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마르크스주의는 역사주의가 아니다
『"자본"을 읽자』, 2부 「“자본”의 대상(L’Objet du “Capital”)」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 지음
배세진 옮김(정치철학 박사)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동일한 종류의 것이면서도 아마 훨씬 더 심각한 것일 그러한 마지막 오해와 대면하게 된다. 이 오해는 『자본』에 대한 독해를 대상으로 할 뿐만 아니라,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대상으로 할 뿐만 아니라, 또한 『자본』과 마르크스주의 철학 사이에 존재하는, 그러니까 역사유물론과 변증법적 유물론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를 대상으로 하는, 다시 말해 하나의 전체로 간주된 마르크스의 저작[즉 작업]의 의미를 대상으로 하는, 결국에는 현실역사와 마르크스주의 이론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기에 동일한 종류의 것임에도 훨씬 더 심각한 오해일 것이다. 이 오해는 마르크스주의 안에서 하나의 역사주의를, 그리고 모든 역사주의들 가운데에서 가장 발본적인 역사주의인 하나의 ‘절대적 역사주의’를 보는(voit) 그러한 오류(bévue) 내에 자리하고 있다.[1] 이러한 확언은, 역사과학과 마르크스주의 철학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라는 유형 하에서[차원 내에서], 마르크스주의 철학이 현실역사와 맺는 관계를 무대 위에 상연한다.
***
나는 마르크스주의가 이론적 관점에서 인간주의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cf. 프랑스어판 『마르크스를 위하여』, p. 225 sq.) 역사주의가 아니라는 점을, 적지 않은 상황들에서 인간주의와 역사주의 둘 모두가 동일한 이데올로기적 문제설정에 토대해 있다는 점을, 그리고 이론적으로 말해 마르크스주의는, 동일한 운동을 통해 그리고 이 마르크스주의를 정초하는 유일한 인식론적 단절로 인해 하나의 반(anti)인간주의이자 하나의 반(anti)역사주의라는 점을 주장하고자 한다.[2] 게다가 나는 엄밀한 방식으로 하나의 무-인간주의와 하나의 무-역사주의라고 말해야만 할 것이다.[3] 하지만 나는 단절에 대한 선언 -이 단절에 대한 선언은 자명한(aller de soi) 것이기는커녕 이와는 정반대로 수행(consommer)하기에 매우 까다로운 것이다- 이 지니는 모든 무게를 이 무-인간주의와 무-역사주의에 부여하기 위해, 단순한 부정접두사의 형태[즉 ‘무’] 대신에 이러한 이중으로 부정적인[‘반’의] 정식(반인간주의와 반역사주의)을 의식적으로 활용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40년 전부터 몇몇 영역들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끊임없이 위협하고 있는 인간주의와 역사주의의 공격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단순한 부정접두사의 활용만으로는 전혀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떠한 정황들에서 마르크스에 대한 이러한 인간주의적이고 역사주의적인 해석이 탄생했는지, 그리고 어떠한 최근의 정황들이 이 해석에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했는지 완벽히 알고 있다. 이 해석은 1917년 러시아혁명에 선행하는 기간에, 그리고 특히 러시아혁명 바로 이후의 몇 년간에, 제2인터내셔널의 기계론과 경제주의에 대항하는 맹렬한 반격(réaction) 속에서 탄생했다. 이 해석은, 상당히 다른 형태 하에서라고는 할지라도 ‘개인숭배’의 범죄와 도그마적 오류에 대한 소련 공산당 20차 당대회의 고발 직후에 이루어진 이 해석에 대한 최근의 부활이 몇몇 역사적 권리[정당성]를 지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실제적인 역사적 공적(mérites)을 자신의 권리로 지니고 있다. 만일 최근에 이루어진 이러한 새로운 생명력의 부여가 [러시아혁명 시기에 이루어진, 인간주의적이고 역사주의적인 해석을 통한 반격의] 반복에 불과한 것이라면,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혁명적 정신의 저항적 힘을 그 당시 지니고 있었던 이 역사적 반격에 대한 자비로운 혹은 능수능란한 하지만 ‘우익적’인 우회에 불과한 것이라면([물론 이는 표면적으로는] ‘좌익주의적’인 것이긴 했지만), 이러한 해석의 최초 상태의 역사적 의미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제2인터내셔널에 적용하는 기준(norme)과 동일한 기준을 활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바로 독일 좌파 즉 처음에는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와 프란츠 메링(Franz Mehring)의 독일 좌파, 그 다음에는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의 일련의 모든 이론가들(이들 중 몇몇은 코르쉬와 같이 그 영향력을 상실하기도 했으나, 루카치와 같은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그람시와 같은 또 다른 이들의 경우에는 영향력 있는 역할을 수행했다)로 구성된 독일 좌파 주위에서 혁명적 인간주의와 혁명적 역사주의에 대한 주제들이 확립되었다. 우리는 레닌이 어떠한 용어들로 제2인터내셔널의 기계론적 진부함에 대항하는 ‘좌익주의화된’ 이러한 반격 운동을 평가했는지 알고 있다. 레닌은, 예를 들어 로자 룩셈부르크와 그람시가 그 당시 진정으로 혁명적인 것을 포함하고 있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cf. 『좌익주의 혹은 공산주의의 소아병』에서) 이 ‘좌익주의화된’ 반격 운동의 이론적 우화들과 그 정치전술을 비판했다. 우리는 언젠가는 이 모든 과거를 명료히 밝혀내야만 할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이고 이론적인 연구는, 우리의 현재 그 자체 내에서 실제 인물들을 유령들로부터 제대로 구별해내기 위해서는, 그리고 제2인터내셔널의 기계론과 숙명론에 대항하는 반격이 역사가 인간들에게 그 수행의 임무를 부과했던 혁명을 결국 완수해내고자 한다면 이 인간들의 의식과 의지에 대한 호소라는 형태를 취해야만 했던 그러한 혼란스러운 전장에서 그 당시 수행되어야만 했던 비판의 결과들을 이론의 여지없이 탄탄한 토대들 위에 자리잡게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바로 그 때에 아마도 우리는, 그람시가 1917년의 반자본주의적 혁명이, 제2인터내셔널이 마치 성경에서와 같이 사회주의의 숙명적 도래를 읽어냈던 한 권의 [대문자] 책[즉 『자본』]으로 인해서가 아니라 인간들과 대중들과 볼셰비키들의 의지적이고 의식적인 행위를 통해, 칼 마르크스의 『자본』에 반해서 수행되어야만 했다는 점을 명확히 강조하는 『자본』에 반하는 혁명을 격찬했던 그 유명한 그의 저술의 제목[즉 ‘『자본』에 반하는 혁명’]의 역설을 조금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4]
이러한 인간주의와 역사주의의 ‘좌익주의적’인 최초 형태[러시아혁명 당시 등장했던 형태]를 생산해냈던 조건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기다리면서도, 우리는 마르크스 그 자신 안에서 이러한 해석을 승인해줄 수 있었던 바를, 그리고 분명 오늘날의 마르크스 독자들의 눈에 이 해석의 최근 형태를 성공적으로 정당화해주는 것으로 보이는 바를 식별할 수 있다. 우리는 기계론적이고 진화주의적인 독해에 자양분을 공급할 수 있었던 정식화에서의 그 동일한 모호성들이 이와 동시에 역사주의적 독해 또한 승인해 주었다는 점을 발견하고 놀라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레닌은, 기회주의와 좌익주의의 역설적 마주침이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지 않도록, 이 기회주의와 좌익주의의 공통의 이론적 토대에 대한 충분한 예시들을 제공했다.
이제 정식화에서의 모호성들을 언급해보도록 하겠다. 바로 이 지점에서 여전히, 우리는 우리가 이미 그 효과를 가늠한 바 있던 하나의 현실에 부딪혀 넘어지게 된다. 자신의 저작 속에서 자신을 자신의 전임자들로부터 분리시키는 구별을 온전히 생산해냈던 마르크스가, 결국 이는 모든 발명가들의 공통된 운명이기는 한데, 충분히 완전한 선명성을 가지고서 이러한 구별의 개념을 사고하지는 않았다는 현실 말이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이론적으로 혁명적인 사유행보(démarche)에 대한 이론적 개념과 함의들을 적합하고 발전된[전개된] 하나의 형태 하에서 이론적으로 사고하지는 않았다.[5] 때로 마르크스는 이 사유행보를 (더 나은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부분적으로는 다른 이들로부터 차용해온 개념들(특히 그 무엇보다도 헤겔적 개념들) 내에서 사고했는데, 이는 이 개념들을 차용해온 장소인 본원적인 의미론적(sémantique originaire) 장과 이 개념들이 적용되었던 장소인 개념적 대상들의 장 사이의 어긋남이라는 효과를 초래했다. 때로 마르크스는 이러한 차이 그 자체를 사고했는데, 하지만 부분적으로만 혹은 하나의 개요적 지표(esquisse d’une indication) 내에서, 이 개념들의 등가물들[이 개념들과 동일한 가치를 지니는 것들]에 대한 끈질긴 탐구 내에서,[6] 하지만 한 개념의 적합성 내에서 자신이 생산해냈던 바에 대한 엄밀한 본원적 의미(sens original)를 언표하는 데에는 단숨에 성공해내지 못하면서 사고했다. 하나의 비판적 독해를 통해서만 식별될 수 있으며 제거될 수 있는 이러한 어긋남은 마르크스의 담론의 텍스트 그 자체의 객관적 일부를 이룬다.[7]
바로 이 때문에, 모든 경향적 이유들을 논외로 한다면, 마르크스의 그토록 많은 상속자들과 지지자들이 마르크스 자신의 텍스트들을 손에 쥐고서 이 텍스트들의 문자 그대로에 자신들은 충실히 남아있다고 주장(prétendant)하면서도 그의 사유에 대한 부정확한 해석들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8]
이 지점에서 나는 이 경우 어떠한 텍스트들 위에 우리가 마르크스에 대한 역사주의적 독해를 정초할 수 있는지 보여주기 위해 세부지점으로 들어가보고자 한다. 나는 마르크스의 [대문자] 청년기의 혹은 [대문자] 절단의 텍스트들(프랑스어판 『마르크스를 위하여』, p. 26)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이 [대문자] 청년기[특히 1844년의 『경제학-철학 수고』] 혹은 [대문자] 절단[특히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들」과 『독일 이데올로기』]의 텍스트들 위에 이 역사주의적 독해를 정초할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은 [『마르크스를 위하여』에서 내가 이미 보여주었듯] 손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들」이나 『독일 이데올로기』와 같은 인간주의적이고 역사주의적인 심원한 반향이 여전히 울려퍼지고 있는 텍스트들에, 이 텍스트들로부터 우리가 기대하는 단어들을 이 텍스트들이 발음하도록 만들기 위해, 폭력을 가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이 텍스트들은 이 단어들을 다른 이들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발음하기 때문이다. 나는 『자본』과 1857년의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의 「서설」에 대해서만 언급하도록 하겠다.
마르크스에 대한 역사주의적 독해가 의거할 수 있는 그러한 마르크스의 텍스트들은 두 가지 집합으로 그러모아질 수 있다. 첫 번째 집합은 그 안에서 역사적 과학 전체의 대상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그러한 조건들에 대한 정의와 관계된다.[9]
1857년의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의 「서설」에서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쓴다.
(…) 역사적 과학 혹은 사회적 과학 일반에서, 경제적 범주들의 진행과 관련해, 주체 즉 여기에서는 근대 부르주아 [시민]사회가 현실 속에서 뿐만 아니라 두뇌 속에서도 주어진다는 점, 따라서 [경제적] 범주들은 이 주체의, 이 규정된 사회[근대 부르주아 시민사회]의 존재형태들, 규정된 존재조건들, 때로는 규정된 단순한 측면들 등을 표현한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p. 170/국역본 77쪽)
우리는 이 텍스트를 『자본』의 한 구절과 상호접근시킬 수 있다(『자본』, I. p. 87/강신준 판 국역본 1권 38쪽).
사회적 삶의 형태들에 대한 성찰[이론], 그러니까 결국 이 사회적 삶의 형태들에 대한 과학적 분석은 현실적 운동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하나의 길을 따른다. 이러한 성찰 또는 분석은 이미 전체가 확립된 소여들과 함께, 발전[전개]의 결과들과 함께 사후적으로 시작된다(…).[10]
이 텍스트들은 사회적 과학과 역사적 과학 전체의 대상이 [이미] 생성된(devenu) 하나의 대상, 즉 하나의 결과라는 점 뿐만 아니라 이 대상에 적용되는 인식 활동 또한 이 소여의 현재에 의해, 이 소여의 현행적 계기에 의해 정의된다는 점 또한 지시한다. 이는 크로체의 표현을 다시 취해 몇몇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 해석가들이 ‘역사적 현재’의 ‘동시대성’의 범주, 하나의 역사적 대상을 취급하는 인식 전체의 조건을 역사적으로 그러니까 역사적인 조건으로 정의하는 그러한 범주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미 알다시피 이 동시대성이라는 용어는 하나의 모호함을 내포하고 있다.
