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성의 차원에서 거짓말을 사유하기
-자크 데리다의 『거짓말의 역사』(2019) 리뷰
조지훈(서교인문사회연구실)
1.
『거짓말의 역사』는 1994년에서 1995년까지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열린 데리다의 세미나 일부 내용을 단행본으로 출판한 강연록이다. 흥미로운 점은 데리다가 이 책에서 생전에 출판한 저작에서는 거의 다룬 적이 없는 ‘거짓말’에 대해서 다룬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자신의 전매특허인 해체론의 방법으로 철학사에 다루어진 거짓말 개념을 추적한다.
우선 데리다는 진술문의 참/거짓 유형을 따지는 방식으로 거짓말을 파악하는 일상적인 거짓말 개념에 문제제기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실수할 수도 있고, 굳이 속이려고 하지 않더라도, 즉 거짓말하지 않고도 거짓을 말할 수 있기”(12쪽) 때문이다. 즉, 상대방을 속이려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틀린 진술문을 발화했을 경우 이것을 거짓말이라고 부를 수 있겠냐는 것이다. 데리다가 보기에 진술문의 차원에서만 거짓말을 파악하면 우발적인 속임과 의도적인 속임을 구분할 수 없다.
그러나 칸트로 대표되듯 철학사에서 두 가지 형태의 거짓말은 잘 구분되지 않으며, 어떤 형태의 거짓말이든 윤리적인 차원에서 원천 봉쇄될 뿐이다. 진리를 탐구하는 철학이 원칙적으로 거짓말을 용인할 이유는 전혀 없으니 말이다. 여기서 데리다는 참/거짓의 진술문의 문제 혹은 윤리적인 영역을 넘어 거짓말을 파악하기 위해서 아우구스티누스를 끌고 들어온다. 왜냐하면 이 교부 철학자는 종교 교리에 따라 거짓말의 윤리적인 문제를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짓말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말을 의도에 따라 구분해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거짓말은 상대방을 속이려는 의도가 핵심적인 것이기 때문에, 설령 거짓 진술을 하더라도 자기가 말하는 것을 믿는다면 이를 거짓말로 파악할 수 없다.
데리다가 보기에 루소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서 거짓말을 의도의 문제만이 아니라, 기만에 따른 손실의 여부로까지 파악하고자 한다. 즉, 속이더라도 상대방 혹은 자기에게 어떤 해도 끼치지 않는다면 이는 거짓말이 아니라 ‘허구’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아우구스티누스와 루소를 끌고 들어오며 거짓말 개념을 분화시키는 까닭은, 거짓말이 참/거짓을 가리는 방식으로 증명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누군가가 자신의 거짓말에 대해 “내가 말한 것은 참이 아니다. 분명히 내가 틀렸지만, 나는 속이려고 하지 않았다. 선의였다”(25쪽)라고 변명한다면, 이는 증명할 도리가 없다. 거짓말을 발화한 자의 본심은 원론적으로는 그 어떤 외부적인 담론으로도 반박할 수가 없으니 말이다.
따라서 데리다는 거짓말을 어떤 사실이나 상태로 파악하는 전통적 정의에 반해서, 거짓말을 의도적인 행위, ‘거짓말하기’라고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무엇이 거짓말인가’라고 묻기보다는 ‘거짓말한다는 것’은 ‘무엇을 한다는 것인가’, 무엇보다도 거짓말할 때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26쪽)라고 물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거짓말은 “하나의 사건을 만들고”, “어떤 믿음의 효과를 일으키려고 하므로”, “진실의 약속을 배반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조차 진실의 약속을 암시”(68쪽)한다는 점에서 수행성(performativité)의 차원에서 파악해야하는 것이다. 즉, 거짓말에 맞설 때조차도 거짓말의 진위 여부를 따지는 것보다, 거짓말이 무엇을 약속하고 어떤 사건을 만드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2.
