이 자기의 교육비를 스스로 내게 하자고 요구했다. 교육은 더 이상 공유재로 여겨지지 않게 되었다.
당시에 우리는 이 변화를 뭐라 불러야 할지 몰랐지만, “신자유주의” 대학이라 불릴 어떤 이행을 알아채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신자유주의에서는 교육이 학생이 구매하는 상품, 자기 미래를 위한 투자가 되고, 나아가 교육제도 자체가 기업을 본보기로 삼았다.
1975년은 바로 이러한 대학의 신자유주의화가 시작된 때였다. 『학생에게 임금을』은 이러한 변화를 기술하고 풍자했다.
팸플릿이 작성될 당시 저자들도 학생운동에서 일어나고 있던 변화에 참여했다. 대학 입학 정책에서의 인종주의나 대학 내에서의 신병 모집과 같은 “정치적 쟁점”과 수년간 겨루고 나서, 1970년대 후반경에 학생들은 “경제적 쟁점”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대학에서 대학 재정삭감, 등록금 인상, 장학금 축소 등에 항의하는 시위들이 흔해졌다. 돌이켜보면, 이 새로운 학생시위는 미국 대학 체계의 신자유주의화를 중단시키려 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학생에게 임금을』은 새로운 학생운동에게 언어와 어휘를 제공했다. 그것은 학생들을 자신의 미래에 투자하고 있는 소비자나 1인 사업가로 묘사하는 대신 그들을 노동자로 불렀다. 그것은 등록금 인상에 반대하며 “학교노동에게 임금을”을 외쳤다.
『학생에게 임금을』은 단지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말한 것이거나 지적인 자극을 일으키는 행위인 것만은 아니었다. 물론 두 측면 모두 사실이긴 하지만 말이다. ‘학생 임금’ 활동가들은 여러 다른 이들 중 특히 『제로워크』 동료들과 함께 미 북동부 일대의 대학들에 전파하고자 했다.
이러한 정치적 작업의 첫 단계는 ‘학교노동에게 임금을’의 관점을 학생들의 관심사로 이끄는 데 있었다. 우리는 이 생각을 처음에는 좌파 컨퍼런스와 학생회합에서 제기했다. 전단지를 작성하고, 차량 범퍼에 붙일 스티커를 나눠주고, 대학 시위에 참여하고, 동조하는 교수들의 수업에서 발표했다. 우리는 이 임금이 “누구에게” “얼마에” 지급되어야 할지를 정하는 도식을 만들기를 거부했다. 우리의 목표는 대학 내에 ‘학생 임금’ 지부를 만들고, 좌파(우리의 요구에 대해 곳곳에서 적의를 드러냈던)나 학생운동이 고수하던 담론을 우선적으로 변화시킬 네트워크를 건설하는 데 있었다.
‘학생 임금 캠페인’은 1970년대 중반경에 그 조직화가 정점에 이르렀던 ‘가사노동 임금 캠페인’의 작업을 모델로 삼았다. 그들의 정치조직의 대부분은 당시에 “재정 위기”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던 여성 복지 분야에 대한 공격에 맞서는 것이었다. 그들의 캠페인은 처음에는 “가사노동 임금”을 “복지”로 불렀다.
‘학생에게 임금을’은 임금의 이러한 확대로부터 배움을 얻었고, 그것을 학생에게 적용하고자 했다. ‘가사노동 임금 캠페인’이 처음에 가사노동 임금의 형태를 “복지혜택”으로 보았던 것처럼, ‘학생에게 임금을’ 활동가들은 처음에는 학생 임금의 형태를 학생에게 재정적으로 지원되는 다양한 학자금 형태 중 하나로 보았다. 우리는 시위에 참여하면서 이러한 ‘원조’의 삭감에 반대하는 저항을 조직했다. 우리가 “임금”으로 떠올렸던 것은 그러한 원조였다. 몇몇 곳에서 이 캠페인은 다양한 분야의 노동계급―생활보조금을 받는 주부나 공동체 활동가에서 대학원생, 그리고 이 시기의 시민권 투쟁을 통해 대학과 연결되어 있던 많은 이들에 이르는―을 결집시켰다. 우리는 ‘학교노동에게 임금을’이 더 높은 임금을 받기 위한 다른 여러 투쟁처럼 그 자체로는 혁명적 요구는 아니었을지라도, 모든 형태의 부불노동을 끝장내는 것이 너무나 많은 잉여가치를 만들어내는 자본주의 체계의 안정성을 무너뜨리고 정말로 그것을 종식시킬 것이라고 보았다.