마르크스 자신 또한 1857년의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의 「서설」에서, 위에서 인용했던 텍스트보다 몇 줄 전에, 이 절대적 조건을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우리가 역사적 발전[전개]이라고 부르는 바는 [이 역사적 발전(또는 전개)에서의] 마지막 형태가 과거의 형태들을 자신의[즉 마지막 형태의] 발전[전개] 단계로 이끌어주는 그러한 단계들로 간주한다는 사실에 기초해 있다. 그러나 이 마지막 형태는 제대로 규정된 조건 내에서가 아니라면 자기 자신에 대해 스스로가 행하는 비판을 거의 대부분의 경우 행하지 못하기에 (…) 이 마지막 형태는 과거의 형태들을 항상 하나의 일면적 양상 하에서만 개념화한다. 기독교는 어느 특정 정도에 이르기까지, 말하자면 그 가능성에 있어서, 자기 자신에 대해 스스로가 행하는 비판을 완수한 뒤에야만 이전의 신화들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작업을 도울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은 부르주아 사회가 스스로 행하는 자기비판이 시작되는 그날이 되어서야 봉건사회, 고대사회, 동양사회를 이해하는 데에 이르게 되었다(…)(1857년의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의 「서설」, p. 170/국역본 77쪽).[11]
나는 이 텍스트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도록 하겠다. 하나의 역사적 대상을 취하는 과학 전체(그리고 특히 정치경제학이라는 과학)는 주어진 그리고 현재의 역사적 대상, 과거 역사의 결과(résultat)로 생성된(devenu) 대상을 취급한다고 말이다. 따라서 현재로부터 출발하는 그리고 하나의 생성된-대상(objet-devenu)을 취급하는 인식의 실행 전체는 이 대상의 현재를 이 대상의 과거에 투사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반영적’(réfléchissante) 역사학인 『역사철학 입문』(Introduction à la philosophie de l’Histoire)에서 헤겔이 비판했던 바인 회고(rétrospection)를 바로 이 지점에서 기술하는 것이다. 이러한 불가피한 회고는, 만일 현재가 자기 자신에 대한 과학에, 자기 자신에 대한 비판에, 이 과학에 대한 자기비판에 도달하는 데에 성공한다면, 다시 말해 만일 현재가 본질을 가시적인 것으로 만드는 하나의 ‘본질적 절단면’이라면, 바로 그러할 때에만 과학적인 것이 된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 두 번째 집합의 텍스트들이 개입해 들어온다. 즉, 이 지점은 우리가 마르크스 자신의 역사주의에 관해 말할 수 있는 결정적 지점이다. 이 결정적 지점은 위에서 언급했던 텍스트에서 마르크스가 현재에 대한 “자기비판의 잘 규정된 조건들”이라 부르는 바와 정확히 관련된다.[12] 이를 다음과 같이 이해하도록 하자. 어떠한 한 현재의 자기의식[자기에 대한 의식](conscience de soi)의 회고가 주관적이기를 멈추려면, 이 현재가 스스로 자기비판할 수 있어야 하며 결국 이를 통해 자기에 대한 과학(science de soi)에까지 도달해야 한다고 말이다.[13] 그런데 만일 우리가 정치경제학의 역사로 고개를 돌린다면 우리는 무엇을 보게 되는가? 우리는 자신들의 현재가 취하는 한계 내에 갇혀서 사고하는 것 이외에는, 그러니까 자신들의 시간을 넘어서 튀어오를 수 없어서 이렇게 사고하는 것 이외에는 그 무엇도 하지 않은 그러한 사상가들을 보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그의 모든 천재성은 그로 하여금 수량이 x인 대상 A = 수량이 y 인 대상 B 라는 동등성(égalité)을 등식(égalité)으로 써내려가도록, 그리고 이 등식의 공통적 실체가 부조리하기에 사고 불가능한 것이라는 점을 선언하는 것만을 허락했을 뿐이다. 이러한 도중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시대의 한계를 건드렸다. 그런데 도대체 누가 아리스토텔레스로 하여금 자신의 시대의 한계를 넘어 나아가도록 하는 것을 가로막았는가?
모든 노동이 상품가치의 형태 내에서 무차별적[동질적](indistinct) 인간 노동으로 표현된다는, 따라서 결국 [모두] 동등한(égaux) 것으로 표현된다는 점을 아리스토텔레스로 하여금 이 상품의 가치형태 내에서 읽어내지(lire, herauslesen) 못하도록 가로막았던 것은 그리스 사회가 노예 노동에 기초해 있었으며 그 자연적 토대로서 인간들의 불평등(inégalité)과 이 인간들의 노동력의 불평등을 취하고 있었다는 점이다(『자본』, I, p. 73/강신준 판 국역본 1권 119쪽).
아리스토텔레스로 하여금 이러한 천재적 직관의 독해를 행할 수 있게 허락했던 그 현재는, 이와 동시에, 바로 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신이 제기했던 질문을 해결하는 것을 금지했다.[14] 고전파 정치경제학의 모든 위대한 발명가들에게도 사태는 동일하다. 중상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시대의 화폐정책을 가지고서 화폐이론을 만듦으로써, 자기 자신들의 고유한 현재를 반영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중농주의자들은, 잉여가치에 대한 천재적인 이론을, 하지만 자연적 잉여가치에 대한, 그러니까 밀이 자라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그리고 이 밀을 생산하는 농업 노동자가 소비하지 않은 잉여(surplus)가 농장주의 곳간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그러한 농업 노동의 잉여가치에 대한 천재적인 이론을 소묘함으로써 자기 자신들의 고유한 현재를 반영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이러한 도중에, 중농주의자들은 자기 자신들의 현재의 본질을, 즉 마르크스가 열거하는 노르망디, 피카르디, 일-드-프랑스의 뒤를 잇는(『반-뒤링』, E. S., chapitre X, p. 283) 파리 분지의 비옥한 평원에서의 농업자본주의의 발전을 언표하고 있었을 뿐이다.[15] 이 중농주의자들 또한 자기 자신들의 시간[즉 현재]을 넘어서 튀어오를 수는 없었다. 이들은 자기 자신들의 시간[즉 현재]이 자기 자신들에게 하나의 가시적 형태로 인식을 제공하는, 그리고 그 의식을 위해 이러한 인식을 생산하는 한에서만 이 인식에 도달하는 데에 성공할 수 있었다. 결국 이 중농주의자들은 그들이 보았던 것을 기술했[을 뿐이었]던 것이다. 스미스와 리카도는 이보다 더 멀리 나아가 자신들이 보지 못했던 것조차도 기술했는가? 스마스와 리카도는 자기 자신들의 시대를 넘어서 튀어올랐는가? 아니다. 만일 스미스와 리카도가 자기 자신들의 현재에 대한 단순한 의식과는 다른 것으로서 하나의 과학에 도달하는 데에 성공했다면, 이는 이들의 의식이 이 현재에 대한 진정한 자기비판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기비판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했는가? 그 원리에서 헤겔적인 이러한 해석 논리 내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게 된다. 스미스와 리카도는 자기 자신들의 현재의 의식 내에서, 이 의식이 의식으로서[의식 그 자체로서]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기비판 그러니까 자기에 대한 과학이었기 때문에, 과학 그 자체에 도달했다고 말이다.[16]
달리 말해, 스미스와 리카도가 살아가고 있으며 살아내었던 현재의 특징, 즉 이 현재를 다른 모든 (과거의) 현재들로부터 구별해주는 그러한 특징은, 최초로 이 현재가 자기 자신 내에서[즉자적으로](en soi)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기 스스로의 비판(sa propre critique de soi)을 생산했다는, 따라서 이 현재가 자기의식[자기에 대한 의식]이라는 형태 그 자체 내에서 자기에 대한 과학[자기과학]을 생산하는 그러한 역사적 특권을 가졌다는 점이다.[17] 하지만 이 현재는 하나의 이름을 지니게 된다. 이는 절대지[절대적 지식]의 현재라는 이름이며, 이 현재에서 의식과 과학은 일체를 이루고, 이 현재에서 과학은 의식의 무매개적 형태 내에서 존재하며, 이 현재에서 진리는 직접적으로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약간의 노력만 기울이면 현상들 내에서 펼쳐진 책을 읽는 것과 같이 손쉽게 읽어낼 수 있다(왜냐하면 현상들 내에서, 현실적인 경험적 존재 내에서, 추상들 -고찰된 사회-역사적 과학 전체가 그 위에 기초해 있는- 이 실제적으로 현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언급한 뒤 곧바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노동이 인간 노동이기 때문에, 그리고 모든 노동이 인간 노동이라는 점에서, 이 모든 노동을 동등(égalité)하고 등가(équivalence)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가치표현의 비밀은 인간의 동등성[평등]이라는 관념이 인민적 선입견(préjugé populaire)의 뿌리깊은 성격[즉 사회 전체로의 일반화]을 이미 획득했을 때에만 풀릴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상품형태가 노동생산물이라는 일반형태가 되는 하나의 사회 내에서만, 그래서 인간들이 자신들 사이에서 상품의 생산자와 교환자로서 맺는 관계가 지배적인 사회적 관계인 그러한 하나의 사회 내에서만 가능하다(…)(『자본』, I, p. 75/강신준 판 국역본 1권 119쪽).
혹은 다르게 말하여,
(…) 다음과 같은 과학적 진리가, 즉 서로가 서로에 대해 독립적인 방식으로 실행되는 사적 노동들이, 비록 이 사적 노동들이 분업의 자연발생적 사회체계의 가지들(ramifications)로서 서로 얽히고설키게 된다고는 해도, 이 사적 노동들에 대한 사회적 비율 척도로 지속적으로 포섭된다(...)는 과학적 진리가, 경험 그 자체로부터 드러나기 위해서는 이미 상품생산이 완전히 발전되어 있어야만 한다(…)(『자본』, I, p. 87/강신준 판 국역본 1권 138쪽).
가치로서의 노동생산물이[즉 노동생산물의 가치가] 이 노동생산물의 생산 내에서 지출된 인간 노동의 순수하고 단순한 표현이라는 (…) 과학적 발견은 인류의 발전에서 하나의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표시한다(『자본』, I, p. 86/강신준 판 국역본 1권 137쪽).
여기에서 [대문자] 정치경제학이라는 과학을 정초하는 이러한 역사적 시대(époque)는 경험(Erfahrung) 그 자체와의, 다시 말해 현상 내에서의 본질에 대한 가시적(à ciel ouvert) 독해와의, 혹은 우리가 다음과 같은 표현을 더 선호한다면, 현재의 단면(tranche du présent)의 본질적 절단면(coupe de l’essence)으로의 독해와의 온전한 관계맺음인 것처럼, 상품생산의 일반화 그러니까 상품이라는 범주의 일반화가 절대적 가능조건으로서와 동시에 이러한 경험으로부터의 직접적 독해로부터 얻어진 무매개적 소여로서도 나타나는 장소로서의 인간 역사의 특수한(particulière) 한 시대의 본질과의 온전한 관계맺음인 것처럼 보인다. 사실, 1857년의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의 「서설」에서뿐만 아니라 『자본』에서도, 노동 일반 즉 추상적 노동이라는 이러한 현실은 자본주의적 생산에 의한 하나의 현상적 현실로 생산된다고 말해진다. 어떤 의미에서 역사는 벌써 이러한 지점에 도달하여, 과학적 추상들이 경험적 현실들의 상태로 존재하는 장소로서의, 과학과 과학적 개념들이 백일하에 드러난(à ciel ouvert) 진리들로서 경험의 가시적인 것의 형태 내에서 존재하는 장소로서의 이러한 예외적인 특수한 현재를 이미 생산했을 것이다.
1857년의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의 「서설」에서 마르크스는 이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노동 일반이라는 이러한 추상은 노동들의 구체적 총체성에 대한 사고(geistige) 내에서의 결과일 뿐인 것이 아니다. 이러저러한 규정된 노동들에서의 무차별성(indifférence)은 하나의 사회형태, 즉 그 안에서 규정된 개인들이 하나의 노동에서 다른 하나의 노동으로 손쉽게 이동하는, 그리고 그 안에서 노동의 일정한 한 종류가 이 개인들에게는 우연적인 것일 뿐인 그러니까 무차별적인 것일 뿐인 그러한 하나의 사회형태에 조응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노동은 범주 내에서뿐만 아니라 현실 그 자체 내에서(in der Wirklichkeit)도 부 일반을 창조하는 수단이 되었으며, 규정으로서 이 노동은, 어떠한 개별 양상 하에서의 개인이든간에 이 개인들과 일체를 이루는 것에 불과할 뿐임을 멈추게 되었다. 이러한 사물의 상태는 부르주아 사회들 중 가장 근대적인 존재형태인 미국에서 그 가장 높은 발전 정도에 도달했다. 바로 여기에서만 ‘노동’, ‘노동 일반’, 노동 ‘그 자체’(sans phrase)라는 범주의 추상은, 근대경제의 출발점으로서, 실천적 진리가 된다(wird praktisch wahr). 이로 인해, 근대경제가 제일 앞줄에 위치시키는, 그리고 모든 사회형태에 유효(valable)하며 매우 의고적인 하나의 관계를 표현하는 그러한 가장 단순한 추상은 가장 근대적인 사회의 범주로서만 실천적 진리(praktisch wahr)로서의 이 추상적 형태 하에서 나타나게 된다(1857년의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의 「서설」, pp. 168-169, 강조는 알튀세르/국역본 75쪽).