데리다는 거짓말을 수행성의 차원에서 파악하면서, 사유의 무대를 철학사가 아니라 오늘날의 미디어 현실에 옮겨놓는다. 흥미롭게도 데리다는 세미나를 진행할 당시 1995년에 시라크 대통령이 프랑스 정부가 반세기 동안 묵인해온 비시 정부(Régime de Vichy)의 범죄에 대한 사과문 보도를 통해서 오늘날의 거짓말 문제를 접근한다. 이전에 프랑스의 대통령들은 나치와 협력했던 1940~1944년에서의 비시 정부를 프랑스 정부로 인정하지 않았는데, 시라크에 와서야 그동안 프랑스가 묵인해왔던 비시 정부에 대해 ‘분명한 프랑스 정부’로 인식하며, 이 시기에 행했던 유대인 추방에 대해 사과문을 발표한 것이다. 비시 정부를 현재의 프랑스 정부와 연속 상에서 파악할 것인지 아니면 단절로 파악할 것인지에 따라서 거짓말의 위상이 달라지는 국가적 수행성이라는 흥미로운 문제가 있지만, 데리다는 여기서 멈추고 이를 보도한 <뉴욕타임스>로 눈길을 돌린다.
<뉴욕타임스>는 시라크의 담화문 발표를 뉴욕 대학교의 교수로 있는 토니 주트에게 컬럼을 청탁한다. 컬럼은 늦었지만 시라크가 과거의 진실을 밝힌 것에 대해 높이 평가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반세기 동안 사르트르, 푸코, 데리다와 같은 프랑스 지식인들이 대체로 먼 곳인 마다가스카르, 콩고, 베트남 등에서 벌어지는 학살에 대해선 문제제기를 하면서도, 본인들의 국가에서 행해졌던 범죄에 대해선 기이한 침묵을 지키고 있음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데리다는 자신을 포함하여 당대 프랑스 지식인에 대한 이와 같은 주류 미국 지식인들의 스테레오타입화 된 저격에 대해 ‘반 진실’(Contre-vérité)이라는 용어로 논평한다. 왜냐하면 자신을 포함하여 프랑스 지식인들은 분명 시라크 이전에 미테랑 정부에 비시 정부의 악행에 대해서 책임질 것을 촉구하는 공개서한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이는 전혀 검토되지 않은 채, 국제적으로 배포되는 신문과 미국의 대학교수라는 권위가 결합하여 어떠한 진실을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컬럼 발표 나흘 후에 일리노이 대학교의 조교수로 근무하는 케빈 엔더슨이 이에 대한 반박 기사를 내긴 했지만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고, 이미 <뉴욕타임스> 그리고 <인터네셔널 헤럴드 트리뷴>에는 ‘프랑스 지식인의 위선적인 침묵’은 ‘하나의 진실’로 유통되고 있는 상태였다.
여기서 데리다는 프랑스 지식인을 규탄하는 <뉴욕타임스>의 기사를 거짓말로 파악할 수 있냐고 질문한다. 그들은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고의로 독자를 속였던 것인가? 아니면 단순한 정보 부족에 따른 실수라고 할 수 있는가? 데리다가 보기에 이들은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어떤 결론에 이르기 위해, 즉 프랑스 지식인들과 정치에 대한 그의 일반적인 논조에 맞춰 ‘진실의 어떤 효과’를 생산해내기 위해 모든 대가를 치르면서 서둘렀다”(81쪽)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즉, 미디어에서 보도되는 잘못된 뉴스들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거짓말이라고 할 수 없다. 이러한 뉴스의 특징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정의했던 ‘속이려는 의도’가 핵심적인 것이 아니라, 진실의 효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3.
이처럼 데리다는 미디어가 만연한 시대의 ‘반 진실’을 거짓말과 분리한다. 왜냐하면 미디어의 보도들을 전통적인 개념의 거짓말과 연속 상에서 놓고 파악하게 되면, 아렌트가 제기하는 ‘절대적 거짓말’과 같은 비관적인 개념으로 빠지고 말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본인이 아이히만을 취재하면서도 체험한 것처럼 국제적 언론이 발휘하는 자본-기술-미디어의 힘을 절감한다. 그리고 미디어에서 생산되는 엄청난 양의 잘못된 보도에 대해 역사적으로 거짓말이 이렇게까지 발화된 적이 없었다고 비관적으로 논평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해독제로 ‘절대적 거짓말’의 불가능성을 제기하면서, 아무리 거짓말을 통해서 진실을 덮으려고 해도 거짓말은 어디까지나 진실에 기대어 생산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에는 거짓말로 진실을 전부 가릴 수는 없다는 식으로 대안을 모색한다.
