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우울증적인 주체, 이성애
- 주디스 버틀러, <권력의 정신적 삶> 5장 읽기
쏠|서교연 페미니즘이론학교
최근 출판된 <권력의 정신적 삶> 5장 ‘우울증적 젠더/거부된 동일화(identification)’에서 버틀러는 “먼저 자아가 젠더화된 성격을 띠게 되는 과정에서 어떻게 우울증적 동일화가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지 설명하고 둘째로, 이 같은 우울증적인 젠더 형성 분석이 동성애적 애착의 상실을 애도하기에 매우 어려운 문화 안에서 사는 것의 어려움을 밝히는 데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 설명”(196) 한다.
우울증적 동일화와 젠더화된 성격 습득
먼저 우울증적 동일시와 젠더화된 성격 습득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버틀러는 프로이트의 상실과 대상리비도 집중에 대한 논의들을 끌고 온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자아와 이드』에서 “어떤 사람이 성적 대상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그의 자아에 변화가 뒤따르는 일이 자주 일어나는데, 이것은 우울증에서 나타나듯이 자아 내에 그 대상을 설치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196, 재인용) 여기에서 자아란 스스로 생각하는 자기 자신을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상실하거나 헤어져야 한다면, 자아는 공허해진다. 자아는 공허감을 채우기 위해 비어버린 마음속에 상대를 집어넣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해 사랑했던 대상을 향한 비난이 자기 자신을 향하게 되는데 사랑했던 사람으로 채워진 자아가 곧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기 비난이 지속되는 상태가 우울증이(라고 프로이트는 본)다. 우울한 상태가 지속되는 가운데 자아는 대상을 완전히 흡수하여 동일시하게 된다. 대상을 영영 떠나보내는 대신 자신의 내부에 위치시킴으로서 애착대상과 아예 한 몸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동일시가 사랑하는 사람을 절대 포기하지 않으려는 “이드가 그 대상을 포기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인지도 모른다······.”(196-197, 재인용) 이를 바탕으로 “자아의 성격은 포기한 대상 리비도 집중의 침전물이고 따라서 그것은 대상 선택의 역사를 포함하고 있다”(197, 재인용)는 프로이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다. 성적 대상의 포기가 강제되는 상황에 놓였을 때 애착대상을 향해있던 사랑 에너지가 안으로 들어와 남게 되고, 이 잔여물들이 자아의 성격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버틀러는 프로이트가 『성욕에 관한 세편의 에세이』(1905)에서 “힘들고 불확실한 성취의 효과로 이해했던 ‘남성적’입장 및 ‘여성적’입장은 부분적으로는 금지에 의해 정립되는데, 이 금지는 어떤 성적 애착의 상실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그 상실이 공언되어서는[알려져서는] 안 되고 또 그에 대해 슬퍼해서도 안 된다고 요구한다.”(198-199)는 것에 주목한다. 이는 남성성과 여성성이 자아의 성격이 형성 되는 것처럼 ‘성취’되는 것이자 ‘특정한 성적 애착의 상실을 요구’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젠더정체성 또한 자연 그대로의 것이 아니라 성취의 문제인 것이다. 그것도 인정되지 않고 슬퍼할 수도 없는 특정한 성적 애착의 상실이 있어야만 습득이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를 통해 성취되는 것은 어떤 젠더정체성인가? 인정받을 수 있는 특정한 애착 대상을 갈망하는 젠더이다. 여성은 남자를 사랑해야만 인정받을 수 있고, 남성은 여자를 사랑해야만 인정받을 수 있다. 이는 곧 이성애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젠더화된 성격습득, 즉 이성애젠더가 어떤 식으로 성취되는가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젠더가 성취되기 위해서는 원래 자아에 어떤 ‘변화’가 생겨야 한다. 자아가 변화하기 위해서는 위에서 설명했듯이 자아 내부에 어떤 대상이 자리 잡아야 하고 그 대상과 자아가 동일시되어야 한다. 자아 내부에 대상이 자리 잡기 위해서는 먼저 성적 대상의 강제적 포기가 필요하다. 즉, 여성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여성’을 향한 마음이 강제적으로 포기되어야 하고, 그 침전물이 자아 내부에 남아 대상과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여성성과 남성성을 성취한 주체(즉, 이성애 여성과 이성애 남성)는 원래 그 젠더를 사랑했던 동성애 주체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성에 대한 사랑이 무엇보다도 먼저 거부되어야만 이성애 여성과 이성애 남성으로서의 젠더 정체성을 획득할 수 있다.