만일 자본주의적 생산의 현재가 그 가시적 현실(Wirklichkeit, Erscheinung, Erfahrung) 내에서, 그 자기의식 내에서 과학적 진리 그 자체를 생산해냈다면, 그래서 만일 이 현재의 자기의식이, 이 현재 고유의 현상이 현행적으로(en acte) 이 현재 고유의 자기비판이라면, 우리는 과거에 대한 현재의 회고(rétrospection du présent sur le passé)가 더 이상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참된 인식이라는 점을 완벽히 이해하게 되며, 또한 우리는 현재의 과거에 대한 정당한 인식론적 우위를 포착하게 된다.
부르주아 [시민]사회는 존재하는 것들 가장 발전된, 가장 다양한 역사적 생산조직이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이러한 사회의 관계들을 표현하는 그리고 이 사회의 구조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범주들은, 이와 동시에, 그 잔해들과 요소들을 남겨두고 사라져버린 [이전] 사회형태들 전체 -이 잔해들과 요소들로부터 이 사회가 구축되었으며, 부분적으로는 아직 지양되지 않은 그 몇몇 흔적들이 이 사회 내에서 지속적으로 잔존하게 되며, 몇몇 단순한 그 기호들(signes)은 스스로 발전함으로써 자신들의 의미(signification) 전체를 가지게 된다- 의 생산관계들과 생산구조를 해명할 수 있게 해준다. 결국 인간의 해부학은 원숭이의 해부학의 열쇠인 것이다. 열등한 동물 종의 경우에서, 우리는 우등한 형태가 그 자체로 이미 인식되었을 때에만 우등한 형태를 예고하는 기호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부르주아 경제는 우리에게 고대 경제 등의 [이해를 위한] 열쇠를 제공하는 것이다(1857년의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의 「서설」, p. 169/국역본 76쪽).
경제의 역사[경제사] 전체(혹은 다른 종류의 역사들)를 (예를 들어 상품 내에 무매개적으로 현존하는 가치와 같은) 하나의 단순하고 원시적(primitive)이며 기원적(originaire)인 형태의 (헤겔적 의미에서의) 전개로 개념화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자본』을 가치 범주 혹은 더 나아가 노동 범주와 같은 하나의 기원적 범주로부터 출발해 모든 경제적 범주들을 논리-역사적으로 연역하는 작업으로 독해하기 위해서는, 절대지의 논리에서 한 걸음 더 넘어서는 것, 의식과 동일한(identique) 하나의 과학의 현재 내에서 정점에 도달하여 완성되는 역사의 전개를 사고하는 것, 그리고 정초된 회고 내에서 이 결과를 반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런데 이러한 조건 하에서, 『자본』의 서술 방법은 개념의 사변적 발생과 혼동된다. 심지어, 개념에 대한 이러한 사변적 발생은 현실구체 그 자체의 발생과, 다시 말해 경험적 역사의 과정과 동일한 것이 되고 만다. 이럴 경우 [『자본』과 마주해] 우리는 하나의 헤겔적 본질의 저작 앞에 놓여 있게 될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출발점이라는 질문이, 모든 것이 이 출발점 즉 『자본』 1권 1편 1장에 대한 오해에 기반한(malentendue) [잘못된] 독해 내에서 작동할 수 있기에, 하나의 비판적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또한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글에서 이전 설명들을 통해 이미 내가 보여주었듯, 모든 비판적 독해가 이러한 오해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자본』 1권 1편 1장의 개념들의 지위와 분석양식의 지위를 명확히 해명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주의의 형태는, 이 역사주의의 형태가 절대-지(savoir-absolu)의 부정에서 그 정점에 도달하고 이 절대-지의 부정 안에서 말소되는 한에서, 하나의 한계-형태로 간주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이 역사주의의 형태를, 이 역사주의의 형태가 우리를 다른 역사주의의 형태들에 대한 이해를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이 다른 역사주의의 형태들 -비록 종종 더욱 ‘발본적’이기도 하지만 덜 확정적(péremptoires)이고 종종 덜 가시적인- 의 공통된 모체로 간주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증거로서 나는, 종종은 의식적으로 종종은 무의식적으로 몇몇 마르크스주의 해석가들, 프랑스의 해석가들과 마찬가지로 특히 이탈리아의 해석가들의 저작을 물들이고 있는 역사주의의 동시대 형태들을 제시하고 싶다. 바로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 전통 내에서 ‘절대적 역사주의’로서의 마르크스주의 해석이 가장 선명한 특징과 가장 엄밀한 형태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약간의 지면을 할애해 내가 이 점에 대해 강조하는 것을 허락해주길 바란다.
이러한 전통은 라브리올라와 크로체로부터 이 전통의 상당 부분을 상속받은 그람시에게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람시에 대해 다루어야만 한다. 하지만 나는, 놀라울 정도로 미묘하며 섬세한 그람시의 천재적 저작을 필연적으로 도식적일 수밖에 없는 나의 언급들을 통해 왜곡하지는 않을까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그람시적인 변증법적 유물론 해석을 대상으로 해서만 내가 정식화하고자 하는 나의 이론적 유보를 나도 모르게 독자들로 하여금 역사유물론이라는 영역 내에서의 그람시의 비옥한 발견들로까지 확장하도록 잘못 이끌지는 않을까에 대해서도 걱정하기에, 나는 매우 깊은 거리낌[주저함]을 느끼면서 이렇게 그람시를 다루고자 한다. 따라서 독자들은 그람시의 변증법적 유물론 해석과 역사유물론 해석 사이에 존재하는 구별을 잘 유념해야 한다. 이러한 구별이 없다면 나의 이러한 비판적 성찰 시도는 그 한계를 넘어가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나는 다음과 같은 기초적인 대비행위(précaution)를 수행하도록 하겠다. 나는 어떠한 경우에서도, 그리고 그 어떠한 구실(prétexte)이나 그람시의 그 어떠한 텍스트(texte)를 가지고서도, 그람시를 그 자신이 했던 말들 그 자체를 가지고서 무매개적으로 이해하기를 거부할 것이다.[18] 나는 그람시의 이 말들을, 이 말들이 그람시의 가장 심원한 철학적 문제설정에 진정으로 속하는 그러한 ‘유기적’ 개념들을 통해 승인된 기능을 수행할 때에만 -그러니까 이 말들이 하나의 논쟁적 역할이든 혹은 하나의 ‘실천적’ 지시의 기능(기존의 하나의 문제 혹은 하나의 대상에 대한 지시이든 하나의 문제를 제대로 제기하고 해결하기 위해 취해야 할 방향에 대한 지시이든)이든 이를 떠맡게 된 언어의 역할을 수행할 때만이 아니라- 취하도록 하겠다. 예를 들어, 크로체에 대한 그람시의 유명한 주석과 같이(Il Materialismo Storico e la Filosofia di B. Croce, Einaudi, p. 159) 하나의 논쟁적인 텍스트에 대한 처음으로 행한[즉 피상적인] 독해를 통해 그람시를 ‘절대적’인 ‘인간주의자’이자 ‘역사주의자’로 선언하는 것은 그람시의 의도를 부당하게 비난하는 일에 불과할 것이다.
헤겔주의는 우리의 저자[즉 크로체]가 철학을 하는(philosopher) 이유들 중 (상대적으로) 가장 중요한 이유임에 틀림없다. 특히 그리고 또한, 왜냐하면 헤겔주의는 그 어떠한 의심의 여지도 없이 탁월한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던, 그리고 철학적 탐구의 세계-역사적인 한 계기를 표상하는, 관념론과 유물론의 전통적 개념화들을 하나의 새로운 종합을 통해 지양하고자 시도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크로체의) 『에세이』(Essai)에서 프락시스의 철학의 ‘내재성’(immanence)이라는 용어가 은유적 의미에서 활용될 때, 우리가 그 무엇도 말하지 않게 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사실, 내재성이라는 용어는 ‘범신론자들’이 부여하는 의미가 아닌, 그리고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의미를 전혀 지니고 있지 않은, 하지만 새로운 것이며 [그 의미가] 확정되어야만 하는 그러한 하나의 특별한 의미를 획득했다. 매우 광범위하게 통용되는 역사유물론이라는 표현 내에서 우리는, 우리가 유물론이라는 형이상학적 기원의 첫 번째 단어가 아니라 역사라는 두 번째 단어를 강조해야 한다는 점을 망각했다.[19] 프락시스의 철학은 절대적 ‘역사주의’, 사유에 대한 절대적 세속화(mondanisation)와 ‘세속성’(terrestrité), 역사에 대한 절대적 인간주의이다. 바로 이러한 방향으로 우리는 세계(monde)에 대한 새로운 개념화의 광맥을 파고 들어가야만 한다.[20]
그람시의 이러한 ‘절대적’인 ‘인간주의적’이고 ‘역사주의적’인 확언들이 무엇보다도 우선 비판적이고 논쟁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점은 너무나 명확하다. 이 주장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 1) 마르크스주의 철학에 대한 모든 형이상학적 해석을 거부하기, 2) 이전의 형이상학들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시키기 위해, 마르크스주의적 개념화가 확립되어야만 하는 장소와 이 장소의 방향성을 ‘실천적’ 개념들로서[21] 지시하기. 여기에서 이 장소란 마르크스가 이미 고전 철학들의 초월성 즉 저편(jenseits)을 ‘diesseits’(우리의 이편)의 자격으로 대립시켰던 ‘내재성’ 즉 ‘이편’의 장소이다.[22] 이러한 구별은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들」 중 두 번째 테제로 그 용어 그대로 등장한다.[23] 그러나 이미 우리는, 그람시에 의해 단 하나의 유일하고 동일한 기능을 지닌 하나의 쌍으로 묶여진 이 두 개념들(인간주의와 역사주의)의 ‘실천적-지시적’ 본성으로부터, 최초의 결론을, 분명 그 자체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이론적으로 중요한 그러한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게 된다. 만일 이 개념들이 지시적-논쟁적인 것이라면, 이 개념들은 하나의 탐구가 진입해야만 하는 방향을,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해석의 문제가 제기되어야 하는 공간으로서의 영역 유형을, 하지만 이러한 해석의 실정적 개념을 제시하지는 않으면서 분명히 지시하는 것이다. 그람시의 해석을 판단할 수 있기 위해, 우선 우리는 이 해석을 표현하는 실정적 개념들을 해명해야만 한다. 결국 그람시가 ‘절대적 역사주의’라는 용어를 통해 의미하는 바는 도대체 무엇인가?
