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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에게 임금을』(2/5)

(청서 형태의 1975년의 팸플릿)

 

학생에게 임금을그룹

/ 연구공간 L 연구자 박채원, 왕세종, 노지현, 이민주 번역

 

 

 

정신 훈육 공장(1965)

 

아침이다. 기상예보관이 오늘은 맑고, 해가 중천에 떠 있을 것(혹은 비구름 중 가장 적절한 것을 고를 테지)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기계화된 시계-시간처럼 지구는 또 다시 태양 주위를 똑딱거리며 돈다.”

존 도는 엘름 시티의 정신 훈육 공장 제12구에 속해 있다. 그는 늘 우리의 표준이었다. 존은 평범한 사람이다, 아니 실수하기 전까지는 평균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대량 생산되는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 신체적-욕구 방에 앉아 오른손에는 연필을 쥐고, 책상 위에는 종이를 두고, 자기 일에 전념하느라 바빴다.

그런데 몇 가지 배경정보가 있다. ‘신체적-욕구 방’[급식실]이 있어야 할 본래 구실은 신체적 장려와 절반의 만족을 줌으로써 우리의 훈육을 보충하는 음식을 만들고 나눠 주기위함이었다. 하지만 현재 이 방은 다른 더 중요한 일정이 없는 존 도들을 모아 놓은 장소가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그들에게 전반적인 정신 훈육의 아주, 아주, 아주 중요한 부분인 복종을 가르친다.

존 도에 대해 말하자면,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식수대로 가 크게 물 두 모금을 마시는 뻔뻔함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괜찮았다. 그는 입을 한가득 채우고 우리의 비용으로 그의 갈증을 해소한 것이다.

그런데 당신들 모두는 그것이 우리 식수대의 목적이 아님을 깨닫도록 훈련받았다. 당신은 식수대가 훈육의 유혹을 위한 것이고 오로지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만 우리 계획[교육]에 포함되었음을 이해하도록 프로그램되었다. 당신은 존과 달리 갈증을 참아야 한다. 그는 나쁘고, 나쁘고, 나쁘고, 나쁘다. 우리의 감시자 중 한 명의 그의 두 입술을 재빨리 꿰매 줄 의사에게 그를 데려다주었다.

우리 중 몇몇은 존의 처벌이 그러한 부끄러운 불복종 쇼에 대한 것 치고는 너무 가벼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자비가 베풀어지리라 믿는다. 원칙도 원칙이지만 인간성을 무시하는 원칙이라면 그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내일 들을 수업이나 공부하자. (어느 고등학생이 학교에서 쓰다.)

 

 

 

학교 노동이란 무엇인가?

 

학교에 가면, 한 명의 학생이 된다는 것이 노동이다. 이 노동은 우리가 그것을 하는 것에 임금을 받지 않기에 대개 진짜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지만 어쨌든 학교 노동이라 불린다. 이는 학교노동(schoolwork[학업])이 일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당신이 돈을 받을 때만 진짜 일을 하는 것이라고 믿게끔 우리를 가르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학교 노동은 다양한 강도를 가진 여러 다른 작업의 형태, 숙련노동과 미숙련노동을 합친 형태를 띤다. 가령 우리는 오랜 시간 소란을 피우는 대신 강의실에 조용히 앉아있는 법을 익혀야 한다. 우리는 주의해서 듣고, 이야기된 것을 기억하려고 애써야 한다. 우리는 교육자에게 복종해야만 한다. 우리는 간혹 특정한 기술을 익히는데, 이 기술은 학교를 나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직장에서 일할 때 우리를 더 생산적이게 만들어 준다. 하지만 우리는 생애 대부분에서 기술이 필요 없는 노동을 많이 한다.

학교 노동과 관련된 특정한 모든 업무들의 공통 특징은 훈육, 즉 강제된 노동이다. 때때로 우리는 훈육되는데, 이는 다른 사람들(교육자교장(총장)수위)이 우리를 강제로 일하게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때에는 우리는 우리 자신을 훈육시키는데, 이는 우리가 학교 노동을 우리 자신에게 강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양한 범주의 학교 노동이 [훈육과 같은 단어인] ‘분과’(discipline)로 불린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 아닌 것은 이런 이유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훈육시키는 것이 자본에게 더 저렴하고 좋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것은 임금 노동자들인 교육자교장(총장)수위가 더 받아야만 하는 급여를 경감시킨다. 스스로를 훈육하는 학생들인 우리는 학교 노동하기와 그것을 해내는 우리 자신을 만들어내기라는 이중 업무를 수행한다. 바로 이것이 교무실(행정실)이 학교의 자기-훈육적 측면을 그토록 많이 강조하는 이유이며, 이는 우리를 훈육하는 일에 드는 비용을 최소한으로 유지하게 한다.

