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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喚想):환상(幻想)  미래를 돌이켜 과거를 상상하기 1

『도서관 환상들』 서평

 

『도서관 환상들』

엮은이. 아나소피 스프링어, 에티엔 튀르팽 | 옮긴이. 김이재 | 편집. 이승주 | 디자인. 김동신 | 제작. 세걸음 | 발행. 만일

 

 

 

정지영 | 디자이너.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세미나회원

 

 

[일러두기]

본 원고는 2022년 8월 15일 《텍스트 뷔페》에서 전시했던 글을 일부 수정했습니다.

『도서관 환상들』 내 본문 페이지 출처는 대괄호 안에 표기했습니다.

 

 

『도서관 환상들』 표지 (출처: 출판사 만일 웹페이지 https://manilbooks.me/18422603)

 

 

책상을 딛고 벽에 기대어, 내 왼 편에 책 한 권이 서있다. 희고 거친 표지 사이로 붉은 박이 빛난다. 힘주어 눌러 새긴 박 글자의 자리는 표지의 다른 자리보다 낮아져 있다. 오른편에는 묶이지 않은 낱장의 페이지가 슬쩍 열려 있다. 새삼스러운 그 모습에서 페이지를 엮고 표지로 싼 책의 기원, 코덱스(codex)를 떠올린다.[각주:1] B.C.2세기부터 지금 내 책상 위까지 엮여 온 페이지들. 그러나 이내 오늘날 책은 더이상 페이지의 엮음만으로 설명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렇다면 책은 무엇의 엮음일까? 이에 답하려 나는 다시 묻는다: 엮음이란 무엇인가?

 

 

1. 엮음

 

엮이지 않고 철저하게 홀로 가능한 일이 과연 있을까. 생각에는 이름이 쓰여 있지 않으니 생각의 소유주를 알 수 없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나의 결과물은 말이 엮이고 생각이 엮여 마침내 얽히고설킨 덩어리, 결코 하나가 되지 못하는 덩어리다. 무엇도 단일하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단일한 저자로부터 탄생하지 않는 건 물론이다. 이렇게 쓰니 저자는 단일한 존재일까? 하는 또 하나의 물음이 생긴다. 글을 짓는 고독한 일조차 나와 관계하는 다른 이들의 목소리를 내 안에서 엮는 일이다. 

 

『도서관 환상들』은 과거와 미래의 도서관을 말한다. 이곳에는 저자의 자리에 엮은이가 있다. 그들에게 이 책은 큐레토리얼 결과물이다. 엮은이 중 한 명인 아나소피 스프링어는 소재를 모으고 일련의 체계에 따라 편집하는 행위를 ‘큐레토리얼’이라 규정한다. 이곳에는 그가 쓴 텍스트·비주얼 에세이, 프레링거 도서관을 만든 두 설립자와의 대화, 인류세에 책과 책 만들기에 관한 성찰, 오픈 액세스를 지지하는 편지, 페이지 사이사이 개입하는 〈스캔옵스〉 사진을 비롯한 요소들이 엮여 있다. 국내 출판계에서는 이렇게 소재를 선별하여 구성한 편집저작물에 자기 창작물이 포함될 경우 ‘편저자’, 그렇지 않을 경우 ‘엮은이’로 표기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 아나소피 스프링어와 에티엔 튀르팽은 모두 엮은이다. 책을 덮으면 표지의 ‘엮음’이 그들의 편집 행위뿐 아니라 이 책 전반을, 나아가 엮인 모든 존재를 함축함을 깨닫는다. 

 

『도서관 환상들』은 메타-책이자 메타-도서관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도서관은 “큐레토리얼 공간”으로써 지식을 담는 장소다. 책 또한 지식을 담는 “큐레토리얼 공간”이므로 일종의 도서관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자신에 관해 말한다. 에세이에서 소개하는 ‘도서관’은 실재했거나 실재하는, 혹은 실현된 적 없지만 상상된 도서관 모두를 포함한다. 고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바르부르크 도서관, 드니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과 미셸 푸코의 「도서관 환상」 등이 그 예다. 이들은 도서관 환상들의 계보를 형성한다. 엮인 것, 엮는 행위, 엮인 것을 다시 엮은 곳이 이 책에 엮여 있다. 엮음이란 불가능한 결합 — 복수의 개체가 얽혀 풍부해지는 사건이다. 