만일 우리가 그람시의 정식화들이 지니는 비판적 의도를 넘어선다면, 무엇보다도 우선 우리는 그 첫 번째 실정적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마르크스주의를 하나의 역사주의로 제시함으로써, 그람시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본질적인 하나의 결정작용을, 즉 현실역사 내에서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실천적 역할을 강조한다. 그람시의 지속적인 관심사 중 하나는 그가 종교에 대한 크로체적 개념화를 자신의 것으로 다시 취하면서 거대한 ‘세계관들’ 혹은 ‘이데올로기들’이라고 부르는 바의 역사적-실천적 역할과 관계된다. 이 ‘세계관들’ 혹은 ‘이데올로기들’은, 인간들에게 그러니까 ‘지식인들’ 뿐만 아니라 또한 그리고 특히 ‘범박한 이들’(simples)에게도 세계의 흐름에 대한 일반적 관점과 동시에 실천적 품행의 규칙(règle de conduite) 또한 제공함으로써, 인간들의 실천적 삶 내에 침투할 수 있는, 그러니까 하나의 역사적 시대(époque) 전체에 영감과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그러한 이론적 형성물들이다.[24] 이러한 관계[의미] 하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주의란 이러한 과업과 이러한 필연성에 대한 의식일 뿐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이 마르크스주의가 자신의 이론 그 자체 내에서 역사 내로의, 사회의 모든 층위들 내로의, 그리고 심지어는 인간들의 일상적 품행 내로까지의 이러한 침투의 조건을 사고하는 한에서만, 스스로가 역사 이론이라고 주장(prétendre)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관점 내에서 우리는, 예를 들어 철학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어야 하며 역사가 되어야 한다고, 현실 철학자는 정치가와 다를 바 없다고, 철학, 정치학, 역사학은 결국 단 하나의 유일하고 동일한 것이라고 말하는 그람시의 몇몇 정식화들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25] 바로 이러한 관점을 통해서 우리는 그람시의 지식인과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론을, 다소간 주관적이며 자의적인 이데올로기들을 생산할 수 있는 개인적 지식인들과 ‘유기적’ 지식인들 혹은 ‘집합적 지식인’(즉 당) -자신의 ‘세계관’(혹은 유기적 이데올로기)을 모든 인간들의 일상적 삶 안으로 집어넣음으로써 하나의 지배적 계급이 자신의 ‘헤게모니’를 확립하게 해주는- 사이의 구분을 이해하고 그람시의 마키아벨리적 [대문자] ‘군주’에 대한 해석 -[그람시에게서는] 현대의 공산당이 새로운 조건 등등 속에서 그 유산을 자신의 것으로 다시 취하는 것인데- 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경우에서, 단지 그람시는 실천적으로뿐만 아니라 의식적으로, 그리고 이론적으로, 마르크스주의에 내재하는 이러한 필연성이 표현되도록 만들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주의는 잘 개념화된 자기 자신의 이론의 양상들과 효과들 중 하나에 불과하며,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주의는 자기 자신에 대해 일관적인(conséquente avec soi) 마르크스주의 자신의 이론에 불과한 것이다. 즉, [그람시에 따르면] 현실 역사에 대한 하나의 이론은, 그 또한 다른 ‘세계관들’이 아주 오래전에 행했던 바처럼, 현실 역사를 통과해야만 한다. 거대 종교들에서 참인 바는 마르크스주의 그 자체에 대해서도, 심지어는 더욱 강한 이유로, 참이어야만 한다. 마르크스주의와 이 이데올로기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또한 심지어는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 새로움으로 인해(왜냐하면 마르크스주의의 새로움은 자신의 이론 그 자체 내에 실천적 의미를 포함시키는 것에 놓여 있기 때문에), 바로 이 차이 그 자체 때문에 말이다.[26]
하지만 우리를 마르크스주의 이론 내부의 주제로 준거케 하는 이 ‘역사주의’의 마지막 의미가 여전히, 매우 거대한 부분에서 모든 ‘책상머리’(livresques)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마르크스주의를 현실에 대한 장악(prise) 없이 ‘개인적 철학들’(philosophies individuelles)의 운명 속으로 강림하도록 만든다고 주장하는(prétendent) 이들로 규탄하는 것을, 혹은 심지어는 정치적 행위와 현실역사로는 진입하지 않으면서 (크로체와 같이) ‘위로부터’(par le haut) 인간종을 교육시키기를(faire l’éducation) 원하는 르네상스 지식인들의 불행한 전통을 다시 취하는 모든 이데올로그들로 규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하나의 비판적 지표(indication critique)라는 점을 우리는 인지했을 것이다.[27] 그람시가 주장했던 역사주의는 이러한 이론과 그 ‘사상가들’의 귀족주의에 대항하는 강력한 저항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28] 제2인터내셔널의 책상머리 위선(pharisaïsme)에 대항하는 이전의 저항(즉 ‘『자본』에 반하는 혁명’)의 소리가 바로 이 그람시의 저항에서 여전히 반향하고 있다. 이는 ‘실천’, 정치적 행위, ‘세계의 변형’ -이것들이 없다면 마르크스주의는 도서관의 쥐들의 먹잇감이 혹은 수동적인 정치 공무원들의 먹잇감이 되고 말 것이다- 에 대한 직접적인 하나의 호소인 것이다.[29]
이러한 저항은 자기 자신 내에[즉자적으로](en soi)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대한 하나의 새로운 이론적 해석을 필연적으로 지니고 있는가? 필연적으로는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저항은, 하나의 절대적 호소라는 실천적 형태 하에서, 마르크스의 이론이 취하는 하나의 본질적 주제[테마]를, 즉 마르크스의 이론 그 자체 내에서, 마르크스에 의해 확립된 ‘이론’과 ‘실천’ 사이의 새로운 관계라는 주제를 [이 주제에 대한 새로운 이론적 해석을 제시함 없이] 단순하게 발전시키기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주제를 우리는 마르크스 자신에 의해 다음의 두 장소에서 사고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한편으로는 역사유물론(이데올로기들의 역할에 대한 이론, 그리고 기존 이데올로기들의 변형에서 과학적 이론의 역할에 대한 이론)이라는 장소, 다른 한편으로는 변증법적 유물론(우리가 ‘인식에 대한 유물론적 이론’이라고 일반적으로 부르는 바 내에서의 이론과 실천, 그리고 이 이론과 실천 사이의 관계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대상으로 하는)이라는 장소이다. 역사유물론과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이 두 경우 모두에서, 마르크스에 의해 생생하게 주장되는 바, 그리고 우리의 문제에서 쟁점이 되는 바, 그것은 바로 마르크스주의적 유물론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주의’(우리가 방금 정의했던 매우 정확한 의미에서)에 대해 그람시가 행했던 강조는 실제로는(en réalité) (역사유물론과 변증법적 유물론 모두에서의) 마르크스의 개념화가 지니는 단호하게 유물론적인 특징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현실(réalité)은 우리를 당황스러운 하나의 언급의 길 위에 서게 만들며, 이러한 당황스러운 하나의 언급은 모두가 동일한 정도로 우리에게 곤란을 초래하는 다음의 세 가지 측면을 포함한다. 1) 직접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이 유물론인 반면, 그람시는, “역사유물론”이라는 표현 내에서, 그에 따르면 “유물론이라는 ‘형이상학적 기원의’ 첫 번째 단어가 아니라 ‘역사’라는 두 번째 단어를 강조해야 한다”는 점을 선언한다. 2) 유물론에 대한 강조가 역사유물론뿐만 아니라 또한 변증법적 유물론과도 관계되어 있는 반면, 그람시는 역사유물론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더욱이, 그람시는 ‘유물론’이라는 표현이 ‘형이상학적’ 반향들을 필연적으로 초래하거나, 혹은 아마도 이러한 반향들 이상의 것을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3) 따라서 그람시가 [사실은] 역사에 대한 과학적 이론만을 유일하게 지시하는 것인 ‘역사유물론’이라는 표현에 두 가지 의미를 담지케 한다는 점은 명확하다. 그람시에게서 ‘역사유물론’이라는 표현은 역사유물론과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동시에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람시는 역사유물론이라는 단수의 것 내에서 역사이론과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사실은 구별되는 두 가지 영역[분과](disciplines)을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위에서 제시된 언급들과 [특히] 이 마지막 결론을 언표하기 위해, 나는 내가 [자의적으로] 분석하는 단 하나의 구절도 분명 나 스스로에게 허락치 않으며, 대신 그람시 자신의 매우 많은 수의 이론적 전개들 -이 이론적 전개들은 이 마지막 결론을 그 어떠한 모호함 없이 확인시켜주고 있는데, 그래서 이 이론적 전개들은 이 마지막 결론에 하나의 개념적 의미를 제시해주고 있다- 을 활용하도록 하겠다.[30]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가 그람시적 ‘역사주의’의 새로운 의미 -이번에는 우리가 더 이상 지시적, 논쟁적 혹은 비판적인 하나의 개념에 대한 정당한 활용으로는 환원할 수 없는, 대신 마르크스의 사고의 내용 그 자체를 대상으로 하는 하나의 이론적 해석으로 우리가 간주해야만 하는, 그래서 우리의 유보 혹은 비판 아래로 굴러 떨어질 수 있는- 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그람시에게서는, 이 개념에 대한 논쟁적이고 실천적인 의미를 넘어서, 마르크스에 대한 진정한 ‘역사주의적’ 개념화가 존재하는 것이다. 즉, 마르크스의 이론이 현실역사와 맺는 관계를 대상으로 하는 이론에 대한 ‘역사주의적’ 개념화 말이다. 만일 그람시가 종교에 대한 크로체적 이론에 지속적으로 사로잡혀 있다면 이는 전혀 우연이 아니다. 만일 그람시가 종교에 대한 크로체적 이론의 용어들을 수용한다면, 그리고 만일 그람시가 종교에 대한 크로체적 이론을 현실의 종교들로부터 마르크스주의라는 새로운 ‘세계관’으로까지 확장한다면, 만일 그람시가 이러한 관계[맥락] 하에서 이 종교들과 마르크스주의 사이에 그 어떠한 차이점도 설정하지 않는다면, 만일 그람시가 이 종교들과 마르크스주의를 ‘세계관’ 혹은 ‘이데올로기’라는 동일한 개념 아래 위치시킨다면, 만일 그람시가 마르크스주의를 이데올로기적 ‘세계관들’로부터 구별해주는 바가 모든 천상의 ‘내세’(au-delà)를 종결짓는 (유의미한importante) 형식적 차이라기보다는 절대적 내재성의 변별적 형태, 즉 과학성의 형태라는 점을 지적함 없이 종교, 이데올로기, 철학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그토록 손쉽게 동일시한다면, 이는 전혀 우연이 아니다. 심지어 ‘유기적’이기까지 한 이전의 종교들 혹은 이데올로기들과 마르크스주의 -이 마르크스주의는 그람시에게는 하나의 과학이며[과학임과 동시에], 대중들 속에서 하나의 새로운 이데올로기 형태(이번에는 이전과는 달리 하나의 과학 위에 기초해 있는 그러한 이데올로기인데, 이는 인류가 전혀 경험해본 적 없는 것이다)를 생산해냄으로써 인류 역사의 ‘유기적인’ 이데올로기가 되어야만 한다- 사이의 이러한 ‘절단’, 이 ‘절단’은 그람시에 의해 진정으로 성찰된 적이 없으며, 그는 현실역사 내에서 ‘프락시스의 철학’의 침투 요구와 그 실천적 조건에 너무나도 강하게 영향받아 이러한 절단과 이 절단의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결론들의 역사적 의미를 무시해버리고 만다. 이로 인해 그람시는 동일한 하나의 용어 하에서 역사에 대한 과학적 이론(역사유물론)과 마르크스주의 철학(변증법적 유물론)을 서로 결합하도록(réunir) 하는 경향을, 그리고 이러한 통일체를 하나의 ‘세계관’ 혹은 결국은 이전 종교들과 비교 가능한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사고하는 경향을 거의 대부분의 경우 취하게 된다. 게다가 그람시는 마르크스주의 과학과 현실역사 사이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지배적이며 활동적인) 하나의 ‘유기적’ 이데올로기와 현실역사 사이의 관계의 모델 위에서 사고하는 동일한 경향을, 결국 마르크스주의적인 과학이론[과학적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현실역사 사이의 이러한 관계를 하나의 유기적 이데올로기와 이 이데올로기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 사이의 관계를 충분히 잘 설명해주는 직접적 표현관계라는 모델 위에서 사고하는 경향을 가지게 된다. 내가 볼 때는 바로 이 지점에 그람시의 역사주의가 취하는 반박의 여지가 있는(contestable) 원리가 놓여 있는 것 같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람시는 모든 ‘역사주의’에 필요불가결한 언어와 이론적 문제설정을 자생적으로[스스로] 발견하게 된다.
이 전제들로부터 출발하여, 우리는 우리 논의의 시작에서 내가 인용했던 정식들에 이론적으로 역사주의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정식들은, 내가 방금 지시했던 맥락 전체에 의해 지지되고 있기에, 그람시에게서 이러한 이론적으로 역사주의적인 의미 또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이제 내가 가능한 가장 엄밀한 방식으로, 가능한 가장 소박한 공간[지면] 안에서 이 정식들의 함의를 발전시키고자 시도한다면, 이는 그람시에게 불만을 제기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그람시는, 그래야만 할 때에, 거리를 취하지 않기에는 역사적이고 이론적인 감각이 너무나 발달해 있기 때문에) 하나의 잠재적 논리 -이 잠재적 논리에 대한 인식은 일정 수의 그 이론적 효과들을 인지 가능하게 만들어주는데, 그람시 자신에게서이든 그람시로부터 영감을 얻거나 그와 결합할 수 있는 이들 중 몇몇에게서이든, 이 잠재적 논리와의 만남은 다른 한편으로는 수수께끼적인 것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를 가시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함이다. 따라서 이 지점에서 또 다시, 내가 『자본』의 몇몇 텍스트들에 대한 ‘역사주의적’ 독해에 관해 행했듯, 나는 하나의 한계-상황을 설명할 것이며, (그람시, 델라 볼페, 콜레티, 사르트르 등에 대한) 이러저러한 해석보다는 이들의 성찰에 출몰하는, 그리고 가끔은 이들의 개념들과 문제들과 해결책들 중 몇몇에서 돌발하는 이론적 문제설정의 장을 정의할 것이다.