모든 자본주의적 기관들과 마찬가지로 학교 역시 공장이다. 등급을 매기고 진로를 정하는 일은 학교-공장 내에서 우리의 생산성을 측정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우리 미래의 사회적 위치를 택하도록 훈련받을 뿐 아니라, 또한 우리는 적절한 장소로 가도록 프로그램된다. 학교-공장은 선별과정의 필수적 단계로, 이는 누군가는 거리를 청소하고 누군가는 청소부를 감독하는 쪽으로 보낼 것이다.

학교 노동도 학생들이 유용한 것을 스스로 찾게 하는 교육을 포함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측면은 엄격하게는 자본의 가장 직접적인 자기-이익, 즉 노동계급 훈육에 종속된다. 어쨌든 자본에게 좋은 것은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엔지니어지만 그가 출근하지 않는다면 미분 방정식을 해결할 수 있겠는가.

 

 

 

왜 학교 노동인가?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학교노동은 소비재이자 투자재이다라는 점에 동의한다. 그래서 왜 학교 노동인가?”라는 질문에 그들은 당신이 받는 학교 교육이 이런 놀라운 양면을 가진 재화라고 답한다. 당신이 미래에 고소득 직업을 가지리라고 기대하는 만큼 당신 자신에게 투자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이 재미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투자가 기피되던 시절과는 거리가 먼 이 이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소비측면을 생각해보자. 경제학자들이 소비재를 재미있고 즐겁고 만족스러운 것으로 규정한다고 해서 학교 교육을 소비재로 부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농담을 하는 것이리라. 과제를 끝내야 한다는 끊임없는 압박, 짜증나는 일정, 그리고 그 밖에도 모든 가능한 재미를 직접 계속해서 억누르는 자기-훈육 등. 그것[학교 노동이 소비재라는 것]은 출소하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에 감옥에 가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분명 누군가는 학교에 가면 몇 가지 즐거움이 있지만 그것이 교육은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오히려 즐거움을 주는 것은 그러한 교육에 맞서는 투쟁이다. 교실(강의실)에서 빠져나와 떠나는 여행, 마음을 요동치게 만드는 연애, 술집에서 나누는 두서없는 대화, 학교를 문 닫게 만드는 시위들, 부적절한 책을 읽고 올바른 책은 부적절한 시간에 읽기, 이 모든 것은 당신이 교육받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래서 소비 측면에서 결론은 경제학자들의 것과는 정반대이다.

투자측면은 어떤가? 60년대 내내 경제학 교수들, 은행가들, “지도적상담사들은 학교가 개인적 투자재라는 점에 동의했다. 이 생각은 당신 자신을 작은 회사처럼, 소경영자처럼 취급해야 하며, 그래서 회사가 돈을 벌려면 돈을 써야(투자해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큰 이윤을 벌려고 기계를 사는 것처럼, 당신은 학교에 감으로써 자기 자신에게 투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신이 대출을 받거나, 부업을 하거나, 부모님의 월급을 끌어와 학교에 가는 것으로 돈(그리고 배)을 불릴 수 있다면, 그 돈으로 추가이익을 얻는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는데, 당신이 받는 학교 교육이 늘어날수록 미래에 고소득 직업을 가지리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인적 자본 혁명의 전성기에, 박식한 경제학자들은 제너럴모터스(GM)사의 주식을 사는 것보다 교육에 투자하는 것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이것이 너무나도 대단한 노동자 계급의 자본주의이다!

이러한 투자관()”이 야기하는 혐오감왜냐하면 당신이 회사라면 당신의 한 부분은 노동자가 될 것이고 당신의 다른 부분은 그 노동자를 거느린 사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을 한쪽으로 치워보면 당신이 오랜 기간 학교를 다니면 실제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지 어떨지 궁금할 것이다. 60년대에는 모두가 그렇게 될 거라 확신했지만, “위기에 시달린” 70년대에서는 이 모든 도박이 중단된다. 관계 당국은 이제 자신들이 전에 했던 분석이 모두 잘못 인식한 것이었다고, 당신이 자신에게 투자한 것에 대해 어떠한 좋은 결과도 기대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제 당신에게 투자하는 것이 제너럴모터스사의 주식보다 더 나은 수익 창출 사업이 아니라는 점이 증명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들이 제시할 수 있는 것이란 기껏해야 그들이 심리적소득이라 일컫는 것이 증가할 가능성밖에 없다. 즉 당신이 더 많은 학교 교육을 받으면 고소득 직업은 아니더라도 더 멋진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는 식이다. 그러나 이조차도 보장된 것은 아니다. 특히 모든 멋진일자리, “깔끔한일자리가 불확실해지고, 일하기 더 힘들고, 가령 가르치는 일이 그렇듯 심지어 위험하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잘못된 계획에 사로잡힌 듯하다.