캠페인을 조직한 사람들인 우리도, 학교노동에 대한 임금을 지불받게 되면 학업을 수행하면서 “제공하라”고 요구받은 그 노동을 포함해, 자본이 우리에게 강제하는 다른 매일의 더 많은 노동을 선택적으로 거부할 수 있는 추가적인 힘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생각하고, 창조하고, 공유하고, 서로를 돌볼 시간을 주지 않는 그러한 노동을 거부할 힘을 말이다. 가사노동 임금을 조직한 이들처럼, 우리는 학교노동에 돈을 받으면 결국 자본에 의해 강제된 노동을 거부할 더 큰 힘을 학생들에게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미국의 자본과 그들의 국가는 ‘가사노동에게 임금을’이나 ‘학교노동에게 임금을’이 촉진시켰던 임금의 확대와 포괄성이 자본주의 체제를 정치적으로 위협한다고 생각했던 것이 분명하다. 지난 30년간 여러 신자유주의적 개혁들이 복지권과 대학 교육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을 공격했던 것, 그리고 이 공격들이, 민주당이든 공화당이든 상관없이, 고용된 이들의 임금이나 복지혜택을 삭감하는 것과 나란히 이뤄졌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나의 요구로서 ‘학생에게 임금을’은 미국의 자본 전략가들이 자본의 발전계획에 임금투쟁을 포섭하는 케인즈주의 정책을 포기하던 불운한 시절에 등장했다. 따라서 우리는 학생 임금을 받는 것은 고사하고 엄청난 등록금 인상(1985년부터 2015년까지 500% 증가)을 겪어야 했다. 그 결과는 오늘날 보통의 학생 채무자는 거의 3만 달러에 달하는 대출 빚을 안고 있고, 전체 학생 대출 채무는 1조 1천억 달러 이상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학생들은 학생 임금을 받는 대신에 돈을 지불하면서 대학에서 일하고 스스로 미래에 착취당하는 훈련을 한 것이다.
물론 출판 이후 40년이 지난 뒤 이 글이 신자유주의적 대학개혁에 맞서 역류를 일으키는 글로 다시 새롭게 관심받는 것을 보는 것은 기쁜 일이다. 칠레와 퀘벡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무수한 미국 도시들로 또 다시 이어지는 현재의 학생운동은 이 팸플릿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까? 이 운동들 스스로 결정해야만 한다. 이 새로운 학생 세대가 이 팸플릿에 응답하는 방식은 우리 모두를 위한 유용한 정치적 지식을 제공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미 『학생에게 임금을』이 적어도 한 가지 목적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팸플릿은 학생이 노동자이며, 그들이 대학에서 하는 일이 이른바 “고등교육”이라는 상품을 “소비”하는 일이 아님을 보여줌으로써 학생 부채에 맞서는 투쟁에 힘을 실어준다. 이 팸플릿은 대학이나 정부, 은행에게 막대한 양의 돈을 갚아야 하는 것은 학생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 바로 이 기관들, 더 중요하게는 자본이야말로 학생의 부불노동으로 성공하게 된 만큼 학생들에게 돈을 지불해야 한다. 정치인들이 학생 부채로 발생된 위기에 대해 신자유주의적 “해법”—가령 학생들을 “교육시장에서 더 나은 쇼핑객”으로 만들기 위해 대학을 서열화하는 일—을 제시하는 현시대에, 『학생에게 임금을』은 학생들이 부불노동에 종사하는 착취당하는 노동자이며, 그들은 이 노동에 반드시 임금을 지불받아야 한다고 대응하는 것이다.

2015년 뉴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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