한 사람이 이성애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동성애가 금기시되어야 한다. 이것이 버틀러가 <젠더트러블>과 ‘우울증적 젠더/거부된 동일화’에서 주장한 핵심이다. 프로이트가 젠더화된 성격습득을 이야기 했다면 버틀러는 이 논의를 더 확장하여 이성애젠더정체성이 성취되기 위한 구조가 동성애 억압에 기초해 있음을 규명한다. 이성애가 성취되도록 하는 힘이 “동성애적 애착을 포기하도록 강제한다고 생각해 볼 수”(199)있다. “또는 더욱 신랄하게 말해, 이 힘이 동성애적 애착을 선제적으로 예방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힘은 슬퍼할 수 없고 체험할 수 없는 정념으로 이해되는 동성애성을 생산하는 폐제인 것이다.”(199) 폐제란 애초부터 동성애라는 것은 아예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것으로 치부해 버림으로서 안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동성애 폐제를 통해 이성애의 성취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처럼 “이성애성은 금지를 통해 배양되고, 이러한 금지는 동성애적 애착을 자신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이 애착의 상실을 강제한다.”(201) 이성애는 동성애적 애착을 금지하고 이 애착을 애초에 없애버리는 과정을 통해 생겨난다는 것이다.
동성애 폐제는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론과 프로이트 뿐만 아니라 구조주의 인류학이 말한 근친상간 금기에 보이지 않게 전제되어 있다. 이것이 버틀러가 드러낸 바이다. 버틀러 자신의 요약을 인용하자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이성애적 욕망이 이미 성취된 것으로 간주하고, 이성애와 동성애의 구분(그러나 결국에 이것은 필연성을 지니지 않은 구분이다)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가정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근친상간의 금지는 동성애의 금지를 이미 전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그것이 욕망의 이성애화(heterosexualization)를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199) 근친상간 금기는 욕망을 이성애적인 것이라고만 본다. 무조건 자신과 다른 성별의 부모를 사랑한다고 여긴다. 하지만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과 같은 성별의 부모를 사랑했던 마음이 강제적으로 단념돼야 한다.
이성애 정체성은 동성애를 부자연스럽고, 절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것으로 강제함으로서 확립된다. 버틀러가 말한 우울증적 젠더는 “이성애성이 동성애성의 근본적 타자성을 주장하면서 그 자신을 자연화”(205)함을 개념화 한 것이다. “이성애 정체성은 사실 그것이 부정하는 [동성애적] 사랑의 우울증적 합체를 통해 취득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205) 이것이 바로 버틀러의 글 제목인 ‘우울증적 젠더/거부된 동일화’가 뜻하는 바이다. 즉 동성부모에 대한 애착의 거부는 젠더우울증을 구조화한다. 구조화된 젠더우울증은 이성애정체성 확립에 핵심적인 요소이다.