모든 학생에게 분명한 것은, 학교에서 무료로 일하거나 심지어 돈을 내면서 일하는 것의 지혜를 당신에게 보여주려 하는 이러한 투자재”[논리]는 거짓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당신이 이윤 창출 기업이라는 거짓 이야기를 근거 삼아 학교 교육에 거액을 들이라고 모두를 설득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이제 경제학자들이 주장하는 두 측면[소비재와 투자재]은 붕괴하지만, 이러한 몰락의 한 가운데에서 학교 노동은 뜻밖의 분야처럼 보이는 곳(즉 좌파)으로부터 새로운 수호자를 얻는다.

사회주의적교육자와 혁명적학생은 예산 삭감등에 맞서는 공립대학의 가장 믿음직한 수호자가 되었다. 왜인가? 그들의 이야기는 이런 것이다. ‘교육은 당신의 사회적 상황에서 더 넓은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이어진다. 한마디로 교육은 당신을 더 의식있는 자로 만든다. 공립대학들이 고학력 노동계급을 보유할 가능성이 열려있기 때문에 이 대학들은 노동계급이 더욱 더 계급의식을 갖게끔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더 의식 있는 노동계급은 더 많은 돈과 더 적은 노동에 관한 단순한 경제적요구보다는 사회주의를 건설하는정치적 과업에 더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이 논리는 좌파에게 대학 위기에 대한 설명(자본은 대학이 배출하기 시작한 높은 의식을 가진 노동계급을 두려워한다)과 요구(학교 노동을 줄이지 말고 더 많이 하자!) 모두를 제공한다. 그래서 이 좌파들은 정치적 의식과 사회주의라는 미명 하에 학교노동(그저 부불노동에 불과한)을 강화하면서, 학생들이 더 적은 학교 노동을 요구하는 것을 자본주의적 퇴보라면서 못마땅해한다. 학교에서 행해지는 무료노동에 대한 통상적인 방어책이 모두 노출된 시기에, 좌파는 이제 이 시기를 기회로 삼아 물질만능주의의 잠에 빠져 있는 노동계급을 깨워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이라는 더 높은 사명으로 이끌고자 한다.

그러나 좌파는 이전에 노동계급을 계몽하려 한 자들이 던진 저 낡은 질문과 충돌한다. 즉 누가 교육자들을 교육할 것인가? 좌파가 명백한 사실(학교 노동은 부불노동이다)에서 출발하지 않다 보니, 그들의 모든 노력은 자본을 위한 부불노동을 더 많이 하라는 쪽, 그래서 더 많은 착취 쪽에 이른다. 계급의식을 고양시키려는 그들의 모든 시도는 자본이 그 자신의 토대 위에서 통제하려는 것을 감지하지 못하게 되며 그래서 좌파는 노동계급을 합리화하고 훈육하면서 노동을 강화하고자 하는 자본의 노력을 계속해서 도와주는 꼴에 이른다. 그래서 사회주의 건설은 자본에 복무하여 더 많은 무료노동을 하게 만드는 그저 또 하나의 장치가 된다. 그러므로 학교노동의 부불적 성격에 대한 자본과 좌파의 방어는 곧 땅바닥에 얼굴을 처박을 것이다.

 

 

 

학생들은 부불 노동자다

 

학생은 노동계급에 속해 있다. 더 정확히 말해 우리는 노동계급의 부불 부분에 속해 있다. 우리가 임금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를 가난, 의존, 과로의 삶에 처하게 만든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임금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임금이 자본을 다루는 데 필요한 힘이 우리에게 부족하다는 것을 뜻한다.

임금이 없다면 우리는 겨우 연명하는 삶에 처하게 된다. 우리는 타인들은 견디지 못할 일을 하며 살아남도록 강제당한다. 우리가 임대할 수 있는 집들은 평균 이하이거나 인구 과밀 된 곳이다. 우리가 먹는, 아니 먹어야만 하는 음식은 가장 저렴한 브랜드의 싸구려 규격품이다. 우리의 옷과 오락거리는 표준화되고 칙칙한 것이다. 우리는 빈곤의 명백한 사례다.