이러한 목적에서, 그리고 형식적(style)인 것에 머무르는 것이 전혀 아닌 이러한 유보 하에서, 이제 나는 그람시로부터 다음과 같은 정식을 취하고자 한다. 마르크스주의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의 잠재적 문제설정 전체를 명증화할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증상적 테제를 위해 ‘절대적 역사주의’로 개념화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현재 취하고 있는 관점에서 이러한 그람시의 확언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만일 마르크스주의가 하나의 절대적 역사주의라면, 이는 마르크스주의가 헤겔적 역사주의 내에서, 즉 그 종말목적(fin)이 [대문자] 절대지의 지양 불가능한 현재인 그러한 헤겔적 역사주의 내에서, 역사의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고유한 부정인 바 그 자체를 역사화하기 때문이다. 절대적 역사주의 내에서, [대문자] 절대지는, 그러니까 역사의 종말목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총체성이 하나의 ‘본질적 절단면’ 내에서 가시적(visible)이고 독해 가능한(lisible) 것이 되는, 의식과 과학이 일치할(coïncideraient), 그러한 특권화된 현재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대문자] 절대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런데 바로 이것이 절대적 역사주의를 가능케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문자] 절대지가 그 자체로 역사화되었다는 점을 의미한다. 만일 더이상 특권화된 현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현재들이 동등한 자격을 가지고서 바로 이 특권화된 현재가 된다. 이에 따라, 역사적 시간은 이 각각의 현재들 내에서 각각의 현재에 동시대성의 ‘본질적 절단면’을 가능케 하는 그러한 하나의 구조를 소유하게 된다. 그렇지만, 마르크스주의적 총체성이 헤겔적 총체성과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기에, 특히 마르크스주의적 총체성이 서로가 서로에 대해 직접적으로 표현적이지는 않은 그러한 서로 다른 수준들 혹은 심급들을 포함하고 있기에, 이 마르크스주의적 총체성으로 하여금 ‘본질적 절단면’이[즉 ‘본질적 절단’이] 가능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각각의 현재가 다른 모든 현재들과 일치(coïncide)하는 그러한 방식으로, 그러니까 이 모든 현재들이 ‘동시대적인’(contemporains) 그러한 방식으로 이 구별되는 수준들을 그 수준들 사이에서 상호연결시켜야만 한다. 이 모든 현재들이 형성하는, 이러한 방식으로 수정된 관계는, 본래적인 마르크스주의적 개념화 내에서는 동시대성에 대한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독해와 모순되는 왜곡과 어긋남의 효과들을 배제한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를 (절대적) 역사주의로 사고하려는 기획은 마르크스주의적 총체성을 헤겔적 총체성의 변이[변종]로 축소하고 납작하게 만들어버리는(aplatir) 경향을 지니는, 그리고 다소간 수사학적인 구별들에 대한 신중함(précaution)을 유지하는 경우에서조차도 [복수의] 수준들을 분리하는 현실적 차이들을 흐려지게 하거나 환원해버리거나 누락해버리고 마는, 그러한 하나의 논리적 필연성이 지니는 연쇄 효과들을 자동적으로 촉발시키게 된다.
수준들에 대한 이러한 환원이 노골적으로 나타나는, 다시 말해 이러한 환원을 (이 단어의 두 가지 의미에서) 배반하는/드러내는(trahir) 그러한 ‘명증성’의 가림막 아래 은폐되는 증상적 지점을, 우리는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인식의 지위 내에서 정확히 지시할 수 있다.[31] 우리는 그람시가 세계에 대한 개념화[세계관]와 역사에 대한 개념화[역사관] 사이의 실천적 통일성을 너무나 강조한 나머지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이전의 모든 유기적 이데올로기로부터 구별해주는 바를, 즉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과학적 인식으로서의 특징을 자신의 것으로 취해야 한다는 점을 무시했음을 보았다. 그람시가 역사이론으로부터 선명하게 구별하지 않는 마르크스주의 철학 또한 이와 동일한 운명을 겪는다. 그람시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현재의 역사와 직접적 표현관계를 맺게 만든다. 그로 인해 그람시에게서 철학은, 헤겔이 원했듯, ‘철학의 역사’(크로체에게서 다시 차용한 개념화)인 것이고 결국은 역사[그 자체]가 되어버린다. 모든 과학과 모든 철학이 그 현실적 토대에서는 현실역사이기에, 현실역사 그 자체가 철학과 과학이라고 말해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 이론 내에서 이러한 발본적인 이중의 확언을 어떻게 사고할 수 있으며 이러한 이중의 확언을 정식화할 수 있게 해주는 이론적 조건을 어떻게 창조할 수 있는가? 이는 바로, 마르크스가 구별했던 수준들 사이의 거리를 축소하는 효과를 정확하게 생산해내는 일련의 개념적 미끄러짐들 전체를 통해서 가능하다. 이 개념적 미끄러짐들 각각은 우리가 마르크스의 개념적 정확성(précision) 내에 기입되어 있는 이론적 구별점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만큼 덜 지각 가능한 것이다.
바로 그래서 그람시는 하나의 과학적 이론 혹은 하나의 과학에 속하는 이러저러한 범주들이 그람시가 하나의 ‘인간적 관계’[32]와 동화시키는 하나의 ‘상부구조’[33] 혹은 하나의 ‘역사적 범주’라고 지속적으로 선언하는 것이다. 사실 이는 마르크스가 ‘상부구조’라는 개념에 부여하기를 거부하는 외연을 이 ‘상부구조’라는 개념에 부여해버리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를 거부하는데, 왜냐하면 그는 이 ‘상부구조’라는 개념에 1) 법-정치적 상부구조와 2)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즉 [하부구조에] 조응하는 ‘사회적 의식의 형태들’)만을 위치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문자] 청년기 저작들(그 중에서도 특히 1844년의 『경제학-철학 수고』)를 제외한다면, 마르크스는 과학적 의식을 상부구조에 절대로 포함시키지 않는 것이다. 언어가 그렇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스탈린은 언어가 상부구조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과학 또한 ‘상부구조’라는 범주 아래에 위치할 수 없다. 과학을 하나의 상부구조로 만드는 것, 이는 구조 -‘유기적’ 이데올로기들이 이와 동일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와 함께 [하나의] ‘블록’을 너무나도 잘 형성하는 이러한 ‘유기적’ 이데올로기들 중 하나로 과학을 사고하는 것이다! 그런데 심지어 마르크스주의 이론 내에서도, 우리는 이데올로기들이 이 이데올로기들을 산출해냈던 [하부]구조보다도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으며(이는 이데올로기들 중 상당수에 해당되는 경우인데, 예를 들어 종교, 도덕 혹은 이데올로기적 철학이 그러하다), 또한 동일하게 법-정치적 상부구조의 몇몇 요소들([예를 들어] 로마법과 같이 말이다!)보다도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는 주장을 찾아볼 수 있다. 과학과 관련해 말해보자면, 과학은 하나의 이데올로기로부터 탄생할 수 있고, 과학으로 스스로를 구성하기 위해 이 이데올로기의 장으로부터 떨어져나올 수 있지만, 바로 이 떨어져나옴(détachement), 그러니까 이 ‘절단’이 (최소한 이 과학 자신의 역사가 현실적 연속성을 취하도록 보증해주는 몇몇 역사적 조건들 내에서 -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보자면] 이러한 보증이 항상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었다) 과학을 하나의 유일한(unique) 역사 즉 [하부]구조와 상부구조의 통일체가 취하는 ‘역사적 블록’이라는 역사의 공통된[일반적] 운명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들어주는 역사적 존재와 역사적 시간성의 새로운 형태를 개시하는 것이다. 관념론은 과학에 고유한 시간성, 과학의 발전 리듬, 과학의 연속성 유형과 구획 유형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반영하는데, 이것들은 과학으로 하여금, 무역사성(anhistoricité)과 비시간성(intemporalité)이라는 형태로,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역사의 부침(vicissitudes)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만들어주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관념론은 사고되기 위해서는 다른 모든 범주들을 필요로 하는, 하지만 상대적으로 자율적이고 고유한 과학적 인식의 역사를 역사적 존재의 다른 양태들(즉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와 법-정치적 상부구조라는 양태들, 그리고 경제적 구조[즉 하부구조]라는 양태)로부터 구별함으로써 사고되어야만 하는, 그러한 하나의 현실적 현상을 실체화(hypostasie)해버린다.
과학의 고유한 역사를 유기적 이데올로기의 역사와 경제-정치적 역사로 환원하고 동시에 이 과학의 고유한 역사를 유기적 이데올로기의 역사와 경제-정치적 역사와 동일시하는 것, 결국 이는 과학을 이 과학의 ‘본질’로 환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과학을 역사로 환원해버리는 것이다. 여기에서 과학의 역사로의 전락은 이론적 전락의 지표[이면]에 불과하다. 즉, 역사이론을 현실역사 속으로 밀어넣어버리는 전락, 역사과학의 (이론적) 대상을 현실역사로 환원시켜버리는 전락, 따라서 인식대상을 현실대상과 혼동하는 전락 말이다. 이러한 전락은 여기에서 철학과 현실역사가 그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경험주의적 이데올로기의 무대 안으로의 전락과 다른 것이 전혀 아니다. 그람시의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놀라운 천재성이 어떠했든간에, 그람시는 그가 과학의 지위를 사고하기를 원했을 때, 그리고 특히 철학의 지위를 사고하기를 원했을 때(왜냐하면 사실 그는 과학에 대해서는 거의 다루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경험주의적 유혹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그람시는 현실역사와 철학 사이의 관계를 표현적 통일성의 관계 -이러한 관계를 보증하는 역할을 떠맡은 매개물들[매개작용들]이 어떤 것이든간에- 로 사고하려는 유혹을 지속적으로 받았다.[34] 이미 우리는 그람시에게서 한 명의 철학자가 최종심급에서는 한 명의 ‘정치가’라는 점을, 그람시에게서 철학이 대중들의 활동과 경험의, 경제-정치적 프락시스의 직접적 생산물(모든 ‘필연적 매개물들[매개작용들]’의 존재라는 유보 하에서)이라는 점을 확인했다. 직업 철학자들 바깥에서 이미 완전히 만들어진 이러한 ‘양식’(bons sens)의 철학에, 그리고 역사적 프락시스 내에서 말하는 이러한 ‘양식’의 철학에, 직업 철학자들은 그 실체를 수정하지는 않으면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자신들의 담론의 형태들을 빌려줄 뿐이다. [이로 인해] 자생적으로[자동적으로], 그람시는 1839년의 유명한 텍스트에서 현실역사에 의해 생산된 철학을 철학자들에 의해 생산된 철학과 대립시키는 포이어바흐의 정식들 그 자체를, 그러니까 프락시스를 사변에 대립시키는 정식들 그 자체를 그람시 자신의 사유를 표현함에서 필요불가결한 하나의 대항마(opposition)로 다시 취한다. 그리고 바로 사변의 ‘구체적’ 철학으로의 포이어바흐적 ‘전도’(renversement)의 용어들 그 자체 내에서 그람시가 크로체적 역사주의를 자신의 자산으로 다시 취하고자 하는 것이다. 즉, 여기에서 ‘전도’란 크로체의 사변적 역사주의를 ‘전도하는 것’, 다시 말해 크로체의 사변적 역사주의를 마르크스주의적 역사주의로 만들어내기 위해 이 크로체의 사변적 역사주의를 두 발로 다시 제대로 서도록 돌려놓는 것이며, 이를 통해 현실역사를, ‘구체적’ 철학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만일 하나의 문제설정에 대한 ‘전도’가 이러한 문제설정의 구조 그 자체를 보존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현실역사와 철학 사이의 (헤겔 혹은 크로체에 의해 사고된) 직접적 표현관계([직접적임에도] 필수적인 모든 ‘매개물들[매개작용들]’과 함께 말이다)가 전도된 이론 내에서 재발견된다는 점에 놀라지는 않을 것이다. 매우 정확히 말하자면 그람시가 정치(현실역사)와 철학 사이에서 확립하고자 유혹받는 그러한 직접적 표현관계 내에서 말이다.
하지만 사회구조 내에서의 이론적, 철학적 그리고 과학적 형성물들이 점하는 특수한 장소를 정치적 실천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그러니까 이론적 실천의 장소를 정치적 실천의 장소로부터 분리시키는 거리를 최소한으로 축소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더 나아가 [그람시는] 철학과 정치 사이에 공언된 동일성을 예증하고 축성하는 이론적 실천에 대한 하나의 개념화를 스스로에게 제시해야만 한다. [그람시에게 제기되는] 이러한 잠재적 요구는, [복수의] 수준들 사이의 구별을 제거(réduire)하는 것을 새로이 그 효과로 취하게 되는, 그러한 [그람시의] 새로운 개념적 미끄러짐들을 설명해준다.