 

 

2. 환상

 

환상적인 것이 간직한 보물은 책들 안에 잠들어 있다. (…) 
꿈의 진정한 이미지는 과거에 쓰인 문장들, 보다 정확한 교정판, 세세한 사실들의 집합, 복제되어 
아주 작은 조각으로 쪼개진 기념비, 복제품의 복제품에서 피어오른다. [각주:2]

 

미래. 그것도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미래를 그리는 이에게 과거는 종종 오래되고 낡은 것으로 치부된다. 그들에게 환상은 가능성 희박한 미래의 엮음이다. 그런데 푸코는 환상이 이미 과거에 “쓰여있다”고 말한다. 책 제목 ‘fantasies’에 해당하는 ‘환상(幻想)’의 사전적 의미는 “현실적인 기초나 가능성이 없는 헛된 생각이나 공상” 또는 “사상이나 감각의 착오로 사실이 아닌 것이 사실로 보이는 환각 현상”에 해당한다.[각주:3] 그러나 ‘fantasies’가 우리말 ‘환상들’로 번역될 때 ‘환상(幻想)’은 “지나간 것을 돌이켜 생각”한다는 ‘환상(喚想)’과 구별되지 않는다. 이 책은 우리가 근원에 질문을 던질 때 대면하는 예측 불가능성, 그리고 그 예측 불가능성이 관행에서 벗어나는 동력으로 작용함을 보여준다.

 

십진수 분류법은 도서관에서 흔히 쓰인다. 총류, 철학, 종교, 사회학, 언어, 자연과학, 기술과학, 예술, 문학, 역사로 책을 분류하는 국·공립 도서관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그러나 이 책에서 프레링거도서관의 두 설립자는 이러한 관행을 당연시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들은 질문한다. 도서관이 무엇을 위한 곳인지, 도서관에 오는 사람들은 무엇을 하는지, 그렇다면 도서관이 책을 어떻게 담을 수 있는지 질문한다. 메건 쇼 프레링거는 도서관이 연구를 위한 곳이며 연구는 “세상을 물리적으로 탐험”하는 일이라 말한다. 연구가 탐험이라면 도서관은 “예기치 못한 발견(serendipity)”을 하는 탐험 장소인 셈이다. 그들은 도서관이 실제 위치한 샌프란시스코에서 우주까지 나아가는 지리 기반 분류법으로 책을 배치한다. 지리적 위치가 이동하고 범위가 확장되면서 “정부 문서와 그것을 해석하는 논문이, 대안적 역사서와 정통 역사서가 서로 이웃”하는 배열이 만들어진다.[p.20]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읽기는 글자의 나열을 지각하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가 읽는 텍스트는 글자들이 직조하는 의미 관계다. ‘엮다’를 뜻하는 라틴어 동사 ‘textum’은 텍스트text의 어원이다. 즉, 텍스트는 엮는 행위에서 비롯되었다. 텍스트의 의미 관계는 거듭 엮여 의미의 겹을 형성하고 의미의 겹은 중층적으로 쌓여 깊이를 생성한다. 깊이는 조화될 수 없고 하나로 통합될 수 없는 요소들 사이에서 발생한다. “깊이란 공존할 수 없는 것들로부터 출현한다”.[각주:4]

 

바르부르크 도서관

 