데리다가 보기에 아렌트의 이런 생각은 사실 비관론이라기보다 절대적 거짓말이 언젠가 진실에 의해 분쇄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낙관론이라고 논평한다. 그리고 데리다는 아렌트가 이처럼 미디어 시대의 반 진실 혹은 거짓말을 절대적 거짓말로 파악하는 것이 거짓말을 진술문의 상태로 이해하는 전통적인 개념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아렌트의 절대적 거짓말은 미디어 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꽤나 낡은 느낌이지만, 이 논의틀은 최근 몇 년 사이 가짜뉴스의 범람이 문제가 되면서 ‘포스트 트루스’ 혹은 ‘탈진실’의 시대라는 이름으로 다시 돌아오고 있다. 우연히도 최근 데리다의 『거짓말의 역사』와 같은 시기에 번역된 리 매킨타이어의 『포스트 트루스: 가짜 뉴스와 탈진실의 시대』를 살펴보면 미디어 이론에서 거짓말 개념이 여전히 갱신되고 있지 않은 채로 유통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책의 한 구절만 읽어봐도 아렌트의 절대적 거짓말 개념이 선동적인 판본으로 다시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탈진실에 맞서 싸우는 가장 중요한 방법 중 하나는 우리 속에 있는 탈진실적인 경향성을 물리치는 것이다. 진보주의자든 보수주의자든 우리 모두는 탈진실로 이어질 수 있는 다양한 인지 편향을 타고난다. 따라서 탈진실이 다른 사람에게만 나타난다거나 다른 사람에게만 문제를 초래한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이 외면하려고 하는 진실을 찾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우리 속에서도 그러한 진실을 발견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포스트 트루스』, 215쪽)
‘탈진실’이라는 용어를 가지고 오늘날의 미디어 현실을 분석하는 듯하지만, 이 용어는 사실 한 세대도 더 전에 장 보드리야르가 언급했던 ‘시뮬라시옹’(Simulation)과 별반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결론은 다르지만 오늘날을 가상 혹은 이미지의 과잉으로 진실과 거짓이 구분불가능한 시대로 진단했다는 점에서 매킨타이어나 보드리야르나 매한가지다. 이미지의 무한한 증식으로 현실을 내파시키거나, 아렌트-매킨타이어 류의 진실에 대한 가치 부여로 거짓말과 맞서 싸우거나, 이 논의들에서 거짓말 개념은 빈곤하다. 데리다가 지적한 것처럼 거짓말을 참/거짓을 가리는 진술문의 차원에서만 파악한다면, 오늘날의 가짜뉴스 혹은 이미지의 범람은 단죄의 대상으로 끝나고 만다. 물론 데리다가 계속 주의를 주다시피 거짓말을 진술문이 아닌 수행성의 관점에서 이해한다는 것이, 진실을 평가절하하고 회의주의에 머물자는 얘기는 아니다. 사실은 회의주의조차도 진실이 참/거짓의 진술문의 형태로 환원될 수 있다는 발상에서 가능한 생각이니 말이다. 오히려 거짓말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거짓말 개념의 해체가 필요하다.
4.
이 책 막바지에 데리다는 수행성의 차원이 부재한 상태로 거짓말을 파악하면, 동일한 맥락에서 참/거짓을 판단하는 증거와 다른 층위에 있는 ‘증언’을 이해할 수 없다고 덧붙인다. 진실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증거만이 아니라 증언의 도입은 필수적이다. 그런데 데리다가 보기에 증언은 증거와 다를 뿐만 아니라, 하나의 사안을 두고서도 모순될 수도 있다. 거짓말이 수행적으로 파악이 되어야 한다면, 증언도 수행적으로 파악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증언은 아렌트가 근거하는 전통적인 거짓말 개념으로 이해할 수 없는 위상에 있다.
증언은 절대적 진실을 보증할 수 있는가? 증언에 거짓된 정보가 섞여 있으면 이를 위증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가? 아니면 아우구스티누스가 언급했던 것처럼 속이려는 의도만 없다면 잘못된 내용을 발화했더라도 위증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인가? 혹은 루소처럼 해를 끼치지만 않는다면 위증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는 건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진실을 증거에 따라 판단하는 참/거짓의 구분을 초과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아쉽지만 『거짓말의 역사』는 여기서 그친다. 증언을 수행성의 차원에서 파악하는 것은 데리다의 다른 강연록이나 아니면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의 몫으로 보인다. 불행히도 우리 앞에는 진술문의 관점에서 팩트체크 당하는 증언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증언을 수행성의 차원에서 사유할 기회는 너무나도 많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