이러한 그람시적 해석에서, 이론적 실천은 모든 특수성을 상실하여 역사적 실천 일반으로, 즉 그 아래에서 경제적 실천, 정치적 실천, 이데올로기적 실천 그리고 과학적 실천과 같이 서로 다른 여러 생산형태들이 사고되는 그러한 범주로 환원되는 경향을 지니게 된다. 그렇지만 이러한 동화는 몇 가지 까다로운 문제들을 우리에게 제기한다. 그래서 그람시 자신은 절대적 역사주의가 이데올로기들에 대한 이론이라는 장애물에 부딪혀 좌초할 위험이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 하지만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들」을 엥겔스가 썼던 한 구절(‘산업과 실험’으로서의 역사)과 상호접근케 함으로써, 이를 통해 그 개념 하에서 서로 다른 여러 모든 실천들을 통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하나의 실천이라는 모델을 제시함으로써, 하나의 해결책을 위한 논거를 그람시 스스로가 우리에게 제공해주었다.[35] 절대적 역사주의의 문제설정은 이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고 요구했다(exigeait). 그렇기 때문에, 만일 이 절대적 역사주의의 문제설정이 이 문제에 대해 경험주의적 정신에 의해 고취된 해결책을 제시하려는 경향을 지니게 된다면, 이는 전혀 우연이 아닌 것이다. 이 모델은 예를 들어 근대 과학의 현실로부터라기보다는 근대 과학의 한 특정한 이데올로기로부터 빌려온 실험적 실천의 모델일 수 있다. 콜레티는 그람시의 이러한 [이론적] 지표를 자신의 것으로 다시 취하여, 현실 그 자체와 정확히 마찬가지로 역사 또한 하나의 ‘실험적 구조’를 소유한다고, 그래서 이 역사는 그 본질에서 하나의 실험으로 구조화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현실역사는 자신의 편에서 ‘산업과 실험’으로 선언되었기에, 그리고 모든 과학적 실천은 자신의 편에서 실험적 실천으로 정의되었기에, 역사적 실천과 이론적 실천은 하나의 유일하고 동일한 구조만을 가질 뿐인 것이다. 콜레티는 역사가 과학과 정확히 마찬가지로 가설의 계기 -[프랑스의 생리학자] 클로드 베르나르(Claude Bernard)의 도식에 따르면 실험의 구조에 대한 상연(mise en scène)에서 필요불가결한- 를 자신의 존재 내에 포함한다는 점을 보증함으로써 역사적 실천과 이론적 실천 사이의 이러한 비교를 그 극한으로까지 밀어붙인다. 따라서 살아있는 정치적 행위 내에서 (모든 행위에 필요불가결한 미래에 대한 투사projections를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해 예상하기를 멈추지 않는 그러한 역사는, 실험과학의 실천과 정확히 마찬가지로, 현행적인(en acte) 가설(hypothèse)과 증명(vérification)일 것이다. 이러한 본질적 구조의 동일성을 통해, 이론적 실천은 역사적 실천과 직접적으로, 무매개적으로 그리고 적합하게 동화될 수 있으며, 따라서 이론적 실천의 장소의 정치적 혹은 사회적 실천의 장소로의 환원은 실천들에 대한 하나의 유일한 구조로의 환원 내에 정초할 수 있게 된다.[36]
방금 나는 그람시와 콜레티의 예시를 원용했다. 이는 그람시와 콜레티가 역사주의의 문제설정이라는 하나의 동일한 이론적 불변항(invariant)이 취할 수 있는 이론적 변이들[변종들]의 잠재적인 유일한 예시들이기 때문은 아니다. 하나의 문제설정은 이 문제설정의 장[들판](champ)을 가로지르는 사고들과 절대적으로 동일한 것으로서의 변이들을 전혀 강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이 장[들판]을 다양한 각도에서 접근할 수 있기에, 매우 다른 여러 길들을 통해서 하나의 장[들판]을 가로지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장[들판]을 마주치는 것은 우리가 이 장[들판]을 마주치는 사고들이 서로 다른만큼이나 서로 다른 효과들을 생산하는 법칙을 경험하게 된다는 점을 함의한다. 그렇지만 이 모든 효과들은, 이 효과들이 하나의 동일한 구조 -마주치게 된 문제설정이라는 구조- 의 효과들이라는 점에서, 몇몇 동일한 특징들을 공통적으로 지니게 된다. 이에 대한 하나의 역설적 예시를 제시해보자면, 우리 모두는 사르트르의 사고가 그 어떠한 방식으로도 그람시가 제출하는 마르크스주의 해석으로부터는 유래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고 있다. 사르트르의 사고는 이와는 완전히 다른 기원들(origines)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르트르가 마르크스주의를 만나게 되었을 때, 그는 자기 스스로가 지니고 있던 이유들로 인해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하나의 역사주의적 해석(물론 사르트르는 이를 역사주의적 해석으로 명명하기를 거부했지만)을 즉각 제시했다. 위대한 철학들(사르트르는 로크와 칸트-헤겔의 철학들 다음으로 마르크스의 철학을 이 위대한 철학의 예로 제시한다)은 “역사적 계기 -이 위대한 철학들은 바로 이 역사적 계기의 표현인데- 가 넘어서지 않는 한에서는, 넘어설 수 없는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말이다(Critique de la Raison Dialectique, Gallimard, p. 17.[37] 여기에서 우리는, 사르트르에게 고유한 형태 하에서, 사르트르에게서는 자신의 주요 개념인 총체화(totalisation)에 대한 특수화(spécification)를 표상하는 구조들, 하지만 그럼에도 사르트르에게 고유한 것인 이 총체화라는 개념에 대한 일종의 특수화 하에서 역사화된 문제설정의 구조와의 그 마주침을 위해 필수적인 개념적 효과들을 실현하는 구조들, 즉 동시대성, 표현, 지양불가능성(l’indépassable)(헤겔의 “그 누구도 자신의 시간을 넘어서 튀어오를 수는 없다”)의 구조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이 효과들이 [존재가능한] 유일한 효과들인 것은 전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르트르가 자기 고유의 수단들을 통해 (하나의 거대한 철학을 주조하고 논평하며, 이 위대한 철학을 인간들의 실천적 삶을 통과하도록 만드는) ‘이데올로기들’(ib. 17-18)에 대한 하나의 이론 -몇몇 지점들에서 유기적 지식인에 대한 그람시적 이론과 매우 가까운[38]- 을 재발견하는 모습을 보고도 전혀 놀라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우리는 사르트르에게서 서로 다른 여러 실천들(마르크스에 의해 구별된 서로 다른 여러 수준들)에 대한 하나의 유일한 실천으로의 동일한 필연적 환원이 실행되는 것을 보고도 별로 놀라지 않을 것이다. 사르트르에게서, 사르트르 자신의 고유한 철학적 기원들과 정확히 관련되는 이유들로 인해, 실험적 실천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프락시스’라는 개념 그 자체가, 셀 수 없이 많은 ‘매개물들[매개작용들]’이라는 값을 치르고서(사르트르는 탁월한 매개물[매개작용]의 철학자인데, 이 매개물[매개작용]은 차이들에 대한 부정 내에서 이 차이들에 대한 통일성을 보증하는 기능, 바로 정확히 그러한 기능을 수행한다), 과학적 실천과 경제적 혹은 정치적 실천 사이에서 그러한 것만큼이나 서로 다른 여러 실천들에 대한 통일을 가능케 하는 역할을 떠맡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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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도식적인 이러한 언급들을 이 자리에서 더욱 발전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언급들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모든 역사주의적 해석 내에 필연적으로 내포되어 있는 함의들에 대한 관념을, 그리고 이러한 해석이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제기하는 문제들에 답변하기 위해 생산해야만 하는 특수한 개념들에 대한 관념을 제시할 수는 있다. 최소한 이 해석이 그람시, 콜레티 혹은 사르트르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스스로가 이론적으로 고집스럽고(exigeante) 엄밀하기를(rigoureuse) 원할 때는 말이다.[39] 이러한 해석은 개념들의 생산이라는 질서[차원] 내에서 이 해석 자신의 기획의 경험주의적 특징의 효과로서 존재하는 다음과 같은 일련의 환원들 전체라는 조건 하에서만 자기 자신을 스스로 사고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모든 실천을 실험적 실천으로 혹은 ‘프락시스’ 일반으로 환원하고 그 다음으로 이 모-실천(pratique-mère)을 정치적 실천과 동화시킨다는 조건 하에서, 철학은, 그리고 심지어 과학은, 그러니까 이와 동일하게 마르크스주의는 현실역사의 ‘표현’으로 사고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과학적 인식 그 자체 혹은 철학, 그리고 어쨌든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경제-정치적 실천의 통일체로, ‘역사적’ 실천의 중심으로, ‘현실’역사로 격하(rabattre)시키는데에 이르게 된다. 이에 따라 우리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모든 역사주의적 해석에 의해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조건 그 자체로 요구된 결과, 즉 마르크스주의적 총체성에 대한 헤겔적 총체성이라는 변이로의 변형이라는 결과에 도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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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역사주의적 해석은 다음과 같은 최종적 효과, 즉 역사과학(역사유물론)과 마르크스주의 철학(변증법적 유물론) 사이의 구별에 대한 실천적(pratique) 부정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최종적 환원 내에서,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역사이론에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기 위해 실천적 차원에서(pratiquement) 자신의 존재이유를 상실하게 된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역사유물론 속에서 소멸하게 되는 것이다.[40] 우리는 이를 그람시에게서, 그리고 그람시를 추수하는 이들 대부분에게서 선명하게 확인하게 된다.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단어뿐만 아니라, 그 고유한 한 대상에 의해 정의된 마르크스주의 철학이라는 개념 또한 그람시와 그를 추수하는 이들에게서 그에 대해 가장 강력한 유보를 표하도록 자극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람시와 그를 추수하는 이들은 (그 대상, 이론, 방법에서) 이론적으로 자율적인, 그러니까 역사과학과는 구별되는 하나의 철학이라는 단순한 관념이 마르크스주의를 형이상학 안으로, [대문자] 자연에 대한 [대문자] 철학[즉 ‘대문자’ 자연철학]의 복원(아마도 엥겔스가 [『자연변증법』이라는 저서를 집필했기에] 이러한 복원에 책임이 있는 이일 것이다) 속으로 던져버린다고 간주한다.[41] 왜냐하면 모든 철학은 역사이며, ‘프락시스의 철학’은, 철학과 마찬가지로, 역사와 철학 혹은 역사와 과학 사이의 동일성에 대한 철학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자신의 고유한 대상을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기에,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그 자율적 영역(discipline)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게 되며, 그람시가 크로체로부터 다시 취한 단어를 따르자면, 하나의 단순한 ‘역사적 방법론’으로, 다시 말해 역사의 역사성(historicité de l’histoire)에 대한 단순한 자기의식으로[즉 역사가 자신의 역사성을 단순히 의식하는 것으로], 그 모든 발현들(manifestations) 내에서 현실역사의 현존에 대한 반영으로 환원되고 만다.
역사와 정치에 대한 이론으로부터 분리되어 버린다면, 철학은 형이상학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다. 반면 근대 사유의 역사에서 프락시스의 철학이 대표하는 거대한 정복[성취]은 바로 철학의 구체적 역사화와 이 철학에 대한 역사와의 동일화이다(Gramsci, Materialismo Storico, p. 133).
따라서 이러한 철학의 역사화는 철학을 하나의 역사적 방법론의 지위로 환원해버린다.
역사의 규정된 한 기간 내에서 참인 것으로, 다시 말해 규정된 한 역사적 행위의, 규정된 (하지만 회의주의나 도덕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상대주의에 빠지지는 않으면서도 곧바로 이어지는 그 다음의 한 기간 내에서 그 의미가 지양되고 ‘비워진’) 한 프락시스에 대한 필수적이고 분리 불가능한 표현으로 철학적 주장(affirmation)을 사고하는 것, 즉 철학을 역사성으로 개념화하는 것, 이는 하나의 어려운 정신적 실행[작업]이다(…). 이 저자(부하린 - 알튀세르)는 프락시스의 철학이라는 개념을 ‘역사적 방법론’으로 정교구성하는 데에 성공하지 못하며, 또한 이 프락시스의 철학을 [하나의] 철학으로, 단 하나의 유일한 구체적 철학으로 정교구성하는 데에도 성공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 이 저자는, 현실적 변증법이라는 관점에서, 크로체가 사변적 관점에서 스스로에게 제기했으며 또한 해결하고자 시도했던 문제를 스스로에게 제기하는 것에도, 이를 해결하는 것에도 성공하지 못한 것이다.