이 책에서 바르부르크 도서관은 분류·배치로 깊이를 만들어내는 하나의 본보기로 다뤄진다. “바르부르크는 무엇보다도 책들(…)을 한데 모아 놓으면 학생들이 제목만 보고도 인간 정신의 본질적인 힘과 역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받게 되리라 생각했다.” 사서였던 프리츠 작슬을 인용한 이 대목은 분류 목적이 독자로 하여금 무언가를 상상하게 하기 위함이었음을 잘 드러낸다. 이는 중립으로 위장하거나 효율만을 추구하는 기존의 체계와는 분명 다른 시도였다. 바르부르크 도서관의 분류법은 그에 공감하는 이용자조차 이해하기 어려웠다고 전해진다.[p.67]  바르부르크 도서관의 서가를 떠올려보자. 배열된 책 제목을 눈으로 따라가면 이해할 수 없지만 독특한 한 줄의 텍스트가 만들어진다. 알 수 없게 조합된 단어와 단어 사이는 공백을 낳고 그 공백은 상상으로 채워진다. 책과 책은 기묘한 방식으로 엮이며 환상을 피워낸다. 이제 서가 한 칸은 시의 한 행으로 탈바꿈한다. 

 

환상은 하나와 다른 하나가 엮이며 통합되지 못한 간극에서 자라나는 주석이다. 이 책은 과거 환상들의 엮음이며 도서관은 과거의 환상들 사이에 자리하는 미래의 환상들까지 엮는다. 그러므로 이 책에 사용된 큐레토리얼 방법은 과거를 돌아보는 환상(喚想)이다. 이때 환상은 환원을 거부하고 분석에 저항한다. 이 책에서 일관된 체계를 찾으려는 시도는 거듭 좌절된다. 앞으로 성공한 듯 보이는 모든 논의가 실은 실패의 주석임을 미리 밝힌다. 

 

 

3. 주석

 

“주석 달기는 수 세기부터 이어져 온 지적 행위입니다. 중세에는 미래의 독자를 위해 원본 페이지에 주석을 써넣는 기술을 특별히 ‘글로싱’(glossing)이라고 일컫기도 했습니다. 이제껏 수많은 철학, 신학, 심지어는 과학 이론이 다른 텍스트의 난외(欄外)에서 탄생했습니다.” [각주:5]

주석이 달린 양피지 페이지. 코펜하겐 왕립 도서관.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Gloss_(annotation))

 

주석을 생각하면 지면에서 글자가 인쇄된 판면 밖 여백이 떠오른다. 주석 달기의 목표는 용어의 절대적인 본질을 찾기 위함이 아니다. 의미를 현실과 다르게 확장하여 일시적인 해방감을 얻기 위함도 아니다. 주석 달기는 지금의 용어가 과거와 달리 어떤 의미로 쓰이고 있는가, 미래에는 무엇이 될 수 있는가를 고민하며 사유하려는 시도다. 모든 학문 분야는 주석으로부터 의미를 더하고 제거하며 변화해왔다. 주석 달기는 분과학문의 경계 너머에서 이쪽과 저쪽을 연결하고, 미래를 말하기 위해 과거의 이야기를 듣는 행위다. 이는 과거 의미로부터 불가피한 미끄러짐을 전제한다. 그러나 동시에 주석은 미끄러짐을 목표로 한다. 관행적 의미로부터 미끄러지며 새로운 의미를 시도하기에, 주석에게 미끄러짐은 한계이자 가능성이다.  

 

분과 학문 체계에서 용어를 좁은 의미로 한정하는 태도는 주석 달기를 막는다. 나의 주장은 모든 용어를 넓은 의미로 사용하고자 함이 아니다. 분석에는 한계 짓는 일이 선행됨을 인정한다. 다만 의미를 좁히는 행위는 언어가 대상을 명확하게 지시한다고 착각하게 한다. ‘디자인’이 이미 걷잡을 수 없게 널리 쓰이는 단어인 까닭에, ‘디자인’을 좁은 의미의 용어로 사용하려는 시도는 목표했던 명확성에서 계속 멀어진다. 분야를 좁은 의미에 가두는 일은 오히려 그 영역을 축소하고 왜곡할 뿐이다. 예컨대 디자인을 조형적 실체에 관한 것으로만 제한한다면 개념적 체계는 디자인이 될 수 없으며 근거 없는 조형 행위가 디자인에 더 가까워진다. 이는 디자인 행위를 제약할 뿐 아니라 실제 디자인 과정을 적합하게 설명하지도 못한다. 