상실을 공적으로 애도하기
앞서 우울증적인 동일시가 이성애적 젠더 형성에 핵심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버틀러는 이러한 우울증적 젠더 형성에 대한 분석을 통해 “애도되지 않는 대상, 애도될 수 없는 대상에 대한 프로이트의 생각과 동성애적 애착의 상실을 슬퍼하는 데 매우 큰 어려움이 있는 문화 속에서 산다는 것의 어려움이라는 문제 사이에서 생산적이라고 여겨질 만한 어떤 접합을 시도하려 할 뿐이”(203)라는 생각을 밝힌다. 동성애적 사랑이 애초부터 금지된 사회에서 동성을 사랑하는 것은 원래 불가능한 것이고, 혹시라도 가능했다 하더라도 그 후에 올 이별을 절대 슬퍼할 수 없다. 사랑하는(혹은 했던) 이를 향한 애도가 허락되지 않는 것이다. 동성인 사랑을 향한 애도가 불가능한 문화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금지와 부정으로 얼룩져 궁핍할 수밖에 없다. 버틀러는 이러한 삶들과 프로이트의 애도불가능성과 애도불가능한 상실에 대한 생각들을 한 데 모아 새롭게 전유할 수 있는 입장을 제시하고자 한다.
동성애 금지가 만연해 있는 문화적 토대 속에서 우울증적 동일시는 “처음에는 봉쇄(containment)의 한 형식인 것처럼 ··· 즉 세계로부터 차단된 애착을 내부화하는 한 방법인 것처럼”(210)보인다. 동성애가 애초에 불가능한 사회에서 동성애 대상과의 이별은 공적인 장(즉, 이성애정체성만이 인정받는 사회)에서 애도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울증적 동일시를 통해 사랑했던 대상을 자신의 내부로 이전시키고 바깥으로 세어 나오지 못 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을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 보면 우울증은 “세계 자체를 폐제를 통해 우연히 조직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 정신적 조건을 정립하기도 한다.”(210) 이성애 정체성은 동성애의 우울증적 동일시를 통해 만들어진다. 애초부터 동성애가 가능한 것이고 문제될 게 없다면 이성애 정체성은 성취될 수 없다. 이성애 정체성이 보편적이고 당연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이는 구성된 것일 뿐이다. 우울증적 젠더가 이성애 정체성이 확립되는 구조를 드러냄으로서 이성애는 동성애 배제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
버틀러는 우울증적 동일시가 이성애 정체성의 양가적 형태를 나타낼 수 있음을 이야기 하면서 이를 수행성 개념과 연관 지어 설명한다. 수행성이란 “어떤 젠더도 행위, 몸짓, 또는 발화(speech)에 의해서 ‘표현’되지 않으며, 젠더의 수행이 젠더의 내적 본질이 있다는 환상을 소급해서 생산한다는 것을 의미 한다.”(211) 젠더란 특정한 행동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차를 마실 때 새끼손가락을 드는 ‘여성적인’행동을 통해 여성임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먼저 특정한 행동이 끊임없이 반복되어야 한다. 행동이 반복되면서 이것이 마치 젠더가 원래 가지고 있는 특성인 것 같은 환영을 만들어낸다. 새끼손가락을 들고 차를 마시는 행동이 ‘여성적인’ 행동이라는 관념을 생산해내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관습의 의례화된 반복을 통해 젠더가 생산되고, 이 의례가 부분적으로는 강제적인 이성애의 힘에 의해 사회적으로 강제”(211)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지점까지 봤을 때 젠더수행성이 어떻게 우울증적 동일시와 연결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우울증적 동일시는 이성애 정체성이 보편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강제된 문화 아래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애초부터 동성애의 가능성조차 인정받지 못 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러면서 한 편으로는 이성애는 동성애의 폐제 없이는 생겨날 수 없는 것임을 보여준다. 수행성도 마찬가지이다. 젠더는 이성애 정체성이 보편적인 것으로 자리 잡고 있는 사회에서 무조건 따라야만 하는 의례들을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만들어진다. 