이 마지막 단어들을 통해 우리는, 다시 기원으로 그러니까 크로체에 의해 ‘발본화’된 헤겔적 역사주의로, 사변적 철학으로부터 ‘구체적’ 철학으로 즉 사변적 변증법에서 현실적 변증법으로 등등 통과[이동]하기 위해서는 ‘전도’하는 것만으로 충분할, 그러한 헤겔적 역사주의로 되돌아오게 된다. 마르크스주의를 역사주의로 해석하려는 이론적 기획은 절대적 한계 -포이어바흐 이래로, 바로 이 절대적 한계 안에서, 프락시스 내에서의 사변의 ‘전도’, ‘구체’ 내에서의 추상의 ‘전도’가 실행된다- 로부터 전혀 탈출하지 않는다. 이 한계는 헤겔적 사변 내에서 승화된 경험주의적 문제설정에 의해, 그리고 그에 대한 어떠한 ‘전도’도 우리를 해방시켜줄 수 없는 그러한 경험주의적 문제설정에 의해 정의된다.[42]
따라서 우리는 마르크스를 역사주의적으로 해석하는 데에서 필요불가결한 이러한 서로 다른 이론적 환원들 내에서, 그리고 이 이론적 환원들이 만들어내는 효과 내에서, 모든 역사주의의 공통적인 근본구조가, 즉 본질적 절단면으로의 독해를 가능케 하는 동시대성이 발현(manifester)되는 것을 선명하게 확인하게 된다. 또한 이와 동일하게 우리는 이러한 [근본]구조가 좋든 싫든 마르크스주의적 총체성의 구조에 강제되며(왜냐하면 근본구조에 대한 이러한 강제가 바로 마르크스주의적 총체성의 구조의 이론적 조건이기 때문에) 이 구조를 변형하고 이 구조의 서로 다른 수준들을 서로서로 분리시키는 현실적 거리를 축소하는 것을 보게 된다. 결국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은 역사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개념인 시간적 현존과 시간적 연속성의 범주 안으로, 즉 생산관계와 생산력의 통일체 다시 말해 하부구조에 대한 과학들과 철학 그리고 이데올로기들의 억압(aplatissement)에 의해 현실역사의 경제-정치적 실천 안으로 ‘재추락’하게 된다.[43] 이러한 결론이 역설적으로 보이기에, 아마도 사람들은 나에게 이같은 주장을 언표했다고 불만을 표하겠지만, 우리는 분명 이러한 결론을 이끌어낼 수밖에 없다. 그 정치적 의도와 그 정치적 강조점의 관점으로부터가 아니라 그 이론적 문제설정의 관점으로부터, 이 인간주의적이고 역사주의적인 유물론은 제2인터내셔널의 경제주의적이고 기계론적인 해석의 기초적인 이론적 원리들과 마주하게 된다. 만일 이러한 동일한 이론적 문제설정이 서로 다른 영감을 취하고 있는 복수의 정치들 -하나는 숙명론적이고 다른 하나는 의지주의적인, 하나는 수동적이고 다른 하나는 의식적이고 능동적인- 을 공통적으로 지지해줄 수 있다면, 이는, 모든 이데올로기가 그러하듯, 이러한 이데올로기적인 이론적 문제설정이 포함하고 있는 이론적 ‘작동’(jeu)의 원천들 때문이다. 이 경우,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상부구조의 가장 능동적인 속성들을 상보적 교차를 통해 하부구조에 부여함으로써, 이러한 역사주의가 제2인터내셔널의 테제들에 정치적으로 대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속성들의 전이에 대한 이러한 실행은, 예를 들어 철학과 이론의 속성들을 통해 정치적 실천을 변용함으로써(자생주의), 경제적 ‘프락시스’에 정치의 그 모든 능동적인 심지어는 폭발적인 이점들(vertus)을 부여함으로써(아나코-생디칼리즘), 혹은 정치적 의식과 정치적 결정에 경제적인 것에 대한 결정을 내맡김으로써(의지주의), 서로 다른 여러 형태들 하에서 개념화될 수 있다. 이 사태를 한마디로 말해보자면, 만일 상부구조를 하부구조와 동일시하는 혹은 의식을 경제와 동일시하는 구별되는 두 가지 방식들이, 그러니까 하나는 의식과 정치에서 유일하게 경제만을 보는 것이고 반면 다른 하나는 정치와 의식으로 경제를 채워넣는 것인 그러한 구별되는 두 가지 방식들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현존하는 [복수의] 수준들을 서로가 서로에게로 환원되도록 만듦으로써 이 현존하는 수준들을 이론적으로 동일시하는 문제설정의 구조만이, 작동하는 동일화의 단 하나의 유일한 구조만이 결국 존재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경제주의-기계론의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주의-인간주의의 이론적 혹은 정치적 의도들이 아니라 이 의도들의 개념적 메커니즘을 우리가 분석할 때, 바로 이론적 문제설정의 이러한 공통된 구조가 가시적이게 된다.
인간주의와 역사주의 사이의 관계에 대한 한 가지 언급을 더 해보도록 하겠다. 우리가 인간주의적이지 않은 하나의 역사주의를 개념화할 수 있는 것과 정확히 마찬가지로 역사주의적이지 않은 하나의 인간주의를 개념화할 수 있다는 점은 너무도 명확하다. 물론 이 지점에서 나는 과학과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이론적 토대로서의 그 기능 내에서 간주된 이론적 인간주의와 이론적 역사주의만을 언급하고 있다.[44] 마르크스에 대한 인간주의적인 하지만 역사주의적이지는 않은 해석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도덕 혹은 종교 내에, 혹은 사회-민주주의라고 불리우는 이러한 정치-도덕적 이데올로기 속에서 사는(vivre)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이는, 그것이 종교적이든, 윤리적이든 혹은 인간학[인류학]적이든, ‘인간 본성’에 대한 어떠한 하나의 이론에 ‘비추어서’(lumière) 마르크스를 독해하는 것밖에 안 된다(cf. R.R.P.P., 란트슈트Landshut와 마이어Mayer와 같은 사회민주주의자들, 그 뒤를 잇는 마르크스의 대문자 청년기 저작들의 최초 편집자들인 칼베즈Calvez 신부와 비고Bigo 신부 그리고 막시밀리앙 뤼벨.). 『자본』을 하나의 윤리적 영감으로 환원하는 것은, 우리가 1844년의 『경제학-철학 수고』의 발본적 인간학[인류학] 위에 조금만 의거하기만 한다면, 애들 장난과 같이 쉬운 일이다. 하지만 이와는 정반대로 우리는 또한 마르크스에 대한 인간주의적이지 않은 역사주의적 독해의 가능성을 개념화할 수 있다. 만일 내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맞다면, 콜레티의 대단한 노력들은 바로 이러한 방향을 향해 있다. 인간주의적이지 않은 역사주의적인 이러한 독해를 승인하기 위해 우리는, 콜레티가 정확히 바로 그렇게 했듯, 역사의 본질을 구성하는 [대문자] 생산력과 [대문자] 생산관계 사이의 통일체를 (심지어 역사화된 것이라고 해도) 하나의 인간 본성에 대한 단순한 현상으로 환원하기를 거부해야만 한다. 그렇지만 이 지점에서는 이 두 가지 가능성 모두를 남겨두도록 하자.
바로 인간주의와 역사주의에 대한 결합이 가장 심각한 유혹을 표상하는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반드시 지적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결합은, 최소한 외양상으로는, 가장 거대한 이론적 이점들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이 이론적 이점들 중 하나는, 모든 인식을 역사적인 사회적 관계들로 환원하는 것[즉 첫 번째 환원] 내에, 우리가 생산관계를 단순한 인간적 관계로 취급하는 두 번째 환원을 은밀하게 도입할 수 있다는 점이다.[45] 이러한 두 번째 환원은 다음과 같은 하나의 ‘명증성’ 위에 기반해 있다. 역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인간적’ 현상인 것 아닌가? 그래서 마르크스는 잠바티스타 비코(Giambattista Vico)를 인용하면서 인간들은 그들이 역사를 완전히 ‘만들’었기에 이 역사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이라고 선언하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이러한 ‘명증성’은 다음과 같은 하나의 독특한 선전제 위에 기초해 있다. 역사의 ‘행위자들’은 이 역사라는 텍스트의 저자들이며 이 역사 생산의 주체들이라는 선전제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선전제 또한 사실은 완전한 하나의 ‘명증성’ 그 자체인데, 왜냐하면 이러한 선전제에 따르면 연극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바와는 정반대로, 역사 속에서 이 구체적 인간들은 이 구체적 인간들이 그 장본인[저자]인 그러한 역할들[배역들]의 행위자[배우]이기 때문이다.[46] 저자-행위자[장본인-배우]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낡은 몽상에서와 같이 한 형제처럼 닮기 위해서는, 그리고 역사의 그 고유한 연출자[감독]인 생산관계가 단순한 인간적 관계로 환원되기 위해서는, 이 연출자[감독], 즉 자기를-스스로-치료하는-의사를 슬쩍 옆으로 치워놓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독일 이데올로기』는 이 ‘현실적 인간들’, 이 ‘구체적 개인들’, 즉 ‘땅 위에 단단히 발딛고 서있는’ 이 역사의 진정한 주체들에 대한 정식들로 넘쳐나지 않는가?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들」은 대상성(objectivité) 그 자체가 이 주체들의 ‘실천적-감각적’ 활동의 완전히 인간적인 결과라고 선언하지 않는가? 신학적 혹은 도덕적 인간학들의 추상성(abstraction)과 고정성(fixisme)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리고 마르크스를 자신의 구석진 공간 즉 역사유물론의 중심 한가운데로 되돌려 놓기 위해서는, 이러한 인간 본성에 ‘구체적’ 역사성의 속성들을 부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에 따라 우리는, 이미 인간 본성의 역사에서의 혁명과 함께 계몽주의 철학이 이를 원했듯, 이러한 인간 본성을 역사에 의해 생산된 것으로, 인간 또한 변화하므로 역사와 함께 변화하는 것으로, 그 객관적 역사의 사회적 생산물들에 의해 가장 내밀한 그 직능들(facultés) -이는 보기, 듣기, 기억, 이성 등과 같은 가장 내밀한 직능들을 말하는 것인데, 엘베시우스는 이미 (그리고 루소 또한) 디드로에 반대해 이를 주장했으며, 포이어바흐는 이를 가지고서 자신의 철학의 거대한 한 부분을 만들어냈고, 오늘날에는 다수의 문화주의적 인류학자들이 이를 행하고 있다- 에서까지 변용된 것으로, 이 인간본성을 개념화할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역사는, 인간 본성을 변형하는 역사의 진정한 주체는 그대로 남겨두는, 그러한 인간 본성의 변형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인간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그 주체인 역사적 효과의 동시대인이 되도록 만들기 위해 역사를 인간 본성 내에 도입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모든 것이 결정되는 것인데, 결국 우리는 생산관계,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사회적 관계를 역사화된 ‘인간적 관계’로, 다시 말해 상호-인간적, 상호-주관적[주체적]인 관계로 환원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역사주의적 인간주의의 주요 활동무대이며, 이것이 바로 이 역사주의적 인간주의의 거대한 강점이다. 즉, 마르크스를 마르크스보다 훨씬 이전의 이데올로기, 18세기에 탄생한 이데올로기의 흐름 안으로 집어넣는다는 강점, 마르크스로부터 혁명적인 이론적 단절의 독창성이라는 이점[공적]을 박탈하고 심지어 많은 경우 마르크스를 ‘문화적’ 인류학[즉 ‘문화인류학’] 등의 현대적 형태들에 수용 가능한 인물로 만들어버린다는 강점 말이다. 이러한 강점을 목도하고서도, 오늘날 마르크스를 진정으로 표방할 수 있다고 믿는 이들 중 그 누가 이 역사주의적 인간주의 -사실은 우리를 마르크스로부터 멀리 떨어뜨려놓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를 원용하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최소한 정치적으로 말하자면, 사태가 항상 이러했던 것은 아니다. 나는 왜 그리고 어떻게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인간주의적-역사주의적 해석이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예감(pressentiments)과 맥락(sillage) 속에서[즉 러시아 혁명 전과 후에] 탄생했는지 언급했다. 내가 지적했듯, 이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인간주의적-역사주의적 해석은 제2인터내셔널의 기계론과 기회주의에 대항하는 격렬한 저항의 의미를 지녔던 것이었다. 이 해석은 전쟁을 거부하기 위해, 자본주의를 무너뜨리기 위해 그리고 혁명을 행하기 위해 인간의 의식과 의지에 직접적으로 호소했다. 이 해석은, 그 이론 자체 내에서, 혁명 속으로 던져진 현실적 인간들의 이론적 책임성에 대한 이러한 위급한 호소를 연기하거나 질식시켜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차없이 거부했다. 이 동일한 운동 속에서 이 해석은 그 의지에 대한 이론을 요구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해석은 헤겔로의 회귀(청년 루카치와 코르쉬의 경우)를 공언했으며, 마르크스의 학설을 노동자계급과의 직접적 표현관계로 확립하는 그러한 하나의 이론을 정교구성했다. 바로 이 시기로 ‘부르주아 과학’과 ‘프롤레타리아 과학’ 사이의 대립, 프롤레타리아적 실천의 표현과 배타적 생산물로 마르크스주의를 간주하는 그러한 관념론적이고 의지주의적인 해석이 승리했던 저 유명한 대립의 탄생이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이 ‘좌익주의적’ 인간주의는 프롤레타리아를 인간 본질의 장소이자 선교사로 지시했다. 만일 프롤레타리아가 인간을 그 ‘소외’로부터 해방시킬 역사적 역할을 짊어지게 되었다면, 이는 바로 인간 본질 -이러한 인간 본질의 절대적 피해자가 바로 인간 자신인 것인데- 에 대한 부정을 통해 이루어졌던 것이다. 마르크스의 [대문자] 청년기 텍스트들에 의해 선언된 철학과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동맹은 이제 더 이상 서로가 서로에 대해 외부적인 두 부분들 사이의 동맹이기를 멈추게 되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발본적 부정에 대항하는 봉기적(en révolte) 인간 본질로서의 프롤레타리아는 인간 본질에 대한 혁명적 확언이 되었다. 따라서 [이 ‘좌익주의적’ 인간주의에서] 프롤레타리아는 현행적 철학(philosophie en acte), 그리고 이 철학 그 자체의 정치적 실천인 것이다. 이를 통해 마르크스의 역할은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행위되고(agie) 살아진(vécue) 이러한 철학에 자기의식의 단순한 형태를 부여하는 것으로 환원되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유일한 역사적 저자로서의 프롤레타리아를 통해, 이 마르크스주의를 인간 본질의 직접적 표현과 직접적 생산으로, ’프롤레타리아적’인 ‘과학’ 혹은 ‘철학’으로 공언했던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바깥에서 행해지는 하나의 특수한 이론적 실천에 의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생산이라는, 그리고 노동자운동 내부로의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수입’이라는 카우츠키주의적이고 레닌주의적인 테제는 [이 ‘좌익주의적’ 인간주의에서] 가차없이 거부되며, 자생주의의 모든 주제들이 이 열려진 틈 즉 프롤레타리아의 인간주의적 보편주의을 통해 마르크스주의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게 되었다. 이론적으로, 이 혁명적 ‘인간주의’와 ‘역사주의’는 그 당시에 접근 가능했던 마르크스의 [대문자] 청년기 텍스트들과 헤겔을 함께 표방했다.[47] 나는 이제 다음과 같은 그 정치적 효과들의 영역으로 넘어가고자 한다. 제국주의에 대한, 그리고 사회주의 체제 내에서의 ‘정치경제학’ 법칙들의 소멸에 대한 로자 룩셈부르크의 몇몇 테제들, 소련에서의 프롤레트쿨트(proletkult) 운동과 ‘노동자 반대파’(Opposition ouvrière)라는 개념화 등, 그리고 가장 일반적으로는 소련에서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시기를 (스탈린적 도그마주의의 역설적 형태들 내에서까지도) 심원하게 각인했던 ‘의지주의’라는 정치적 효과들 말이다. 심지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 ‘인간주의’와 ‘역사주의’는 자신들의 정치적 독립을 쟁취하고 방어하기 위한, 그리고 사회주의적 길로 나아가기 위한 제3세계 인민들의 정치적 투쟁에서도 그 진정한 혁명적 메아리를 여전히 울려퍼지도록 만들고 있다. 하지만 이 이데올로기적이고 정치적인 강점들 그 자체는, 레닌이 경탄스럽게 포착해냈듯이, 이 강점들이 작동하게 만드는 논리의 몇몇 효과들이라는, 그리고 때가 되면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개념화와 실천 내에서 관념론적이고 의지주의적인 유혹을 필연적으로 생산하는 그러한 몇몇 효과들이라는 대가를 치르게 된다. 이 이데올로기적이고 정치적인 강점들이, 우호적 정세의 도움을 통해, 개량주의와 기회주의에 물든 개념화들 혹은 아주 단순하게도 수정주의적인 개념화들을 역설적인 하나의 전도(역설적이기는 하지만 이 전도는 또한 필수적인 것이기도 하다)를 통해 촉발하지 않는 한에서는 말이다.