우리는 대체로 임금을 받지 못한 채 살아야 하기에, 임금을 받는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식으로 다른 곳에서 돈을 받아야 한다. 몇몇 학생들은 생활비와 등록금의 일정 부분을 가까운 친척에게 의탁한다. 그러나 임금을 받지 못하는 학생들인 우리는 부모나 여타 후원자들에게 의존하는 관계에 있는데, 이는 우리를 무력하게 만든다. 게다가 만일 가족 전체가 희생어머니는 부업을, 아버지는 우리의 학비를 벌려고 땀 흘려 일하는 등하면, 우리의 부모는 자신들의 노동에 대한 투쟁에서 약해지며, 그만큼 우리는 학교 노동을 받아들이도록 협박당하게 된다. 우리가 일한 만큼 임금을 받아도, 우리는 부모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 임금을 받는 학생들(군대에서, 캘리포니아의 진보적인” ‘롬폭 교도소에서, 민간기업 교육 프로그램에서, 인력 양성교육에서)을 제외한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들이 하는 학교 노동 일체에 대해 임금을 받지 못한다.

그런 지원을 받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임금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학교 밖에서 부업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노동시장이 이렇게 일자리를 구하려는 학생들로 넘쳐나기 때문에, 자본은 우리에게 최저임금을 부과해 이익을 얻는다. 그 결과 우리는 심지어 더 많은 시간을 일하거나 추가적인 일자리[이른바 ‘n잡러’-옮긴이]를 가져야 한다. 우리의 학교 노동이 무급이기 때문에 우리 대부분은 여름 방학에도 일을 해야 한다. 휴식을 취할 때조차 우리는 그것을 즐길 돈이 없다. 이러한 부조리는 학생들인 우리에게 끊임없이 부과되는 매우 높은 생산성 요구(시험퀴즈과제 등)로 인해,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에게 더 높은 생산성 요구를 부과하려고 프로그래밍되는 방식(추가학점 노동,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 우리의 수업을 위한 학교 바깥에서의 읽기와 생각하기, 현장실습, 교생실습 등)으로 인해 훨씬 더 크게 확대된다. 한편으로 우리는 [학교 안에서는] 공짜로 일하도록 강요당하고,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학교 바깥에서] 거의 공짜에 가까운 일을 하도록 강요당한다.

물론 우리는 이 모두가 미래의 우리에게 보상될 것이라는 얘기를 듣는다. 그들은 우리가 비서가 딸린 의미있는 고소득 직업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무료노동이 헛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알다시피 이 공장 밖에서 즐겁게 춤추기 전에는 우리는 지방 호텔의 점원이나 기껏해야 대학 안의 우리의 옛 작업장에서 비서로 우울하게 일하는 것 외에는 기대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현실은 결국 학생들이 수업을 듣기 위해 돈을 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 상황을 보면, 오늘날 학생들은 이미 다음과 같이 수업노동에 대한 봉급을 받기 시작했다.

 

군대: 학군단은 학비에 더해 매달 100달러를 받는다.

일부 기업들은 야간 학교를 다니거나 석박사 학위를 받으려고 계속 공부하는 직원들에게 급여를 준다.

롬폭 교도소의 교도관들[롬폭 교도소]은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학교 노동을 하는 그들의 수감자들 일부에게 급여를 준다.

사회보장연금

장학금(BEOG-Basic Educational Opportunity Grant: 기본교육 기회보조금)

베트남전 참전군인 등.

 

 

 

학생에게 임금을

 

우리는 공짜 일에 진저리가 난다.

 

우리는 우리가 지금 하는 학교 노동에 대한 현금을 요구한다.

 

우리는 우리의 노동으로부터 이익을 얻는 자본에게 우리의 학교 노동에 대한 임금을 지불하도록 강제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재정 지원이나 부모에게 의존하는 것, 2-3개의 직업을 갖는 것, 혹은 생존을 위해 여름 방학 동안 일하는 것을 중단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임금 노동을 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그것을 지불받아야 한다. 이렇게 될 때에만 우리는 자본과 거래하는데 유용한 더 많은 힘을 가지게 된다.

 

우리는 그 돈으로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첫째, 부업을 일할 필요가 사라지는 만큼 더 적은 노동을 하게 될 것이다. 둘째, 우리는 학교 노동을 쉴 때 더 많은 돈을 쓸 것이기에 직접적으로 더 높은 생활 수준을 누릴 것이다. 셋째, 우리들 같은 저임금 노동자들의 존재에게 영향을 받는 전 지역에서 평균 임금이 상승할 것이다.

 

학생들에게 임금을 요구하기 위해 학교 노동을 쉼[학생 파업을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하는 노동에 대해 생각하고 그에 맞서 행동한다. 그것은 또한 우리를 돈을 버는 더 좋은 위치에 서게 한다.

 

더 이상 부불 학교 노동은 없다!

 

학생에게 임금을그룹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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