동시에 반복되는 행동을 통해 이상적인 젠더의 형태가 나중에 생성되는 것임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제 우울증 개념과 젠더 수행성 개념을 합쳐서 생각해보자. “프로이트적 의미에서 우울증이 애도되지 않은 상실의 효과라면, 행동화로 이해되는 수행은 인정받지 못한 상실이라는 문제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아마도 그것은 수행된 동일화 속에서 거부되고 합체된 상실이자 젠더화된 이상화와 그것의 근본적 거주불가능성을 반복하는 상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13) 공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상실은 애도할 수 없다. 애도할 수 없는 상실된 대상과 자신이 하나가 되면서 발생하는 것이 우울증이다. 이 때 젠더 이상을 끊임없이 연기하고 만들어내는 ‘연출’(행동화)인 수행성 또한 공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상실과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끊임없이 절대 있을 수 없는 이상적인 젠더를 반복하는 것 또한 동일시이고 이 동일시는 상실을 통해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적 젠더는 여성적인 것이 가능한 사랑의 대상에서 배제되지만(애도되지 않는 배제), 이 대상이 다시 더 강화된 여성적 동일화 속에 ‘보존되는’ 합체적 판타지 속에서 형성된다(채택된다, 추정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진정한’ 레즈비언적 우울증은 엄격히 이성애 여성적이라고 할 수 있고, ‘진정한’ 남성 게이 우울증은 엄격히 이성애 남성적이라고 할 수 있다.”(214) 이성애 정체성이 보편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회에서 여성은 같은 여성을 사랑할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남성 또한 같은 남성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 이 상실은 애도가 불가능하고, ‘여성적인/남성적인 동일시’를 통해 보존된다. 다시 말해 강제적인 이성애 문화 속에서 금지된 애착대상과의 동일시와 더불어 이성애 여성/남성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행동을 계속해서 수행해야지만 이성애 여성/남성 정체성이 유지된다. 그렇기 때문에 쉼 없이 상실을 거부하고 부인하면서 이상적인 젠더의 형태를 쫓아야 하는 엄격한 이성애 여성과 남성의 우울증이 ‘가장 진정한’ 레즈비언, 게이 우울증이 될 수 있다.
이처럼 “동성애적 사랑의 상실을 인정하는 문화적 관습의 부재”(215)는 “이성애적 우울증이라는 문화를 생성”(215)한다. 상실을 인정 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이성애적인 우울증 문화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이성애적인 우울증이란 끊임없이 상실을 부인하고 이성애 규범에 맞게 행동하는 우울증적 동일시이다. 이성애적인 우울증 문화 아래에서 동성 애인을 잃은 슬픔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 누군가의 “슬픔이 말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는 한, 그 상실에 대한 분노는 공언되지 않고 남아 있음으로 인해 재배가(redoubled)될 수 있다. 그리고 이 분노가 공개적으로 금지된 것이라면, 그러한 금지의 우울증적인 효과는 자살적 비례(suicidal proportions)를 성취한다. 그러므로 애도를 위한 집합적 제도의 출현은 생존을 위해서 필수적이며, 공동체를 다시 모으고 친족들을 다시 통합하며 지속가능한 관계를 다시 짜는 데 있어 필수적이다.”(216-217) 상실한 대상이 누구든 그 슬픔을 말 할 수 있어야 하고, 애도할 수 있어야 한다. 계속해서 특정한 형태의 상실이 공적인 장으로 나오지 못 한다면 이성애 정체성은 여전히 보편적인 것으로 남아있게 되고, 이 정체성의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의 삶은 점점 더 궁핍해지고 허물어지게 될 것이다. “퀴어네이션(Queer Nation)의 ‘모의사 시위운동’(die-ins)의 경우에서처럼 집합적 제도들은 문화적으로 방해 받고 금지된 애도과정의 절박한 정신적 결과에 반해 삶을 긍정하고자 하는 응수로서 읽혀져야 할 것이다.”(217) 동성애의 상실을 끊임없이 공적인 방식으로 인정하고 표현하는 것은 이성애 멜랑콜리 문화의 구조를 재전유하고 생을 긍정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