바로 이것이 모든 이데올로기적 개념화의 고유성인데, 특히 만일 이 이데올로기적 개념화가 과학적 개념화를 그 의미로부터 벗어나도록 만듦으로써 이 과학적 개념화가 인식이라는 유일한 필요성 바깥의 ‘이해관계들’에 의해 지배되도록 이를 종속시킨다면 그러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다시 말해 이 과학적 개념화가 이를 알지 못한 채로 말하고 있는 그 대상을 이 과학적 개념화에 제공한다는 조건 하에서, 역사주의는 이론적 가치를 지니게 된다. 왜냐하면 역사주의는 현행적 이해관계들로부터 자신의 의미를 수용하는 이데올로기 전체의 –이 이데올로기 전체는 이 현행적 이해관계들에 복무하도록 종속되어 있다- 본질적인 한 측면을 충분히 잘 기술해주기 때문이다. 만일 이데올로기가 자신의 시대의 총체적인 객관적 본질(즉 역사적 현재의 본질)을 표현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이 이데올로기는, 내부적 강조점에 대한 가벼운 전위가 산출하는 효과에 의해, 역사적 상황의 현행적 변화들을 충분히 잘 표현할 수 있다. 하나의 과학과는 달리, 하나의 이데올로기는 이론적으로 닫혀 있음과 동시에 정치적으로 유연(souple)하고 적응적(adaptable)이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는, 그 고유한 내적 관계에 대한 어떠한 감각조차 가능하지 않을 정도로 미세한(insensible) 수정을 통해 역사적 변화들 -이데올로기는 이 역사적 변화들을 흡수하고 장악하는 것을 그 임무로 지니고 있는데- 을 반영하는 것에 스스로 만족함으로써, 외양적 운동 없이 시간의 욕구에 따라 휘어진다[변형된다]. 바티칸 제2차 공의회의 ‘교회 근대화’(aggiornamento)라는 모호한 예시는 그 명료한 증거를 우리에게 제시해주기에 충분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바티칸 2세의 ‘교회 근대화’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변화의 효과이자 신호이지만, 동시에 영리하게 활용 가능한 정세의 도움을 통해 역사학의 손에 다시 떨어진 그러한 간교한[능수능란한] 변화의 효과이자 신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데올로기는 이데올로기로서의 자신의 형태를 보존하면서도 변화한다(하지만 이는 어떠한 감각조차 가능하지 않을 정도로 미세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움직이지만 부동의 운동(mouvement immobile)이라는 방식으로 움직이며, 이 부동의 운동은 이데올로기를 그 자리 위에 그대로, 그러니까 이데올로기로서의 그 장소와 역할 위에 그대로 유지시킨다. 이데올로기는 철학 그 자체에 대해 헤겔이 지적했듯, 자신의 시간으로부터 전혀 튀어오르지는 않으면서도(왜냐하면 이데올로기는 거울반영의 포획 내에 사로잡힌 –정확히 바로 인간들이 그 안에 사로잡히도록- 이 시간 그 자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역사 내에서 일어나는 바를 반영하고 표현하는 부동의 운동이다. 바로 이러한 본질적 이유로 인해 1917년 러시아혁명의 메아리로부터 만들어진 혁명적 인간주의가 오늘날 다양한 정치적 혹은 이데올로기적 관심사들(préoccupations) -이 관심사들 중 한편은 이 혁명적 인간주의의 기원들과 여전히 관계를 맺고 있으며, 다른 한편은 이 기원들로부터 다소간 멀어져 낯선 상태로(étrangères) 존재해 있다- 의 이데올로기적 반영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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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역사주의적 인간주의는 예를 들어 부르주아지 혹은 프티-부르주아지 출신의 지식인들 -이 지식인들은, 종종 본래적으로 극적인 용어들로, 이들 바깥에서 행해지는[만들어지는](se fait) 역사(이들 바깥에서 행해지기에[만들어지기에], 이들은 이를 인식해내지 못하면 이를 두려워하게 된다)의 적극적 구성원으로 자신들이 온전한 권리를 가지고서 속해 있는지 아닌지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제기한다- 의 이론적 보증물(caution)로 활용될 수 있다. 아마도 이것이 사르트르가 제기했던 가장 심원한 질문일 것이다. 이 사르트르의 질문은 그의 이중적 테제, 즉 [첫 번째로] 마르크스주의가 ‘우리 시대의 넘어설 수 없는[지양할 수 없는] 철학’이며 [두 번째로] 그 어떠한 문학적 혹은 철학적 저작도 제국주의적 착취에 의해 기아와 단말마의 고통으로 환원된 한 명의 비참한 자 앞에서는 단 한 시간도 독해할 가치가 없다는 그러한 이중적 테제에 온전히 포함되어 있다. 충실성을 위한 이러한 이중적 선언, 즉 한편으로는 마르크스주의의 이념에 대한,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피착취자들을 향한 대의에 대한 이중적 선언에 사로잡혀, 사르트르는 그가 자기 스스로 생산한 그리고[그럼에도] 하찮은 것으로 간주하는 [대문자] ‘말들’을 넘어, 우리 시대의 [끔찍한] 비인간적 역사 내에서, 모든 (혁명적) 변증법에서와 마찬가지로 모든 (이론적) 합리성에도 인간적 ‘기획’의 초월론적인 유일한 기원[단 하나의 기원]을 할당하는 ‘변증법적 이성’의 이론을 통해 진정으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48] 따라서 역사주의적 인간주의는 사르트르에게서 인간 자유에 대한 찬양이라는 형태를 취하게 되는데, 이 형태 내에서, 자신들의 전투를 자유롭게 개시함으로써, 역사주의적 인간주의는 노예 혁명의 잊혀졌지만 길고 길었던 밤 이래로 아주 조금의 인간적 빛을 위해 영원히 투쟁하는 모든 피억압자들의 자유와 함께 연대하게 된다.[49]
이 동일한 인간주의는, 우리가 이 인간주의에 어떠한 강조점을 조금만 위치시킨다면, 정세와 욕구에 따라 다른 대의들을 위해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개인숭배’ 시기의 오류와 범죄에 대항하는 저항, 이 오류와 범죄가 해결되기를 보고자 하는 조급함, 참된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 등과 같은 대의들을 위해 말이다. 이 정치적 감정들이 스스로의 이론적 토대를 가지기를 원할 때, 이 정치적 감정들은 이 이론적 토대를 항상 동일한 텍스트들과 동일한 개념들 내에서 찾는다. 그러니까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의 위대한 시기가 배출해낸 이러저러한 이론가들 속에서(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청년 루카치나 코르쉬에 대한 출판물들이, 그람시의 몇몇 모호한 정식들에 대한 이러한 열정[열광]이 등장하는 것이다), 혹은 마르크스의 인간주의적 텍스트들 즉 [대문자] 청년기 저작들 속에서, 그러니까 ‘현실적 인간주의’, ‘소외’, ‘구체적인 것’, 역사, 철학 혹은 ‘구체적’ 심리학 안에서 말이다.[50][51]
마르크스의 [대문자] 청년기 저작들에 대한 비판적 독해와 『자본』에 대한 심화된 연구만이 [절단 이후의] 마르크스의 문제설정에게는 멀리 떨어져 있어 낯선 것인(étrangers) 이론적 인간주의와 역사주의의 의미와 위험성을 우리에게 밝혀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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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독자들은 역사에 대한 오해를 대상으로 하는 이러한 분석을 우리로 하여금 착수하게끔 이끌어주었던 출발점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마르크스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사고했던 방식이 그가 자신의 전임자들[즉 스미스와 리카도 등]의 이점들[3장의 대상]과 결점들[4장의 대상]에 대해 내렸던 판단들로부터 도출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53] 이와 동시에 나는, 마르크스의 텍스트가 지니는 그 담론의 외양적 연속성 속에서 엄밀한 의미의 누락들(lacunes), 공백들(blancs) 그리고 결함들(défaillances), 즉 마르크스의 담론이 자신의 침묵의 말해지지 않은 바 -자신의 담론 그 자체 내에서 돌발하는- 에 불과한 것으로 존재하는 그러한 장소들을 식별하기 위해, 우리가 이 마르크스의 텍스트를 하나의 무매개적 독서가 아니라 하나의 ‘증상적’ 독서에 종속시켜야만 한다는 점을 지시했다.[54] 나는 마르크스가 자신의 전임자들에게서 존재하는 하나의 개념의 부재에 대해, 즉 잉여가치라는 개념의 부재 -엥겔스가 지적하듯 마르크스는 ‘자비롭게도’ 마치 이것이 하나의 단어의 부재[에 불과한 것]인듯 다루었다- 에 대해 내렸던 판단 내에 존재하는 이 이론적 증상들 중 하나를 강조했다. 우리는 또 하나의 다른 단어, 즉 역사라는 단어가 마르크스가 자신의 전임자들에게 가하는 비판적 담론 내에서 돌발할 때 이 단어에 일어나는 바가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하나의 충만한(plein) 단어인 듯 보이는 이 단어는 사실은 그 명증성의 무매개성 내에서 이론적으로는 텅빈(vide), 혹은 오히려 엄밀한 의미의 누락 내에서 그 모습을 보이는 충만한-이데올로기(plein-de-l’idéologie)인 그러한 하나의 단어이다.[55] 『자본』의 대상에 대한 비판적 질문을 스스로에게 제기하지 않고서 [순진한 방식으로] 『자본』을 읽는 이는 이 단어[즉 ‘역사’라는 단어] 안에서 자기 자신에게 ‘말을 거는’ 그 어떠한 간지도 보지 못한다.[56] 그는 그저 순진하게(tout bonnement) 담론을, 그러니까 그 안에서 이 단어가 첫 번째 단어일 수 있는, 역사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담론일 수 있는, 그 다음으로는 역사주의적 담론일 수 있는 그러한 담론을 추수하고 있[을 뿐이]다.[57] 우리가 앞에서 이미 확인했으며 이를 통해 이해하고 있듯,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결론들은 이러한 결백함(innocence)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와는 정반대로 인식론적이고 비판적인 독해 내에서, 우리는 이 말해진 단어 아래에서 이 단어가 감추고 있는 침묵을 듣지 않을 수 없으며, 텍스트의 검게 칠해진 부분(noir)[충만함 혹은 종이 위의 ‘글자’] 속에서 거의 섬광과 같은 짧은 시간 동안 매달려 있는 엄밀한 의미의 하얀 부분(blanc)[공백 혹은 (‘글자’를 제외한) 종이의 여백]을 보지 않을 수 없다. 이와 상관적으로, 외양적으로는 연속적인, 하지만 사실은 하나의 억압적(refoulant) 담론의 위협적 침입에 의해 중단되고 복속된 이러한 담론 하에서, 우리는 참된 담론의 침묵하는 목소리를 듣지 않을 수 없으며, 우리는 그 심원한 연속성을 복원하기 위해 이 참된 담론의 텍스트를 복원하지 않을 수 없다.[58] 바로 이 안에서 마르크스의 엄밀성에서의 결함이 놓여있는 정확한 지점들에 대한 식별이 이 엄밀성에 대한 인정과 일체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 마르크스의 엄밀성이 우리에게 마르크스의 결함들을 지시해주는 것이며, 마르크스의 잠정적(provisoire) 침묵의 그리 길지 않은 순간 속에서 우리는 마르크스에게 자기 자신의 것인 그 말(parole)을 되돌려주는 것 이외에는 그 무엇도 행하지 않는 것이다.
(끝)