 

명확성이야말로 다른 가능성들을 제거하는 착각이다. 단어가 맥락에 따라 다른 의미가 된다는 사실에는 누구나 동의하지만, 단어의 정의를 절대적인 의미로 오인하는 일은 꽤 자주 일어난다. 그러나 단어의 정의는 맥락 속에서 의미를 형성하는 출발점일 뿐 종착점이 될 수 없다. 기준에 따라 분류하는 행위뿐 아니라 ‘기준에 따른다’는 기준을 설정하는 행위—즉, 기준을 해석하는 행위—조차 인간의 행위라면, 그러니까 구별 기준 또한 절대적일 수 없다는 사실을 당신이 기억한다면, 페이지의 여백에는 곧 이러한 주석이 새로 쓰이리라. 주석을 다는 행위는 가까이에서 관찰하고 성찰하여 다른 엮음을 시도하기 위함이다.

 

이 책에서 ‘도서관’은 좁은 의미의 도서관을 의미하지 않는다. ‘책’과 ‘도서관’도 완벽하게 분리되는 개념이 아니다. 에세이 “페이지 매겨진 정신”은 이 책의 추상성이 집약된 제목이다. 아나소피에게 책은 ‘정신이 공간을 점유하는 물질로 변화됨’을 지칭하는 말이다. 정신의 물화라는 측면에서 지식을 담는 책과 책을 담는 도서관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큐레토리얼’ 역시 그가 도서관을 전시장으로 치환하며 사용하는 용어일 뿐 큐레이터의 작업에 국한되는 방법론이 아니다. ‘큐레토리얼’은 편집하고 구성하는 모든 일에 적용할 수 있는 넓은 개념이다. 아나소피 역시 “큐레토리얼은 작품을 분류하고 관리하는 등 큐레이터가 맡은 전통적인 과업만으로 설명할 수 없으며, 자료나 컬렉션을 인식론적 차원에서 연구하고 공간적으로 해석하는 능동적인 행위를 포괄한다.”고 밝힌다.[pp.121-123] 

 

이 책은 생각이 “본질적으로 불안정”[p.134]함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책의 구조를 파악하려는 독자는 불안정함을 몸소 체험하게 된다. 경계를 밟고 서서 질문하는 일, 질문의 끝에서 답이 없다는 답을 확인하는 일, 답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러 다시 질문하는 일은 환원적이고 무가치하지 않다. 탐험의 끝에서 나는 다른 질문을 향해 탐험을 시작하려 한다. 

 

 

 

2편에서 이어집니다.

  1. “하지만 두 물질(진흙과 파피루스) 다 서판과 두루마리를 능가하는 책의 형태인 코덱스나, 책장을 다발로 묶는 형태에는 적절하지 못했다. (…) 반면 양피지나 벨럼은(이 둘은 제조 과정은 달라도 똑같이 동물 가죽으로 만들었다.) 자르거나 갖가지 형태의 크기로 접을 수 있었다. (…) 양피지 코덱스는 즉각 관리와 성직자, 여행자와 학생들에게 널리 환영받는 책의 형태가 되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책장 양면에 텍스트를 담을 수 있었고, 코덱스 책장의 네 귀퉁이에는 여백까지 생기게 되었다. 여백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언제든지 쉽게 해석을 달고 논평을 할 수 있게 함으로써 독서가들에게 텍스트의 이야기에 직접 참여하는 듯한 기분을 안겨다 준다.” 
    알베르토 망구엘, 『독서의 역사』, 세종서적, 2020, pp.189-190 [본문으로]
  2. 미셸 푸코, 『도서관 환상』, 1967: 『도서관 환상들』, 2021, p.17 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3. 표준국어대사전 [본문으로]
  4. 이종건, 『깊은 이미지』, 궁리, 2017, p.88 [본문으로]
  5. 찰스 스탠키에베치, 「오픈 엑세스 플랫폼 ‘Arg.org’를 지지하며 퀘벡주 고등 법원에 부치는 편지」, 『도서관 환상들』, p.12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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